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 통로.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가 천천히 눈썹을 찌푸렸다.그때, 뒤에서 주훈이 이준혁의 길을 가로막는 어린 여자아이를 보고 서둘러 앞으로 나왔다.그러고는 무릎을 꿇더니 부드럽게 말했다.“꼬마야, 엄마를 못 찾겠니?”아이는 동그란 큰 눈에 풍성한 속눈썹을 갖고 있었는데 핑크색 드레스를 입어 눈처럼 하얀 피부가 더욱 돋보였다.한눈에 보기에도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아이 같았다.그녀는 주훈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머리를 흔드는 그 순진한 모습이 보는 사람의 마음을 사르르 녹일 듯했다.주훈은 목소리를 더 부드럽게 낮추며 말했다.“아저씨가 공항 직원한테 엄마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줄게, 어때?”그러자 아이는 고개를 저으며 발끝을 들어 작은 손으로 이준혁의 손가락을 잡아당겼다.“잘생긴 아저씨, 엄마한테 전화하게 핸드폰 좀 빌려주실 수 있으세요?”무시당한 주훈은 잠시 당황했다.‘어린 애가 외모를 다 가리고 참나...’그는 가볍게 기침하며 찰나의 당혹감을 감추고 부드럽게 말했다.“아저씨가 공항 안내방송 직원에게 데려가 줄게, 그러면 더 빨리 찾을 수 있을 거야. 알겠지?”그 말을 듣자 아이는 실망한 듯 반짝이던 눈빛을 거두고 고개를 끄덕였다.그 눈빛과 동작이 한 사람을 매우 닮아 있었다.순간, 마치 바늘에 찔린 듯 이준혁은 마음이 흠칫 떨렸다. 주훈이 막 아이를 데리고 공항 직원에게 가려는데 그가 낮은 목소리로 제지했다.“잠깐만.”이준혁은 몸을 굽혀 똘망똘망하게 예쁜 눈을 보고 말했다.“아저씨 핸드폰 빌리고 싶어?”“네, 잘생긴 아저씨.”아이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촉촉한 큰 눈으로 이준혁을 바라보았다. 너무나 귀여운 모습에 이준혁의 가슴도 순간 따뜻해졌다.곧 묵묵히 핸드폰을 꺼내주는 이준혁의 행동에 주훈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동안 감정 없는 기계처럼 일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던 대표님이 아이한테 전화를 걸도록 핸드폰을 빌려주다니... 이게 무슨 놀라운 일이야?’아이는 작은 손으로 엄마의 전화번
“네.”“아름이는 올해 몇 살이야?”“아름이 세 살 반이에요.”아름은 반짝이는 큰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대답했다.‘이 아저씨 정말 잘생겼잖아? 만약 이분이 내 아빠가 되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자신을 우러러보는 아이의 그 눈빛에 이준혁의 마음은 또다시 따뜻해졌다.‘세 살 반이라고? 그럼...’이준혁이 다시 물었다“아름이 엄마 성함은 어떻게 되셔?”그러자 아름은 그 큰 눈망울을 더욱 또렷이 떴다.‘아저씨가 우리 엄마의 이름을 묻고 있어! 내가 아빠가 되어줬으면 한다는 걸 눈치챈 건가?’곧이어 아름은 배시시 웃었다.“우리 엄마 이름은...”하지만 아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웬 남자가 말을 끊었다.“곽아름.”아름은 자신의 풀 네임을 듣고 작은 어깨를 움츠리며 입을 막았다. 곽경천은 뒤에서 아름을 안더니 앞에 있는 이준혁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고맙습니다.”그렇게 고개를 들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자, 곽경천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이준혁은 이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주의 깊게 관찰했지만 곽경천은 곧 다시 차분한 표정을 되찾았다. 이때, 공항 직원이 다가와 물었다.“곽경천 씨, 아이는 찾으셨나요?”“찾았어요.”공항 직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다행입니다. 방송을 철회할게요, 그럼.”직원이 떠난 후, 곽경천은 이준혁에게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하고 뒤돌아 떠났다. 이준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곽아름, 곽경천... 부녀지간인가?’주훈은 아이가 가족에게 인도되는 것을 보고 다시 이준혁에게 알렸다.“대표님, 회의 시간이 거의 다 되었습니다.”...곽경천은 아름을 안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아름아, 너 일부러 길 잃어버린 척 한거야?”아름은 죄책감에 고개를 떨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모습에 곽경천은 아무래도 교육이 필요하겠다라고 생각하며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너희 엄마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로 놀랐어. 공항에
휴게실.윤혜인은 아름이를 안으며 다급하게 물었다.“아름아, 너 어디 갔었어?”“아름이 아빠 찾으러...”말하다 말고 아름이가 순간 자신의 입을 막았다.‘아빠 찾으러 갔다고 말하면 엄마가 상처받으실 거야!’곧 커다란 눈에 눈물이 맺힌 채로 아름은 얌전히 잘못을 인정했다.“엄마, 아름이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함부로 돌아다니지 않을게요.”이미 차분해진 윤혜인은 아이의 작은 얼굴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우리 이제 돌아가자. 홍 이모께서 아름이가 가장 좋아하는 어묵 반찬 해놓으셨대.”곽경천은 아름이를 캐리어 위에 앉혀 밀었고 윤혜인은 뒤따라 나갔다.비록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그들의 수려한 외모는 공항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몇몇 사람들은 몰래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고 그것을 인기 있는 쇼츠 플랫폼에 올렸다. 그러자 몇 분 만에 그 동영상은 ‘만화를 뚫고 나온 가족의 등장'이라는 제목으로 인기 순위 1위에 올랐고 빠르게 퍼져나갔다.곧, 남자의 정체가 밝혀졌다.“와, 곽경천을 국내에서 보게 될 줄이야. 런던 대학의 최연소 생물학 교수로 이 사람 강의는 항상 만석이고 돈 받고 대신 줄 서주는 사람도 있다며?”“런던 대학에서 사직하고 국내 최고 대학인 서울대에서 객원 교수로 일하고 있다 들었어.”“근데 교수님이 결혼했었나? 옆에 있는 여자도 우아한 게 엄청 예쁠 것 같아. 아이도 눈이 똘망똘망한게 너무 귀엽고. 너무 부럽다.”“그건 잘 모르겠네. 교수님의 사생활은 공개된 적이 없으니까.”“외모도 그렇고 풍기는 분위기도 그렇고... 이 집안 확실히 대단해. 웬만한 연예인을 능가하는 수준인데?”한 시간 후, 곽경천은 사람을 시켜 모든 게시물을 삭제하게 했다.사람들은 곽경천이 수려한 외모를 가진 젊은 교수라는 것만 알았지, 곽씨 가문이 국제 항공 사업을 하는 부유한 가문이라는 것은 몰랐다.더욱이 5년 전, 이 곽씨 가문이 어릴 적 잃어버린 막내딸을 찾았다는 것도 말이다.그들은 매우 조용하게 지냈고 막내딸의 정체는 공개되지 않아 그녀의
곽경천도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번에 그가 국내로 돌아온 주요 임무는 바로 윤혜인의 작업실을 지원해주는 것과 곽씨 가문의 막내딸인 그녀에게 꼭 맞는, 신뢰할 만한 남자를 찾는 것이었다.하지만 그들의 아버지가 눈여겨본 사람은 하필이면 연씨 가문의 막내아들, 연규성이었다.이는 두 집안이 어렸을 때 장난삼아 결혼을 약속한 것이었지만, 이후 윤혜인이 실종되면서 무산되었다.곽경천은 아버지가 연씨 집안의 가훈을 중요시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들의 가훈은 연씨 가문 남자는 평생 한 사람만 선택하고 결혼하면 평생 이혼하지 않으며 재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연규성의 평판이 그리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오빠, 이렇게 입고 가면 맞선 자리에 어울리지 않아.”그러자 곽경천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며 “응?”이라고 물었다.“무슨 무사처럼 보여, 마치 싸우러 가는 것 같아.”윤혜인이 피식 웃으며 그의 옷차림을 평가하자 곽경천이 눈을 가늘게 떴다.“그런 의도도 없지 않아 있어.”그 말에 윤혜인은 놀라서 멍해졌다.‘정말 싸우러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단 말이야?’그가 연규성을 얼마나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식당에 거의 도착했을 때, 곽경천의 핸드폰이 울렸다. 학교 일로 꽤 급한 전화였다.“오빠, 바쁜 일 있으면 먼저 가. 나 혼자서 먹고 갈게.”“안 돼, 그래도 네가 먼저지.”“나를 너무 어린 애처럼 대하지 마. 괜찮으니까 빨리 가서 일 봐.”그러자 곽경천은 시간을 확인했다.“그럼 빨리 처리하고 8시에 데리러 올게.”윤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곽경천이 바라보는 가운데 차에서 내렸다.식당 안.웨이터가 문을 두드리며 차를 따르기 위해 들어왔다. 매혹적인 외모의 소유자 연규성은 옆에 있는 냉담한 남자에게 불만을 토로했다.“형, 이번엔 나 좀 도와줘. 아버지가 나한테 과부를 찾아줬다니까? 과부도 모자라서 아이도 있대. 이렇게 멋지고 잘생긴 나더러 과부랑 결혼하고 아이의 아빠가 되라니, 너무 웃긴 소리지 않아?”연규성
윤혜인은 연규성이 갑자기 자신을 잡아당기자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그러자 연규성이 그녀의 허리를 한 손으로 잡았다.“이 여자가 감히 어디서...”늘 거침없이 말하던 연규성도 지금 이 순간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여자를 만져본 적은 많지만 이렇게 가늘고 부드러운 허리는 한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그의 시선은 윤혜인의 아름다운 얼굴에 고정되었다. 반짝이는 눈, 붉은 입술, 이 아름다움은 이루 말로 묘사할 수 없었다.마치 새벽이슬 같기도 저녁노을 같기도 한 것이 모든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듯했다.‘아니, 어떻게 이렇게 완벽하게 생긴 사람이 있을 수 있지?’그러나 더 생각할 틈도 없이 갑자기 극심한 고통이 느껴졌다.방어술을 잘 배워둔 윤혜인이 무릎으로 그의 복부를 강하게 찬 뒤 발로 그의 발등을 밟은 것이었다.“젠장!”고통에 연규성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그는 아랫배를 감싸며 발을 들어 올렸다.그리고 윤혜인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이 더러운 변태!”그 부드러운 목소리 때문인지 두 사람의 실랑이는 오히려 연인 간의 싸움처럼 보였다.그렇게 돌아서 나가려다, 윤혜인은 한 번 더 날카로운 시선을 마주쳤다.그 살벌한 눈동자에 심장이 빠르게 뛰어 그녀는 서둘러 문을 열고 나갔다.연규성이 쫓아가려 했지만 이준혁이 그의 한 손을 단단히 잡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이윽고 문이 또다시 열리더니 빠르게 닫혔다.이제 연규성은 어깨까지 아팠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는 의자에 기댄 뒤 손바닥에 남아있는 향기를 느끼며 생각에 잠겼다.‘미친년! 누구더러 변태라고 하는 거야? 이렇게 잘 생겼으니까 여자들이 알아서 다가오는 거지, 변태는 무슨.”한편 레스토랑 문 앞.윤혜인은 차에 오르며 곽경천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돌아가고 있음을 알리려 했다. “윤혜인!”그때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핸드폰 속 곽경천의 목소리와 동시에 말이다.윤혜인은 그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그래도 뒤를 돌아보았다. 바로 그 살벌한 눈빛을 하고 있던 남자였다.그
동작이 하도 빠른 탓에 윤혜인은 미처 반응할 틈도 없었다.“개자식... 읍....”윤혜인이 화난 목소리로 항의했지만 눈앞의 미친 남자는 그녀의 입을 막아버렸다.그는 강제로 그녀를 차에 눌러 앉히고 큰 손으로 윤혜인의 턱을 꽉 쥐어 그녀의 입과 이빨의 움직임을 제어하며 물려고 해도 물지 못하게 했다.윤혜인은 손과 발을 모두 사용해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이준혁이 산처럼 그녀를 짓눌러 숨쉬기도 어려웠다.하도 할퀸 탓에 손에 끈적한 피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지만 이준혁은 아픔을 느끼지 못한 듯 여전히 윤혜인의 마른 몸을 꼭 껴안고 놓지 않았다.윤혜인은 그의 몸이 떨리고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폭풍 같은 키스가 끝난 후, 그는 머리를 윤혜인의 목덜미에 얹고 마치 큰 늑대개처럼 그녀의 목을 핥았다.그러고는 낮게 중얼거렸다.“혜인아, 드디어 돌아왔구나...”강렬한 익숙함에 윤혜인은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목덜미에는 남자의 눈에서 떨어진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대체 누구지?’주훈은 차에 오르자마자 윤혜인이 이준혁에게 눌려 키스를 당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바로 가림판 상승 버튼을 눌렀다.가림판이 올라가기 전, 남자는 새빨개진 눈을 한 채 차갑게 말을 뱉었다.“빨리 가.”주훈은 잔뜩 흥분한 이준혁에게 더 묻지도 않고 곧장 스카이 별장 쪽으로 차를 몰았다.여전히 머리가 혼란스러웠던 윤혜인은 커다란 눈으로 앞에 있는 낯선 남자를 바라보았다.그 눈빛에는 놀람, 혐오, 낯섦이 있었지 오랜만에 다시 만난 기쁨이나 반가움은 없었다.그녀를 바라보는 이준혁의 눈 속에는 욕망의 빛이 떠올랐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며 점점 더 강렬해졌다.윤혜인은 그의 굶주린 늑대 같은 시선에 놀라 몸을 지킬 무언가를 찾으며 급하게 대응했다.“이거 완전히 미친 사람이네?! 잘생기면 강간이 죄가 안 되는 줄 알아? 우리 오빠 태권도 9단이거든? 우리 오빠 오면 당신 죽을 줄 알아.”남자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듣지 않았다.아니, 듣고 싶지도 않았고 이
크리스털 전등이 남자의 얼굴을 스쳐지나 벽에 부딪히더니 ‘펑’하는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그리고 이준혁의 얼굴은 크리스털 조각에 긁혀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윤혜인은 맨발로 뛰쳐나가려다 바닥에 깔린 깨진 크리스털 조각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밟아버렸다.“조심해!”이준혁은 윤혜인을 보호하기 위해 무릎을 방패 삼아 땅에 무릎을 꿇고, 그녀가 자신의 손바닥을 밟게 했다.이윽고 속도를 주체하지 못한 윤혜인이 그대로 발을 내디디자 크리스털 조각이 이준혁의 손등에 깊이 파고들이 피가 쏟아졌다.하지만 이준혁은 아픔을 느끼지 못한 듯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아 들고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흐르는 피가 베이지색 침대 시트에 뚝뚝 떨어졌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고 오히려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지긋이 바라봐주었다.죽은 줄 알았던 사람, 매일 밤 그의 꿈에 나타나던 사람이 지금 눈앞에 살아 있다.“윤혜인, 윤혜인...” 남자는 길고 날렵한 몸으로 그녀를 감싸 안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피 묻은 손바닥으로 그녀의 얼굴, 눈썹, 입술을 더듬으며 그는 떨리는 손길로 윤혜인의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꼭 마치 이런 방식으로 그녀가 꿈속이 아닌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듯 말이다.“혜인아.”남자의 얇은 입술이 그녀의 이마에 닿았다. 그러더니 윤혜인을 품에 안은 채 이준혁이 낮게 중얼거렸다.“날 미워해도 싫어해도 좋아. 하지만 날 떠나지만 마...”코끝에 퍼지는 것은 온통 피 냄새였다.그런 남자를 밀어내려 윤혜인이 힘껏 힘을 써보았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하는 수 없이 윤혜인은 이준혁의 어깨를 세게 물었다.그러나 근육이 너무도 단단해 그녀의 이가 아플 정도였다.이준혁은 낮게 신음소리를 내며 살짝 뒷걸음질 쳤다.“아파?”정말이지 윤혜인은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어이가 없어서 정말. 왜 하필이면 이런 정신병자랑 마주친 거야?!’그녀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이만 놔줘요! 집에 가야 하니까!”하지만 이준혁이
그 말을 들은 윤혜인이 단호하게 말했다.“아니, 당신은 내 남편 아니야.”“맞는지 아닌지 내가 보여줄게!”곧 이준혁은 윤혜인을 침대에 밀어놓고 손목을 꽉 잡더니 그녀의 위에 올라탔다.눈빛은 마치 맛있는 사냥감을 포획한 야수 같았다.“이거 놔!”윤혜인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남자를 피하려 했고 그의 통제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그렇게 이준혁이 몸을 숙이려는 순간.“쿵!”큰 소리와 함께 문이 발에 차여 열렸다.그러더니 한 사람이 달려와 이준혁을 땅에 눕히고 그의 머리를 강타하는 것이었다.이준혁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팔을 한 번 휘둘러 쉽게 몸을 뒤집었다. 그러자 방금까지 우세했던 남자는 목이 무릎에 눌려 얼굴이 창백해졌다.윤혜인은 땅에 누워있는 사람을 확인하고 눈빛이 흔들렸다.그러고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탁자 위에 있는 재떨이를 집어 들어 이준혁의 뒤통수를 세게 내리쳤다.“퍽!”방심한 채로 공격을 받은 이준혁이 결국 손을 놓았다.재떨이는 바닥에 굴러갔지만, 다행히 단단한 재질이라 부서지지는 않았다.그러나 부서진 건 이준혁의 마음이었다.“툭...툭...”뒤통수에서 피가 흘러 바닥에 떨어졌다.그는 마치 영화의 슬로 모션 장면처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그 잘생긴 얼굴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가득했다.윤혜인의 얼굴에는 걱정하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 시선은 이준혁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그녀는 다친 이준혁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달려와 그를 밀쳐냈다.힘이 세지 않았는데도 이준혁은 마치 벼락을 맞은 것처럼 마음이 무너져 그녀가 밀쳐내는 대로 놔두었다.윤혜인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땅에 쓰러진 남자를 일으켜 세웠다.“오빠... 오빠... 괜찮아?”“괜찮아.”곽경천은 이미 그녀와 함께 일어나 있었다.실제로 그는 매우 훌륭한 싸움 솜씨를 가지고 있었지만, 너무 조급한 나머지 조금 전 밖에서 네 명의 경호원들과 자신의 안위를 걱정할 새 없이 싸우는 바람에 부상을 당한 뒤였다.때문에 안으로 들어왔을 때 그는 당
소원은 속았다는 생각에 머리가 윙 해졌다. 아니, 소원이 속은 게 아니라 서씨 가문이 너무 교활했고 혹시나 누군가 결혼식에 훼방을 놓을까 봐 만반의 준비를 한 것이다.캔디를 줍던 소원은 그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파티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아니 다 줍지도 않고 어딜 가는 거예요?”화가 잔뜩 난 웨이터가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지금 바로 매니저님 찾아가서 덤벙거리기만 하는 당신을 자르라고 할 거예요.”결혼식 현장.서씨 가문과 육씨 가문이 공동으로 준비한 결혼식이었기에 호화롭기 그지없었고 축하해주러 온 사람도 많았다.사회자의 열정적인 소개와 함께 하얀 드레스를 입은 육연주가 친인척의 손을 잡고 서서히 등장했다.버진 로드의 끝에는 빨간 벨벳 턱시도를 입고 가슴에 꽃을 단 신랑이 보였다. 기다란 체구와 꼿꼿한 자세가 신랑을 더 도도하고 우아해 보이게 했다.육연주는 남자의 준수한 얼굴을 보자마자 심장이 벌렁거렸다. 이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지만 드디어 이 남자를 손에 넣고 서씨 가문 사모님이 되었다.그렇게 신랑 앞까지 걸어간 육연주의 친인척이 육연주의 손을 신랑에게 넘겨줬지만 신랑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잘생긴 얼굴은 육연주의 손을 받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현장의 분위기가 싸늘해지자 사회자가 어색하게 웃으며 귀띔했다.“신랑분, 신부님 손을 잡아주세요.”사회자의 귀띔에도 서현재가 움직이지 않자 하객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어떻게 된 거야. 혹시 신랑은 결혼하기 싫은 거 아니야?”“그러니까. 근데 신부가 약간 막무가내래. 성격이 오만하면서도 사납다고 들었는데 아마도 서씨 가문 도련님이 후회한 게 아닌가 싶다.”“하기 싫은 건 그렇다 치고 그러면 미리 파혼해야 할 거 아니야. 이제 와서 성질부리면 양가 가문의 체면은 어떡해.”“허허. 억지로 결혼시킨 결과라고 봐야지...”“근데 신랑 어딘가 이상하지 않아?”“어디가?”“예전에 신랑을 본적이 있는데 이렇게 멍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말이 좋아 멍하지 서현재는 거의
소원은 바로 대기실 방향으로 향했지만 대기실 앞도 누군가 지키고 있었다.‘서씨 가문 너무 오버하는데?’지금 보면 서씨 가문은 소원만 경계하는 게 아니라 서현재도 같이 경계하고 있었다.‘설마 현재가 뭘 발견했는데 서씨 가문에서 그걸 알아챘나?’소원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걱정되어 들어가 물어보려 했지만 문 앞을 지키고 있는 보디가드들의 경비가 너무 삼엄해 파리 한 마리조차 그냥 들여보내지 않을 것 같았다.너무 다급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던 소원은 그저 조용히 옆에서 기다리다 서현재가 나오면 기회를 찾아볼 생각이었지만 한참 동안 기다려도 대기실은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그렇게 두 시간을 족히 쪼그리고 있다가 발이 저려서 감각을 잃어가는데 대기실을 지키던 보디가드가 하나둘씩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소원은 그제야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황을 살펴보려고 대기실로 다가가 문을 살짝 밀어 보니 문이 그대로 열렸다.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 흔적도 없었다.‘뭐지...?’‘왜 텅 빈 대기실을 지키고 있지?’소원은 자기가 속임에 걸려들었다는 걸 알고 밖으로 뛰어가다 같은 유니폼을 입은 웨이터와 부딪히고 말았다.“아야... 무슨 급한 일이 있다고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는 거예요?”웨이터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언짢은 말투로 말했다.“미안해요. 미안해요...”소원이 얼른 사과하고는 자리를 뜨려는데 웨이터가 그녀를 덥석 잡고는 말했다.“어디 가요? 이거 주워주고 가야죠.”바닥에 캔디가 흩뿌려져 있었다. 소원은 어쩔 수 없이 같이 쪼그리고 앉아 캔디를 한 알씩 줍는데 같이 줍던 웨이터가 소원을 힐끔 쳐다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도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예요? 실수로 부딪혔으면 수습할 생각을 해야지 도망가는 게 어딨어요? 매니저님께 알리면 바로 잘릴 거예요.”소원은 웨이터로 위장한 거라 찍소리도 못하고 머리를 숙인 채 열심히 캔디만 주었다. 이때 결혼식 입장을 알리는 익숙한 음악이 가든을 가득 메웠다. 아무래도 결혼식 파티가 시작된 것
육경한은 냉랭한 표정으로 말했다.“지금 당장 서씨 가문 어르신한테 연락해.”“알겠습니다.”소종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바로 서진태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를 받은 것은 도우미였다..“어르신은 주무시고 계십니다.”소종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정말 대단하네요. 손자가 오늘 결혼했는데 이렇게 일찍 잠이 들다니... 참 태평하시네요!”더욱 짜증 난 듯 육경한의 표정이 굳어졌다.“그럼 연주는? 연주는 전화 연결되나?”곧바로 소종이 육연주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역시나 아무도 받지 않았다.소종은 기이하다는 듯 말했다.“이 집안은 정말 이상하네요. 이렇게 큰 경사날에 왜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는 걸까요? 정말 그리 바쁜 건지.”육경한의 마음속에는 불길한 예감이 스며들었다.그는 조사 중 이번 사건이 서진태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을 발견했지만 아직 명확한 증거는 없었다.직접 손을 대지는 않았겠지만 서진태의 성격상 누군가를 이용했을 가능성은 충분했다.그러나 당시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할 여유가 없었고 사실을 알아채자마자 육경한은 바로 사람을 구하러 갔었다.그런데 이제 소원이 다시 서씨 가문으로 간다는 것은 스스로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나 다름없었다.서진태 같은 교활한 사람이 소원이 육연주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이를 이용해 ‘이익을 위한 희생’같은 일을 꾸민다면 소원이 위험에 빠질 것은 자명했다.그렇게 되면 서진태는 모든 책임을 회피할 수 있었고 심지어 육경한의 보복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그야말로 일석이조의 계략이었다.물론 이 모든 것은 육경한의 추측에 불과했지만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이내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육경한은 무거운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더 빨리 가!”...소원은 아침 일찍 서울로 향하는 차를 탔다.아무리 이른 시간에 출발했어도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후 1시가 넘어 있었다.서씨 가문의 결혼식은 저녁에 열릴 예정이었고 아직 늦지는 않았다.결혼식장은 경비가 삼엄했고 저택 전체가 철통같이 둘러싸여 있었다.때
소종이 말한 대로였다. 그 사람들이 얼마나 흉포한지는 이미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과거 미국에서 목숨 걸고 활동하던 시절, 함께 일하던 친구들에게서 그 지역의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그 사람들이 하지 못할 일이란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듣기만 해도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충격이었다.다행히도 미우 그룹은 그런 사업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한국에서 발붙일 수 없었을 것이다.모두가 알다시피 한국은 이러한 불법적이고 회색 지대의 산업에 대해 엄격히 단속하며 절대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이런 위험한 인물들이 한국에서 발호할 기회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이번에 잡힌 자들은 겨우 작은 졸개들일 뿐, 진짜 배후 세력은 여전히 해외에 있었다.이번 작전으로 큰 타격을 입었지만 이곳에서 은신처가 전부 드러나고 파괴된 이상, 그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하여 소종은 육경한이 소원 때문에 이런 사람들과 엮이는 건 정말 가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소원 씨가 배은망덕한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잖아요. 저는 이제 익숙해졌습니다. 대표님이 아무리 잘해줘도 소원 씨는 결국 배신할 뿐이에요.”소종은 소원의 이름만 나오면 마치 한풀이를 하듯 멈추지 않고 말을 쏟아냈다.“그 여자한테는 마음이란 게 없어요! 제발 다시 속지 마세요, 대표님!”그러나 육경한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엉뚱한 말을 꺼냈다.“오늘이 며칠이지?”그러자 소종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네?”“오늘 며칠이냐고 묻잖아!”육경한의 목소리에 짜증이 배어 있었다.“26일입니다.”육경한은 차갑게 중얼거렸다.“오늘이 서현재의 결혼식 날이야.”그제야 소종은 모든 것을 깨달은 듯 눈이 번쩍 뜨였다.‘아하! 그래서였구나! 아침 일찍 사라진 이유가 다 있었어. 분명 그 서씨를 만나러 간 거야.’육경한을 보자 소종은 더더욱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그 여자는 눈을 뜨자마자 다른 남자 만나러 갔는데 대표님은 그 여자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니... 이거 정말 너무 황당한 막장
“안녕하세요.”달콤한 목소리의 여자가 병실 문을 열며 들어왔다.육경한이 고개를 들어 보니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여자는 육경한을 본 순간 눈빛에 놀라움이 스치더니 다가와 말했다.“안녕하세요. 저는 픽업트럭에 있던 사람 중 하나입니다. 모두를 대표해서 감사 인사를 드리러 왔어요.”그녀는 들고 온 과일 바구니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육경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여자는 갈 생각도 없는 듯했다.구해준 사람이 이렇게 잘생겼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그의 외모는 남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음에도 흠잡을 데 없는 이목구비가 돋보였다.마치 드라마 속에서나 볼 법한 ‘냉철한 대표님’ 같았다.날카로운 눈빛과 잘생긴 얼굴은 그녀 같은 평범한 여자들이 평생 가까이할 수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제가 사과 깎아드릴까요?”여자가 먼저 제안했다.하지만 그녀가 사과를 집어 드는 순간, 육경한이 차갑게 말했다.“필요 없어요. 나가세요.”그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갑고 단호했다.여자는 순간 멈칫하며 사과를 손에 든 채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그러고는 이내 눈가가 붉어졌다.“저는 그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을 뿐이에요.”“고마워할 필요 없어요.”육경한은 냉담하게 대꾸했다.“나는 당신들을 구하려고 한 게 아니었으니까요.”이 말을 듣고 여자는 눈이 휘둥그레졌다.‘우리를 구하려 한 게 아니면 왜 목숨을 걸고 그런 위험한 싸움에 뛰어든 거지? 그토록 무모한 일을...’옆에서 육경한의 말을 듣고 있던 소종은 속이 답답해졌다.최근 구급차에서 찍힌 사진이 온라인에 퍼지며 언론은 육경한이 수많은 여성을 구한 영웅이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그 덕분에 미우 그룹의 이미지는 하늘로 치솟았고 주식도 단기간에 급등했다.지금 병원 밖에는 그를 인터뷰하려는 기자들이 몰려 있었다.하지만 육경한의 이런 모습이 퍼지면 언론의 긍정적인 관심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말 것이었다.하여 소종은 재빨리 상황을 수습했다.“죄송합니다. 저희 대표님이 머리를 다쳐서 지금 조
의료진들이 내려와 먼저 소원을 들것에 눕히고 이어 남자도 들것에 옮겨 눕혔다.구급차에 실려 가는 동안, 소원의 마음속은 기쁨이 가득 차 있었다.그녀는 들것에 누운 채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며 감사의 인사를 전하려 했다.하지만 그 순간 닦여진 남자의 얼굴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날카롭게 솟은 눈썹, 칠흑같이 검은 눈동자, 얇고 날렵한 입술.그 얼굴은 다름 아닌 육경한이었다.순간, 소원의 목에서는 감사 인사가 걸려 나오지 않았다.‘왜 저 사람이 여기 있는 거지? 왜 하필 육경한이...’동시에 커다란 절망감이 온몸에 퍼졌다.‘웃기네. 내가 내 원수를 직접 구했다니... 이게 대체 무슨 어이없는 농담이냐고.’하늘은 정말 잔인하게도 그녀를 조롱하고 있었다.남자 역시 소원이 자신을 알아보았음을 눈치챘다.그러나 그는 심각한 부상을 입고 연기를 너무 많이 들이마셔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소원을 향한 그의 검은 눈동자는 복잡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그는 소원보다 더 큰 충격에 휩싸였고 이 상황을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그는 소원이 자신을 구하려 했을 때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음을 알았다.그녀는 육경한을 철저히 낯선 사람으로 여겼고 그런 그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세상에, 어쩌면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구급차 문이 닫히면서 두 사람의 시야는 차단되었다.소원은 현실이 너무 잔혹하다고 느꼈다.왜 육경한이 여기 있는지, 왜 그녀를 구하려 했는지, 왜 결국 자신이 육경한을 구해야 했는지.모든 것이 이해되지 않았고 이해할 수 없었다.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며 결국 그녀는 생각을 멈추고 천천히 잠에 들었다.육경한도 깊은 잠에 빠져 하루 밤낮을 지나서야 깨어났다.눈을 떴을 때, 그의 침대 곁에는 소종이 눈물을 흘리며 앉아 있는게 보였다.“대표님!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정말 돌아가시는 줄 알았습니다!”소종은 울먹이며 말했다.육경한은 여전히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문지르며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썼다.그러나 소종
남자는 말을 할 수 없었지만 손가락을 살짝 움직여 소원의 말을 들었다는 신호를 보냈다.소원은 말했다.“우리에게 기회는 한 번뿐이에요. 반드시 호흡을 맞춰야 해요. 내가 그쪽 손을 잡고 하나, 둘, 셋 하면 그쪽은 그쪽 인생에서 가장 큰 힘을 다해 저와 함께 나와야 해요.”남자는 손가락을 움직였지만 협조하기를 꺼리는 듯했다.그 위험성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만약 실패하면 두 사람 모두 죽을 것이 분명했다.그러나 지금 소원이 그냥 떠난다면 최소한 한 명은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었다.소원이 남자의 손을 잡으려 하자 남자는 주먹을 꽉 쥔 채 그녀의 시도를 거부했다.그러자 소원이 조급한 목소리로 말했다.“왜 그래요? 시간이 없어요!”뒷좌석은 여전히 불길에 휩싸여 있었고 차의 후미는 이미 골격만 남아 있었다.조금 전 절벽으로 떨어진 은색 미니밴은 검은 잔해로 변해버렸고 그 광경은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끔찍했다.시간은 점점 다급해지고 있었다.남자가 끝내 협조하지 않자 소원은 손바닥을 펼치며 말했다.“제 손바닥에 하고 싶은 말 적어주세요.”남자는 소원의 말을 듣고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손바닥에 급히 글자를 적었다.“가.”그는 그녀에게 빨리 떠나라고, 도망치라고 재촉하고 있었다.그러나 소원은 남자가 손을 빼려 하자 그의 손가락을 꽉 붙잡으며 말했다.“날 믿어줘요. 우리는 반드시 함께 살아남을 거예요.”남자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지만 소원은 포기하지 않았다.“만약 그쪽이 나를 믿지 않는다면 나도 여기 남아 있을게요. 5분도 안 걸려서 이 차는 절벽 아래로 떨어질 거예요. 함께 죽든지, 아니면 살아남든지 선택은 그쪽에게 달렸어요.”남자의 손가락이 갑자기 움찔했다.소원의 말이 그의 마음에 닿은 듯했다.마침내 그는 손을 돌려 소원의 손을 감싸 쥐었다.그것은 동의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행동이었다.곧 소원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말했다.“그럼 시작할게요.”손바닥과 등은 이미 땀으로 흥건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
어떤 여자들은 다리까지 심하게 다쳐 이미 상처가 곪아가고 있었다.더 나은 내일을 꿈꾸며 힘들게 나왔지만 현실은 그녀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가혹했다.다행히 아직 한국의 국경 안에 있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다른 나라로 끌려갔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더 끔찍한 일이 그녀들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고맙다는 말 필요 없어요. 빨리 가요!”소원은 이 말을 남기고 검은색 차량으로 혼자 달려갔다.몸에 상처가 있는 그녀는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고통이 밀려왔지만 지금은 죽음과의 경주였다.단 한 걸음만 늦어도 차는 절벽 아래로 추락할 게 분명했다.겨우 차에 도달했을 때, 차 안이 짙은 연기로 가득 차 있는 게 보였다.다행히 차창이 조금 전 미니밴에서 발사된 총알로 인해 깨져 있었기에 연기가 일부 빠져나가고 있었다.만약 창문이 깨지지 않았다면 차가 추락하거나 폭발하기도 전에 차 안의 사람들이 연기에 질식해 죽었을 것이다.차 안은 정적만이 감돌았다.운전석에는 한 남자가 조용히 누워 있었는데 얼굴이 옆으로 기울어진 상태로 연기에 질식해 의식을 잃은 듯했다.소원은 조심스럽게 차 문을 당겼다.차체는 이미 한계에 다다른 상태라 사소한 움직임 하나로도 균형이 무너져 차가 추락할 수 있었다.자칫하면 그녀 자신도 함께 떨어질 위험이 있었다.그러나 조금 전 이 남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들을 구해냈던 걸 떠올리며 소원은 자신도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결과가 어떻든 간에 그녀는 차 안의 모든 사람들의 기대를 짊어지고 포기하지 않기로 결심했다.그렇게 소원은 움직임을 최대한 부드럽게 하며 조금씩 차 문을 열었다.문이 열리자마자 운전석의 남자가 의식을 잃고 피투성이가 된 채로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그의 이마에서 흐르는 피 때문에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다.소원은 먼저 안전벨트를 풀기 위해 남자의 안전벨트 걸쇠를 손으로 더듬었다.그의 몸은 안전벨트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다행히 앞쪽에 충돌이 없어 에어백이 터지지 않았던 덕분에 상황은 상대적으로
은색 미니밴은 이제 주도권을 잡았고 더 이상 검은색 차량과 정면으로 맞붙지 않으려 했다.그들의 목표는 픽업트럭과 트럭에 타고 있는 사람들 전부였다.만약 그들이 구해진다면 자신들의 기지는 끝장날 게 뻔했다.은색 미니밴은 픽업트럭을 향해 추격하던 중, 다시 한번 총구를 들어 트럭을 조준했다.목표는 단 하나, 트럭을 전복시켜 절벽 아래로 추락하게 만드는 것이었다.소원은 뒤따라오는 차가 계속 자신들을 조준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손은 전보다 더 떨려 안정감을 잃었고 뒷좌석에서는 공포에 질린 듯한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다들 다음 총알이 누구에게 향할지 몰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공포 앞에서 아무도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소원은 뒤차에서 어떤 모션이 나올지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필사적으로 차를 몰아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었다.멈추는 순간 위험은 더 커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은색 미니밴이 다시 픽업트럭을 조준하려는 순간, 검은색 차량이 갑자기 속도를 내어 커브 길에서 추월했다.그러고는 차체를 던져 승합차와 픽업트럭 사이에 끼어들며 총알을 막아냈다.하지만 이번 상황은 심각했다.총알을 막아낸 직후, 검은색 차량의 뒷좌석에서 불꽃이 튀어 오르더니 곧장 거센 불길로 번졌다.뒷좌석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고 차 안은 금세 아수라장이 되었다.미니밴 역시 이 광경에 놀라 멈칫했다.그러나 검은색 차량의 운전자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불길이 치솟는 뒷좌석을 강제로 승합차에 밀어붙였다.결국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미니밴은 중심을 잃고 휘청이다가 산 아래로 추락했다.곧이어 미니밴에서도 거대한 불길이 치솟았다.한편, 검은색 차량은 미니밴을 밀어붙인 여파로 인해 간신히 멈췄으나 뒷좌석은 절벽 밖으로 튀어 나가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상태가 되었다.지금은 운전자가 움직이지 않아도 불길이 더 번지면 차체가 균형을 잃고 결국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게 뻔했다.SUV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