성혜인은 이곳에서 밤새워 기다렸다. 그런데 돌아오는 질문이 이런 것이라니.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마음 한편이 시큰거리는 게 반박하고 싶었지만 성휘의 연이은 기침 때문에 말하지 못했다. 성휘의 기침이 점점 심해졌다. 성혜인이 종이를 건네주자 하얀 종이에 피가 살짝 튀어있었다. 성휘 본인도 보고 놀란 모양인지 미간이 좁혀졌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고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 것으로 생각했다. “혜인아, 네가 반승제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알아. 예전에 대학에 있을 때 남친이 있지 않았던가?”성혜인은 머릿속에 핏자국 생각으로 가득해서 성휘의 말에 반응하지 못했다. 의사도 성휘한테 비밀로 하고 있으니 성휘는 계속 자신이 회사에 돌아와서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성휘는 성혜인이 대답하지 않자 살짝 후회되는 마음으로 얘기했다. “다 내 탓이다. 회사는 내가 하나하나 쌓아 올린 것인데 지금 이 지경까지 왔으니 손을 놓기도 어려워서 반승제와 혼인을 맺게 했다. 게다가 반 회장님이 너를 꽤 좋아하는 눈치길래 시집가도 괜찮을 줄 알았다. 제원에서 얼마나 많은 여자가 반승제와 엮이려고 노력하는지 너도 알잖냐. 반승제가 내 사위라니, 난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게다.”“아빠!”성혜인은 그의 말을 막고 싶었다. '죽는다'는 단어를 듣고 싶지 않았다. “내가 어느 날 버티지 못해서 회사가 망하더라도 너는 뒷배가 있으니 괜찮을 거다. 요 며칠 사람을 시켜 10%의 지분을 네게로 넘기마. 소윤 이모와 더 이상 이걸로 싸우지 말거라.”병 주고 약 주는 것이 바로 성휘가 자주 쓰는 방법이었다. 성혜인은 성휘를 완전히 미워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는 남은 날이 얼마 없었으니. “혜인아, 반승제와 잘 지내려고 해봐라. 네 대학 때의 남자친구는 어디 출신인지도 얘기해주지 않았으니 그게 어떻게 진심으로 널 좋아한 것이겠니.”성혜인은 그저 피곤함을 느껴 대답하고 그대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옆의 허진이 가만히 서 있다가 빗소리를 듣고 물었다. “혜인
반승제에게 실례가 될까 봐 몸을 돌려 재채기한 성혜인의 어깨가 바르르 떨렸다. 비에 젖어서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고 빗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붙었으며 속눈썹에도 물방울이 맺혀있었다. 얇게 입은 옷이 다 젖어 몸에 붙는 바람에 몸매가 그대로 드러났다. 성혜인은 눈물이 날 것만 같은 눈을 비볐다. 반승제의 차가 아직도 출발하지 않자 예의상 말을 건넸다. “반 대표님, 야근하세요?”반승제는 확실히 야근 중이었다. 내일 큰 저택에서 연회가 있었기에 무조건 참가해야 했다. 그래서 회의를 앞당겨서 방금 끝냈다. 그는 성혜인인 주동적으로 차에 타도 되냐고 물을 줄 알았다. 이곳에선 택시를 잡기도 어렵고 그녀는 가방과 핸드폰도 못 챙긴 상태니까. 반승제의 차가 2분간 그녀 앞에 서 있었다. 뒤의 차들이 조급해서 클락션을 울릴 때도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성혜인도 그저 웃으며 고객을 대하듯 그를 보았다. 반승제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왜 그런지는 자기도 몰랐다. “집이 어딘데.”딱딱한 말투와 표정에서 냉랭함이 느껴졌다. 성혜인은 성씨 저택에 가서 서류를 챙겨야 한다. 만약 반승제가 그녀를 태워서 성씨 저택에 도착한다면 그녀가 누구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게다가 성혜인은 이미 몸이 다 젖어서 차에 탄다면 차를 더럽힐 것이었다. “가까운 곳에 있어요.”반승제의 심경이 복잡해졌다. 처음으로 여자한테 데려다주겠다는 말을 꺼낸 것인데 그마저도 거절당했다. 진짜 온시환의 말대로 밀당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무엇인지. 반승제는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차 문을 열었다. 성혜인은 반승제가 차에 타라는 뜻인 줄 알고 덜컥 겁이 났다. 거절할 핑곗거리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차 문에서 은색의 손잡이가 튀어나왔다. “우산이다. 쓰고 가.”성혜인은 그 말을 듣고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은색 손잡이를 건네받았다.“감사합니다, 반 대표님. 나중에 꼭 돌려드리겠습니다.”반승제는 그제야 성혜인이 지금까지 그를 '반 대표님'이라고 불러왔다는 것이 떠올랐다. 예의 있
성혜인은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아래층으로 내려와 보니 소윤이 어두운 안색으로 소파에 앉아있었다.소윤의 피부는 나이에 맞지 않게 아주 깨끗했다. 안 그러면 성휘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고, 성한 같은 아들을 데리고 성씨 집안에 들어오지도 못했을 것이다.소윤은 지금도 반짝이는 눈으로 소파에 앉아 우아한 자태를 뽐냈다.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소윤에게 왜 오늘 병원으로 가지 않았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녀가 집에서 쉰다고 해서 불만 있을 사람은 없었기에 그냥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문밖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본 성혜인은 방금 전의 냄새가 떠오르면서 또다시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그 남자는 다름 아닌 성한이었다.성한은 금방 회사에서 돌아왔는지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는 음흉한 눈빛으로 성혜인의 몸매를 훑어봤다. 하지만 금세 눈빛을 숨기고 찬란하게 웃으며 인사했다.“혜인아, 오늘은 어떻게 밤에 돌아왔어?”“네.”예나 지금이나 성한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성혜인은 대답도 아닌 대답을 짧게 하고 그를 지나쳐 버렸다.성한은 코끝에서 맴도는 성혜인의 향기에 애써 본능을 억누르며 그녀에게 말했다.“너 차 안 갖고 왔지? 밖에 차가 안 보이던데... 내가 집까지 데려다줄까?”“됐어요.”“아무리 그래도 오빠라고 불러주지 그래.”성혜인은 이미 멀어져 갔고 성한은 제자리에 멈춰서서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곧 몸을 돌려 거실로 들어간 그는 이상한 냄새를 맡고 얼굴을 찡그렸다.“앞으로는 조심 좀 해요. 그러다 들키면 어떡하려고 그래요?”성한의 말을 들은 소윤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걔가 갑자기 돌아올 줄 난들 어떻게 알았겠어?”성한은 정장 재킷을 벗어 팔에 걸쳤다.“남자를 만나고 싶으면 밖에서 만나요. 안 그래도 몸 안 좋은 사람이 엄마 때문에 죽으면 어떡해요? 지금 죽으면 지분이고 뭐고 전부 성혜인 앞으로 간단 말이에요. 제가 지분을 물려받기 전에는 조심 좀 해줘요.”“알아, 내가 잘못했어. 다
성혜인은 애초에 반승제의 답장을 기대하지 않았기에 문자를 보내자마자 바로 샤워하러 갔다. 얼마 후, 욕실에서 나와 휴대전화를 확인하니 반승제는 말도 없이 2천만 원을 돌려줬다.‘이건 배상이 필요 없다는 뜻인가?’반승제는 언제나 성혜인을 차갑게 대했다, 정확히는 서로 차갑게 대했다. 2천만 원을 주고받기도 껄끄러울 정도로 말이다.성혜인은 반승제의 생각을 도무지 읽을 수 없었다. 심지어 그와 함께했던 식사 자리가 아직도 기억에 남을 정도였다.성혜인은 잠깐 고민하다가 망가진 우산을 사진 찍어 반승제에게 보내줬다. 그러고는 부동산에 연락해 은행 절차가 언제쯤 끝나는지 물어봤다. 그녀는 하루빨리 포레스트 펜션에서 나오고 싶었다. 언제까지 지금처럼 반승제를 피해 가며 살 수는 없었다.반승제도 성혜인의 두 가지 정체를 알게 된다면 빨리 쫓아내려 할 것이다. 그녀는 그래도 이 정도의 양심은 있었다.머리를 말리고 나서 사진을 확인한 반승제는 이번에도 역시 단답으로 답장했다.「그래.」「이건 혹시 배상이 필요 없다는 뜻인가요?」「응.」반승제의 차가운 태도에 성혜인도 길게 말하지 않았다.「감사합니다.」지루하기 그지없는 채팅 내용에 성혜인은 휴대전화를 한쪽에 놓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반승제는 노트북을 열고 서류를 결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의 눈빛은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선물상자로 향했다. 이건 반태승이 성혜인에게 전해 주라고 했던 선물이다.반승제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선물 상자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청소하고 있던 유경아는 반승제가 걸어오는 것을 보고 걸레를 내려놓았다.“대표님, 혹시 필요한 게 있으세요?”유경아는 혹시라도 백연서가 트집을 잡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깍듯한 태도로 말했다.“그 여자는 아직도 안 돌아왔어요?”반승제는 복도 끝에 있는 방을 바라보며 물었다.“네.”“이걸 전해줘요.”반승제는 길게 말하고 싶지 않은 듯 차가운 말투를 일관했다.유경아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아무래도 비싼 물건 같은데 대표님이 직접 사모님의
결혼한 3년 동안, 반승제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아내와 만난 적 없었다. 그러니 방 안에 이상한 토이가 있어도 할 말은 없었다. 하지만 도대체 무슨 용기로 이렇게 잘 보이는 곳에 뒀는지는 정말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반승제는 저도 모르게 그 물건을 다시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최대한 빨리 이혼하고 싶었지만 반태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부부 관계를 이어가야만 했다. 그는 애써 기분을 진정시키며 일이나 계속했다.성혜인은 자신의 얼굴 안마기가 어떤 오해를 받고 있는지도 모르고 새로운 시공팀과 내일 밤의 파티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녀는 휴대전화를 꺼내 반승제가 개인 번호로 보냈던 문자를 바라봤다.반승제는 성혜인과 반씨 저택에서 만나려고 했지만 그녀가 지각하는 바람에 결국 만나지 못했다. 그녀는 한참 고민하다가 개인 번호로 예고라도 하기 위해 문자 한 줄 보냈다.「대표님, 사실 저희 이미 만난 적 있어요.」반승제는 한참이 지나서도 답장이 없었다.성혜인은 자신이 약간 우습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반승제는 일말의 호기심도 없을 정도로 명의상의 아내가 싫은 듯했다.‘됐어, 시간이 늦었으니 나머지는 내일 다시 얘기하자. 어차피 난 이미 알려주려고 노력했어.’...이튿날, 성혜인은 잠결에 전화벨 소리를 듣고 정신 차렸다. 성휘는 아침부터 전화 와서 파티에서 입을 드레스를 준비했는지 물었다.파티에 처음 참석하는 성혜인은 당연히 드레스를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을 못 했고, 이제야 일어나서 드레스를 사러 가야겠다고 했다.“혜인아, 드레스는 내가 이미 포레스트 펜션으로 보냈어. 넌 그걸 입고 가면 돼.”파티 장소가 반씨 저택이었기에 성휘는 성혜인의 드레스에 많은 신경을 썼다.제원 전체를 놓고 봐도 반씨 저택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아주 적었다. 게다가 반태성도 참석하는 자리여서, 이는 성혜인을 사람들에게 알릴 최적의 기회였다.“난 몸이 안 좋아서 병원 밖으로 못 나갈 것 같구나. 괜히 파티에 참석했다가 회장님의 눈에 나면 안 되니 오늘은 네가 알아
“사모님, 혹시 사라진 물건이라도 있어요?”유경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침실을 두리번거렸다.“아니에요, 그냥 책 위치가 달라져서요.”성혜인의 말을 들은 유경아는 드디어 한시름 놓고 식사를 차리러 갔다.성혜인은 반승제가 갖고 왔다는 선물상자를 열어봤다. 상자 안에는 옥으로 만든 팔찌가 들어 있었다. 반태승이 준비한 물건이니 당연히 비쌀 것 같아서 그녀는 휴대전화를 꺼내 반태승에게 전화를 걸었다.통화가 연결되고 휴대전화 건너편에서는 반태승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혜인아, 네 아버지는 좀 어떻냐?”반태승은 성혜인에게 진심으로 잘해 줬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했던 거짓말과 사인했던 계약서만 생각하면 죄책감이 들었다.“아버지는 많이 좋아졌어요. 저 방금 할아버지께서 주신 선물을 봤어요. 비싼 팔찌 같은데 정말 고마워요.”“내가 승제 놈한테 문병을 가라고 이르기는 했지만 갔는지 모르겠구나.”반태승은 반승제의 말을 믿을 수 없어 성혜인에게 간접적으로 물었다.“갔었어요. 승제 씨가 많이 도와주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만족스러운 대답에 반태승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그래. 오늘 밤 팔찌를 끼고 나오거라, 내 잘 어울리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구나. 그리고 너를 사람들한테 소개해 줘야겠다. 무식한 놈들이 유언비어를 퍼뜨리지 못하게끔 말이다.”반태승의 말에 감동한 성혜인은 눈물을 글썽였다.“알겠어요.”“그리고 두 사람 꼭 잘 지내야 한다. 내가 증손주를 볼 날만을 기다리고 있어.”“저랑 대...”성혜인은 무의식적으로 대표님이라고 하려다 말고 말을 고쳤다.“저희도 노력하고 있어요. 근데 제가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해서 시간이 조금 걸리네요.”하나의 거짓말은 수많은 거짓말을 낳기 마련이다.“괜찮아, 나도 그리 급한 것은 아니니. 둘이 노력만 하고 있으면 됐지.”성혜인은 안부의 말을 몇 마디 더 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무거운 마음으로 팔찌를 바라봤다. 이는 임경헌의 어머니가 선물했던 팔찌와 똑같은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성혜인
반승혜는 축 처져 있다가도 금세 환하게 웃으며 겨울이를 바라봤다.“겨울이가 그 강아지랑 너무 닮았어요. 페니 씨, 어디 살아요? 저 앞으로 겨울이랑 같이 놀아도 돼요?”반승혜는 성혜인이 걸어온 방향을 바라봤다. 그녀는 제원에서도 비싸기로 유명한 동네에서 나왔다. 이 동네는 땅값이 금값과 마찬가지였고, 돈이 있다고 해서 아무나 쉽게 들어올 수 있는 곳도 아니었다.‘페니 씨 집안이 생각보다 좋은가 보네.’성혜인은 반승혜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바로 설명했다.“저는 근처에 사는 게 아니라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어요. 이 동네가 산책하기 좋다는 말을 들은 적 있거든요. 그리고 저 요즘 이사를 준비하고 있어서 새로운 집 주소는 제대로 결정되고 알려줄게요.”반승혜는 별 의심 없이 겨울이와 놀기 시작했다. 성혜인은 뒤에서 그녀가 그리다 만 그림을 바라봤다. 보아하니 그녀도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했다.“그림은 안 그려요?”반승혜는 약간 짜증 섞인 얼굴로 겨울이를 놔주고 붓을 들었다.“안 그래도 저녁에 시간이 없어서 빨리 그려놔야 해요. 내일이 제출 마지막 날이거든요.”“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그리고 생일 축하해요, 승혜 씨. 선물은 다음에 만날 때 줄게요.”생일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선물 준비는 당연하였다. 성혜인은 자신이 공부하면서 만들어 놓은 모든 필기에서 중요한 것만 따로 정리해 선물로 만들었다. 반승혜에게는 모자란 물건이 없었으니, 주얼리 같은 걸 선물하면 오히려 식상할 것 같았다.“고마워요. 너무 비싼 걸 준비할 필요는 없어요. 제가 딱히 모자란 물건이 없거든요.”“승혜 씨가 무조건 좋아할 거니까 기대해요.”성혜인은 혹시라도 또 아는 사람을 만날까 봐 이만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포레스트펜션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때, 반승제의 차가 그녀를 유유히 스쳐 지나가 펜션을 향해 갔다.성혜인은 몸을 흠칫 떨며 발걸음을 멈추더니, 겨울이를 데리고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그녀는 반승제가 죄를 물으러 온 건 아닌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유경아는 반승제가 성혜인을 기다리는 것을 보고 마음이 급했다. 그녀는 속으로 성혜인이 빨리 돌아왔으면 했다. 어찌 됐든 두 사람은 부부이니, 지금처럼 어색하게 지내는 것은 보기 좋지 않았다.게다가 반승제는 일분일초 바쁘게 지내는 사람이었고, 너무 오래 기다리다가 안 그래도 나쁘던 감정이 더 틀어지면 어떡하나 걱정되기도 했다. 자칫 백연서가 또다시 찾아올 수도 있고 말이다.유경아는 사람 없는 곳으로 가서 몰래 성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사모님, 대표님이 거실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겨울이를 밖에 두고 일단 들어오시는 건 어때요?”만약 겨울이를 데리고 들어온다면 반승제에게 들킬 수밖에 없게 된다.성혜인은 반승제가 죄를 물으러 왔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지금으로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나쁜 일이 계약을 해지고 대외로 선포하는 것이다.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리고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하지만 금세 어차피 이혼할 마당에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기에, 반승제가 화를 내도 진심을 다해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겨울이가 포레스트편센에서 지내고 있는 건 절대 들키면 안 됐다. 그녀는 반승혜를 찾아가 겨울이를 잠깐 부탁했다. 급할 일만 처리하고 다시 데리러 오겠다고 하면서 말이다. 개털 알레르기가 있는 반승제 앞에 개를 데려가는 것은 안 그래도 바닥 치는 호감도를 더 깎기만 할 뿐이었다.반승혜는 물론 흔쾌히 동의했다. 그렇게 성혜인은 길에서 20분이나 낭비하고 포레스트펜션을 향해 달려갔다. 혹시라도 반승제가 기다림에 지칠까 봐서 말이다.반승제의 안색은 아주 어두웠다. 20분을 기다린 것은 이미 그의 최선이었다. 그는 사업 파트너조차 5분 이상 기다리지 않는데, 성혜인은 이미 두 번이나 그를 바람 맞혔다.반승제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밖으로 나와 차에 올라탔다. 이때 황급하게 달려오고 있던 성혜인이 반승제의 차를 발견하고 약간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잠깐 정신을 판 사이에 돌부리에 걸려 휘청거리며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