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경한은 항상 그녀에게 보상을 주겠다고 한다. 그놈의 보상!그의 말은 영원히 믿을 것이 못 되었다.육경한은 가슴 언저리에서 통증을 느꼈다. 숨쉬기도 어려워지는 것 같았다.뭐라 설명하고 싶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소원은 이미 그에게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넌 꼭 내가 지옥으로 떨어지고 처참하게 사는 꼴을 봐야 속 시원하겠어?”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그렇게 해줄게...”육경한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소원은 이미 몸을 틀어 시멘트로 만든 화단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퍽 소리가 났다.화단엔 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순간 육경한의 몸이 경직되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저 본능적으로 빠르게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품에 끌어안았다.“소원아!”그는 그녀의 어깨를 꽉 안으면서 소리를 질렀다.“미쳤어?!”소원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무력감을 느끼고 있었다. 죽는 것마저 힘이 부족해 제대로 죽지 못했으니 말이다.이마에 흐른 피가 그녀의 얼굴 반쪽을 적시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모습마저 아름다워 보였다.그런 그녀의 모습은 육경한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소원은 점차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고 끊임없이 중얼거렸다.“육경한... 돌려줄게... 네가 살려낸 목숨... 돌려줄게...”그렇게 그녀는 끝없는 어둠에 의식이 삼켜졌고 겉모습은 거의 죽은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육경한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식은땀을 흘리며 차갑게 말했다.“소원아, 바보 같은 짓 하지 마! 너한테 어머님이 계시잖아! 너 죽으면 어머님은! 어머님 생각은 안 해봤어?”여하간에 그녀는 자신이 짐승보다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쉽게 자살 시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계속 살아가길 바랐다.육경한의 말은 독 묻은 비수가 되어 그녀의 가슴에 푹 박혀버렸다.그는 그녀를 알아도 너무 잘 알았다.이 세상에 그녀의 가족이 한 명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는 그녀를 절대 놓아주지
퍽!이때 누군가가 진아연을 발로 차 넘어지게 했다.진아연은 소원보다 더 많이 바닥에 구르게 되었다.“아윽... 누가 감히... 어떤 X이야!”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진아연은 자신을 차버린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지 못했다.그녀는 허리에 손을 올리며 일어나자 육경한이 이미 소원을 안아 든 채 차에 태우고 있었다.얼른 따라가 보았지만 급하게 출발하는 차에 빗물을 뒤집어쓰게 되었다.진아연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아아아아악!!!!!”여기서 포기할 수 없었던 그녀는 얼른 따라갔다.차 안.육경한의 팔에서는 계속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보지 못한 사람처럼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차는 비를 뚫고 달려 장례식장으로 왔다.소원은 너무도 조용해 꼭 죽은 사람 같았다.그녀는 구석에 몸을 한껏 웅크리고 있었다. 육경한이 조금이라도 다가가려고 하면 그녀는 소리를 지르면서 발작을 일으켰고 몸에 무리가 갔는지 피를 토해내기도 했다.육경한은 그녀의 곁으로 다가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그 짧은 몇 분이 그에겐 수십 년처럼 느껴졌다.만약 그녀에게 힘이 많이 남아 있었더라면...만약 각진 곳에 머리를 박았더라면...그는 아마 영원히 그녀를 잃게 될 것이다.상상만 해도 그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장례식장 안.장례지도사는 소진용의 시체를 깨끗하게 닦아주고 있었다.소원은 의자에 앉기 싫어했고 입구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그녀의 모습은 꼭 버려진 강아지 같았다. 동글동글한 두 눈으로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이 안에... 우리 아빠가 있어...'어릴 때 비가 오면 항상 마중을 나와 그녀에게 겉옷과 우산을 씌워주던 아빠였다.아빠가 살아있을 땐 그녀는 항상 든든한 기분을 느꼈다.그런데 지금은... 없었다.그녀의 버팀목이 사라졌다.문이 열리고 소원은 기어가듯 들어갔다.육경한은 그녀에게 다가가면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발작을 일으킬까 봐 손을 댈 엄두도 나지 않았다.소진용은 하얀 천을 덮고 있었다.소원은 그런 소
진아연은 방금 자신을 발로 차버린 사람이 누군지 보지 못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녀의 뒤엔 육경한뿐이었다.만약 그 사람이 육경한이라면 그녀의 은혜는 이미 육경한이 소원을 향한 마음을 능가했다는 것이었다.진아연은 미쳐버릴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는 이성을 잃어서는 안 되었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똑바로 차려 챙길 것은 챙겨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녀는 부드럽고 아량이 넓은 사람 연기를 해야 한다.독하게 육경한을 깨물던 소원과 대비되게 연기를 해야 육경한의 마음을 다시 잡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경한 씨, 괜찮아요? 아까...”진아연은 빨갛게 물든 그의 소매를 가리키며 걱정스레 물었다.“그 여자가 깨물었는데 괜찮아요?”육경한은 멍하니 그녀의 꼴을 몇 초간 지켜보다가 담담하게 답했다.“괜찮아.”“방금은 미안했어요. 소원한테 그런 큰일이 있었을 줄은 몰랐거든요. 그냥 경한 씨의 팔을 꽉 물고 있길래 나도 모르게 급해서... 이따가 내가 직접 소원이한테 사과할게요...”진아연은 시선을 내리깔며 처연한 모습을 연기했다.육경한은 그녀의 웨딩드레스를 빤히 보았다. 순간 이상하게도 눈에 거슬렸다.“괜찮아. 오늘 많이 속상했지. 나중에 보상해줄 테니까 오늘은 이만 먼저 돌아가.”진아연은 화가 치밀었다. 육경한이 그녀에게 먼저 돌아가라고 했으니 말이다. 그는 분명 이곳에 남아 소원의 곁에 있어 줄 것이 틀림없었다.다행인 것은 육경한의 태도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는 것이다.그녀는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나 먼저 가 볼게요.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육경한은 떠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가 다시 소원을 떠올리면서 자신과 소원의 사이도 이렇게 평화로웠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진아연은 몸을 틀자마자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그녀는 똑똑히 들었다. 육경한이 소원의 어머니를 언급한 것을. 아마 위독한 상태인 듯했다.‘설마 하루 사이에 둘이나 죽는다고?'‘이런 좋은 소식 당연히 소원이도 알아야지.'그녀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임세희는 몸을 돌려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어머, 윤혜인 씨가 여긴 어쩐 일이에요?”그녀는 꼭 우연인 것처럼, 꼭 자기가 이선 그룹의 안주인이 된 것처럼 말을 건넸다.윤혜인의 두 눈이 분노에 충혈되고 손발마저 차가워졌다.그녀는 살짝 튀어나온 임세희의 배를 발견했다. 같은 여자로서 윤혜인은 그것이 뱃살이 아니라 임신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아마 그녀보다 꽤 일찍 임신한 것 같았다. 다만 누렇게 변한 얼굴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이상하게도 티가 나는 것 같았다.순간 윤혜인은 배신감을 느꼈다.이준혁이 줄곧 그녀를 속이고 있었기 때문이다.정신병동에 있다느니 복수를 해주겠다느니 전부 거짓말이었다.이준혁은 임세희를 곁으로 부른 것도 모자라 임신까지 시켰다.“윤혜인 씨, 사실 전 줄곧 혜인 씨한테 사과하고 싶었어요...”임세희는 윤혜인을 보면서 울먹거렸다.“전에는 다 제가 철이 없어서 주제도 모르고 준혁 오빠한테 들러붙어 혜인 씨 기분만 상하게 했어요.”제멋대로 굴던 모습은 사라지고 누렇게 뜬 얼굴로 울먹이니 확실히 가련해 보이긴 했다.그러나 윤혜인은 전혀 넘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향한 증오만 더 깊어져 갔다.송소미는 죽기 직전에 임세희가 그녀의 아이를 없애버리라고 지시했다는 사실을 직접 인정했다.윤혜인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고 이내 짝 소리와 함께 뺨을 때렸다.털썩.뺨을 맞은 임세희는 소파 모서리에 부딪히며 넘어졌다.“아야...”그녀는 배를 감싸 안았다. 그러면서 아주 고통스러운 듯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다른 각도에서는 어떻게 보일지는 몰라도 그녀의 맞은편에 있는 윤혜인은 똑똑히 보았다.그녀의 손힘으론 절대 이 정도로 넘어질 리가 없었다.임세희는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지금도 연기를 하며 누명을 씌우고 있었으니 말이다.그렇게나 연극을 좋아하니 그녀는 맞춰줄 생각이었다.윤혜인은 임세희에게 다가가 손을 잡으며 물었다.“괜찮아요?”임세희는 입술을 짓이기더니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달았다. 그런데 누렇게 뜬 얼굴로 그
“윤혜인!”이때 이준혁이 다가와 그녀를 확 잡아당기며 이 소란을 종결시켰다.“내 몸에 손대지 말아요!”윤혜인은 이준혁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역겨워.'그녀는 눈앞에 있는 쓰레기남과 쓰레기녀가 너무도 역겹게 느껴졌다.순간 속이 울렁거리며 눈앞이 어질하여 휘청거리게 되었다.이준혁은 급하게 손을 뻗어 그녀를 부축하려고 했다.그러나 윤혜인은 뒤로 물러나면서 이를 빠득 갈았다.“이준혁 씨, 우리 계약도 그만하죠. 번거롭겠지만 이혼 서류에 일찍이 사인해주길 바라요. 안 그러면 사람 많은 곳에서 난동을 피울 거예요.”말을 마친 윤혜인은 바로 떠나려고 했다. 더는 눈을 더럽히는 남녀를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이준혁은 그녀를 따라가려고 했지만, 뒤에 있던 임세희가 갑자기 그의 바짓자락을 붙잡으며 당황한 듯 말했다.“준혁 오빠, 나 배가... 배가 너무 아파... 피가 나는 것 같아...”바닥은 어느새 피로 물들어 있었다.이준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곤 주훈을 불렀다.“주 비서, 당장 세희를 병원으로 데려가. 모든 과정에 곁에서 딱 붙어 지켜봐. 절대 문제 생기지 않게.”말을 마친 뒤 그는 바닥에 주저앉은 임세희를 무시하고 얼른 윤혜인을 붙잡으러 나갔다.임세희는 이를 빠득 갈았다. 그녀의 몸에서는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이준혁은 무시하고 나가버렸다.감히 난동을 피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여하간에 정신병동에서 지냈던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으니 말이다.그녀는 일단 힘부터 키워야 했다. 절대 윤혜인과 맞서 싸워서는 안 되었다. 그랬다면 이준혁이 절대 그녀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임세희는 주먹을 꽉 쥐며 이 치욕은 잠깐이리라 생각했다.‘난 반드시 윤혜인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고 말 거야!'이준혁은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경호원과 다투는 윤혜인을 발견했다.“비켜요! 당신들이 뭔데 자꾸만 내 자유를 빼앗는데요! 비켜요!”이준혁은 경호원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두 경호원은 길을 내어주었다.윤혜인이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이준혁
익숙한 레퍼토리에 윤혜인은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지만, 꾹 참고 들었다.이준혁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임세희 배 속에 있는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야.”윤혜인은 차갑게 웃었다.“이준혁 씨, 내가 그렇게 멍청해 보여요? 준혁 씨 아이가 아니라고요. 그럼 왜 곁에 두고 보살펴 주고 있었는데요?”“세희를 데리고 나온 사람은 내가 맞아. 하지만 난 절대 불쌍해서 마음이 약해져서 데리고 나온 게 아니야. 나에겐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어.”그 이유에 관해선 이준혁은 뜸을 들이며 말했다.“언젠가, 언젠가는 반드시 알려줄게. 아직은 아니야.”너무도 형편없는 변명에 윤혜인은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웃음이 터져 나오려고 했다.이젠 그녀에게 그럴싸한 변명도 지어내지 않았다.확실히 그녀도 들을 자격이 없었다.이준혁은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괜스레 불안해져 그녀의 손을 잡았다.“난 너랑 이혼할 생각 없어. 너도 자꾸만 내 곁을 떠날 생각하지 말아줘, 알겠어?”며칠간 그는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게 될까 봐 회사에서 잠을 잤다.밤잠을 이루지 못할 때 그는 자신이 윤혜인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날 이성을 잃은 것도 그녀가 그의 곁을 몰래 떠나려고 했기 때문이다.그는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윤혜인이 임신한 아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녀를 놓아주지 못하니 차라리 전부 받아들이자는 마음이었다.게다가 그는 은근히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일 수도 있다는 희망을 말이다.여하간에 그간 그는 몇 번이나 충동적으로 그녀의 몸을 탐했었다.교활한 한구운의 말만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하지만 그는 이미 그 아이가 진짜 그의 아이이든 다른 남자의 아이이든 전부 받아들이기로 다짐했고 윤혜인을 잘 타일러 방심하게 한 다음 그녀가 직접 털어놓게 할 생각이었다.윤혜인은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그동안 나 계속 속이고 있었어요?”‘계약 결혼은 무슨. 그냥 날 묶어두기 위한 수단이겠지!'이준혁은 솔
한참 울고 난 뒤 윤혜인은 소원을 부축하며 휴식 공간으로 왔다. 이준혁과 육경한은 그런 그녀들을 따라가지 않았다.두 사람에겐 할 말이 말았을 테니까.휴식 공간으로 온 뒤 윤혜인은 소원에게 물었다.“아저씨가 왜 그러셨는지 알고 있어?”소원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회사 일로...”“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소원은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전미경은 아파 집에 있었고 빈소는 그녀 혼자 지키고 있어야 했다.장례식까지 치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이 모든 상황이 여전히 꿈만 같았고 꿈에서 깨면 소진용이 집에 있을 것 같았다.그녀의 가족은 전처럼 오손도손 모여앉아 즐겁게 웃고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복도를 가득 채운 근조화환이 그녀에게 현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더는 그럴 일 없다고.두 사람은 다시 서로를 끌어안으며 통곡했다.떠나기 전 윤혜인은 소원에게 물었다.“소원아, 혹시 핸드폰 있어? 나 어디로 전화 한 통 좀 하고 싶은데.”소원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그녀는 윤혜인이 핸드폰조차 마음대로 쓰지 못할 줄은 몰랐다. 어쩌면 이준혁의 집착에 힘들게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윤혜인이 떠난 뒤 소원은 계속 빈소에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해가 저물자 빈소에 불청객이 찾아왔다.검은색 코트를 입은 진아연이 국화꽃을 들고 등장했다. 육경한은 마침 담배 태우러 나간 터라 진아연과 마주치지 못했다.진아연은 빈소로 들어가 인사하려고 했지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당장 꺼져!”비록 빈소에 남아 있는 사람은 얼마 없었지만 진아연은 소리치는 그녀에 조금 괘씸하며 악랄하게 말했다.“소원. 난 좋은 마음으로 인사드리려고 온 거야. 내 호의 무시하지 마.”소원은 두 눈을 부릅뜨며 화를 냈다.“더러운 게 감히 깨끗한 우리 아빠 빈소를 더럽히려고 하지 마.”“깨끗하다고?”진아연은 웃으며 되물었다.“넌 정말로 네 아빠가 깨끗하다고 생각해?”소원은 그녀를 상대하고 싶지 않아 차갑게
향로에 있던 뜨거운 재가 진아연의 머리카락에 닿았다.소원은 비록 진아연이 죽길 바랐지만 정말로 향로를 엎어버릴 마음은 없었다.이곳은 빈소였고 소진용의 영혼이 마지막으로 머물다 가는 곳이었다.그녀는 소진용이 보는 앞에서 이런 짓을 해서는 안 되었다.이런 악랄한 사람 때문에 감방에 갈 가치는 없었다.소원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당장 우리 부모님께 사과해!”뜨거운 김을 폴폴 내는 향로가 진아연의 얼굴과 가까워지고 뜨거운 열기가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진아연은 원래 소원이 자신의 말을 들으면 미쳐버릴 거로 생각했다. 그렇게 빈소에서 미쳐 죽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그러나 소원은 향로를 들어 그녀의 얼굴 앞으로 내밀었다.진아연은 소리를 질렀다.“이게 뭐 하는 짓이야! 미쳤어?!”진아연은 빈소에 아무도 없는 것을 원망했다.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일부러 사람이 없을 시간대에 찾아왔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그 순간.소원이 그녀의 머리를 눌러버렸고 이마의 잔머리가 향로에 따면서 꼬불꼬불해졌다.“아아악!”놀란 진아연은 하마터면 바지에 실수할 뻔했고 처량하게 소리를 질렀다.“아아악! 알았어! 할게! 사과할게!”“미안해, 내가 미안해. 내가 네 부모님을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었어. 부모님이 돌아가신 거 겹경사라고 해서는 안 되었어.”“사과했잖아.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소원은 손을 놓았다. 그러자 진아연은 뒤로 털썩 주저앉았다.진아연의 얼굴은 향로의 뜨거운 열기에 빨갛게 되었고 돼지기름이라도 바른 듯 얼굴이 번들거렸다.소원은 놀라 멍하니 앉아 있는 진아연을 보며 차갑게 말했다.“꺼져. 우리 아빠 빈소 더럽히지 말고!”“알았어. 갈게, 갈게...”겁먹은 진아연은 기어가듯 나가버렸다.하지만 속으로는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알고 보니 소원은 그저 그녀에게 겁주기 위해 향로를 들이밀었던 것이었다.그 탓에 그녀는 소원의 앞에서 모든 체면을 깎이게 되었다.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그녀는 고개를 돌려 소원을 노려보았다
그녀가 당한 모든 불행은 전부 이 남자 때문이었다.어머니의 사랑을 받아야 할 그녀는 이리저리 떠돌며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원진우 씨, 지금 무슨 헛된 꿈을 꾸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쪽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엄마와 함께 떠날 거예요. 당신이 우리 엄마를 얼마나 오랫동안 감금했는지, 또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는지 절대 잊지 않았어요.”윤혜인은 진지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당신 같은 사람은 지옥에나 가야 해요!”그러자 원진우는 분노가 가득 찬 윤혜인의 얼굴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이렇게는 대화가 안 되겠군.”그는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괜찮아. 우리 세 식구에게는 앞으로 시간이 많으니까. 내가 얼마나 좋은 아버지인지 천천히 알게 될 거야.”윤혜인은 경계심을 품고 원진우를 응시했지만 그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그러나 곧 그 의도를 알게 되었다.원진우는 손짓으로 도우미를 불러 들어오게 한 후, 지시를 내렸다.“아가씨의 짐을 챙겨서 비행기에 실어라.”윤혜인의 창백해진 얼굴을 보며 원진우는 느긋하게 설명했다.“우린 곧 떠날 거라서.”원진우가 윤아름과 자신을 데리고 떠나려 한다는 말에 윤혜인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그녀는 원진우가 매우 영리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수십 년 동안 윤아름을 감쪽같이 숨길 수 있었던 걸 보면 그의 경계심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었다.이번에 끌려가면 아버지, 큰오빠, 아이들, 모든 가족과 친구들을 평생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몰랐다.“난 안 가요!”윤혜인은 근처에 있던 의자를 집어 던지고 온 힘을 다해 문밖으로 뛰쳐나갔다.그러나 문에 도달하자마자 윤혜인은 원진우에게 팔이 붙잡히고 말았다.곧 원진우는 넥타이로 그녀의 손을 묶은 뒤 그대로 어깨에 들쳐 업었다.시간이 촉박했다. 이미 이곳이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즉시 떠나야 했다.바깥에는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떠나기만 하면 전처럼 윤아름과 윤혜인 모두 꽁꽁 아무도 모르게 숨
윤혜인이 갑자기 손을 들자 봉투가 바닥에 떨어지더니 안에 들어있던 자료가 쏟아져 나왔다. 윤혜인은 자료를 보고 싶은 생각보다는 하얀 나무젓가락을 들어 원진우의 목에 찔러넣고 싶었다. 두 사람은 신장 차이가 있었지만 원진우는 지금 고개를 살짝 아래로 숙이고 있어 윤혜인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지 못했다. 뾰족하게 자른 나무젓가락이 그대로 원진우의 목에 들어갔다. 그러자 피가 나무젓가락을 타고 아래로 후드득 떨어졌다. 하지만 떨어지는 피의 양에서 윤혜인은 글렀다는 걸 알아챘다. 동맥을 찌르지 못했으니 원진우를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원진우는 고개를 들어 아래로 흘러내리는 피를 보더니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윤혜인을 바라봤다.“나 죽이고 싶어요?”원진우가 차분하게 물었다. 까만 눈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고요했다. 윤혜인이 뒤로 물러나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곧 사람들이 나와 엄마를 구하러 들이닥칠 거예요. 도망은 꿈도 꾸지 마요.;원진우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연락이 됐나 보네요.”윤혜인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윤혜인이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원진우는 어떻게 된 일인지 충분히 알아챘을 것이다. 아니면 윤혜인도 이렇게 무모하게 나가기보다는 계속 위장하는 걸 선택했을 것이다.원진우는 목에 꽂혀있는 젓가락을 뽑지도 처리하지도 않은 채 눈썹을 추켜세우며 말했다.“제법인데? 역시 내 핏줄이라 그런가? 배짱이 커.”윤혜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간사하기로 소문난 원진우가 친자 감정을 보지 않았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미 자기 핏줄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원진우는 윤혜인이 아리송한 표정을 짓자 모든 걸 알아차렸다는 듯 큰 소리로 웃었다.“나 속이려 했나 본데...”원진우가 허리를 굽혀 서류를 줍더니 윤혜인에게 건네줬다.“봐... 네 말이 맞아. 너 정말 내 딸이야.”“...”윤혜인은 원진우의 말을 믿을 수가 없어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이내 결과지에 적힌 숫자에 눈길이 갔다.99.99%.그럴
문이 삐걱 열리더니 원진우가 안으로 돌아왔다. 표정이 밝아진 윤아름을 보고 원진우의 표정도 살짝 풀렸지만 그렇다고 단둘이 있는 시간을 연장해 주지는 않았다.“시간 됐어요.”원진우가 덤덤하게 말하더니 윤아름이 의향도 물어보지 않고 윤아름을 번쩍 안아 들고는 방에서 나갔다.다음날.윤아름이 제시간에 나타나자 윤혜인은 그 이야기를 다시 한번 들려줬다. 이야기가 결말까지 이어지자 윤아름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하더니 이성을 잃은 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이거야?”윤아름이 마술을 부리듯 손목에 묶었던 레이스를 풀더니 윤혜인의 얼굴을 보며 헤헤 웃었다.“이거?”윤혜인은 원하던 물건이 윤아름 몸에 숨겨져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손목에 묶여있는 레이스가 그저 장식이라고만 생각했다. 윤혜인은 얼른 자수를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위치 추적기가 아직 들어있었다. 윤혜인은 자수를 더듬거리며 버튼을 찾더니 꾹 눌렀다. 그때 문 쪽에서 들리는 작은 소리에 윤혜인이 얼른 자수를 윤아름의 손목에 묶어줬다.발신기의 발신 기회는 고작 두번이었다. 마지막 한 번을 사용했으니 이제 더는 기회가 없다. 윤혜인은 윤아름이 다시 끌려가는 걸 보고 너무 안타까웠지만 곧 구출될 거라는 희망을 안고 꾹 참았다.한편, 곽경천과 배남준은 북안도를 이 잡듯이 뒤지며 윤혜인을 찾고 있었다. 원진우의 출입국 기록이 없는 걸 봐서는 아직 북안도에 숨어있다는 의미였다.이준혁도 온 힘을 다해 윤혜인을 찾았다. 꼬박 3일을 눈도 붙이지 못하고 돌아치던 이준혁은 의자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잠깐 휴식하려 했다.그때 문이 열리더니 주훈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안으로 들어왔다.“발신기... 발신기에서 또 한 번의 신호를 보내왔습니다.”이준혁이 얼른 외투를 집어 들더니 지하 차고로 향했다. 가는 길에 주훈은 발신기 주변에 위험 물체가 있는지 탐색했다. 이준혁은 이 소식을 곽경천과 배남준에게 알렸다. 세 사람은 서로 다른 곳에서 출발했지만 목표는 똑같이 윤혜인과 윤아름을 구해내는 것이었다.
“아름아, 왜 그래?”원진우가 앞으로 다가와 윤아름이 도대체 왜 그러는지 확인하려 했다. 뒤를 힐끔 돌아본 윤아름이 원진우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며 소리를 지르더니 윤혜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윤아름이 오히려 애가 된 것 같았다.“삼촌, 일단 나가 계세요. 삼촌이 여기 있으면 오히려 자극만 받을 거예요.”윤혜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원진우는 자리를 비우고 싶지 않았지만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윤아름을 보고 한발 양보했다.“윤혜인 씨, 얌전하게만 있으면 절대 다치게 하지 않는다고 약속할게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죠?”원진우가 타이름 반 협박 반으로 말했다. 얕은 수작을 부리면 벌을 내리겠다는 경고였다. 윤혜인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알겠다고 대답하더니 윤아름의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엄마, 엄마, 나 혜인이야...”원진우는 겨우 차분해진 윤아름을 보며 더는 자극하기 싫어 방에서 나갔다. 윤혜인은 방문이 닫히는 걸 똑똑히 보았다. 오전에 방안을 둘러보며 카메라가 없다는 건 이미 확인한 상태였다. 새 거처를 바꿔서 그런지 아니면 윤아름을 데리고 떠날 계획이라 그런지 여기는 카메라가 없었다.“엄마, 미안해요. 아팠죠?”윤혜인이 얼른 윤아름의 등을 확인했지만 다행히 살짝 빨개진 정도였다. 이런 위험한 수를 둔 건 윤아름이 조금만 이상해도 원진우가 신경 쓴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윤아름의 정서를 이용해 원진우를 영향 주려 했다. 다행히 그 방법이 제대로 먹혔다. 윤아름이 아닌 윤혜인이 아프다고 소리를 질렀다면 죽을 정도가 아니고서는 원진우도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윤아름은 여전히 아무 감각이 없는 듯했지만 윤혜인이 친근하게 다가가도 밀어내지는 않았다. 그저 멍한 눈으로 윤혜인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눈을 깜빡였다가 윤혜인이 사라질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 윤혜인은 윤아름의 팔을 잡고 눈물을 뚝뚝 떨궜다.“엄마...”윤혜인은 한참 동안 속 시원하게 울더니 울음을 그치고는 물었다.“엄마, 그때 그 자수는 어디에다 뒀어요?”윤혜인이 물은 자수는
윤혜인이 문 앞으로 다가가 힘껏 문을 두드리며 큰 소리로 불렀다.“엄마... 엄마...”화들짝 놀란 도우미가 얼른 달려와 윤혜인을 막았다.“아가씨,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만하세요.”도우미가 윤혜인을 안더니 힘껏 침대 쪽으로 끌어당겼다. 윤혜인은 문을 두드릴 수 없어 큰 소리로 외칠 수밖에 없었다.“엄마. 엄마. 엄마.”윤혜인이 큰 소리로 외치자 바깥에서 들리던 웅얼거리는 소리가 달라졌다.쿵.문이 격렬하게 흔들렸다.쿵. 쿵. 쿵.휠체어로 문을 힘껏 부수는 소리와 도우미가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사모님... 사모님. 안 됩니다. 이러시면 안 돼요.”윤혜인이 더 높은 소리로 불렀다.“엄마. 엄마. 엄마.”방 안에 있던 도우미가 윤혜인의 입술을 틀어막자 윤혜인이 팔다리를 마구 버둥대며 웅얼웅얼 소리를 냈다.문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흔들리더니 탈칵 하는 소리와 함께 열쇠가 망가졌다. 문이 열리더니 검은 그림자가 안으로 쌩하고 들어왔다. 윤아름은 큰 꽃병 하나를 이고 들어와 윤혜인의 입을 막고 있는 도우미를 내리쳤다. 도우미는 피를 철철 흘리며 바닥에 쓰러지더니 고통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윤아름이 휠체어에서 겨우 일어나 윤혜인을 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윤혜인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정말 오랜만에 엄마를 다시 안아보는 거라 윤혜인도 엄마를 꼭 끌어안았다. 도우미는 바닥에 쓰러져 피를 흘리는 다른 도우미를 보고 윤아름을 말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긴 윤아름은 아까 정신이 살짝 나간 것 같았다. 게다가 원진우가 윤아름을 다치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했기에 과분하게 말렸다가 윤아름이 다치는 날에는 도우미에게 불똥이 튈 수도 있다.이때 소식을 들은 원진우가 다급하게 걸어왔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는 모녀를 보게 되었다. 원진우는 멈칫하더니 그 자리에 멈춰 섰다.울다가 웃기를 반복하는 윤혜인은 정상 같아 보이지 않았지만 적어도 멍하던 예전과 비기면 정서라는 게 생겼다. 윤혜인이 확실히 윤아름을 치유
원진우는 연속 몇 시간이나 윤혜인을 관찰했다. 관찰한 시간이 오래면 오랠수록 원진우는 윤혜인이 자는 모습이 자신과 쏙 빼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낯선 곳에서 안전함을 느끼지 못하고 언제든 경계 태세에 들어가는 것도 말이다.“일어났으면 뭐 좀 먹어요. 도우미에게 이쪽으로 가져다주라고 할게요.”원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차분하고 온화한 말투로 말했다. 만약 윤혜인에게 예전 경력이 없었다면 원진우를 좋은 사람이라고 여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적어도 그렇게 잔혹한 사이코패스 성향을 뒤로 잘 숨긴 것 같았다.윤혜인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었다가는 원망을 이겨내지 못할 것 같았다. 정서도 도라는 게 있어 일정한 포인트까지 닿으면 되지 아니면 원진우가 오히려 경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원진우는 그렇게 생각한다기보다 그저 윤혜인이 보면 볼수록 귀엽다고 생각했다.“혜인 씨, 이름은 엄마가 지어준 거예요?”윤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혜인의 몸에는 금패가 하나 있는데 위에 윤혜인의 이름이 적힌 금패였다. 양아버지가 길다가 그녀를 줍고 주변과 경찰서에 윤혜인이라는 아이가 실종됐는지 물었지만 윤혜인이라는 아이를 잊어버린 적은 없다고 했다. 전에 조사가 어려웠던 건 윤혜인이 원진우의 의해 먼곳에 던져졌기 때문이다. 그때는 기술이 좋지 않아 실종자를 찾는 것도 힘든 일이긴 했다. 게다가 양아버지는 인자한 사람이었기에 윤혜인의 아버지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다고만 말할 뿐 이기적이게 그녀의 모든 걸 묵살하지는 않았다. 원래 이름을 쓰겠다고 한 것도 어느 날 친부모님을 만나면 그들이 자기를 알아볼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듣기 좋네요.”원진우가 말했다. 윤혜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원진우가 뭔가 말하려다가 방향을 잃었다.“일찍 쉬어요.”원진우가 이렇게 말하더니 방에서 빠져나갔다. 도우미가 아침을 가져다줬는데 그야말로 진수성찬이었다. 윤혜인은 그 요리와 밥을 이미 보며 원진우가 아직 독을 타지는 않았을 거라는
윤혜인은 다시 눈을 감으며 잠을 자야 체력을 보존할 수 있다고 자기 자신을 타일렀다. 오빠가 사람을 데리고 오기 전까지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자기 자신을 타일러도 윤혜인의 잠자리는 여전히 뒤숭숭했고 악몽만 연거푸 꿨다. 엄마가 여기 있고, 아버지를 죽인 원수도 여기 있다는 생각에 잠에 들 수가 없었다. 그렇게 겨우 동이 틀 때까지 버틴 윤혜인이 눈을 뜨자 침대맡에 놓인 의자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원진우였다. 윤혜인은 순간 얼굴을 굳히더니 혹시나 하지 말아야 할 잠꼬대를 하면서 마음에 담아뒀던 말을 전부 쏟아낸 게 아닌지 걱정했다.“깼어요?”원진우는 그런 윤혜인을 보며 덤덤하게 물었다. 윤혜인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지만 표정만큼은 매우 덤덤했다.“네.”“어제 잠을 설치는 것 같던데요?”원진우가 대수롭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차갑디차가운 눈동자에 담긴 의미가 뭔지는 알아내기 힘들었다.윤혜인은 혹시나 실수한 건 아닌지 의심되어 심장이 철렁했다. 얼른 머리를 굴린 윤혜인이 주먹을 꽉 움켜쥐고 이렇게 말했다.“네. 잠을 잘 자지 못한 건 맞아요. 어제 겪었던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무섭거든요. 나는 정말 거기서 죽는 줄 알았어요.”윤혜인이 솔직하게 말하자 원진우의 눈빛도 살짝 풀렸다.“내가 그렇게 무서워요?”원진우가 물었다.“네. 너무 무서워요. 나를 세 번이나 죽이려고 했는데 어떻게 안 무섭겠어요?”윤혜인은 두려움을 전혀 위장하지 않았다. 원진우와 말할 때도 몸을 살짝 움츠리며 뒤로 빼고는 경계 태세를 취했다. 이에 원진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평소 곽진명과는 어떻게 지내는데요?”윤혜인은 원진우가 무슨 뜻으로 묻는지 몰라 잠깐 넋을 잃었다.“곽진명과도 이렇게 지내요?”원진우가 물었다. 윤혜인은 그제야 원진우가 자기를 윤혜인의 아버지로 대입해 곽진명과 비교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곽진명을 떠올리자 윤혜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아빠는 내게 무척이나 잘해줬어요. 그래서 한 번도 무섭다고
원진우가 눈길을 돌리더니 차분한 표정으로 묵묵히 다짐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총명한 여자라는 걸 알아챘으니 윤혜인이 한 말과 보이는 행동을 믿으면 함정에 빠지는 거나 다름없다고 말이다. 원진우는 윤아름을 한참 동안 뚫어져라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무릎을 꿇더니 윤아름의 어깨를 잡고 힘껏 흔들었다.“아름아,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윤아름의 동공은 여전히 풀려 있었고 원진우가 무슨 말을 하든 아무 반응이 없었다. 원진우는 윤아름의 어깨를 점점 더 억세게 부여잡더니 이를 악물고 캐물었다.“말해. 말하라고. 있어, 없어?”“...”윤아름은 여전히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흥흥거릴 뿐이었다. 진우희가 그렇게 된 걸 본 다음부터 줄곧 이 상태였다.원진우는 윤아름의 멘탈이 이렇게 약할 줄은 몰랐다. 양자를 총으로 쐈다는 소식부터 먼저 알려주고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있는 진우희의 시신까지 보여줬다. 지하실에 갇혀 있으면서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친 윤아름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미쳐버리고 말았다. 다 자기 잘못이라고 자책하고 있었다. 곽경천도 그녀를 구하려다 총에 맞았고 진우희도 그녀를 도우려다 원진우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이 모든 건 다 그녀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런 생각이 든 순간 이성의 끈이 끊어지고 말았고 그 뒤에 아무리 다시 이어주려 해도 이어지지 않았다. 무의식적인 흥얼거림과 가끔 입가로 흘러내리는 침은 윤아름을 모두가 알아주던 미녀에서 바보로 전락하게 했다. 하지만 미인은 미인인지라 치매에 바보가 되어도 예쁘기만 했다.윤아름은 초점 없는 동공으로 무의식적으로 모니터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때 미약하게나마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윤아름의 눈동자가 다시 초점을 되찾더니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휠체어에서 바닥으로 넘어졌다. 원진우가 부축하려 했지만 윤아름이 그 손을 탁 쳐내더니 미친 듯이 모니터가 있는 쪽으로 기어갔다. 화면으로 보이는 윤혜인은 어느새 몸을 웅크리고 있
그 누구든 오랫동안 보지 못한 아이를 본다면 차분함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게다가 윤아름처럼 아이를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윤아름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멍한 표정이었다.원진우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번에는 정말 연기가 아닌 진짜였다. 윤혜인의 쓸모도 이제 끝났기에 원진우는 윤혜인의 손에 올렸던 발을 뗐고는 입을 열었다.“온도 영하 80도로 내려.”“!”윤혜인이 화들짝 놀랐다. 이건 윤혜인을 산채로 냉동시켜 저번에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내겠다는 뜻이었다. 원진우가 시야에서 점점 멀어지자 윤혜인은 이번 기회를 놓치고 원진우가 문밖으로 나서는 날에는 죽음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어떻게 해야만 살 수 있을까...’윤혜인은 죽기 싫었다. 살아서 엄마를 구하고 오빠가 오기를 기다리고 싶었다. 윤혜인은 윤아름의 얼굴을 떠올리다 갑자기 자지러지게 소리를 질렀다.“원진우!”윤혜인이 성까지 붙여서 부르자 아니나 다를까 원진우가 걸음을 멈추더니 윤혜인을 돌아봤다. 윤혜인은 혀끝을 꽉 깨물었다. 피비린내가 혀끝에서 느껴져서야 윤혜인은 정신을 조금 차릴 수 있었다. 윤혜인의 목은 마르고 갈라져 있었다.“내가 누구 딸인지 생각해 본 적 없어요?”윤혜인을 보는 원진우의 눈빛에서 보기 드물게 두려움이 묻어났다. 비록 몇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윤혜인이 그 눈빛을 캐치하고는 반은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머지 반이야말로 윤혜인이 살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는 핵심이었다. 윤혜인은 원진우에게 고민할 기회도 주지 않고 꿋꿋하게 말했다.“삼촌, 그렇게 총명하신 분이 이미 눈치채고 계신 거 아니에요? 경천 오빠랑 나랑 친 남매가 아닌 건 알고 있잖아요. 아버지가 왜 직접 낳지 않고 남자아이를 입양했는지 생각해 본 적 없어요?”원진우가 윤혜인을 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혹시 지금 내 딸이라고 하고 싶은 거예요?”“머리는 썼는데 나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서 그렇게 쉽게 속지 않아요.”원진우가 이렇게 말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