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혁의 몸이 아래로 기울어졌고 위협적인 숨결을 내뿜으며 윤혜인을 응시했다. “얼마나 대단한데?”“뭐... 그냥...”대충 얼버무리고 난 후에 윤혜인은 얌전하게 입을 다물었다.원래 임시로 꾸며낸 거짓말이었기 때문에 윤혜인은 오재윤이 도대체 어떻게 대단한지 설명하기 어려웠다.이준혁의 눈부시게 잘생긴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고 매력적인 중저음 목소리도 들려왔다.“내가 자를 줄까? 네가 한번 측정해 봐, 과연 누가 더 대단한지.”“...”윤혜인의 표정이 굳어지고 해맑은 눈동자가 여러 번 깜박였다. “뭘 측정하라고요?”이준혁은 목소리를 더 낮춰 말했다.“네 생각엔 뭘 말하는 것 같아?”윤혜인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설마 그걸 말하는 건 아니겠지... 이 변태 새끼가!’“오재윤은 그렇게 자세히 기억하면서 나에 대한 기억은 하나도 없단 말이야?”이준혁은 윤혜인의 손을 잡고 아래로 내려가며 말했다. “내가 네 기억 회복을 도와줄까?”윤혜인은 사태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걸 감지하고 손바닥을 본능적으로 뒤로 뺐지만 이준혁이 꽉 잡고 놓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이준혁의 손을 따라 아래로 끌려갔다. 이 상황은 너무 이상했다.이준혁이 도대체 뭘 하려고...윤혜인은 놀란 가슴에 떨리는 목소리로 고함쳤다.“변태예요?”“난 변태가 아닌데?”이준혁은 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정색한 표정보다 더 무서웠다.“과거를 추억하는 걸 좋아한다며? 그럼...”이준혁은 기다랗고 아름다운 손가락으로 윤혜인의 턱을 들어 올렸다. “내가 너에게 예전에 네가 날 남편이라고 불렀을 때 우리가 뭘 하고 있었는지 기억시켜 줄까?” 윤혜인은 억지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썼지만 한계에 이르렀다.“이준혁! 당신은...”미처 내뱉지 못한 말들은 이준혁의 입술 속에 파묻혀 전부 삼켜졌다.“읏...”윤혜인은 가볍게 신음을 냈고 이 상황에서 도망치려고 했지만 이준혁이 더 강하게 당겨 그의 품에 안겨 더 진한 키스를 하게 됐다.진한 키스에는 이준혁의 알아채기 어려운 인내
이준혁은 아름의 예쁘고 자그마한 얼굴을 보자 순간 온몸이 굳어버렸다.그날 이준혁의 직감이 틀리지 않았다. 이 소녀는 윤혜인의 딸이 분명했다.윤혜인과 그 남자와의 딸이었다.이 사실은 이준혁의 심장을 무형의 덩굴로 엉킨 것처럼 고통스러웠고 호흡하기도 어려워졌다.부드럽고 향기로운 아름이 차석에서 이준혁의 품으로 뛰어들었다.아름의 연꽃처럼 하얗고 야들야들한 작은 팔이 이준혁의 목을 감았고 자연스럽게 이준혁에게 물었다.“아빠, 아름를 찾으러 왔어요?”아름이 이토록 친밀하게 대하자 이준혁도 어리둥절해졌다.솔직히 말해서 윤혜인 이외의 사람이 이준혁과 친밀한 접촉을 하는 행동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어른이든 아이든 상관없이 다 싫었다.하지만 아름은 ‘아빠'를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어 갑자기 이준혁의 얼굴에 입을 갖다 댔다.“쪽.”앵두처럼 붉은 입술이 이준혁의 얼굴에 닿았다.자신이 선택한 ‘아빠'는 진짜 보면 볼수록 잘생겨 보였다.아름은 유치원 친구 안나에게 자기 아빠가 안나의 아빠처럼 진흙이 묻은 지 오래된 물통 같은 아빠가 아닌 세상에서 가장 잘생긴 아빠라고 말하고 싶었다.비록 엄마가 아름에게 딴 사람에게 함부로 별명을 짓지 말라고 가르침을 받았지만 안나의 아빠에게 별명을 지은 건 이유가 있었다. 그건 바로 지난번에 안나가 아름을 아빠 없는 들개라고 조롱할 때 안나의 물통 아빠도 안나와 함께 윤혜인을 조롱했기 때문이었다.흥!아름은 마음속으로 안나의 아빠를 오래된 물통이라고 부르기로 했다.아름은 앳된 목소리로 이준혁에게 물었다. “아빠, 아름를 놀이공원에 데려가려고 오신 건가요?”이준혁은 눈앞의 어린 소녀를 복잡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얇은 입술은 몇 번 움직였지만 끝내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아까 이준혁의 뺨에 맞춘 달콤한 뽀뽀에는 심지어 약간 끈적한 침이 묻어 있었다.그러나 이준혁은 의외로 그게 싫지 않았고 오히려 마음 깊은 곳에서 본능에 끌린 듯 친밀감이 일어났다. 원래 아름을 밀어내려고 했던 손도 동작을 멈추고 아름이 넘
‘이 남자는 분명 내 아빠잖아. 내가 공항에서 고른 아빠란 말이야.’윤혜인은 한숨을 내쉬며 속삭이듯 아름을 달랬다. “아름아, 이분은 삼촌이지 아빠가 아니야. 네가 이렇게 함부로 아빠라고 부르면 삼촌이 괴로워할 거야. 알겠어?”아름은 아직 어린 소녀인지라 괴롭다는 것은 좋지 않고 싫어한다는 뜻이라는 걸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아름이 ‘아빠'를 아빠라고 부르면 ‘아빠'가 싫어하는 걸까?아름은 너무 슬펐다.이 순간, 아름은 가장 좋아하는 인형을 다른 사람에게 선물했는데 그 사람이 인형을 쓰레기통에 버린 것 같은 슬픔을 느꼈다.아름은 작은 입이 힘없이 축 처졌고 샘물처럼 맑은 두 눈도 어느새 촉촉해진 채 내리깔고 말했다.“아름이 알았어요...”윤혜인은 아름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법을 가르쳤다.“그럼 삼촌에게 작별 인사해 봐.”이때 이준혁은 이미 차에서 내려와 윤혜인과 아름의 앞에 서 있었다.물론 윤혜인이 아름에게 가르친 말을 전부 다 들었다.윤혜인은 아빠라고 부르면 이준혁이 괴로울 것이라고 했다.사실 진짜 괴롭다고 하더라도 그건 달콤한 ‘괴로움'일 것이다.아름은 진짜 내키지 않았지만 작은 입을 살짝 내밀고 이준혁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삼촌, 안녕히 가세요.”아름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인사했다.순간, 이준혁의 마음은 알 수 없는 힘에 무겁게 한 대 맞은 것 같았다.이준혁은 아름을 번쩍 안아 올려 달래고 싶었다.이준혁의 눈동자에 불분명한 감정이 요동치고 있었다.왜 자기가 다른 사람의 아이에게 이렇게 강렬한 감정이 생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윤혜인은 이준혁이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아름을 빤히 쳐다보는 모습을 보며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불안감이 더 차올랐다. 아름이 이준혁과 더 이상 불필요한 접촉이 발생하길 원하지 않았다.윤혜인은 아름의 작은 손을 잡고 이준혁에게 살짝 머리를 숙여 인사하고 돌아서 별장에 들어가려 했다.“잠깐만.” 이준혁이 두 사람을 불렀다.윤혜인은 걸음을 멈추
어린 소녀는 이내 깊은 잠에 빠졌다.윤혜인은 방으로 돌아왔지만 오랜 시간 동안 잠들지 못했다.어쩌면 서둘러 아름의 성장에 참여할 아빠를 아름에게 찾아주어야 할지도 모른다. 오재윤이 천국에서 내려다보고 있다면 윤혜인의 결정에 동의할 것이라고 확신했다.다만 찾아야 할 아빠 후보는 반드시 이혼 후에 물색해야 한다.윤혜인은 또 이유를 알 수 없이 불쑥 튀어나온 그 남편이 생각나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그래서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베개 밑에서 헤적거렸다.‘개자식!’...술집에서 세 명의 남자가 바에 앉아 말없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첫 라운드가 이미 끝났고 김성훈은 앞장서 두 번째 라운드를 이어갔다.이준혁이 오늘 술잔을 연이어 비우는 모습을 보자 김성훈은 약간 충격을 받았다.“오늘 왜 이렇게 많이 마시는 거야?”이준혁은 굳은 표정을 지으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윤혜인이 돌아왔는데 기쁘지 않아? 왜 인상을 험하게 쓰며 그 난리야?” 김성훈이 의아해하며 물었다.침묵을 지키던 이준혁이 갑자기 되물었다. “임신 상태가 2년 동안 지속된 사례가 있어?”“푸흡!”김성훈의 입에서 술이 뿜어져 나왔다.“뭐 괴물이라도 임신한 거야? 출산하는 게 그렇게 어려울 정도로?” 김성훈이 말을 이었다.“11개월 동안 임신한 사례도 거의 없는데 2년이란 게 말이 돼? 아이를 낳자마자 유치원에 바로 보내야 하겠네?”이준혁 마음속에서 타오르는 희망의 불꽃에 찬물을 끼얹어 꺼버리는 것 같았다.답답한 마음을 술병을 들어 건배하는 방식으로 풀었다.김성훈은 이준혁의 질문이 무슨 뜻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너 혹시... 윤혜인의 아이를 만났어?”이준혁은 무표정을 유지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김성훈이 무심하게 물었다. “그 아이는 누구를 닮은 거 같았어?”이준혁은 기억을 되새겨 보았다.동그랗고 살굿빛이 나는 눈동자, 기다란 속눈썹, 계란형 얼굴, 그리고 웃을 때 정말 윤혜인을 닮은 것 같았다.“아이의 엄마를 닮은 거 같아.”자꾸 언급되던 오재윤에
김성훈은 윤혜인의 아이에 관한 얘기가 나오니까 이준혁이 빼앗고 싶어 하는 모습이 가득한 표정이라고 말하고 싶었다.김성훈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윤혜인의 아이가 진짜 귀여울 거라고 짐작했다.이제 시간이 나면 꼭 만나러 가야겠다고 다짐했다.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있을 때, 육경한의 전화벨이 울렸다.휴대폰 너머에서 무슨 말이 왔는지 육경한의 표정이 이내 어두워졌다.육경한은 전화를 끊고 일어서서 자리를 떠났다.김성훈은 육경한의 뒷모습을 보며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그때 소원이 사망한 후, 육경한은 자기 목숨 따윈 안중에도 없이 삶을 허비하며 고통에 허덕였다.김성훈이 곁에서 애써 설득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그러다가 삶을 허비하며 고통에 허덕이는 남자가 두 명이 되었다.두 친구가 너무나 타락한 삶을 사는 걸 번연히 보면서도 김성훈은 아무런 대책도 없었다.다행히도 이준혁은 어머니가 아들을 다시 정신을 차리고 기운 내라고 등을 떠밀어 드디어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보이는 오늘을 맞이할 수 있었다.그리고 육경한에게 남겨진 유일한 목표는 아마 그 사람의 여생과 노후를 책임지는 일일 것이다....클럽에 도착한 육경한은 방문을 하나하나 발로 차서 열어 확인했다.방에서 쾌락에 젖어 있던 남녀들은 한결같이 소란에 놀랐고 잇따라 각종 욕설을 퍼부었다.육경한은 욕설에 아랑곳하지 않고 찾고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으면 주저없이 다음 방 문을 열어제꼈다.클럽의 접대 매니저 영숙은 이 남자가 이렇게 소란을 피우자 깜짝 놀라 허겁지겁 뛰어와 담배를 드리고 불을 붙이며 소통하려고 애썼다.“육 대표님, 왜 이러시는 거죠?”육경한의 잘생긴 얼굴은 험상궂은 기색이 역력했고, 불붙은 담배를 입에 꼬나물고 쌀쌀하게 물었다.“선미는 어디에 있어?”영숙은 그 말에 순식간에 식은땀이 삐질삐질 났다.이 쌍년이 영숙 몰래 원군을 부를 줄 생각하지 못했다. “선, 선미는...”영숙은 우물쭈물하며 말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선미는 오늘 밤에 친한 친구의 생일을 쇠어준다며
턱은 마치 압력계로 눌러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아팠다.선미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육경한의 사나운 태도에 놀라 가슴이 두근두근 심하게 떨렸다.콩알만 한 눈물이 눈에 고였고 오래도록 떨어지지 않았다.육경한은 선미의 얼굴 중 어느 부위가 그렇게 닮았는지 주의 깊게 살피다 두 눈이 닮았다는 결론을 내렸다.둘 다 위로 휘어진 여우 눈이지만 소원의 눈에는 아무리 비천할 때도 굴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하지만 선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미 이쪽 바닥에서 뒹굴고 놀아나 비굴하고 아부하는 데 능숙한 성격을 갖추게 되었다.그래서 남자를 잘 유혹할 만한 이 여우 눈에는 아부와 순종만이 가득했다.소원과 가장 닮은 것 같으면서도 어찌 보면 가장 닮지 않은 여자인 것 같았다.선미는 꾹 참다가 인내심이 한계에 이르렀다. 계속 이대로 누르면 자기 턱이 분명 육경한의 손에 의해 산산조각 날 것 같았다.놓아달라고 말을 하려던 찰나, 육경한은 눈꺼풀을 내리깔며 흥미를 잃은 것처럼 손을 놓았다.선미는 관성에 의해 바닥에 주저앉았고 심장이 여전히 쿵쾅쿵쾅 심하게 뛰었다.자기 턱이 가짜가 아니라 다행이었다. 가짜였다면 이미 부서졌을 것이다.육경한은 상반신을 펴고 긴 다리를 무심하게 꼬고 앉아 쌀쌀한 말투로 명령했다.“술을 따라.”선미는 부들부들 떨며 술을 따랐고 육경한은 술잔을 술을 벌컥벌컥 마셨으며 어느새 두 병을 다 마셨다.양주는 술기운이 셌다.육경한은 어느새 시선이 흐릿해졌고 눈앞의 여자도 점점 매일 밤 그의 곁에 누워 시간을 보내던 여자와 닮아갔다.육경한은 모호한 말투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소원아...”이 이름은 선미가 처음 듣는 이름이 아니었다.육경한이 처음으로 선미를 지목했을 때 육경한은 선미를 옆에 두고 밤새도록 말없이 얼굴만 바라봤다.육경한은 선미에게 웃지도 울지도 못하게 했고 심지어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게 명령했다.그때부터 선미는 자기가 소리를 내면 그 여자가 아니라는 게 들통나기에 이런 명령을 내리는 걸 눈
그리고 육경한 앞에서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선미가 가늘란 손가락을 내밀자마자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꺼져!"선미는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었다.쿵 하는 소리와 함께 술잔이 선미의 얼굴을 스쳐 뒤쪽의 액정화면에 부딪혀 와르르 깨졌다.남자는 술에 취해 벌겋게 달아오른 눈을 치켜뜨고 사람을 잡아먹으려는 악마처럼 음흉한 소리를 냈다."꺼져!"그 무서운 표정에 선미는 놀라서 다리에 힘이 빠졌다.옷 단추를 잠글 겨를도 없이 허둥지둥 뛰쳐나갔다.밖으로 막 나왔을 때, 영숙이한테 한 발 걷어 맞았다."이년아, 그 남자가 너 좀 더 쳐다보면 데려갈 줄 알았냐?”선미의 마른 몸은 바닥에서 끓은 채 부들부들 떨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정말 아니에요.”"그렇게 포기할 줄 모르고 계속 희망을 품고 발버둥 치더니, 이젠 정신 차렸지?”영숙이는 영수증 한 묶음을 꺼내 선미의 얼굴에 내던졌다. "오늘 밤의 손실한 돈을 다 갚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선미는 그 영수증 위에 찍혀진 어마어마한 숫자를 보고 놀라서 눈물을 펑펑 쏟으며 계속 머리를 조아렸다."잘못했어요, 제발 용서해주세요. 정말 잘못했어요!”이 돈은 그녀가 죽어서도 갚을 수 없는 금액이었다. "네가 벌린 일이야. 사람은 마음이 하늘보다 높아서는 안 돼. 자기 주제를 알아야지. 우리는 단지 너더러 함께 술을 마시라는 것일 뿐인데, 너는 밥 한술에 배불러지고 싶어 하잖아!”영숙이는 조금도 공감할 생각이 없다는 듯이 말했다. "하늘에 너 같은 작은 참새가 날아올라 갈 수 있을 것 같아?”그녀가 이렇게 건방지게 작은 참새 따위가 가지 위로 날아올라 봉황새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어떻게 이렇게 큰 손실을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들이 이 일을 하는 데 있어서, 큰놈에게 미움을 사면 안 된다.육경한처럼 일이 많은 사람한테도 웃는 낯으로 받쳐줘야 한다. 영숙이는 선미의 순진한 얼굴을 보며 말했다. "네가 그를 따라가서 사는 삶은 여기보다 더 비참할 것이야.
이 목소리...육경한의 눈은 순간 뭔가에 홀린 듯 빨갛게 물들었다. 그는 손을 짚고 바닥에서 일어나 이 여자를 자기 품에 껴안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이때 그녀가 검은색 하이힐을 들어 올려 그의 손등에 발을 디뎠다.여자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너 지금, 이 꼴이..."말소리가 잠시 멈추더니 구두 굽이 남자의 손등을 짓눌렀는데 마치 남자의 손바닥을 뚫고 싶은 것 같았다."아무도 원하지 않는 들개 같아.”이 말을 마치자 검은 구두 굽은 육경한의 시선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소원아!"그는 그제야 막혔던 목구멍이 터졌다."가지 마!"그는 입안에 온통 피 냄새였고, 말도 안 되게 쉰 목소리였다.파란색 고급 차의 후미등이 깜빡였는데 마치 그를 비웃고 불쌍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가지 마...”모든 소리가 자동차의 시동 소리 속에 파묻혔다."가지 마...제발...”육경한은 눈 밑이 촉촉하게 되었고, 바닥 위로 눈물을 떨구며 바람 속에서 미친 듯이 소리쳤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다.소종이 찾아올 때까지 말이다.그날 밤, 소중은 육경한을 태우고 온 서울을 돌아다니며 소원을 찾았다.하늘가에 동이 트기 시작했다.소종은 조금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대표님, 어젯밤에 술을 많이 마셨으니 먼저 약을 드실래요?”사실 그는 육경한이 너무 많이 마셔서 환각을 일으켰다고 생각한 것이었다.소원 씨가 죽은 지 이미 5년이 되었다.뒷좌석에 앉은 육경한은 검은색 셔츠 위에 흙을 뒤집어쓴 채 풀이 죽어 있었다.그는 손등의 핏자국을 보며 엉뚱하게 대답했다. "그녀가 돌아왔어.”소종은 여전히 그가 헛것을 봤다고 생각했다.'만약 소원 씨가 아직 살아 있다면 대표님 집에 누워있는 사람은 또 누구야?'소종은 감히 계속 생각하지 못했고, 진저리가 났다....아침에 작업실에 가려 하는 윤혜인이 차에 올라탔는데 운전자는 기사가 아니라 곽경천이었다."오빠, 오늘 안 바빠?”"응, 내가 데려다줄게.”곽경천은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았다.
소원은 속았다는 생각에 머리가 윙 해졌다. 아니, 소원이 속은 게 아니라 서씨 가문이 너무 교활했고 혹시나 누군가 결혼식에 훼방을 놓을까 봐 만반의 준비를 한 것이다.캔디를 줍던 소원은 그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파티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아니 다 줍지도 않고 어딜 가는 거예요?”화가 잔뜩 난 웨이터가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지금 바로 매니저님 찾아가서 덤벙거리기만 하는 당신을 자르라고 할 거예요.”결혼식 현장.서씨 가문과 육씨 가문이 공동으로 준비한 결혼식이었기에 호화롭기 그지없었고 축하해주러 온 사람도 많았다.사회자의 열정적인 소개와 함께 하얀 드레스를 입은 육연주가 친인척의 손을 잡고 서서히 등장했다.버진 로드의 끝에는 빨간 벨벳 턱시도를 입고 가슴에 꽃을 단 신랑이 보였다. 기다란 체구와 꼿꼿한 자세가 신랑을 더 도도하고 우아해 보이게 했다.육연주는 남자의 준수한 얼굴을 보자마자 심장이 벌렁거렸다. 이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지만 드디어 이 남자를 손에 넣고 서씨 가문 사모님이 되었다.그렇게 신랑 앞까지 걸어간 육연주의 친인척이 육연주의 손을 신랑에게 넘겨줬지만 신랑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잘생긴 얼굴은 육연주의 손을 받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현장의 분위기가 싸늘해지자 사회자가 어색하게 웃으며 귀띔했다.“신랑분, 신부님 손을 잡아주세요.”사회자의 귀띔에도 서현재가 움직이지 않자 하객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어떻게 된 거야. 혹시 신랑은 결혼하기 싫은 거 아니야?”“그러니까. 근데 신부가 약간 막무가내래. 성격이 오만하면서도 사납다고 들었는데 아마도 서씨 가문 도련님이 후회한 게 아닌가 싶다.”“하기 싫은 건 그렇다 치고 그러면 미리 파혼해야 할 거 아니야. 이제 와서 성질부리면 양가 가문의 체면은 어떡해.”“허허. 억지로 결혼시킨 결과라고 봐야지...”“근데 신랑 어딘가 이상하지 않아?”“어디가?”“예전에 신랑을 본적이 있는데 이렇게 멍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말이 좋아 멍하지 서현재는 거의
소원은 바로 대기실 방향으로 향했지만 대기실 앞도 누군가 지키고 있었다.‘서씨 가문 너무 오버하는데?’지금 보면 서씨 가문은 소원만 경계하는 게 아니라 서현재도 같이 경계하고 있었다.‘설마 현재가 뭘 발견했는데 서씨 가문에서 그걸 알아챘나?’소원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걱정되어 들어가 물어보려 했지만 문 앞을 지키고 있는 보디가드들의 경비가 너무 삼엄해 파리 한 마리조차 그냥 들여보내지 않을 것 같았다.너무 다급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던 소원은 그저 조용히 옆에서 기다리다 서현재가 나오면 기회를 찾아볼 생각이었지만 한참 동안 기다려도 대기실은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그렇게 두 시간을 족히 쪼그리고 있다가 발이 저려서 감각을 잃어가는데 대기실을 지키던 보디가드가 하나둘씩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소원은 그제야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황을 살펴보려고 대기실로 다가가 문을 살짝 밀어 보니 문이 그대로 열렸다.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 흔적도 없었다.‘뭐지...?’‘왜 텅 빈 대기실을 지키고 있지?’소원은 자기가 속임에 걸려들었다는 걸 알고 밖으로 뛰어가다 같은 유니폼을 입은 웨이터와 부딪히고 말았다.“아야... 무슨 급한 일이 있다고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는 거예요?”웨이터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언짢은 말투로 말했다.“미안해요. 미안해요...”소원이 얼른 사과하고는 자리를 뜨려는데 웨이터가 그녀를 덥석 잡고는 말했다.“어디 가요? 이거 주워주고 가야죠.”바닥에 캔디가 흩뿌려져 있었다. 소원은 어쩔 수 없이 같이 쪼그리고 앉아 캔디를 한 알씩 줍는데 같이 줍던 웨이터가 소원을 힐끔 쳐다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도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예요? 실수로 부딪혔으면 수습할 생각을 해야지 도망가는 게 어딨어요? 매니저님께 알리면 바로 잘릴 거예요.”소원은 웨이터로 위장한 거라 찍소리도 못하고 머리를 숙인 채 열심히 캔디만 주었다. 이때 결혼식 입장을 알리는 익숙한 음악이 가든을 가득 메웠다. 아무래도 결혼식 파티가 시작된 것
육경한은 냉랭한 표정으로 말했다.“지금 당장 서씨 가문 어르신한테 연락해.”“알겠습니다.”소종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바로 서진태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를 받은 것은 도우미였다..“어르신은 주무시고 계십니다.”소종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정말 대단하네요. 손자가 오늘 결혼했는데 이렇게 일찍 잠이 들다니... 참 태평하시네요!”더욱 짜증 난 듯 육경한의 표정이 굳어졌다.“그럼 연주는? 연주는 전화 연결되나?”곧바로 소종이 육연주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역시나 아무도 받지 않았다.소종은 기이하다는 듯 말했다.“이 집안은 정말 이상하네요. 이렇게 큰 경사날에 왜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는 걸까요? 정말 그리 바쁜 건지.”육경한의 마음속에는 불길한 예감이 스며들었다.그는 조사 중 이번 사건이 서진태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을 발견했지만 아직 명확한 증거는 없었다.직접 손을 대지는 않았겠지만 서진태의 성격상 누군가를 이용했을 가능성은 충분했다.그러나 당시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할 여유가 없었고 사실을 알아채자마자 육경한은 바로 사람을 구하러 갔었다.그런데 이제 소원이 다시 서씨 가문으로 간다는 것은 스스로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나 다름없었다.서진태 같은 교활한 사람이 소원이 육연주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이를 이용해 ‘이익을 위한 희생’같은 일을 꾸민다면 소원이 위험에 빠질 것은 자명했다.그렇게 되면 서진태는 모든 책임을 회피할 수 있었고 심지어 육경한의 보복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그야말로 일석이조의 계략이었다.물론 이 모든 것은 육경한의 추측에 불과했지만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이내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육경한은 무거운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더 빨리 가!”...소원은 아침 일찍 서울로 향하는 차를 탔다.아무리 이른 시간에 출발했어도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후 1시가 넘어 있었다.서씨 가문의 결혼식은 저녁에 열릴 예정이었고 아직 늦지는 않았다.결혼식장은 경비가 삼엄했고 저택 전체가 철통같이 둘러싸여 있었다.때
소종이 말한 대로였다. 그 사람들이 얼마나 흉포한지는 이미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과거 미국에서 목숨 걸고 활동하던 시절, 함께 일하던 친구들에게서 그 지역의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그 사람들이 하지 못할 일이란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듣기만 해도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충격이었다.다행히도 미우 그룹은 그런 사업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한국에서 발붙일 수 없었을 것이다.모두가 알다시피 한국은 이러한 불법적이고 회색 지대의 산업에 대해 엄격히 단속하며 절대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이런 위험한 인물들이 한국에서 발호할 기회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이번에 잡힌 자들은 겨우 작은 졸개들일 뿐, 진짜 배후 세력은 여전히 해외에 있었다.이번 작전으로 큰 타격을 입었지만 이곳에서 은신처가 전부 드러나고 파괴된 이상, 그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하여 소종은 육경한이 소원 때문에 이런 사람들과 엮이는 건 정말 가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소원 씨가 배은망덕한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잖아요. 저는 이제 익숙해졌습니다. 대표님이 아무리 잘해줘도 소원 씨는 결국 배신할 뿐이에요.”소종은 소원의 이름만 나오면 마치 한풀이를 하듯 멈추지 않고 말을 쏟아냈다.“그 여자한테는 마음이란 게 없어요! 제발 다시 속지 마세요, 대표님!”그러나 육경한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엉뚱한 말을 꺼냈다.“오늘이 며칠이지?”그러자 소종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네?”“오늘 며칠이냐고 묻잖아!”육경한의 목소리에 짜증이 배어 있었다.“26일입니다.”육경한은 차갑게 중얼거렸다.“오늘이 서현재의 결혼식 날이야.”그제야 소종은 모든 것을 깨달은 듯 눈이 번쩍 뜨였다.‘아하! 그래서였구나! 아침 일찍 사라진 이유가 다 있었어. 분명 그 서씨를 만나러 간 거야.’육경한을 보자 소종은 더더욱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그 여자는 눈을 뜨자마자 다른 남자 만나러 갔는데 대표님은 그 여자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니... 이거 정말 너무 황당한 막장
“안녕하세요.”달콤한 목소리의 여자가 병실 문을 열며 들어왔다.육경한이 고개를 들어 보니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여자는 육경한을 본 순간 눈빛에 놀라움이 스치더니 다가와 말했다.“안녕하세요. 저는 픽업트럭에 있던 사람 중 하나입니다. 모두를 대표해서 감사 인사를 드리러 왔어요.”그녀는 들고 온 과일 바구니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육경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여자는 갈 생각도 없는 듯했다.구해준 사람이 이렇게 잘생겼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그의 외모는 남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음에도 흠잡을 데 없는 이목구비가 돋보였다.마치 드라마 속에서나 볼 법한 ‘냉철한 대표님’ 같았다.날카로운 눈빛과 잘생긴 얼굴은 그녀 같은 평범한 여자들이 평생 가까이할 수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제가 사과 깎아드릴까요?”여자가 먼저 제안했다.하지만 그녀가 사과를 집어 드는 순간, 육경한이 차갑게 말했다.“필요 없어요. 나가세요.”그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갑고 단호했다.여자는 순간 멈칫하며 사과를 손에 든 채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그러고는 이내 눈가가 붉어졌다.“저는 그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을 뿐이에요.”“고마워할 필요 없어요.”육경한은 냉담하게 대꾸했다.“나는 당신들을 구하려고 한 게 아니었으니까요.”이 말을 듣고 여자는 눈이 휘둥그레졌다.‘우리를 구하려 한 게 아니면 왜 목숨을 걸고 그런 위험한 싸움에 뛰어든 거지? 그토록 무모한 일을...’옆에서 육경한의 말을 듣고 있던 소종은 속이 답답해졌다.최근 구급차에서 찍힌 사진이 온라인에 퍼지며 언론은 육경한이 수많은 여성을 구한 영웅이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그 덕분에 미우 그룹의 이미지는 하늘로 치솟았고 주식도 단기간에 급등했다.지금 병원 밖에는 그를 인터뷰하려는 기자들이 몰려 있었다.하지만 육경한의 이런 모습이 퍼지면 언론의 긍정적인 관심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말 것이었다.하여 소종은 재빨리 상황을 수습했다.“죄송합니다. 저희 대표님이 머리를 다쳐서 지금 조
의료진들이 내려와 먼저 소원을 들것에 눕히고 이어 남자도 들것에 옮겨 눕혔다.구급차에 실려 가는 동안, 소원의 마음속은 기쁨이 가득 차 있었다.그녀는 들것에 누운 채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며 감사의 인사를 전하려 했다.하지만 그 순간 닦여진 남자의 얼굴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날카롭게 솟은 눈썹, 칠흑같이 검은 눈동자, 얇고 날렵한 입술.그 얼굴은 다름 아닌 육경한이었다.순간, 소원의 목에서는 감사 인사가 걸려 나오지 않았다.‘왜 저 사람이 여기 있는 거지? 왜 하필 육경한이...’동시에 커다란 절망감이 온몸에 퍼졌다.‘웃기네. 내가 내 원수를 직접 구했다니... 이게 대체 무슨 어이없는 농담이냐고.’하늘은 정말 잔인하게도 그녀를 조롱하고 있었다.남자 역시 소원이 자신을 알아보았음을 눈치챘다.그러나 그는 심각한 부상을 입고 연기를 너무 많이 들이마셔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소원을 향한 그의 검은 눈동자는 복잡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그는 소원보다 더 큰 충격에 휩싸였고 이 상황을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그는 소원이 자신을 구하려 했을 때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음을 알았다.그녀는 육경한을 철저히 낯선 사람으로 여겼고 그런 그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세상에, 어쩌면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구급차 문이 닫히면서 두 사람의 시야는 차단되었다.소원은 현실이 너무 잔혹하다고 느꼈다.왜 육경한이 여기 있는지, 왜 그녀를 구하려 했는지, 왜 결국 자신이 육경한을 구해야 했는지.모든 것이 이해되지 않았고 이해할 수 없었다.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며 결국 그녀는 생각을 멈추고 천천히 잠에 들었다.육경한도 깊은 잠에 빠져 하루 밤낮을 지나서야 깨어났다.눈을 떴을 때, 그의 침대 곁에는 소종이 눈물을 흘리며 앉아 있는게 보였다.“대표님!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정말 돌아가시는 줄 알았습니다!”소종은 울먹이며 말했다.육경한은 여전히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문지르며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썼다.그러나 소종
남자는 말을 할 수 없었지만 손가락을 살짝 움직여 소원의 말을 들었다는 신호를 보냈다.소원은 말했다.“우리에게 기회는 한 번뿐이에요. 반드시 호흡을 맞춰야 해요. 내가 그쪽 손을 잡고 하나, 둘, 셋 하면 그쪽은 그쪽 인생에서 가장 큰 힘을 다해 저와 함께 나와야 해요.”남자는 손가락을 움직였지만 협조하기를 꺼리는 듯했다.그 위험성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만약 실패하면 두 사람 모두 죽을 것이 분명했다.그러나 지금 소원이 그냥 떠난다면 최소한 한 명은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었다.소원이 남자의 손을 잡으려 하자 남자는 주먹을 꽉 쥔 채 그녀의 시도를 거부했다.그러자 소원이 조급한 목소리로 말했다.“왜 그래요? 시간이 없어요!”뒷좌석은 여전히 불길에 휩싸여 있었고 차의 후미는 이미 골격만 남아 있었다.조금 전 절벽으로 떨어진 은색 미니밴은 검은 잔해로 변해버렸고 그 광경은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끔찍했다.시간은 점점 다급해지고 있었다.남자가 끝내 협조하지 않자 소원은 손바닥을 펼치며 말했다.“제 손바닥에 하고 싶은 말 적어주세요.”남자는 소원의 말을 듣고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손바닥에 급히 글자를 적었다.“가.”그는 그녀에게 빨리 떠나라고, 도망치라고 재촉하고 있었다.그러나 소원은 남자가 손을 빼려 하자 그의 손가락을 꽉 붙잡으며 말했다.“날 믿어줘요. 우리는 반드시 함께 살아남을 거예요.”남자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지만 소원은 포기하지 않았다.“만약 그쪽이 나를 믿지 않는다면 나도 여기 남아 있을게요. 5분도 안 걸려서 이 차는 절벽 아래로 떨어질 거예요. 함께 죽든지, 아니면 살아남든지 선택은 그쪽에게 달렸어요.”남자의 손가락이 갑자기 움찔했다.소원의 말이 그의 마음에 닿은 듯했다.마침내 그는 손을 돌려 소원의 손을 감싸 쥐었다.그것은 동의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행동이었다.곧 소원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말했다.“그럼 시작할게요.”손바닥과 등은 이미 땀으로 흥건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
어떤 여자들은 다리까지 심하게 다쳐 이미 상처가 곪아가고 있었다.더 나은 내일을 꿈꾸며 힘들게 나왔지만 현실은 그녀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가혹했다.다행히 아직 한국의 국경 안에 있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다른 나라로 끌려갔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더 끔찍한 일이 그녀들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고맙다는 말 필요 없어요. 빨리 가요!”소원은 이 말을 남기고 검은색 차량으로 혼자 달려갔다.몸에 상처가 있는 그녀는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고통이 밀려왔지만 지금은 죽음과의 경주였다.단 한 걸음만 늦어도 차는 절벽 아래로 추락할 게 분명했다.겨우 차에 도달했을 때, 차 안이 짙은 연기로 가득 차 있는 게 보였다.다행히 차창이 조금 전 미니밴에서 발사된 총알로 인해 깨져 있었기에 연기가 일부 빠져나가고 있었다.만약 창문이 깨지지 않았다면 차가 추락하거나 폭발하기도 전에 차 안의 사람들이 연기에 질식해 죽었을 것이다.차 안은 정적만이 감돌았다.운전석에는 한 남자가 조용히 누워 있었는데 얼굴이 옆으로 기울어진 상태로 연기에 질식해 의식을 잃은 듯했다.소원은 조심스럽게 차 문을 당겼다.차체는 이미 한계에 다다른 상태라 사소한 움직임 하나로도 균형이 무너져 차가 추락할 수 있었다.자칫하면 그녀 자신도 함께 떨어질 위험이 있었다.그러나 조금 전 이 남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들을 구해냈던 걸 떠올리며 소원은 자신도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결과가 어떻든 간에 그녀는 차 안의 모든 사람들의 기대를 짊어지고 포기하지 않기로 결심했다.그렇게 소원은 움직임을 최대한 부드럽게 하며 조금씩 차 문을 열었다.문이 열리자마자 운전석의 남자가 의식을 잃고 피투성이가 된 채로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그의 이마에서 흐르는 피 때문에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다.소원은 먼저 안전벨트를 풀기 위해 남자의 안전벨트 걸쇠를 손으로 더듬었다.그의 몸은 안전벨트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다행히 앞쪽에 충돌이 없어 에어백이 터지지 않았던 덕분에 상황은 상대적으로
은색 미니밴은 이제 주도권을 잡았고 더 이상 검은색 차량과 정면으로 맞붙지 않으려 했다.그들의 목표는 픽업트럭과 트럭에 타고 있는 사람들 전부였다.만약 그들이 구해진다면 자신들의 기지는 끝장날 게 뻔했다.은색 미니밴은 픽업트럭을 향해 추격하던 중, 다시 한번 총구를 들어 트럭을 조준했다.목표는 단 하나, 트럭을 전복시켜 절벽 아래로 추락하게 만드는 것이었다.소원은 뒤따라오는 차가 계속 자신들을 조준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손은 전보다 더 떨려 안정감을 잃었고 뒷좌석에서는 공포에 질린 듯한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다들 다음 총알이 누구에게 향할지 몰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공포 앞에서 아무도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소원은 뒤차에서 어떤 모션이 나올지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필사적으로 차를 몰아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었다.멈추는 순간 위험은 더 커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은색 미니밴이 다시 픽업트럭을 조준하려는 순간, 검은색 차량이 갑자기 속도를 내어 커브 길에서 추월했다.그러고는 차체를 던져 승합차와 픽업트럭 사이에 끼어들며 총알을 막아냈다.하지만 이번 상황은 심각했다.총알을 막아낸 직후, 검은색 차량의 뒷좌석에서 불꽃이 튀어 오르더니 곧장 거센 불길로 번졌다.뒷좌석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고 차 안은 금세 아수라장이 되었다.미니밴 역시 이 광경에 놀라 멈칫했다.그러나 검은색 차량의 운전자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불길이 치솟는 뒷좌석을 강제로 승합차에 밀어붙였다.결국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미니밴은 중심을 잃고 휘청이다가 산 아래로 추락했다.곧이어 미니밴에서도 거대한 불길이 치솟았다.한편, 검은색 차량은 미니밴을 밀어붙인 여파로 인해 간신히 멈췄으나 뒷좌석은 절벽 밖으로 튀어 나가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상태가 되었다.지금은 운전자가 움직이지 않아도 불길이 더 번지면 차체가 균형을 잃고 결국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게 뻔했다.SUV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