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인은 반승제가 그렇게 난폭한 수단으로 흰둥이를 데리고 올 줄은 상상치도 못했다.흰둥이의 성격은 반승제와 거의 비슷하다.낯선 이와 마주할 때 강력하고 도도한 모습을 보이나 반승제를 보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순종만 하니 말이다.두 사람은 이미 포레스트로 돌아왔고 반승제는 화가 단단히 모습으로 흰둥이의 엉덩이를 때렸다.“그렇게 쉽게 새 주인한테 달라붙고 싶었어? 내가 돈 들여가면서 널 키워 뭐해!”말을 마치고 손에 힘을 더하면서 다시 흰둥이를 때렸다.성혜인은 옆에 앉아 가만히 지켜보았다.유경아가 준비해 준 과일을 먹으면서 반승제의 모습을 보고 있는데 왠지 모르게 앞으로 말썽만 피우는 자식을 교육할 때도 저럴 듯싶었다.그 생각에 얼굴이 약간 달아올랐다.하지만 반승제는 흰둥이를 교육하느라 바빠서 그녀의 정서를 알아차리지 못했다.흰둥이는 아첨을 떨며 드러누워 온몸을 흔들며 화 삭이라고 하는 듯했다.반승제는 화가 나면서도 우습기도 했다.계속 야단을 치려고 하던 그 순간, 갑자기 하얀 그림자가 쏜살같이 성혜인 곁으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그 정체는 바로 겨울이다.성혜인 곁을 오랫동안 지켜 온 겨울이의 사랑받는 수단일 뿐이다.겨울이는 지금 성혜인의 무릎에 고개를 살짝 기대고 귀를 움직이고 있다.성혜인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면 겨울이는 늘 이처럼 환심을 사곤 했었다.그런 겨울이의 모습에 성혜인은 마음이 사르르 녹으면서 손을 들어 머리를 어루만져주었다.“우리 겨울이 참 예뻐.”반승제는 이 광경을 보고 왠지 모르게 답답한 심정이 들었다.라이벌이 선물한 애완견도 성혜인의 환심을 살 줄 아는 데 자기가 선물한 흰둥이는 다른 여자를 주인으로 삼았으니 말이다.생각하면 할 수록 화가 나서 흰둥이를 확 밀쳐 버렸다.“너 앞으로 이틀 동안 밥 먹지 마.”흰둥이는 마치 반승제에게 아첨을 떨어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이 곧바로 성혜인 곁으로 비집고 들어왔다.겨울이를 한쪽으로 밀어내버리고 자기 머리를 성혜인의 무릎 위에 살포시
정원의 여러 소파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는 아름다운 커튼 장식이 있었고 주변의 풍경은 수려하기 그지없었다.모두가 한마음으로 한뜻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와중 임경헌이 외쳤다.“형, 왔어요?”임경헌은 줄곧 별말 없이 설인아가 몇몇 재벌가 딸들과 얘기 나누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모습은 마치 자신의 인복이 이렇게 좋다며 일부러 과시하는 것 같았다.설인아는 신분도 높고 청순가련하게 생긴 탓에 사람들의 호감을 사기 쉬웠다.임경헌의 말에 모두 멀지 않은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 온 사람은 적어도 20명 남짓하였는데 남녀의 비례가 반반이었다.사람들의 시선이 닿은 곳에서, 반승제는 두 손으로 성혜인의 얼굴을 잡고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묻고 있었다.“만약 네가 불편하다고 하면 우리는 돌아갈 거야.”‘온시환 정말 쓸모없는 자식. 이런 작은 일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곧 성혜인이 고개를 저었다. 정말 돌아간다면 무리 내 사람들이 그녀가 일부러 설인아를 피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그렇게 되면 나중에 더 난처해질지 몰라.’게다가 요즘 무리 내 사람들은 계속 그녀의 출신을 조롱하고 있지 않은가? 아마 대부분 사람들은 그녀가 호텔에서 망신 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반승제의 별장에 평생 머물며 다시는 나오지 않으리라 생각할 것이다.“혜인아, 돌아가자.”사실 반승제는 성혜인을 데리고 나와 기분 전환을 시켜주려 했지만 그녀의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이내 손목을 잡으며 되돌아가려 했다.그러나 성혜인은 되레 고개를 흔들며 뒷좌석에 있던 흰둥이를 내려주었다.흰둥이는 털을 몇 번 털더니 금세 애교스럽게 그녀의 무릎에 대고 얼굴을 문질렀다.사람들은 흰둥이의 등장에 순간 놀라고 말았고 몇몇 여자들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했다.“저 개는 대체 무슨 종이지? 위풍당당하네, 아주.”설인아는 흰둥이를 보자마자 얼굴이 굳어져서는 몰려오는 통증에 자신의 가슴팍을 어루만졌다.‘그래도 미리 약을 먹어놔서
성혜인은 그 모습이 우습기만 했고 손에는 여전히 흰둥이의 목줄을 잡고 있었다.이내 그녀는 반승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승제 씨, 차 안에 있는 물건 내려놔요. 흰둥이도 계속 차 안에 있으면 답답할 테니까 저는 임경헌 씨랑 흰둥이 산책시키러 갈게요.”반승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몸을 돌려 차 문을 열고 물건을 아래로 옮기기 시작했다.두 사람 모두 설인아를 상대하지 않는 탓에 이들 중 그녀는 너무 쓸데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설인아는 몸을 비틀댔지만 어떻게든 버티며 쓰러지지 않았다.곧 성혜인이 목줄을 잡고 떠나려는 데 흰둥이의 큰 몸이 설인아와 부딪히는 게 보였다.원래도 몸이 좋지 않던 설인아는 이렇게 흰둥이와 부딪히자 그대로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성혜인도 조금 어이가 없었다.‘흰둥이도 어쨌든 설인아랑 한동안 지낸 적 있었는데, 왜 이렇게 버릇없이 구는 거지?’그러나 성혜인은 이내 흰둥이의 성질을 떠올렸다. 반승제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하인이라 생각할 것 말이다.설인아는 한쪽에 드리운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반드시 참아야 해. 어차피 다들 며칠 동안 이 별장에서 머물 거고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거야.’성혜인이 흰둥이를 끌고 사람들의 앞을 지나가자 모두 이상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설인아가 방금 그녀의 집안일을 언급했기 때문일 것이다.그들은 또 장영희와 전태경을 떠올렸다.‘그런 사람들의 딸이 우리와 같은 무리 내에 있다니... 이만한 굴욕도 없지!’하지만 성혜인은 그들을 상대하지 않고 그저 임경헌의 곁으로 걸어갈 뿐이었다.임경헌의 시선은 그녀를 넘어 반승제에게 계속 말을 걸려고 하는 설인아에게 향했다. 그러고는 다시 눈을 휙 뒤집더니 성혜인에게 말했다.“제가 괜히 산책하러 가자고 말했나 봐요. 저 사람한테는 오히려 득이 되어버렸잖아요.”“괜찮습니다.”성혜인은 목줄을 끌고 임경헌과 오솔길을 따라 걸으며 밖으로 나갔다.한편, 자리에 남아있던 반승제는 물건을 옮기기 시작했고 설인아는 서둘러 한 걸음
반승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온시환의 옷깃을 움켜잡았다.그러자 온시환은 어처구니없다는 어조로 말했다.“너희 두 사람이 안 왔을 때 모두 방 번호를 뽑고 이 두 개밖에 안 남은 거야. 내가 뭐 일부러 그런 줄 알아? 그리고 너 혜인 씨더러 같이 한방 쓰자고 해도 되잖아.”반승제는 멍하니 서 있었다. 조금 전에는 순간적인 분노에 휩싸여 이 사실을 잊고 있던 것이다.곧 온시환을 놓아준 반승제는 성혜인이 자신과 한방을 쓰게 하지 않고 대신 직접 그녀의 방으로 옮겨갔다. 이렇게 하면 설인아와 조금 더 멀리 떨어질 수 있었으니 말이다.샤워를 마치고 나온 성혜인은 내일 입산에 필요한 장비를 정리하는 반승제를 발견했다.하이킹은 이 별장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별장은 단지 모두가 머물며 노는 장소일 뿐 내일 아침 일찍 모두 산에 올라가야 했다.가방 안의 것들은 모두 반승제가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준비해 온 것들로, 이것은 두 사람이 사귄 이래 첫 데이트라고 할 수 있다.성혜인은 침대 위에 누워 몸을 뒤척이며 반승제가 여전히 두 가방 안의 것들을 점검하는 것을 보고 한마디 물었다.“승제 씨는 예전에 하이킹 많이 해봤어요?”“반년에 한 번 정도? 자연과 친해지면 기분이 많이 좋아질 거야. 이번에는 흰둥이가 계속 따라다닐 텐데 그러면 밤에 너를 도와 벌레도 쫓아줄 수 있어.”“풉.”성혜인은 그 모습이 조금 웃기기는 했지만 진지한 그의 옆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훈훈해졌다.그는 두 가방 안의 물건을 모두 점검한 후, 한쪽 소파 위에 올려놓았다.“혜인이 너는 내일 이 가벼운 거 메면 돼. 내가 무거운 거 멜게.”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곧이어 어깨를 반쯤 드러낸 채 누워있는 성혜인을 보고 반승제는 성큼성큼 다가가 그녀를 들쳐 안았다.그러자 성혜인의 다리가 무의식적으로 그의 허리를 감았다.그렇게 반승제가 키스를 한 지 1분이 지났을 때, 임경헌이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형, 모두 형 회의 언제 여나 기다리고 있어요. 아, 또 회의
안색이 잠깐 굳더니 설인아는 이내 입술을 오므렸다. 주먹을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손톱이 손바닥을 뚫고 들어갈 뻔했다.그때 한 사람이 말했다.“지금부터 바비큐 준비하고 조금 이따 술 살짝 마실까요? 그리고 다들 돌아가 쉰 다음 내일 아침 6시에 출발합시다.”그 소리는 얼어있던 현장의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풀어주었다.이윽고 성혜인도 반승제의 곁으로 향했다.그녀는 음침하면서도 공포스러운 설인아의 질투 섞인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느꼈다.그러면서 문득 성혜인은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저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조건을 갖고 태어났으면서 왜 아직도 만족하지 못하는 거지?’밖에서는 도우미들이 바비큐 받침대를 세우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이런 음식을 먹지 않는 재벌 2세들이었지만 모처럼 하이킹하러 왔기 때문에 분위기에 맞춰 노는 것도 퍽 나쁘지 않았다.오늘 밤 속이 좋지 않았던 성혜인은 반승제에게 주의 사항을 다시 한번 들은 다음 안에 남아 바깥 바비큐 파티에는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그녀가 가지 않으면 따라서 반승제도 가지 않을 게 분명했으므로 온시환이 들어와서 외쳤다.“승제 너는 뭐 먹을래? 여기 전문적인 셰프님이 해산물 구워주시는데 혜인 씨랑 조금 먹는 게 어때?”해산물 얘기에 흥미를 느낀 성혜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을 한 번 보았다.그러자 각종 싱싱한 해산물이 들어있는 수조가 눈에 들어왔다.이 모든 것은 헬리콥터로 공수해온 것이었다.비록 야외에서 하는 식사라고는 하지만 재벌 집 도련님들이 어찌 아무거나 먹을 수 있겠는가. 따라서 바비큐 파티에 놓일 음식들은 전부 최고급으로 준비했다.그중, 성혜인은 킹크랩 한 마리가 마음에 들었다.‘저 게살 구워 먹으면 아주 맛있다던데...’예전 성씨 집안에 있을 때, 당시 성훈은 재혼하지 않았고 매년 설날 음식을 충분히 준비했었다. 하지만 준비한 음식의 반을 채 먹기도 전에 그는 항상 회의 전화를 받고 황급히 자리를 뜨고는 했다.그녀가 손을 들어 안에 있는 킹크랩을 가리키려 하자 설인
설인아는 설기웅의 팔짱을 끼고 한 무리의 사람들 앞으로 걸어갔다.설기웅 역시 반승제에 버금가는 엘리트로 해외 상업계에서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고 현장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설씨 가문과 협력하고 싶어 했다.이곳에 있는 재벌가 자제들은 어려서부터 줄곧 서로 속고 속이며 서로가 가진 자원을 교환하고 이용하는 환경에서 자라났다. 때문에 누구와 사귀어야 할지 잘 알고 있었고 자연스레 그들은 설씨 가문의 두 사람과 말을 섞기 시작했다.설인아는 환하게 웃으며 하나하나 대답했다. 그때, 누군가 설기웅에게 여자친구가 있느냐고 묻자 설인아가 먼저 나서며 대답했다.“우리 오빠는 워커홀릭이라 가정을 꾸릴 생각이 전혀 없어요. 그리고 제 새언니가 되고 싶은 사람은 먼저 저라는 관부터 넘어야 합니다.”그녀는 웃으며 설기웅을 쳐다보았다.“그렇지 오빠? 내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야말로 오빠 마음에 들 수 있잖아.”온몸에 차가운 기운이 맴돌았지만, 설기웅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하루종일 소란만 피울래?”설인아는 혀를 삐죽 내밀더니 이내 성혜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자신을 이렇게 총애하는 설기웅을 보고 성혜인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싶어서 말이다.그녀는 정말 기대하고 있었다.하지만 성혜인은 기대했던 것만큼 질투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저 마지막 킹크랩을 아쉽게 쳐다보는 것을 보니 성혜인은 멀지 않은 곳에서 벌어진 소동보다 킹크랩에 훨씬 더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설인아는 뾰로통한 얼굴로 중얼거렸다.“살면서 킹크랩도 못 못 먹어봤나.”그 말은 현장에 있던 다른 사람들에게도 들렸고 모두들 성혜인을 바라보았다. 과연 설인아의 말대로 성혜인은 킹크랩이 있는 수조를 멍하게 쳐다보고 있었다.이때, 반승제가 성혜인의 곁으로 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먹고 싶어?”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음식에 기대를 내비치다니,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아까 승제 씨가 가방 정리하고 있을 때 마침 킹크랩 굽는 영상을 봤었거든요.”그러자 반승제의 시선은 순간 온시환에게
“누가 너한테 이런 말버릇 가르쳤어?”설기웅의 안색은 어두워졌고 눈빛 역시 차가워졌다.“인아야, 둘째한테 나쁜 거 배우지 마.”설인아는 억울한 듯 입술을 오므리고 계속 그의 팔을 흔들었다.설기웅이라는 사람은 정인군자로서 서로 질투하며 싸우는 여자들의 모습을 그닥 좋아하지 않았고 몸과 마음을 일에 몰두하여 유독 설씨 가족에게만 책임을 질 뿐이었다.그의 눈에 설인아는 조금 오만할 뿐이지 결코 사람의 마음을 해치는 아이가 아니었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므로 세상이 그녀를 에워싸고 돌아가기를 바랐다.설인아가 아직 어리기 때문에 이런 행동이 결코 틀렸다 생각하지도 않았다.“내가 잘못했어, 오빠.”그녀는 입술을 오므리고 아무 말 없이 얌전하게 있었다. 설기웅이 싫어한다는 것을 눈치채서 말이다.한편, 설기웅의 시선은 때때로 성혜인 쪽을 향했다.성혜인은 이미 먼 곳에 있는 한 전망대에 다다랐는데, 산이 꽤 높은 덕에 웅장한 야경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산 아래로 마치 은하수가 땅에 흩어져 있는 것 같았고 그녀는 처음 이런 관점에서 제원을 바라보았다.그녀가 돌의자에 앉아 있을 때 반승제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끝을 움켜쥐었다.“머리가 더 길어진 거 아니야?”이전에 성혜인의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오는 단발이었다면, 지금은 포니테일을 할 수 있을 정도 많이 자랐다.그는 손끝으로 머리카락 한 가닥을 짚더니 그녀에게 물었다.“묶을래?”성혜인은 고개를 흔들다가 반승제의 손목에 검은색 머리끈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시계 외에는 어떤 장신구도 착용하지 않는 사람인데, 오늘은 웬일로 머리끈을 다 갖고 왔지?'성혜인의 시선이 몇 초간 자신에게 머무르자 반승제가 조금 쑥스러워했다.“오기 전에 머리가 좀 길어진 걸 보고, 나중에 네가 묶을 것 같아서 가져왔어.”성혜인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더니 그의 손목을 잡고 반복해서 살펴보았다.분명히 몇천 원 되지 않는 물건이었는데 그의 이 길쭉한 손목뼈에 있으니 수백만 원짜리 같은 느낌이 났다.“승제
성혜인은 그녀의 연기를 보는 것조차 귀찮아하며 조용히 식사를 이어갔다.반승제도 맞은편을 보지 않고 한 손으로 뺨을 괴고는 빙긋 웃으며 성혜인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가 먹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부르다는 듯한 표정이었다.성혜인이 반 마리를 다 먹고 더 먹으려 하자 반승제는 손가락 끝으로 그녀를 꾹 눌러 제지했다.“차가운 성질의 음식이니 조금만 먹어. 위가 아플지도 몰라.”그녀는 아쉬워하며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반승제는 침착하게 옆에 있는 물티슈를 뽑아 들더니 마치 예술품을 닦는 것처럼 그녀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닦아주었다.너무 몰입한 나머지 반승제는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임경헌이 한마디 했다.“형 혹시 서주혁 씨 전화 못 받았어요? 조금 전에 온시환 씨가 그러는데, 서주혁 씨가 형더러 잠깐 와달라 한대요.”조금 전 온시환이 이 말을 꺼냈을 때, 반승제는 성혜인의 손을 닦아주고 있어 듣지 못했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이쪽으로 향하게 되었다.모두의 얼굴에는 놀라움, 질투, 의아함이 가득했다.‘남의 것 빼앗아서 성혜인한테 줬으면 됐지, 킹크랩 먹었다고 정성스레 손까지 닦아줘? 성혜인은 왜 또 가만히 받기만 해? 손이 없어 발이 없어? 반승제한테 도대체 어떤 약을 타 먹였길래 저러는 거지...’설인아는 짜증이 몰려와 이를 악물었다. 온몸의 피가 들끓고 곧 역류할 것만 같았다.입버릇처럼 자신이 반승제를 좋아한다고 말했건만 지금 그가 무리 내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성혜인을 챙기다니... 그야말로 설인아의 뺨을 때리는 일이 아닌가?“다 큰 사람이 스스로 손 닦을 줄도 모르나?”그녀의 한 마디에 사람들은 순간 생각을 멈추었다.반승제는 손에 든 티슈를 접어 느릿느릿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던지더니 툭 한 마디를 내뱉었다.“너랑 상관없잖아.”조금의 체면도 세워주지 않는 말에 설인아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설기웅도 더 이상 가만히 볼 수 없었다.“반 대표님, 제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