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사장님, 강 여사님, 어떻게 여기서 다 뵙죠?”그러자 중년 남자가 고개를 들며 여자를 보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누구시죠?”“주 사장님, 기억 안 나세요? 저 DS 디자인 작업실 총감독 임세희입니다!”‘임세희? DS 디자인 작업실?’윤혜인은 눈을 반짝였다.‘저 사람이 바로 오빠가 말한 그 쓰레기 같은 첫사랑이군.’그녀를 자세히 보니, 풍성한 눈썹에 매혹적인 눈빛, 외모는 그럭저럭 괜찮지만, 어딘지 좀 싸구려스러웠다.“아, 아.”강인은 여전히 기억하지 못한 듯 대충 넘어갔다.그러나 임세희는 포기하지 않고 초대장을 꺼내 강인의 손에 쥐여주었다.“다음 주에 저희 DS에서 신제품 발표회를 하니 꼭 여사님과 함께 오세요.”윤혜인은 옆에서 그 장면을 똑똑히 보고 있었다. 임세희는 초대장을 건네며 강인의 손등을 계속 쓰다듬었고, 초대장을 보는 동안에도 다리를 일부러 그에게 비볐다. 정말 역겨웠다.윤혜인은 주훈에게 어느 방인지 물어보려다 카메라를 잘못 눌러 ‘찰칵’ 소리가 났다.그러자 즉시 세 사람의 시선이 윤혜인에게로 쏠렸다.안 그래도 찔리는 게 있었던지라 임세희는 즉시 다가와 따졌다.“당신 방금...”하지만 윤혜인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녀는 마치 귀신을 본 듯,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당신은... 윤... 윤혜인!”윤혜인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나를 아는 게 당연하지.”임세희는 한참을 버벅거리다 사악하게 말했다.“왜 안 죽었어요?”윤혜인은 그 말을 무시하며 비웃었다.“당신도 안 죽었잖아요.”“너!”임세희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방금 뭐 찍었어요?”“실수로 누른 거예요, 아무것도 안 찍혔습니다.”당연히 임세희는 이 말을 믿을 리 없었다“뭐요? 그 큰 소리를 내면서 아무것도 안 찍었다고요? 헛소리하지 말고 당장 핸드폰 내놔서 지워요.”강인도 불안해졌다. 그는 아까 임세희가 자기에게 비비는 것을 방관하며 내심 더 나아가 그녀를 비밀 애인으로 만들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그는 한 발 앞으로 다가서며 임세
이 말은 분명 겁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레스토랑은 증거가 없으면 일방적인 결정을 내리지 않으니 말이다.상황은 세 사람 이 한 사람을 몰아붙이는 형태가 되었고 윤혜인이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등을 곧게 펴며 세 사람을 쳐다보았다. “당신들은 제 핸드폰을 볼 권리가 없습니다.”결코 기가 꺾지 않는 윤혜인의 모습에 임세희는 그녀가 변한 것을 느꼈다.그녀의 말투와 태도는 예전보다 훨씬 자신감이 넘쳤고 내면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여유와 자신감이 윤혜인을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마치 귀하게 자란 상류층 막내딸처럼 말이다.세월이 윤혜인의 얼굴에는 전혀 흔적을 남기지 않은 듯, 그녀는 오히려 더 아름다워지고 생기 있어 보였다.반면, 임세희는 아이를 유산한 후 빠르게 노화가 진행되어 피부가 처졌기 때문에 외모를 유지하기 위해 의학적 시술에 의존하고 있었다.따로 보면 그럭저럭 볼만했지만, 윤혜인과 함께 있으면 나이 차이가 확연히 나는 듯 보였다.순간, 임세희는 질투심이 끓어올랐다. 그녀는 직원이 자신에게 잘 보이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물었다.“이 여자 이 레스토랑 손님인가요?”직원은 상황을 파악하고 바로 대답했다.“잘 모르겠습니다. 일행을 기다린다고 하셨어요.”“기다린다고요?”그러자 임세희가 비웃음을 터뜨렸다“정말로 기다린다는 건지, 아니면 남자를 낚으려는 건지 모르겠네요?”눈치 빠른 직원은 임세희의 말뜻을 단번에 알아챘다.“손님, 여기서 식사하실 분 아니시죠? 더 큰 문제가 생기기 전에 핸드폰을 내놓고 지우세요. 그러면 보내드리겠습니다.”“내가 여기서 식사를 안 한다고요? 누가 그래요?자신감 있게 말하는 윤혜인의 태도에 직원은 적잖이 당황했다. 혹시라도 진짜 손님이라면 큰일이었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어느 방에서 식사하시는지 말씀해 주세요. 확인해 보겠습니다.”“물어볼게요.”윤혜인은 주훈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임세희가 비웃으며 말했다.“인터넷에서 여기 레스토랑 방 이름을 검색하려는
임세희는 오랜 세월 동안 이준혁을 만나지 않았지만 여전히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본능적으로 이준혁을 두려워했다.그때 윤혜인이 ‘죽은' 후, 이준혁은 임세희를 매몰차게 버리고 이런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더 이상 임세희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그러다가 이천수가 임세희를 찾았고 임세희는 이 기회를 잡아 송휘재가 숨긴 파일로 이천수를 무너뜨리려는 이준혁의 계획을 이천수에게 이실직고해 실질적으로 그의 사람이 되었다.이천수는 이 사건을 이용하여 이준혁의 세력을 크게 무너뜨리고 그룹의 주도권을 되찾았다. 그리고 임세희에게 약속한 혜택을 실행했는데 그것은 바로 DS 디자인 작업실의 지분 15%였다.임세희는 임신한 아이를 낙태한 후 송휘재가 감옥에서 사고로 사망한 소식을 들었고 사태가 임세희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그리고 이준혁의 부인으로 자리 잡는 꿈도 그때쯤에 깔끔하게 접었다.왜냐하면 그때 이준혁이 너무 퇴폐한 몰골로 추락해 이천수가 주도한 이씨 가문 주주총회에서 내쫓을 위기에 처했고 사업이 큰 위기에 직면했기 때문이었다.그런데 일 년 후에 이준혁이 다시 일떠설 수 있을 걸 그 누가 예상할 수 있었을까.이 남자의 능력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무시무시했다.이런 남자를 오랜만에 만나니 임세희는 두려움뿐만 아니라 마음속에서 멈출 수 없는 떨림을 감추기 어려웠다.이 남자는 예전보다 더욱 잘생기고 매력적으로 변했다.임세희가 그때 이준혁에게 쏟아부었던 집착이 다시 슬슬 꿈틀대기 시작했다.그래서 예전의 수법을 사용하여 억울한 척하며 말했다. “준혁 오빠, 나도 혜인 씨가 왜 날 찍으려 하는지 모르겠어.”그러면서 윤혜인을 쳐다보며 목이 멘 목소리로 물었다.“혜인 씨, 날 찍으려면 정정당당하게 찍으세요. 내가 당신을 제지하진 않았잖아요? 왜 하필이면 몰카처럼 슬그머니 날 찍으려고 하죠...”아까 보인 무례하고 오만한 여자와는 커다란 차이가 있는 가냘픈 여자로 보였다.윤혜인은 그 모습에 입가가 살짝 떨렸다. 이 여자에 대해 아
강 사장은 윤혜인을 쳐다보며 느끼한 웃음을 지었다. “방금 제가 큰 실수를 한 것 같아요. 사모님께서 절 너그럽게 봐주시고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윤혜인은 강 사장의 표정이 너무 느끼해 휴대폰을 강 사장의 아내에게 내밀며 말했다.“강 사모님, 제가 의도하지 않게 찍은 이 사진은 사모님이 직접 삭제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그 순간, 강 사장과 임세희의 표정이 굳어버렸다.강 여사는 휴대폰을 받아 임세희가 남자의 다리에 자기 다리를 걸치고 있고 남편이 임세희의 손등을 꽉 잡고 놓지 않고 있는 사진을 확인했다.놀랍게도 이 모든 일이 강 여사의 눈앞에서 일어난 것이다.강 여사는 휴대폰을 윤혜인에게 돌려주고 숨을 고르고 여유로운 말투로 말했다. “고마워요.”그리고 다음 순간.“짝짝짝!”강 여사는 강 사장에게 귀싸대기를 연이어 날렸다고 큰 소리로 고함쳤다.“이 여자를 따먹지 못해 안달이 난 개자식아!”강 사장은 아내가 화를 내는 모습을 가장 무서워했다. 그래서 체면이고 뭐고 챙길 여유도 없이 임세희를 가리켜 말했다. “내 탓이 아니야, 이 여자가 날 꼬셨어.”그 순간, 임세희의 얼굴은 피가 빠져나간 것처럼 창백해졌다.“강 사장님, 헛소리하지 마세요! 왜 생사람을 잡고 난리예요?”강 여사는 강 사장과 임세희를 번갈아 보며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파리는 금 가지 않은 달걀에는 꾀지 않는다고 금이 간 네놈이 흘리고 다니니까 파리를 끌어들이지.”강 여사는 일타쌍피로 두 사람을 함께 묶어 욕했다.강 여사는 그나마 교양 있는 사람인지라 문제가 발생하면 먼저 집안의 문제부터 해결하고 다시 외부 상황을 정리하곤 했다.“세희 씨, 당신들 DS 디자인 작업실은 이렇게 사업을 하는군요. 나중에 우리 분야의 친한 자매들에게 자세히 귀띔해 줘야겠어요.”말을 마치고 강 여사는 몸을 돌려 남편을 쳐다보지도 않고 자리를 떠났다.그 모습에 임세희는 당황해 어쩔 바를 몰랐다.강 여사의 친구 중에는 DS 디자인 작업실의 VIP 손님들도 많고 그 손님 중 여
뜨거운 숨결이 윤혜인의 코를 덮쳤다.이준혁은 오른팔을 의자 등에 걸고 윤혜인의 뺨과 손가락 하나만큼의 거리에 얇은 입술을 갖다 댔다.윤혜인은 놀라움에 심장이 멈출 뻔했다.머릿속에서는 지난번 이준혁이 자신을 물고 빨며 키스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때 남긴 치아 자국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아 샤워할 때마다 고개를 숙이면 볼 수 있었다.윤혜인의 얼굴이 갑자기 불처럼 확 타올라 뜨거워졌고 뒤로 피하려고 했지만 등 뒤에는 시원한 에어컨의 바람을 맞아 서늘한 벽만 남았다.얇은 입술이 당장 덮쳐와 키스할 것 같은 분위기에 윤혜인은 군침을 꿀꺽 삼키며 떨리는 숨소리로 경고했다. “준, 준혁 씨가 더 이상 다가오면 성희롱으로 고소할 거예요. 그리고 근로기준법으로도 준혁 씨를 처벌할 거예요.”이준혁은 웃음을 터뜨리며 윤혜인의 이마에 대고 손가락을 튕겼다.“앗!”윤혜인의 어여쁜 얼굴이 찌푸려졌고 그녀는 머리를 감싸며 이준혁을 기세등등하게 노려보았다. “뭐 하는 거예요? 가정 폭력을 행사하는 건가요?”이준혁의 입가에는 미소가 슬며시 떠올랐고 다정스럽게 윤혜인의 콧등을 긁었다.“응, 가정 폭력이야.”웃음기가 섞여 있는 이준혁의 목소리는 매력적이고 듣기 좋았다.그 말에 윤혜인의 얼굴이 단번에 뜨거워졌다.자신이 말을 내뱉고 나서야 가정 폭력이란 말은 친밀한 관계를 설명하는 데 사용된다는 것을 깨달았다.하지만 윤혜인은 자기가 이 개자식과 친밀한 관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선을 테이블로 돌리며 다시 기세를 되찾아 당당하게 말했다. “식사할 거예요? 말 거예요?”이준혁은 공간을 내어주었고 윤혜인은 그제야 마침내 마음껏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테이블 위의 음식은 진짜 그녀의 입맛에 맞는 것들로만 가득 차 있었다. 윤혜인이 맛있는 음식을 먹어보지 못한 것도 아니고 곽씨 가문의 요리사들도 국내에서 초청한 최고의 요리사들로 꽉 찼다.하지만 거기서 만들어진 음식은 언제나 뭔가 부족한 느낌이 강했다.아무래도 식재료든 요리 방식이든 국내에서 먹어야 윤혜인의 마
이준혁이 까준 게를 먹고 나자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에 윤혜인의 태도는 훨씬 나아졌다. 그래서 배시시 웃으며 얘기를 꺼냈다.“우리 남편 오재윤 씨도 예전에 항상 게를 까서 나에게 주었어요.”이준혁의 손가락이 갑자기 경직되어 이례적으로 윤혜인의 가느다란 팔목을 꽉 쥐었다.남편이라는 두 글자는 마치 보이지 않는 철사처럼 이준혁의 심장을 거세게 조여왔다.윤혜인이 떠난 그 기간, 윤혜인이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고 아이를 낳았다는 생각만 하면 이준혁의 마음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거대한 고통이 밀려왔다.불행 중의 다행은 그 남자가 일찍 죽었다는 것이다. 만약 아직도 그 남자가 살아있다면 자기가 어떤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를지 확신할 수 없었다.“준혁 씨, 준혁 씨...”윤혜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이준혁의 이름을 두 번이나 불러서야 이준혁은 정신을 차리고 꽉 쥐었던 손을 느슨하게 풀었다.하지만 잘생긴 얼굴에는 아까와 달리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다.윤혜인은 이준혁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유심하게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이준혁이 방금 보인 실수는 윤혜인이 예전의 남편인 오재윤을 언급했기 때문인가?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것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 수 없다.사실 윤혜인은 오늘 온종일 걱정이 태산이었다.첫 출근 날인 오늘 이준혁에게 20억에 가까운 지출을 부담하게 했고 방금 만난 이준혁의 첫사랑도 무척이나 짜증 나 윤혜인은 그녀를 의도적으로 도발해 아슬아슬한 사태로 이끌어갔었다.윤혜인은 이준혁을 짜증 나게 하려고 이 정도로 노력했는데도 왜 이 남자는 전혀 화내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이준혁은 일부러 재산을 과시하는 사람과 착하지 않은 사람을 가장 혐오한다고 하지 않았던가?그런데 왜 윤혜인이 이 정도까지 했는데도 이준혁의 얼굴에는 조금도 싫어하는 표정이 없는 걸까.심지어 윤혜인에게 눈웃음을 지으며 윤혜인이 소동을 일으키는 것을 애교처럼 귀엽게 봐주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그래서 윤혜인은 오빠가 제공한 정보의 신빙성을 의심하려고 했는데 이제
이준혁의 몸이 아래로 기울어졌고 위협적인 숨결을 내뿜으며 윤혜인을 응시했다. “얼마나 대단한데?”“뭐... 그냥...”대충 얼버무리고 난 후에 윤혜인은 얌전하게 입을 다물었다.원래 임시로 꾸며낸 거짓말이었기 때문에 윤혜인은 오재윤이 도대체 어떻게 대단한지 설명하기 어려웠다.이준혁의 눈부시게 잘생긴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고 매력적인 중저음 목소리도 들려왔다.“내가 자를 줄까? 네가 한번 측정해 봐, 과연 누가 더 대단한지.”“...”윤혜인의 표정이 굳어지고 해맑은 눈동자가 여러 번 깜박였다. “뭘 측정하라고요?”이준혁은 목소리를 더 낮춰 말했다.“네 생각엔 뭘 말하는 것 같아?”윤혜인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설마 그걸 말하는 건 아니겠지... 이 변태 새끼가!’“오재윤은 그렇게 자세히 기억하면서 나에 대한 기억은 하나도 없단 말이야?”이준혁은 윤혜인의 손을 잡고 아래로 내려가며 말했다. “내가 네 기억 회복을 도와줄까?”윤혜인은 사태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걸 감지하고 손바닥을 본능적으로 뒤로 뺐지만 이준혁이 꽉 잡고 놓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이준혁의 손을 따라 아래로 끌려갔다. 이 상황은 너무 이상했다.이준혁이 도대체 뭘 하려고...윤혜인은 놀란 가슴에 떨리는 목소리로 고함쳤다.“변태예요?”“난 변태가 아닌데?”이준혁은 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정색한 표정보다 더 무서웠다.“과거를 추억하는 걸 좋아한다며? 그럼...”이준혁은 기다랗고 아름다운 손가락으로 윤혜인의 턱을 들어 올렸다. “내가 너에게 예전에 네가 날 남편이라고 불렀을 때 우리가 뭘 하고 있었는지 기억시켜 줄까?” 윤혜인은 억지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썼지만 한계에 이르렀다.“이준혁! 당신은...”미처 내뱉지 못한 말들은 이준혁의 입술 속에 파묻혀 전부 삼켜졌다.“읏...”윤혜인은 가볍게 신음을 냈고 이 상황에서 도망치려고 했지만 이준혁이 더 강하게 당겨 그의 품에 안겨 더 진한 키스를 하게 됐다.진한 키스에는 이준혁의 알아채기 어려운 인내
이준혁은 아름의 예쁘고 자그마한 얼굴을 보자 순간 온몸이 굳어버렸다.그날 이준혁의 직감이 틀리지 않았다. 이 소녀는 윤혜인의 딸이 분명했다.윤혜인과 그 남자와의 딸이었다.이 사실은 이준혁의 심장을 무형의 덩굴로 엉킨 것처럼 고통스러웠고 호흡하기도 어려워졌다.부드럽고 향기로운 아름이 차석에서 이준혁의 품으로 뛰어들었다.아름의 연꽃처럼 하얗고 야들야들한 작은 팔이 이준혁의 목을 감았고 자연스럽게 이준혁에게 물었다.“아빠, 아름를 찾으러 왔어요?”아름이 이토록 친밀하게 대하자 이준혁도 어리둥절해졌다.솔직히 말해서 윤혜인 이외의 사람이 이준혁과 친밀한 접촉을 하는 행동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어른이든 아이든 상관없이 다 싫었다.하지만 아름은 ‘아빠'를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어 갑자기 이준혁의 얼굴에 입을 갖다 댔다.“쪽.”앵두처럼 붉은 입술이 이준혁의 얼굴에 닿았다.자신이 선택한 ‘아빠'는 진짜 보면 볼수록 잘생겨 보였다.아름은 유치원 친구 안나에게 자기 아빠가 안나의 아빠처럼 진흙이 묻은 지 오래된 물통 같은 아빠가 아닌 세상에서 가장 잘생긴 아빠라고 말하고 싶었다.비록 엄마가 아름에게 딴 사람에게 함부로 별명을 짓지 말라고 가르침을 받았지만 안나의 아빠에게 별명을 지은 건 이유가 있었다. 그건 바로 지난번에 안나가 아름을 아빠 없는 들개라고 조롱할 때 안나의 물통 아빠도 안나와 함께 윤혜인을 조롱했기 때문이었다.흥!아름은 마음속으로 안나의 아빠를 오래된 물통이라고 부르기로 했다.아름은 앳된 목소리로 이준혁에게 물었다. “아빠, 아름를 놀이공원에 데려가려고 오신 건가요?”이준혁은 눈앞의 어린 소녀를 복잡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얇은 입술은 몇 번 움직였지만 끝내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아까 이준혁의 뺨에 맞춘 달콤한 뽀뽀에는 심지어 약간 끈적한 침이 묻어 있었다.그러나 이준혁은 의외로 그게 싫지 않았고 오히려 마음 깊은 곳에서 본능에 끌린 듯 친밀감이 일어났다. 원래 아름을 밀어내려고 했던 손도 동작을 멈추고 아름이 넘
그녀가 당한 모든 불행은 전부 이 남자 때문이었다.어머니의 사랑을 받아야 할 그녀는 이리저리 떠돌며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원진우 씨, 지금 무슨 헛된 꿈을 꾸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쪽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엄마와 함께 떠날 거예요. 당신이 우리 엄마를 얼마나 오랫동안 감금했는지, 또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는지 절대 잊지 않았어요.”윤혜인은 진지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당신 같은 사람은 지옥에나 가야 해요!”그러자 원진우는 분노가 가득 찬 윤혜인의 얼굴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이렇게는 대화가 안 되겠군.”그는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괜찮아. 우리 세 식구에게는 앞으로 시간이 많으니까. 내가 얼마나 좋은 아버지인지 천천히 알게 될 거야.”윤혜인은 경계심을 품고 원진우를 응시했지만 그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그러나 곧 그 의도를 알게 되었다.원진우는 손짓으로 도우미를 불러 들어오게 한 후, 지시를 내렸다.“아가씨의 짐을 챙겨서 비행기에 실어라.”윤혜인의 창백해진 얼굴을 보며 원진우는 느긋하게 설명했다.“우린 곧 떠날 거라서.”원진우가 윤아름과 자신을 데리고 떠나려 한다는 말에 윤혜인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그녀는 원진우가 매우 영리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수십 년 동안 윤아름을 감쪽같이 숨길 수 있었던 걸 보면 그의 경계심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었다.이번에 끌려가면 아버지, 큰오빠, 아이들, 모든 가족과 친구들을 평생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몰랐다.“난 안 가요!”윤혜인은 근처에 있던 의자를 집어 던지고 온 힘을 다해 문밖으로 뛰쳐나갔다.그러나 문에 도달하자마자 윤혜인은 원진우에게 팔이 붙잡히고 말았다.곧 원진우는 넥타이로 그녀의 손을 묶은 뒤 그대로 어깨에 들쳐 업었다.시간이 촉박했다. 이미 이곳이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즉시 떠나야 했다.바깥에는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떠나기만 하면 전처럼 윤아름과 윤혜인 모두 꽁꽁 아무도 모르게 숨
윤혜인이 갑자기 손을 들자 봉투가 바닥에 떨어지더니 안에 들어있던 자료가 쏟아져 나왔다. 윤혜인은 자료를 보고 싶은 생각보다는 하얀 나무젓가락을 들어 원진우의 목에 찔러넣고 싶었다. 두 사람은 신장 차이가 있었지만 원진우는 지금 고개를 살짝 아래로 숙이고 있어 윤혜인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지 못했다. 뾰족하게 자른 나무젓가락이 그대로 원진우의 목에 들어갔다. 그러자 피가 나무젓가락을 타고 아래로 후드득 떨어졌다. 하지만 떨어지는 피의 양에서 윤혜인은 글렀다는 걸 알아챘다. 동맥을 찌르지 못했으니 원진우를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원진우는 고개를 들어 아래로 흘러내리는 피를 보더니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윤혜인을 바라봤다.“나 죽이고 싶어요?”원진우가 차분하게 물었다. 까만 눈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고요했다. 윤혜인이 뒤로 물러나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곧 사람들이 나와 엄마를 구하러 들이닥칠 거예요. 도망은 꿈도 꾸지 마요.;원진우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연락이 됐나 보네요.”윤혜인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윤혜인이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원진우는 어떻게 된 일인지 충분히 알아챘을 것이다. 아니면 윤혜인도 이렇게 무모하게 나가기보다는 계속 위장하는 걸 선택했을 것이다.원진우는 목에 꽂혀있는 젓가락을 뽑지도 처리하지도 않은 채 눈썹을 추켜세우며 말했다.“제법인데? 역시 내 핏줄이라 그런가? 배짱이 커.”윤혜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간사하기로 소문난 원진우가 친자 감정을 보지 않았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미 자기 핏줄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원진우는 윤혜인이 아리송한 표정을 짓자 모든 걸 알아차렸다는 듯 큰 소리로 웃었다.“나 속이려 했나 본데...”원진우가 허리를 굽혀 서류를 줍더니 윤혜인에게 건네줬다.“봐... 네 말이 맞아. 너 정말 내 딸이야.”“...”윤혜인은 원진우의 말을 믿을 수가 없어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이내 결과지에 적힌 숫자에 눈길이 갔다.99.99%.그럴
문이 삐걱 열리더니 원진우가 안으로 돌아왔다. 표정이 밝아진 윤아름을 보고 원진우의 표정도 살짝 풀렸지만 그렇다고 단둘이 있는 시간을 연장해 주지는 않았다.“시간 됐어요.”원진우가 덤덤하게 말하더니 윤아름이 의향도 물어보지 않고 윤아름을 번쩍 안아 들고는 방에서 나갔다.다음날.윤아름이 제시간에 나타나자 윤혜인은 그 이야기를 다시 한번 들려줬다. 이야기가 결말까지 이어지자 윤아름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하더니 이성을 잃은 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이거야?”윤아름이 마술을 부리듯 손목에 묶었던 레이스를 풀더니 윤혜인의 얼굴을 보며 헤헤 웃었다.“이거?”윤혜인은 원하던 물건이 윤아름 몸에 숨겨져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손목에 묶여있는 레이스가 그저 장식이라고만 생각했다. 윤혜인은 얼른 자수를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위치 추적기가 아직 들어있었다. 윤혜인은 자수를 더듬거리며 버튼을 찾더니 꾹 눌렀다. 그때 문 쪽에서 들리는 작은 소리에 윤혜인이 얼른 자수를 윤아름의 손목에 묶어줬다.발신기의 발신 기회는 고작 두번이었다. 마지막 한 번을 사용했으니 이제 더는 기회가 없다. 윤혜인은 윤아름이 다시 끌려가는 걸 보고 너무 안타까웠지만 곧 구출될 거라는 희망을 안고 꾹 참았다.한편, 곽경천과 배남준은 북안도를 이 잡듯이 뒤지며 윤혜인을 찾고 있었다. 원진우의 출입국 기록이 없는 걸 봐서는 아직 북안도에 숨어있다는 의미였다.이준혁도 온 힘을 다해 윤혜인을 찾았다. 꼬박 3일을 눈도 붙이지 못하고 돌아치던 이준혁은 의자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잠깐 휴식하려 했다.그때 문이 열리더니 주훈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안으로 들어왔다.“발신기... 발신기에서 또 한 번의 신호를 보내왔습니다.”이준혁이 얼른 외투를 집어 들더니 지하 차고로 향했다. 가는 길에 주훈은 발신기 주변에 위험 물체가 있는지 탐색했다. 이준혁은 이 소식을 곽경천과 배남준에게 알렸다. 세 사람은 서로 다른 곳에서 출발했지만 목표는 똑같이 윤혜인과 윤아름을 구해내는 것이었다.
“아름아, 왜 그래?”원진우가 앞으로 다가와 윤아름이 도대체 왜 그러는지 확인하려 했다. 뒤를 힐끔 돌아본 윤아름이 원진우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며 소리를 지르더니 윤혜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윤아름이 오히려 애가 된 것 같았다.“삼촌, 일단 나가 계세요. 삼촌이 여기 있으면 오히려 자극만 받을 거예요.”윤혜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원진우는 자리를 비우고 싶지 않았지만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윤아름을 보고 한발 양보했다.“윤혜인 씨, 얌전하게만 있으면 절대 다치게 하지 않는다고 약속할게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죠?”원진우가 타이름 반 협박 반으로 말했다. 얕은 수작을 부리면 벌을 내리겠다는 경고였다. 윤혜인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알겠다고 대답하더니 윤아름의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엄마, 엄마, 나 혜인이야...”원진우는 겨우 차분해진 윤아름을 보며 더는 자극하기 싫어 방에서 나갔다. 윤혜인은 방문이 닫히는 걸 똑똑히 보았다. 오전에 방안을 둘러보며 카메라가 없다는 건 이미 확인한 상태였다. 새 거처를 바꿔서 그런지 아니면 윤아름을 데리고 떠날 계획이라 그런지 여기는 카메라가 없었다.“엄마, 미안해요. 아팠죠?”윤혜인이 얼른 윤아름의 등을 확인했지만 다행히 살짝 빨개진 정도였다. 이런 위험한 수를 둔 건 윤아름이 조금만 이상해도 원진우가 신경 쓴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윤아름의 정서를 이용해 원진우를 영향 주려 했다. 다행히 그 방법이 제대로 먹혔다. 윤아름이 아닌 윤혜인이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다면 죽을 정도가 아니고서는 원진우도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윤아름은 여전히 아무 감각이 없는 듯했지만 윤혜인이 친근하게 다가가도 밀어내지는 않았다. 그저 멍한 눈으로 윤혜인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눈을 깜빡였다가 윤혜인이 사라질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 윤혜인은 윤아름의 팔을 잡고 눈물을 뚝뚝 떨궜다.“엄마...”윤혜인은 한참 동안 속 시원하게 울더니 울음을 그치고는 물었다.“엄마, 그때 그 자수는 어디에다 뒀어요?”윤혜인이 물은 자수는
윤혜인이 문 앞으로 다가가 힘껏 문을 두드리며 큰 소리로 불렀다.“엄마... 엄마...”화들짝 놀란 도우미가 얼른 달려와 윤혜인을 막았다.“아가씨,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만하세요.”도우미가 윤혜인을 안더니 힘껏 침대 쪽으로 끌어당겼다. 윤혜인은 문을 두드릴 수 없어 큰 소리로 외칠 수밖에 없었다.“엄마. 엄마. 엄마.”윤혜인이 큰 소리로 외치자 바깥에서 들리던 웅얼거리는 소리가 달라졌다.쿵.문이 격렬하게 흔들렸다.쿵. 쿵. 쿵.휠체어로 문을 힘껏 부수는 소리와 도우미가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사모님... 사모님. 안 됩니다. 이러시면 안 돼요.”윤혜인이 더 높은 소리로 불렀다.“엄마. 엄마. 엄마.”방 안에 있던 도우미가 윤혜인의 입술을 틀어막자 윤혜인이 팔다리를 마구 버둥대며 웅얼웅얼 소리를 냈다.문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흔들리더니 탈칵 하는 소리와 함께 열쇠가 망가졌다. 문이 열리더니 검은 그림자가 안으로 쌩하고 들어왔다. 윤아름은 큰 꽃병 하나를 이고 들어와 윤혜인의 입을 막고 있는 도우미를 내리쳤다. 도우미는 피를 철철 흘리며 바닥에 쓰러지더니 고통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윤아름이 휠체어에서 겨우 일어나 윤혜인을 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윤혜인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정말 오랜만에 엄마를 다시 안아보는 거라 윤혜인도 엄마를 꼭 끌어안았다. 도우미는 바닥에 쓰러져 피를 흘리는 다른 도우미를 보고 윤아름을 말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긴 윤아름은 아까 정신이 살짝 나간 것 같았다. 게다가 원진우가 윤아름을 다치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했기에 과분하게 말렸다가 윤아름이 다치는 날에는 도우미에게 불똥이 튈 수도 있다.이때 소식을 들은 원진우가 다급하게 걸어왔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는 모녀를 보게 되었다. 원진우는 멈칫하더니 그 자리에 멈춰 섰다.울다가 웃기를 반복하는 윤혜인은 정상 같아 보이지 않았지만 적어도 멍하던 예전과 비기면 정서라는 게 생겼다. 윤혜인이 확실히 윤아름을 치유
원진우는 연속 몇 시간이나 윤혜인을 관찰했다. 관찰한 시간이 오래면 오랠수록 원진우는 윤혜인이 자는 모습이 자신과 쏙 빼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낯선 곳에서 안전함을 느끼지 못하고 언제든 경계 태세에 들어가는 것도 말이다.“일어났으면 뭐 좀 먹어요. 도우미에게 이쪽으로 가져다주라고 할게요.”원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차분하고 온화한 말투로 말했다. 만약 윤혜인에게 예전 경력이 없었다면 원진우를 좋은 사람이라고 여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적어도 그렇게 잔혹한 사이코패스 성향을 뒤로 잘 숨긴 것 같았다.윤혜인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었다가는 원망을 이겨내지 못할 것 같았다. 정서도 도라는 게 있어 일정한 포인트까지 닿으면 되지 아니면 원진우가 오히려 경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원진우는 그렇게 생각한다기보다 그저 윤혜인이 보면 볼수록 귀엽다고 생각했다.“혜인 씨, 이름은 엄마가 지어준 거예요?”윤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혜인의 몸에는 금패가 하나 있는데 위에 윤혜인의 이름이 적힌 금패였다. 양아버지가 길다가 그녀를 줍고 주변과 경찰서에 윤혜인이라는 아이가 실종됐는지 물었지만 윤혜인이라는 아이를 잊어버린 적은 없다고 했다. 전에 조사가 어려웠던 건 윤혜인이 원진우의 의해 먼곳에 던져졌기 때문이다. 그때는 기술이 좋지 않아 실종자를 찾는 것도 힘든 일이긴 했다. 게다가 양아버지는 인자한 사람이었기에 윤혜인의 아버지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다고만 말할 뿐 이기적이게 그녀의 모든 걸 묵살하지는 않았다. 원래 이름을 쓰겠다고 한 것도 어느 날 친부모님을 만나면 그들이 자기를 알아볼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듣기 좋네요.”원진우가 말했다. 윤혜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원진우가 뭔가 말하려다가 방향을 잃었다.“일찍 쉬어요.”원진우가 이렇게 말하더니 방에서 빠져나갔다. 도우미가 아침을 가져다줬는데 그야말로 진수성찬이었다. 윤혜인은 그 요리와 밥을 이미 보며 원진우가 아직 독을 타지는 않았을 거라는
윤혜인은 다시 눈을 감으며 잠을 자야 체력을 보존할 수 있다고 자기 자신을 타일렀다. 오빠가 사람을 데리고 오기 전까지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자기 자신을 타일러도 윤혜인의 잠자리는 여전히 뒤숭숭했고 악몽만 연거푸 꿨다. 엄마가 여기 있고, 아버지를 죽인 원수도 여기 있다는 생각에 잠에 들 수가 없었다. 그렇게 겨우 동이 틀 때까지 버틴 윤혜인이 눈을 뜨자 침대맡에 놓인 의자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원진우였다. 윤혜인은 순간 얼굴을 굳히더니 혹시나 하지 말아야 할 잠꼬대를 하면서 마음에 담아뒀던 말을 전부 쏟아낸 게 아닌지 걱정했다.“깼어요?”원진우는 그런 윤혜인을 보며 덤덤하게 물었다. 윤혜인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지만 표정만큼은 매우 덤덤했다.“네.”“어제 잠을 설치는 것 같던데요?”원진우가 대수롭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차갑디차가운 눈동자에 담긴 의미가 뭔지는 알아내기 힘들었다.윤혜인은 혹시나 실수한 건 아닌지 의심되어 심장이 철렁했다. 얼른 머리를 굴린 윤혜인이 주먹을 꽉 움켜쥐고 이렇게 말했다.“네. 잠을 잘 자지 못한 건 맞아요. 어제 겪었던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무섭거든요. 나는 정말 거기서 죽는 줄 알았어요.”윤혜인이 솔직하게 말하자 원진우의 눈빛도 살짝 풀렸다.“내가 그렇게 무서워요?”원진우가 물었다.“네. 너무 무서워요. 나를 세 번이나 죽이려고 했는데 어떻게 안 무섭겠어요?”윤혜인은 두려움을 전혀 위장하지 않았다. 원진우와 말할 때도 몸을 살짝 움츠리며 뒤로 빼고는 경계 태세를 취했다. 이에 원진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평소 곽진명과는 어떻게 지내는데요?”윤혜인은 원진우가 무슨 뜻으로 묻는지 몰라 잠깐 넋을 잃었다.“곽진명과도 이렇게 지내요?”원진우가 물었다. 윤혜인은 그제야 원진우가 자기를 윤혜인의 아버지로 대입해 곽진명과 비교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곽진명을 떠올리자 윤혜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아빠는 내게 무척이나 잘해줬어요. 그래서 한 번도 무섭다고
원진우가 눈길을 돌리더니 차분한 표정으로 묵묵히 다짐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총명한 여자라는 걸 알아챘으니 윤혜인이 한 말과 보이는 행동을 믿으면 함정에 빠지는 거나 다름없다고 말이다. 원진우는 윤아름을 한참 동안 뚫어져라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무릎을 꿇더니 윤아름의 어깨를 잡고 힘껏 흔들었다.“아름아,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윤아름의 동공은 여전히 풀려 있었고 원진우가 무슨 말을 하든 아무 반응이 없었다. 원진우는 윤아름의 어깨를 점점 더 억세게 부여잡더니 이를 악물고 캐물었다.“말해. 말하라고. 있어, 없어?”“...”윤아름은 여전히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흥흥거릴 뿐이었다. 진우희가 그렇게 된 걸 본 다음부터 줄곧 이 상태였다.원진우는 윤아름의 멘탈이 이렇게 약할 줄은 몰랐다. 양자를 총으로 쐈다는 소식부터 먼저 알려주고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있는 진우희의 시신까지 보여줬다. 지하실에 갇혀 있으면서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친 윤아름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미쳐버리고 말았다. 다 자기 잘못이라고 자책하고 있었다. 곽경천도 그녀를 구하려다 총에 맞았고 진우희도 그녀를 도우려다 원진우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이 모든 건 다 그녀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런 생각이 든 순간 이성의 끈이 끊어지고 말았고 그 뒤에 아무리 다시 이어주려 해도 이어지지 않았다. 무의식적인 흥얼거림과 가끔 입가로 흘러내리는 침은 윤아름을 모두가 알아주던 미녀에서 바보로 전락하게 했다. 하지만 미인은 미인인지라 치매에 바보가 되어도 예쁘기만 했다.윤아름은 초점 없는 동공으로 무의식적으로 모니터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때 미약하게나마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윤아름의 눈동자가 다시 초점을 되찾더니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휠체어에서 바닥으로 넘어졌다. 원진우가 부축하려 했지만 윤아름이 그 손을 탁 쳐내더니 미친 듯이 모니터가 있는 쪽으로 기어갔다. 화면으로 보이는 윤혜인은 어느새 몸을 웅크리고 있
그 누구든 오랫동안 보지 못한 아이를 본다면 차분함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게다가 윤아름처럼 아이를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윤아름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멍한 표정이었다.원진우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번에는 정말 연기가 아닌 진짜였다. 윤혜인의 쓸모도 이제 끝났기에 원진우는 윤혜인의 손에 올렸던 발을 뗐고는 입을 열었다.“온도 영하 80도로 내려.”“!”윤혜인이 화들짝 놀랐다. 이건 윤혜인을 산채로 냉동시켜 저번에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내겠다는 뜻이었다. 원진우가 시야에서 점점 멀어지자 윤혜인은 이번 기회를 놓치고 원진우가 문밖으로 나서는 날에는 죽음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어떻게 해야만 살 수 있을까...’윤혜인은 죽기 싫었다. 살아서 엄마를 구하고 오빠가 오기를 기다리고 싶었다. 윤혜인은 윤아름의 얼굴을 떠올리다 갑자기 자지러지게 소리를 질렀다.“원진우!”윤혜인이 성까지 붙여서 부르자 아니나 다를까 원진우가 걸음을 멈추더니 윤혜인을 돌아봤다. 윤혜인은 혀끝을 꽉 깨물었다. 피비린내가 혀끝에서 느껴져서야 윤혜인은 정신을 조금 차릴 수 있었다. 윤혜인의 목은 마르고 갈라져 있었다.“내가 누구 딸인지 생각해 본 적 없어요?”윤혜인을 보는 원진우의 눈빛에서 보기 드물게 두려움이 묻어났다. 비록 몇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윤혜인이 그 눈빛을 캐치하고는 반은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머지 반이야말로 윤혜인이 살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는 핵심이었다. 윤혜인은 원진우에게 고민할 기회도 주지 않고 꿋꿋하게 말했다.“삼촌, 그렇게 총명하신 분이 이미 눈치채고 계신 거 아니에요? 경천 오빠랑 나랑 친 남매가 아닌 건 알고 있잖아요. 아버지가 왜 직접 낳지 않고 남자아이를 입양했는지 생각해 본 적 없어요?”원진우가 윤혜인을 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혹시 지금 내 딸이라고 하고 싶은 거예요?”“머리는 썼는데 나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서 그렇게 쉽게 속지 않아요.”원진우가 이렇게 말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