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경천도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번에 그가 국내로 돌아온 주요 임무는 바로 윤혜인의 작업실을 지원해주는 것과 곽씨 가문의 막내딸인 그녀에게 꼭 맞는, 신뢰할 만한 남자를 찾는 것이었다.하지만 그들의 아버지가 눈여겨본 사람은 하필이면 연씨 가문의 막내아들, 연규성이었다.이는 두 집안이 어렸을 때 장난삼아 결혼을 약속한 것이었지만, 이후 윤혜인이 실종되면서 무산되었다.곽경천은 아버지가 연씨 집안의 가훈을 중요시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들의 가훈은 연씨 가문 남자는 평생 한 사람만 선택하고 결혼하면 평생 이혼하지 않으며 재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연규성의 평판이 그리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오빠, 이렇게 입고 가면 맞선 자리에 어울리지 않아.”그러자 곽경천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며 “응?”이라고 물었다.“무슨 무사처럼 보여, 마치 싸우러 가는 것 같아.”윤혜인이 피식 웃으며 그의 옷차림을 평가하자 곽경천이 눈을 가늘게 떴다.“그런 의도도 없지 않아 있어.”그 말에 윤혜인은 놀라서 멍해졌다.‘정말 싸우러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단 말이야?’그가 연규성을 얼마나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식당에 거의 도착했을 때, 곽경천의 핸드폰이 울렸다. 학교 일로 꽤 급한 전화였다.“오빠, 바쁜 일 있으면 먼저 가. 나 혼자서 먹고 갈게.”“안 돼, 그래도 네가 먼저지.”“나를 너무 어린 애처럼 대하지 마. 괜찮으니까 빨리 가서 일 봐.”그러자 곽경천은 시간을 확인했다.“그럼 빨리 처리하고 8시에 데리러 올게.”윤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곽경천이 바라보는 가운데 차에서 내렸다.식당 안.웨이터가 문을 두드리며 차를 따르기 위해 들어왔다. 매혹적인 외모의 소유자 연규성은 옆에 있는 냉담한 남자에게 불만을 토로했다.“형, 이번엔 나 좀 도와줘. 아버지가 나한테 과부를 찾아줬다니까? 과부도 모자라서 아이도 있대. 이렇게 멋지고 잘생긴 나더러 과부랑 결혼하고 아이의 아빠가 되라니, 너무 웃긴 소리지 않아?”연규성
윤혜인은 연규성이 갑자기 자신을 잡아당기자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그러자 연규성이 그녀의 허리를 한 손으로 잡았다.“이 여자가 감히 어디서...”늘 거침없이 말하던 연규성도 지금 이 순간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여자를 만져본 적은 많지만 이렇게 가늘고 부드러운 허리는 한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그의 시선은 윤혜인의 아름다운 얼굴에 고정되었다. 반짝이는 눈, 붉은 입술, 이 아름다움은 이루 말로 묘사할 수 없었다.마치 새벽이슬 같기도 저녁노을 같기도 한 것이 모든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듯했다.‘아니, 어떻게 이렇게 완벽하게 생긴 사람이 있을 수 있지?’그러나 더 생각할 틈도 없이 갑자기 극심한 고통이 느껴졌다.방어술을 잘 배워둔 윤혜인이 무릎으로 그의 복부를 강하게 찬 뒤 발로 그의 발등을 밟은 것이었다.“젠장!”고통에 연규성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그는 아랫배를 감싸며 발을 들어 올렸다.그리고 윤혜인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이 더러운 변태!”그 부드러운 목소리 때문인지 두 사람의 실랑이는 오히려 연인 간의 싸움처럼 보였다.그렇게 돌아서 나가려다, 윤혜인은 한 번 더 날카로운 시선을 마주쳤다.그 살벌한 눈동자에 심장이 빠르게 뛰어 그녀는 서둘러 문을 열고 나갔다.연규성이 쫓아가려 했지만 이준혁이 그의 한 손을 단단히 잡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이윽고 문이 또다시 열리더니 빠르게 닫혔다.이제 연규성은 어깨까지 아팠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는 의자에 기댄 뒤 손바닥에 남아있는 향기를 느끼며 생각에 잠겼다.‘미친년! 누구더러 변태라고 하는 거야? 이렇게 잘 생겼으니까 여자들이 알아서 다가오는 거지, 변태는 무슨.”한편 레스토랑 문 앞.윤혜인은 차에 오르며 곽경천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돌아가고 있음을 알리려 했다. “윤혜인!”그때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핸드폰 속 곽경천의 목소리와 동시에 말이다.윤혜인은 그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그래도 뒤를 돌아보았다. 바로 그 살벌한 눈빛을 하고 있던 남자였다.그
동작이 하도 빠른 탓에 윤혜인은 미처 반응할 틈도 없었다.“개자식... 읍....”윤혜인이 화난 목소리로 항의했지만 눈앞의 미친 남자는 그녀의 입을 막아버렸다.그는 강제로 그녀를 차에 눌러 앉히고 큰 손으로 윤혜인의 턱을 꽉 쥐어 그녀의 입과 이빨의 움직임을 제어하며 물려고 해도 물지 못하게 했다.윤혜인은 손과 발을 모두 사용해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이준혁이 산처럼 그녀를 짓눌러 숨쉬기도 어려웠다.하도 할퀸 탓에 손에 끈적한 피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지만 이준혁은 아픔을 느끼지 못한 듯 여전히 윤혜인의 마른 몸을 꼭 껴안고 놓지 않았다.윤혜인은 그의 몸이 떨리고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폭풍 같은 키스가 끝난 후, 그는 머리를 윤혜인의 목덜미에 얹고 마치 큰 늑대개처럼 그녀의 목을 핥았다.그러고는 낮게 중얼거렸다.“혜인아, 드디어 돌아왔구나...”강렬한 익숙함에 윤혜인은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목덜미에는 남자의 눈에서 떨어진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대체 누구지?’주훈은 차에 오르자마자 윤혜인이 이준혁에게 눌려 키스를 당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바로 가림판 상승 버튼을 눌렀다.가림판이 올라가기 전, 남자는 새빨개진 눈을 한 채 차갑게 말을 뱉었다.“빨리 가.”주훈은 잔뜩 흥분한 이준혁에게 더 묻지도 않고 곧장 스카이 별장 쪽으로 차를 몰았다.여전히 머리가 혼란스러웠던 윤혜인은 커다란 눈으로 앞에 있는 낯선 남자를 바라보았다.그 눈빛에는 놀람, 혐오, 낯섦이 있었지 오랜만에 다시 만난 기쁨이나 반가움은 없었다.그녀를 바라보는 이준혁의 눈 속에는 욕망의 빛이 떠올랐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며 점점 더 강렬해졌다.윤혜인은 그의 굶주린 늑대 같은 시선에 놀라 몸을 지킬 무언가를 찾으며 급하게 대응했다.“이거 완전히 미친 사람이네?! 잘생기면 강간이 죄가 안 되는 줄 알아? 우리 오빠 태권도 9단이거든? 우리 오빠 오면 당신 죽을 줄 알아.”남자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듣지 않았다.아니, 듣고 싶지도 않았고 이
크리스털 전등이 남자의 얼굴을 스쳐지나 벽에 부딪히더니 ‘펑’하는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그리고 이준혁의 얼굴은 크리스털 조각에 긁혀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윤혜인은 맨발로 뛰쳐나가려다 바닥에 깔린 깨진 크리스털 조각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밟아버렸다.“조심해!”이준혁은 윤혜인을 보호하기 위해 무릎을 방패 삼아 땅에 무릎을 꿇고, 그녀가 자신의 손바닥을 밟게 했다.이윽고 속도를 주체하지 못한 윤혜인이 그대로 발을 내디디자 크리스털 조각이 이준혁의 손등에 깊이 파고들이 피가 쏟아졌다.하지만 이준혁은 아픔을 느끼지 못한 듯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아 들고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흐르는 피가 베이지색 침대 시트에 뚝뚝 떨어졌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고 오히려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지긋이 바라봐주었다.죽은 줄 알았던 사람, 매일 밤 그의 꿈에 나타나던 사람이 지금 눈앞에 살아 있다.“윤혜인, 윤혜인...” 남자는 길고 날렵한 몸으로 그녀를 감싸 안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피 묻은 손바닥으로 그녀의 얼굴, 눈썹, 입술을 더듬으며 그는 떨리는 손길로 윤혜인의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꼭 마치 이런 방식으로 그녀가 꿈속이 아닌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듯 말이다.“혜인아.”남자의 얇은 입술이 그녀의 이마에 닿았다. 그러더니 윤혜인을 품에 안은 채 이준혁이 낮게 중얼거렸다.“날 미워해도 싫어해도 좋아. 하지만 날 떠나지만 마...”코끝에 퍼지는 것은 온통 피 냄새였다.그런 남자를 밀어내려 윤혜인이 힘껏 힘을 써보았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하는 수 없이 윤혜인은 이준혁의 어깨를 세게 물었다.그러나 근육이 너무도 단단해 그녀의 이가 아플 정도였다.이준혁은 낮게 신음소리를 내며 살짝 뒷걸음질 쳤다.“아파?”정말이지 윤혜인은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어이가 없어서 정말. 왜 하필이면 이런 정신병자랑 마주친 거야?!’그녀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이만 놔줘요! 집에 가야 하니까!”하지만 이준혁이
그 말을 들은 윤혜인이 단호하게 말했다.“아니, 당신은 내 남편 아니야.”“맞는지 아닌지 내가 보여줄게!”곧 이준혁은 윤혜인을 침대에 밀어놓고 손목을 꽉 잡더니 그녀의 위에 올라탔다.눈빛은 마치 맛있는 사냥감을 포획한 야수 같았다.“이거 놔!”윤혜인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남자를 피하려 했고 그의 통제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그렇게 이준혁이 몸을 숙이려는 순간.“쿵!”큰 소리와 함께 문이 발에 차여 열렸다.그러더니 한 사람이 달려와 이준혁을 땅에 눕히고 그의 머리를 강타하는 것이었다.이준혁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팔을 한 번 휘둘러 쉽게 몸을 뒤집었다. 그러자 방금까지 우세했던 남자는 목이 무릎에 눌려 얼굴이 창백해졌다.윤혜인은 땅에 누워있는 사람을 확인하고 눈빛이 흔들렸다.그러고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탁자 위에 있는 재떨이를 집어 들어 이준혁의 뒤통수를 세게 내리쳤다.“퍽!”방심한 채로 공격을 받은 이준혁이 결국 손을 놓았다.재떨이는 바닥에 굴러갔지만, 다행히 단단한 재질이라 부서지지는 않았다.그러나 부서진 건 이준혁의 마음이었다.“툭...툭...”뒤통수에서 피가 흘러 바닥에 떨어졌다.그는 마치 영화의 슬로 모션 장면처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그 잘생긴 얼굴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가득했다.윤혜인의 얼굴에는 걱정하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 시선은 이준혁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그녀는 다친 이준혁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달려와 그를 밀쳐냈다.힘이 세지 않았는데도 이준혁은 마치 벼락을 맞은 것처럼 마음이 무너져 그녀가 밀쳐내는 대로 놔두었다.윤혜인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땅에 쓰러진 남자를 일으켜 세웠다.“오빠... 오빠... 괜찮아?”“괜찮아.”곽경천은 이미 그녀와 함께 일어나 있었다.실제로 그는 매우 훌륭한 싸움 솜씨를 가지고 있었지만, 너무 조급한 나머지 조금 전 밖에서 네 명의 경호원들과 자신의 안위를 걱정할 새 없이 싸우는 바람에 부상을 당한 뒤였다.때문에 안으로 들어왔을 때 그는 당
이준혁은 윤혜인이 곽경천의 팔을 꼭 잡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 속에는 경계하는 듯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그 모습을 보니 이준혁은 가슴이 더욱 아파왔다.“혜인아, 이리 와.”“여러 번 말했잖아요. 당신이 말하는 그 사람이 나는 아니라고.”그녀는 남자의 손등과 이마에 가득한 피를 보고도 차갑게 말했다.“됐어요, 이번에는 그냥 넘어갈게요. 대신 다음에 또 이런 짓 하면 그땐 바로 경찰에 신고할 겁니다.”“네가 맞아. 내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거야.”차가운 분위기를 물씬 풍기며 이준혁이 고집스레 말했다.“죽어서 재가 되더라도 난 널 알아볼 수 있어.” 그토록 그리워하던 사람을, 그가 절대 잘못 봤을 리가 없었다.그녀는 바로 윤혜인, 이준혁의 윤혜인이었다.‘정말 병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 그럼 일이 복잡해지는데... 나중에 또 이런 미친 짓을 한다면 법이 처벌할 수 있을지 확실치 않으니까...’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이준혁 씨, 병이 있으면 병원에 가서 약을 먹어야죠,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말고. 알겠어요?”아주 진지한 눈빛이었다. 정말 이준혁에게 병이 있다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낯선 남자에게 강제로 키스를 당한 그녀는 그저 자신이 더러워진 것만 같아 얼른 돌아가서 깨끗이 씻고 싶었다.그녀는 곽경천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오빠, 이만 가자.”그러자 곽경천은 이준혁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다시 차갑게 경고했다.“이준혁 씨, 다음번에 또 제 동생에게 무례하게 구시면... 저희 곽씨 가문,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곽씨 가문의 사업은 서울과 관련이 없었지만, 그래도 어느정도의 인맥은 있었다.모두가 알만한 가문이었기에 그는 이준혁도 행동하기 전에 반드시 고민해볼 것이라 믿었다.곧이어 곽경천이 윤혜인의 손을 잡고 떠나려 하자, 그녀가 다급히 말했다.“잠깐만.”두 남자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그녀가 쓰레기통에서 반지를 찾는 것이었다.다행히 쓰레기통은 새로 바뀐 것이라 그 안에는 반지 외에 다른 쓰레기가 없었다
‘이 사람이 내 남편이면... 그럼 재윤 씨는 뭐야? 남편이 있는 상태에서 재윤 씨랑 결혼했다는 건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모든 것이 얽히고설킨 거대한 그물 같았다. 윤혜인은 이 혼인신고서에 충격을 받아 머리가 터질 것 같았고 결국 몸에 힘이 풀리며 쓰리지고 말았다.갑작스러운 상황에 곽경천은 놀라 동공이 확장되었다.“혜인아!”이준혁은 숨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들며 급히 그녀를 안아 방문을 차고 나간 뒤, 자신의 차에 태우고 떠났다.곽경천도 급히 차를 몰아 그들을 뒤쫓아갔다.차는 병원에서 멈췄다.이준혁이 그녀를 안고 병원에 들어가려는 순간, 뒤따라 온 곽경천이 막아섰다.그러고는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이쯤 하시죠.”곽경천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해 보였다.“혜인이는 저한테 맡겨요. 괜히 애 해치지 말고.”얼마간 망설이다가, 결국 지나치게 창백해진 윤혜인의 얼굴을 보고 이준혁은 그녀를 곽경천에게 넘겼다.차가 다시 출발했고 곽경천은 그녀를 바로 자신의 별장으로 데려갔다.그곳에는 주치의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 방 안에서 뇌파 간섭 치료가 질서 있게 진행되는 것을 보며 남자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이 방은 밀폐된 치료실로, 안에는 침대와 각종 장비가 있었다. 윤혜인은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치료 침대에 누워 있었고 머리에는 수많은 가느다란 관들이 꽂혀 있었다.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준혁은 심장이 비틀린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곧 안색도 잔뜩 어두워졌다.“대체 무슨 일이예요?”“저희가 혜인이를 다시 찾았을 때, 혜인이의 뇌 신경은 이미 손상되어 있었습니다. 수차례 고통스러운 치료를 거쳐 지금의 상태로 회복한 거죠. 이 말이 나온 김에 묻고 싶네요. 이준혁 씨...”곽경천은 냉담한 눈빛으로 말했다.“혜인이를 왜 강물에 떨어뜨린 거죠?”당시 윤혜인이 강물에 떨어진 일이 곽경천은 늘 의문이었다.그는 항상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벌인 짓이라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 윤혜인이 작업실로 돌아온 기회를 이용해 그
“그건 안 됩니다!”이준혁이 생각도 하지 않고 거절하자 곽경천은 비웃으며 말했다.“그건 이 대표님께서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혼인신고서가 있어도 5년간 별거했으면 충분하지 않나요?!”그러나 이준혁은 단호했다.“전 혜인이랑 이혼하지 않을 겁니다. 그건 그쪽이 대신 결정할 수 없어요.”이준혁이 아직도 윤혜인에게 미련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곽경천은 다소 놀랐다. 그는 방안을 둘러보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혜인이가 깨어나면 모든 걸 알려줄 거예요. 혜인이도 알 권리가 있으니까요. 이준혁 씨한테 받은 상처를 떠올리고 혜인이가 내리는 선택을 그쪽이 반드시 감당했으면 좋겠습니다. 다시는 혜인이한테 강요하지 말고요.”곽경천은 숨김없이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윤혜인에게 말할 생각이었다.“혜인이가 기억을 잃은 게 오히려 당신한테는 좋은 일 아닌가요? 기억을 되찾으면 이준혁 씨에게 혜인이가 어떤 태도를 보일지, 충분히 똑똑하신 분이니 말 안해도 아시겠죠?”이준혁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곽경천의 말이 맞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또 한 가지 말할 게 있습니다.”곽경천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윤혜인에게 아이가 있다는 거 알고 있어요? 혜인이는 자신의 심리 치료사였던 오재윤과 함께 지내며 감정을 쌓아 사랑의 결실을 맺었어요. 나중에 결혼식 직전에 오재윤이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윤혜인은 그의 아이를 낳았습니다.”곽경천은 그에게 윤혜인이 그를 떠난 후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이준혁이 없는 세상에서도 행복으로 충만된 삶을 살았다는 것을 말이다.순간,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이준혁은 입술마저 떨렸다.“그걸 왜 저한테 말하시는 건데요?”“제가 말 안 한다 해서, 대표님이 알아내지 못할 것 같으세요?”곽경천은 알고 있었다. 아름이의 신분을 비밀스럽게 처리했지만 언제나 완벽할 수는 없었다.때문에 이준혁이 의심해서 조사하는 것보다 자신이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그는 윤혜인과 아름이를 잃을 수 없고 싶지 않았으니 말
그녀가 당한 모든 불행은 전부 이 남자 때문이었다.어머니의 사랑을 받아야 할 그녀는 이리저리 떠돌며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원진우 씨, 지금 무슨 헛된 꿈을 꾸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쪽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엄마와 함께 떠날 거예요. 당신이 우리 엄마를 얼마나 오랫동안 감금했는지, 또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는지 절대 잊지 않았어요.”윤혜인은 진지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당신 같은 사람은 지옥에나 가야 해요!”그러자 원진우는 분노가 가득 찬 윤혜인의 얼굴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이렇게는 대화가 안 되겠군.”그는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괜찮아. 우리 세 식구에게는 앞으로 시간이 많으니까. 내가 얼마나 좋은 아버지인지 천천히 알게 될 거야.”윤혜인은 경계심을 품고 원진우를 응시했지만 그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그러나 곧 그 의도를 알게 되었다.원진우는 손짓으로 도우미를 불러 들어오게 한 후, 지시를 내렸다.“아가씨의 짐을 챙겨서 비행기에 실어라.”윤혜인의 창백해진 얼굴을 보며 원진우는 느긋하게 설명했다.“우린 곧 떠날 거라서.”원진우가 윤아름과 자신을 데리고 떠나려 한다는 말에 윤혜인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그녀는 원진우가 매우 영리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수십 년 동안 윤아름을 감쪽같이 숨길 수 있었던 걸 보면 그의 경계심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었다.이번에 끌려가면 아버지, 큰오빠, 아이들, 모든 가족과 친구들을 평생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몰랐다.“난 안 가요!”윤혜인은 근처에 있던 의자를 집어 던지고 온 힘을 다해 문밖으로 뛰쳐나갔다.그러나 문에 도달하자마자 윤혜인은 원진우에게 팔이 붙잡히고 말았다.곧 원진우는 넥타이로 그녀의 손을 묶은 뒤 그대로 어깨에 들쳐 업었다.시간이 촉박했다. 이미 이곳이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즉시 떠나야 했다.바깥에는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떠나기만 하면 전처럼 윤아름과 윤혜인 모두 꽁꽁 아무도 모르게 숨
윤혜인이 갑자기 손을 들자 봉투가 바닥에 떨어지더니 안에 들어있던 자료가 쏟아져 나왔다. 윤혜인은 자료를 보고 싶은 생각보다는 하얀 나무젓가락을 들어 원진우의 목에 찔러넣고 싶었다. 두 사람은 신장 차이가 있었지만 원진우는 지금 고개를 살짝 아래로 숙이고 있어 윤혜인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지 못했다. 뾰족하게 자른 나무젓가락이 그대로 원진우의 목에 들어갔다. 그러자 피가 나무젓가락을 타고 아래로 후드득 떨어졌다. 하지만 떨어지는 피의 양에서 윤혜인은 글렀다는 걸 알아챘다. 동맥을 찌르지 못했으니 원진우를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원진우는 고개를 들어 아래로 흘러내리는 피를 보더니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윤혜인을 바라봤다.“나 죽이고 싶어요?”원진우가 차분하게 물었다. 까만 눈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고요했다. 윤혜인이 뒤로 물러나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곧 사람들이 나와 엄마를 구하러 들이닥칠 거예요. 도망은 꿈도 꾸지 마요.;원진우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연락이 됐나 보네요.”윤혜인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윤혜인이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원진우는 어떻게 된 일인지 충분히 알아챘을 것이다. 아니면 윤혜인도 이렇게 무모하게 나가기보다는 계속 위장하는 걸 선택했을 것이다.원진우는 목에 꽂혀있는 젓가락을 뽑지도 처리하지도 않은 채 눈썹을 추켜세우며 말했다.“제법인데? 역시 내 핏줄이라 그런가? 배짱이 커.”윤혜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간사하기로 소문난 원진우가 친자 감정을 보지 않았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미 자기 핏줄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원진우는 윤혜인이 아리송한 표정을 짓자 모든 걸 알아차렸다는 듯 큰 소리로 웃었다.“나 속이려 했나 본데...”원진우가 허리를 굽혀 서류를 줍더니 윤혜인에게 건네줬다.“봐... 네 말이 맞아. 너 정말 내 딸이야.”“...”윤혜인은 원진우의 말을 믿을 수가 없어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이내 결과지에 적힌 숫자에 눈길이 갔다.99.99%.그럴
문이 삐걱 열리더니 원진우가 안으로 돌아왔다. 표정이 밝아진 윤아름을 보고 원진우의 표정도 살짝 풀렸지만 그렇다고 단둘이 있는 시간을 연장해 주지는 않았다.“시간 됐어요.”원진우가 덤덤하게 말하더니 윤아름이 의향도 물어보지 않고 윤아름을 번쩍 안아 들고는 방에서 나갔다.다음날.윤아름이 제시간에 나타나자 윤혜인은 그 이야기를 다시 한번 들려줬다. 이야기가 결말까지 이어지자 윤아름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하더니 이성을 잃은 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이거야?”윤아름이 마술을 부리듯 손목에 묶었던 레이스를 풀더니 윤혜인의 얼굴을 보며 헤헤 웃었다.“이거?”윤혜인은 원하던 물건이 윤아름 몸에 숨겨져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손목에 묶여있는 레이스가 그저 장식이라고만 생각했다. 윤혜인은 얼른 자수를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위치 추적기가 아직 들어있었다. 윤혜인은 자수를 더듬거리며 버튼을 찾더니 꾹 눌렀다. 그때 문 쪽에서 들리는 작은 소리에 윤혜인이 얼른 자수를 윤아름의 손목에 묶어줬다.발신기의 발신 기회는 고작 두번이었다. 마지막 한 번을 사용했으니 이제 더는 기회가 없다. 윤혜인은 윤아름이 다시 끌려가는 걸 보고 너무 안타까웠지만 곧 구출될 거라는 희망을 안고 꾹 참았다.한편, 곽경천과 배남준은 북안도를 이 잡듯이 뒤지며 윤혜인을 찾고 있었다. 원진우의 출입국 기록이 없는 걸 봐서는 아직 북안도에 숨어있다는 의미였다.이준혁도 온 힘을 다해 윤혜인을 찾았다. 꼬박 3일을 눈도 붙이지 못하고 돌아치던 이준혁은 의자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잠깐 휴식하려 했다.그때 문이 열리더니 주훈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안으로 들어왔다.“발신기... 발신기에서 또 한 번의 신호를 보내왔습니다.”이준혁이 얼른 외투를 집어 들더니 지하 차고로 향했다. 가는 길에 주훈은 발신기 주변에 위험 물체가 있는지 탐색했다. 이준혁은 이 소식을 곽경천과 배남준에게 알렸다. 세 사람은 서로 다른 곳에서 출발했지만 목표는 똑같이 윤혜인과 윤아름을 구해내는 것이었다.
“아름아, 왜 그래?”원진우가 앞으로 다가와 윤아름이 도대체 왜 그러는지 확인하려 했다. 뒤를 힐끔 돌아본 윤아름이 원진우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며 소리를 지르더니 윤혜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윤아름이 오히려 애가 된 것 같았다.“삼촌, 일단 나가 계세요. 삼촌이 여기 있으면 오히려 자극만 받을 거예요.”윤혜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원진우는 자리를 비우고 싶지 않았지만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윤아름을 보고 한발 양보했다.“윤혜인 씨, 얌전하게만 있으면 절대 다치게 하지 않는다고 약속할게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죠?”원진우가 타이름 반 협박 반으로 말했다. 얕은 수작을 부리면 벌을 내리겠다는 경고였다. 윤혜인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알겠다고 대답하더니 윤아름의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엄마, 엄마, 나 혜인이야...”원진우는 겨우 차분해진 윤아름을 보며 더는 자극하기 싫어 방에서 나갔다. 윤혜인은 방문이 닫히는 걸 똑똑히 보았다. 오전에 방안을 둘러보며 카메라가 없다는 건 이미 확인한 상태였다. 새 거처를 바꿔서 그런지 아니면 윤아름을 데리고 떠날 계획이라 그런지 여기는 카메라가 없었다.“엄마, 미안해요. 아팠죠?”윤혜인이 얼른 윤아름의 등을 확인했지만 다행히 살짝 빨개진 정도였다. 이런 위험한 수를 둔 건 윤아름이 조금만 이상해도 원진우가 신경 쓴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윤아름의 정서를 이용해 원진우를 영향 주려 했다. 다행히 그 방법이 제대로 먹혔다. 윤아름이 아닌 윤혜인이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다면 죽을 정도가 아니고서는 원진우도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윤아름은 여전히 아무 감각이 없는 듯했지만 윤혜인이 친근하게 다가가도 밀어내지는 않았다. 그저 멍한 눈으로 윤혜인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눈을 깜빡였다가 윤혜인이 사라질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 윤혜인은 윤아름의 팔을 잡고 눈물을 뚝뚝 떨궜다.“엄마...”윤혜인은 한참 동안 속 시원하게 울더니 울음을 그치고는 물었다.“엄마, 그때 그 자수는 어디에다 뒀어요?”윤혜인이 물은 자수는
윤혜인이 문 앞으로 다가가 힘껏 문을 두드리며 큰 소리로 불렀다.“엄마... 엄마...”화들짝 놀란 도우미가 얼른 달려와 윤혜인을 막았다.“아가씨,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만하세요.”도우미가 윤혜인을 안더니 힘껏 침대 쪽으로 끌어당겼다. 윤혜인은 문을 두드릴 수 없어 큰 소리로 외칠 수밖에 없었다.“엄마. 엄마. 엄마.”윤혜인이 큰 소리로 외치자 바깥에서 들리던 웅얼거리는 소리가 달라졌다.쿵.문이 격렬하게 흔들렸다.쿵. 쿵. 쿵.휠체어로 문을 힘껏 부수는 소리와 도우미가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사모님... 사모님. 안 됩니다. 이러시면 안 돼요.”윤혜인이 더 높은 소리로 불렀다.“엄마. 엄마. 엄마.”방 안에 있던 도우미가 윤혜인의 입술을 틀어막자 윤혜인이 팔다리를 마구 버둥대며 웅얼웅얼 소리를 냈다.문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흔들리더니 탈칵 하는 소리와 함께 열쇠가 망가졌다. 문이 열리더니 검은 그림자가 안으로 쌩하고 들어왔다. 윤아름은 큰 꽃병 하나를 이고 들어와 윤혜인의 입을 막고 있는 도우미를 내리쳤다. 도우미는 피를 철철 흘리며 바닥에 쓰러지더니 고통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윤아름이 휠체어에서 겨우 일어나 윤혜인을 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윤혜인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정말 오랜만에 엄마를 다시 안아보는 거라 윤혜인도 엄마를 꼭 끌어안았다. 도우미는 바닥에 쓰러져 피를 흘리는 다른 도우미를 보고 윤아름을 말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긴 윤아름은 아까 정신이 살짝 나간 것 같았다. 게다가 원진우가 윤아름을 다치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했기에 과분하게 말렸다가 윤아름이 다치는 날에는 도우미에게 불똥이 튈 수도 있다.이때 소식을 들은 원진우가 다급하게 걸어왔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는 모녀를 보게 되었다. 원진우는 멈칫하더니 그 자리에 멈춰 섰다.울다가 웃기를 반복하는 윤혜인은 정상 같아 보이지 않았지만 적어도 멍하던 예전과 비기면 정서라는 게 생겼다. 윤혜인이 확실히 윤아름을 치유
원진우는 연속 몇 시간이나 윤혜인을 관찰했다. 관찰한 시간이 오래면 오랠수록 원진우는 윤혜인이 자는 모습이 자신과 쏙 빼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낯선 곳에서 안전함을 느끼지 못하고 언제든 경계 태세에 들어가는 것도 말이다.“일어났으면 뭐 좀 먹어요. 도우미에게 이쪽으로 가져다주라고 할게요.”원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차분하고 온화한 말투로 말했다. 만약 윤혜인에게 예전 경력이 없었다면 원진우를 좋은 사람이라고 여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적어도 그렇게 잔혹한 사이코패스 성향을 뒤로 잘 숨긴 것 같았다.윤혜인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었다가는 원망을 이겨내지 못할 것 같았다. 정서도 도라는 게 있어 일정한 포인트까지 닿으면 되지 아니면 원진우가 오히려 경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원진우는 그렇게 생각한다기보다 그저 윤혜인이 보면 볼수록 귀엽다고 생각했다.“혜인 씨, 이름은 엄마가 지어준 거예요?”윤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혜인의 몸에는 금패가 하나 있는데 위에 윤혜인의 이름이 적힌 금패였다. 양아버지가 길다가 그녀를 줍고 주변과 경찰서에 윤혜인이라는 아이가 실종됐는지 물었지만 윤혜인이라는 아이를 잊어버린 적은 없다고 했다. 전에 조사가 어려웠던 건 윤혜인이 원진우의 의해 먼곳에 던져졌기 때문이다. 그때는 기술이 좋지 않아 실종자를 찾는 것도 힘든 일이긴 했다. 게다가 양아버지는 인자한 사람이었기에 윤혜인의 아버지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다고만 말할 뿐 이기적이게 그녀의 모든 걸 묵살하지는 않았다. 원래 이름을 쓰겠다고 한 것도 어느 날 친부모님을 만나면 그들이 자기를 알아볼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듣기 좋네요.”원진우가 말했다. 윤혜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원진우가 뭔가 말하려다가 방향을 잃었다.“일찍 쉬어요.”원진우가 이렇게 말하더니 방에서 빠져나갔다. 도우미가 아침을 가져다줬는데 그야말로 진수성찬이었다. 윤혜인은 그 요리와 밥을 이미 보며 원진우가 아직 독을 타지는 않았을 거라는
윤혜인은 다시 눈을 감으며 잠을 자야 체력을 보존할 수 있다고 자기 자신을 타일렀다. 오빠가 사람을 데리고 오기 전까지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자기 자신을 타일러도 윤혜인의 잠자리는 여전히 뒤숭숭했고 악몽만 연거푸 꿨다. 엄마가 여기 있고, 아버지를 죽인 원수도 여기 있다는 생각에 잠에 들 수가 없었다. 그렇게 겨우 동이 틀 때까지 버틴 윤혜인이 눈을 뜨자 침대맡에 놓인 의자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원진우였다. 윤혜인은 순간 얼굴을 굳히더니 혹시나 하지 말아야 할 잠꼬대를 하면서 마음에 담아뒀던 말을 전부 쏟아낸 게 아닌지 걱정했다.“깼어요?”원진우는 그런 윤혜인을 보며 덤덤하게 물었다. 윤혜인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지만 표정만큼은 매우 덤덤했다.“네.”“어제 잠을 설치는 것 같던데요?”원진우가 대수롭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차갑디차가운 눈동자에 담긴 의미가 뭔지는 알아내기 힘들었다.윤혜인은 혹시나 실수한 건 아닌지 의심되어 심장이 철렁했다. 얼른 머리를 굴린 윤혜인이 주먹을 꽉 움켜쥐고 이렇게 말했다.“네. 잠을 잘 자지 못한 건 맞아요. 어제 겪었던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무섭거든요. 나는 정말 거기서 죽는 줄 알았어요.”윤혜인이 솔직하게 말하자 원진우의 눈빛도 살짝 풀렸다.“내가 그렇게 무서워요?”원진우가 물었다.“네. 너무 무서워요. 나를 세 번이나 죽이려고 했는데 어떻게 안 무섭겠어요?”윤혜인은 두려움을 전혀 위장하지 않았다. 원진우와 말할 때도 몸을 살짝 움츠리며 뒤로 빼고는 경계 태세를 취했다. 이에 원진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평소 곽진명과는 어떻게 지내는데요?”윤혜인은 원진우가 무슨 뜻으로 묻는지 몰라 잠깐 넋을 잃었다.“곽진명과도 이렇게 지내요?”원진우가 물었다. 윤혜인은 그제야 원진우가 자기를 윤혜인의 아버지로 대입해 곽진명과 비교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곽진명을 떠올리자 윤혜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아빠는 내게 무척이나 잘해줬어요. 그래서 한 번도 무섭다고
원진우가 눈길을 돌리더니 차분한 표정으로 묵묵히 다짐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총명한 여자라는 걸 알아챘으니 윤혜인이 한 말과 보이는 행동을 믿으면 함정에 빠지는 거나 다름없다고 말이다. 원진우는 윤아름을 한참 동안 뚫어져라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무릎을 꿇더니 윤아름의 어깨를 잡고 힘껏 흔들었다.“아름아,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윤아름의 동공은 여전히 풀려 있었고 원진우가 무슨 말을 하든 아무 반응이 없었다. 원진우는 윤아름의 어깨를 점점 더 억세게 부여잡더니 이를 악물고 캐물었다.“말해. 말하라고. 있어, 없어?”“...”윤아름은 여전히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흥흥거릴 뿐이었다. 진우희가 그렇게 된 걸 본 다음부터 줄곧 이 상태였다.원진우는 윤아름의 멘탈이 이렇게 약할 줄은 몰랐다. 양자를 총으로 쐈다는 소식부터 먼저 알려주고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있는 진우희의 시신까지 보여줬다. 지하실에 갇혀 있으면서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친 윤아름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미쳐버리고 말았다. 다 자기 잘못이라고 자책하고 있었다. 곽경천도 그녀를 구하려다 총에 맞았고 진우희도 그녀를 도우려다 원진우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이 모든 건 다 그녀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런 생각이 든 순간 이성의 끈이 끊어지고 말았고 그 뒤에 아무리 다시 이어주려 해도 이어지지 않았다. 무의식적인 흥얼거림과 가끔 입가로 흘러내리는 침은 윤아름을 모두가 알아주던 미녀에서 바보로 전락하게 했다. 하지만 미인은 미인인지라 치매에 바보가 되어도 예쁘기만 했다.윤아름은 초점 없는 동공으로 무의식적으로 모니터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때 미약하게나마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윤아름의 눈동자가 다시 초점을 되찾더니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휠체어에서 바닥으로 넘어졌다. 원진우가 부축하려 했지만 윤아름이 그 손을 탁 쳐내더니 미친 듯이 모니터가 있는 쪽으로 기어갔다. 화면으로 보이는 윤혜인은 어느새 몸을 웅크리고 있
그 누구든 오랫동안 보지 못한 아이를 본다면 차분함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게다가 윤아름처럼 아이를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윤아름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멍한 표정이었다.원진우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번에는 정말 연기가 아닌 진짜였다. 윤혜인의 쓸모도 이제 끝났기에 원진우는 윤혜인의 손에 올렸던 발을 뗐고는 입을 열었다.“온도 영하 80도로 내려.”“!”윤혜인이 화들짝 놀랐다. 이건 윤혜인을 산채로 냉동시켜 저번에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내겠다는 뜻이었다. 원진우가 시야에서 점점 멀어지자 윤혜인은 이번 기회를 놓치고 원진우가 문밖으로 나서는 날에는 죽음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어떻게 해야만 살 수 있을까...’윤혜인은 죽기 싫었다. 살아서 엄마를 구하고 오빠가 오기를 기다리고 싶었다. 윤혜인은 윤아름의 얼굴을 떠올리다 갑자기 자지러지게 소리를 질렀다.“원진우!”윤혜인이 성까지 붙여서 부르자 아니나 다를까 원진우가 걸음을 멈추더니 윤혜인을 돌아봤다. 윤혜인은 혀끝을 꽉 깨물었다. 피비린내가 혀끝에서 느껴져서야 윤혜인은 정신을 조금 차릴 수 있었다. 윤혜인의 목은 마르고 갈라져 있었다.“내가 누구 딸인지 생각해 본 적 없어요?”윤혜인을 보는 원진우의 눈빛에서 보기 드물게 두려움이 묻어났다. 비록 몇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윤혜인이 그 눈빛을 캐치하고는 반은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머지 반이야말로 윤혜인이 살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는 핵심이었다. 윤혜인은 원진우에게 고민할 기회도 주지 않고 꿋꿋하게 말했다.“삼촌, 그렇게 총명하신 분이 이미 눈치채고 계신 거 아니에요? 경천 오빠랑 나랑 친 남매가 아닌 건 알고 있잖아요. 아버지가 왜 직접 낳지 않고 남자아이를 입양했는지 생각해 본 적 없어요?”원진우가 윤혜인을 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혹시 지금 내 딸이라고 하고 싶은 거예요?”“머리는 썼는데 나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서 그렇게 쉽게 속지 않아요.”원진우가 이렇게 말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