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의 여러 소파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는 아름다운 커튼 장식이 있었고 주변의 풍경은 수려하기 그지없었다.모두가 한마음으로 한뜻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와중 임경헌이 외쳤다.“형, 왔어요?”임경헌은 줄곧 별말 없이 설인아가 몇몇 재벌가 딸들과 얘기 나누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모습은 마치 자신의 인복이 이렇게 좋다며 일부러 과시하는 것 같았다.설인아는 신분도 높고 청순가련하게 생긴 탓에 사람들의 호감을 사기 쉬웠다.임경헌의 말에 모두 멀지 않은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 온 사람은 적어도 20명 남짓하였는데 남녀의 비례가 반반이었다.사람들의 시선이 닿은 곳에서, 반승제는 두 손으로 성혜인의 얼굴을 잡고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묻고 있었다.“만약 네가 불편하다고 하면 우리는 돌아갈 거야.”‘온시환 정말 쓸모없는 자식. 이런 작은 일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곧 성혜인이 고개를 저었다. 정말 돌아간다면 무리 내 사람들이 그녀가 일부러 설인아를 피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그렇게 되면 나중에 더 난처해질지 몰라.’게다가 요즘 무리 내 사람들은 계속 그녀의 출신을 조롱하고 있지 않은가? 아마 대부분 사람들은 그녀가 호텔에서 망신 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반승제의 별장에 평생 머물며 다시는 나오지 않으리라 생각할 것이다.“혜인아, 돌아가자.”사실 반승제는 성혜인을 데리고 나와 기분 전환을 시켜주려 했지만 그녀의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이내 손목을 잡으며 되돌아가려 했다.그러나 성혜인은 되레 고개를 흔들며 뒷좌석에 있던 흰둥이를 내려주었다.흰둥이는 털을 몇 번 털더니 금세 애교스럽게 그녀의 무릎에 대고 얼굴을 문질렀다.사람들은 흰둥이의 등장에 순간 놀라고 말았고 몇몇 여자들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했다.“저 개는 대체 무슨 종이지? 위풍당당하네, 아주.”설인아는 흰둥이를 보자마자 얼굴이 굳어져서는 몰려오는 통증에 자신의 가슴팍을 어루만졌다.‘그래도 미리 약을 먹어놔서
성혜인은 그 모습이 우습기만 했고 손에는 여전히 흰둥이의 목줄을 잡고 있었다.이내 그녀는 반승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승제 씨, 차 안에 있는 물건 내려놔요. 흰둥이도 계속 차 안에 있으면 답답할 테니까 저는 임경헌 씨랑 흰둥이 산책시키러 갈게요.”반승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몸을 돌려 차 문을 열고 물건을 아래로 옮기기 시작했다.두 사람 모두 설인아를 상대하지 않는 탓에 이들 중 그녀는 너무 쓸데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설인아는 몸을 비틀댔지만 어떻게든 버티며 쓰러지지 않았다.곧 성혜인이 목줄을 잡고 떠나려는 데 흰둥이의 큰 몸이 설인아와 부딪히는 게 보였다.원래도 몸이 좋지 않던 설인아는 이렇게 흰둥이와 부딪히자 그대로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성혜인도 조금 어이가 없었다.‘흰둥이도 어쨌든 설인아랑 한동안 지낸 적 있었는데, 왜 이렇게 버릇없이 구는 거지?’그러나 성혜인은 이내 흰둥이의 성질을 떠올렸다. 반승제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하인이라 생각할 것 말이다.설인아는 한쪽에 드리운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반드시 참아야 해. 어차피 다들 며칠 동안 이 별장에서 머물 거고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거야.’성혜인이 흰둥이를 끌고 사람들의 앞을 지나가자 모두 이상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설인아가 방금 그녀의 집안일을 언급했기 때문일 것이다.그들은 또 장영희와 전태경을 떠올렸다.‘그런 사람들의 딸이 우리와 같은 무리 내에 있다니... 이만한 굴욕도 없지!’하지만 성혜인은 그들을 상대하지 않고 그저 임경헌의 곁으로 걸어갈 뿐이었다.임경헌의 시선은 그녀를 넘어 반승제에게 계속 말을 걸려고 하는 설인아에게 향했다. 그러고는 다시 눈을 휙 뒤집더니 성혜인에게 말했다.“제가 괜히 산책하러 가자고 말했나 봐요. 저 사람한테는 오히려 득이 되어버렸잖아요.”“괜찮습니다.”성혜인은 목줄을 끌고 임경헌과 오솔길을 따라 걸으며 밖으로 나갔다.한편, 자리에 남아있던 반승제는 물건을 옮기기 시작했고 설인아는 서둘러 한 걸음
반승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온시환의 옷깃을 움켜잡았다.그러자 온시환은 어처구니없다는 어조로 말했다.“너희 두 사람이 안 왔을 때 모두 방 번호를 뽑고 이 두 개밖에 안 남은 거야. 내가 뭐 일부러 그런 줄 알아? 그리고 너 혜인 씨더러 같이 한방 쓰자고 해도 되잖아.”반승제는 멍하니 서 있었다. 조금 전에는 순간적인 분노에 휩싸여 이 사실을 잊고 있던 것이다.곧 온시환을 놓아준 반승제는 성혜인이 자신과 한방을 쓰게 하지 않고 대신 직접 그녀의 방으로 옮겨갔다. 이렇게 하면 설인아와 조금 더 멀리 떨어질 수 있었으니 말이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성혜인은 내일 입산에 필요한 장비를 정리하는 반승제를 발견했다.하이킹은 이 별장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별장은 단지 모두가 머물며 노는 장소일 뿐 내일 아침 일찍 모두 산에 올라가야 했다.가방 안의 것들은 모두 반승제가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준비해 온 것들로, 이것은 두 사람이 사귄 이래 첫 데이트라고 할 수 있다.성혜인은 침대 위에 누워 몸을 뒤척이며 반승제가 여전히 두 가방 안의 것들을 점검하는 것을 보고 한마디 물었다.“승제 씨는 예전에 하이킹 많이 해봤어요?”“반년에 한 번 정도? 자연과 친해지면 기분이 많이 좋아질 거야. 이번에는 흰둥이가 계속 따라다닐 텐데 그러면 밤에 너를 도와 벌레도 쫓아줄 수 있어.”“풉.”성혜인은 그 모습이 조금 웃기기는 했지만 진지한 그의 옆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훈훈해졌다.그는 두 가방 안의 물건을 모두 점검한 후, 한쪽 소파 위에 올려놓았다.“혜인이 너는 내일 이 가벼운 거 메면 돼. 내가 무거운 거 멜게.”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곧이어 어깨를 반쯤 드러낸 채 누워있는 성혜인을 보고 반승제는 성큼성큼 다가가 그녀를 들쳐 안았다.그러자 성혜인의 다리가 무의식적으로 그의 허리를 감았다.그렇게 반승제가 키스를 한 지 1분이 지났을 때, 임경헌이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형, 모두 형 회의 언제 여나 기다리고 있어요. 아, 또 회의
안색이 잠깐 굳더니 설인아는 이내 입술을 오므렸다. 주먹을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손톱이 손바닥을 뚫고 들어갈 뻔했다.그때 한 사람이 말했다.“지금부터 바비큐 준비하고 조금 이따 술 살짝 마실까요? 그리고 다들 돌아가 쉰 다음 내일 아침 6시에 출발합시다.”그 소리는 얼어있던 현장의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풀어주었다.이윽고 성혜인도 반승제의 곁으로 향했다.그녀는 음침하면서도 공포스러운 설인아의 질투 섞인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느꼈다.그러면서 문득 성혜인은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저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조건을 갖고 태어났으면서 왜 아직도 만족하지 못하는 거지?’밖에서는 도우미들이 바비큐 받침대를 세우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이런 음식을 먹지 않는 재벌 2세들이었지만 모처럼 하이킹하러 왔기 때문에 분위기에 맞춰 노는 것도 퍽 나쁘지 않았다.오늘 밤 속이 좋지 않았던 성혜인은 반승제에게 주의 사항을 다시 한번 들은 다음 안에 남아 바깥 바비큐 파티에는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그녀가 가지 않으면 따라서 반승제도 가지 않을 게 분명했으므로 온시환이 들어와서 외쳤다.“승제 너는 뭐 먹을래? 여기 전문적인 셰프님이 해산물 구워주시는데 혜인 씨랑 조금 먹는 게 어때?”해산물 얘기에 흥미를 느낀 성혜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을 한 번 보았다.그러자 각종 싱싱한 해산물이 들어있는 수조가 눈에 들어왔다.이 모든 것은 헬리콥터로 공수해온 것이었다.비록 야외에서 하는 식사라고는 하지만 재벌 집 도련님들이 어찌 아무거나 먹을 수 있겠는가. 따라서 바비큐 파티에 놓일 음식들은 전부 최고급으로 준비했다.그중, 성혜인은 킹크랩 한 마리가 마음에 들었다.‘저 게살 구워 먹으면 아주 맛있다던데...’예전 성씨 집안에 있을 때, 당시 성훈은 재혼하지 않았고 매년 설날 음식을 충분히 준비했었다. 하지만 준비한 음식의 반을 채 먹기도 전에 그는 항상 회의 전화를 받고 황급히 자리를 뜨고는 했다.그녀가 손을 들어 안에 있는 킹크랩을 가리키려 하자 설인
설인아는 설기웅의 팔짱을 끼고 한 무리의 사람들 앞으로 걸어갔다.설기웅 역시 반승제에 버금가는 엘리트로 해외 상업계에서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고 현장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설씨 가문과 협력하고 싶어 했다.이곳에 있는 재벌가 자제들은 어려서부터 줄곧 서로 속고 속이며 서로가 가진 자원을 교환하고 이용하는 환경에서 자라났다. 때문에 누구와 사귀어야 할지 잘 알고 있었고 자연스레 그들은 설씨 가문의 두 사람과 말을 섞기 시작했다.설인아는 환하게 웃으며 하나하나 대답했다. 그때, 누군가 설기웅에게 여자친구가 있느냐고 묻자 설인아가 먼저 나서며 대답했다.“우리 오빠는 워커홀릭이라 가정을 꾸릴 생각이 전혀 없어요. 그리고 제 새언니가 되고 싶은 사람은 먼저 저라는 관부터 넘어야 합니다.”그녀는 웃으며 설기웅을 쳐다보았다.“그렇지 오빠? 내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야말로 오빠 마음에 들 수 있잖아.”온몸에 차가운 기운이 맴돌았지만, 설기웅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하루종일 소란만 피울래?”설인아는 혀를 삐죽 내밀더니 이내 성혜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자신을 이렇게 총애하는 설기웅을 보고 성혜인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싶어서 말이다.그녀는 정말 기대하고 있었다.하지만 성혜인은 기대했던 것만큼 질투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저 마지막 킹크랩을 아쉽게 쳐다보는 것을 보니 성혜인은 멀지 않은 곳에서 벌어진 소동보다 킹크랩에 훨씬 더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설인아는 뾰로통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살면서 킹크랩도 못 못 먹어봤나.”그 말은 현장에 있던 다른 사람들에게도 들렸고 모두들 성혜인을 바라보았다. 과연 설인아의 말대로 성혜인은 킹크랩이 있는 수조를 멍하게 쳐다보고 있었다.이때, 반승제가 성혜인의 곁으로 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먹고 싶어?”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음식에 기대를 내비치다니,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아까 승제 씨가 가방 정리하고 있을 때 마침 킹크랩 굽는 영상을 봤었거든요.”그러자 반승제의 시선은 순간 온시환에게
“누가 너한테 이런 말버릇 가르쳤어?”설기웅의 안색은 어두워졌고 눈빛 역시 차가워졌다.“인아야, 둘째한테 나쁜 거 배우지 마.”설인아는 억울한 듯 입술을 오므리고 계속 그의 팔을 흔들었다.설기웅이라는 사람은 정인군자로서 서로 질투하며 싸우는 여자들의 모습을 그닥 좋아하지 않았고 몸과 마음을 일에 몰두하여 유독 설씨 가족에게만 책임을 질 뿐이었다.그의 눈에 설인아는 조금 오만할 뿐이지 결코 사람의 마음을 해치는 아이가 아니었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므로 세상이 그녀를 에워싸고 돌아가기를 바랐다.설인아가 아직 어리기 때문에 이런 행동이 결코 틀렸다 생각하지도 않았다.“내가 잘못했어, 오빠.”그녀는 입술을 오므리고 아무 말 없이 얌전하게 있었다. 설기웅이 싫어한다는 것을 눈치채서 말이다.한편, 설기웅의 시선은 때때로 성혜인 쪽을 향했다.성혜인은 이미 먼 곳에 있는 한 전망대에 다다랐는데, 산이 꽤 높은 덕에 웅장한 야경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산 아래로 마치 은하수가 땅에 흩어져 있는 것 같았고 그녀는 처음 이런 관점에서 제원을 바라보았다.그녀가 돌의자에 앉아 있을 때 반승제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끝을 움켜쥐었다.“머리가 더 길어진 거 아니야?”이전에 성혜인의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오는 단발이었다면, 지금은 포니테일을 할 수 있을 정도 많이 자랐다.그는 손끝으로 머리카락 한 가닥을 짚더니 그녀에게 물었다.“묶을래?”성혜인은 고개를 흔들다가 반승제의 손목에 검은색 머리끈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시계 외에는 어떤 장신구도 착용하지 않는 사람인데, 오늘은 웬일로 머리끈을 다 갖고 왔지?'성혜인의 시선이 몇 초간 자신에게 머무르자 반승제가 조금 쑥스러워했다.“오기 전에 머리가 좀 길어진 걸 보고, 나중에 네가 묶을 것 같아서 가져왔어.”성혜인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더니 그의 손목을 잡고 반복해서 살펴보았다.분명히 몇천 원 되지 않는 물건이었는데 그의 이 길쭉한 손목뼈에 있으니 수백만 원짜리 같은 느낌이 났다.“승제
성혜인은 그녀의 연기를 보는 것조차 귀찮아하며 조용히 식사를 이어갔다.반승제도 맞은편을 보지 않고 한 손으로 뺨을 괴고는 빙긋 웃으며 성혜인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가 먹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부르다는 듯한 표정이었다.성혜인이 반 마리를 다 먹고 더 먹으려 하자 반승제는 손가락 끝으로 그녀를 꾹 눌러 제지했다.“차가운 성질의 음식이니 조금만 먹어. 위가 아플지도 몰라.”그녀는 아쉬워하며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반승제는 침착하게 옆에 있는 물티슈를 뽑아 들더니 마치 예술품을 닦는 것처럼 그녀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닦아주었다.너무 몰입한 나머지 반승제는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임경헌이 한마디 했다.“형 혹시 서주혁 씨 전화 못 받았어요? 조금 전에 온시환 씨가 그러는데, 서주혁 씨가 형더러 잠깐 와달라 한대요.”조금 전 온시환이 이 말을 꺼냈을 때, 반승제는 성혜인의 손을 닦아주고 있어 듣지 못했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이쪽으로 향하게 되었다.모두의 얼굴에는 놀라움, 질투, 의아함이 가득했다.‘남의 것 빼앗아서 성혜인한테 줬으면 됐지, 킹크랩 먹었다고 정성스레 손까지 닦아줘? 성혜인은 왜 또 가만히 받기만 해? 손이 없어 발이 없어? 반승제한테 도대체 어떤 약을 타 먹였길래 저러는 거지...’설인아는 짜증이 몰려와 이를 악물었다. 온몸의 피가 들끓고 곧 역류할 것만 같았다.입버릇처럼 자신이 반승제를 좋아한다고 말했건만 지금 그가 무리 내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성혜인을 챙기다니... 그야말로 설인아의 뺨을 때리는 일이 아닌가?“다 큰 사람이 스스로 손 닦을 줄도 모르나?”그녀의 한 마디에 사람들은 순간 생각을 멈추었다.반승제는 손에 든 티슈를 접어 느릿느릿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던지더니 툭 한 마디를 내뱉었다.“너랑 상관없잖아.”조금의 체면도 세워주지 않는 말에 설인아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설기웅도 더 이상 가만히 볼 수 없었다.“반 대표님, 제
카드를 만지고 있던 반승제는 손을 멈칫하며 그녀의 뻔뻔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한편, 홀 밖에서 전화를 받아 든 성혜인은 온몸이 굳어졌다.전화를 걸어온 사람이 아직 실종 상태인 반태승이었기 때문이다.“혜인아.”핸드폰 너머의 목소리가 잠시 멈추더니 이내 몇 번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할아버지.”성혜인은 자신이 환청을 들은 줄 알고 급히 입을 열었다.“지금 어디에 계세요? 승제 씨가 계속 할아버지를 찾고 있어요.”“혜인아, 내일 밤에 나랑 만나자꾸나. 대신 승제한테는 얘기하지 마.”‘내일 밤?’그 시간에 그들은 이미 입산하여 산속에서 밤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그 말인즉슨 할아버지가 이 주변에 계신다는 거야. 단지 나오려 하지 않으실 뿐.’성혜인의 마음속에는 너무 많은 의문이 떠올랐다.“내가 너한테 따로 물어볼 것이 있어서 그러니 승제한테는 알려주면 안 돼.”말을 마치고 나서, 그는 다시 심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떠날 때 이미 몸이 성치 않았던 반태승이라 성혜인은 그가 오래 버티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할아버지, 제가 승제 씨한테 이 신호가 뜨는 주소를 추적하라고 할게요.”“혜인아, 이건 내 유언이다. 한 번만 너를 만나고 뭔가를 확실히 알아내고 싶어. 그러니 제발 승제한테 아무 말 하지 말아.”“알겠어요.”그렇게 통화를 끊고 사람들 속으로 돌아갔을 때 성혜인은 반승제를 보지 못했다.그녀가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 예의 바르게 물어보자, 여자는 눈을 흘기며 대답했다.“정말 한순간도 남자를 떠날 수 없는 거예요? 다른 큰일도 아니고 잠깐 전화하러 간 게 다면서 참...”성혜인은 어이가 없었지만, 그녀와 따지는 것도 귀찮았다. 또 일단 여기서 또 충돌이 일어나게 되면 조금 이따 반승제가 또 발작할지도 모른다.그렇게 현장을 한 바퀴 빙 둘러보았지만 성혜인은 반승제를 찾지 못했다. 그때, 누군가 친절하게 한마디 했다.“바로 옆 보드게임 방에 있어요.”임경헌은 오늘 흰둥이에게 첫눈에 반해 밤새 흰둥이와 함께 사람들과 멀리
공지민은 섬에서 한 달을 푹 쉬었고 그 사이 연승혁의 상처도 조금씩 나아졌다.그녀는 텔레비전에서 염정아의 판결 결과를 알게 되었다. 그 당시 염정아는 카메라를 보며 미소를 지었고 분명히 이는 그녀가 선택한 결말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운명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으니까.판결 결과를 본 날 공지민은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주변의 바람이 매우 거셌다. 그녀는 자신이 흘리는 눈물이 악어의 눈물처럼 느껴졌다. 염정아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자신 때문이었다. 자신이 그녀에게 칼을 쥐여준 것처럼 느껴졌다.공지민은 입을 틀어막으며 울음소리가 흘러나오지 않게 참았으며 고통에 젖어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그때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고 연승혁이 다가왔다.“지민아, 오늘 밤에 해산물 바비큐 할 건데 저번에 먹었던 킹크랩 또 먹을래? 이따가 나랑 시장에 가서 사 오자.”연승혁은 공지민 앞에 서서 그녀의 붉어진 눈을 보더니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야? 울었어?”최근 며칠 동안 연승혁은 매우 부드러워졌고 이전의 그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의 친구들이 여기 있었다면 아마 그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오늘 바람이 너무 세서 눈에 모래가 들어갔어요.”연승혁은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얼굴을 받쳐 들고 자세히 살펴보았다.“혹시 뉴스 때문에 그래? 봤었어? 사실 무기징역을 받을 수도 있었는데 법정 쪽에 말대로라면 법정에서 자기가 직접 자백하며 죽는 걸 원했대. 아무도 살릴 수 없었어. 지민아, 더 이상 괴로워하지 말고 오늘 밤에 뭐 먹을지 생각해 보자.” 공지민의 눈빛에는 조롱이 가득했다. 오늘 밤 뭐 먹을지가 한 생명보다 중요하다고? 마음속에서 조롱이 커질수록 그녀의 얼굴에는 더욱 감동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의 목을 감싸며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연승혁의 눈빛이 깊어지고 손은 그녀의 허리에 닿아 한껏 힘을 주었다. 공지민은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연승혁은 웃음을 터뜨렸고
온시환은 일어나서 집을 나와 헬기를 타고 염정아의 집에 가기로 했다. 그녀의 집에 아이들이 다섯 명이나 있었으니까. 그가 도착했을 때는 저녁 무렵이었다. 옆에는 두 사람이 따라왔고 모두 그의 사람들이었다. 염정아의 집을 알아낸 후 그는 서둘러 그곳으로 갔다.아래층 슈퍼마켓 사장님은 그들을 보고 처음에는 경계했지만 염정아에게 부탁받고 왔다는 걸 듣고 몇 마디 더 묻고 나서야 방 열쇠를 건넸다. 온시환은 문 앞에 서서 잠시 망설였다. 문에는 작은 광고들이 잔뜩 붙어 있었고 집은 꽤 오래된 것 같았다. 그렇게 크지도 않아 보였다. 그는 열쇠를 꽂고 들어갔을 때 방 안에 있던 몇 명의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 일부는 소파에서 TV를 보고 있었고 일부는 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아무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있었다.온시환은 입을 열려고 하다가 이 아이들이 아마 죽음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큰 아이만이 어느 정도 어른스러워 보였다. “아저씨, 엄마 아빠가 우리 보러 오라고 하신 건가요? 우리는 언제 엄마 아빠를 만날 수 있어요?”온시환은 웃어보려 했지만 어떻게 해도 웃어지지 않았다. 염정아는 이미 사형선고를 받았고 곧 처형될 예정이다. 그는 정말 이 아이들을 모두 복지관에 보내야 할까? 그는 잠깐 망설였다가 옆에 있는 사람에게 말했다.“아이들 챙겨. 제원으로 간다.”만약 아이들을 이곳 복지관에 두면 이곳은 너무 멀어서 아이들이 괴롭힘을 당해도 알지 못할 수 있다. 차라리 제원 복지관에 보내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온시환은 이 아이들을 직접 돌볼 고민도 했었지만 그들을 보면 염정아의 인생이 떠올랐다.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었고 그걸 떠올리면 마음이 불편했다.그는 제원의 복지관에 기부할 수 있었고 매주 사람을 보내 아이들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아이들이 안정적으로 자라도록 챙기고 학교에 보내어 나중에 직장을 찾아서 스스로 먹고살 수 있게 할 수 있었다. 직장을 구하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그는 늘 자신이 쓴 시나리오가 가장 막장 같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잔을 비우고 또 비웠다. 문득 공지민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속의 쓰라림도 점점 더 커졌다. 그때 VIP룸의 문이 열리고 반승제는 조금 늦게 도착했다. 그가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보자 걱정스러운 얼굴로 위로의 말을 건넸다.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술을 많이 마셔. 뭐가 그렇게 힘들어서 이러는 거야? 아니면 우리 다 같이 시간 내서 놀러라도 가자. 마침 혜인이도 요즘 놀러 가고 싶어 하던데.” 한때 온시환은 노는 걸 가장 즐겼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 나갈 생각만으로도 힘이 빠졌다. 그는 멍하니 손에 든 술잔을 바라보다가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그때 반승제가 물었던 적이 있었다. ‘어떻게 해야 그 여자가 나를 사랑하게 될까?’ 그때 그는 우습게 느껴졌다. 반승제처럼 완벽한 남자가 여자의 사랑이 부족할 리가 있나? 세상에 여자는 넘쳐나는데 이 여자가 아니면 다른 여자를 찾으면 될 일 아닌가.하지만 세상일은 돌고 도는 법이라더니 그도 결국 한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순간이 찾아왔다. 하물며 그 사람은 그를 원하지도 않았다. 그를 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다른 남자의 감정을 갖고 장난치려 들었다. 그날 경찰서 앞에서 연승혁을 봤을 때 온시환은 공지민의 대략적인 계획을 알 것 같았다. 그때 연승혁이 그녀를 바라보던 눈빛은 분명히 순수하지 않았고 연승혁도 그와 마찬가지로 그녀에게 빠졌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온시환은 질투가 아니라 씁쓸함을 느꼈다. ‘연승혁 너도 참. 평생을 거만하게 살아온 네가 유일하게 사랑한 여자가 오히려 네 목숨을 노리다니.” 온시환은 술을 또 한 모금 마시며 자신과 연승혁 중 누가 더 불행한지 가늠할 수 없었다. 옆에 앉아 있던 서주혁은 손을 천천히 내밀어 그가 마시려던 술을 가로챘다. “그만 마셔. 위 출혈 나서 병원에 실려서 가고 싶어?” 온시환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
연승혁의 상처가 조금 나아졌을 때 공지민은 그를 데리고 해변을 거닐었다. 마치 그들이 처음 섬에 왔을 때처럼. 연승혁은 체력이 좋아 빠르게 회복되었고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연인처럼 보였다. 이 섬에 와서 부상을 당한 그날을 제외하고 그는 매일 자신과 공지민이 연인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진실이 무엇인지. 그것은 오직 그만이 알고 있었다. 그날 두 사람이 다시 여기서 석양을 바라보고 있을 때 연승혁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지민아, 여기서 돌아가면 나랑 함께할래?” 공지민은 잠시 의아해하며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 “우리가 이미 함께 있는 게 아니에요? 전에 우리가 미혼 부부였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렇긴 한데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 네가 나를 선택한다면 그 문제들은 내가 모두 해결할 거야.” 김경자 쪽에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그가 한 일이 기존의 규범을 어기는 일이었지만 반대하는 이들을 모두 없애 버리면 그만이었다. 예전처럼 말이다. 어차피 김경자도 그가 하는 방식에는 이미 익숙해졌을 터였다. 그는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짓더니 그녀를 품에 안았다. “너만 원하면 난 뭐든지 할 수 있어.” 공지민은 속눈썹을 내렸다. 머릿속에는 연승혁과의 일보다는 염정아가 떠올랐다. ‘염정아가 원아정을 죽인 사건이 그렇게 커졌는데 지금은 어떻게 됐을까?’ ‘온시환은 염정아를 도왔을까?’ 그녀는 심지어 이런 생각도 했다. ‘만약 자신이 죽는다면 온시환은 슬퍼할까?’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예전부터 살고 싶은 의욕이 없었다. 그래서 제원에는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반드시 방법을 찾아 연승혁이 자신과 함께 여기 남아있게 할 것이다. 마치 그때 구은우가 영원히 바닷가에 남았던 것처럼. 제원 쪽에서 온시환은 더 이상 공지민과 연락하려는 시도를 포기했다. 그가 들은 바에 따르면 공지민은 이미 연승혁과 함께 그 섬으로 갔고 그 섬에는 그가 배치해
공지민이 눈을 떴을 때 천장이 보였는데 연승혁이 말한 대로 안전해진 것 같았다.그녀는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연승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공지민은 침대에서 내려와 방문을 열었다. 밖에 서 있던 연승혁의 부하들은 그녀가 나오는 걸 보고 격정스런 눈빛을 지었다. “공지민 씨, 괜찮으신가요?”공지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오빠는요?”“형님은 아직 의식이 없으십니다.” “오빠 보러 가고 싶어요.”그때 그녀는 일부러 미친 척하며 그를 몇 번 밀쳤고 기억에 의하면 그를 불더미 속에 밀어 넣었다. 그의 등은 아마 화상을 입었을 것이다.하지만 연승혁은 정말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녀를 안고 탈출할 수 있었으며 그녀가 다치지 않도록 잘 보호했다.공지민은 감동하기보다는 오히려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원래는 그와 함께 그곳에서 같이 죽을 생각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무사히 살아남았다.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연승혁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연승혁은 병상에 누워 있었고 의사가 그의 상처를 살펴보고 있었다.섬의 의료 수준은 제원에 미치지 못했다. 연승혁은 등 부상으로 인해 이미 이틀째 의식을 찾지 못했고 의사는 감염을 우려하며 그의 곁을 이틀 동안 지키고 있었다. 공지민의 눈빛에 조롱의 기색이 스쳤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왜 이 사람은 타 죽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녀는 곧 눈가가 붉어진 채 천천히 병상 옆에 앉았다.“오빠는 괜찮아졌나요?”의사는 그녀를 보며 공손하게 답했다. “위험한 고비는 넘겼습니다. 이제 깨어나기만 기다리면 됩니다.”공지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승혁의 손을 잡았고 그대로 병상 옆에 앉아 떠나지 않았다.의사는 곧 방을 떠났고 방 안에는 연승혁과 공지민 두 사람만 남았다.공지민은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이 방에는 카메라가 없었다. 그녀는 옆에 있는 베개를 가져다 이 남자를 질식시켜 죽일 생각도 했다. 그러면 모든 게 끝날 테니까. 그녀가 그렇게 하려던 찰나
남자는 이미 죽고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연승혁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옆에 있는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옆에 있던 부하들에게 짧게 말했다. “정리해. 난 먼저 간다.” 호텔 쪽에는 이미 그의 부하들을 배치해 두었으니 원래라면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방금 그 남자의 말이 자꾸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결국 직접 돌아가 확인해야만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연승혁은 자신이 공지민에게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것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더 이상 이걸 단순한 게임으로만 여길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만약 공지민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이 어떻게 될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는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았다. 원래는 30분은 걸려야 할 거리였지만 그는 10여 분 만에 도착했다. 그가 머물던 호텔은 이미 짙은 연기로 뒤덮여 있었다. 그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졌고 서둘러 앞으로 나가 자신의 부하를 붙잡고 물었다. “공지민 어디 있어!” “형님, 공지민 씨는 아직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방 안에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연승혁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바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불길은 이미 너무 거세게 타오르고 있었고 섬의 소방은 아직 빠르지 않아 불은 이미 1층에서부터 꼭대기까지 번져 있었다. 지금 들어가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연승혁은 이성적으로 생각하며 밖에서 소식을 기다려야 한다고 여겼다. 어쩌면 공지민이 운 좋게 스스로 탈출했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이성을 차릴 수 없었다. 곧바로 옆에 있던 사람들을 밀쳐내고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자신이 자던 방으로 들어갔다. “공지민! 공지민!” 그는 큰 소리로 외쳤고 곧 방 한구석에서 공지민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짙은 연기에 눈을 뜰 수 없었던 연승혁은 최대한 몸을 낮추며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공지민은 방구석에 웅
연승혁은 즉시 공지민을 바라보며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넌 이 방에 가만히 있어. 내가 가서 그 사람을 처리하고 나서 나랑 같이 제국으로 돌아가자.”공지민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오빠가 위험하진 않겠죠?”“걱정하지 마. 금방 돌아올 테니까 한잠 푹 자고 있어.”연승혁이 묵고 있는 호텔은 이 섬에서 가장 큰 호텔로 매우 호화로운 데다가 그의 부하들도 지키고 있기 때문에 공지민은 안전했다.공지민은 서서 그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연승혁은 겨우 몇 걸음을 걸었을 뿐인데 이상하게 매우 불안했고 심지어 공지민이 그와 함께 움직이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와 함께하는 건 결코 안전하지 않았고 그 사람이 혹시나 손에 총이 있다면 공지민은 위험할 수 있었다.그는 신이 아니었고 공지민을 100% 보호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약간의 과실로 그녀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는 감히 모험할 수 없었고 그녀를 호텔에 남겨 둘 수밖에 없었다.연승혁은 차에 올라탔고 차는 30분 동안 달리다가 암초가 있는 곳에 멈췄다.근처의 암초는 크고 새까맣기 때문에 숨어 있기에 좋은 장소였다.연승혁은 옆에 있는 부하한테 물었다.“여기에 있는 게 확실해?”“네. 확실해요. 저희 쪽 사람들이 지금 수색하고 있어요. 늦어도 30분이면 결과가 나올 거예요.”연승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보헤미안 스타일의 소매를 입고 있었는데 평소의 옷차림과는 전혀 달랐고 휴가를 온 것 같았다.멀지 않은 곳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양측이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연승혁은 눈썹을 치켜올리고 입꼬리를 천천히 올렸다. 이제 그 사람은 도망칠 수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부하들은 온몸이 새까만 남자를 붙들고 걸어왔다.어쩐지 이 남자가 그렇게 오랫동안 숨어 있더라니 그의 몸에는 검은 물감이 칠해져 있었고 마치 암초와 융합된 것처럼 보였으며 사람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연승혁은 담배에 불을 붙였고 밤바다 바람에 그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그는 심호흡한 뒤 그 남자
연승혁은 한동안 그녀와 꽁냥꽁냥하다가 해변의 경치를 구경하러 가자고 말하며 그녀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떴다.공지민은 바다를 극도로 두려워했다. 구은우가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후 그녀는 평생 악몽 속에서 살았다.그녀는 고요한 바다를 바라보며 가슴이 격하게 오르내리기 시작했지만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연승혁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그녀의 손을 잡고 부드러운 모래 위를 걸었다.“지민아, 어때? 여기 달이 특별히 예쁜 것 같지 않아?”공지민은 얼굴에 순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예뻐요. 이렇게 예쁜 달은 처음 봐요.”연승혁의 입꼬리는 올라갔고 그녀를 품에 안은 채 말없이 서 있었다.그는 정말로 여기의 달이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여자와 함께 경치를 보면서 느낀 감정은 뭔가 더 특별했고 전에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공지민은 내내 연승혁한테 맞춰줬고 그가 바닷물을 만지고 싶다고 해서 그녀도 따라나섰다.바닷물에 발을 담그면서 연승혁이 물었다.“이런 해변을 보고 있으면 뭔가 떠오르는 게 있어?”공지민의 눈에는 의문으로 가득 찼고 그것이 무엇인지 묻고 싶었다.연승혁은 구은우에 관해 얘기하고 싶었다. 그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공지민은 그때 구은우를 매우 사랑했고 그들이 서로를 가장 열정적으로 사랑할 때 구은우가 사망했는데 그녀가 그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이상우가 최면술을 사용했음에 불구하고 연승혁은 그녀가 갑자기 기억해 낼까 봐서 걱정이었다.하지만 공지민의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고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는 듯했다.연승혁은 안도감을 느꼈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기억 안 나면 됐어. 손 줘봐. 우리 여기 좀 둘러보다가 돌아가자.”공지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오빠가 잡으려는 그 사람은요?” “아마 일주일 안에 잡힐 거야. 이 섬이 제국만큼 크지는 않지만 숨을 수 있는 동굴이 많아. 그 사람이 이곳에 들어온 후 바로 숨어버렸어. 그래서 내 부하들이 그를 찾아내려면 구석구석을 돌아다녀야 해.”그들이 며
공지민은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어서 그저 연승혁한테 기대어 있기만 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고 누군가가 그녀를 들어 올려 따뜻한 침대에 눕혔다.이곳은 작은 섬으로 보였고 원주민들도 꽤 많아서 야시장은 매우 북적거렸다.공지민은 안겨서 이동하는 동안 많은 노점상들의 외침 소리를 들었다.또 30분이 지났을 때 음식의 냄새가 그녀의 코끝을 스쳤다.연승혁은 그녀를 일으키며 말했다.“왜 이렇게 많이 자는 거야? 너 하루 종일 잠만 잤어. 얼른 일어나서 뭐라도 좀 먹어. 이따가 야시장 구경하러 가보자.”“사람 잡으러 왔다면서 야시장을 구경할 기분은 나요?”“그 사람이 지금 이 원주민들 사이에 있어. 멀리 도망가지 못할 거야. 이곳의 출입구는 이미 부하들이 지키고 있어서 그 사람이 함정에 빠뜨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면 돼.”공지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기울여 그의 뺨에 뽀뽀했다.“역시 오빠는 대단해요.” 연승혁의 입꼬리가 올라갔고 그는 역할에 완전히 몰입한 듯했다.“네 약혼자가 될 수 있는 걸 봐서 내가 좀 대단하긴 하지. 그러고 보니 네가 보는 눈이 있네.”“그럼요. 내가 안목이 높긴 하죠.” 그녀의 말을 들은 연승혁은 기분이 더 좋아졌고 그녀를 품에 껴안은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이거 야시장에서 파는 것들인데 먹고 싶은 게 있나 봐봐.”연승혁은 많은 음식을 사 왔고 그녀는 확실히 배가 고파서 그의 품에 안겨 마음껏 먹기 시작했다.연승혁은 여자가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행복감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그는 손가락을 내밀어 그녀의 입가를 닦아주었다.“전부다 네 거니까 천천히 먹어.” “오빠가 뺏어 먹을까 봐 그러죠.”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는 연승혁의 눈이 깊어졌다.공지민은 눈치채지 못한 듯 모든 음식을 다 먹고 나서 곧장 침대에서 일어났다.“야시장 구경하러 간다면서요? 얼른 가요. 나도 너무 구경하고 싶고 이곳의 풍습이 궁금해요. 여기 국내는 아니겠죠?”연승혁은 그녀가 어린아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