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을 들은 윤혜인이 단호하게 말했다.“아니, 당신은 내 남편 아니야.”“맞는지 아닌지 내가 보여줄게!”곧 이준혁은 윤혜인을 침대에 밀어놓고 손목을 꽉 잡더니 그녀의 위에 올라탔다.눈빛은 마치 맛있는 사냥감을 포획한 야수 같았다.“이거 놔!”윤혜인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남자를 피하려 했고 그의 통제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그렇게 이준혁이 몸을 숙이려는 순간.“쿵!”큰 소리와 함께 문이 발에 차여 열렸다.그러더니 한 사람이 달려와 이준혁을 땅에 눕히고 그의 머리를 강타하는 것이었다.이준혁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팔을 한 번 휘둘러 쉽게 몸을 뒤집었다. 그러자 방금까지 우세했던 남자는 목이 무릎에 눌려 얼굴이 창백해졌다.윤혜인은 땅에 누워있는 사람을 확인하고 눈빛이 흔들렸다.그러고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탁자 위에 있는 재떨이를 집어 들어 이준혁의 뒤통수를 세게 내리쳤다.“퍽!”방심한 채로 공격을 받은 이준혁이 결국 손을 놓았다.재떨이는 바닥에 굴러갔지만, 다행히 단단한 재질이라 부서지지는 않았다.그러나 부서진 건 이준혁의 마음이었다.“툭...툭...”뒤통수에서 피가 흘러 바닥에 떨어졌다.그는 마치 영화의 슬로 모션 장면처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그 잘생긴 얼굴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가득했다.윤혜인의 얼굴에는 걱정하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 시선은 이준혁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그녀는 다친 이준혁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달려와 그를 밀쳐냈다.힘이 세지 않았는데도 이준혁은 마치 벼락을 맞은 것처럼 마음이 무너져 그녀가 밀쳐내는 대로 놔두었다.윤혜인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땅에 쓰러진 남자를 일으켜 세웠다.“오빠... 오빠... 괜찮아?”“괜찮아.”곽경천은 이미 그녀와 함께 일어나 있었다.실제로 그는 매우 훌륭한 싸움 솜씨를 가지고 있었지만, 너무 조급한 나머지 조금 전 밖에서 네 명의 경호원들과 자신의 안위를 걱정할 새 없이 싸우는 바람에 부상을 당한 뒤였다.때문에 안으로 들어왔을 때 그는 당
이준혁은 윤혜인이 곽경천의 팔을 꼭 잡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 속에는 경계하는 듯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그 모습을 보니 이준혁은 가슴이 더욱 아파왔다.“혜인아, 이리 와.”“여러 번 말했잖아요. 당신이 말하는 그 사람이 나는 아니라고.”그녀는 남자의 손등과 이마에 가득한 피를 보고도 차갑게 말했다.“됐어요, 이번에는 그냥 넘어갈게요. 대신 다음에 또 이런 짓 하면 그땐 바로 경찰에 신고할 겁니다.”“네가 맞아. 내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거야.”차가운 분위기를 물씬 풍기며 이준혁이 고집스레 말했다.“죽어서 재가 되더라도 난 널 알아볼 수 있어.” 그토록 그리워하던 사람을, 그가 절대 잘못 봤을 리가 없었다.그녀는 바로 윤혜인, 이준혁의 윤혜인이었다.‘정말 병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 그럼 일이 복잡해지는데... 나중에 또 이런 미친 짓을 한다면 법이 처벌할 수 있을지 확실치 않으니까...’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이준혁 씨, 병이 있으면 병원에 가서 약을 먹어야죠,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말고. 알겠어요?”아주 진지한 눈빛이었다. 정말 이준혁에게 병이 있다 여기는 것처럼 말이다.낯선 남자에게 강제로 키스를 당한 그녀는 그저 자신이 더러워진 것만 같아 얼른 돌아가서 깨끗이 씻고 싶었다.그녀는 곽경천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오빠, 이만 가자.”그러자 곽경천은 이준혁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다시 차갑게 경고했다.“이준혁 씨, 다음번에 또 제 동생에게 무례하게 구시면... 저희 곽씨 가문,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곽씨 가문의 사업은 서울과 관련이 없었지만, 그래도 어느정도의 인맥은 있었다.모두가 알만한 가문이었기에 그는 이준혁도 행동하기 전에 반드시 고민해볼 것이라 믿었다.곧이어 곽경천이 윤혜인의 손을 잡고 떠나려 하자, 그녀가 다급히 말했다.“잠깐만.”두 남자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그녀가 쓰레기통에서 반지를 찾는 것이었다.다행히 쓰레기통은 새로 바뀐 것이라 그 안에는 반지 외에 다른 쓰레기가 없었다
‘이 사람이 내 남편이면... 그럼 재윤 씨는 뭐야? 남편이 있는 상태에서 재윤 씨랑 결혼했다는 건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모든 것이 얽히고설킨 거대한 그물 같았다. 윤혜인은 이 혼인신고서에 충격을 받아 머리가 터질 것 같았고 결국 몸에 힘이 풀리며 쓰리지고 말았다.갑작스러운 상황에 곽경천은 놀라 동공이 확장되었다.“혜인아!”이준혁은 숨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들며 급히 그녀를 안아 방문을 차고 나간 뒤, 자신의 차에 태우고 떠났다.곽경천도 급히 차를 몰아 그들을 뒤쫓아갔다.차는 병원에서 멈췄다.이준혁이 그녀를 안고 병원에 들어가려는 순간, 뒤따라 온 곽경천이 막아섰다.그러고는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이쯤 하시죠.”곽경천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해 보였다.“혜인이는 저한테 맡겨요. 괜히 애 해치지 말고.”얼마간 망설이다가, 결국 지나치게 창백해진 윤혜인의 얼굴을 보고 이준혁은 그녀를 곽경천에게 넘겼다.차가 다시 출발했고 곽경천은 그녀를 바로 자신의 별장으로 데려갔다.그곳에는 주치의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 방 안에서 뇌파 간섭 치료가 질서 있게 진행되는 것을 보며 남자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이 방은 밀폐된 치료실로, 안에는 침대와 각종 장비가 있었다. 윤혜인은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치료 침대에 누워 있었고 머리에는 수많은 가느다란 관들이 꽂혀 있었다.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준혁은 심장이 비틀린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곧 안색도 잔뜩 어두워졌다.“대체 무슨 일이예요?”“저희가 혜인이를 다시 찾았을 때, 혜인이의 뇌 신경은 이미 손상되어 있었습니다. 수차례 고통스러운 치료를 거쳐 지금의 상태로 회복한 거죠. 이 말이 나온 김에 묻고 싶네요. 이준혁 씨...”곽경천은 냉담한 눈빛으로 말했다.“혜인이를 왜 강물에 떨어뜨린 거죠?”당시 윤혜인이 강물에 떨어진 일이 곽경천은 늘 의문이었다.그는 항상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벌인 짓이라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 윤혜인이 작업실로 돌아온 기회를 이용해 그
“그건 안 됩니다!”이준혁이 생각도 하지 않고 거절하자 곽경천은 비웃으며 말했다.“그건 이 대표님께서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혼인신고서가 있어도 5년간 별거했으면 충분하지 않나요?!”그러나 이준혁은 단호했다.“전 혜인이랑 이혼하지 않을 겁니다. 그건 그쪽이 대신 결정할 수 없어요.”이준혁이 아직도 윤혜인에게 미련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곽경천은 다소 놀랐다. 그는 방안을 둘러보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혜인이가 깨어나면 모든 걸 알려줄 거예요. 혜인이도 알 권리가 있으니까요. 이준혁 씨한테 받은 상처를 떠올리고 혜인이가 내리는 선택을 그쪽이 반드시 감당했으면 좋겠습니다. 다시는 혜인이한테 강요하지 말고요.”곽경천은 숨김없이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윤혜인에게 말할 생각이었다.“혜인이가 기억을 잃은 게 오히려 당신한테는 좋은 일 아닌가요? 기억을 되찾으면 이준혁 씨에게 혜인이가 어떤 태도를 보일지, 충분히 똑똑하신 분이니 말 안해도 아시겠죠?”이준혁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지만, 곽경천의 말이 맞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또 한 가지 말할 게 있습니다.”곽경천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윤혜인에게 아이가 있다는 거 알고 있어요? 혜인이는 자신의 심리 치료사였던 오재윤과 함께 지내며 감정을 쌓아 사랑의 결실을 맺었어요. 나중에 결혼식 직전에 오재윤이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윤혜인은 그의 아이를 낳았습니다.”곽경천은 그에게 윤혜인이 그를 떠난 후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이준혁이 없는 세상에서도 행복으로 충만된 삶을 살았다는 것을 말이다.순간,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이준혁은 입술마저 떨렸다.“그걸 왜 저한테 말하시는 건데요?”“제가 말 안 한다 해서, 대표님이 알아내지 못할 것 같으세요?”곽경천은 알고 있었다. 아름이의 신분을 비밀스럽게 처리했지만 언제나 완벽할 수는 없었다.때문에 이준혁이 의심해서 조사하는 것보다 자신이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그는 윤혜인과 아름이를 잃을 수 없고 싶지 않았으니 말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이 있었다.윤혜인은 진지하게 말했다.“언제 시간 돼요?”그러자 이준혁이 차가운 눈빛을 한 채 조금 쉰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너와 함께라면 언제든지 시간 낼 수 있어.”수천억 원의 사업이라도 그는 지금 당장 내려놓을 수 있었다.윤혜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미소를 지었다.“그럼 가요.”순간 어리둥절해졌지만 이준혁은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윤혜인의 현재 천진난만한 성격은 아마도 곽씨 가문에서 귀하게 자라며 형성된 것일 것이다.보아하니 지난 5년 동안 그녀는 큰 고통을 겪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당장이라도 윤혜인의 손을 잡고 싶었지만 이준혁은 애써 참으며 부드럽게 물었다.“어디 가려고?”그러자 윤혜인은 그가 모른 척한다고 생각했는지 직설적으로 말했다.“어디겠어요, 이혼하러 가는 거지.”“뭐?”예상치 못한 대답에 이준혁의 표정이 얼어붙었다.“이혼이요.”윤혜인은 다시 한번 반복해 말했다.“우리의 과거는 오빠가 이미 말해줬어요. 당연히 그쪽도 제 상황을 알고 있겠네요. 지금 당신은 제게 낯선 이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더 이상 부부로 지낼 수 없어요.”이준혁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왜 불가능하다는 거야? 넌 원래 내 아내야.”“하지만 지금의 전 당신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어요. 그냥 낯설게 느껴질 뿐이고, 더 이상 부부로 지내고 싶지 않습니다.”윤혜인의 단호한 말에 이준혁은 마음이 불안해졌다.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당장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지 않을게. 우리 일단 지내보자. 내가 반드시 잘해줄게, 응?”“안 돼요.”윤혜인은 고개를 저으며 협상 여지가 없음을 밝혔다.“부부는 감정이 바탕이 되어야 해요. 근데 지금의 전 당신에 대한 아무런 감정도 없습니다. 아마 예전에도 당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완전히 잊어버릴 리 없잖아요.”순간, 윤혜인의 머릿속에는 오재윤이 떠올랐다. 그는 항상 그녀에게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기억되어있었다.하지만 이준혁이 그녀 앞에 서
이준혁은 윤혜인이 떠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짧은 거리였지만 마치 아주 먼 거리처럼 느껴졌다.그는 모든 것이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때 친밀한 사이였던 사람들도 어느 순간 낯선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윤혜인의 얼굴이 점점 멀어져 사라지는 것을 보며 그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마음을 다잡았다.‘반드시 혜인이 너를 되찾고 말겠어.’...다음 날.작업실에서 돌아온 윤혜인은 아름이가 한 중년 여성과 즐겁게 놀고 있는 것을 보았다.아름이는 달콤한 목소리로 계속 “할머니.”라고 부르며 여성의 기분을 한껏 높여주고 있었다.그녀가 아름이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이 분명했다.곧 윤혜인을 본 아름이가 인형을 안고 그녀에게 달려갔다.“엄마, 할머니께서 새 공주 인형 세트를 주셨어요. 12개나 돼요.”이 공주 세트는 아직 6개월 후에나 출시될 예정이었기에 그녀가 신경을 많이 쓴 것이 분명했다.윤혜인은 아름이를 안고 다가가며 공손히 인사했다.“사모님.”그러자 연규성의 모친 민옥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얇은 봉투를 건네며 부드럽게 말했다.“아이고, 혜인이 많이 예뻐졌구나? 너무 예뻐져서 못 알아볼 뻔했어.”민옥정은 윤혜인이 마음에 들었고 아름이를 보니 그녀의 유전자가 참 좋다는 생각까지 들었다.하지만 당황한 윤혜인은 아름이를 내려놓고 두 손으로 봉투를 되돌려주었다.“사모님, 이러지 않으셔도 돼요.”그러자 민옥정은 한사코 거절하며 윤혜인의 손을 밀어냈다.“이건 아름이에게 주는 선물이야. 너한테 대신 거절할 권리는 없단다.”“아름이도 필요 없어요. 사모님, 굳이 이러지 않으셔도 돼요.”아름이도 고개를 끄덕이며 귀엽게 말했다.“할머니가 주신 공주는 너무 좋아요. 하지만 돈은 필요 없어요. 아름이한테는 용돈이 있어요.”그때, 뒤에서 느긋하면서도 귀찮은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주면 받으라고. 뭐가 그렇게 까다로워.”고개를 돌아본 윤혜인의 앞에는 연규성이 서 있었다.그는 정장 차림이었지만 여전히 한가롭게 소파에 앉아 그녀를 향
이번에는 정말 드물게, 민옥정이 물었을 때 그는 “뭐, 그러든지.”라고 대답했다. 그 뜻은 사실 윤혜인과 만나보고 싶다는 뜻 아닌가?“내가 뭐가 모자라서 그래? 넌...”말을 하다 말고 연규성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리고 윤혜인은 그가 또 자신을 ‘과부'라고 부르려 했다는 것을 알아챘다.‘과부’라고 부르는 것도 모자라 아름이를 ‘짐'이라고 말한 건 정말 지나쳤다.지금 그녀는 혼자서도 아름이를 잘 키울 수 있었다. 만약 아름이가 다른 가정을 부러워하는 모습을 보지 않았다면 새아빠를 찾아주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녀는 오랜 친분이 있는 곽씨 가문과 연씨 가문 사이의 감정이 상할까 봐, 그날 연규성의 말을 다 꺼내지도 않고 그저 ‘서로 맞지 않다'며 넘겨버렸다.하지만 이제는 연규성을 위해 덮어줄 필요도 없었다.‘아무래도 가정교육이 부족한 모양이군.’곧 윤혜인은 레스토랑에서 녹음한 내용을 민옥정에게 들려주었다.채 다 듣기도 전에 민옥정은 얼굴이 굳어졌고 윤혜인과 아름이에게 사과한 뒤 연규성의 귀를 잡고 별장을 나섰다.연규성은 방탕했지만, 어른들에게는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귀를 잡힌 채로 차에 오를 때까지 참았다.오늘, 연규성의 자존심은 완전히 바닥에 떨어졌다.그는 속으로 이를 갈며 말했다.“곽혜인, 두고 봐!”오후.윤혜인은 곽경천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빠, 잠시 시간 있어? 공항에 가서 지윤이 좀 데려와 줘.”곽경천은 잠시 멈칫하더니 물었다.“지윤이가 여긴 왜 왔어?”“그게 무슨 말이야, 오빠. 당연히 홍 아주머니 보러 오는 거지.”구지윤은 홍 아주머니의 딸로, 윤혜인과 나이가 비슷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홍 아주머니는 윤혜인과 구지윤을 데리고 함께 놀았고, 나중에는 10여 년간 연락이 끊겼다가 5년 전 다시 만나 둘은 좋은 친구가 되었다.마치 운명 같은 인연이었다.“아참, 그리고 지윤이를 작업실의 디자인 총괄로 두기로 했어. 아마 오랫동안 여기서 지낼 거야. 아름이도 지윤이 좋아하고, 나도 기뻐.”윤혜
구지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조수석에 앉았다. 늘 그렇듯 반항하지 않았다.차에 타고나서도 두 사람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구지윤은 계속해서 엔진 후드를 응시하며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몇 년간의 지옥 같은 삶이 그녀에게 무엇을 생각해야 하고, 무엇을 보지 말아야 하는지 가르쳐 주었다.옆에 있는 남자는 마치 하늘에 있는 신 같은 존재였고 자신은 땅에 떨어진 먼지 같은 존재였다.이제 이 먼지 같은 존재는 더러워져 더욱 혐오스러울 뿐이었다.구지윤은 속이 점점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곽경천을 볼 때마다 그 열등감이 더욱 강해지는 것 같았다.신호등에서 멈췄을 때, 곽경천은 차량용 냉온장고에서 따뜻한 음료수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추워서 그래?”그는 그녀의 안색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구지윤은 고분고분하게 받으며 간단하게 말했다.“감사합니다, 곽 교수님.”그녀의 ‘교수님'이라는 호칭이 곽경천의 신경을 건드렸다.“교수님이라고 부르지 마. 지금 나는 그저 강사일 뿐이고, 모든 에너지를 회사에 집중하고 있어.”“네, 대표님.”이 호칭은 더욱 그를 짜증 나게 했다.곽경천은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구지윤, 나랑 한번 해보겠다는 거야?”그러자 구지윤은 눈을 내리깔고 순종적인 태도를 보였다.“감히 그럴 리가요, 대표님.”곽경천은 그녀가 자신에게 맞서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마치 과거에 그가 육선재와 만나보라고 했을 때처럼, 그녀는 진짜로 육선재와 만났다.육선재가 청혼할 때, 구지윤은 함정을 파서 곽경천을 현장에 끌어들여 정말 결혼해도 되느냐고 물었었다. 그리고 그는 “나는 상관없어.”라고 대답했다.그 말을 듣자마자 구지윤은 재빨리 반지를 꼈고 며칠 후 육선재와 결혼했다.순종적인 성격으로 사람을 화나게 만드는 게 그녀의 방식이었다.뭐라 더 말하고 싶었지만 아무런 말도 들을 것 같지 않은 구지윤의 태도에 그는 단념했다.“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이 말을 끝으로 곽경천은 차를 출발시켰다. 이번에는 전보다 속도가 더 빨
소종은 육경한이 아이들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교도소 안에 있을 때 육경한은 모든 사람들의 면회를 거절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두 아이를 그리워했다.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타세요, 대표님.”소종이 침묵을 깨며 한마디 했다.육경한이 차에 타자 소종은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이 대표님 가족이 소 대표님을 잘 돌봐주셨어요. 아이들끼리도 친하게 지내고... 그리고 김 대표님도 하정이와 유진이를 돌봐주셨어요... 그리고 윤혜인 사모님의 오빠가 8년 전에 결혼했어요. 집 가정부의 딸 구지윤 씨와 결혼했어요. 처음에 할아버지가 많이 반대했지만 지금은 행복하게 잘살고 있어요. 딸을 낳으면서 할아버지도 받아들이셨고요... 아, 참. 예전에 소 대표님과 친하게 지냈던 여경 강민혜 씨, 기억하시죠? 소 대표님의 친동생이었더라고요. 당시 소 대표님의 어머니가 과다 출혈로 위독하셨을 때 그 여경이 수혈해 줬거든요. 소 대표님이 두 사람의 혈액형이 같은 것을 알고 친자 확인을 했더니 강민혜 씨가 정말 친동생이었어요. 예전에 도둑맞아 죽었다고 알려졌던 아이가 사실은 살아 있었던 거죠...”소종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차는 어느새 호화로운 호텔 앞에 도착했다.그들이 육경한을 위해 환영회를 준비한 듯했다.육경한이 말했다.“이런 거 필요 없어. 어떤 모임에도 참석하고 싶지 않아. 그냥 쉬고 싶어.”그러자 소종이 바로 말했다.“안 돼요. 오늘 식사 자리에는 꼭 가야 해요.”황진수도 말했다.“맞아요, 육경한 씨. 소소하게 준비한 것이니 우리 마음을 봐서라도 꼭 참석해 주세요.”마지못해 차에서 내린 육경한은 호텔 룸에 들어간 순간 방 안에 익숙한 얼굴들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예쁜 소녀가 육경한에게 다가오더니 큰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고 말했다.“그쪽이 우리 아빠예요?”자신과 닮은 소녀의 눈매에 육경한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육하정이 계속 말했다.“엄마가 말했어요. 아빠가 잘못을 저질러
법정 안, 판사가 선고했다.“피고인 육경한, 살인죄로... 그러나 피해자와의 갈등 관계를 고려하고 증인의 증언을 종합하여 본 법정은 다음과 같이 판결합니다. 육경한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합니다...”“대표님...”방금 깨어나서 법정에 나와 주석훈의 살인을 증언한 소종은 울며 육경한을 불렀다.뒤에 서서 두 달 된 아기를 안고 있는 소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시울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아기의 얼굴과 핑크색 이불을 본 육경한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는 더 이상 소원에게 할 말이 없었다. 대신 소종을 보며 한마디 했다.“잘 돌봐줘.”육경한이 누구를 말하는지 바로 캐치한 소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요.”...15년 후, 구치소 대문 앞.15년 전 입소할 때 입었던 옷을 입고 나온 육경한은 여전히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걸었다.교도소에 있는 동안 좋은 표현 덕분에 감형을 받아 조기 출소했다.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육경한의 얼굴에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더 깊고 온화한 매력을 내뿜었다.구치소 밖에서는 황진수와 소종이 육경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종이 가장 먼저 달려와 그를 붙잡고 울었다.“대표님, 고생 많으셨어요!”키가 185cm나 되는 팔이 하나뿐인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대표님...”옆에 있던 황진수가 육경한에게 담배를 건네자 담배를 받은 육경한은 깊게 빨아들인 뒤 말했다.“내 재봉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 나중에 너희들에게 옷 한 벌 만들어 줄게.”소종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슬픈 분위기가 육경한의 한 마디에 완전히 뒤바뀌었다.소종이 울다가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기대하고 있을게요.”육경한이 코웃음을 쳤다.“꺼져.”먼 곳을 바라본 육경한은 소종과 황진수 외에 그를 맞이하러 온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왠지 실망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들었다.그녀가 오지 않아도... 괜찮았다.결코 좋은
“두 번째 것을 선택할게.”죽어도 소원을 구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온 육경한이었기에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대답했다.“허허, 육 대표가 소원을 정말 많이 아끼나 봐.”주석훈이 비꼬는 듯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그럼 시작하지. 육 대표, 6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죽은 소녀의 이름이 뭔지 기억나?”자리에 얼어붙은 육경한은 주석훈이 혹시라도 소원을 해칠까 봐 바로 앞으로 두 걸음 걸었다. 덫이 ‘탁탁’ 소리를 내며 그의 두 다리를 집었고 이내 피가 철철 흘렀지만 육경한은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몰라.”손에 칼을 움켜쥔 주석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 소녀의 이름은 수정이야. 육 대표처럼 모든 지원을 다 받아 치료받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겠지.”큰 고통 속에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육경한이 입을 열었다.“그 교통사고에서 소녀가 죽은 것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우리 미우 그룹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어. 그 사람들이 나를 먼저 치료한 이유는 대동맥이 눌러져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소녀도 나와 똑같이 심각한 상태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어. 그래서 그 후에 소녀의 가족에게 위로금도 보냈어.”육경한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소녀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 그녀의 부모님이 통곡하는 모습을 본 육경한은 소종을 시켜 소녀의 가족에게 2억 원의 위로금을 전달했다.“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주석훈이 매서운 눈빛을 내뿜으며 큰소리로 외쳤다.“어쨌든 넌 살아남았고 나의 수정이는 떠났어. 아무도 우리 수정이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주석훈은 더 이상 게임 따위 생각하지 않은 채 미친듯이 울부짖었다.“너희들은 모두 냉혈 인간들이야. 너희들은 죽어도 싸!”말을 마친 주석훈이 칼을 휘둘러 소원의 배를 찌르려 하자 육경한은 재빨리 몸을 날려 자신의 종아리로 칼을 막았다.소원을 밀어낸 육경한은 격렬한 고통을 참으며 주석훈과 맞붙었다.팔다리가 멀쩡한 주석훈은 이내 다리가 다친 육경한보다 우위를 점했다.도우려고 한 발 나선 소
이후 남자는 기분이 좋은 듯 소원의 입에 물린 천을 빼주며 말했다.“어떻게 여기에!”소원은 깜짝 놀랐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를 계속 도와주던 주석훈이었다!자신에게 접근한 의도를 의심한 적은 있었지만 나중에 그의 여자친구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과는 원한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 모든 사건의 배후가 주석훈이라니...“소원, 많이 놀랐지?”가면을 벗어 던진 주석훈은 마치 조금 전까지 잔인했던 사람이 본인이 아닌 듯 아주 평온해 보였다.“왜... 이렇게까지?”소원은 처음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왼손을 사용해 물건을 잡는 모습을 보고 바로 깨달았다.“너였어!”소원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상철 삼촌과 진아연을 죽인 사람이 너! 맞지?!”주석훈은 부인하지 않았고 그의 표정 또한 모든 걸 말해주듯 가볍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소원, 그 사람들은 죽어도 싼 사람들이야. 그들이 죽었으니 네가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사람들이 공모해서 네 아버지를 죽였잖아?”“아니야!”소원은 단호하게 부정했다.“그 사람들은 단순히 조종당한 희생양일 뿐이야. 내 아버지를 죽인 진짜 범인이 너였어?! 넌 그냥 증거 인멸을 한 거야!”“소원, 정말 똑똑하네?!”칭찬하듯 한마디 한 주석훈의 말에 소원은 분노로 가득 차올라 외쳤다.“왜! 아빠가 뭘 잘못했다고 죽인 건데?!”주석훈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원, 네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이유? 알고 싶어? 나와 육경한 사이에 깊은 원한이 있기 때문이야.”“그게 아빠와 무슨 상관인데!”소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렇게 간단한 이치를 모른다고?”주석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진용이 죽어야만 너와 육경한의 갈등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 넌 내 손에 있는 최고의 무기야. 넌 육경한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 줄 수 있는 존재지. 지난 5년 동안, 본인만의 원칙이 있는 사람이 그것을 깨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즐거운
소원이 두 손을 머리 위로 든 채 남자의 방향으로 걸어가자 남자는 다친 전미영을 바닥에 내던졌다.전미영은 이미 의식을 잃었기에 지금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다.소원은 체념한 듯 보였지만 사실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몰래 반지 속의 장치를 작동시켰다.이내 독이 묻은 바늘로 남자의 팔을 찌르자 팔이 곧바로 마비되기 시작한 남자는 저린 감각이 팔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망할 년! 감히 날 속여?”남자는 분노하며 소원을 발로 걷어찼다.배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돌린 소원은 엉덩이가 세게 걷어차인 바람에 비틀거리며 앞으로 두 걸음 나아갔다. 다행히 앞에 소파가 있었기에 소파를 붙잡고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은 뒤 있는 힘껏 소리쳤다.“살려 주세요! 도와주세요...!”그러나 남자가 바로 달려와 순식간에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최면제의 효과가 서서히 올라옴과 동시에 문을 걷어차는 소리와 몇 발의 총성이 희미하게 울리는 것이 들렸다.소원은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제발 엄마를 구해 주세요...’그러고는 있는 힘을 다해 목걸이를 바닥으로 내던진 뒤 점점 의식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희미하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운송 차 안인 듯한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었다.입안에는 천이 틀어막혀 있었고 팔도 밧줄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순간 소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결국 구출되지 못하고 가면을 쓴 남자에게 끌려온 것이다.주위에 전미영이 보이지 않자 소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엄마가 같이 끌려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엄마를 병원으로 옮겼을 거야. 그러면 희망이 있어.’하지만 엄마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기에 속으로 행운을 빌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이 납치범에 대한 분노가 가슴 속 깊이 밀려왔다.‘이 사람은 대체 우리와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런 짓을 하는 거지?’덜컹거리며 달리는 차 안에 있는 소원은 졸음이 밀려왔다.임신 후기라서 그런지 이런 상황에서도 극심한 피
육경한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그 여경을 찾아서 같이 있도록 해. 이 사람이 아직도 쇼핑몰 안에 있을 가능성이 커. 나도 지금 돌아가는 중이야...”소원은 순간 숨을 죽인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앞을 응시했다.바로 앞에 하얀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한 중년 여성을 붙잡고 있었다. 그 중년 여성이 바로 모두가 찾는 전미영이었다.육경한의 말대로 그녀의 엄마는 정말 여기에 있었다.육경한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계속 들렸지만 소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전미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가면을 쓴 이 교활한 남자는 사람을 쇼핑몰 안에 붙잡아둔 채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짜 번호판 차량은 아마도 이 남자가 미리 파놓은 함정일 것이다.그녀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똑똑한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심리를 읽을 줄 알았다.가면 쓴 남자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소원에게 말을 하지 말고 전화를 끊으라는 뜻을 내비쳤다.자기 엄마가 상대방의 손에 있기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전화를 끊은 후 가면을 쓴 남자가 그녀에게 한마디 지시했다.“전화기를 꺼서 이쪽으로 던져.”소원은 남자의 말대로 순순히 전화기를 끄고 그의 앞에 던진 후 한마디 물었다.“누구세요? 지금 뭘 원하는 거예요? 제발 우리 엄마만 해치지 마세요!”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소원은 남자를 향해 두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그녀의 유일한 요구는 상대방이 엄마를 해치지 않는 것이었다.말을 하면서도 소원은 몰래 주변을 관찰했다. 가면 쓴 신비로운 남자는 정말 교묘한 장소를 선택했다.화장실은 휴게실 제일 안 쪽에 있었고 뒤쪽에 있는 창문과 거리가 가까웠다.남자는 전미영을 붙잡고 입구 쪽에서 소원과 정면으로 마주서 있었다. 이렇게 하면 좁은 포위망이 형성되어 소원을 한 구석에 가둘 수 있다.남자는 손에 흉기를 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제작한 권총 비슷한 것
강민혜는 즉시 지시를 내려 이 수상한 차량을 중점적으로 조사하라고 했다. 육경한이 회사의 위기 대응팀과 협력해 조사하라고 지시하자 그들은 이내 차량의 이동 경로를 찾아냈다.육경한은 즉시 차량을 출동시켜 추적하도록 했지만 소원더러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현재 상대방의 목표가 소원의 엄마가 아니라 임신 중인 소원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게다가 차량 추격은 너무 자극적이어서 소원 같은 임산부에게 위험할 수 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그녀를 배려하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원이 차량 추격에 참여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어머니를 찾지 못하고 본인까지 안 좋은 상황이 되면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친 셈이 된다.육경한의 부탁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라 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육경한은 회사 경호원 한 팀을 불러 상대방의 차량을 추적하도록 했다.쇼핑몰에 남아 있는 경호원들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소원을 경호했다. 소원의 걱정을 덜기 위해 육경한도 차량 추적에 나섰다.이렇게 되어 여러 대의 차량이 CCTV에 찍힌 그 검은 차를 추적하기 시작했다.소원은 쇼핑몰의 휴게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불안감에 휩싸인 그녀는 심박 수가 빨라져 의사가 와서 경고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그녀의 몸에도 해로울 뿐만 아니라 조산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소원이 걱정된 강민혜는 현장에 남아 그녀를 달랬고 소원이 화장실에 갈 때도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했다.소원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를 했고 강민혜도 옆에서 그녀를 위로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님은 분명 괜찮을 거예요. 그렇게 큰 고비도 넘겼는데 별일 없을 거예요. 게다가 경찰과 육 대표님이 모두 추적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마음 놓으세요.”본인이 아무리 불안해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육경한이 좋은 소식을 전해주길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불편한 몸 때문에 자꾸 구역질이 났다.이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육경한이었다.당황한
육경한이 성큼성큼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 장모님은?”“엄마가 사라졌어...”소원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충돌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전미영은 그녀 곁에 서 있었다.어떻게 된 일일까... 눈 깜짝할 사이에 전미영이 사라졌다.전미영은 걸을 수는 있지만 말을 잘하지 못하고 지능도 두세 살 아이 수준인데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소원이 급히 찾으러 가려 하자 육경한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달랬다.“너무 급해 하지 마. 우선 CCTV를 보자. 경호원들에게 찾으라고 했어. 네가 걷는 것보다 경호원들이 움직이는 게 빨라.”소원도 육경한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최대한 침착한 마음가짐으로 엄마를 찾아야 했다. 절대 당황하면 안 되었다.두 사람이 CCTV 실로 향했을 때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전미영이 사라지는 영상을 찾아냈다.영상을 보니 전미영은 처음에는 경호원의 뒤, 소원 곁에 서 있었다.하지만 조금 전 말싸움이 일어나면서 그 남자가 경호원과 몸싸움을 하려 하자 경호원들은 소원이 다칠까 봐 소원과 육경한 주변으로 몰렸다.그러면서 전미영은 자연스럽게 뒤에 갔다. 원래대로라면 전미영도 별일 없어야 했지만 무슨 일인지 전미영이 갑자기 혼자 모퉁이 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그곳에 그녀를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그녀는 불과 7, 8걸음 되는 모퉁이까지 아주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한편 소원과 육경한에게 정신이 팔린 경호원들은 전미영을 발견하지 못했고 전미영이 뒤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다음 모퉁이의 CCTV에는 소원이 비상구로 들어가는 것이 찍었다. 계단에 CCTV가 없었고 출구에 CCTV가 한 대 있었지만 전미영의 모습은 어디에도 찍히지 않았다. 즉 전미영이 출구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그렇다면 유일한 통로는 지하 주차장이었다. 하지만 지하 주차장 출구의 CCTV가 때마침 고장이 나 있어 전미영이 그 출구로 나갔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전미영이 실종된 지 불과 몇 분, 실종자를 한 시간 이내에
두 모자가 가식적으로 불쌍한 척하며 사람들의 동정을 구걸한 것을 안 사람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 모자를 제일 먼저 도우려고 나섰던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소원에게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눈이 어두웠네요.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는 정말 톡톡히 교육해야 해요. 얼마든지 책임을 물으세요.”주변 사람들도 같은 입장이었다.입장을 바꿔 생각해 봤을 때 본인이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를 만난다면 분명 화가 날 것이다.게다가 이 모자는 역할 분담이 명확했다. 아들은 말썽을 부리고 엄마는 말재주를 발휘해 변명했다. 누구나 이런 일이 생긴다면 진짜로 화가 날 것이다.구경꾼들이 흩어진 후 육경한은 두 모자의 앞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아이를 내려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시킨 거야?”엄마가 아이를 뒤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다고 했잖아요. 그냥 우리 애가 장난친 거예요.”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왜 이래요... 우리가 그냥... 사과할게요... 아이고, 내가 왜 이렇게 불행한지...”그들은 완전히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피해자인 척하고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고 주위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이상해 보였다.조금 지친 소원이 육경한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됐어, 이만 가자.”“1분만 기다려.”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육경한은 아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압박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누가 너를 시켰는지 말해. 안 그러면 바로 고소할 테니까.”겁이 많은 아이는 바로 오줌을 지리더니 이내 ‘와’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아저씨가...”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육경한이 아이의 엄마를 밀어내고 차가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똑바로 말해!”“어떤 아저씨가... 아주머니와 부딪히면 엄마에게 100만 원을 준다고 했어요... 엄마가 그러면 게임기를 사주겠다고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