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지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조수석에 앉았다. 늘 그렇듯 반항하지 않았다.차에 타고나서도 두 사람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구지윤은 계속해서 엔진 후드를 응시하며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몇 년간의 지옥 같은 삶이 그녀에게 무엇을 생각해야 하고, 무엇을 보지 말아야 하는지 가르쳐 주었다.옆에 있는 남자는 마치 하늘에 있는 신 같은 존재였고 자신은 땅에 떨어진 먼지 같은 존재였다.이제 이 먼지 같은 존재는 더러워져 더욱 혐오스러울 뿐이었다.구지윤은 속이 점점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곽경천을 볼 때마다 그 열등감이 더욱 강해지는 것 같았다.신호등에서 멈췄을 때, 곽경천은 차량용 냉온장고에서 따뜻한 음료수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추워서 그래?”그는 그녀의 안색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구지윤은 고분고분하게 받으며 간단하게 말했다.“감사합니다, 곽 교수님.”그녀의 ‘교수님'이라는 호칭이 곽경천의 신경을 건드렸다.“교수님이라고 부르지 마. 지금 나는 그저 강사일 뿐이고, 모든 에너지를 회사에 집중하고 있어.”“네, 대표님.”이 호칭은 더욱 그를 짜증 나게 했다.곽경천은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구지윤, 나랑 한번 해보겠다는 거야?”그러자 구지윤은 눈을 내리깔고 순종적인 태도를 보였다.“감히 그럴 리가요, 대표님.”곽경천은 그녀가 자신에게 맞서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마치 과거에 그가 육선재와 만나보라고 했을 때처럼, 그녀는 진짜로 육선재와 만났다.육선재가 청혼할 때, 구지윤은 함정을 파서 곽경천을 현장에 끌어들여 정말 결혼해도 되느냐고 물었었다. 그리고 그는 “나는 상관없어.”라고 대답했다.그 말을 듣자마자 구지윤은 재빨리 반지를 꼈고 며칠 후 육선재와 결혼했다.순종적인 성격으로 사람을 화나게 만드는 게 그녀의 방식이었다.뭐라 더 말하고 싶었지만 아무런 말도 들을 것 같지 않은 구지윤의 태도에 그는 단념했다.“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이 말을 끝으로 곽경천은 차를 출발시켰다. 이번에는 전보다 속도가 더 빨
“흑흑, 왜 이렇게 다음 주가 멀게 느껴질까. 우리 셋이 같이 있는 게 너무 그리워.”구지윤은 윤혜인을 부축해 씻고 재우려 했다. 아름이도 구지윤을 보자 같이 자겠다고 떼를 썼다.결국 그날 밤, 세 사람은 같은 방에서 잠을 잤다. 윤혜인은 구지윤과 밤새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자신에게 갑자기 남편이 생긴 이야기부터, 이준혁이 방에 가둬놓고 한 일들까지 모두 이야기했다. 특히 몸에 난 자국들은 구지윤도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아름이에게는 벌레에 물린 자국이라고 둘러댔지만, 구지윤은 바보가 아니었다.윤혜인은 괴로워하며 말했다.“너 모를 거야, 정말 너무 무서웠어. 그 사람이 손으로... 너무 아팠어...”구지윤은 조용히 말했다.“너무 긴장해서 그랬을 거야, 그래서 아팠던 거지.”“지윤아, 너도 육씨 자식이랑... 그 자식도 침대에서 너에게 못되게 굴었어?”그러자 구지윤은 고개를 저었다.“우리는 그런 적 없어.”외모는 번듯했지만, 알고 보니 육선재는 완전 변태였다.처음에는 술을 마신 후 때리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점심시간에도 시간을 내서 집에 와서 때렸다.육선재와 결혼한 2년 동안, 구지윤은 매일 두려움 속에서 살았다. 그는 그녀에게 만약 다른 사람에게 이 사실을 알리면 구지윤의 엄마를 죽이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오랜 학대로 인해 구지윤은 반항할 용기를 잃었고 맞는 것을 일상처럼 여겼다.나중에 윤혜인이 우연히 알아차리고 곽경천이 나서서 해결해 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그 어두운 결혼 생활에서 얼마나 더 허우적거리고 있었을지 모른다.마지막으로 헤어질 때, 육선재는 그녀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구지윤, 나 너 사랑해. 진짜로 사랑해.”하지만 그 말을 듣고 구지윤은 놀란 나머지 기절하고 말았었다.윤혜인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지윤아, 너 혹시 아직 한번도...”구지윤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야.”한 번의 경험이 있었지만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둘 다 처음이어서 서툴렀고 금방 끝났다.그것이 그녀의 유일한 경험이자 신과 같은 위치
이준혁은 담담하게 말했다.“걱정하지 마. 특별히 요구하는 건 없어. 단지 한 달 동안은 나를 피하지 말고, 시간이 날 때마다 함께 있어 줘.”그는 단지 둘이서 시간을 더 보내고 싶었다.윤혜인은 화가 나서 말했다.“절대 안 돼!”그녀는 한 달은커녕 하루도 이 남자와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그러자 이준혁은 얇은 입술을 씩 올리며 말했다.“소송을 통해 이혼하려면 우리 법무팀의 실력으로는 2년, 5년이 걸려도 상관없어. 그 길을 가고 싶다면 문은 저기 있으니 마음대로 해.”말을 마치고 그는 다시 서류를 보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했다.윤혜인은 말이 안 나올 정도로 화가 났다.“대표님, 그렇게 사람이 필요해요? 제가 돈 내줄 테니 친구 할 사람 고용하세요. 1억이든 10억이든 제가 다 낼게요!”이준혁은 그녀를 힐끗 바라보았다.“다른 사람은 필요 없어. 너만 있으면 돼.”그의 눈빛은 그날 침대에서와 같았다.윤혜인은 순간 얼굴이 빨개지며 그를 욕했다.“정말 뻔뻔하고 무례하네요. 변태...”곧이어 이준혁이 그녀를 차갑게 막았다.“잊었나 본데, 이혼해달라고 빌고 있는 사람은 너야.”그 말에 윤혜인은 입을 다물었다.‘이 빌어먹을! 한 달? 그래, 내가 반드시 후회하게 해준다. 한 달이 뭐야, 열흘 안에도 먼저 이혼하자고 나한테 빌게 할 자신이 있다고.’마침내 윤혜인은 조건을 받아들였다.“그럼 이렇게 해요. 내가 바쁠 때는 나를 찾지 말아요.”“좋아.”곧이어 윤혜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그럼 먼저 가볼게요.”이준혁은 미간을 찌푸렸다.“오늘은 가지 마. 사무실에서 나랑 있어 줘.”그는 ‘있어 줘'라는 말을 강하게 강조했고 윤혜인은 다시 화가 치밀었다.“오늘은 시간이 없어요.”“오늘 주말이잖아. 뭐가 그렇게 바빠?”윤혜인은 다급히 변명거리를 찾았다.“주말이라고 안 바쁜 줄 알아요? 난...”“이렇게 하면 우리 협상이 의미가 없어지잖아. 그만두는 게 좋겠어.”윤혜인은 당황했다.‘그럴 수는 없지!’그녀는 곧바로 태도
주훈은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대표님!”이준혁은 발걸음을 멈췄고 주훈이 그를 급히 막아섰다.“대표님, 잠시만 기다리시죠?”“비켜.”그의 차가운 목소리에 주훈은 할 수 없이 물러섰다.곧이어 성큼성큼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간 이준혁의 눈동자가 금방 초록색으로 물들었다.그때, 윤혜인이 갑자기 초록색 모자를 쓰고 초록색 소파 뒤에서 튀어나오며 말했다.“서프라이즈!”주훈은 속으로 난감해했다.‘이게 무슨 서프라이즈야, 그냥 놀라 죽이려는 거잖아!’이준혁은 어두운 눈빛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어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그가 화를 안 내는 게 믿기지 않아 윤혜인은 더욱 자극했다.“제가 꾸민 거 마음에 들어요?”그러자 이준혁은 이를 악물고 “마음에 드네!”라 말했다.하지만 그런 대답과 달리 주위의 분위기는 점점 더 무거워졌다.“역시 좋아할 줄 알았어요.”윤혜인은 다시 파란색 털모자를 꺼내며 기대에 찬 얼굴로 말했다.“이 모자도 준비했어요. 써봐요.”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지만 속으로는 무척 기뻐하고 있었다.‘이걸로도 화 안 나나?’이준혁은 잠시 침묵하다가 모자를 받아들고 망설임 없이 썼다.이 상황은 그녀가 예상한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지금쯤이면 화를 내며 이혼하자고 할 줄 알았는데, 전혀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윤혜인은 결국 실망하며 초록색 소파에 앉아 기분이 상한 얼굴로 턱을 괴었다.사무실 밖에서는 가구 회사가 대금 결제를 기다리고 있었다.주훈은 혹시나 가구를 다시 반환해야 할지도 몰라 결제를 미뤘다.하지만 청구서를 올리자 이준혁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서명했다.주훈은 혼란스러웠다.‘대표님이 왜 이렇게 행복해 보이시지? 정말 초록색을 좋아하시는 건가?’그는 작은 노트에 빨리 메모를 했다.오후 내내 이준혁은 사무실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계속해서 회의를 했다.너무 지루한 나머지 윤혜인은 곽경천에게 전화를 걸어 이준혁이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봐 달라고 했다.곽경천은 처음에는 윤혜인이 이준혁과 내기하는 것을
“강 사장님, 강 여사님, 어떻게 여기서 다 뵙죠?”그러자 중년 남자가 고개를 들며 여자를 보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누구시죠?”“주 사장님, 기억 안 나세요? 저 DS 디자인 작업실 총감독 임세희입니다!”‘임세희? DS 디자인 작업실?’윤혜인은 눈을 반짝였다.‘저 사람이 바로 오빠가 말한 그 쓰레기 같은 첫사랑이군.’그녀를 자세히 보니, 풍성한 눈썹에 매혹적인 눈빛, 외모는 그럭저럭 괜찮지만, 어딘지 좀 싸구려스러웠다.“아, 아.”강인은 여전히 기억하지 못한 듯 대충 넘어갔다.그러나 임세희는 포기하지 않고 초대장을 꺼내 강인의 손에 쥐여주었다.“다음 주에 저희 DS에서 신제품 발표회를 하니 꼭 여사님과 함께 오세요.”윤혜인은 옆에서 그 장면을 똑똑히 보고 있었다. 임세희는 초대장을 건네며 강인의 손등을 계속 쓰다듬었고, 초대장을 보는 동안에도 다리를 일부러 그에게 비볐다. 정말 역겨웠다.윤혜인은 주훈에게 어느 방인지 물어보려다 카메라를 잘못 눌러 ‘찰칵’ 소리가 났다.그러자 즉시 세 사람의 시선이 윤혜인에게로 쏠렸다.안 그래도 찔리는 게 있었던지라 임세희는 즉시 다가와 따졌다.“당신 방금...”하지만 윤혜인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녀는 마치 귀신을 본 듯,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당신은... 윤... 윤혜인!”윤혜인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나를 아는 게 당연하지.”임세희는 한참을 버벅거리다 사악하게 말했다.“왜 안 죽었어요?”윤혜인은 그 말을 무시하며 비웃었다.“당신도 안 죽었잖아요.”“너!”임세희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방금 뭐 찍었어요?”“실수로 누른 거예요, 아무것도 안 찍혔습니다.”당연히 임세희는 이 말을 믿을 리 없었다“뭐요? 그 큰 소리를 내면서 아무것도 안 찍었다고요? 헛소리하지 말고 당장 핸드폰 내놔서 지워요.”강인도 불안해졌다. 그는 아까 임세희가 자기에게 비비는 것을 방관하며 내심 더 나아가 그녀를 비밀 애인으로 만들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그는 한 발 앞으로 다가서며 임세
이 말은 분명 겁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레스토랑은 증거가 없으면 일방적인 결정을 내리지 않으니 말이다.상황은 세 사람 이 한 사람을 몰아붙이는 형태가 되었고 윤혜인이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등을 곧게 펴며 세 사람을 쳐다보았다. “당신들은 제 핸드폰을 볼 권리가 없습니다.”결코 기가 꺾지 않는 윤혜인의 모습에 임세희는 그녀가 변한 것을 느꼈다.그녀의 말투와 태도는 예전보다 훨씬 자신감이 넘쳤고 내면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여유와 자신감이 윤혜인을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마치 귀하게 자란 상류층 막내딸처럼 말이다.세월이 윤혜인의 얼굴에는 전혀 흔적을 남기지 않은 듯, 그녀는 오히려 더 아름다워지고 생기 있어 보였다.반면, 임세희는 아이를 유산한 후 빠르게 노화가 진행되어 피부가 처졌기 때문에 외모를 유지하기 위해 의학적 시술에 의존하고 있었다.따로 보면 그럭저럭 볼만했지만, 윤혜인과 함께 있으면 나이 차이가 확연히 나는 듯 보였다.순간, 임세희는 질투심이 끓어올랐다. 그녀는 직원이 자신에게 잘 보이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물었다.“이 여자 이 레스토랑 손님인가요?”직원은 상황을 파악하고 바로 대답했다.“잘 모르겠습니다. 일행을 기다린다고 하셨어요.”“기다린다고요?”그러자 임세희가 비웃음을 터뜨렸다“정말로 기다린다는 건지, 아니면 남자를 낚으려는 건지 모르겠네요?”눈치 빠른 직원은 임세희의 말뜻을 단번에 알아챘다.“손님, 여기서 식사하실 분 아니시죠? 더 큰 문제가 생기기 전에 핸드폰을 내놓고 지우세요. 그러면 보내드리겠습니다.”“내가 여기서 식사를 안 한다고요? 누가 그래요?자신감 있게 말하는 윤혜인의 태도에 직원은 적잖이 당황했다. 혹시라도 진짜 손님이라면 큰일이었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어느 방에서 식사하시는지 말씀해 주세요. 확인해 보겠습니다.”“물어볼게요.”윤혜인은 주훈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임세희가 비웃으며 말했다.“인터넷에서 여기 레스토랑 방 이름을 검색하려는
임세희는 오랜 세월 동안 이준혁을 만나지 않았지만 여전히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본능적으로 이준혁을 두려워했다.그때 윤혜인이 ‘죽은' 후, 이준혁은 임세희를 매몰차게 버리고 이런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더 이상 임세희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그러다가 이천수가 임세희를 찾았고 임세희는 이 기회를 잡아 송휘재가 숨긴 파일로 이천수를 무너뜨리려는 이준혁의 계획을 이천수에게 이실직고해 실질적으로 그의 사람이 되었다.이천수는 이 사건을 이용하여 이준혁의 세력을 크게 무너뜨리고 그룹의 주도권을 되찾았다. 그리고 임세희에게 약속한 혜택을 실행했는데 그것은 바로 DS 디자인 작업실의 지분 15%였다.임세희는 임신한 아이를 낙태한 후 송휘재가 감옥에서 사고로 사망한 소식을 들었고 사태가 임세희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그리고 이준혁의 부인으로 자리 잡는 꿈도 그때쯤에 깔끔하게 접었다.왜냐하면 그때 이준혁이 너무 퇴폐한 몰골로 추락해 이천수가 주도한 이씨 가문 주주총회에서 내쫓을 위기에 처했고 사업이 큰 위기에 직면했기 때문이었다.그런데 일 년 후에 이준혁이 다시 일떠설 수 있을 걸 그 누가 예상할 수 있었을까.이 남자의 능력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무시무시했다.이런 남자를 오랜만에 만나니 임세희는 두려움뿐만 아니라 마음속에서 멈출 수 없는 떨림을 감추기 어려웠다.이 남자는 예전보다 더욱 잘생기고 매력적으로 변했다.임세희가 그때 이준혁에게 쏟아부었던 집착이 다시 슬슬 꿈틀대기 시작했다.그래서 예전의 수법을 사용하여 억울한 척하며 말했다. “준혁 오빠, 나도 혜인 씨가 왜 날 찍으려 하는지 모르겠어.”그러면서 윤혜인을 쳐다보며 목이 멘 목소리로 물었다.“혜인 씨, 날 찍으려면 정정당당하게 찍으세요. 내가 당신을 제지하진 않았잖아요? 왜 하필이면 몰카처럼 슬그머니 날 찍으려고 하죠...”아까 보인 무례하고 오만한 여자와는 커다란 차이가 있는 가냘픈 여자로 보였다.윤혜인은 그 모습에 입가가 살짝 떨렸다. 이 여자에 대해 아
강 사장은 윤혜인을 쳐다보며 느끼한 웃음을 지었다. “방금 제가 큰 실수를 한 것 같아요. 사모님께서 절 너그럽게 봐주시고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윤혜인은 강 사장의 표정이 너무 느끼해 휴대폰을 강 사장의 아내에게 내밀며 말했다.“강 사모님, 제가 의도하지 않게 찍은 이 사진은 사모님이 직접 삭제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그 순간, 강 사장과 임세희의 표정이 굳어버렸다.강 여사는 휴대폰을 받아 임세희가 남자의 다리에 자기 다리를 걸치고 있고 남편이 임세희의 손등을 꽉 잡고 놓지 않고 있는 사진을 확인했다.놀랍게도 이 모든 일이 강 여사의 눈앞에서 일어난 것이다.강 여사는 휴대폰을 윤혜인에게 돌려주고 숨을 고르고 여유로운 말투로 말했다. “고마워요.”그리고 다음 순간.“짝짝짝!”강 여사는 강 사장에게 귀싸대기를 연이어 날렸다고 큰 소리로 고함쳤다.“이 여자를 따먹지 못해 안달이 난 개자식아!”강 사장은 아내가 화를 내는 모습을 가장 무서워했다. 그래서 체면이고 뭐고 챙길 여유도 없이 임세희를 가리켜 말했다. “내 탓이 아니야, 이 여자가 날 꼬셨어.”그 순간, 임세희의 얼굴은 피가 빠져나간 것처럼 창백해졌다.“강 사장님, 헛소리하지 마세요! 왜 생사람을 잡고 난리예요?”강 여사는 강 사장과 임세희를 번갈아 보며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파리는 금 가지 않은 달걀에는 꾀지 않는다고 금이 간 네놈이 흘리고 다니니까 파리를 끌어들이지.”강 여사는 일타쌍피로 두 사람을 함께 묶어 욕했다.강 여사는 그나마 교양 있는 사람인지라 문제가 발생하면 먼저 집안의 문제부터 해결하고 다시 외부 상황을 정리하곤 했다.“세희 씨, 당신들 DS 디자인 작업실은 이렇게 사업을 하는군요. 나중에 우리 분야의 친한 자매들에게 자세히 귀띔해 줘야겠어요.”말을 마치고 강 여사는 몸을 돌려 남편을 쳐다보지도 않고 자리를 떠났다.그 모습에 임세희는 당황해 어쩔 바를 몰랐다.강 여사의 친구 중에는 DS 디자인 작업실의 VIP 손님들도 많고 그 손님 중 여
소원은 속았다는 생각에 머리가 윙 해졌다. 아니, 소원이 속은 게 아니라 서씨 가문이 너무 교활했고 혹시나 누군가 결혼식에 훼방을 놓을까 봐 만반의 준비를 한 것이다.캔디를 줍던 소원은 그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파티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아니 다 줍지도 않고 어딜 가는 거예요?”화가 잔뜩 난 웨이터가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지금 바로 매니저님 찾아가서 덤벙거리기만 하는 당신을 자르라고 할 거예요.”결혼식 현장.서씨 가문과 육씨 가문이 공동으로 준비한 결혼식이었기에 호화롭기 그지없었고 축하해주러 온 사람도 많았다.사회자의 열정적인 소개와 함께 하얀 드레스를 입은 육연주가 친인척의 손을 잡고 서서히 등장했다.버진 로드의 끝에는 빨간 벨벳 턱시도를 입고 가슴에 꽃을 단 신랑이 보였다. 기다란 체구와 꼿꼿한 자세가 신랑을 더 도도하고 우아해 보이게 했다.육연주는 남자의 준수한 얼굴을 보자마자 심장이 벌렁거렸다. 이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지만 드디어 이 남자를 손에 넣고 서씨 가문 사모님이 되었다.그렇게 신랑 앞까지 걸어간 육연주의 친인척이 육연주의 손을 신랑에게 넘겨줬지만 신랑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잘생긴 얼굴은 육연주의 손을 받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현장의 분위기가 싸늘해지자 사회자가 어색하게 웃으며 귀띔했다.“신랑분, 신부님 손을 잡아주세요.”사회자의 귀띔에도 서현재가 움직이지 않자 하객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어떻게 된 거야. 혹시 신랑은 결혼하기 싫은 거 아니야?”“그러니까. 근데 신부가 약간 막무가내래. 성격이 오만하면서도 사납다고 들었는데 아마도 서씨 가문 도련님이 후회한 게 아닌가 싶다.”“하기 싫은 건 그렇다 치고 그러면 미리 파혼해야 할 거 아니야. 이제 와서 성질부리면 양가 가문의 체면은 어떡해.”“허허. 억지로 결혼시킨 결과라고 봐야지...”“근데 신랑 어딘가 이상하지 않아?”“어디가?”“예전에 신랑을 본적이 있는데 이렇게 멍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말이 좋아 멍하지 서현재는 거의
소원은 바로 대기실 방향으로 향했지만 대기실 앞도 누군가 지키고 있었다.‘서씨 가문 너무 오버하는데?’지금 보면 서씨 가문은 소원만 경계하는 게 아니라 서현재도 같이 경계하고 있었다.‘설마 현재가 뭘 발견했는데 서씨 가문에서 그걸 알아챘나?’소원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걱정되어 들어가 물어보려 했지만 문 앞을 지키고 있는 보디가드들의 경비가 너무 삼엄해 파리 한 마리조차 그냥 들여보내지 않을 것 같았다.너무 다급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던 소원은 그저 조용히 옆에서 기다리다 서현재가 나오면 기회를 찾아볼 생각이었지만 한참 동안 기다려도 대기실은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그렇게 두 시간을 족히 쪼그리고 있다가 발이 저려서 감각을 잃어가는데 대기실을 지키던 보디가드가 하나둘씩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소원은 그제야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황을 살펴보려고 대기실로 다가가 문을 살짝 밀어 보니 문이 그대로 열렸다.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 흔적도 없었다.‘뭐지...?’‘왜 텅 빈 대기실을 지키고 있지?’소원은 자기가 속임에 걸려들었다는 걸 알고 밖으로 뛰어가다 같은 유니폼을 입은 웨이터와 부딪히고 말았다.“아야... 무슨 급한 일이 있다고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는 거예요?”웨이터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언짢은 말투로 말했다.“미안해요. 미안해요...”소원이 얼른 사과하고는 자리를 뜨려는데 웨이터가 그녀를 덥석 잡고는 말했다.“어디 가요? 이거 주워주고 가야죠.”바닥에 캔디가 흩뿌려져 있었다. 소원은 어쩔 수 없이 같이 쪼그리고 앉아 캔디를 한 알씩 줍는데 같이 줍던 웨이터가 소원을 힐끔 쳐다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도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예요? 실수로 부딪혔으면 수습할 생각을 해야지 도망가는 게 어딨어요? 매니저님께 알리면 바로 잘릴 거예요.”소원은 웨이터로 위장한 거라 찍소리도 못하고 머리를 숙인 채 열심히 캔디만 주었다. 이때 결혼식 입장을 알리는 익숙한 음악이 가든을 가득 메웠다. 아무래도 결혼식 파티가 시작된 것
육경한은 냉랭한 표정으로 말했다.“지금 당장 서씨 가문 어르신한테 연락해.”“알겠습니다.”소종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바로 서진태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를 받은 것은 도우미였다..“어르신은 주무시고 계십니다.”소종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정말 대단하네요. 손자가 오늘 결혼했는데 이렇게 일찍 잠이 들다니... 참 태평하시네요!”더욱 짜증 난 듯 육경한의 표정이 굳어졌다.“그럼 연주는? 연주는 전화 연결되나?”곧바로 소종이 육연주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역시나 아무도 받지 않았다.소종은 기이하다는 듯 말했다.“이 집안은 정말 이상하네요. 이렇게 큰 경사날에 왜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는 걸까요? 정말 그리 바쁜 건지.”육경한의 마음속에는 불길한 예감이 스며들었다.그는 조사 중 이번 사건이 서진태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을 발견했지만 아직 명확한 증거는 없었다.직접 손을 대지는 않았겠지만 서진태의 성격상 누군가를 이용했을 가능성은 충분했다.그러나 당시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할 여유가 없었고 사실을 알아채자마자 육경한은 바로 사람을 구하러 갔었다.그런데 이제 소원이 다시 서씨 가문으로 간다는 것은 스스로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나 다름없었다.서진태 같은 교활한 사람이 소원이 육연주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이를 이용해 ‘이익을 위한 희생’같은 일을 꾸민다면 소원이 위험에 빠질 것은 자명했다.그렇게 되면 서진태는 모든 책임을 회피할 수 있었고 심지어 육경한의 보복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그야말로 일석이조의 계략이었다.물론 이 모든 것은 육경한의 추측에 불과했지만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이내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육경한은 무거운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더 빨리 가!”...소원은 아침 일찍 서울로 향하는 차를 탔다.아무리 이른 시간에 출발했어도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후 1시가 넘어 있었다.서씨 가문의 결혼식은 저녁에 열릴 예정이었고 아직 늦지는 않았다.결혼식장은 경비가 삼엄했고 저택 전체가 철통같이 둘러싸여 있었다.때
소종이 말한 대로였다. 그 사람들이 얼마나 흉포한지는 이미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과거 미국에서 목숨 걸고 활동하던 시절, 함께 일하던 친구들에게서 그 지역의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그 사람들이 하지 못할 일이란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듣기만 해도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충격이었다.다행히도 미우 그룹은 그런 사업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한국에서 발붙일 수 없었을 것이다.모두가 알다시피 한국은 이러한 불법적이고 회색 지대의 산업에 대해 엄격히 단속하며 절대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이런 위험한 인물들이 한국에서 발호할 기회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이번에 잡힌 자들은 겨우 작은 졸개들일 뿐, 진짜 배후 세력은 여전히 해외에 있었다.이번 작전으로 큰 타격을 입었지만 이곳에서 은신처가 전부 드러나고 파괴된 이상, 그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하여 소종은 육경한이 소원 때문에 이런 사람들과 엮이는 건 정말 가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소원 씨가 배은망덕한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잖아요. 저는 이제 익숙해졌습니다. 대표님이 아무리 잘해줘도 소원 씨는 결국 배신할 뿐이에요.”소종은 소원의 이름만 나오면 마치 한풀이를 하듯 멈추지 않고 말을 쏟아냈다.“그 여자한테는 마음이란 게 없어요! 제발 다시 속지 마세요, 대표님!”그러나 육경한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엉뚱한 말을 꺼냈다.“오늘이 며칠이지?”그러자 소종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네?”“오늘 며칠이냐고 묻잖아!”육경한의 목소리에 짜증이 배어 있었다.“26일입니다.”육경한은 차갑게 중얼거렸다.“오늘이 서현재의 결혼식 날이야.”그제야 소종은 모든 것을 깨달은 듯 눈이 번쩍 뜨였다.‘아하! 그래서였구나! 아침 일찍 사라진 이유가 다 있었어. 분명 그 서씨를 만나러 간 거야.’육경한을 보자 소종은 더더욱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그 여자는 눈을 뜨자마자 다른 남자 만나러 갔는데 대표님은 그 여자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니... 이거 정말 너무 황당한 막장
“안녕하세요.”달콤한 목소리의 여자가 병실 문을 열며 들어왔다.육경한이 고개를 들어 보니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여자는 육경한을 본 순간 눈빛에 놀라움이 스치더니 다가와 말했다.“안녕하세요. 저는 픽업트럭에 있던 사람 중 하나입니다. 모두를 대표해서 감사 인사를 드리러 왔어요.”그녀는 들고 온 과일 바구니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육경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여자는 갈 생각도 없는 듯했다.구해준 사람이 이렇게 잘생겼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그의 외모는 남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음에도 흠잡을 데 없는 이목구비가 돋보였다.마치 드라마 속에서나 볼 법한 ‘냉철한 대표님’ 같았다.날카로운 눈빛과 잘생긴 얼굴은 그녀 같은 평범한 여자들이 평생 가까이할 수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제가 사과 깎아드릴까요?”여자가 먼저 제안했다.하지만 그녀가 사과를 집어 드는 순간, 육경한이 차갑게 말했다.“필요 없어요. 나가세요.”그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갑고 단호했다.여자는 순간 멈칫하며 사과를 손에 든 채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그러고는 이내 눈가가 붉어졌다.“저는 그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을 뿐이에요.”“고마워할 필요 없어요.”육경한은 냉담하게 대꾸했다.“나는 당신들을 구하려고 한 게 아니었으니까요.”이 말을 듣고 여자는 눈이 휘둥그레졌다.‘우리를 구하려 한 게 아니면 왜 목숨을 걸고 그런 위험한 싸움에 뛰어든 거지? 그토록 무모한 일을...’옆에서 육경한의 말을 듣고 있던 소종은 속이 답답해졌다.최근 구급차에서 찍힌 사진이 온라인에 퍼지며 언론은 육경한이 수많은 여성을 구한 영웅이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그 덕분에 미우 그룹의 이미지는 하늘로 치솟았고 주식도 단기간에 급등했다.지금 병원 밖에는 그를 인터뷰하려는 기자들이 몰려 있었다.하지만 육경한의 이런 모습이 퍼지면 언론의 긍정적인 관심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말 것이었다.하여 소종은 재빨리 상황을 수습했다.“죄송합니다. 저희 대표님이 머리를 다쳐서 지금 조
의료진들이 내려와 먼저 소원을 들것에 눕히고 이어 남자도 들것에 옮겨 눕혔다.구급차에 실려 가는 동안, 소원의 마음속은 기쁨이 가득 차 있었다.그녀는 들것에 누운 채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며 감사의 인사를 전하려 했다.하지만 그 순간 닦여진 남자의 얼굴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날카롭게 솟은 눈썹, 칠흑같이 검은 눈동자, 얇고 날렵한 입술.그 얼굴은 다름 아닌 육경한이었다.순간, 소원의 목에서는 감사 인사가 걸려 나오지 않았다.‘왜 저 사람이 여기 있는 거지? 왜 하필 육경한이...’동시에 커다란 절망감이 온몸에 퍼졌다.‘웃기네. 내가 내 원수를 직접 구했다니... 이게 대체 무슨 어이없는 농담이냐고.’하늘은 정말 잔인하게도 그녀를 조롱하고 있었다.남자 역시 소원이 자신을 알아보았음을 눈치챘다.그러나 그는 심각한 부상을 입고 연기를 너무 많이 들이마셔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소원을 향한 그의 검은 눈동자는 복잡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그는 소원보다 더 큰 충격에 휩싸였고 이 상황을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그는 소원이 자신을 구하려 했을 때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음을 알았다.그녀는 육경한을 철저히 낯선 사람으로 여겼고 그런 그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세상에, 어쩌면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구급차 문이 닫히면서 두 사람의 시야는 차단되었다.소원은 현실이 너무 잔혹하다고 느꼈다.왜 육경한이 여기 있는지, 왜 그녀를 구하려 했는지, 왜 결국 자신이 육경한을 구해야 했는지.모든 것이 이해되지 않았고 이해할 수 없었다.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며 결국 그녀는 생각을 멈추고 천천히 잠에 들었다.육경한도 깊은 잠에 빠져 하루 밤낮을 지나서야 깨어났다.눈을 떴을 때, 그의 침대 곁에는 소종이 눈물을 흘리며 앉아 있는게 보였다.“대표님!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정말 돌아가시는 줄 알았습니다!”소종은 울먹이며 말했다.육경한은 여전히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문지르며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썼다.그러나 소종
남자는 말을 할 수 없었지만 손가락을 살짝 움직여 소원의 말을 들었다는 신호를 보냈다.소원은 말했다.“우리에게 기회는 한 번뿐이에요. 반드시 호흡을 맞춰야 해요. 내가 그쪽 손을 잡고 하나, 둘, 셋 하면 그쪽은 그쪽 인생에서 가장 큰 힘을 다해 저와 함께 나와야 해요.”남자는 손가락을 움직였지만 협조하기를 꺼리는 듯했다.그 위험성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만약 실패하면 두 사람 모두 죽을 것이 분명했다.그러나 지금 소원이 그냥 떠난다면 최소한 한 명은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었다.소원이 남자의 손을 잡으려 하자 남자는 주먹을 꽉 쥔 채 그녀의 시도를 거부했다.그러자 소원이 조급한 목소리로 말했다.“왜 그래요? 시간이 없어요!”뒷좌석은 여전히 불길에 휩싸여 있었고 차의 후미는 이미 골격만 남아 있었다.조금 전 절벽으로 떨어진 은색 미니밴은 검은 잔해로 변해버렸고 그 광경은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끔찍했다.시간은 점점 다급해지고 있었다.남자가 끝내 협조하지 않자 소원은 손바닥을 펼치며 말했다.“제 손바닥에 하고 싶은 말 적어주세요.”남자는 소원의 말을 듣고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손바닥에 급히 글자를 적었다.“가.”그는 그녀에게 빨리 떠나라고, 도망치라고 재촉하고 있었다.그러나 소원은 남자가 손을 빼려 하자 그의 손가락을 꽉 붙잡으며 말했다.“날 믿어줘요. 우리는 반드시 함께 살아남을 거예요.”남자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지만 소원은 포기하지 않았다.“만약 그쪽이 나를 믿지 않는다면 나도 여기 남아 있을게요. 5분도 안 걸려서 이 차는 절벽 아래로 떨어질 거예요. 함께 죽든지, 아니면 살아남든지 선택은 그쪽에게 달렸어요.”남자의 손가락이 갑자기 움찔했다.소원의 말이 그의 마음에 닿은 듯했다.마침내 그는 손을 돌려 소원의 손을 감싸 쥐었다.그것은 동의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행동이었다.곧 소원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말했다.“그럼 시작할게요.”손바닥과 등은 이미 땀으로 흥건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
어떤 여자들은 다리까지 심하게 다쳐 이미 상처가 곪아가고 있었다.더 나은 내일을 꿈꾸며 힘들게 나왔지만 현실은 그녀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가혹했다.다행히 아직 한국의 국경 안에 있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다른 나라로 끌려갔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더 끔찍한 일이 그녀들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고맙다는 말 필요 없어요. 빨리 가요!”소원은 이 말을 남기고 검은색 차량으로 혼자 달려갔다.몸에 상처가 있는 그녀는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고통이 밀려왔지만 지금은 죽음과의 경주였다.단 한 걸음만 늦어도 차는 절벽 아래로 추락할 게 분명했다.겨우 차에 도달했을 때, 차 안이 짙은 연기로 가득 차 있는 게 보였다.다행히 차창이 조금 전 미니밴에서 발사된 총알로 인해 깨져 있었기에 연기가 일부 빠져나가고 있었다.만약 창문이 깨지지 않았다면 차가 추락하거나 폭발하기도 전에 차 안의 사람들이 연기에 질식해 죽었을 것이다.차 안은 정적만이 감돌았다.운전석에는 한 남자가 조용히 누워 있었는데 얼굴이 옆으로 기울어진 상태로 연기에 질식해 의식을 잃은 듯했다.소원은 조심스럽게 차 문을 당겼다.차체는 이미 한계에 다다른 상태라 사소한 움직임 하나로도 균형이 무너져 차가 추락할 수 있었다.자칫하면 그녀 자신도 함께 떨어질 위험이 있었다.그러나 조금 전 이 남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들을 구해냈던 걸 떠올리며 소원은 자신도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결과가 어떻든 간에 그녀는 차 안의 모든 사람들의 기대를 짊어지고 포기하지 않기로 결심했다.그렇게 소원은 움직임을 최대한 부드럽게 하며 조금씩 차 문을 열었다.문이 열리자마자 운전석의 남자가 의식을 잃고 피투성이가 된 채로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그의 이마에서 흐르는 피 때문에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다.소원은 먼저 안전벨트를 풀기 위해 남자의 안전벨트 걸쇠를 손으로 더듬었다.그의 몸은 안전벨트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다행히 앞쪽에 충돌이 없어 에어백이 터지지 않았던 덕분에 상황은 상대적으로
은색 미니밴은 이제 주도권을 잡았고 더 이상 검은색 차량과 정면으로 맞붙지 않으려 했다.그들의 목표는 픽업트럭과 트럭에 타고 있는 사람들 전부였다.만약 그들이 구해진다면 자신들의 기지는 끝장날 게 뻔했다.은색 미니밴은 픽업트럭을 향해 추격하던 중, 다시 한번 총구를 들어 트럭을 조준했다.목표는 단 하나, 트럭을 전복시켜 절벽 아래로 추락하게 만드는 것이었다.소원은 뒤따라오는 차가 계속 자신들을 조준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손은 전보다 더 떨려 안정감을 잃었고 뒷좌석에서는 공포에 질린 듯한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다들 다음 총알이 누구에게 향할지 몰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공포 앞에서 아무도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소원은 뒤차에서 어떤 모션이 나올지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필사적으로 차를 몰아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었다.멈추는 순간 위험은 더 커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은색 미니밴이 다시 픽업트럭을 조준하려는 순간, 검은색 차량이 갑자기 속도를 내어 커브 길에서 추월했다.그러고는 차체를 던져 승합차와 픽업트럭 사이에 끼어들며 총알을 막아냈다.하지만 이번 상황은 심각했다.총알을 막아낸 직후, 검은색 차량의 뒷좌석에서 불꽃이 튀어 오르더니 곧장 거센 불길로 번졌다.뒷좌석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고 차 안은 금세 아수라장이 되었다.미니밴 역시 이 광경에 놀라 멈칫했다.그러나 검은색 차량의 운전자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불길이 치솟는 뒷좌석을 강제로 승합차에 밀어붙였다.결국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미니밴은 중심을 잃고 휘청이다가 산 아래로 추락했다.곧이어 미니밴에서도 거대한 불길이 치솟았다.한편, 검은색 차량은 미니밴을 밀어붙인 여파로 인해 간신히 멈췄으나 뒷좌석은 절벽 밖으로 튀어 나가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상태가 되었다.지금은 운전자가 움직이지 않아도 불길이 더 번지면 차체가 균형을 잃고 결국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게 뻔했다.SUV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