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사장님, 강 여사님, 어떻게 여기서 다 뵙죠?”그러자 중년 남자가 고개를 들며 여자를 보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누구시죠?”“주 사장님, 기억 안 나세요? 저 DS 디자인 작업실 총감독 임세희입니다!”‘임세희? DS 디자인 작업실?’윤혜인은 눈을 반짝였다.‘저 사람이 바로 오빠가 말한 그 쓰레기 같은 첫사랑이군.’그녀를 자세히 보니, 풍성한 눈썹에 매혹적인 눈빛, 외모는 그럭저럭 괜찮지만, 어딘지 좀 싸구려스러웠다.“아, 아.”강인은 여전히 기억하지 못한 듯 대충 넘어갔다.그러나 임세희는 포기하지 않고 초대장을 꺼내 강인의 손에 쥐여주었다.“다음 주에 저희 DS에서 신제품 발표회를 하니 꼭 여사님과 함께 오세요.”윤혜인은 옆에서 그 장면을 똑똑히 보고 있었다. 임세희는 초대장을 건네며 강인의 손등을 계속 쓰다듬었고, 초대장을 보는 동안에도 다리를 일부러 그에게 비볐다. 정말 역겨웠다.윤혜인은 주훈에게 어느 방인지 물어보려다 카메라를 잘못 눌러 ‘찰칵’ 소리가 났다.그러자 즉시 세 사람의 시선이 윤혜인에게로 쏠렸다.안 그래도 찔리는 게 있었던지라 임세희는 즉시 다가와 따졌다.“당신 방금...”하지만 윤혜인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녀는 마치 귀신을 본 듯,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당신은... 윤... 윤혜인!”윤혜인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나를 아는 게 당연하지.”임세희는 한참을 버벅거리다 사악하게 말했다.“왜 안 죽었어요?”윤혜인은 그 말을 무시하며 비웃었다.“당신도 안 죽었잖아요.”“너!”임세희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방금 뭐 찍었어요?”“실수로 누른 거예요, 아무것도 안 찍혔습니다.”당연히 임세희는 이 말을 믿을 리 없었다“뭐요? 그 큰 소리를 내면서 아무것도 안 찍었다고요? 헛소리하지 말고 당장 핸드폰 내놔서 지워요.”강인도 불안해졌다. 그는 아까 임세희가 자기에게 비비는 것을 방관하며 내심 더 나아가 그녀를 비밀 애인으로 만들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그는 한 발 앞으로 다가서며 임세
이 말은 분명 겁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레스토랑은 증거가 없으면 일방적인 결정을 내리지 않으니 말이다.상황은 세 사람 이 한 사람을 몰아붙이는 형태가 되었고 윤혜인이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등을 곧게 펴며 세 사람을 쳐다보았다. “당신들은 제 핸드폰을 볼 권리가 없습니다.”결코 기가 꺾지 않는 윤혜인의 모습에 임세희는 그녀가 변한 것을 느꼈다.그녀의 말투와 태도는 예전보다 훨씬 자신감이 넘쳤고 내면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여유와 자신감이 윤혜인을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마치 귀하게 자란 상류층 막내딸처럼 말이다.세월이 윤혜인의 얼굴에는 전혀 흔적을 남기지 않은 듯, 그녀는 오히려 더 아름다워지고 생기 있어 보였다.반면, 임세희는 아이를 유산한 후 빠르게 노화가 진행되어 피부가 처졌기 때문에 외모를 유지하기 위해 의학적 시술에 의존하고 있었다.따로 보면 그럭저럭 볼만했지만, 윤혜인과 함께 있으면 나이 차이가 확연히 나는 듯 보였다.순간, 임세희는 질투심이 끓어올랐다. 그녀는 직원이 자신에게 잘 보이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물었다.“이 여자 이 레스토랑 손님인가요?”직원은 상황을 파악하고 바로 대답했다.“잘 모르겠습니다. 일행을 기다린다고 하셨어요.”“기다린다고요?”그러자 임세희가 비웃음을 터뜨렸다“정말로 기다린다는 건지, 아니면 남자를 낚으려는 건지 모르겠네요?”눈치 빠른 직원은 임세희의 말뜻을 단번에 알아챘다.“손님, 여기서 식사하실 분 아니시죠? 더 큰 문제가 생기기 전에 핸드폰을 내놓고 지우세요. 그러면 보내드리겠습니다.”“내가 여기서 식사를 안 한다고요? 누가 그래요?자신감 있게 말하는 윤혜인의 태도에 직원은 적잖이 당황했다. 혹시라도 진짜 손님이라면 큰일이었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어느 방에서 식사하시는지 말씀해 주세요. 확인해 보겠습니다.”“물어볼게요.”윤혜인은 주훈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임세희가 비웃으며 말했다.“인터넷에서 여기 레스토랑 방 이름을 검색하려는
임세희는 오랜 세월 동안 이준혁을 만나지 않았지만 여전히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본능적으로 이준혁을 두려워했다.그때 윤혜인이 ‘죽은' 후, 이준혁은 임세희를 매몰차게 버리고 이런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더 이상 임세희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그러다가 이천수가 임세희를 찾았고 임세희는 이 기회를 잡아 송휘재가 숨긴 파일로 이천수를 무너뜨리려는 이준혁의 계획을 이천수에게 이실직고해 실질적으로 그의 사람이 되었다.이천수는 이 사건을 이용하여 이준혁의 세력을 크게 무너뜨리고 그룹의 주도권을 되찾았다. 그리고 임세희에게 약속한 혜택을 실행했는데 그것은 바로 DS 디자인 작업실의 지분 15%였다.임세희는 임신한 아이를 낙태한 후 송휘재가 감옥에서 사고로 사망한 소식을 들었고 사태가 임세희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그리고 이준혁의 부인으로 자리 잡는 꿈도 그때쯤에 깔끔하게 접었다.왜냐하면 그때 이준혁이 너무 퇴폐한 몰골로 추락해 이천수가 주도한 이씨 가문 주주총회에서 내쫓을 위기에 처했고 사업이 큰 위기에 직면했기 때문이었다.그런데 일 년 후에 이준혁이 다시 일떠설 수 있을 걸 그 누가 예상할 수 있었을까.이 남자의 능력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무시무시했다.이런 남자를 오랜만에 만나니 임세희는 두려움뿐만 아니라 마음속에서 멈출 수 없는 떨림을 감추기 어려웠다.이 남자는 예전보다 더욱 잘생기고 매력적으로 변했다.임세희가 그때 이준혁에게 쏟아부었던 집착이 다시 슬슬 꿈틀대기 시작했다.그래서 예전의 수법을 사용하여 억울한 척하며 말했다. “준혁 오빠, 나도 혜인 씨가 왜 날 찍으려 하는지 모르겠어.”그러면서 윤혜인을 쳐다보며 목이 멘 목소리로 물었다.“혜인 씨, 날 찍으려면 정정당당하게 찍으세요. 내가 당신을 제지하진 않았잖아요? 왜 하필이면 몰카처럼 슬그머니 날 찍으려고 하죠...”아까 보인 무례하고 오만한 여자와는 커다란 차이가 있는 가냘픈 여자로 보였다.윤혜인은 그 모습에 입가가 살짝 떨렸다. 이 여자에 대해 아
강 사장은 윤혜인을 쳐다보며 느끼한 웃음을 지었다. “방금 제가 큰 실수를 한 것 같아요. 사모님께서 절 너그럽게 봐주시고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윤혜인은 강 사장의 표정이 너무 느끼해 휴대폰을 강 사장의 아내에게 내밀며 말했다.“강 사모님, 제가 의도하지 않게 찍은 이 사진은 사모님이 직접 삭제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그 순간, 강 사장과 임세희의 표정이 굳어버렸다.강 여사는 휴대폰을 받아 임세희가 남자의 다리에 자기 다리를 걸치고 있고 남편이 임세희의 손등을 꽉 잡고 놓지 않고 있는 사진을 확인했다.놀랍게도 이 모든 일이 강 여사의 눈앞에서 일어난 것이다.강 여사는 휴대폰을 윤혜인에게 돌려주고 숨을 고르고 여유로운 말투로 말했다. “고마워요.”그리고 다음 순간.“짝짝짝!”강 여사는 강 사장에게 귀싸대기를 연이어 날렸다고 큰 소리로 고함쳤다.“이 여자를 따먹지 못해 안달이 난 개자식아!”강 사장은 아내가 화를 내는 모습을 가장 무서워했다. 그래서 체면이고 뭐고 챙길 여유도 없이 임세희를 가리켜 말했다. “내 탓이 아니야, 이 여자가 날 꼬셨어.”그 순간, 임세희의 얼굴은 피가 빠져나간 것처럼 창백해졌다.“강 사장님, 헛소리하지 마세요! 왜 생사람을 잡고 난리예요?”강 여사는 강 사장과 임세희를 번갈아 보며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파리는 금 가지 않은 달걀에는 꾀지 않는다고 금이 간 네놈이 흘리고 다니니까 파리를 끌어들이지.”강 여사는 일타쌍피로 두 사람을 함께 묶어 욕했다.강 여사는 그나마 교양 있는 사람인지라 문제가 발생하면 먼저 집안의 문제부터 해결하고 다시 외부 상황을 정리하곤 했다.“세희 씨, 당신들 DS 디자인 작업실은 이렇게 사업을 하는군요. 나중에 우리 분야의 친한 자매들에게 자세히 귀띔해 줘야겠어요.”말을 마치고 강 여사는 몸을 돌려 남편을 쳐다보지도 않고 자리를 떠났다.그 모습에 임세희는 당황해 어쩔 바를 몰랐다.강 여사의 친구 중에는 DS 디자인 작업실의 VIP 손님들도 많고 그 손님 중 여
뜨거운 숨결이 윤혜인의 코를 덮쳤다.이준혁은 오른팔을 의자 등에 걸고 윤혜인의 뺨과 손가락 하나만큼의 거리에 얇은 입술을 갖다 댔다.윤혜인은 놀라움에 심장이 멈출 뻔했다.머릿속에서는 지난번 이준혁이 자신을 물고 빨며 키스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때 남긴 치아 자국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아 샤워할 때마다 고개를 숙이면 볼 수 있었다.윤혜인의 얼굴이 갑자기 불처럼 확 타올라 뜨거워졌고 뒤로 피하려고 했지만 등 뒤에는 시원한 에어컨의 바람을 맞아 서늘한 벽만 남았다.얇은 입술이 당장 덮쳐와 키스할 것 같은 분위기에 윤혜인은 군침을 꿀꺽 삼키며 떨리는 숨소리로 경고했다. “준, 준혁 씨가 더 이상 다가오면 성희롱으로 고소할 거예요. 그리고 근로기준법으로도 준혁 씨를 처벌할 거예요.”이준혁은 웃음을 터뜨리며 윤혜인의 이마에 대고 손가락을 튕겼다.“앗!”윤혜인의 어여쁜 얼굴이 찌푸려졌고 그녀는 머리를 감싸며 이준혁을 기세등등하게 노려보았다. “뭐 하는 거예요? 가정 폭력을 행사하는 건가요?”이준혁의 입가에는 미소가 슬며시 떠올랐고 다정스럽게 윤혜인의 콧등을 긁었다.“응, 가정 폭력이야.”웃음기가 섞여 있는 이준혁의 목소리는 매력적이고 듣기 좋았다.그 말에 윤혜인의 얼굴이 단번에 뜨거워졌다.자신이 말을 내뱉고 나서야 가정 폭력이란 말은 친밀한 관계를 설명하는 데 사용된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윤혜인은 자기가 이 개자식과 친밀한 관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선을 테이블로 돌리며 다시 기세를 되찾아 당당하게 말했다. “식사할 거예요? 말 거예요?”이준혁은 공간을 내어주었고 윤혜인은 그제야 마침내 마음껏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테이블 위의 음식은 진짜 그녀의 입맛에 맞는 것들로만 가득 차 있었다. 윤혜인이 맛있는 음식을 먹어보지 못한 것도 아니고 곽씨 가문의 요리사들도 국내에서 초청한 최고의 요리사들로 꽉 찼다.하지만 거기서 만들어진 음식은 언제나 뭔가 부족한 느낌이 강했다.아무래도 식재료든 요리 방식이든 국내에서 먹어야 윤혜인의 마
이준혁이 까준 게를 먹고 나자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에 윤혜인의 태도는 훨씬 나아졌다. 그래서 배시시 웃으며 얘기를 꺼냈다.“우리 남편 오재윤 씨도 예전에 항상 게를 까서 나에게 주었어요.”이준혁의 손가락이 갑자기 경직되어 이례적으로 윤혜인의 가느다란 팔목을 꽉 쥐었다.남편이라는 두 글자는 마치 보이지 않는 철사처럼 이준혁의 심장을 거세게 조여왔다.윤혜인이 떠난 그 기간, 윤혜인이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고 아이를 낳았다는 생각만 하면 이준혁의 마음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거대한 고통이 밀려왔다.불행 중의 다행은 그 남자가 일찍 죽었다는 것이다. 만약 아직도 그 남자가 살아있다면 자기가 어떤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를지 확신할 수 없었다.“준혁 씨, 준혁 씨...”윤혜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이준혁의 이름을 두 번이나 불러서야 이준혁은 정신을 차리고 꽉 쥐었던 손을 느슨하게 풀었다.하지만 잘생긴 얼굴에는 아까와 달리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다.윤혜인은 이준혁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유심하게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이준혁이 방금 보인 실수는 윤혜인이 예전의 남편인 오재윤을 언급했기 때문인가?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것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 수 없다.사실 윤혜인은 오늘 온종일 걱정이 태산이었다.첫 출근 날인 오늘 이준혁에게 20억에 가까운 지출을 부담하게 했고 방금 만난 이준혁의 첫사랑도 무척이나 짜증 나 윤혜인은 그녀를 의도적으로 도발해 아슬아슬한 사태로 이끌어갔었다.윤혜인은 이준혁을 짜증 나게 하려고 이 정도로 노력했는데도 왜 이 남자는 전혀 화내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이준혁은 일부러 재산을 과시하는 사람과 착하지 않은 사람을 가장 혐오한다고 하지 않았던가?그런데 왜 윤혜인이 이 정도까지 했는데도 이준혁의 얼굴에는 조금도 싫어하는 표정이 없는 걸까.심지어 윤혜인에게 눈웃음을 지으며 윤혜인이 소동을 일으키는 것을 애교처럼 귀엽게 봐주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그래서 윤혜인은 오빠가 제공한 정보의 신빙성을 의심하려고 했는데 이제
이준혁의 몸이 아래로 기울어졌고 위협적인 숨결을 내뿜으며 윤혜인을 응시했다. “얼마나 대단한데?”“뭐... 그냥...”대충 얼버무리고 난 후에 윤혜인은 얌전하게 입을 다물었다.원래 임시로 꾸며낸 거짓말이었기 때문에 윤혜인은 오재윤이 도대체 어떻게 대단한지 설명하기 어려웠다.이준혁의 눈부시게 잘생긴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고 매력적인 중저음 목소리도 들려왔다.“내가 자를 줄까? 네가 한번 측정해 봐, 과연 누가 더 대단한지.”“...”윤혜인의 표정이 굳어지고 해맑은 눈동자가 여러 번 깜박였다. “뭘 측정하라고요?”이준혁은 목소리를 더 낮춰 말했다.“네 생각엔 뭘 말하는 것 같아?”윤혜인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설마 그걸 말하는 건 아니겠지... 이 변태 새끼가!’“오재윤은 그렇게 자세히 기억하면서 나에 대한 기억은 하나도 없단 말이야?”이준혁은 윤혜인의 손을 잡고 아래로 내려가며 말했다. “내가 네 기억 회복을 도와줄까?”윤혜인은 사태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걸 감지하고 손바닥을 본능적으로 뒤로 뺐지만 이준혁이 꽉 잡고 놓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이준혁의 손을 따라 아래로 끌려갔다. 이 상황은 너무 이상했다.이준혁이 도대체 뭘 하려고...윤혜인은 놀란 가슴에 떨리는 목소리로 고함쳤다.“변태예요?”“난 변태가 아닌데?”이준혁은 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정색한 표정보다 더 무서웠다.“과거를 추억하는 걸 좋아한다며? 그럼...”이준혁은 기다랗고 아름다운 손가락으로 윤혜인의 턱을 들어 올렸다. “내가 너에게 예전에 네가 날 남편이라고 불렀을 때 우리가 뭘 하고 있었는지 기억시켜 줄까?” 윤혜인은 억지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썼지만 한계에 이르렀다.“이준혁! 당신은...”미처 내뱉지 못한 말들은 이준혁의 입술 속에 파묻혀 전부 삼켜졌다.“읏...”윤혜인은 가볍게 신음을 냈고 이 상황에서 도망치려고 했지만 이준혁이 더 강하게 당겨 그의 품에 안겨 더 진한 키스를 하게 됐다.진한 키스에는 이준혁의 알아채기 어려운 인내
이준혁은 아름의 예쁘고 자그마한 얼굴을 보자 순간 온몸이 굳어버렸다.그날 이준혁의 직감이 틀리지 않았다. 이 소녀는 윤혜인의 딸이 분명했다.윤혜인과 그 남자와의 딸이었다.이 사실은 이준혁의 심장을 무형의 덩굴로 엉킨 것처럼 고통스러웠고 호흡하기도 어려워졌다.부드럽고 향기로운 아름이 차석에서 이준혁의 품으로 뛰어들었다.아름의 연꽃처럼 하얗고 야들야들한 작은 팔이 이준혁의 목을 감았고 자연스럽게 이준혁에게 물었다.“아빠, 아름를 찾으러 왔어요?”아름이 이토록 친밀하게 대하자 이준혁도 어리둥절해졌다.솔직히 말해서 윤혜인 이외의 사람이 이준혁과 친밀한 접촉을 하는 행동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어른이든 아이든 상관없이 다 싫었다.하지만 아름은 ‘아빠'를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어 갑자기 이준혁의 얼굴에 입을 갖다 댔다.“쪽.”앵두처럼 붉은 입술이 이준혁의 얼굴에 닿았다.자신이 선택한 ‘아빠'는 진짜 보면 볼수록 잘생겨 보였다.아름은 유치원 친구 안나에게 자기 아빠가 안나의 아빠처럼 진흙이 묻은 지 오래된 물통 같은 아빠가 아닌 세상에서 가장 잘생긴 아빠라고 말하고 싶었다.비록 엄마가 아름에게 딴 사람에게 함부로 별명을 짓지 말라고 가르침을 받았지만 안나의 아빠에게 별명을 지은 건 이유가 있었다. 그건 바로 지난번에 안나가 아름을 아빠 없는 들개라고 조롱할 때 안나의 물통 아빠도 안나와 함께 윤혜인을 조롱했기 때문이었다.흥!아름은 마음속으로 안나의 아빠를 오래된 물통이라고 부르기로 했다.아름은 앳된 목소리로 이준혁에게 물었다. “아빠, 아름를 놀이공원에 데려가려고 오신 건가요?”이준혁은 눈앞의 어린 소녀를 복잡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얇은 입술은 몇 번 움직였지만 끝내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아까 이준혁의 뺨에 맞춘 달콤한 뽀뽀에는 심지어 약간 끈적한 침이 묻어 있었다.그러나 이준혁은 의외로 그게 싫지 않았고 오히려 마음 깊은 곳에서 본능에 끌린 듯 친밀감이 일어났다. 원래 아름을 밀어내려고 했던 손도 동작을 멈추고 아름이 넘
남자는 재밌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만약 제가 당신에게 기회를 준다면요?”“무슨 기회요?”진아연은 자신이 누구와 거래하는지 잊지 않고 전전긍긍하며 물었다.남자의 두 눈은 마치 별을 숨긴듯 하였다. 그는 반혹적인 어조로 말했다.“육경한을 죽일 기회를 줄게요. 만약 그 사람을 죽일 수 있으면 저는 당신의 잘못을 추궁하지 않고 평안히 출국할 수 있게 해줄 수 있어요. 진아연 씨, 어떻게 생각해요?”“정말이에요?”진아연은 그의 말을 정말 믿기 어려웠다.제트를 마주할 떄 진아련은 항상 착각에 빠졌다. 사실은 육경한을 죽이는 것보다 제트를 마주하는게 더 어려웠다. 이 두 문제를 함께 놓으면 비교가 될 것이다.왜냐하면 그는 아주 신비하기에 누구도 그의 배경과 내력을 알 수 없어 그와 상대할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육경한의 약점은 아주 많다. 소원이와 그녀 뱃속에 있는 아이, 그리고 망할 놈 유진이... 심지어 하나하나의 나쁜 계획은 이미 진아연의 마음속에서 형태를 갖추게 되며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제트는 고개를 끄덕이였다. “물론 정말이에요, 당신이 성공하면 저는 말한 대로 다시는 따지지 않을 것이에요. ”말하는 사이에 남자는 뒤에 쫓아오는 세 대의 차를 가볍게 따돌렸다.이 제트는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사람마냥 무섭기 그지없었다.하지만 진아연의 마음속에 있는 제트는 탁월한 능력이 있어서 그녀가 아무리 숨기려 해도 그의 눈을 피할 수 없어 놀라지 않았다.진아연은 눈앞의 남자를 보면서 자신의 충성심을 알려 주었다.“제트 씨, 안심해요, 저는 반드시 임무를 완수할 거니까. 당신은 저를 죽이지만 않으면 됩니다.”“음, 기대가 되네요.”“...”뒤따라오던 세 대의 차가 앞차를 잃어버린 후, 경비원들은 실시간 정보를 병실의 VIP 라운지에 전달했다.유진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남자는 황수진보고 유진이의 휴식에 방해 안 되는 대기실에 오라고 했다.지금 육경한의 안색은 매우 안 좋았다.경호원들이 전송해 오는 화면
남자는 짜증을 내며 말했다.“잡히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 또 오다니 정말 바보 중의 바보예요! ”“제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이곳 경비원은 다른 동네 분들과 다를 줄은, 이곳 경비원은 정말 최고급 경호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여자가 원망하자 옆에 있던 남자가 말했다. “진아연, 당신은 내가 본 것 중 가장 멍청한 사람인 것 같아요. ”진아연은 순간 자신의 이름을 듣고도 반응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 사람은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을가 라는 생각에 그녀는 그를 경계하면서 물어봤다.“누구세요? “남자는 침묵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얼굴 가리려고 마스크를 썼지만, 눈빛에 드러나는 냉랭함은 숨길 수 없었다. 진아연은 그의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 나서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 당신이 바로 제트 씨이세요? ”남자는 그녀를 상대하지도 않고 부인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다 설명했다. 진아연은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바지에 실수까지 할 뻔했다. 누가 알았겠는가, 늑대 무리에서 도망쳐 나와 호랑이 굴에 들어갈 줄을... "제트 씨... 아주 죄송해요, 제가 일부러 여기에 나타난 건 아니예요. 지금 당장 꺼질게요. ”놀라움은 하여금 진아연의 이성을 잃게 만들어 고속도로에서 차 문을 열고 뛰어내릴 생각까지 하였다.제트와 비교했을 때, 지금 뒤에서 자신을 쫓아오는 경비원들이 구세주라고 생각되었다. 진아연은 제트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라고 느꼈다. 필경 지난번에 그의 손에서 죽을 뻔했으니까... 진아연의 손이 차 문손잡이에 닿았을 때, 차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진아연은 절망 속에서 두 손을 비비며 용서를 비는 자세를 취했다. “죄송해요... 제트 씨... 저 진짜 멀리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니까 저를 놓아주세요. ”안장이 좁아서 진아연은 무릎을 꿇을 수 없어 두 손을 끊임없이 비비며 아주 작은 희망을 찾고 있었다.남자는 역시 수단과 방법을 숨기고 있었다. 뒤차의 추격을 피하는 동시에
여자가 작은 골목에 들어섰을 때, 경비원이 말했다. “아가씨, 길을 잘못 들었어요. 13동은 저쪽에 있어요.”여자는 할 수 없이 돌아섰는데 경비원이 다시 말했다. “아가씨, 친구 보러 처음 오셨어요?”여자는 이곳의 경비원이 왜 범인을 검문하는 것처럼 자신을 물어보는지 이해 안 가 속으로 욕했다.여자는 대충 대답했다.“네네, 처음 왔어요.”13동 문 앞에 오자 경비원이 직접 603의 초인종을 눌렀고 방울 소리가 울리자, 안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여보세요?”경비원은 여자보고 말하라고 고개를 돌렸다.“...”정말 어쩔 수 없어 여자는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아이고, 배가 너무 아파요.”여자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말하자 경비원은 즉시 구급차를 불러주었다. 그리고 경비원이 구급차를 부르는 사이에 여자는 작은 틈을 놓치지 않고 도망쳤다.“거기서요!”경비원은 일반인보다 더 빠르게 반응해 무전기에 대고 빨리 저 검은 옷 입은 여자를 잡으라는 말을 했다.여자는 자신의 눈앞에서 점점 닫혀 가는 문을 보며 당황해 어리둥절했다.“닫지 말아요.”안에서 경비원이 소리를 듣고 여자 쪽으로 돌진해 왔다. 그들은 마치 여기서 여자를 기다리고 있는 듯 일반 경비원보다 속도가 더욱 빨랐다.바로 얼마 전 육씨 그룹이 이곳의 부동산을 사서 전문적인 경호원으로 바꾸어 수상한 인물을 주시하여 남자와 여자를 막론하고 의심이 가는 사람들을 모두 붙잡아 파출소로 보냈다. 여자는 온몸에 힘이 빠진 채 어디로 도망갈지 몰랐다. “저 여자 잡아요.”전에 여자와 얘기하던 경비원이 소리쳤다. 여자가 잡힐 것만 같았는데 갑자기...펑!큰 소리가 나 그곳을 보자 검은색의 지프차 한 대가 돌진해 들어와 난간에 부딪혀 부서지는 것이 보였다.대중들은 모두 이 갑작스러운 변고에 어리둥절하여 반응하지 못했지만, 지프차가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자, 경비원들은 모두 재빨리 몸을 피했다.유독 여자만 제자리에서 자신한테 향해 오는 것을 멍하니 보며 어찌할 바
소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마음이 놓이지 않아. 유진이를 보러 갈래”“필요 없어”육경한은 단호히 거절하다 멈칫했다. 그러다 소원이 자신이 아이를 못 본다고 오해 할가봐 천천히 입을 열었다“내가 보고 있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일도 다 병원에 가지고 갈 거니까. 넌 휴식이 필요해. 알았어? “유진이 병으로 쓰러진 후 소원은 며칠 동안 거의 밤새 자지 못해 눈 밑에는 이미 짙은 다크써클이 생겼지만 그녀는 억지로 버티는 중이었다.소원은 유진이 자신을 찾지 못할까 봐 걱정되어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육경한은 무슨 일이든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직접 휴대폰 음성 메시지를 소원이에게 들려주었다.“아빠, 엄마 보고 잠자고 있으래요. 만약 성공하지 못하면 저는 삼촌이라고 부를 거예요. ”“엄마보고 많이 휴식하고 있으래요. 그렇지 않으면 뱃속의 아기가 천천히 자랄 거예요. 저는 아기를 빨리 만나고 싶어요. 아기한테 오빠가 지금 힘이 세니까 아기를 업을 수 있다고 알려주고 싶어요. ”캐톡에서 유진이의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협박한 것을 보니 두 사람의 사이가 아주 좋은 것 같았다. 유진이의 소리는 듣기에도 정신이 맑고 괜찮아 보였다.소원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생각해 보니 자기가 쉬지 않은 것을 아이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금 내가 자신의 건강에 대한 책임은 즉 유진에게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기에 소원이는 말 듣고 차에서 내려서 휴식을 취하러 갔다.네 명의 경호원은 육경한의 분부에 따라 두 명은 아파트 입구에 두 명은 계단 입구를 엄중히 지켜 사수의 파리 한 마리조차 날아 들어갈 수 없었다.육경한의 차가 떠나자 멀지 않은 곳에서 한 여인이 사방을 둘러보며 나타났다.그녀는 벙거지 모자를 쓰고 얼굴을 절반 이상 가린 채 마스크를 쓰고 수상한 모습으로 나타나 동네 경비원의 주의를 불러일으켰다.“저기요, 당신은 어느 건물로 가나요? 여기에서 뭘 하고 있습니까? “여인은 경비원한테 놀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요... 사람을 찾고
주석훈이 웃으며 말했다.“허허. 몰랐죠? 저 평소엔 되게 허당이에요.”“변호사님 은근히 유머가 넘친다니까요.”주석훈은 언변에 능했기에 단 몇 마디에 간호사가 함박꽃 같은 웃음을 지었다.“저기는 왜 저런 거래요? 아까 길을 잘못 들었는데 막더라고요.”주석훈이 물었다.“아, 저기요.”간호사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어떤 여자애 한 명 들어왔는데 가족이 살해당했다나 뭐라나. 실어증에 걸려서 한마디도 못 했는데 평소 믿고 따르던 언니가 와서 입을 열었다고 들었어요.”주석훈이 물었다.“여자애요? 많이 놀랐나 보네요.”“그러게요.”간호사가 대답했다.“가족이 칼 맞고 죽었는데 누가 견딜 수 있겠어요.”“억울한 사건이 얼마나 많은데 범인만 잡아도 다행 아니겠어요?”주석훈이 말했다.“어려울 것 같던데요?”간호사가 말했다.“뭐 유용한 단서가 안 나왔나 보더라고요. 아빠가 여자애를 지키겠다고 같이 들어가지 않아서 아무것도 못 봤대요. 진술한 상황이 경찰이 알고 있는 상황과 별반 다를 게 없어서 경찰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숨만 내쉬더라고요.”간호사가 이렇게 많은 내용을 알 수 있었던 건 안지영의 간호를 책임진 간호사가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다.주석훈이 더 물으려는데 다른 간호사가 들어왔다.“어? 이 간호사 있었네? 저쪽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니까 빨리 가봐.”이 간호사가 말했다.“알겠어요. 이것만 마무리하고 갈게요.”치료를 받은 주석훈이 이 간호사에게 고맙다고 말하자 이 간호사가 얼굴을 붉히며 괜찮다고 말했다.주석훈이 멀리 가고 나서야 다른 간호사가 이렇게 말했다.“이 간호사, 아까 저 사람이랑 무슨 얘기 했어? 저 병실에서 나온 얘기는 함부로 하면 안 돼.”“저 별말 안 했어요. 다들 아는 내용 얘기해준 거예요.”이 상황에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인정하면 바보나 다름없었다.“그래. 앞으로 조심해. 자칫하다간 징계 먹을 수도 있어.”나이 많은 간호사가 귀띔했다.“알아요.”이 간호사가 얼른 대답했다.“아
소원이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잘됐다. 정말 너무 잘됐어요. 이번엔 하느님이 제 소원을 들어주셨네요.”소원이 주석훈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래도 제가 신세를 졌으니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줘요.”감염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확률이 반반이라 주석훈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을 텐데 주석훈의 마음이 그만큼 단단하니 망정이지 다른 사람 같으면 진작 멘탈이 무너졌을 것이다.소원은 다시 한번 주석훈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별거 아니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마요.”주석훈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소원 씨가 여기 있다는 건 유진도 여기 입원해 있는 건가요?”소원이 고개를 저었다.“유진은 여기 없어요. 아는 동생 좀 보려고 여기 온 거예요.”“동생이요?”주석훈이 물었다.“소원 씨에게 동생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혹시 괜찮으면 같이 보러 갈까요?”뜬금없는 초대였지만 원래도 열정적인 주석훈이 말하니 뭔가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소원이 별다른 생각 없이 이렇게 말했다.“괜찮아요. 이미 만나고 나오는 길에요. 전에 알고 지내던 동생인데 지금쯤 이미 쉬려고 누웠을 거예요.”“아.”주석훈이 말했다.“그러면 데려다줄까요?”“아니요. 아니요.”소원이 얼른 대답했다.“데려다줄 사람이 있어요.”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경한이 다가왔다. 까만 트렌치코트가 육경한의 키를 더 커 보이게 했는데 강압적인 아우라를 뿜어내며 소원에게로 걸어왔다.“가자.”육경한은 옆에 선 주석훈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육경한과 구면인 주석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대표님.”육경한은 작은 변호사 따윈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것처럼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다. 이에 난감해진 소원이 분위기를 만회하려고 이렇게 말했다.“나오다가 마침 주 변호사님을 만났어.”육경한이 그제야 옆에 선 주석훈을 보며 ‘응’이라고 대답했다.주석훈은 전혀 난감해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두 분 사이가 좋아 보이네요. 변호사로서 의뢰인과 피고가 잘 지내고 있으니 뿌
제일 의심 가는 사람은 진아연이었다. 안상철은 여자관계가 간단한 편이었고 오랫동안 여자 친구 하나 사귀지 않고 싱글을 유지하면서 모든 심혈을 딸과 어른을 모시는 데 썼다.박혜순도 안상철을 여러 번 타일렀지만 그럴 때마다 안상철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 싫다며 거절했다. 그렇다면 싱글인 안상철이 이렇게 격렬하게 다툴 수 있는 사람은 진아연일 가능성이 컸다.경찰 조사가 끝나고 안지영도 검사를 받고 쉬어야 했기에 강민혜는 소원과 함께 병실을 나섰다. 밖으로 나와서야 소원은 자신의 추측을 털어놓았다.소원은 진아연의 힘으로 안상철을 죽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한 방도 아닌 60방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안상철은 180은 되는 큰 키를 가졌기에 큰 부상을 입어 몸이 허약해 툭하면 쓰러지는 진아연을 이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진아연은 얼마 전에 손목을 그으면서 피를 많이 흘렸던 터라 짧은 시간 내에 회복하긴 어려웠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 진아연 말고도 다른 사람이 개입했다는 의미였다.멀쩡히 살아움직이는 사람을 60번이나 찔렀다는 건 웬만한 정신상태로 저지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런 사이코패스가 잡히지 않고 사회에 섞여 들어간다면 악영향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강민혜의 생각도 소원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진아연이 입원했을 때 강민혜도 만나본 적이 있어서 알고 있었다. 진아연은 절대 안상철을 쓰러트릴 만큼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부검 결과를 보면 약물을 사용한 흔적이 없는데 그렇다는 건 안상철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진아연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다른 건 몰라도 진아연 같은 몸집이라면 3, 4명이 더 와도 절대 안상철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그래도 일단 진아연을 잡는 게 우선이었다. 진아연을 잡아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지만 문제는 진아연이 어디로 숨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소원은 의문만 가득 품은 채 병원 밖으로 나가다가 주석훈과 마주쳤다.“소원 씨, 여기서 마주치네요.”주석훈이 소원을 향해 헤벌쭉 웃자 소원이 멍한 표정으로 물었
“내가 너무 욕심이 많았어요.”소원은 안지영이 하는 말을 조용히 들어줬다.“내가 바이올린 계속하겠다고 하지만 않았어도 아버지가 그 돈을 다시 찾으러 가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될 일도 없었을 텐데.”안지영이 갈라질 대로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안상철이 소원에게 사건의 전말을 들려줄 때 진아연이 그 돈을 줬는지 말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안상철의 말대로라면 진아연이 돈을 주려다가 결국 주지 않았으니 그 돈이 없어야 맞았지만 실제로 안상철은 그때 돈을 받은 것이다. 하긴 안상철이 바보도 아니고 아무런 보수 없이 그런 위험한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상대가 딸의 병을 고쳐주겠다고 약속해도 외국으로 나가야 가능한 일이었기에 확실치도 않은 약속을 쉽게 믿지 못했을 테고 일단은 확실한 무언가, 즉 돈을 줘야만 안상철이 소진용을 찾아갈 결심을 내렸을 것이다.하지만 안상철은 결국 이 일을 소원에게 말하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했다면 소원은 안상철이 그 돈을 찾으러 가지 못하게 막았을 것이고 그 돈은 결국 경찰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결국 안상철의 탐욕이 그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소원이 안지영을 위로했다.“아니에요. 그게 왜 지영 씨 탓이에요. 나쁜 사람이 몹쓸 짓을 저지른 건데. 지영 씨도 아버지가 그렇게 될 줄은 몰랐잖아요. 지영 씨, 일단 그날 있었던 일을 경찰에게 알리는 게 좋겠어요. 최대한 자세하게 빠트린 것 없이 말해야 경찰도 빨리 범인을 찾을 수 있고 삼촌도 편히 눈 감을 수 있을 거예요.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죠?”안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지영도 말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그저 너무 무서울 뿐이었는데 소원이 곁에 있으니 무서움이 한결 가시는 것 같았다. 어릴 적부터 소원을 믿고 의지해왔는데 최근에는 소원 덕분에 살아날 수 있었다.안지영은 경찰 조사를 받을 때 두려움을 가시기 위해 소원에게 옆에 앉아 있어 달라고 제안했고 강민혜도 안지영의 제안을 받아들여 진술하는 내내 소원이 옆에 있을 수 있도록 했다.안지
소원의 설명을 들은 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명확해진 게 아니니까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도 안전에는 조심해야 되니까 사람 4명 붙여줄게. 유진이는 내가 알아서 보안 강화하고.”육경한은 소원이 거절할 것 같아 그러는지 얼른 한마디 덧붙였다.“너는 지금 홀몸이 아니야. 내가 이러는 것도 다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고.”육경한의 말이 맞았기에 소원도 거절하지 않았다. 이제 홀몸이 아니었고 유진도 엄마가 없어서는 안 되기에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어떻게든 조심하면서 안전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육경한이 골라준 보디가드는 의심할 여지 없는 안전한 사람들이었기에 소원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안상철도 소진용이 제일 믿고 맡긴 사람이었지만 결국 아버지를 배신한 걸 보면 이 세상에 영원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지금 갈 거지? 내가 데려다줄게.”육경한은 소원이 반대하지 않자 경찰이 지정한 병원으로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병원에 도착한 두 사람은 강민혜의 안내를 받아 안지영의 병실에 도착했다.문을 열어보니 안지영이 자그마한 몸집으로 무릎을 꽉 끌어안은 채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종이 인형처럼 삐쩍 마른 안지영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가까이 다가간 소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지영 씨...”안지영이 소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들지도, 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자 소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영 씨, 지금 어떤 기분인지 알아요. 하지만 경찰에게 단서를 줘야만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잡을 수 있어요...”가족을 잃은 슬픔은 소원도 겪어봐서 잘 알았다. 마지막 인사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을 보며 했으니 그 아쉬움과 후회는 사람을 통째로 집어삼킬 만큼 컸다. 소원은 그때 왜 아버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는지, 왜 같이 밥을 먹고 얘기를 나누지 않았는지 후회했지만 그땐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안지영을 다독이던 소원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지영을 꼭 끌어안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