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육경한 앞에서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선미가 가늘란 손가락을 내밀자마자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꺼져!"선미는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었다.쿵 하는 소리와 함께 술잔이 선미의 얼굴을 스쳐 뒤쪽의 액정화면에 부딪혀 와르르 깨졌다.남자는 술에 취해 벌겋게 달아오른 눈을 치켜뜨고 사람을 잡아먹으려는 악마처럼 음흉한 소리를 냈다."꺼져!"그 무서운 표정에 선미는 놀라서 다리에 힘이 빠졌다.옷 단추를 잠글 겨를도 없이 허둥지둥 뛰쳐나갔다.밖으로 막 나왔을 때, 영숙이한테 한 발 걷어 맞았다."이년아, 그 남자가 너 좀 더 쳐다보면 데려갈 줄 알았냐?”선미의 마른 몸은 바닥에서 끓은 채 부들부들 떨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정말 아니에요.”"그렇게 포기할 줄 모르고 계속 희망을 품고 발버둥 치더니, 이젠 정신 차렸지?”영숙이는 영수증 한 묶음을 꺼내 선미의 얼굴에 내던졌다. "오늘 밤의 손실한 돈을 다 갚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선미는 그 영수증 위에 찍혀진 어마어마한 숫자를 보고 놀라서 눈물을 펑펑 쏟으며 계속 머리를 조아렸다."잘못했어요, 제발 용서해주세요. 정말 잘못했어요!”이 돈은 그녀가 죽어서도 갚을 수 없는 금액이었다. "네가 벌린 일이야. 사람은 마음이 하늘보다 높아서는 안 돼. 자기 주제를 알아야지. 우리는 단지 너더러 함께 술을 마시라는 것일 뿐인데, 너는 밥 한술에 배불러지고 싶어 하잖아!”영숙이는 조금도 공감할 생각이 없다는 듯이 말했다. "하늘에 너 같은 작은 참새가 날아올라 갈 수 있을 것 같아?”그녀가 이렇게 건방지게 작은 참새 따위가 가지 위로 날아올라 봉황새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어떻게 이렇게 큰 손실을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들이 이 일을 하는 데 있어서, 큰놈에게 미움을 사면 안 된다.육경한처럼 일이 많은 사람한테도 웃는 낯으로 받쳐줘야 한다. 영숙이는 선미의 순진한 얼굴을 보며 말했다. "네가 그를 따라가서 사는 삶은 여기보다 더 비참할 것이야.
이 목소리...육경한의 눈은 순간 뭔가에 홀린 듯 빨갛게 물들었다. 그는 손을 짚고 바닥에서 일어나 이 여자를 자기 품에 껴안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이때 그녀가 검은색 하이힐을 들어 올려 그의 손등에 발을 디뎠다.여자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너 지금, 이 꼴이..."말소리가 잠시 멈추더니 구두 굽이 남자의 손등을 짓눌렀는데 마치 남자의 손바닥을 뚫고 싶은 것 같았다."아무도 원하지 않는 들개 같아.”이 말을 마치자 검은 구두 굽은 육경한의 시선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소원아!"그는 그제야 막혔던 목구멍이 터졌다."가지 마!"그는 입안에 온통 피 냄새였고, 말도 안 되게 쉰 목소리였다.파란색 고급 차의 후미등이 깜빡였는데 마치 그를 비웃고 불쌍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가지 마...”모든 소리가 자동차의 시동 소리 속에 파묻혔다."가지 마...제발...”육경한은 눈 밑이 촉촉하게 되었고, 바닥 위로 눈물을 떨구며 바람 속에서 미친 듯이 소리쳤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다.소종이 찾아올 때까지 말이다.그날 밤, 소중은 육경한을 태우고 온 서울을 돌아다니며 소원을 찾았다.하늘가에 동이 트기 시작했다.소종은 조금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대표님, 어젯밤에 술을 많이 마셨으니 먼저 약을 드실래요?”사실 그는 육경한이 너무 많이 마셔서 환각을 일으켰다고 생각한 것이었다.소원 씨가 죽은 지 이미 5년이 되었다.뒷좌석에 앉은 육경한은 검은색 셔츠 위에 흙을 뒤집어쓴 채 풀이 죽어 있었다.그는 손등의 핏자국을 보며 엉뚱하게 대답했다. "그녀가 돌아왔어.”소종은 여전히 그가 헛것을 봤다고 생각했다.'만약 소원 씨가 아직 살아 있다면 대표님 집에 누워있는 사람은 또 누구야?'소종은 감히 계속 생각하지 못했고, 진저리가 났다....아침에 작업실에 가려 하는 윤혜인이 차에 올라탔는데 운전자는 기사가 아니라 곽경천이었다."오빠, 오늘 안 바빠?”"응, 내가 데려다줄게.”곽경천은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았다.
소송은 말하기는 쉽지만 행하기는 너무 어렵다.윤혜인은 이선그룹 법무부는 몇 년 동안 한 번도 소송에서 진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아냈다.이기고 지는 것은 둘째치고 그 긴 시간만 생각해도 머리가 지끈지끈해놓았다.그녀는 지금 이 남자에 대한 기억이 하나도 없는데 남자의 아내라는 신분을 계속 달고 살아야 하는 상황이 정말 그녀를 견딜 수 없게 했다.윤혜인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오빠, 내가 더 해보고 안되면 오빠 말대로 할게.""그래."곽경천은 윤혜인을 부드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조금도 억울한 일이 있으면 꼭 나한테 말해, 알겠지?”"걱정하지 마, 오빠. 그럴 일 없을 거야.”차에서 내리려던 윤혜인이 갑자기 뭔가 생각나는 듯이 물었다."오빠, 주변에 괜찮은 남자 있어?”"응?""괜찮은 사람 있으면 구지윤한테 하나 소개해 줘.”곽경천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구지윤의 뜻이야?”윤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전에 얘기해 봤는데 싫지 않아서 하더라고.”윤혜인의 착각 때문인지 상관 곽경천의 안색이 좋지 않아 보였다. 그는 어이가 없어 말했다."먼저 네 골칫거리부터 해결해.”구지윤 대신에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었다.윤혜인은 육선재 그 미친놈이 다시 찾아왔는데 구지윤을 지키지 못할까 봐 불안해하는 것이었다.차에서 내린 후 그녀는 무엇이 생각났는지 곽경천에게 물었다."남준 오빠 출장 갔다 왔어?”배남준은 곽경천의 오래된 동창이다. 돈 많고 잘생겼는데 심지어 아직 여자 친구도 없다.윤혜인은 곽경천의 내키지 않은 표정을 보고 자신이 나서서 구지윤에게 남자를 찾아줄 생각을 하고 있다."응, 어제 왔다고 문자 받았는데, 왜?”이 말에 윤혜인은 몰래 좋아하며 뭔가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웃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조심히 가.”몸을 돌리자마자 윤혜인은 휴대폰을 꺼내 배남준한테 메시지를 보냈다."남준 오빠, 바빠요?”빠르게 답장이 왔다."안 바빠.""무슨 일 있어?"그는 두 개의 메시지를 보내왔다."오
윤혜인은 이준혁도 여기서 밥을 먹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그가 술 한 병을 보내온 것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지만, 아무튼 별로 좋은 뜻은 아니리라 생각했다. 배남준도 위층에서 기개가 당당하고 잘생긴 남자가 매서운 눈매로 그들의 방향을 주시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혜인아."그가 불렀다.윤혜인은 정신을 차리고 배남준을 보며 대답했다."네?”"무슨 일이야?"이 질문은 그의 도움이 필요한지 물어보는 것이었다.윤혜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오빠. 어서 드세요.”배남준은 일을 캐묻는 스타일이 아니다. 윤혜인이 말하지 않으면 더는 묻지 않는다.웨이터는 옆에 서서 물었다. "아가씨, 이 와인을 따 드릴까요?”윤혜인은 미지근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버리세요.”웨이터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술잔에 따르라는 줄 알고 병을 따서 술잔에 따르려고 하였다.윤혜인은 눈을 치켜들며 말했다. "버리라고요.”그래도 어리둥절해서 하는 종업원을 보고 다시 말했다. "쓰레기통에 버리라고요.”"쓰, 쓰레기통에 버려요?"종업원이 너무 놀란 나머지 말까지 더듬었다."네."윤혜인은 혼자 생각했다. '보기 좋아하면 잘 봐봐, 당신이 준 술이 쓰레기통에 들어가는 것까지."종업원이 몇 번을 시도했지만 그래도 아홉 자리 술을 쓰레기통에 버리려 하니 그는 손까지 벌벌 떨었다.그녀도 종업원이 난처 한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와인을 받아와 말했다."제가 할게요."그러더니 술을 쓰레기통에 깔끔하게 집어 던졌다.위층에서 모든 것을 본 이준혁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회거나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분명 자기한테는 바쁘다고 해놓고 여기서 다른 남자와 데이트하고 있는 것도 모자라 그가 보낸 술마저 쓰레기통에 버리니 말이다.그녀의 그 표정...이준혁은 그녀가 마치 술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던지는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버린 후에 더러운 것을 만졌다는 듯이 손을 닦았다.김성훈은 웃으며 말했다. "준혁아, 혜인 씨는 정말 너
평소에 곽경천한테 아부하는 것처럼 배남준에게 똑같이 했다. 어쨌든 효과는 똑같다."넌 어떤 스타일 좋아하는데?"배남준은 담담한 말투로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요?" 윤혜인이 의아해했다."음, 아름이에게 어떤 아빠를 찾아주고 싶어?”아름이 아빠라...윤혜인은 얼핏 아름이가 좋아하는 그 남자를 떠올렸다.그리고 그녀는 빠르게 이 생각을 접었다. 누가 돼질지언정 그 사람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요구는 한 가지에요, 아름이한테 잘해주면 돼요.”"그럼 너한테는?""나한테?"배남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성격이 좋고 책임감 있고 바른 사람이면 돼요.”배남준은 따뜻한 음료를 윤혜인에게 건네며 물었다. "내가 네 조건에 맞는다고 생각해?”콜록콜록윤혜인은 방금 뜨거운 음료를 마셔서 하마터면 사레들릴 뻔했다.배남준이 일어나 그녀의 등을 다독이려 하자 그녀는 손을 저으며 괜찮다고 하고는 괜찮아졌다.그녀가 어색한 듯 또 한 번 물을 마시자 배남준은 숨김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경천이한테 네가 아름이 아빠를 찾아주고 싶다고 들었는데, 나는 어때?”윤혜인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말했다."남준 오빠...”"혜인아, 나는 감정에 대한 욕구가 별로 없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결혼할 나이가 됐어. 우리는 여러모로 잘 맞고, 아름이도 나를 좋아하잖아. 되게 잘 어울릴 것 같아.”그렇다, 그냥 딱 어울린 것뿐이다. 배남준은 학문에 대해 전문적으로 연구하여 이성과의 애정 이런 것에 대해 줄곧 그다지 관심이 없었는데 그는 줄곧 착실하게 생활하는 습관이 되었다.이제 결혼할 나이가 되니 결혼 상대가 윤혜인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윤혜인도 그의 뜻을 알아들었다. 자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모르겠고, 그냥 그녀가 익숙하고 어울린다고 생각한 것으로 말이다.그녀는 묵묵히 생각해. 보았는데, 결국 그녀도 배남준이 가장 적합한 상대라고 생각했다.적어도 서로 잘 알고 있으니, 그가
그가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윤혜인은 더는 발버둥 치지 않았다.배남준은 고개를 돌려 마주 잡은 두 사람의 손을 보며 물었다."혜인아?”이준혁의 눈빛은 마치 먹잇감을 잡으려는 짐승과 같았다.윤혜인은 두 사람이 이러다가 싸움이라도 날까 봐 두려웠다. 배남준 같이은 공부만 해 온 사람은 싸워봤자이 이 미친놈이랑 싸우면 분명 손해 볼 게 뻔하다고 생각했다."남준 오빠, 먼저 차에 들어가 계세요. 이 사람이랑 몇 마디하고 갈게요.”배남준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 물었다."괜찮겠어?"이 말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던 이준혁이 손에 힘을 더하게 의 손을 더 힘껏 쥐게 했다. 마치 금방이라도 가서 배남준을 때릴 것만 같았다.윤혜인은 황급히 한 걸음 앞으로 나가 두 사람 사이에 섰다. 그리고서서 그를 가로막는 듯이 두 팔을 벌렸다.이 모습은 본 이준혁은 무언가가 심장을 찌르는 것처럼 느껴졌고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윤혜인이 배남준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남준 오빠. 제가 곧 찾아갈게요.”배남준은 그이 남자의 표정을 보고 그녀를 해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가 잘 처리할 수 있다고 믿고 머리를 약간 갸우뚱한 채로 밖으로 나갔다.배남준이 멀어지자 그녀는 시무룩하게 손을 뿌리쳤다."이제 좀 놔줄래요?”이준혁은 손에 힘을 줄였을 뿐, 놓지는 않았다. 그리고 물었다. "이게 네가 바쁘다고 한 이유였어? 다른 남자랑 데이트하는 게?”말 속에 가득한 질투심이 느껴졌다.만약 곽경천이 그녀에게 이준혁이 남자가 예전에 첫사랑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정말 이준혁이이 남자가 자기를 사랑해서 질투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그녀는 웃으며 일부러 대답하지 않고 물었다. "대표님,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이준혁이은 입술을 오므린 채리고 입을 열려고 한 순간하자 그녀가 계속 말했다. "질투 나면 준혁 씨도 다른 여자랑 데이트해요., 상관없어요,. 저는.”이런 상황을 그녀는 개의치 않을뿐더러 두 팔을 들어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참을 수 있으면 그녀는 정말 그를 리스팩해할 것이다.순간, 남자는 안색이 냉랭해졌는데 화날 것 같으면서도 참고 있는 듯하였다."난 바람피운 적이 없어. 너 말고 다른 여자랑 잔 적도 없어.”남자의 고백에 윤혜인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오히려 아주 담담하게 비아냥거렸다."그럼, 대표님이 참 정이 깊은 사람이라고 할 걸 그랬어요. ”"저에게 이렇게 애틋하게 대하다니, 우리 사이에 아이는 어떻게 없어졌는지도 잊게 생겼네요냐고 묻겠어요.”아이 얘기가 나오니, 이준혁의 기세가 조금 약해졌다.그는 약간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뜻밖의 일이었어.”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는 결코 잘못된 결정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그들의 첫 아이에 대한 그의 가슴앓이는 윤혜인 못지않았다."대표님은대표님의 뜻밖으로 대표님의 찐 사랑을 구하러 가셨고, 또 뜻밖으로 위험에 빠진 저를 버리고 가신 거예요?”정말 좋은 핑곗거리라고 윤혜인은 생각했다. 윤혜인은 입꼬리를 조금 올리더니 말했다."그러면 제가 다른 남자랑 데이트하고 친밀한 행동을 하는 것도 뜻밖이라고 하면 되겠네요. ”"우리 둘 다 뜻밖으로 저지른 일인데 대표님도 너무 따지지 마세요.”윤혜인이 한마디씩 할 때마다 남자의 안색은 점점 먹물처럼 어두워졌다."아까 그 남자랑 같이 나를 상대하기로 마음을 굳혔구나?”이준혁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남자가 망가져도 괜찮다는 뜻인가?”이 말은 조금도 포장하지 않은 협박이었다. 그도 더는 감추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는 그 남자를 망가뜨리고, 다시는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게 하려고 했다. 윤혜인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긴장한 기색도 없이 물었다. "대표님, 이건 또 협박인가요?”'또'라는 한 글자 때문에 남자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하지만 그는 부인하지 않고 대답했다. "맞아.”그녀가 다른 남자랑 데이트하는 걸 지켜보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에 비하면 그녀에게 미움을 받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이준혁은 마음이 조금 씁
5년 전에도 윤혜인은 이준혁에게 이혼을 요구한 적이 있었고 그때도 이준혁은 그녀를 억지로 붙잡아두기 위해 갖은 방법을 썼었다.이준혁은 스치듯 떠오른 그 기억에 마음이 복잡해졌다.이때 그들 뒤로 종업원이 음식을 나르면서 지나갔고 이준혁은 그녀를 끌어당기기 위해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하지만 윤혜인은 그가 손을 뻗는 것을 보고 습관적으로 몸을 뒤로 피했다. 그러하다가 잘록한 허리가 식탁 모서리에 부딪혔다.그녀는 아픈 듯 눈살을 찌푸리며 나지막이 신음을 냈다.갈 곳을 잃은 이준혁의 손은 한참 동안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이준혁은 윤혜인이 자기가 다칠지언정 그와 어떠한 접촉도 하고 싶지 않다는 눈빛을 읽고 눈시울이 붉어졌다.“내가 그렇게 싫어?”윤혜인은 눈을 살짝 치켜뜨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당연한 거 아니에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난 당신이 더 싫어요!”그녀의 단호한 말투와 혐오스럽게 바라보는 눈빛은 비수가 되어 그의 심장을 찔렀다.하지만 윤혜인은 그의 기분 따위는 상관하지도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것 같으니 이만 가볼게요, 비켜주세요.”그녀는 이준혁이 계속 앞을 막고 있자, 차가운 말투로 그를 불렀다.“이준혁 씨?”이준혁은 상처를 제대로 입은 듯 침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왜...”“뭐라고요?”“왜 날 이토록 미워하는 거야?”기억상실증에 걸린 윤혜인이 돌아온 후, 두 사람은 두세 번밖에 만나지 못했다.이준혁은 아무런 기억이 없는 윤혜인이 어떻게 자기를, 이 지경까지 미워하고 거부하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그는 심지어 윤혜인이 자기와의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고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이러한 이준혁의 생각을 알 리 없는 윤혜인은 단호한 태도로 답했다.“내 의지와 상관없이 다른 사람이 날 강요하는 것이 너무 싫어요., 게다가 당신은 첫 만남부터 거부감이 들었어요.”윤혜인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준혁에 대한 거부감과 저항심이
소원의 설명을 들은 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명확해진 게 아니니까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도 안전에는 조심해야 되니까 사람 4명 붙여줄게. 유진이는 내가 알아서 보안 강화하고.”육경한은 소원이 거절할 것 같아 그러는지 얼른 한마디 덧붙였다.“너는 지금 홀몸이 아니야. 내가 이러는 것도 다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고.”육경한의 말이 맞았기에 소원도 거절하지 않았다. 이제 홀몸이 아니었고 유진도 엄마가 없어서는 안 되기에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어떻게든 조심하면서 안전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육경한이 골라준 보디가드는 의심할 여지 없는 안전한 사람들이었기에 소원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안상철도 소진용이 제일 믿고 맡긴 사람이었지만 결국 아버지를 배신한 걸 보면 이 세상에 영원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지금 갈 거지? 내가 데려다줄게.”육경한은 소원이 반대하지 않자 경찰이 지정한 병원으로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병원에 도착한 두 사람은 강민혜의 안내를 받아 안지영의 병실에 도착했다.문을 열어보니 안지영이 자그마한 몸집으로 무릎을 꽉 끌어안은 채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종이 인형처럼 삐쩍 마른 안지영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가까이 다가간 소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지영 씨...”안지영이 소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들지도, 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자 소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영 씨, 지금 어떤 기분인지 알아요. 하지만 경찰에게 단서를 줘야만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잡을 수 있어요...”가족을 잃은 슬픔은 소원도 겪어봐서 잘 알았다. 마지막 인사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을 보며 했으니 그 아쉬움과 후회는 사람을 통째로 집어삼킬 만큼 컸다. 소원은 그때 왜 아버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는지, 왜 같이 밥을 먹고 얘기를 나누지 않았는지 후회했지만 그땐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안지영을 다독이던 소원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지영을 꼭 끌어안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안지
소원이 육경한을 불러세우더니 따라서 나오며 병실 문을 닫았다.“현재 일은 내가 오해했어.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소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원은 옳고 그름에 명확한 사람이었기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인정하는 편이었다. 허심탄회한 모습은 쉽게 가질 수 없는 좋은 태도였다.육경한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지만 티가 나지는 않았다.“도와준 거 아니야.”육경한은 연적을 도와줬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것 같았다. 소원도 더는 이 문제에 집착하지 않고 본론으로 돌아왔다.“진아연을 찾고 있다고 들었는데 나도 찾고 있어. 찾으면 바로 나한테 알려줄래?”진아연이 잡혀들어가기 전에 물어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만약 교활한 진아연을 그대로 들여보낸다면 사실을 말하지 않을 게 뻔했고 베일에 싸인 배후의 지도를 받을 수도 있었다. 아무튼 직접 물어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응. 알겠어. 너는 일단 가만히 있어. 내가 찾고 있으니까.”진아연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아무도 몰랐기에 진아연을 찾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 배후는 신비로울 뿐만 아니라 수단도 만만치 않았다.소원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지만 의견을 수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일인데 무슨 일이 있든 직접 헤쳐나가고 싶었다.그때 소원의 핸드폰이 울렸다. 강민혜가 걸어온 전화였다.“소원 씨, 안상철이 죽었어요.”전화를 받자마자 강민혜의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쿵.머릿속에서 뭔가 터져버린 것 같았다.‘삼촌이 왜?’소원의 계획대로라면 안상철은 지금쯤 안지영과 외국에 나가 있어야 하는데 왜 갑자기 죽어버린 건지 의문이었다.‘지영 씨는...’소원이 얼른 물었다.“그러면 지영 씨는요? 딸은 어떻게 됐어요?”강민혜가 말했다.“딸은 안전한 상태지만 충격을 많이 받아서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어요. 입을 열려 하지 않아서 경찰이 무슨 질문을 하든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어요.”“어... 어떻게 이런 일이...”소원은 믿을 수가 없었다. 안
그때 문 뒤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소원이었다.소원도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은 아니었지만 육경한이 이 정도로 양보했다는 것에 놀랐을 뿐이었다.“현재야...”“누나...”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네가 먼저 말해.”소원이 양보하자 서현재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누나, 그거 알아요?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노력한 건 다 안정된 삶을 되찾고 누나랑 행복해지기 위해서였어요. 하지만 지금은...”서현재가 뜸을 들이더니 씁쓸하게 말했다.“지금은 그저 누나가 잘 있기만 하면 다른 건 바라지 않을게요. 하지만 이것만 기억해요. 언제든 누나가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그 자리에 있을게요.”순간 서현재는 능력이든 다른 부분이든 육경한과 비길 자격이 없다는 걸 알아챘다. 앞으로 몇 년간 피타는 노력을 거쳐 원하던 자리까지 올라갈 수는 있지만 육경한처럼 해탈의 경지까지는 오르지 못할 것 같았다. 사람은 일단 사랑에 빠지면 이기적이고 쪼잔해지고 질투에 휩싸이기 마련인데 유진도 아이를 받아들였으니 소원이 이 모든 걸 받아들이는 건 시간 문제라는 생각만 하면 마음이 자꾸만 벼랑 끝으로 떨어졌지만 소원만 행복하다면 서현재로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소원은 그런 서현재를 보며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내뱉은 건 결국 한마디였다.“현재 너는 나의 영원한 가족이야. 유진도 그렇고.”서로에게 위안이 되던 나날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서현재가 유진을 돌봐준 것도 소원은 잊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든 앞으로든 서현재가 원하는 바를 이뤄줄 수가 없었기에 차라리 가족이라는 자리로 남는 편이 제일 나을 것 같았다. 게다가 소원은 이미 서현재에게 다시는 재혼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상태였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면 소원의 중점은 아이를 돌보는 것과 아버지가 만든 회사를 다시 일궈내는 것, 그 외에 다른 건 없었다.“누나, 나도 잊지 않을게요.”서현재는 이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병실로 돌아오는데 육경한이 침대맡에 앉아 깊은 눈동자로 유진을 바
서현재는 육경한이 그를 내쫓는다는 걸 알고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아직 망하진 않았어요.”육경한은 그를 관심해 주는 게 아니라 그가 쫄딱 망해서 서울에서 더는 살 수 없기를 바랐지만 서현재도 유진의 아빠라는 말이 떠올라 톡 까놓고 얘기할 수는 없었다.육경한도 유진의 아빠인 서현재가 너무 궁색해지는 건 싫었다.“서한 가문의 제일 큰 라이벌이 요즘 해성으로 실사하러 갔다고 들었는데.”육경한이 밑도 끝도 없이 이렇게 말하자 서현재가 미간을 찌푸렸다. 서현재는 아직 모르는 소식이었다. 해성에서 새로 거론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는데 이때 라이벌 회사가 해성으로 간다는 같은 프로젝트를 노린다는 의미였다. 라이벌 회사라 같은 영업 범위였기에 경쟁하는 건 정상이지만 토론이 끝나가는 프로젝트를 뺏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서현재가 잠깐 침묵하더니 말했다.“고마워요.”육경한이 콧방귀를 뀌었다.“약육강식인 세상에서는 승자가 왕이 되는 법이야. 능력이 부족한 건 다른 사람 탓해도 쓸모없어.”이 말은 서현재가 육경한이 했던 탄압을 복수라고 생각한다면 어리석다는 말이었다. 육경한이 없었다면 서한 그룹이 흔들릴 때 다른 회사에서 서한 그룹을 노렸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무너져가는 회사라도 떨어질 부스러기는 남아있었다. 게다가 서한 그룹은 완전히 가치를 잃은것도 아니었기에 기회를 노려 서한 그룹의 주문을 앗아간다면 체급을 늘이고 있는 회사엔 큰 이익이 될 수도 있었지만 육경한이 손쓴 덕분에 기회를 노리던 일부 회사들이 떨어져 나갔다. 그 회사들에게 육경한과 경쟁한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으니 말이다.물론 육경한의 실력도 서울을 제패할 만큼의 실력은 아니었지만 그가 사용하는 방식과 수단은 일반인이 감당하기에 매우 힘든 것들이었다. 완전히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는 3시간 만에 한 상장 회사를 파산하게 만든 적도 있으니 육경한을 건드린다는 건 목숨이 아깝지 않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육경한이 손쓴 덕분에 서현재도 숨 돌릴 시간이 있
상황이 매우 긴급했기에 육경한은 몸이 채 낫지도 않았는데 병원으로 나와 곁을 지켰고 소원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결정을 내릴 때가 된 것 같았다. 장기 이식을 기다리는 일은 운이 좋으면 빨리 되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10년을 기다려도 힘들었다. 게다가 유진의 몸 상태는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없었다.소원은 리스크를 감수하고 유진에게 그 알약을 먹이려고 했고 육경한도 동의했다. 소원도 잘 회복하고 있었고 임신까지 했다는 건 약효가 정말 신기하다는 의미였다.약을 먹기 전에 소원과 육경한이 유진의 손을 잡고 격려했다. 유진은 두 사람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용감했고 오히려 웃으며 두 사람을 위로했다.“아빠,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유진이 꼭 나아서 더 좋은 유진이가 될게요.”유진은 그 알약을 먹은 후로 고열에 시달리는 등 이상 반응이 나타났다. 몸이 작기도 했고 체질이 약해서 감당 능력이 어른과는 비길 수 없었다.소원은 속이 바질바질 타들어 갔고 서현재도 소식을 받고 달려왔다. 유진이 커가는 걸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라 그 감정이 여간 두터운 게 아니었기에 유진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달려온 것이다. 육경한은 서현재를 보고도 드물게 화를 내지 않았고 쫓아내지도 않았다. 아마도 서현재의 눈빛에서 유진에 대한 걱정을 보아내서 그런 것 같았다.서현재는 정말 유진을 끔찍이 아꼈고 유진도 서현재를 좋아했기에 육경한은 유진이 깨어났을 때 기분이 조금이라도 더 좋아지길 바랐다. 아버지가 된 후로 육경한은 무슨 결정을 내릴 때 그렇게 차갑지 않았고 감정이라는 게 들어갔다. 아버지가 되면서 얻은 제일 큰 변화였다.지금 이 세 사람에겐 같은 목표가 생겼다. 그것은 바로 유진의 건강이었다.세 사람이 이렇게 화목하게 병원 복도에 앉아 있은 건 처음이었다. 유진이 여기 있으니 병원의 모든 전문가가 대기하고 있었고 조금만 이상을 보여도 바로 응급조치에 들어갔다. 알약을 복용한 이튿날 밤, 유진이 잠에서 깼고 얼굴에 윤기가 감도는 게 상태가 매우 좋아 보였다. 검사 결과
진아연의 죄는 이루 말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런 사람이 아직도 벌을 받지 않고 멀쩡하게 사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소원은 진아연을 꼭 찾아내 벌받게 하고 진아연 뒤에 숨어있는 사람이 누군지 잡아내겠다고 다짐했다.‘그 배후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이런 짓을 벌였는지도 알아내야 해.’소원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안지영이 불안한 표정으로 옆방에서 건너오더니 소원에게 말했다.“언니, 우리 아빠... 아무 잘못 없는 거 맞아요?”소원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지영 씨 아빠 살인범 아니에요. 지영 씨가 있으니까 삼촌이 무슨 결정을 하기 전에 늘 지영 씨를 생각하더라고요. 지영 씨 실망하게 하지 않으려고 삼촌이 엄청 노력한 건 사실이에요.”안지영이 그제야 한시름 놓으며 아버지가 살인범이 아니라는 사실에 기뻐했다.“언니, 언니도 하루빨리 아저씨 죽인 범인 찾아내길 바라요.”소원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나도 그러길 바라고 있어요.”소원에게 남은 유일한 목표는 그 사람을 찾아내어 응당한 벌을 내리는 것이었다. 소원은 미리 친구에게 연락해 지금 당장 두 사람을 데리고 나가게 했다. 안상철의 힘을 빌리면서 소원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든 두 사람을 보호해야 했고 최대한 비밀스럽게 움직여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외국으로 잠깐 피신해 있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소원은 그 자리에서 나오며 강민혜에게 소식을 알렸다. 강민혜는 소원이 안상철을 믿은 것에 놀란 듯 보였다. 다만 오래전 일이라 별다른 증거가 없는 게 문제였다. 예를 들면 안상철이 소진용을 아래로 밀어버리는 장면에 대한 증거가 없었기에 안상철의 말만으로는 죄를 물을 수가 없었다.소원이 말했다.“나는 삼촌 믿어요. 오래 알고 지내기도 했고 오늘 얘기를 나누면서 느꼈는데 내가 예전에 알던 그 삼촌이 맞았어요.”소원이 안상철을 믿기로 한 원인 중 하나였다. 안상철은 소원을 해치려는 생각이 없었고 결국 손을 대지 않았다. 딸을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소진용처럼 마음이 약한 사람일 것
진아연이 소진용을 죽이려 한 이유는 사실 간단했다. 소진용의 죽음으로 육경한과 소원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오해를 만들고 소원이 아버지의 투신을 육경한이 건넨 파일때문이라고 생각해 육경한을 죽도록 원망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면 소원은 육경한을 죽이려고 죽기 살기로 달려들 테고 진아연은 어부지리로 육경한이 제일 사랑하는 여자가 되어 결국엔 육경한과 결혼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다른 사람의 목숨을 해치다니, 진아연은 정말 뱀보다 더 잔인하고 독한 여자였다.사실 소원은 소진용의 죽음을 계속 의심하고 있었다. 사업을 하면서 이런저런 일을 다 겪었을 텐데 딱 봐도 흠집이 많은 계약서 때문에 옥살이할까 봐 투신자살할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소진용은 절대 그렇게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는 소원도 아버지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기에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어머니 전미영까지 쓰러졌으니 타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에 마음이 잿더미가 된 소원은 좀비처럼 살면서 차분하게 정리할 힘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숨을 쉬는 것조차 죄라고 생각했다.모든 걸 털어놓은 안상철은 그제야 홀가분해졌다. 마음의 짐을 떠안고 살면서 털어놓을 엄두를 내지 못한 건 결국 복수가 두려워서였다. 범인이 살인도 마다하지 않았다면 계획을 알고 있는 안상철을 가만둘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범인이 안상철만 노린다면 안상철도 두려울 게 없었지만 돌봐야 할 딸도 있고 모셔야 할 어른도 있었기에 그들까지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할 수는 없었다. 이제 와서 묵혀뒀던 사실을 털어놓은 건 소진용에 대한 죄책감이 커서였지만 다 털어놓음으로써 안상철의 마음도 많이 편해졌다.소원은 이제 안상철의 처지를 알았고 안상철이 왜 진실을 말해주려 하지 않았는지 이해했다.“삼촌, 지금 이대로 출국해서는 안 돼요. 너무 위험할뿐더러 지영 씨도 힘들 거예요. 내가 전화번호 하나 줄 테니까 그 사람한테 연락하면 무사히 출국할 수 있게 도와줄 거예요. 내
안상철은 아직도 그날을 떠올리면 살이 떨렸다.“아래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길래 대표님께 무슨 일이 생겼구나 싶었어요. 하지만 아까만 해도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했던 분이 왜 갑자기 뛰어내린 건지 의문이었죠.”안상철의 머릿속에 그 남자가 떠올랐다. 낯선 사람이었고 다급하게 현장을 벗어난 걸 봐서는 회사 직원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안상철이 소진용의 죽음을 의심한 건 이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 소진용의 컴퓨터가 켜져 있었는데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영상이 아직도 재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소진용이 얼마나 딸을 사랑하는 데 자살할 마음을 먹었다 해도 딸에게 불리한 동영상은 무조건 지우지 켜두고 갔을 리 만무했다. 적어도 다른 사람이 올라와 조사할 것을 대비해 딸의 이미지를 생각해서라도 조치했을 텐데 그럴 겨를조차 없었다는 것이다.하지만 안상철은 이내 여기 있다가 발견되면 무조건 연루된다는 생각에 바로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딸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게 떠올라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허둥지둥 USB를 빼서 사무실에서 나왔다.그 뒤로 시골에 숨어 나올 엄두를 내지 못했고 소진용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 숨어있다가 소식을 알아보러 나왔는데 신문 기사에 소진용이 자살했다고 적혀있는 걸 보고 이 사실이 이대로 묻혔음을 알게 되었다. 안상철은 기회를 노리고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자는 잘했다고 칭찬하며 안상철에게 외국 의사의 연락처를 보내줬다.소식이 잠잠해지자 안상철은 안지영을 데리고 수술하러 나갔지만 약간의 휴양 시간만 가지고 다시 귀국했다. 외국은 적응하기 힘들뿐더러 누구든 총을 소지할 수 있었기에 늘 안지영이 괴롭힘을 위험해질까 봐 전전긍긍하다가 고민 끝에 그래도 국내가 안전할 것 같아 안지영을 데리고 귀국한 것이다.그렇게 5년간 안정된 삶을 살면서 모든 게 지나갔다고 생각했는데 소원이 찾아오면서 더는 숨길 수 없다는 걸 알아챘다.안상철이 하는 말을 듣고 있던 소원이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하지만 그때는 딸을 구하는 데 급급해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눈에 뵈는 것도 없었다.“그러다 결국 그 여자의 요구를 들어주게 됐어요. 해산 회의를 하는 날 모든 사람이 아래층에 모여있을 때 대표님 사무실로 향했죠. 어디로 가면 CCTV를 피할 수 있는지 알고 있어서 나를 발견한 사람은 없었어요. 하지만 사모님은 그날 사무실에 함께 계셔서 그날 마지막으로 대표님을 만난 사람이 나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소원은 전미영도 이 일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다만 전미영은 뒤에 큰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혼수상태에 빠졌고 그렇게 진실은 오랫동안 묻히고 말았다.안상철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 영상을 대표님께 보여주면서 가끔은 어른이 살아있는 게 자식들에겐 짐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죠. 딸이 힘든 거 보기 싫으면 이제 결정할 때가 되었다고 말이에요.”“내 말을 들은 대표님이 한참 동안 말을 아끼셨어요. 그리고 내 예상과는 달리 딸에게 짐이 되지 말아야 한다면서도 딸 혼자서 이 모든 걸 짊어지게 하는 건 아니라면서 딸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은 하지 않겠다고 했어요. 대표님은 자살하면 소원 씨가 충격을 받을까 봐, 모든 걸 자기 잘못으로 돌릴까 봐 걱정했어요. 대표님은 참 좋은 아버지였고 소원 씨를 참 잘 알았죠.”소원의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차오르더니 이내 두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마음이 너무 아파 숨 쉬는 것조차 너무 힘들었다.안상철이 말했다.“그때는 나도 너무 감동해서 내가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자기 딸을 구하겠다고 똑같이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를 해치려 한 내가 너무 미워서 그 자리에서 바로 모든 걸 털어놓았어요. 대표님이 너그럽게 용서해 주면서 하시던 말씀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안 비서, 이번만큼은 내가 용서할게요. 같은 아빠니까 용서하겠지만 앞으로 절대 이런 실수는 하지 마요.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요.”안상철이 눈시울을 붉혔다. 같은 아빠로서 똑같이 지켜야 하는 사람이 있는데 하마터면 아빠의 자격을 잃은 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