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경한이 천천히 다가왔다. 이국땅에서 맨손으로 늑대도 찢어 죽이던 손이 지금은 파킨슨병 환자처럼 주체할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힘겹게 하얀 천이 벗겨지고 순간 무언가 머리를 세게 내리친 듯했다.주위에 적막이 감돌았다.순간 이명이 들린 육경한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그는 감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피투성이가 되어도 얼굴 윤곽이 소원의 얼굴과 일치했다.“말도 안 돼! 내가 네 속임수를 모를 것 같아, 소원!”육경한의 눈은 무서울 정도로 시뻘겋게 빛났고 그는 미친 사람처럼 갈아입힌 시체 옷을 찢었다.소종이 깜짝 놀라며 제지했다.“대표님!”허리 자락을 들어 올리자 가느다란 허리에 유일하게 남은 피부 조각에 작은 붉은 점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이 너덜너덜한 시체랑은 어울리지 않게.“헉!”새빨간 피가 흰 천에 튀었다.육경한은 치명적인 한 방을 맞은 듯 피를 토했다.잔인한 현실은 거짓말을 용납하지 않았다.“아아악!!!”육경한은 너덜너덜해진 시체를 안은 채 바닥에 무릎을 꿇었고 극심한 고통의 비명이 방 전체에 울려 퍼졌다.요란한 소리 뒤엔 숨 막힐 듯한 적막감이 돌았다.기억 속에 단 한 번도 떨어지지 않았던 눈물이 남자의 눈에서 툭툭 떨어졌다.“소원아, 더는 널 가두지 않을게. 돌아와 제발, 곁에 묶어두지 않고 자유롭게 보내줄게… 내가 잘못했어, 내가...”육경한은 미련이 가득한 모습으로 뼈가 다 드러난 머리에 얼굴을 갖다 댔다. 소종은 이 시체를 보고 소름이 돋았다. 솔직히 말해서 진아연의 흉측한 얼굴보다 더 소름 끼쳤다.진자연은 기껏해야 아주 못생겼을 뿐 그래도 숨 쉬고 움직이는 사람이었다.이 시체는 피투성이가 되어 음산한 분위기를 뿜었고, 특히 움푹 파인 두 눈은 사람의 영혼까지 송두리째 뽑아갈 정도로 오싹했다.육경한은 진아연의 소름 끼치는 모습은 싫어하면서 품 안에 피투성이가 된 시체는 내치지 않았다.“소원아, 제발 돌아와, 제발. 내 목숨이라도 줄 테니...”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품에 안긴
윤혜인은 얼떨결에 뒤로 넘어졌고 다행히 이준혁이 제때 잡아주었다.“뭐가 네 건데 이 미친놈아. 소원이는 널 떠나려고 죽었어. 네가 건드리는 걸 원하지 않아. 빨리 그 손 놔!”윤혜인은 여전히 가서 뺏고 싶었지만 이준혁이 뒤에서 가지 못하도록 손을 붙잡고 있었다.오랜 세월을 알고 지낸 이준혁은 육경한이 조금은 미쳐 있고 매우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실수로 윤혜인이 다칠까 봐 두려웠던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충동적으로 가지 마, 네가 다칠 수도 있어.”육경한은 소원의 시체를 안은 채 밤낮으로 자리에 앉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소종이 다그치자 육경한은 얇은 입술로 차가운 말을 뱉어냈다.“집으로 데려갈 거야.”두 사람이 가장 많은 추억을 공유했던 오아시스로 돌아갈 것이다.소종의 표정이 급변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 어떻게 데려가요?”“가서 무덤을 준비하고, 사람 시켜서 얼음 관을 집에 가져오라고 해.”“!!!”미쳤다!대표님이 미쳤다!얼음 관이 집에 가져다 놓을 수 있는 물건이었던가?하지만 차마 더 이상 말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아 육경한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곧 장례식 날짜가 정해지고 윤혜인을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도착했다.가짜 무덤일 뿐 소원의 시신이 들어있지 않다는 사실을 모두 몰랐다.조문이 끝난 후 윤혜인은 육경한을 무시한 채 일찍 자리를 떴다.죽은 다음에야 슬픈 척하는, 전혀 동정할 가치도 없는 놈과 같이 참배하고 싶지 않았다.돌아오는 길에 이준혁의 전화가 울렸다.주훈은 임세희가 몸이 좋지 않다며 그를 만나려 한다는 말을 전했다.윤혜인은 그 말을 듣고 있다가 갑자기 차 문에 손을 뻗었다.끼익-급히 브레이크를 밟아 차가 멈췄고 이준혁은 윤혜인을 뒤로 끌어당기며 소리쳤다.“미쳤어?”윤혜인은 지금 기분이 좋지 않아서 그를 힘껏 뿌리쳤다.“꺼져! 나 건드리지 마!”윤혜인의 엄지가 이준혁의 손등을 스치면서 할퀴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다만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고집
이걸 알리는 건 이준혁에게도 위험한 일이었다.최근 이천수는 갑자기 미친 듯이 권력을 잡기 위해 온갖 꼼수를 부렸다.송휘재는 이천수를 무너뜨릴 결정적 증거를 손에 쥐고 있었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 문서를 몰래 숨겼다.송휘재가 죄를 저질러 구치소에 들어간 후 이천수가 이 난리를 치자 그에게 연락이 왔다. 이준혁이 임세희의 배 속에 있는 아기를 지킬 수 있게 도와준다면 나온 뒤에 무조건 협조하겠다고 했다.이천수의 경계를 늦추기 위해서는 임세희의 아이가 이준혁의 아이라고 착각하게 만들어야 한다.이런 복잡한 일은 윤혜인이 모를수록 좋았고 3개월만 버티면 이천수를 단번에 무너뜨릴 수 있었다.소원의 죽음에 이준혁의 마음은 늘 불안하기만 했다.윤혜인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슬퍼하지 않는 다기엔 조금 전 울면서 죽일 듯이 육경한을 욕했지만, 그렇다고 슬프다고 하기도 이상한 행동이었다.이준혁은 그녀를 지켜보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윤혜인, 넌 날 떠나지 않을 거지?”굳이 선택해야 한다면 그녀를 석 달 동안 계속 가둬두는 게 도망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게다가 윤혜인은 줄곧 이혼을 언급하고 있었다.윤혜인은 그녀의 눈빛에 담긴 소유욕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지금 그를 자극하는 것은 그녀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 반대로 이렇게 말했다.“안 떠나요.”이윽고 그녀는 가녀린 얼굴로 나지막이 부탁했다.“이준혁 씨, 출근 안 해도 되니까 지금처럼 저 가둬두지 않으면 안 돼요? 꼭 죄수가 된 기분이에요.”이준혁은 그녀의 말 속에 담긴 진실을 캐내려는 듯 덤덤하게 바라봤다.윤혜인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소원이도 없어서 충분히 힘든데 매일 날 가둬놓기만 하면, 대체 날 사람으로 보기는 해요?”“그만 울어.”이준혁은 손을 뻗어 그녀의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고 마음이 약해져 이렇게 말했다.“외출은 할 수 있지만 경호원이 동행해야 하고 밖에 너무 오래 있지 마, 알았지?”윤혜인의 작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탈의실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다 됐어?”이준혁의 목소리였다.“다 됐어.”곧이어 치맛자락을 잡고 나온 임세희는 이준혁과 마주쳤다.순간,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화장을 두껍게 한 탓에 얼굴이 새빨개진 것은 그리 티가 나지 않았다.“가자.”이준혁은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그러자 임세희의 얼굴에는 이내 실망한 기색이 역력해졌다. 앞에 있는 전신거울에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선명하게 비췄다.웨딩드레스는 아름다웠지만 그렇게 화장을 두껍게 했음에도 안색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정신병원에서 밤낮없이 겪은 고문과 툭 튀어나온 뱃살로 인해 그녀는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때문에 이준혁이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는 것은 당연했다.뒤이어 둘은 촬영실로 갔다. 이것은 특별한 촬영이었다. 임세희 옆에는 모델 소품이 서 있었는데 최신 기술로 나중에 모델링하여 얼굴을 바꿀 예정이었다.촬영할 때, 이준혁은 창가에 서서 맞은편에 대기하고 있는 차를 확인했다.그것은 그를 미행하기 위해 이천수가 보낸 사람들이었다.이준혁은 일부러 직원들에게 커튼을 얇게 남기게 해 맞은편에서 그와 임세희가 웨딩 촬영을 하는 모습을 몰래 찍을 수 있게 했다.얼마 후 촬영이 끝나고, 이준혁은 임세희와 함께 나가려 했다.그때, 임세희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준혁 오빠...”하지만 곧 자신이 그렇게 부르는 것을 이준혁이 싫어했었다는 사실이 떠올라 그녀는 이내 말을 바꿨다.“준혁 씨, 나랑 진짜로 사진 한 장만 찍어주면 안 돼?”뚫어져라 그녀를 바라볼 뿐, 이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임세희는 이유 없이 긴장하여 목이 멨다.“준혁 씨, 나 요즘 매일 악몽을 꿔. 정신병원은 사람 사는 곳이 아니야. 나 정말 송휘재가 나오기 전에 나와 아이 모두가 무사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그녀는 이준혁이 이 아이를 지키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임세희 본인은 이 아이가 태어나기를 원하지 않았다.때문에 그녀는 한 번도 검진을 받지 않았었다. 당시
이준혁이 지시했다.“몇 명 데리고 가서 방금 탈의실에서 나온 사람을 찾아.”그러자 주훈은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최근 이천수가 계속 이준혁을 미행하고 있는데, 만약 그와 임세희의 관계가 가짜라는 것이 발각되면 틀림없이 이천수가 무언가를 알아낼 것이다.즉시 주훈은 앞뒤 출구를 조용히 봉쇄하게 한 뒤, 사람들을 데리고 건물 안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하지만 스튜디오 건물이 너무 큰 탓에 사람을 찾는 일이 쉽지 않았다. 탈의실이 많기도 하고 큰 소란을 피울 수도 없어서 그들은 반드시 조용히 찾아야 했다.그 시각, 윤혜인은 이미 준비된 검은색 벤에 앉아 있었다.다행히 오늘 도망을 위해 미리 스튜디오의 통로 지도를 손에 넣었기에 그녀는 순조롭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이준혁이 이렇게 신중할 줄이야... 웨딩 촬영 하나에 이런 규모라니.’비록 이준혁에 대한 기대는 일찍이 접었지만, 조금 전의 그 장면은 여전히 그녀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임세희의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면 그 사람 성격상 웨딩 촬영 같은 걸 할 리 없는데... 근데 그럼 나는 왜 속이는 거지? 나한테 더 이상 무슨 이용 가치가 있다고...’마음이 아프고 괴로운 나머지 윤혜인은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머릿속에는 당장 여기를 떠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운전기사는 외국인이라 언어가 통하지 않았고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었다.곧 차는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스튜디오 입구에 다다랐을 때, 윤혜인은 이준혁이 나오는 것을 보고 습관적으로 머리를 숙여 숨으려 했다.그러나 이내 차에 선팅이 되어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녀는 이준혁이 한 손으로 임세희를 차에 태우는 것을 보았다.어둡고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수려한 외모는 유독 빛났다.지나가는 몇몇 사람들은 넋을 잃고 임세희에게 부러운듯한 눈길을 보냈다.임세희는 계속 배를 손으로 감싸 조심스럽고 소중하게 대하는 모습이었다.“툭, 툭.”굵은 눈물이 윤혜인의 턱 끝에서 땅에 떨어졌다
앞 좌석의 운전사가 좌석째로 뒷좌석으로 밀려오는 바람에 그 피가 전부 뒷좌석으로 흐르게 되었다.윤혜인은 피투성이가 된 채로 바닥에 누워 있었다. 깨진 유리에 이마가 찔려 온 얼굴에 피가 흘렀고 머릿속은 혼미했다.교통사고로 인해 가드레일이 날아가 대교 도로가 차단되었다.그 시각, 검은색 고급차 안에서 임세희는 갑자기 심한 복통을 느꼈고 아래쪽에는 출혈이 보였다.“준혁 씨, 나 배가... 배가 너무 아파...”임세희가 고통스러워하며 신음했다.그러자 이준혁은 눈살을 찌푸리며 즉시 앞서가던 차에 전화를 걸어 지시했다.“멈춰서 좀 기다려.”그 후, 그는 차에서 내려 임세희를 안고 다리를 건너 걸어갔다.벤의 앞부분에 불꽃이 피어올랐다.윤혜인은 뒷좌석에서 고통스럽고 무력하게 창밖을 바라보다가 흐릿하게나마 이준혁의 모습을 보았다.“이준혁!”그녀는 크게 외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입을 여는 것조차 어려웠다.피투성이 손을 힘겹게 뻗어 가까이 있는 창문을 잡으려 하며 윤혜인은 속으로 말했다.“준혁 씨, 우리 아이를 구해줘...”하지만 눈앞에선 임세희를 안은 이준혁이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다.윤혜인은 절망감에 눈을 감았다.그때,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고 윤혜인은 희망을 본 듯 힘겹게 눈을 떴다.그러자 구급차가 아직 멈추기도 전에 ‘쿵’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 불타며 강물 속으로 빠져들었다.곧 차는 차가운 물에 잠기기 시작했다.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차 안으로 들이닥쳤고 윤혜인의 눈가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도망치려 하지 않았다면 교통사고를 당하지도 않았을 텐데...’그녀는 후회했다.‘만약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난 다신 이준혁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거야.’배 속에서 미약한 움직임이 느껴졌고 윤혜인은 그것이 첫 태동이라는 것을 알았다.아기가 엄마에게 힘을 주는 것 같아 심장이 미어지는 듯 아파왔다.“아가야, 미안해! 엄마가 무능해서... 널 데리고 가야 할 것 같아.”...병원.임세희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듣고 이준혁은
남자의 목소리는 마치 며칠 동안 말하지 않은 것처럼 이상하게 낮고 쉰 목소리였다.“흑흑흑...”진아연은 울음을 터뜨렸다.“경한 씨, 저 사람들 나한테 약도 발라 주지 않아요. 얼굴이 너무 아파서 썩어가는 것 같고 계속 고름이 흐르고 있어요... 너무 아파요... 내가 잘못했어요, 제발 용서해줘요, 정말 너무 아파서 죽고 싶을 정도예요...”진아연은 몰랐다. 그녀의 상반신에 있는 화상 부위는 이미 썩어 있는 탓에 치료를 해도 썩은 살을 도려내야 한다는 사실을.그 부분은 큰 흉터로 남게 될 것이며 그녀의 얼굴은 이제 완전히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육경한은 더 이상 그 얼굴을 바라보기도 싫었다.“어디 죽는 것보다 더 아프겠어?”진아연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정말로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워요!”그 상처들은 매일 수천 마리의 개미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가렵고 아팠다. 때로는 그냥 벽에 부딪혀 기절하고 싶을 정도였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녀는 죽고 싶지 않았다. 육경한에게서 많은 돈을 받았고 아직 삶을 즐기지 못했기에 절대 죽을 수 없었다.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났다육경한은 바닥에 칼을 던지고 담담한 목소리로 유혹하듯 말했다.“정말 견딜 수 없다면, 스스로 끝낼 수 있어.”순간, 진아연의 안색이 차갑게 굳어졌다.‘지금 나더러 자살하라는 거야?! 어떻게 이렇게 잔인할 수 있어?!’곧 완전히 절망한 진아연이 울부짖었다.“육경한, 내가 당신 구했잖아. 양심은 어디 국에다 말아먹었어? 날 이렇게 대하면 당신도 기필코 벌을 받을 거야!”그러자 육경한이 벌떡 일어서서는 내려다보며 말했다.“내가 네게 준 보상은 이미 내가 받은 은혜의 값어치를 훨씬 넘었어. 하지만 네 욕심은 끝이 없었고 내 경고도 무시한 채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드렸어.”그의 차가운 눈빛에는 혐오감이 가득 담겨있었다.“너도 네 쓸모없는 오빠처럼 죽어 마땅해!”그 말을 마치고, 남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뒤돌아 나갔다.오늘 그는 진아연에게 칼을 주러 온 것이
‘육경한 당신보다 더 잔혹하고 더러운 수단을 쓰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다고!’진아연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죽어 마땅한 사람은 육경한 바로 당신이야!”침묵이 흘렀다!공기 속에는 무한한 정적이 가득했다!육경한은 얇은 입술을 꽉 다물었고 창백한 얼굴에는 핏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그 말들은 마치 무수한 커다란 돌덩이처럼 하나씩 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러 숨을 쉴 수 없게 만들었다.최근 그는 자신의 마음이 이미 고통에 무뎌졌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진아연의 말들은 다시 한번 그의 가슴을 찔렀다.그렇게 한참을 진정시킨 후, 그는 옆에 있던 검은 옷을 입은 사람에게 낮은 목소리로 명령했다.“이 여자의 혀를 잘라.”“네!”명령이 떨어지자,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점점 진아연에게 다가왔다.‘미쳤어! 악마야, 이건!’진아연은 온몸이 땀에 젖을 정도로 무서웠다. 곧 누군가가 자신의 입을 억지로 벌리려고 할 때 그녀가 외쳤다.“육경한, 당신이 그 여자한테 미안한 일이 이것뿐이라 생각해? 그 여자가 왜 당신을 배신하지 않았다고 계속 말했는지 한번 생각해봐!”그러자 육경한은 갑자기 몸을 돌려세우더니 눈빛을 반짝였다.“뭘 알고 있는데?”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움직임을 멈췄다.진아연의 다리 옆에는 악취가 나는 물웅덩이가 생겼다. 무서워서 결국 오줌을 싼 것이었다.마치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듯 그녀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안 말해줄 거야. 날 풀어주지 않으면 당신은 평생 진실을 알지 못할 거야!”지하실에서는 계속되는 고문이 펼쳐졌다.처절한 비명이 점점 더 커졌지만 진아연은 절대 입을 열지 않았다.사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입을 열면 바로 죽음이 찾아오리라는 것을.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한, 절대 말할 수 없었다.몇 시간 후.육경한은 지하실에서 올라와 잔뜩 붉어진 눈으로 뒤에 있는 검은 옷을 입은 사람에게 명령했다.“입을 열 수 있게 계속 고문을 진행해! 절대 죽게 하지는 말고!”며칠 후, 지하실
그녀가 당한 모든 불행은 전부 이 남자 때문이었다.어머니의 사랑을 받아야 할 그녀는 이리저리 떠돌며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원진우 씨, 지금 무슨 헛된 꿈을 꾸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쪽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엄마와 함께 떠날 거예요. 당신이 우리 엄마를 얼마나 오랫동안 감금했는지, 또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는지 절대 잊지 않았어요.”윤혜인은 진지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당신 같은 사람은 지옥에나 가야 해요!”그러자 원진우는 분노가 가득 찬 윤혜인의 얼굴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이렇게는 대화가 안 되겠군.”그는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괜찮아. 우리 세 식구에게는 앞으로 시간이 많으니까. 내가 얼마나 좋은 아버지인지 천천히 알게 될 거야.”윤혜인은 경계심을 품고 원진우를 응시했지만 그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그러나 곧 그 의도를 알게 되었다.원진우는 손짓으로 도우미를 불러 들어오게 한 후, 지시를 내렸다.“아가씨의 짐을 챙겨서 비행기에 실어라.”윤혜인의 창백해진 얼굴을 보며 원진우는 느긋하게 설명했다.“우린 곧 떠날 거라서.”원진우가 윤아름과 자신을 데리고 떠나려 한다는 말에 윤혜인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그녀는 원진우가 매우 영리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수십 년 동안 윤아름을 감쪽같이 숨길 수 있었던 걸 보면 그의 경계심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었다.이번에 끌려가면 아버지, 큰오빠, 아이들, 모든 가족과 친구들을 평생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몰랐다.“난 안 가요!”윤혜인은 근처에 있던 의자를 집어 던지고 온 힘을 다해 문밖으로 뛰쳐나갔다.그러나 문에 도달하자마자 윤혜인은 원진우에게 팔이 붙잡히고 말았다.곧 원진우는 넥타이로 그녀의 손을 묶은 뒤 그대로 어깨에 들쳐 업었다.시간이 촉박했다. 이미 이곳이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즉시 떠나야 했다.바깥에는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떠나기만 하면 전처럼 윤아름과 윤혜인 모두 꽁꽁 아무도 모르게 숨
윤혜인이 갑자기 손을 들자 봉투가 바닥에 떨어지더니 안에 들어있던 자료가 쏟아져 나왔다. 윤혜인은 자료를 보고 싶은 생각보다는 하얀 나무젓가락을 들어 원진우의 목에 찔러넣고 싶었다. 두 사람은 신장 차이가 있었지만 원진우는 지금 고개를 살짝 아래로 숙이고 있어 윤혜인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지 못했다. 뾰족하게 자른 나무젓가락이 그대로 원진우의 목에 들어갔다. 그러자 피가 나무젓가락을 타고 아래로 후드득 떨어졌다. 하지만 떨어지는 피의 양에서 윤혜인은 글렀다는 걸 알아챘다. 동맥을 찌르지 못했으니 원진우를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원진우는 고개를 들어 아래로 흘러내리는 피를 보더니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윤혜인을 바라봤다.“나 죽이고 싶어요?”원진우가 차분하게 물었다. 까만 눈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고요했다. 윤혜인이 뒤로 물러나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곧 사람들이 나와 엄마를 구하러 들이닥칠 거예요. 도망은 꿈도 꾸지 마요.;원진우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연락이 됐나 보네요.”윤혜인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윤혜인이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원진우는 어떻게 된 일인지 충분히 알아챘을 것이다. 아니면 윤혜인도 이렇게 무모하게 나가기보다는 계속 위장하는 걸 선택했을 것이다.원진우는 목에 꽂혀있는 젓가락을 뽑지도 처리하지도 않은 채 눈썹을 추켜세우며 말했다.“제법인데? 역시 내 핏줄이라 그런가? 배짱이 커.”윤혜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간사하기로 소문난 원진우가 친자 감정을 보지 않았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미 자기 핏줄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원진우는 윤혜인이 아리송한 표정을 짓자 모든 걸 알아차렸다는 듯 큰 소리로 웃었다.“나 속이려 했나 본데...”원진우가 허리를 굽혀 서류를 줍더니 윤혜인에게 건네줬다.“봐... 네 말이 맞아. 너 정말 내 딸이야.”“...”윤혜인은 원진우의 말을 믿을 수가 없어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이내 결과지에 적힌 숫자에 눈길이 갔다.99.99%.그럴
문이 삐걱 열리더니 원진우가 안으로 돌아왔다. 표정이 밝아진 윤아름을 보고 원진우의 표정도 살짝 풀렸지만 그렇다고 단둘이 있는 시간을 연장해 주지는 않았다.“시간 됐어요.”원진우가 덤덤하게 말하더니 윤아름이 의향도 물어보지 않고 윤아름을 번쩍 안아 들고는 방에서 나갔다.다음날.윤아름이 제시간에 나타나자 윤혜인은 그 이야기를 다시 한번 들려줬다. 이야기가 결말까지 이어지자 윤아름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하더니 이성을 잃은 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이거야?”윤아름이 마술을 부리듯 손목에 묶었던 레이스를 풀더니 윤혜인의 얼굴을 보며 헤헤 웃었다.“이거?”윤혜인은 원하던 물건이 윤아름 몸에 숨겨져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손목에 묶여있는 레이스가 그저 장식이라고만 생각했다. 윤혜인은 얼른 자수를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위치 추적기가 아직 들어있었다. 윤혜인은 자수를 더듬거리며 버튼을 찾더니 꾹 눌렀다. 그때 문 쪽에서 들리는 작은 소리에 윤혜인이 얼른 자수를 윤아름의 손목에 묶어줬다.발신기의 발신 기회는 고작 두번이었다. 마지막 한 번을 사용했으니 이제 더는 기회가 없다. 윤혜인은 윤아름이 다시 끌려가는 걸 보고 너무 안타까웠지만 곧 구출될 거라는 희망을 안고 꾹 참았다.한편, 곽경천과 배남준은 북안도를 이 잡듯이 뒤지며 윤혜인을 찾고 있었다. 원진우의 출입국 기록이 없는 걸 봐서는 아직 북안도에 숨어있다는 의미였다.이준혁도 온 힘을 다해 윤혜인을 찾았다. 꼬박 3일을 눈도 붙이지 못하고 돌아치던 이준혁은 의자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잠깐 휴식하려 했다.그때 문이 열리더니 주훈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안으로 들어왔다.“발신기... 발신기에서 또 한 번의 신호를 보내왔습니다.”이준혁이 얼른 외투를 집어 들더니 지하 차고로 향했다. 가는 길에 주훈은 발신기 주변에 위험 물체가 있는지 탐색했다. 이준혁은 이 소식을 곽경천과 배남준에게 알렸다. 세 사람은 서로 다른 곳에서 출발했지만 목표는 똑같이 윤혜인과 윤아름을 구해내는 것이었다.
“아름아, 왜 그래?”원진우가 앞으로 다가와 윤아름이 도대체 왜 그러는지 확인하려 했다. 뒤를 힐끔 돌아본 윤아름이 원진우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며 소리를 지르더니 윤혜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윤아름이 오히려 애가 된 것 같았다.“삼촌, 일단 나가 계세요. 삼촌이 여기 있으면 오히려 자극만 받을 거예요.”윤혜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원진우는 자리를 비우고 싶지 않았지만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윤아름을 보고 한발 양보했다.“윤혜인 씨, 얌전하게만 있으면 절대 다치게 하지 않는다고 약속할게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죠?”원진우가 타이름 반 협박 반으로 말했다. 얕은 수작을 부리면 벌을 내리겠다는 경고였다. 윤혜인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알겠다고 대답하더니 윤아름의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엄마, 엄마, 나 혜인이야...”원진우는 겨우 차분해진 윤아름을 보며 더는 자극하기 싫어 방에서 나갔다. 윤혜인은 방문이 닫히는 걸 똑똑히 보았다. 오전에 방안을 둘러보며 카메라가 없다는 건 이미 확인한 상태였다. 새 거처를 바꿔서 그런지 아니면 윤아름을 데리고 떠날 계획이라 그런지 여기는 카메라가 없었다.“엄마, 미안해요. 아팠죠?”윤혜인이 얼른 윤아름의 등을 확인했지만 다행히 살짝 빨개진 정도였다. 이런 위험한 수를 둔 건 윤아름이 조금만 이상해도 원진우가 신경 쓴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윤아름의 정서를 이용해 원진우를 영향 주려 했다. 다행히 그 방법이 제대로 먹혔다. 윤아름이 아닌 윤혜인이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다면 죽을 정도가 아니고서는 원진우도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윤아름은 여전히 아무 감각이 없는 듯했지만 윤혜인이 친근하게 다가가도 밀어내지는 않았다. 그저 멍한 눈으로 윤혜인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눈을 깜빡였다가 윤혜인이 사라질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 윤혜인은 윤아름의 팔을 잡고 눈물을 뚝뚝 떨궜다.“엄마...”윤혜인은 한참 동안 속 시원하게 울더니 울음을 그치고는 물었다.“엄마, 그때 그 자수는 어디에다 뒀어요?”윤혜인이 물은 자수는
윤혜인이 문 앞으로 다가가 힘껏 문을 두드리며 큰 소리로 불렀다.“엄마... 엄마...”화들짝 놀란 도우미가 얼른 달려와 윤혜인을 막았다.“아가씨,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만하세요.”도우미가 윤혜인을 안더니 힘껏 침대 쪽으로 끌어당겼다. 윤혜인은 문을 두드릴 수 없어 큰 소리로 외칠 수밖에 없었다.“엄마. 엄마. 엄마.”윤혜인이 큰 소리로 외치자 바깥에서 들리던 웅얼거리는 소리가 달라졌다.쿵.문이 격렬하게 흔들렸다.쿵. 쿵. 쿵.휠체어로 문을 힘껏 부수는 소리와 도우미가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사모님... 사모님. 안 됩니다. 이러시면 안 돼요.”윤혜인이 더 높은 소리로 불렀다.“엄마. 엄마. 엄마.”방 안에 있던 도우미가 윤혜인의 입술을 틀어막자 윤혜인이 팔다리를 마구 버둥대며 웅얼웅얼 소리를 냈다.문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흔들리더니 탈칵 하는 소리와 함께 열쇠가 망가졌다. 문이 열리더니 검은 그림자가 안으로 쌩하고 들어왔다. 윤아름은 큰 꽃병 하나를 이고 들어와 윤혜인의 입을 막고 있는 도우미를 내리쳤다. 도우미는 피를 철철 흘리며 바닥에 쓰러지더니 고통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윤아름이 휠체어에서 겨우 일어나 윤혜인을 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윤혜인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정말 오랜만에 엄마를 다시 안아보는 거라 윤혜인도 엄마를 꼭 끌어안았다. 도우미는 바닥에 쓰러져 피를 흘리는 다른 도우미를 보고 윤아름을 말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긴 윤아름은 아까 정신이 살짝 나간 것 같았다. 게다가 원진우가 윤아름을 다치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했기에 과분하게 말렸다가 윤아름이 다치는 날에는 도우미에게 불똥이 튈 수도 있다.이때 소식을 들은 원진우가 다급하게 걸어왔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는 모녀를 보게 되었다. 원진우는 멈칫하더니 그 자리에 멈춰 섰다.울다가 웃기를 반복하는 윤혜인은 정상 같아 보이지 않았지만 적어도 멍하던 예전과 비기면 정서라는 게 생겼다. 윤혜인이 확실히 윤아름을 치유
원진우는 연속 몇 시간이나 윤혜인을 관찰했다. 관찰한 시간이 오래면 오랠수록 원진우는 윤혜인이 자는 모습이 자신과 쏙 빼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낯선 곳에서 안전함을 느끼지 못하고 언제든 경계 태세에 들어가는 것도 말이다.“일어났으면 뭐 좀 먹어요. 도우미에게 이쪽으로 가져다주라고 할게요.”원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차분하고 온화한 말투로 말했다. 만약 윤혜인에게 예전 경력이 없었다면 원진우를 좋은 사람이라고 여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적어도 그렇게 잔혹한 사이코패스 성향을 뒤로 잘 숨긴 것 같았다.윤혜인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었다가는 원망을 이겨내지 못할 것 같았다. 정서도 도라는 게 있어 일정한 포인트까지 닿으면 되지 아니면 원진우가 오히려 경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원진우는 그렇게 생각한다기보다 그저 윤혜인이 보면 볼수록 귀엽다고 생각했다.“혜인 씨, 이름은 엄마가 지어준 거예요?”윤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혜인의 몸에는 금패가 하나 있는데 위에 윤혜인의 이름이 적힌 금패였다. 양아버지가 길다가 그녀를 줍고 주변과 경찰서에 윤혜인이라는 아이가 실종됐는지 물었지만 윤혜인이라는 아이를 잊어버린 적은 없다고 했다. 전에 조사가 어려웠던 건 윤혜인이 원진우의 의해 먼곳에 던져졌기 때문이다. 그때는 기술이 좋지 않아 실종자를 찾는 것도 힘든 일이긴 했다. 게다가 양아버지는 인자한 사람이었기에 윤혜인의 아버지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다고만 말할 뿐 이기적이게 그녀의 모든 걸 묵살하지는 않았다. 원래 이름을 쓰겠다고 한 것도 어느 날 친부모님을 만나면 그들이 자기를 알아볼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듣기 좋네요.”원진우가 말했다. 윤혜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원진우가 뭔가 말하려다가 방향을 잃었다.“일찍 쉬어요.”원진우가 이렇게 말하더니 방에서 빠져나갔다. 도우미가 아침을 가져다줬는데 그야말로 진수성찬이었다. 윤혜인은 그 요리와 밥을 이미 보며 원진우가 아직 독을 타지는 않았을 거라는
윤혜인은 다시 눈을 감으며 잠을 자야 체력을 보존할 수 있다고 자기 자신을 타일렀다. 오빠가 사람을 데리고 오기 전까지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자기 자신을 타일러도 윤혜인의 잠자리는 여전히 뒤숭숭했고 악몽만 연거푸 꿨다. 엄마가 여기 있고, 아버지를 죽인 원수도 여기 있다는 생각에 잠에 들 수가 없었다. 그렇게 겨우 동이 틀 때까지 버틴 윤혜인이 눈을 뜨자 침대맡에 놓인 의자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원진우였다. 윤혜인은 순간 얼굴을 굳히더니 혹시나 하지 말아야 할 잠꼬대를 하면서 마음에 담아뒀던 말을 전부 쏟아낸 게 아닌지 걱정했다.“깼어요?”원진우는 그런 윤혜인을 보며 덤덤하게 물었다. 윤혜인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지만 표정만큼은 매우 덤덤했다.“네.”“어제 잠을 설치는 것 같던데요?”원진우가 대수롭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차갑디차가운 눈동자에 담긴 의미가 뭔지는 알아내기 힘들었다.윤혜인은 혹시나 실수한 건 아닌지 의심되어 심장이 철렁했다. 얼른 머리를 굴린 윤혜인이 주먹을 꽉 움켜쥐고 이렇게 말했다.“네. 잠을 잘 자지 못한 건 맞아요. 어제 겪었던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무섭거든요. 나는 정말 거기서 죽는 줄 알았어요.”윤혜인이 솔직하게 말하자 원진우의 눈빛도 살짝 풀렸다.“내가 그렇게 무서워요?”원진우가 물었다.“네. 너무 무서워요. 나를 세 번이나 죽이려고 했는데 어떻게 안 무섭겠어요?”윤혜인은 두려움을 전혀 위장하지 않았다. 원진우와 말할 때도 몸을 살짝 움츠리며 뒤로 빼고는 경계 태세를 취했다. 이에 원진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평소 곽진명과는 어떻게 지내는데요?”윤혜인은 원진우가 무슨 뜻으로 묻는지 몰라 잠깐 넋을 잃었다.“곽진명과도 이렇게 지내요?”원진우가 물었다. 윤혜인은 그제야 원진우가 자기를 윤혜인의 아버지로 대입해 곽진명과 비교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곽진명을 떠올리자 윤혜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아빠는 내게 무척이나 잘해줬어요. 그래서 한 번도 무섭다고
원진우가 눈길을 돌리더니 차분한 표정으로 묵묵히 다짐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총명한 여자라는 걸 알아챘으니 윤혜인이 한 말과 보이는 행동을 믿으면 함정에 빠지는 거나 다름없다고 말이다. 원진우는 윤아름을 한참 동안 뚫어져라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무릎을 꿇더니 윤아름의 어깨를 잡고 힘껏 흔들었다.“아름아,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윤아름의 동공은 여전히 풀려 있었고 원진우가 무슨 말을 하든 아무 반응이 없었다. 원진우는 윤아름의 어깨를 점점 더 억세게 부여잡더니 이를 악물고 캐물었다.“말해. 말하라고. 있어, 없어?”“...”윤아름은 여전히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흥흥거릴 뿐이었다. 진우희가 그렇게 된 걸 본 다음부터 줄곧 이 상태였다.원진우는 윤아름의 멘탈이 이렇게 약할 줄은 몰랐다. 양자를 총으로 쐈다는 소식부터 먼저 알려주고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있는 진우희의 시신까지 보여줬다. 지하실에 갇혀 있으면서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친 윤아름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미쳐버리고 말았다. 다 자기 잘못이라고 자책하고 있었다. 곽경천도 그녀를 구하려다 총에 맞았고 진우희도 그녀를 도우려다 원진우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이 모든 건 다 그녀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런 생각이 든 순간 이성의 끈이 끊어지고 말았고 그 뒤에 아무리 다시 이어주려 해도 이어지지 않았다. 무의식적인 흥얼거림과 가끔 입가로 흘러내리는 침은 윤아름을 모두가 알아주던 미녀에서 바보로 전락하게 했다. 하지만 미인은 미인인지라 치매에 바보가 되어도 예쁘기만 했다.윤아름은 초점 없는 동공으로 무의식적으로 모니터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때 미약하게나마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윤아름의 눈동자가 다시 초점을 되찾더니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휠체어에서 바닥으로 넘어졌다. 원진우가 부축하려 했지만 윤아름이 그 손을 탁 쳐내더니 미친 듯이 모니터가 있는 쪽으로 기어갔다. 화면으로 보이는 윤혜인은 어느새 몸을 웅크리고 있
그 누구든 오랫동안 보지 못한 아이를 본다면 차분함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게다가 윤아름처럼 아이를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윤아름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멍한 표정이었다.원진우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번에는 정말 연기가 아닌 진짜였다. 윤혜인의 쓸모도 이제 끝났기에 원진우는 윤혜인의 손에 올렸던 발을 뗐고는 입을 열었다.“온도 영하 80도로 내려.”“!”윤혜인이 화들짝 놀랐다. 이건 윤혜인을 산채로 냉동시켜 저번에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내겠다는 뜻이었다. 원진우가 시야에서 점점 멀어지자 윤혜인은 이번 기회를 놓치고 원진우가 문밖으로 나서는 날에는 죽음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어떻게 해야만 살 수 있을까...’윤혜인은 죽기 싫었다. 살아서 엄마를 구하고 오빠가 오기를 기다리고 싶었다. 윤혜인은 윤아름의 얼굴을 떠올리다 갑자기 자지러지게 소리를 질렀다.“원진우!”윤혜인이 성까지 붙여서 부르자 아니나 다를까 원진우가 걸음을 멈추더니 윤혜인을 돌아봤다. 윤혜인은 혀끝을 꽉 깨물었다. 피비린내가 혀끝에서 느껴져서야 윤혜인은 정신을 조금 차릴 수 있었다. 윤혜인의 목은 마르고 갈라져 있었다.“내가 누구 딸인지 생각해 본 적 없어요?”윤혜인을 보는 원진우의 눈빛에서 보기 드물게 두려움이 묻어났다. 비록 몇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윤혜인이 그 눈빛을 캐치하고는 반은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머지 반이야말로 윤혜인이 살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는 핵심이었다. 윤혜인은 원진우에게 고민할 기회도 주지 않고 꿋꿋하게 말했다.“삼촌, 그렇게 총명하신 분이 이미 눈치채고 계신 거 아니에요? 경천 오빠랑 나랑 친 남매가 아닌 건 알고 있잖아요. 아버지가 왜 직접 낳지 않고 남자아이를 입양했는지 생각해 본 적 없어요?”원진우가 윤혜인을 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혹시 지금 내 딸이라고 하고 싶은 거예요?”“머리는 썼는데 나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서 그렇게 쉽게 속지 않아요.”원진우가 이렇게 말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