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경한이 천천히 다가왔다. 이국땅에서 맨손으로 늑대도 찢어 죽이던 손이 지금은 파킨슨병 환자처럼 주체할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힘겹게 하얀 천이 벗겨지고 순간 무언가 머리를 세게 내리친 듯했다.주위에 적막이 감돌았다.순간 이명이 들린 육경한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그는 감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피투성이가 되어도 얼굴 윤곽이 소원의 얼굴과 일치했다.“말도 안 돼! 내가 네 속임수를 모를 것 같아, 소원!”육경한의 눈은 무서울 정도로 시뻘겋게 빛났고 그는 미친 사람처럼 갈아입힌 시체 옷을 찢었다.소종이 깜짝 놀라며 제지했다.“대표님!”허리 자락을 들어 올리자 가느다란 허리에 유일하게 남은 피부 조각에 작은 붉은 점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이 너덜너덜한 시체랑은 어울리지 않게.“헉!”새빨간 피가 흰 천에 튀었다.육경한은 치명적인 한 방을 맞은 듯 피를 토했다.잔인한 현실은 거짓말을 용납하지 않았다.“아아악!!!”육경한은 너덜너덜해진 시체를 안은 채 바닥에 무릎을 꿇었고 극심한 고통의 비명이 방 전체에 울려 퍼졌다.요란한 소리 뒤엔 숨 막힐 듯한 적막감이 돌았다.기억 속에 단 한 번도 떨어지지 않았던 눈물이 남자의 눈에서 툭툭 떨어졌다.“소원아, 더는 널 가두지 않을게. 돌아와 제발, 곁에 묶어두지 않고 자유롭게 보내줄게… 내가 잘못했어, 내가...”육경한은 미련이 가득한 모습으로 뼈가 다 드러난 머리에 얼굴을 갖다 댔다. 소종은 이 시체를 보고 소름이 돋았다. 솔직히 말해서 진아연의 흉측한 얼굴보다 더 소름 끼쳤다.진자연은 기껏해야 아주 못생겼을 뿐 그래도 숨 쉬고 움직이는 사람이었다.이 시체는 피투성이가 되어 음산한 분위기를 뿜었고, 특히 움푹 파인 두 눈은 사람의 영혼까지 송두리째 뽑아갈 정도로 오싹했다.육경한은 진아연의 소름 끼치는 모습은 싫어하면서 품 안에 피투성이가 된 시체는 내치지 않았다.“소원아, 제발 돌아와, 제발. 내 목숨이라도 줄 테니...”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품에 안긴
윤혜인은 얼떨결에 뒤로 넘어졌고 다행히 이준혁이 제때 잡아주었다.“뭐가 네 건데 이 미친놈아. 소원이는 널 떠나려고 죽었어. 네가 건드리는 걸 원하지 않아. 빨리 그 손 놔!”윤혜인은 여전히 가서 뺏고 싶었지만 이준혁이 뒤에서 가지 못하도록 손을 붙잡고 있었다.오랜 세월을 알고 지낸 이준혁은 육경한이 조금은 미쳐 있고 매우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실수로 윤혜인이 다칠까 봐 두려웠던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충동적으로 가지 마, 네가 다칠 수도 있어.”육경한은 소원의 시체를 안은 채 밤낮으로 자리에 앉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소종이 다그치자 육경한은 얇은 입술로 차가운 말을 뱉어냈다.“집으로 데려갈 거야.”두 사람이 가장 많은 추억을 공유했던 오아시스로 돌아갈 것이다.소종의 표정이 급변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 어떻게 데려가요?”“가서 무덤을 준비하고, 사람 시켜서 얼음 관을 집에 가져오라고 해.”“!!!”미쳤다!대표님이 미쳤다!얼음 관이 집에 가져다 놓을 수 있는 물건이었던가?하지만 차마 더 이상 말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아 육경한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곧 장례식 날짜가 정해지고 윤혜인을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도착했다.가짜 무덤일 뿐 소원의 시신이 들어있지 않다는 사실을 모두 몰랐다.조문이 끝난 후 윤혜인은 육경한을 무시한 채 일찍 자리를 떴다.죽은 다음에야 슬픈 척하는, 전혀 동정할 가치도 없는 놈과 같이 참배하고 싶지 않았다.돌아오는 길에 이준혁의 전화가 울렸다.주훈은 임세희가 몸이 좋지 않다며 그를 만나려 한다는 말을 전했다.윤혜인은 그 말을 듣고 있다가 갑자기 차 문에 손을 뻗었다.끼익-급히 브레이크를 밟아 차가 멈췄고 이준혁은 윤혜인을 뒤로 끌어당기며 소리쳤다.“미쳤어?”윤혜인은 지금 기분이 좋지 않아서 그를 힘껏 뿌리쳤다.“꺼져! 나 건드리지 마!”윤혜인의 엄지가 이준혁의 손등을 스치면서 할퀴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다만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고집
이걸 알리는 건 이준혁에게도 위험한 일이었다.최근 이천수는 갑자기 미친 듯이 권력을 잡기 위해 온갖 꼼수를 부렸다.송휘재는 이천수를 무너뜨릴 결정적 증거를 손에 쥐고 있었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 문서를 몰래 숨겼다.송휘재가 죄를 저질러 구치소에 들어간 후 이천수가 이 난리를 치자 그에게 연락이 왔다. 이준혁이 임세희의 배 속에 있는 아기를 지킬 수 있게 도와준다면 나온 뒤에 무조건 협조하겠다고 했다.이천수의 경계를 늦추기 위해서는 임세희의 아이가 이준혁의 아이라고 착각하게 만들어야 한다.이런 복잡한 일은 윤혜인이 모를수록 좋았고 3개월만 버티면 이천수를 단번에 무너뜨릴 수 있었다.소원의 죽음에 이준혁의 마음은 늘 불안하기만 했다.윤혜인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슬퍼하지 않는 다기엔 조금 전 울면서 죽일 듯이 육경한을 욕했지만, 그렇다고 슬프다고 하기도 이상한 행동이었다.이준혁은 그녀를 지켜보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윤혜인, 넌 날 떠나지 않을 거지?”굳이 선택해야 한다면 그녀를 석 달 동안 계속 가둬두는 게 도망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게다가 윤혜인은 줄곧 이혼을 언급하고 있었다.윤혜인은 그녀의 눈빛에 담긴 소유욕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지금 그를 자극하는 것은 그녀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 반대로 이렇게 말했다.“안 떠나요.”이윽고 그녀는 가녀린 얼굴로 나지막이 부탁했다.“이준혁 씨, 출근 안 해도 되니까 지금처럼 저 가둬두지 않으면 안 돼요? 꼭 죄수가 된 기분이에요.”이준혁은 그녀의 말 속에 담긴 진실을 캐내려는 듯 덤덤하게 바라봤다.윤혜인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소원이도 없어서 충분히 힘든데 매일 날 가둬놓기만 하면, 대체 날 사람으로 보기는 해요?”“그만 울어.”이준혁은 손을 뻗어 그녀의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고 마음이 약해져 이렇게 말했다.“외출은 할 수 있지만 경호원이 동행해야 하고 밖에 너무 오래 있지 마, 알았지?”윤혜인의 작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탈의실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다 됐어?”이준혁의 목소리였다.“다 됐어.”곧이어 치맛자락을 잡고 나온 임세희는 이준혁과 마주쳤다.순간,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화장을 두껍게 한 탓에 얼굴이 새빨개진 것은 그리 티가 나지 않았다.“가자.”이준혁은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그러자 임세희의 얼굴에는 이내 실망한 기색이 역력해졌다. 앞에 있는 전신거울에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선명하게 비췄다.웨딩드레스는 아름다웠지만 그렇게 화장을 두껍게 했음에도 안색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정신병원에서 밤낮없이 겪은 고문과 툭 튀어나온 뱃살로 인해 그녀는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때문에 이준혁이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는 것은 당연했다.뒤이어 둘은 촬영실로 갔다. 이것은 특별한 촬영이었다. 임세희 옆에는 모델 소품이 서 있었는데 최신 기술로 나중에 모델링하여 얼굴을 바꿀 예정이었다.촬영할 때, 이준혁은 창가에 서서 맞은편에 대기하고 있는 차를 확인했다.그것은 그를 미행하기 위해 이천수가 보낸 사람들이었다.이준혁은 일부러 직원들에게 커튼을 얇게 남기게 해 맞은편에서 그와 임세희가 웨딩 촬영을 하는 모습을 몰래 찍을 수 있게 했다.얼마 후 촬영이 끝나고, 이준혁은 임세희와 함께 나가려 했다.그때, 임세희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준혁 오빠...”하지만 곧 자신이 그렇게 부르는 것을 이준혁이 싫어했었다는 사실이 떠올라 그녀는 이내 말을 바꿨다.“준혁 씨, 나랑 진짜로 사진 한 장만 찍어주면 안 돼?”뚫어져라 그녀를 바라볼 뿐, 이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임세희는 이유 없이 긴장하여 목이 멨다.“준혁 씨, 나 요즘 매일 악몽을 꿔. 정신병원은 사람 사는 곳이 아니야. 나 정말 송휘재가 나오기 전에 나와 아이 모두가 무사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그녀는 이준혁이 이 아이를 지키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임세희 본인은 이 아이가 태어나기를 원하지 않았다.때문에 그녀는 한 번도 검진을 받지 않았었다. 당시
이준혁이 지시했다.“몇 명 데리고 가서 방금 탈의실에서 나온 사람을 찾아.”그러자 주훈은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최근 이천수가 계속 이준혁을 미행하고 있는데, 만약 그와 임세희의 관계가 가짜라는 것이 발각되면 틀림없이 이천수가 무언가를 알아낼 것이다.즉시 주훈은 앞뒤 출구를 조용히 봉쇄하게 한 뒤, 사람들을 데리고 건물 안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하지만 스튜디오 건물이 너무 큰 탓에 사람을 찾는 일이 쉽지 않았다. 탈의실이 많기도 하고 큰 소란을 피울 수도 없어서 그들은 반드시 조용히 찾아야 했다.그 시각, 윤혜인은 이미 준비된 검은색 벤에 앉아 있었다.다행히 오늘 도망을 위해 미리 스튜디오의 통로 지도를 손에 넣었기에 그녀는 순조롭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이준혁이 이렇게 신중할 줄이야... 웨딩 촬영 하나에 이런 규모라니.’비록 이준혁에 대한 기대는 일찍이 접었지만, 조금 전의 그 장면은 여전히 그녀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임세희의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면 그 사람 성격상 웨딩 촬영 같은 걸 할 리 없는데... 근데 그럼 나는 왜 속이는 거지? 나한테 더 이상 무슨 이용 가치가 있다고...’마음이 아프고 괴로운 나머지 윤혜인은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머릿속에는 당장 여기를 떠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운전기사는 외국인이라 언어가 통하지 않았고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었다.곧 차는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스튜디오 입구에 다다랐을 때, 윤혜인은 이준혁이 나오는 것을 보고 습관적으로 머리를 숙여 숨으려 했다.그러나 이내 차에 선팅이 되어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는 이준혁이 한 손으로 임세희를 차에 태우는 것을 보았다.어둡고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수려한 외모는 유독 빛났다.지나가는 몇몇 사람들은 넋을 잃고 임세희에게 부러운듯한 눈길을 보냈다.임세희는 계속 배를 손으로 감싸 조심스럽고 소중하게 대하는 모습이었다.“툭, 툭.”굵은 눈물이 윤혜인의 턱 끝에서 땅에 떨어졌다
앞 좌석의 운전사가 좌석째로 뒷좌석으로 밀려오는 바람에 그 피가 전부 뒷좌석으로 흐르게 되었다.윤혜인은 피투성이가 된 채로 바닥에 누워 있었다. 깨진 유리에 이마가 찔려 온 얼굴에 피가 흘렀고 머릿속은 혼미했다.교통사고로 인해 가드레일이 날아가 대교 도로가 차단되었다.그 시각, 검은색 고급차 안에서 임세희는 갑자기 심한 복통을 느꼈고 아래쪽에는 출혈이 보였다.“준혁 씨, 나 배가... 배가 너무 아파...”임세희가 고통스러워하며 신음했다.그러자 이준혁은 눈살을 찌푸리며 즉시 앞서가던 차에 전화를 걸어 지시했다.“멈춰서 좀 기다려.”그 후, 그는 차에서 내려 임세희를 안고 다리를 건너 걸어갔다.벤의 앞부분에 불꽃이 피어올랐다.윤혜인은 뒷좌석에서 고통스럽고 무력하게 창밖을 바라보다가 흐릿하게나마 이준혁의 모습을 보았다.“이준혁!”그녀는 크게 외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입을 여는 것조차 어려웠다.피투성이 손을 힘겹게 뻗어 가까이 있는 창문을 잡으려 하며 윤혜인은 속으로 말했다.“준혁 씨, 우리 아이를 구해줘...”하지만 눈앞에선 임세희를 안은 이준혁이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다.윤혜인은 절망감에 눈을 감았다.그때,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고 윤혜인은 희망을 본 듯 힘겹게 눈을 떴다.그러자 구급차가 아직 멈추기도 전에 ‘쿵’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 불타며 강물 속으로 빠져들었다.곧 차는 차가운 물에 잠기기 시작했다.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차 안으로 들이닥쳤고 윤혜인의 눈가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도망치려 하지 않았다면 교통사고를 당하지도 않았을 텐데...’그녀는 후회했다.‘만약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난 다신 이준혁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거야.’배 속에서 미약한 움직임이 느껴졌고 윤혜인은 그것이 첫 태동이라는 것을 알았다.아기가 엄마에게 힘을 주는 것 같아 심장이 미어지는 듯 아파왔다.“아가야, 미안해! 엄마가 무능해서... 널 데리고 가야 할 것 같아.”...병원.임세희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듣고 이준혁은
남자의 목소리는 마치 며칠 동안 말하지 않은 것처럼 이상하게 낮고 쉰 목소리였다.“흑흑흑...”진아연은 울음을 터뜨렸다.“경한 씨, 저 사람들 나한테 약도 발라 주지 않아요. 얼굴이 너무 아파서 썩어가는 것 같고 계속 고름이 흐르고 있어요... 너무 아파요... 내가 잘못했어요, 제발 용서해줘요, 정말 너무 아파서 죽고 싶을 정도예요...”진아연은 몰랐다. 그녀의 상반신에 있는 화상 부위는 이미 썩어 있는 탓에 치료를 해도 썩은 살을 도려내야 한다는 사실을.그 부분은 큰 흉터로 남게 될 것이며 그녀의 얼굴은 이제 완전히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육경한은 더 이상 그 얼굴을 바라보기도 싫었다.“어디 죽는 것보다 더 아프겠어?”진아연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정말로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워요!”그 상처들은 매일 수천 마리의 개미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가렵고 아팠다. 때로는 그냥 벽에 부딪혀 기절하고 싶을 정도였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녀는 죽고 싶지 않았다. 육경한에게서 많은 돈을 받았고 아직 삶을 즐기지 못했기에 절대 죽을 수 없었다.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났다육경한은 바닥에 칼을 던지고 담담한 목소리로 유혹하듯 말했다.“정말 견딜 수 없다면, 스스로 끝낼 수 있어.”순간, 진아연의 안색이 차갑게 굳어졌다.‘지금 나더러 자살하라는 거야?! 어떻게 이렇게 잔인할 수 있어?!’곧 완전히 절망한 진아연이 울부짖었다.“육경한, 내가 당신 구했잖아. 양심은 어디 국에다 말아먹었어? 날 이렇게 대하면 당신도 기필코 벌을 받을 거야!”그러자 육경한이 벌떡 일어서서는 내려다보며 말했다.“내가 네게 준 보상은 이미 내가 받은 은혜의 값어치를 훨씬 넘었어. 하지만 네 욕심은 끝이 없었고 내 경고도 무시한 채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드렸어.”그의 차가운 눈빛에는 혐오감이 가득 담겨있었다.“너도 네 쓸모없는 오빠처럼 죽어 마땅해!”그 말을 마치고, 남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뒤돌아 나갔다.오늘 그는 진아연에게 칼을 주러 온 것이
‘육경한 당신보다 더 잔혹하고 더러운 수단을 쓰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다고!’진아연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죽어 마땅한 사람은 육경한 바로 당신이야!”침묵이 흘렀다!공기 속에는 무한한 정적이 가득했다!육경한은 얇은 입술을 꽉 다물었고 창백한 얼굴에는 핏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그 말들은 마치 무수한 커다란 돌덩이처럼 하나씩 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러 숨을 쉴 수 없게 만들었다.최근 그는 자신의 마음이 이미 고통에 무뎌졌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진아연의 말들은 다시 한번 그의 가슴을 찔렀다.그렇게 한참을 진정시킨 후, 그는 옆에 있던 검은 옷을 입은 사람에게 낮은 목소리로 명령했다.“이 여자의 혀를 잘라.”“네!”명령이 떨어지자,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점점 진아연에게 다가왔다.‘미쳤어! 악마야, 이건!’진아연은 온몸이 땀에 젖을 정도로 무서웠다. 곧 누군가가 자신의 입을 억지로 벌리려고 할 때 그녀가 외쳤다.“육경한, 당신이 그 여자한테 미안한 일이 이것뿐이라 생각해? 그 여자가 왜 당신을 배신하지 않았다고 계속 말했는지 한번 생각해봐!”그러자 육경한은 갑자기 몸을 돌려세우더니 눈빛을 반짝였다.“뭘 알고 있는데?”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움직임을 멈췄다.진아연의 다리 옆에는 악취가 나는 물웅덩이가 생겼다. 무서워서 결국 오줌을 싼 것이었다.마치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듯 그녀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안 말해줄 거야. 날 풀어주지 않으면 당신은 평생 진실을 알지 못할 거야!”지하실에서는 계속되는 고문이 펼쳐졌다.처절한 비명이 점점 더 커졌지만 진아연은 절대 입을 열지 않았다.사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입을 열면 바로 죽음이 찾아오리라는 것을.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한, 절대 말할 수 없었다.몇 시간 후.육경한은 지하실에서 올라와 잔뜩 붉어진 눈으로 뒤에 있는 검은 옷을 입은 사람에게 명령했다.“입을 열 수 있게 계속 고문을 진행해! 절대 죽게 하지는 말고!”며칠 후, 지하실
소원은 속았다는 생각에 머리가 윙 해졌다. 아니, 소원이 속은 게 아니라 서씨 가문이 너무 교활했고 혹시나 누군가 결혼식에 훼방을 놓을까 봐 만반의 준비를 한 것이다.캔디를 줍던 소원은 그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파티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아니 다 줍지도 않고 어딜 가는 거예요?”화가 잔뜩 난 웨이터가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지금 바로 매니저님 찾아가서 덤벙거리기만 하는 당신을 자르라고 할 거예요.”결혼식 현장.서씨 가문과 육씨 가문이 공동으로 준비한 결혼식이었기에 호화롭기 그지없었고 축하해주러 온 사람도 많았다.사회자의 열정적인 소개와 함께 하얀 드레스를 입은 육연주가 친인척의 손을 잡고 서서히 등장했다.버진 로드의 끝에는 빨간 벨벳 턱시도를 입고 가슴에 꽃을 단 신랑이 보였다. 기다란 체구와 꼿꼿한 자세가 신랑을 더 도도하고 우아해 보이게 했다.육연주는 남자의 준수한 얼굴을 보자마자 심장이 벌렁거렸다. 이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지만 드디어 이 남자를 손에 넣고 서씨 가문 사모님이 되었다.그렇게 신랑 앞까지 걸어간 육연주의 친인척이 육연주의 손을 신랑에게 넘겨줬지만 신랑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잘생긴 얼굴은 육연주의 손을 받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현장의 분위기가 싸늘해지자 사회자가 어색하게 웃으며 귀띔했다.“신랑분, 신부님 손을 잡아주세요.”사회자의 귀띔에도 서현재가 움직이지 않자 하객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어떻게 된 거야. 혹시 신랑은 결혼하기 싫은 거 아니야?”“그러니까. 근데 신부가 약간 막무가내래. 성격이 오만하면서도 사납다고 들었는데 아마도 서씨 가문 도련님이 후회한 게 아닌가 싶다.”“하기 싫은 건 그렇다 치고 그러면 미리 파혼해야 할 거 아니야. 이제 와서 성질부리면 양가 가문의 체면은 어떡해.”“허허. 억지로 결혼시킨 결과라고 봐야지...”“근데 신랑 어딘가 이상하지 않아?”“어디가?”“예전에 신랑을 본적이 있는데 이렇게 멍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말이 좋아 멍하지 서현재는 거의
소원은 바로 대기실 방향으로 향했지만 대기실 앞도 누군가 지키고 있었다.‘서씨 가문 너무 오버하는데?’지금 보면 서씨 가문은 소원만 경계하는 게 아니라 서현재도 같이 경계하고 있었다.‘설마 현재가 뭘 발견했는데 서씨 가문에서 그걸 알아챘나?’소원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걱정되어 들어가 물어보려 했지만 문 앞을 지키고 있는 보디가드들의 경비가 너무 삼엄해 파리 한 마리조차 그냥 들여보내지 않을 것 같았다.너무 다급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던 소원은 그저 조용히 옆에서 기다리다 서현재가 나오면 기회를 찾아볼 생각이었지만 한참 동안 기다려도 대기실은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그렇게 두 시간을 족히 쪼그리고 있다가 발이 저려서 감각을 잃어가는데 대기실을 지키던 보디가드가 하나둘씩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소원은 그제야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황을 살펴보려고 대기실로 다가가 문을 살짝 밀어 보니 문이 그대로 열렸다.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 흔적도 없었다.‘뭐지...?’‘왜 텅 빈 대기실을 지키고 있지?’소원은 자기가 속임에 걸려들었다는 걸 알고 밖으로 뛰어가다 같은 유니폼을 입은 웨이터와 부딪히고 말았다.“아야... 무슨 급한 일이 있다고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는 거예요?”웨이터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언짢은 말투로 말했다.“미안해요. 미안해요...”소원이 얼른 사과하고는 자리를 뜨려는데 웨이터가 그녀를 덥석 잡고는 말했다.“어디 가요? 이거 주워주고 가야죠.”바닥에 캔디가 흩뿌려져 있었다. 소원은 어쩔 수 없이 같이 쪼그리고 앉아 캔디를 한 알씩 줍는데 같이 줍던 웨이터가 소원을 힐끔 쳐다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도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예요? 실수로 부딪혔으면 수습할 생각을 해야지 도망가는 게 어딨어요? 매니저님께 알리면 바로 잘릴 거예요.”소원은 웨이터로 위장한 거라 찍소리도 못하고 머리를 숙인 채 열심히 캔디만 주었다. 이때 결혼식 입장을 알리는 익숙한 음악이 가든을 가득 메웠다. 아무래도 결혼식 파티가 시작된 것
육경한은 냉랭한 표정으로 말했다.“지금 당장 서씨 가문 어르신한테 연락해.”“알겠습니다.”소종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바로 서진태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를 받은 것은 도우미였다..“어르신은 주무시고 계십니다.”소종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정말 대단하네요. 손자가 오늘 결혼했는데 이렇게 일찍 잠이 들다니... 참 태평하시네요!”더욱 짜증 난 듯 육경한의 표정이 굳어졌다.“그럼 연주는? 연주는 전화 연결되나?”곧바로 소종이 육연주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역시나 아무도 받지 않았다.소종은 기이하다는 듯 말했다.“이 집안은 정말 이상하네요. 이렇게 큰 경사날에 왜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는 걸까요? 정말 그리 바쁜 건지.”육경한의 마음속에는 불길한 예감이 스며들었다.그는 조사 중 이번 사건이 서진태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을 발견했지만 아직 명확한 증거는 없었다.직접 손을 대지는 않았겠지만 서진태의 성격상 누군가를 이용했을 가능성은 충분했다.그러나 당시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할 여유가 없었고 사실을 알아채자마자 육경한은 바로 사람을 구하러 갔었다.그런데 이제 소원이 다시 서씨 가문으로 간다는 것은 스스로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나 다름없었다.서진태 같은 교활한 사람이 소원이 육연주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이를 이용해 ‘이익을 위한 희생’같은 일을 꾸민다면 소원이 위험에 빠질 것은 자명했다.그렇게 되면 서진태는 모든 책임을 회피할 수 있었고 심지어 육경한의 보복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그야말로 일석이조의 계략이었다.물론 이 모든 것은 육경한의 추측에 불과했지만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이내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육경한은 무거운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더 빨리 가!”...소원은 아침 일찍 서울로 향하는 차를 탔다.아무리 이른 시간에 출발했어도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후 1시가 넘어 있었다.서씨 가문의 결혼식은 저녁에 열릴 예정이었고 아직 늦지는 않았다.결혼식장은 경비가 삼엄했고 저택 전체가 철통같이 둘러싸여 있었다.때
소종이 말한 대로였다. 그 사람들이 얼마나 흉포한지는 이미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과거 미국에서 목숨 걸고 활동하던 시절, 함께 일하던 친구들에게서 그 지역의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그 사람들이 하지 못할 일이란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듣기만 해도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충격이었다.다행히도 미우 그룹은 그런 사업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한국에서 발붙일 수 없었을 것이다.모두가 알다시피 한국은 이러한 불법적이고 회색 지대의 산업에 대해 엄격히 단속하며 절대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이런 위험한 인물들이 한국에서 발호할 기회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이번에 잡힌 자들은 겨우 작은 졸개들일 뿐, 진짜 배후 세력은 여전히 해외에 있었다.이번 작전으로 큰 타격을 입었지만 이곳에서 은신처가 전부 드러나고 파괴된 이상, 그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하여 소종은 육경한이 소원 때문에 이런 사람들과 엮이는 건 정말 가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소원 씨가 배은망덕한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잖아요. 저는 이제 익숙해졌습니다. 대표님이 아무리 잘해줘도 소원 씨는 결국 배신할 뿐이에요.”소종은 소원의 이름만 나오면 마치 한풀이를 하듯 멈추지 않고 말을 쏟아냈다.“그 여자한테는 마음이란 게 없어요! 제발 다시 속지 마세요, 대표님!”그러나 육경한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엉뚱한 말을 꺼냈다.“오늘이 며칠이지?”그러자 소종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네?”“오늘 며칠이냐고 묻잖아!”육경한의 목소리에 짜증이 배어 있었다.“26일입니다.”육경한은 차갑게 중얼거렸다.“오늘이 서현재의 결혼식 날이야.”그제야 소종은 모든 것을 깨달은 듯 눈이 번쩍 뜨였다.‘아하! 그래서였구나! 아침 일찍 사라진 이유가 다 있었어. 분명 그 서씨를 만나러 간 거야.’육경한을 보자 소종은 더더욱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그 여자는 눈을 뜨자마자 다른 남자 만나러 갔는데 대표님은 그 여자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니... 이거 정말 너무 황당한 막장
“안녕하세요.”달콤한 목소리의 여자가 병실 문을 열며 들어왔다.육경한이 고개를 들어 보니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여자는 육경한을 본 순간 눈빛에 놀라움이 스치더니 다가와 말했다.“안녕하세요. 저는 픽업트럭에 있던 사람 중 하나입니다. 모두를 대표해서 감사 인사를 드리러 왔어요.”그녀는 들고 온 과일 바구니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육경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여자는 갈 생각도 없는 듯했다.구해준 사람이 이렇게 잘생겼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그의 외모는 남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음에도 흠잡을 데 없는 이목구비가 돋보였다.마치 드라마 속에서나 볼 법한 ‘냉철한 대표님’ 같았다.날카로운 눈빛과 잘생긴 얼굴은 그녀 같은 평범한 여자들이 평생 가까이할 수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제가 사과 깎아드릴까요?”여자가 먼저 제안했다.하지만 그녀가 사과를 집어 드는 순간, 육경한이 차갑게 말했다.“필요 없어요. 나가세요.”그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갑고 단호했다.여자는 순간 멈칫하며 사과를 손에 든 채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그러고는 이내 눈가가 붉어졌다.“저는 그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을 뿐이에요.”“고마워할 필요 없어요.”육경한은 냉담하게 대꾸했다.“나는 당신들을 구하려고 한 게 아니었으니까요.”이 말을 듣고 여자는 눈이 휘둥그레졌다.‘우리를 구하려 한 게 아니면 왜 목숨을 걸고 그런 위험한 싸움에 뛰어든 거지? 그토록 무모한 일을...’옆에서 육경한의 말을 듣고 있던 소종은 속이 답답해졌다.최근 구급차에서 찍힌 사진이 온라인에 퍼지며 언론은 육경한이 수많은 여성을 구한 영웅이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그 덕분에 미우 그룹의 이미지는 하늘로 치솟았고 주식도 단기간에 급등했다.지금 병원 밖에는 그를 인터뷰하려는 기자들이 몰려 있었다.하지만 육경한의 이런 모습이 퍼지면 언론의 긍정적인 관심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말 것이었다.하여 소종은 재빨리 상황을 수습했다.“죄송합니다. 저희 대표님이 머리를 다쳐서 지금 조
의료진들이 내려와 먼저 소원을 들것에 눕히고 이어 남자도 들것에 옮겨 눕혔다.구급차에 실려 가는 동안, 소원의 마음속은 기쁨이 가득 차 있었다.그녀는 들것에 누운 채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며 감사의 인사를 전하려 했다.하지만 그 순간 닦여진 남자의 얼굴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날카롭게 솟은 눈썹, 칠흑같이 검은 눈동자, 얇고 날렵한 입술.그 얼굴은 다름 아닌 육경한이었다.순간, 소원의 목에서는 감사 인사가 걸려 나오지 않았다.‘왜 저 사람이 여기 있는 거지? 왜 하필 육경한이...’동시에 커다란 절망감이 온몸에 퍼졌다.‘웃기네. 내가 내 원수를 직접 구했다니... 이게 대체 무슨 어이없는 농담이냐고.’하늘은 정말 잔인하게도 그녀를 조롱하고 있었다.남자 역시 소원이 자신을 알아보았음을 눈치챘다.그러나 그는 심각한 부상을 입고 연기를 너무 많이 들이마셔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소원을 향한 그의 검은 눈동자는 복잡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그는 소원보다 더 큰 충격에 휩싸였고 이 상황을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그는 소원이 자신을 구하려 했을 때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음을 알았다.그녀는 육경한을 철저히 낯선 사람으로 여겼고 그런 그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세상에, 어쩌면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구급차 문이 닫히면서 두 사람의 시야는 차단되었다.소원은 현실이 너무 잔혹하다고 느꼈다.왜 육경한이 여기 있는지, 왜 그녀를 구하려 했는지, 왜 결국 자신이 육경한을 구해야 했는지.모든 것이 이해되지 않았고 이해할 수 없었다.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며 결국 그녀는 생각을 멈추고 천천히 잠에 들었다.육경한도 깊은 잠에 빠져 하루 밤낮을 지나서야 깨어났다.눈을 떴을 때, 그의 침대 곁에는 소종이 눈물을 흘리며 앉아 있는게 보였다.“대표님!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정말 돌아가시는 줄 알았습니다!”소종은 울먹이며 말했다.육경한은 여전히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문지르며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썼다.그러나 소종
남자는 말을 할 수 없었지만 손가락을 살짝 움직여 소원의 말을 들었다는 신호를 보냈다.소원은 말했다.“우리에게 기회는 한 번뿐이에요. 반드시 호흡을 맞춰야 해요. 내가 그쪽 손을 잡고 하나, 둘, 셋 하면 그쪽은 그쪽 인생에서 가장 큰 힘을 다해 저와 함께 나와야 해요.”남자는 손가락을 움직였지만 협조하기를 꺼리는 듯했다.그 위험성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만약 실패하면 두 사람 모두 죽을 것이 분명했다.그러나 지금 소원이 그냥 떠난다면 최소한 한 명은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었다.소원이 남자의 손을 잡으려 하자 남자는 주먹을 꽉 쥔 채 그녀의 시도를 거부했다.그러자 소원이 조급한 목소리로 말했다.“왜 그래요? 시간이 없어요!”뒷좌석은 여전히 불길에 휩싸여 있었고 차의 후미는 이미 골격만 남아 있었다.조금 전 절벽으로 떨어진 은색 미니밴은 검은 잔해로 변해버렸고 그 광경은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끔찍했다.시간은 점점 다급해지고 있었다.남자가 끝내 협조하지 않자 소원은 손바닥을 펼치며 말했다.“제 손바닥에 하고 싶은 말 적어주세요.”남자는 소원의 말을 듣고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손바닥에 급히 글자를 적었다.“가.”그는 그녀에게 빨리 떠나라고, 도망치라고 재촉하고 있었다.그러나 소원은 남자가 손을 빼려 하자 그의 손가락을 꽉 붙잡으며 말했다.“날 믿어줘요. 우리는 반드시 함께 살아남을 거예요.”남자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지만 소원은 포기하지 않았다.“만약 그쪽이 나를 믿지 않는다면 나도 여기 남아 있을게요. 5분도 안 걸려서 이 차는 절벽 아래로 떨어질 거예요. 함께 죽든지, 아니면 살아남든지 선택은 그쪽에게 달렸어요.”남자의 손가락이 갑자기 움찔했다.소원의 말이 그의 마음에 닿은 듯했다.마침내 그는 손을 돌려 소원의 손을 감싸 쥐었다.그것은 동의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행동이었다.곧 소원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말했다.“그럼 시작할게요.”손바닥과 등은 이미 땀으로 흥건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
어떤 여자들은 다리까지 심하게 다쳐 이미 상처가 곪아가고 있었다.더 나은 내일을 꿈꾸며 힘들게 나왔지만 현실은 그녀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가혹했다.다행히 아직 한국의 국경 안에 있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다른 나라로 끌려갔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더 끔찍한 일이 그녀들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고맙다는 말 필요 없어요. 빨리 가요!”소원은 이 말을 남기고 검은색 차량으로 혼자 달려갔다.몸에 상처가 있는 그녀는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고통이 밀려왔지만 지금은 죽음과의 경주였다.단 한 걸음만 늦어도 차는 절벽 아래로 추락할 게 분명했다.겨우 차에 도달했을 때, 차 안이 짙은 연기로 가득 차 있는 게 보였다.다행히 차창이 조금 전 미니밴에서 발사된 총알로 인해 깨져 있었기에 연기가 일부 빠져나가고 있었다.만약 창문이 깨지지 않았다면 차가 추락하거나 폭발하기도 전에 차 안의 사람들이 연기에 질식해 죽었을 것이다.차 안은 정적만이 감돌았다.운전석에는 한 남자가 조용히 누워 있었는데 얼굴이 옆으로 기울어진 상태로 연기에 질식해 의식을 잃은 듯했다.소원은 조심스럽게 차 문을 당겼다.차체는 이미 한계에 다다른 상태라 사소한 움직임 하나로도 균형이 무너져 차가 추락할 수 있었다.자칫하면 그녀 자신도 함께 떨어질 위험이 있었다.그러나 조금 전 이 남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들을 구해냈던 걸 떠올리며 소원은 자신도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결과가 어떻든 간에 그녀는 차 안의 모든 사람들의 기대를 짊어지고 포기하지 않기로 결심했다.그렇게 소원은 움직임을 최대한 부드럽게 하며 조금씩 차 문을 열었다.문이 열리자마자 운전석의 남자가 의식을 잃고 피투성이가 된 채로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그의 이마에서 흐르는 피 때문에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다.소원은 먼저 안전벨트를 풀기 위해 남자의 안전벨트 걸쇠를 손으로 더듬었다.그의 몸은 안전벨트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다행히 앞쪽에 충돌이 없어 에어백이 터지지 않았던 덕분에 상황은 상대적으로
은색 미니밴은 이제 주도권을 잡았고 더 이상 검은색 차량과 정면으로 맞붙지 않으려 했다.그들의 목표는 픽업트럭과 트럭에 타고 있는 사람들 전부였다.만약 그들이 구해진다면 자신들의 기지는 끝장날 게 뻔했다.은색 미니밴은 픽업트럭을 향해 추격하던 중, 다시 한번 총구를 들어 트럭을 조준했다.목표는 단 하나, 트럭을 전복시켜 절벽 아래로 추락하게 만드는 것이었다.소원은 뒤따라오는 차가 계속 자신들을 조준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손은 전보다 더 떨려 안정감을 잃었고 뒷좌석에서는 공포에 질린 듯한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다들 다음 총알이 누구에게 향할지 몰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공포 앞에서 아무도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소원은 뒤차에서 어떤 모션이 나올지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필사적으로 차를 몰아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었다.멈추는 순간 위험은 더 커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은색 미니밴이 다시 픽업트럭을 조준하려는 순간, 검은색 차량이 갑자기 속도를 내어 커브 길에서 추월했다.그러고는 차체를 던져 승합차와 픽업트럭 사이에 끼어들며 총알을 막아냈다.하지만 이번 상황은 심각했다.총알을 막아낸 직후, 검은색 차량의 뒷좌석에서 불꽃이 튀어 오르더니 곧장 거센 불길로 번졌다.뒷좌석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고 차 안은 금세 아수라장이 되었다.미니밴 역시 이 광경에 놀라 멈칫했다.그러나 검은색 차량의 운전자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불길이 치솟는 뒷좌석을 강제로 승합차에 밀어붙였다.결국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미니밴은 중심을 잃고 휘청이다가 산 아래로 추락했다.곧이어 미니밴에서도 거대한 불길이 치솟았다.한편, 검은색 차량은 미니밴을 밀어붙인 여파로 인해 간신히 멈췄으나 뒷좌석은 절벽 밖으로 튀어 나가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상태가 되었다.지금은 운전자가 움직이지 않아도 불길이 더 번지면 차체가 균형을 잃고 결국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게 뻔했다.SUV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