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세희는 오랜 세월 동안 이준혁을 만나지 않았지만 여전히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본능적으로 이준혁을 두려워했다.그때 윤혜인이 ‘죽은' 후, 이준혁은 임세희를 매몰차게 버리고 이런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더 이상 임세희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그러다가 이천수가 임세희를 찾았고 임세희는 이 기회를 잡아 송휘재가 숨긴 파일로 이천수를 무너뜨리려는 이준혁의 계획을 이천수에게 이실직고해 실질적으로 그의 사람이 되었다.이천수는 이 사건을 이용하여 이준혁의 세력을 크게 무너뜨리고 그룹의 주도권을 되찾았다. 그리고 임세희에게 약속한 혜택을 실행했는데 그것은 바로 DS 디자인 작업실의 지분 15%였다.임세희는 임신한 아이를 낙태한 후 송휘재가 감옥에서 사고로 사망한 소식을 들었고 사태가 임세희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그리고 이준혁의 부인으로 자리 잡는 꿈도 그때쯤에 깔끔하게 접었다.왜냐하면 그때 이준혁이 너무 퇴폐한 몰골로 추락해 이천수가 주도한 이씨 가문 주주총회에서 내쫓을 위기에 처했고 사업이 큰 위기에 직면했기 때문이었다.그런데 일 년 후에 이준혁이 다시 일떠설 수 있을 걸 그 누가 예상할 수 있었을까.이 남자의 능력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무시무시했다.이런 남자를 오랜만에 만나니 임세희는 두려움뿐만 아니라 마음속에서 멈출 수 없는 떨림을 감추기 어려웠다.이 남자는 예전보다 더욱 잘생기고 매력적으로 변했다.임세희가 그때 이준혁에게 쏟아부었던 집착이 다시 슬슬 꿈틀대기 시작했다.그래서 예전의 수법을 사용하여 억울한 척하며 말했다. “준혁 오빠, 나도 혜인 씨가 왜 날 찍으려 하는지 모르겠어.”그러면서 윤혜인을 쳐다보며 목이 멘 목소리로 물었다.“혜인 씨, 날 찍으려면 정정당당하게 찍으세요. 내가 당신을 제지하진 않았잖아요? 왜 하필이면 몰카처럼 슬그머니 날 찍으려고 하죠...”아까 보인 무례하고 오만한 여자와는 커다란 차이가 있는 가냘픈 여자로 보였다.윤혜인은 그 모습에 입가가 살짝 떨렸다. 이 여자에 대해 아
강 사장은 윤혜인을 쳐다보며 느끼한 웃음을 지었다. “방금 제가 큰 실수를 한 것 같아요. 사모님께서 절 너그럽게 봐주시고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윤혜인은 강 사장의 표정이 너무 느끼해 휴대폰을 강 사장의 아내에게 내밀며 말했다.“강 사모님, 제가 의도하지 않게 찍은 이 사진은 사모님이 직접 삭제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그 순간, 강 사장과 임세희의 표정이 굳어버렸다.강 여사는 휴대폰을 받아 임세희가 남자의 다리에 자기 다리를 걸치고 있고 남편이 임세희의 손등을 꽉 잡고 놓지 않고 있는 사진을 확인했다.놀랍게도 이 모든 일이 강 여사의 눈앞에서 일어난 것이다.강 여사는 휴대폰을 윤혜인에게 돌려주고 숨을 고르고 여유로운 말투로 말했다. “고마워요.”그리고 다음 순간.“짝짝짝!”강 여사는 강 사장에게 귀싸대기를 연이어 날렸다고 큰 소리로 고함쳤다.“이 여자를 따먹지 못해 안달이 난 개자식아!”강 사장은 아내가 화를 내는 모습을 가장 무서워했다. 그래서 체면이고 뭐고 챙길 여유도 없이 임세희를 가리켜 말했다. “내 탓이 아니야, 이 여자가 날 꼬셨어.”그 순간, 임세희의 얼굴은 피가 빠져나간 것처럼 창백해졌다.“강 사장님, 헛소리하지 마세요! 왜 생사람을 잡고 난리예요?”강 여사는 강 사장과 임세희를 번갈아 보며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파리는 금 가지 않은 달걀에는 꾀지 않는다고 금이 간 네놈이 흘리고 다니니까 파리를 끌어들이지.”강 여사는 일타쌍피로 두 사람을 함께 묶어 욕했다.강 여사는 그나마 교양 있는 사람인지라 문제가 발생하면 먼저 집안의 문제부터 해결하고 다시 외부 상황을 정리하곤 했다.“세희 씨, 당신들 DS 디자인 작업실은 이렇게 사업을 하는군요. 나중에 우리 분야의 친한 자매들에게 자세히 귀띔해 줘야겠어요.”말을 마치고 강 여사는 몸을 돌려 남편을 쳐다보지도 않고 자리를 떠났다.그 모습에 임세희는 당황해 어쩔 바를 몰랐다.강 여사의 친구 중에는 DS 디자인 작업실의 VIP 손님들도 많고 그 손님 중 여
뜨거운 숨결이 윤혜인의 코를 덮쳤다.이준혁은 오른팔을 의자 등에 걸고 윤혜인의 뺨과 손가락 하나만큼의 거리에 얇은 입술을 갖다 댔다.윤혜인은 놀라움에 심장이 멈출 뻔했다.머릿속에서는 지난번 이준혁이 자신을 물고 빨며 키스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때 남긴 치아 자국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아 샤워할 때마다 고개를 숙이면 볼 수 있었다.윤혜인의 얼굴이 갑자기 불처럼 확 타올라 뜨거워졌고 뒤로 피하려고 했지만 등 뒤에는 시원한 에어컨의 바람을 맞아 서늘한 벽만 남았다.얇은 입술이 당장 덮쳐와 키스할 것 같은 분위기에 윤혜인은 군침을 꿀꺽 삼키며 떨리는 숨소리로 경고했다. “준, 준혁 씨가 더 이상 다가오면 성희롱으로 고소할 거예요. 그리고 근로기준법으로도 준혁 씨를 처벌할 거예요.”이준혁은 웃음을 터뜨리며 윤혜인의 이마에 대고 손가락을 튕겼다.“앗!”윤혜인의 어여쁜 얼굴이 찌푸려졌고 그녀는 머리를 감싸며 이준혁을 기세등등하게 노려보았다. “뭐 하는 거예요? 가정 폭력을 행사하는 건가요?”이준혁의 입가에는 미소가 슬며시 떠올랐고 다정스럽게 윤혜인의 콧등을 긁었다.“응, 가정 폭력이야.”웃음기가 섞여 있는 이준혁의 목소리는 매력적이고 듣기 좋았다.그 말에 윤혜인의 얼굴이 단번에 뜨거워졌다.자신이 말을 내뱉고 나서야 가정 폭력이란 말은 친밀한 관계를 설명하는 데 사용된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윤혜인은 자기가 이 개자식과 친밀한 관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선을 테이블로 돌리며 다시 기세를 되찾아 당당하게 말했다. “식사할 거예요? 말 거예요?”이준혁은 공간을 내어주었고 윤혜인은 그제야 마침내 마음껏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테이블 위의 음식은 진짜 그녀의 입맛에 맞는 것들로만 가득 차 있었다. 윤혜인이 맛있는 음식을 먹어보지 못한 것도 아니고 곽씨 가문의 요리사들도 국내에서 초청한 최고의 요리사들로 꽉 찼다.하지만 거기서 만들어진 음식은 언제나 뭔가 부족한 느낌이 강했다.아무래도 식재료든 요리 방식이든 국내에서 먹어야 윤혜인의 마
이준혁이 까준 게를 먹고 나자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에 윤혜인의 태도는 훨씬 나아졌다. 그래서 배시시 웃으며 얘기를 꺼냈다.“우리 남편 오재윤 씨도 예전에 항상 게를 까서 나에게 주었어요.”이준혁의 손가락이 갑자기 경직되어 이례적으로 윤혜인의 가느다란 팔목을 꽉 쥐었다.남편이라는 두 글자는 마치 보이지 않는 철사처럼 이준혁의 심장을 거세게 조여왔다.윤혜인이 떠난 그 기간, 윤혜인이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고 아이를 낳았다는 생각만 하면 이준혁의 마음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거대한 고통이 밀려왔다.불행 중의 다행은 그 남자가 일찍 죽었다는 것이다. 만약 아직도 그 남자가 살아있다면 자기가 어떤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를지 확신할 수 없었다.“준혁 씨, 준혁 씨...”윤혜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이준혁의 이름을 두 번이나 불러서야 이준혁은 정신을 차리고 꽉 쥐었던 손을 느슨하게 풀었다.하지만 잘생긴 얼굴에는 아까와 달리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다.윤혜인은 이준혁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유심하게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이준혁이 방금 보인 실수는 윤혜인이 예전의 남편인 오재윤을 언급했기 때문인가?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것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 수 없다.사실 윤혜인은 오늘 온종일 걱정이 태산이었다.첫 출근 날인 오늘 이준혁에게 20억에 가까운 지출을 부담하게 했고 방금 만난 이준혁의 첫사랑도 무척이나 짜증 나 윤혜인은 그녀를 의도적으로 도발해 아슬아슬한 사태로 이끌어갔었다.윤혜인은 이준혁을 짜증 나게 하려고 이 정도로 노력했는데도 왜 이 남자는 전혀 화내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이준혁은 일부러 재산을 과시하는 사람과 착하지 않은 사람을 가장 혐오한다고 하지 않았던가?그런데 왜 윤혜인이 이 정도까지 했는데도 이준혁의 얼굴에는 조금도 싫어하는 표정이 없는 걸까.심지어 윤혜인에게 눈웃음을 지으며 윤혜인이 소동을 일으키는 것을 애교처럼 귀엽게 봐주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그래서 윤혜인은 오빠가 제공한 정보의 신빙성을 의심하려고 했는데 이제
이준혁의 몸이 아래로 기울어졌고 위협적인 숨결을 내뿜으며 윤혜인을 응시했다. “얼마나 대단한데?”“뭐... 그냥...”대충 얼버무리고 난 후에 윤혜인은 얌전하게 입을 다물었다.원래 임시로 꾸며낸 거짓말이었기 때문에 윤혜인은 오재윤이 도대체 어떻게 대단한지 설명하기 어려웠다.이준혁의 눈부시게 잘생긴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고 매력적인 중저음 목소리도 들려왔다.“내가 자를 줄까? 네가 한번 측정해 봐, 과연 누가 더 대단한지.”“...”윤혜인의 표정이 굳어지고 해맑은 눈동자가 여러 번 깜박였다. “뭘 측정하라고요?”이준혁은 목소리를 더 낮춰 말했다.“네 생각엔 뭘 말하는 것 같아?”윤혜인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설마 그걸 말하는 건 아니겠지... 이 변태 새끼가!’“오재윤은 그렇게 자세히 기억하면서 나에 대한 기억은 하나도 없단 말이야?”이준혁은 윤혜인의 손을 잡고 아래로 내려가며 말했다. “내가 네 기억 회복을 도와줄까?”윤혜인은 사태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걸 감지하고 손바닥을 본능적으로 뒤로 뺐지만 이준혁이 꽉 잡고 놓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이준혁의 손을 따라 아래로 끌려갔다. 이 상황은 너무 이상했다.이준혁이 도대체 뭘 하려고...윤혜인은 놀란 가슴에 떨리는 목소리로 고함쳤다.“변태예요?”“난 변태가 아닌데?”이준혁은 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정색한 표정보다 더 무서웠다.“과거를 추억하는 걸 좋아한다며? 그럼...”이준혁은 기다랗고 아름다운 손가락으로 윤혜인의 턱을 들어 올렸다. “내가 너에게 예전에 네가 날 남편이라고 불렀을 때 우리가 뭘 하고 있었는지 기억시켜 줄까?” 윤혜인은 억지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썼지만 한계에 이르렀다.“이준혁! 당신은...”미처 내뱉지 못한 말들은 이준혁의 입술 속에 파묻혀 전부 삼켜졌다.“읏...”윤혜인은 가볍게 신음을 냈고 이 상황에서 도망치려고 했지만 이준혁이 더 강하게 당겨 그의 품에 안겨 더 진한 키스를 하게 됐다.진한 키스에는 이준혁의 알아채기 어려운 인내
이준혁은 아름의 예쁘고 자그마한 얼굴을 보자 순간 온몸이 굳어버렸다.그날 이준혁의 직감이 틀리지 않았다. 이 소녀는 윤혜인의 딸이 분명했다.윤혜인과 그 남자와의 딸이었다.이 사실은 이준혁의 심장을 무형의 덩굴로 엉킨 것처럼 고통스러웠고 호흡하기도 어려워졌다.부드럽고 향기로운 아름이 차석에서 이준혁의 품으로 뛰어들었다.아름의 연꽃처럼 하얗고 야들야들한 작은 팔이 이준혁의 목을 감았고 자연스럽게 이준혁에게 물었다.“아빠, 아름를 찾으러 왔어요?”아름이 이토록 친밀하게 대하자 이준혁도 어리둥절해졌다.솔직히 말해서 윤혜인 이외의 사람이 이준혁과 친밀한 접촉을 하는 행동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어른이든 아이든 상관없이 다 싫었다.하지만 아름은 ‘아빠'를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어 갑자기 이준혁의 얼굴에 입을 갖다 댔다.“쪽.”앵두처럼 붉은 입술이 이준혁의 얼굴에 닿았다.자신이 선택한 ‘아빠'는 진짜 보면 볼수록 잘생겨 보였다.아름은 유치원 친구 안나에게 자기 아빠가 안나의 아빠처럼 진흙이 묻은 지 오래된 물통 같은 아빠가 아닌 세상에서 가장 잘생긴 아빠라고 말하고 싶었다.비록 엄마가 아름에게 딴 사람에게 함부로 별명을 짓지 말라고 가르침을 받았지만 안나의 아빠에게 별명을 지은 건 이유가 있었다. 그건 바로 지난번에 안나가 아름을 아빠 없는 들개라고 조롱할 때 안나의 물통 아빠도 안나와 함께 윤혜인을 조롱했기 때문이었다.흥!아름은 마음속으로 안나의 아빠를 오래된 물통이라고 부르기로 했다.아름은 앳된 목소리로 이준혁에게 물었다. “아빠, 아름를 놀이공원에 데려가려고 오신 건가요?”이준혁은 눈앞의 어린 소녀를 복잡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얇은 입술은 몇 번 움직였지만 끝내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아까 이준혁의 뺨에 맞춘 달콤한 뽀뽀에는 심지어 약간 끈적한 침이 묻어 있었다.그러나 이준혁은 의외로 그게 싫지 않았고 오히려 마음 깊은 곳에서 본능에 끌린 듯 친밀감이 일어났다. 원래 아름을 밀어내려고 했던 손도 동작을 멈추고 아름이 넘
‘이 남자는 분명 내 아빠잖아. 내가 공항에서 고른 아빠란 말이야.’윤혜인은 한숨을 내쉬며 속삭이듯 아름을 달랬다. “아름아, 이분은 삼촌이지 아빠가 아니야. 네가 이렇게 함부로 아빠라고 부르면 삼촌이 괴로워할 거야. 알겠어?”아름은 아직 어린 소녀인지라 괴롭다는 것은 좋지 않고 싫어한다는 뜻이라는 걸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아름이 ‘아빠'를 아빠라고 부르면 ‘아빠'가 싫어하는 걸까?아름은 너무 슬펐다.이 순간, 아름은 가장 좋아하는 인형을 다른 사람에게 선물했는데 그 사람이 인형을 쓰레기통에 버린 것 같은 슬픔을 느꼈다.아름은 작은 입이 힘없이 축 처졌고 샘물처럼 맑은 두 눈도 어느새 촉촉해진 채 내리깔고 말했다.“아름이 알았어요...”윤혜인은 아름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법을 가르쳤다.“그럼 삼촌에게 작별 인사해 봐.”이때 이준혁은 이미 차에서 내려와 윤혜인과 아름의 앞에 서 있었다.물론 윤혜인이 아름에게 가르친 말을 전부 다 들었다.윤혜인은 아빠라고 부르면 이준혁이 괴로울 것이라고 했다.사실 진짜 괴롭다고 하더라도 그건 달콤한 ‘괴로움'일 것이다.아름은 진짜 내키지 않았지만 작은 입을 살짝 내밀고 이준혁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삼촌, 안녕히 가세요.”아름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인사했다.순간, 이준혁의 마음은 알 수 없는 힘에 무겁게 한 대 맞은 것 같았다.이준혁은 아름을 번쩍 안아 올려 달래고 싶었다.이준혁의 눈동자에 불분명한 감정이 요동치고 있었다.왜 자기가 다른 사람의 아이에게 이렇게 강렬한 감정이 생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윤혜인은 이준혁이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아름을 빤히 쳐다보는 모습을 보며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불안감이 더 차올랐다. 아름이 이준혁과 더 이상 불필요한 접촉이 발생하길 원하지 않았다.윤혜인은 아름의 작은 손을 잡고 이준혁에게 살짝 머리를 숙여 인사하고 돌아서 별장에 들어가려 했다.“잠깐만.” 이준혁이 두 사람을 불렀다.윤혜인은 걸음을 멈추
어린 소녀는 이내 깊은 잠에 빠졌다.윤혜인은 방으로 돌아왔지만 오랜 시간 동안 잠들지 못했다.어쩌면 서둘러 아름의 성장에 참여할 아빠를 아름에게 찾아주어야 할지도 모른다. 오재윤이 천국에서 내려다보고 있다면 윤혜인의 결정에 동의할 것이라고 확신했다.다만 찾아야 할 아빠 후보는 반드시 이혼 후에 물색해야 한다.윤혜인은 또 이유를 알 수 없이 불쑥 튀어나온 그 남편이 생각나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그래서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베개 밑에서 헤적거렸다.‘개자식!’...술집에서 세 명의 남자가 바에 앉아 말없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첫 라운드가 이미 끝났고 김성훈은 앞장서 두 번째 라운드를 이어갔다.이준혁이 오늘 술잔을 연이어 비우는 모습을 보자 김성훈은 약간 충격을 받았다.“오늘 왜 이렇게 많이 마시는 거야?”이준혁은 굳은 표정을 지으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윤혜인이 돌아왔는데 기쁘지 않아? 왜 인상을 험하게 쓰며 그 난리야?” 김성훈이 의아해하며 물었다.침묵을 지키던 이준혁이 갑자기 되물었다. “임신 상태가 2년 동안 지속된 사례가 있어?”“푸흡!”김성훈의 입에서 술이 뿜어져 나왔다.“뭐 괴물이라도 임신한 거야? 출산하는 게 그렇게 어려울 정도로?” 김성훈이 말을 이었다.“11개월 동안 임신한 사례도 거의 없는데 2년이란 게 말이 돼? 아이를 낳자마자 유치원에 바로 보내야 하겠네?”이준혁 마음속에서 타오르는 희망의 불꽃에 찬물을 끼얹어 꺼버리는 것 같았다.답답한 마음을 술병을 들어 건배하는 방식으로 풀었다.김성훈은 이준혁의 질문이 무슨 뜻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너 혹시... 윤혜인의 아이를 만났어?”이준혁은 무표정을 유지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김성훈이 무심하게 물었다. “그 아이는 누구를 닮은 거 같았어?”이준혁은 기억을 되새겨 보았다.동그랗고 살굿빛이 나는 눈동자, 기다란 속눈썹, 계란형 얼굴, 그리고 웃을 때 정말 윤혜인을 닮은 것 같았다.“아이의 엄마를 닮은 거 같아.”자꾸 언급되던 오재윤에
소종은 육경한이 아이들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교도소 안에 있을 때 육경한은 모든 사람들의 면회를 거절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두 아이를 그리워했다.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타세요, 대표님.”소종이 침묵을 깨며 한마디 했다.육경한이 차에 타자 소종은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이 대표님 가족이 소 대표님을 잘 돌봐주셨어요. 아이들끼리도 친하게 지내고... 그리고 김 대표님도 하정이와 유진이를 돌봐주셨어요... 그리고 윤혜인 사모님의 오빠가 8년 전에 결혼했어요. 집 가정부의 딸 구지윤 씨와 결혼했어요. 처음에 할아버지가 많이 반대했지만 지금은 행복하게 잘살고 있어요. 딸을 낳으면서 할아버지도 받아들이셨고요... 아, 참. 예전에 소 대표님과 친하게 지냈던 여경 강민혜 씨, 기억하시죠? 소 대표님의 친동생이었더라고요. 당시 소 대표님의 어머니가 과다 출혈로 위독하셨을 때 그 여경이 수혈해 줬거든요. 소 대표님이 두 사람의 혈액형이 같은 것을 알고 친자 확인을 했더니 강민혜 씨가 정말 친동생이었어요. 예전에 도둑맞아 죽었다고 알려졌던 아이가 사실은 살아 있었던 거죠...”소종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차는 어느새 호화로운 호텔 앞에 도착했다.그들이 육경한을 위해 환영회를 준비한 듯했다.육경한이 말했다.“이런 거 필요 없어. 어떤 모임에도 참석하고 싶지 않아. 그냥 쉬고 싶어.”그러자 소종이 바로 말했다.“안 돼요. 오늘 식사 자리에는 꼭 가야 해요.”황진수도 말했다.“맞아요, 육경한 씨. 소소하게 준비한 것이니 우리 마음을 봐서라도 꼭 참석해 주세요.”마지못해 차에서 내린 육경한은 호텔 룸에 들어간 순간 방 안에 익숙한 얼굴들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예쁜 소녀가 육경한에게 다가오더니 큰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고 말했다.“그쪽이 우리 아빠예요?”자신과 닮은 소녀의 눈매에 육경한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육하정이 계속 말했다.“엄마가 말했어요. 아빠가 잘못을 저질러
법정 안, 판사가 선고했다.“피고인 육경한, 살인죄로... 그러나 피해자와의 갈등 관계를 고려하고 증인의 증언을 종합하여 본 법정은 다음과 같이 판결합니다. 육경한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합니다...”“대표님...”방금 깨어나서 법정에 나와 주석훈의 살인을 증언한 소종은 울며 육경한을 불렀다.뒤에 서서 두 달 된 아기를 안고 있는 소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시울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아기의 얼굴과 핑크색 이불을 본 육경한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는 더 이상 소원에게 할 말이 없었다. 대신 소종을 보며 한마디 했다.“잘 돌봐줘.”육경한이 누구를 말하는지 바로 캐치한 소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요.”...15년 후, 구치소 대문 앞.15년 전 입소할 때 입었던 옷을 입고 나온 육경한은 여전히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걸었다.교도소에 있는 동안 좋은 표현 덕분에 감형을 받아 조기 출소했다.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육경한의 얼굴에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더 깊고 온화한 매력을 내뿜었다.구치소 밖에서는 황진수와 소종이 육경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종이 가장 먼저 달려와 그를 붙잡고 울었다.“대표님, 고생 많으셨어요!”키가 185cm나 되는 팔이 하나뿐인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대표님...”옆에 있던 황진수가 육경한에게 담배를 건네자 담배를 받은 육경한은 깊게 빨아들인 뒤 말했다.“내 재봉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 나중에 너희들에게 옷 한 벌 만들어 줄게.”소종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슬픈 분위기가 육경한의 한 마디에 완전히 뒤바뀌었다.소종이 울다가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기대하고 있을게요.”육경한이 코웃음을 쳤다.“꺼져.”먼 곳을 바라본 육경한은 소종과 황진수 외에 그를 맞이하러 온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왠지 실망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들었다.그녀가 오지 않아도... 괜찮았다.결코 좋은
“두 번째 것을 선택할게.”죽어도 소원을 구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온 육경한이었기에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대답했다.“허허, 육 대표가 소원을 정말 많이 아끼나 봐.”주석훈이 비꼬는 듯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그럼 시작하지. 육 대표, 6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죽은 소녀의 이름이 뭔지 기억나?”자리에 얼어붙은 육경한은 주석훈이 혹시라도 소원을 해칠까 봐 바로 앞으로 두 걸음 걸었다. 덫이 ‘탁탁’ 소리를 내며 그의 두 다리를 집었고 이내 피가 철철 흘렀지만 육경한은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몰라.”손에 칼을 움켜쥔 주석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 소녀의 이름은 수정이야. 육 대표처럼 모든 지원을 다 받아 치료받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겠지.”큰 고통 속에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육경한이 입을 열었다.“그 교통사고에서 소녀가 죽은 것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우리 미우 그룹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어. 그 사람들이 나를 먼저 치료한 이유는 대동맥이 눌러져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소녀도 나와 똑같이 심각한 상태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어. 그래서 그 후에 소녀의 가족에게 위로금도 보냈어.”육경한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소녀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 그녀의 부모님이 통곡하는 모습을 본 육경한은 소종을 시켜 소녀의 가족에게 2억 원의 위로금을 전달했다.“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주석훈이 매서운 눈빛을 내뿜으며 큰소리로 외쳤다.“어쨌든 넌 살아남았고 나의 수정이는 떠났어. 아무도 우리 수정이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주석훈은 더 이상 게임 따위 생각하지 않은 채 미친듯이 울부짖었다.“너희들은 모두 냉혈 인간들이야. 너희들은 죽어도 싸!”말을 마친 주석훈이 칼을 휘둘러 소원의 배를 찌르려 하자 육경한은 재빨리 몸을 날려 자신의 종아리로 칼을 막았다.소원을 밀어낸 육경한은 격렬한 고통을 참으며 주석훈과 맞붙었다.팔다리가 멀쩡한 주석훈은 이내 다리가 다친 육경한보다 우위를 점했다.도우려고 한 발 나선 소
이후 남자는 기분이 좋은 듯 소원의 입에 물린 천을 빼주며 말했다.“어떻게 여기에!”소원은 깜짝 놀랐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를 계속 도와주던 주석훈이었다!자신에게 접근한 의도를 의심한 적은 있었지만 나중에 그의 여자친구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과는 원한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 모든 사건의 배후가 주석훈이라니...“소원, 많이 놀랐지?”가면을 벗어 던진 주석훈은 마치 조금 전까지 잔인했던 사람이 본인이 아닌 듯 아주 평온해 보였다.“왜... 이렇게까지?”소원은 처음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왼손을 사용해 물건을 잡는 모습을 보고 바로 깨달았다.“너였어!”소원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상철 삼촌과 진아연을 죽인 사람이 너! 맞지?!”주석훈은 부인하지 않았고 그의 표정 또한 모든 걸 말해주듯 가볍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소원, 그 사람들은 죽어도 싼 사람들이야. 그들이 죽었으니 네가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사람들이 공모해서 네 아버지를 죽였잖아?”“아니야!”소원은 단호하게 부정했다.“그 사람들은 단순히 조종당한 희생양일 뿐이야. 내 아버지를 죽인 진짜 범인이 너였어?! 넌 그냥 증거 인멸을 한 거야!”“소원, 정말 똑똑하네?!”칭찬하듯 한마디 한 주석훈의 말에 소원은 분노로 가득 차올라 외쳤다.“왜! 아빠가 뭘 잘못했다고 죽인 건데?!”주석훈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원, 네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이유? 알고 싶어? 나와 육경한 사이에 깊은 원한이 있기 때문이야.”“그게 아빠와 무슨 상관인데!”소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렇게 간단한 이치를 모른다고?”주석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진용이 죽어야만 너와 육경한의 갈등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 넌 내 손에 있는 최고의 무기야. 넌 육경한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 줄 수 있는 존재지. 지난 5년 동안, 본인만의 원칙이 있는 사람이 그것을 깨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즐거운
소원이 두 손을 머리 위로 든 채 남자의 방향으로 걸어가자 남자는 다친 전미영을 바닥에 내던졌다.전미영은 이미 의식을 잃었기에 지금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다.소원은 체념한 듯 보였지만 사실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몰래 반지 속의 장치를 작동시켰다.이내 독이 묻은 바늘로 남자의 팔을 찌르자 팔이 곧바로 마비되기 시작한 남자는 저린 감각이 팔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망할 년! 감히 날 속여?”남자는 분노하며 소원을 발로 걷어찼다.배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돌린 소원은 엉덩이가 세게 걷어차인 바람에 비틀거리며 앞으로 두 걸음 나아갔다. 다행히 앞에 소파가 있었기에 소파를 붙잡고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은 뒤 있는 힘껏 소리쳤다.“살려 주세요! 도와주세요...!”그러나 남자가 바로 달려와 순식간에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최면제의 효과가 서서히 올라옴과 동시에 문을 걷어차는 소리와 몇 발의 총성이 희미하게 울리는 것이 들렸다.소원은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제발 엄마를 구해 주세요...’그러고는 있는 힘을 다해 목걸이를 바닥으로 내던진 뒤 점점 의식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희미하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운송 차 안인 듯한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었다.입안에는 천이 틀어막혀 있었고 팔도 밧줄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순간 소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결국 구출되지 못하고 가면을 쓴 남자에게 끌려온 것이다.주위에 전미영이 보이지 않자 소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엄마가 같이 끌려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엄마를 병원으로 옮겼을 거야. 그러면 희망이 있어.’하지만 엄마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기에 속으로 행운을 빌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이 납치범에 대한 분노가 가슴 속 깊이 밀려왔다.‘이 사람은 대체 우리와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런 짓을 하는 거지?’덜컹거리며 달리는 차 안에 있는 소원은 졸음이 밀려왔다.임신 후기라서 그런지 이런 상황에서도 극심한 피
육경한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그 여경을 찾아서 같이 있도록 해. 이 사람이 아직도 쇼핑몰 안에 있을 가능성이 커. 나도 지금 돌아가는 중이야...”소원은 순간 숨을 죽인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앞을 응시했다.바로 앞에 하얀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한 중년 여성을 붙잡고 있었다. 그 중년 여성이 바로 모두가 찾는 전미영이었다.육경한의 말대로 그녀의 엄마는 정말 여기에 있었다.육경한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계속 들렸지만 소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전미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가면을 쓴 이 교활한 남자는 사람을 쇼핑몰 안에 붙잡아둔 채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짜 번호판 차량은 아마도 이 남자가 미리 파놓은 함정일 것이다.그녀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똑똑한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심리를 읽을 줄 알았다.가면 쓴 남자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소원에게 말을 하지 말고 전화를 끊으라는 뜻을 내비쳤다.자기 엄마가 상대방의 손에 있기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전화를 끊은 후 가면을 쓴 남자가 그녀에게 한마디 지시했다.“전화기를 꺼서 이쪽으로 던져.”소원은 남자의 말대로 순순히 전화기를 끄고 그의 앞에 던진 후 한마디 물었다.“누구세요? 지금 뭘 원하는 거예요? 제발 우리 엄마만 해치지 마세요!”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소원은 남자를 향해 두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그녀의 유일한 요구는 상대방이 엄마를 해치지 않는 것이었다.말을 하면서도 소원은 몰래 주변을 관찰했다. 가면 쓴 신비로운 남자는 정말 교묘한 장소를 선택했다.화장실은 휴게실 제일 안 쪽에 있었고 뒤쪽에 있는 창문과 거리가 가까웠다.남자는 전미영을 붙잡고 입구 쪽에서 소원과 정면으로 마주서 있었다. 이렇게 하면 좁은 포위망이 형성되어 소원을 한 구석에 가둘 수 있다.남자는 손에 흉기를 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제작한 권총 비슷한 것
강민혜는 즉시 지시를 내려 이 수상한 차량을 중점적으로 조사하라고 했다. 육경한이 회사의 위기 대응팀과 협력해 조사하라고 지시하자 그들은 이내 차량의 이동 경로를 찾아냈다.육경한은 즉시 차량을 출동시켜 추적하도록 했지만 소원더러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현재 상대방의 목표가 소원의 엄마가 아니라 임신 중인 소원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게다가 차량 추격은 너무 자극적이어서 소원 같은 임산부에게 위험할 수 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그녀를 배려하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원이 차량 추격에 참여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어머니를 찾지 못하고 본인까지 안 좋은 상황이 되면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친 셈이 된다.육경한의 부탁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라 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육경한은 회사 경호원 한 팀을 불러 상대방의 차량을 추적하도록 했다.쇼핑몰에 남아 있는 경호원들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소원을 경호했다. 소원의 걱정을 덜기 위해 육경한도 차량 추적에 나섰다.이렇게 되어 여러 대의 차량이 CCTV에 찍힌 그 검은 차를 추적하기 시작했다.소원은 쇼핑몰의 휴게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불안감에 휩싸인 그녀는 심박 수가 빨라져 의사가 와서 경고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그녀의 몸에도 해로울 뿐만 아니라 조산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소원이 걱정된 강민혜는 현장에 남아 그녀를 달랬고 소원이 화장실에 갈 때도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했다.소원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를 했고 강민혜도 옆에서 그녀를 위로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님은 분명 괜찮을 거예요. 그렇게 큰 고비도 넘겼는데 별일 없을 거예요. 게다가 경찰과 육 대표님이 모두 추적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마음 놓으세요.”본인이 아무리 불안해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육경한이 좋은 소식을 전해주길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불편한 몸 때문에 자꾸 구역질이 났다.이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육경한이었다.당황한
육경한이 성큼성큼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 장모님은?”“엄마가 사라졌어...”소원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충돌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전미영은 그녀 곁에 서 있었다.어떻게 된 일일까... 눈 깜짝할 사이에 전미영이 사라졌다.전미영은 걸을 수는 있지만 말을 잘하지 못하고 지능도 두세 살 아이 수준인데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소원이 급히 찾으러 가려 하자 육경한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달랬다.“너무 급해 하지 마. 우선 CCTV를 보자. 경호원들에게 찾으라고 했어. 네가 걷는 것보다 경호원들이 움직이는 게 빨라.”소원도 육경한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최대한 침착한 마음가짐으로 엄마를 찾아야 했다. 절대 당황하면 안 되었다.두 사람이 CCTV 실로 향했을 때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전미영이 사라지는 영상을 찾아냈다.영상을 보니 전미영은 처음에는 경호원의 뒤, 소원 곁에 서 있었다.하지만 조금 전 말싸움이 일어나면서 그 남자가 경호원과 몸싸움을 하려 하자 경호원들은 소원이 다칠까 봐 소원과 육경한 주변으로 몰렸다.그러면서 전미영은 자연스럽게 뒤에 갔다. 원래대로라면 전미영도 별일 없어야 했지만 무슨 일인지 전미영이 갑자기 혼자 모퉁이 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그곳에 그녀를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그녀는 불과 7, 8걸음 되는 모퉁이까지 아주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한편 소원과 육경한에게 정신이 팔린 경호원들은 전미영을 발견하지 못했고 전미영이 뒤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다음 모퉁이의 CCTV에는 소원이 비상구로 들어가는 것이 찍었다. 계단에 CCTV가 없었고 출구에 CCTV가 한 대 있었지만 전미영의 모습은 어디에도 찍히지 않았다. 즉 전미영이 출구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그렇다면 유일한 통로는 지하 주차장이었다. 하지만 지하 주차장 출구의 CCTV가 때마침 고장이 나 있어 전미영이 그 출구로 나갔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전미영이 실종된 지 불과 몇 분, 실종자를 한 시간 이내에
두 모자가 가식적으로 불쌍한 척하며 사람들의 동정을 구걸한 것을 안 사람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 모자를 제일 먼저 도우려고 나섰던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소원에게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눈이 어두웠네요.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는 정말 톡톡히 교육해야 해요. 얼마든지 책임을 물으세요.”주변 사람들도 같은 입장이었다.입장을 바꿔 생각해 봤을 때 본인이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를 만난다면 분명 화가 날 것이다.게다가 이 모자는 역할 분담이 명확했다. 아들은 말썽을 부리고 엄마는 말재주를 발휘해 변명했다. 누구나 이런 일이 생긴다면 진짜로 화가 날 것이다.구경꾼들이 흩어진 후 육경한은 두 모자의 앞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아이를 내려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시킨 거야?”엄마가 아이를 뒤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다고 했잖아요. 그냥 우리 애가 장난친 거예요.”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왜 이래요... 우리가 그냥... 사과할게요... 아이고, 내가 왜 이렇게 불행한지...”그들은 완전히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피해자인 척하고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고 주위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이상해 보였다.조금 지친 소원이 육경한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됐어, 이만 가자.”“1분만 기다려.”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육경한은 아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압박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누가 너를 시켰는지 말해. 안 그러면 바로 고소할 테니까.”겁이 많은 아이는 바로 오줌을 지리더니 이내 ‘와’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아저씨가...”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육경한이 아이의 엄마를 밀어내고 차가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똑바로 말해!”“어떤 아저씨가... 아주머니와 부딪히면 엄마에게 100만 원을 준다고 했어요... 엄마가 그러면 게임기를 사주겠다고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