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족하냐는 말이 순간 육경한의 숨통을 조여왔다.소씨 집안은 결국 처참하게 끝났다. 그는 정말로 만족하고 있을까?아니었다.오히려 반대였다.그는 사실 소진용이 죽지 않기를 바랐다. 소진용이 죽는다는 것은 소원을 휘두를 방법이 하나 줄어든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울리는 머리 탓에 그는 생각을 이어가기도 힘들었다.지금도 믿기지 않았다. 소진용이 자살을 했다니.대체 왜 그런 것일까? 정말로 그 빚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일까?소원이 그의 아이를 낳아주면 그가 당연히 그들의 빚을 갚아주지 않겠는가?“나랑 약속했잖아. 그 계약서 없애기로 약속했었잖아! 그런데 그 계약서를 이용해서 우리 아빠를 사지로 몰아?”“이 배신자! 비열한 놈!”소원은 너무 소리를 질러 가슴이 아파졌다. 원래부터 그녀는 목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런데 자꾸만 소리를 지르니 더 쉬어버린 것이다.그녀의 말에 육경한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그때 없애버렸던 계약서는 사실 원본이 아니었다. 그는 원본을 몰래 남겨두어 집안 금고에 넣어두었다. 그런데 그게 왜...그는 소원에게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만족한 적 없다고, 계약서로 소진용을 사지로 몰아넣지 않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그러나 입에 접착제라도 붙은 것인지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 계약서의 출처는 그가 확실했으니 말이다.그와 무조건 연관이 있었다.소원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그를 보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그 계약서를 위해서 구치소에서 얼마나 많은 괴롭힘을 견뎌냈는지 알아? 그때 아이유 유산한 거로는 부족했어?”“육경한, 너 그 아이 유전자 검사는 해봤니? 그 아이 네 아이야! 아직도 속죄하기엔 부족한 거야?”아이를 언급하자 육경한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부족하지 않았다. 부족할 리가 없었다.그 아이에게서 느낀 아쉬운 마음 때문에 그는 그녀에게 아이를 하나 더 낳아달라며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소원은 울먹였다.“우리 가족이 전부 죽어야 속이 시원하겠어?”육경한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아니...”
육경한은 항상 그녀에게 보상을 주겠다고 한다. 그놈의 보상!그의 말은 영원히 믿을 것이 못 되었다.육경한은 가슴 언저리에서 통증을 느꼈다. 숨쉬기도 어려워지는 것 같았다.뭐라 설명하고 싶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소원은 이미 그에게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넌 꼭 내가 지옥으로 떨어지고 처참하게 사는 꼴을 봐야 속 시원하겠어?”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그렇게 해줄게...”육경한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소원은 이미 몸을 틀어 시멘트로 만든 화단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퍽 소리가 났다.화단엔 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순간 육경한의 몸이 경직되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저 본능적으로 빠르게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품에 끌어안았다.“소원아!”그는 그녀의 어깨를 꽉 안으면서 소리를 질렀다.“미쳤어?!”소원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무력감을 느끼고 있었다. 죽는 것마저 힘이 부족해 제대로 죽지 못했으니 말이다.이마에 흐른 피가 그녀의 얼굴 반쪽을 적시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모습마저 아름다워 보였다.그런 그녀의 모습은 육경한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소원은 점차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고 끊임없이 중얼거렸다.“육경한... 돌려줄게... 네가 살려낸 목숨... 돌려줄게...”그렇게 그녀는 끝없는 어둠에 의식이 삼켜졌고 겉모습은 거의 죽은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육경한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식은땀을 흘리며 차갑게 말했다.“소원아, 바보 같은 짓 하지 마! 너한테 어머님이 계시잖아! 너 죽으면 어머님은! 어머님 생각은 안 해봤어?”여하간에 그녀는 자신이 짐승보다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쉽게 자살 시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계속 살아가길 바랐다.육경한의 말은 독 묻은 비수가 되어 그녀의 가슴에 푹 박혀버렸다.그는 그녀를 알아도 너무 잘 알았다.이 세상에 그녀의 가족이 한 명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는 그녀를 절대 놓아주지
퍽!이때 누군가가 진아연을 발로 차 넘어지게 했다.진아연은 소원보다 더 많이 바닥에 구르게 되었다.“아윽... 누가 감히... 어떤 X이야!”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진아연은 자신을 차버린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지 못했다.그녀는 허리에 손을 올리며 일어나자 육경한이 이미 소원을 안아 든 채 차에 태우고 있었다.얼른 따라가 보았지만 급하게 출발하는 차에 빗물을 뒤집어쓰게 되었다.진아연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아아아아악!!!!!”여기서 포기할 수 없었던 그녀는 얼른 따라갔다.차 안.육경한의 팔에서는 계속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보지 못한 사람처럼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차는 비를 뚫고 달려 장례식장으로 왔다.소원은 너무도 조용해 꼭 죽은 사람 같았다.그녀는 구석에 몸을 한껏 웅크리고 있었다. 육경한이 조금이라도 다가가려고 하면 그녀는 소리를 지르면서 발작을 일으켰고 몸에 무리가 갔는지 피를 토해내기도 했다.육경한은 그녀의 곁으로 다가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그 짧은 몇 분이 그에겐 수십 년처럼 느껴졌다.만약 그녀에게 힘이 많이 남아 있었더라면...만약 각진 곳에 머리를 박았더라면...그는 아마 영원히 그녀를 잃게 될 것이다.상상만 해도 그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장례식장 안.장례지도사는 소진용의 시체를 깨끗하게 닦아주고 있었다.소원은 의자에 앉기 싫어했고 입구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그녀의 모습은 꼭 버려진 강아지 같았다. 동글동글한 두 눈으로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이 안에... 우리 아빠가 있어...'어릴 때 비가 오면 항상 마중을 나와 그녀에게 겉옷과 우산을 씌워주던 아빠였다.아빠가 살아있을 땐 그녀는 항상 든든한 기분을 느꼈다.그런데 지금은... 없었다.그녀의 버팀목이 사라졌다.문이 열리고 소원은 기어가듯 들어갔다.육경한은 그녀에게 다가가면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발작을 일으킬까 봐 손을 댈 엄두도 나지 않았다.소진용은 하얀 천을 덮고 있었다.소원은 그런 소
진아연은 방금 자신을 발로 차버린 사람이 누군지 보지 못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녀의 뒤엔 육경한뿐이었다.만약 그 사람이 육경한이라면 그녀의 은혜는 이미 육경한이 소원을 향한 마음을 능가했다는 것이었다.진아연은 미쳐버릴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는 이성을 잃어서는 안 되었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똑바로 차려 챙길 것은 챙겨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녀는 부드럽고 아량이 넓은 사람 연기를 해야 한다.독하게 육경한을 깨물던 소원과 대비되게 연기를 해야 육경한의 마음을 다시 잡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경한 씨, 괜찮아요? 아까...”진아연은 빨갛게 물든 그의 소매를 가리키며 걱정스레 물었다.“그 여자가 깨물었는데 괜찮아요?”육경한은 멍하니 그녀의 꼴을 몇 초간 지켜보다가 담담하게 답했다.“괜찮아.”“방금은 미안했어요. 소원한테 그런 큰일이 있었을 줄은 몰랐거든요. 그냥 경한 씨의 팔을 꽉 물고 있길래 나도 모르게 급해서... 이따가 내가 직접 소원이한테 사과할게요...”진아연은 시선을 내리깔며 처연한 모습을 연기했다.육경한은 그녀의 웨딩드레스를 빤히 보았다. 순간 이상하게도 눈에 거슬렸다.“괜찮아. 오늘 많이 속상했지. 나중에 보상해줄 테니까 오늘은 이만 먼저 돌아가.”진아연은 화가 치밀었다. 육경한이 그녀에게 먼저 돌아가라고 했으니 말이다. 그는 분명 이곳에 남아 소원의 곁에 있어 줄 것이 틀림없었다.다행인 것은 육경한의 태도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는 것이다.그녀는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나 먼저 가 볼게요.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육경한은 떠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가 다시 소원을 떠올리면서 자신과 소원의 사이도 이렇게 평화로웠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진아연은 몸을 틀자마자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그녀는 똑똑히 들었다. 육경한이 소원의 어머니를 언급한 것을. 아마 위독한 상태인 듯했다.‘설마 하루 사이에 둘이나 죽는다고?'‘이런 좋은 소식 당연히 소원이도 알아야지.'그녀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임세희는 몸을 돌려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어머, 윤혜인 씨가 여긴 어쩐 일이에요?”그녀는 꼭 우연인 것처럼, 꼭 자기가 이선 그룹의 안주인이 된 것처럼 말을 건넸다.윤혜인의 두 눈이 분노에 충혈되고 손발마저 차가워졌다.그녀는 살짝 튀어나온 임세희의 배를 발견했다. 같은 여자로서 윤혜인은 그것이 뱃살이 아니라 임신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아마 그녀보다 꽤 일찍 임신한 것 같았다. 다만 누렇게 변한 얼굴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이상하게도 티가 나는 것 같았다.순간 윤혜인은 배신감을 느꼈다.이준혁이 줄곧 그녀를 속이고 있었기 때문이다.정신병동에 있다느니 복수를 해주겠다느니 전부 거짓말이었다.이준혁은 임세희를 곁으로 부른 것도 모자라 임신까지 시켰다.“윤혜인 씨, 사실 전 줄곧 혜인 씨한테 사과하고 싶었어요...”임세희는 윤혜인을 보면서 울먹거렸다.“전에는 다 제가 철이 없어서 주제도 모르고 준혁 오빠한테 들러붙어 혜인 씨 기분만 상하게 했어요.”제멋대로 굴던 모습은 사라지고 누렇게 뜬 얼굴로 울먹이니 확실히 가련해 보이긴 했다.그러나 윤혜인은 전혀 넘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향한 증오만 더 깊어져 갔다.송소미는 죽기 직전에 임세희가 그녀의 아이를 없애버리라고 지시했다는 사실을 직접 인정했다.윤혜인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고 이내 짝 소리와 함께 뺨을 때렸다.털썩.뺨을 맞은 임세희는 소파 모서리에 부딪히며 넘어졌다.“아야...”그녀는 배를 감싸 안았다. 그러면서 아주 고통스러운 듯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다른 각도에서는 어떻게 보일지는 몰라도 그녀의 맞은편에 있는 윤혜인은 똑똑히 보았다.그녀의 손힘으론 절대 이 정도로 넘어질 리가 없었다.임세희는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지금도 연기를 하며 누명을 씌우고 있었으니 말이다.그렇게나 연극을 좋아하니 그녀는 맞춰줄 생각이었다.윤혜인은 임세희에게 다가가 손을 잡으며 물었다.“괜찮아요?”임세희는 입술을 짓이기더니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달았다. 그런데 누렇게 뜬 얼굴로 그
“윤혜인!”이때 이준혁이 다가와 그녀를 확 잡아당기며 이 소란을 종결시켰다.“내 몸에 손대지 말아요!”윤혜인은 이준혁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역겨워.'그녀는 눈앞에 있는 쓰레기남과 쓰레기녀가 너무도 역겹게 느껴졌다.순간 속이 울렁거리며 눈앞이 어질하여 휘청거리게 되었다.이준혁은 급하게 손을 뻗어 그녀를 부축하려고 했다.그러나 윤혜인은 뒤로 물러나면서 이를 빠득 갈았다.“이준혁 씨, 우리 계약도 그만하죠. 번거롭겠지만 이혼 서류에 일찍이 사인해주길 바라요. 안 그러면 사람 많은 곳에서 난동을 피울 거예요.”말을 마친 윤혜인은 바로 떠나려고 했다. 더는 눈을 더럽히는 남녀를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이준혁은 그녀를 따라가려고 했지만, 뒤에 있던 임세희가 갑자기 그의 바짓자락을 붙잡으며 당황한 듯 말했다.“준혁 오빠, 나 배가... 배가 너무 아파... 피가 나는 것 같아...”바닥은 어느새 피로 물들어 있었다.이준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곤 주훈을 불렀다.“주 비서, 당장 세희를 병원으로 데려가. 모든 과정에 곁에서 딱 붙어 지켜봐. 절대 문제 생기지 않게.”말을 마친 뒤 그는 바닥에 주저앉은 임세희를 무시하고 얼른 윤혜인을 붙잡으러 나갔다.임세희는 이를 빠득 갈았다. 그녀의 몸에서는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이준혁은 무시하고 나가버렸다.감히 난동을 피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여하간에 정신병동에서 지냈던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으니 말이다.그녀는 일단 힘부터 키워야 했다. 절대 윤혜인과 맞서 싸워서는 안 되었다. 그랬다면 이준혁이 절대 그녀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임세희는 주먹을 꽉 쥐며 이 치욕은 잠깐이리라 생각했다.‘난 반드시 윤혜인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고 말 거야!'이준혁은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경호원과 다투는 윤혜인을 발견했다.“비켜요! 당신들이 뭔데 자꾸만 내 자유를 빼앗는데요! 비켜요!”이준혁은 경호원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두 경호원은 길을 내어주었다.윤혜인이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이준혁
익숙한 레퍼토리에 윤혜인은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지만, 꾹 참고 들었다.이준혁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임세희 배 속에 있는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야.”윤혜인은 차갑게 웃었다.“이준혁 씨, 내가 그렇게 멍청해 보여요? 준혁 씨 아이가 아니라고요. 그럼 왜 곁에 두고 보살펴 주고 있었는데요?”“세희를 데리고 나온 사람은 내가 맞아. 하지만 난 절대 불쌍해서 마음이 약해져서 데리고 나온 게 아니야. 나에겐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어.”그 이유에 관해선 이준혁은 뜸을 들이며 말했다.“언젠가, 언젠가는 반드시 알려줄게. 아직은 아니야.”너무도 형편없는 변명에 윤혜인은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웃음이 터져 나오려고 했다.이젠 그녀에게 그럴싸한 변명도 지어내지 않았다.확실히 그녀도 들을 자격이 없었다.이준혁은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괜스레 불안해져 그녀의 손을 잡았다.“난 너랑 이혼할 생각 없어. 너도 자꾸만 내 곁을 떠날 생각하지 말아줘, 알겠어?”며칠간 그는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게 될까 봐 회사에서 잠을 잤다.밤잠을 이루지 못할 때 그는 자신이 윤혜인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날 이성을 잃은 것도 그녀가 그의 곁을 몰래 떠나려고 했기 때문이다.그는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윤혜인이 임신한 아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녀를 놓아주지 못하니 차라리 전부 받아들이자는 마음이었다.게다가 그는 은근히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일 수도 있다는 희망을 말이다.여하간에 그간 그는 몇 번이나 충동적으로 그녀의 몸을 탐했었다.교활한 한구운의 말만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하지만 그는 이미 그 아이가 진짜 그의 아이이든 다른 남자의 아이이든 전부 받아들이기로 다짐했고 윤혜인을 잘 타일러 방심하게 한 다음 그녀가 직접 털어놓게 할 생각이었다.윤혜인은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그동안 나 계속 속이고 있었어요?”‘계약 결혼은 무슨. 그냥 날 묶어두기 위한 수단이겠지!'이준혁은 솔
한참 울고 난 뒤 윤혜인은 소원을 부축하며 휴식 공간으로 왔다. 이준혁과 육경한은 그런 그녀들을 따라가지 않았다.두 사람에겐 할 말이 말았을 테니까.휴식 공간으로 온 뒤 윤혜인은 소원에게 물었다.“아저씨가 왜 그러셨는지 알고 있어?”소원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회사 일로...”“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소원은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전미경은 아파 집에 있었고 빈소는 그녀 혼자 지키고 있어야 했다.장례식까지 치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이 모든 상황이 여전히 꿈만 같았고 꿈에서 깨면 소진용이 집에 있을 것 같았다.그녀의 가족은 전처럼 오손도손 모여앉아 즐겁게 웃고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복도를 가득 채운 근조화환이 그녀에게 현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더는 그럴 일 없다고.두 사람은 다시 서로를 끌어안으며 통곡했다.떠나기 전 윤혜인은 소원에게 물었다.“소원아, 혹시 핸드폰 있어? 나 어디로 전화 한 통 좀 하고 싶은데.”소원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그녀는 윤혜인이 핸드폰조차 마음대로 쓰지 못할 줄은 몰랐다. 어쩌면 이준혁의 집착에 힘들게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윤혜인이 떠난 뒤 소원은 계속 빈소에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해가 저물자 빈소에 불청객이 찾아왔다.검은색 코트를 입은 진아연이 국화꽃을 들고 등장했다. 육경한은 마침 담배 태우러 나간 터라 진아연과 마주치지 못했다.진아연은 빈소로 들어가 인사하려고 했지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당장 꺼져!”비록 빈소에 남아 있는 사람은 얼마 없었지만 진아연은 소리치는 그녀에 조금 괘씸하며 악랄하게 말했다.“소원. 난 좋은 마음으로 인사드리려고 온 거야. 내 호의 무시하지 마.”소원은 두 눈을 부릅뜨며 화를 냈다.“더러운 게 감히 깨끗한 우리 아빠 빈소를 더럽히려고 하지 마.”“깨끗하다고?”진아연은 웃으며 되물었다.“넌 정말로 네 아빠가 깨끗하다고 생각해?”소원은 그녀를 상대하고 싶지 않아 차갑게
소종은 육경한이 아이들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교도소 안에 있을 때 육경한은 모든 사람들의 면회를 거절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두 아이를 그리워했다.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타세요, 대표님.”소종이 침묵을 깨며 한마디 했다.육경한이 차에 타자 소종은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이 대표님 가족이 소 대표님을 잘 돌봐주셨어요. 아이들끼리도 친하게 지내고... 그리고 김 대표님도 하정이와 유진이를 돌봐주셨어요... 그리고 윤혜인 사모님의 오빠가 8년 전에 결혼했어요. 집 가정부의 딸 구지윤 씨와 결혼했어요. 처음에 할아버지가 많이 반대했지만 지금은 행복하게 잘살고 있어요. 딸을 낳으면서 할아버지도 받아들이셨고요... 아, 참. 예전에 소 대표님과 친하게 지냈던 여경 강민혜 씨, 기억하시죠? 소 대표님의 친동생이었더라고요. 당시 소 대표님의 어머니가 과다 출혈로 위독하셨을 때 그 여경이 수혈해 줬거든요. 소 대표님이 두 사람의 혈액형이 같은 것을 알고 친자 확인을 했더니 강민혜 씨가 정말 친동생이었어요. 예전에 도둑맞아 죽었다고 알려졌던 아이가 사실은 살아 있었던 거죠...”소종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차는 어느새 호화로운 호텔 앞에 도착했다.그들이 육경한을 위해 환영회를 준비한 듯했다.육경한이 말했다.“이런 거 필요 없어. 어떤 모임에도 참석하고 싶지 않아. 그냥 쉬고 싶어.”그러자 소종이 바로 말했다.“안 돼요. 오늘 식사 자리에는 꼭 가야 해요.”황진수도 말했다.“맞아요, 육경한 씨. 소소하게 준비한 것이니 우리 마음을 봐서라도 꼭 참석해 주세요.”마지못해 차에서 내린 육경한은 호텔 룸에 들어간 순간 방 안에 익숙한 얼굴들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예쁜 소녀가 육경한에게 다가오더니 큰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고 말했다.“그쪽이 우리 아빠예요?”자신과 닮은 소녀의 눈매에 육경한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육하정이 계속 말했다.“엄마가 말했어요. 아빠가 잘못을 저질러
법정 안, 판사가 선고했다.“피고인 육경한, 살인죄로... 그러나 피해자와의 갈등 관계를 고려하고 증인의 증언을 종합하여 본 법정은 다음과 같이 판결합니다. 육경한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합니다...”“대표님...”방금 깨어나서 법정에 나와 주석훈의 살인을 증언한 소종은 울며 육경한을 불렀다.뒤에 서서 두 달 된 아기를 안고 있는 소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시울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아기의 얼굴과 핑크색 이불을 본 육경한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는 더 이상 소원에게 할 말이 없었다. 대신 소종을 보며 한마디 했다.“잘 돌봐줘.”육경한이 누구를 말하는지 바로 캐치한 소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요.”...15년 후, 구치소 대문 앞.15년 전 입소할 때 입었던 옷을 입고 나온 육경한은 여전히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걸었다.교도소에 있는 동안 좋은 표현 덕분에 감형을 받아 조기 출소했다.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육경한의 얼굴에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더 깊고 온화한 매력을 내뿜었다.구치소 밖에서는 황진수와 소종이 육경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종이 가장 먼저 달려와 그를 붙잡고 울었다.“대표님, 고생 많으셨어요!”키가 185cm나 되는 팔이 하나뿐인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대표님...”옆에 있던 황진수가 육경한에게 담배를 건네자 담배를 받은 육경한은 깊게 빨아들인 뒤 말했다.“내 재봉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 나중에 너희들에게 옷 한 벌 만들어 줄게.”소종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슬픈 분위기가 육경한의 한 마디에 완전히 뒤바뀌었다.소종이 울다가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기대하고 있을게요.”육경한이 코웃음을 쳤다.“꺼져.”먼 곳을 바라본 육경한은 소종과 황진수 외에 그를 맞이하러 온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왠지 실망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들었다.그녀가 오지 않아도... 괜찮았다.결코 좋은
“두 번째 것을 선택할게.”죽어도 소원을 구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온 육경한이었기에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대답했다.“허허, 육 대표가 소원을 정말 많이 아끼나 봐.”주석훈이 비꼬는 듯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그럼 시작하지. 육 대표, 6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죽은 소녀의 이름이 뭔지 기억나?”자리에 얼어붙은 육경한은 주석훈이 혹시라도 소원을 해칠까 봐 바로 앞으로 두 걸음 걸었다. 덫이 ‘탁탁’ 소리를 내며 그의 두 다리를 집었고 이내 피가 철철 흘렀지만 육경한은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몰라.”손에 칼을 움켜쥔 주석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 소녀의 이름은 수정이야. 육 대표처럼 모든 지원을 다 받아 치료받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겠지.”큰 고통 속에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육경한이 입을 열었다.“그 교통사고에서 소녀가 죽은 것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우리 미우 그룹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어. 그 사람들이 나를 먼저 치료한 이유는 대동맥이 눌러져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소녀도 나와 똑같이 심각한 상태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어. 그래서 그 후에 소녀의 가족에게 위로금도 보냈어.”육경한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소녀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 그녀의 부모님이 통곡하는 모습을 본 육경한은 소종을 시켜 소녀의 가족에게 2억 원의 위로금을 전달했다.“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주석훈이 매서운 눈빛을 내뿜으며 큰소리로 외쳤다.“어쨌든 넌 살아남았고 나의 수정이는 떠났어. 아무도 우리 수정이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주석훈은 더 이상 게임 따위 생각하지 않은 채 미친듯이 울부짖었다.“너희들은 모두 냉혈 인간들이야. 너희들은 죽어도 싸!”말을 마친 주석훈이 칼을 휘둘러 소원의 배를 찌르려 하자 육경한은 재빨리 몸을 날려 자신의 종아리로 칼을 막았다.소원을 밀어낸 육경한은 격렬한 고통을 참으며 주석훈과 맞붙었다.팔다리가 멀쩡한 주석훈은 이내 다리가 다친 육경한보다 우위를 점했다.도우려고 한 발 나선 소
이후 남자는 기분이 좋은 듯 소원의 입에 물린 천을 빼주며 말했다.“어떻게 여기에!”소원은 깜짝 놀랐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를 계속 도와주던 주석훈이었다!자신에게 접근한 의도를 의심한 적은 있었지만 나중에 그의 여자친구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과는 원한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 모든 사건의 배후가 주석훈이라니...“소원, 많이 놀랐지?”가면을 벗어 던진 주석훈은 마치 조금 전까지 잔인했던 사람이 본인이 아닌 듯 아주 평온해 보였다.“왜... 이렇게까지?”소원은 처음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왼손을 사용해 물건을 잡는 모습을 보고 바로 깨달았다.“너였어!”소원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상철 삼촌과 진아연을 죽인 사람이 너! 맞지?!”주석훈은 부인하지 않았고 그의 표정 또한 모든 걸 말해주듯 가볍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소원, 그 사람들은 죽어도 싼 사람들이야. 그들이 죽었으니 네가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사람들이 공모해서 네 아버지를 죽였잖아?”“아니야!”소원은 단호하게 부정했다.“그 사람들은 단순히 조종당한 희생양일 뿐이야. 내 아버지를 죽인 진짜 범인이 너였어?! 넌 그냥 증거 인멸을 한 거야!”“소원, 정말 똑똑하네?!”칭찬하듯 한마디 한 주석훈의 말에 소원은 분노로 가득 차올라 외쳤다.“왜! 아빠가 뭘 잘못했다고 죽인 건데?!”주석훈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원, 네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이유? 알고 싶어? 나와 육경한 사이에 깊은 원한이 있기 때문이야.”“그게 아빠와 무슨 상관인데!”소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렇게 간단한 이치를 모른다고?”주석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진용이 죽어야만 너와 육경한의 갈등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 넌 내 손에 있는 최고의 무기야. 넌 육경한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 줄 수 있는 존재지. 지난 5년 동안, 본인만의 원칙이 있는 사람이 그것을 깨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즐거운
소원이 두 손을 머리 위로 든 채 남자의 방향으로 걸어가자 남자는 다친 전미영을 바닥에 내던졌다.전미영은 이미 의식을 잃었기에 지금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다.소원은 체념한 듯 보였지만 사실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몰래 반지 속의 장치를 작동시켰다.이내 독이 묻은 바늘로 남자의 팔을 찌르자 팔이 곧바로 마비되기 시작한 남자는 저린 감각이 팔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망할 년! 감히 날 속여?”남자는 분노하며 소원을 발로 걷어찼다.배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돌린 소원은 엉덩이가 세게 걷어차인 바람에 비틀거리며 앞으로 두 걸음 나아갔다. 다행히 앞에 소파가 있었기에 소파를 붙잡고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은 뒤 있는 힘껏 소리쳤다.“살려 주세요! 도와주세요...!”그러나 남자가 바로 달려와 순식간에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최면제의 효과가 서서히 올라옴과 동시에 문을 걷어차는 소리와 몇 발의 총성이 희미하게 울리는 것이 들렸다.소원은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제발 엄마를 구해 주세요...’그러고는 있는 힘을 다해 목걸이를 바닥으로 내던진 뒤 점점 의식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희미하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운송 차 안인 듯한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었다.입안에는 천이 틀어막혀 있었고 팔도 밧줄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순간 소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결국 구출되지 못하고 가면을 쓴 남자에게 끌려온 것이다.주위에 전미영이 보이지 않자 소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엄마가 같이 끌려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엄마를 병원으로 옮겼을 거야. 그러면 희망이 있어.’하지만 엄마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기에 속으로 행운을 빌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이 납치범에 대한 분노가 가슴 속 깊이 밀려왔다.‘이 사람은 대체 우리와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런 짓을 하는 거지?’덜컹거리며 달리는 차 안에 있는 소원은 졸음이 밀려왔다.임신 후기라서 그런지 이런 상황에서도 극심한 피
육경한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그 여경을 찾아서 같이 있도록 해. 이 사람이 아직도 쇼핑몰 안에 있을 가능성이 커. 나도 지금 돌아가는 중이야...”소원은 순간 숨을 죽인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앞을 응시했다.바로 앞에 하얀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한 중년 여성을 붙잡고 있었다. 그 중년 여성이 바로 모두가 찾는 전미영이었다.육경한의 말대로 그녀의 엄마는 정말 여기에 있었다.육경한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계속 들렸지만 소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전미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가면을 쓴 이 교활한 남자는 사람을 쇼핑몰 안에 붙잡아둔 채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짜 번호판 차량은 아마도 이 남자가 미리 파놓은 함정일 것이다.그녀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똑똑한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심리를 읽을 줄 알았다.가면 쓴 남자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소원에게 말을 하지 말고 전화를 끊으라는 뜻을 내비쳤다.자기 엄마가 상대방의 손에 있기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전화를 끊은 후 가면을 쓴 남자가 그녀에게 한마디 지시했다.“전화기를 꺼서 이쪽으로 던져.”소원은 남자의 말대로 순순히 전화기를 끄고 그의 앞에 던진 후 한마디 물었다.“누구세요? 지금 뭘 원하는 거예요? 제발 우리 엄마만 해치지 마세요!”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소원은 남자를 향해 두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그녀의 유일한 요구는 상대방이 엄마를 해치지 않는 것이었다.말을 하면서도 소원은 몰래 주변을 관찰했다. 가면 쓴 신비로운 남자는 정말 교묘한 장소를 선택했다.화장실은 휴게실 제일 안 쪽에 있었고 뒤쪽에 있는 창문과 거리가 가까웠다.남자는 전미영을 붙잡고 입구 쪽에서 소원과 정면으로 마주서 있었다. 이렇게 하면 좁은 포위망이 형성되어 소원을 한 구석에 가둘 수 있다.남자는 손에 흉기를 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제작한 권총 비슷한 것
강민혜는 즉시 지시를 내려 이 수상한 차량을 중점적으로 조사하라고 했다. 육경한이 회사의 위기 대응팀과 협력해 조사하라고 지시하자 그들은 이내 차량의 이동 경로를 찾아냈다.육경한은 즉시 차량을 출동시켜 추적하도록 했지만 소원더러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현재 상대방의 목표가 소원의 엄마가 아니라 임신 중인 소원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게다가 차량 추격은 너무 자극적이어서 소원 같은 임산부에게 위험할 수 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그녀를 배려하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원이 차량 추격에 참여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어머니를 찾지 못하고 본인까지 안 좋은 상황이 되면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친 셈이 된다.육경한의 부탁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라 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육경한은 회사 경호원 한 팀을 불러 상대방의 차량을 추적하도록 했다.쇼핑몰에 남아 있는 경호원들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소원을 경호했다. 소원의 걱정을 덜기 위해 육경한도 차량 추적에 나섰다.이렇게 되어 여러 대의 차량이 CCTV에 찍힌 그 검은 차를 추적하기 시작했다.소원은 쇼핑몰의 휴게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불안감에 휩싸인 그녀는 심박 수가 빨라져 의사가 와서 경고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그녀의 몸에도 해로울 뿐만 아니라 조산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소원이 걱정된 강민혜는 현장에 남아 그녀를 달랬고 소원이 화장실에 갈 때도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했다.소원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를 했고 강민혜도 옆에서 그녀를 위로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님은 분명 괜찮을 거예요. 그렇게 큰 고비도 넘겼는데 별일 없을 거예요. 게다가 경찰과 육 대표님이 모두 추적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마음 놓으세요.”본인이 아무리 불안해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육경한이 좋은 소식을 전해주길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불편한 몸 때문에 자꾸 구역질이 났다.이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육경한이었다.당황한
육경한이 성큼성큼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 장모님은?”“엄마가 사라졌어...”소원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충돌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전미영은 그녀 곁에 서 있었다.어떻게 된 일일까... 눈 깜짝할 사이에 전미영이 사라졌다.전미영은 걸을 수는 있지만 말을 잘하지 못하고 지능도 두세 살 아이 수준인데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소원이 급히 찾으러 가려 하자 육경한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달랬다.“너무 급해 하지 마. 우선 CCTV를 보자. 경호원들에게 찾으라고 했어. 네가 걷는 것보다 경호원들이 움직이는 게 빨라.”소원도 육경한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최대한 침착한 마음가짐으로 엄마를 찾아야 했다. 절대 당황하면 안 되었다.두 사람이 CCTV 실로 향했을 때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전미영이 사라지는 영상을 찾아냈다.영상을 보니 전미영은 처음에는 경호원의 뒤, 소원 곁에 서 있었다.하지만 조금 전 말싸움이 일어나면서 그 남자가 경호원과 몸싸움을 하려 하자 경호원들은 소원이 다칠까 봐 소원과 육경한 주변으로 몰렸다.그러면서 전미영은 자연스럽게 뒤에 갔다. 원래대로라면 전미영도 별일 없어야 했지만 무슨 일인지 전미영이 갑자기 혼자 모퉁이 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그곳에 그녀를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그녀는 불과 7, 8걸음 되는 모퉁이까지 아주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한편 소원과 육경한에게 정신이 팔린 경호원들은 전미영을 발견하지 못했고 전미영이 뒤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다음 모퉁이의 CCTV에는 소원이 비상구로 들어가는 것이 찍었다. 계단에 CCTV가 없었고 출구에 CCTV가 한 대 있었지만 전미영의 모습은 어디에도 찍히지 않았다. 즉 전미영이 출구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그렇다면 유일한 통로는 지하 주차장이었다. 하지만 지하 주차장 출구의 CCTV가 때마침 고장이 나 있어 전미영이 그 출구로 나갔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전미영이 실종된 지 불과 몇 분, 실종자를 한 시간 이내에
두 모자가 가식적으로 불쌍한 척하며 사람들의 동정을 구걸한 것을 안 사람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 모자를 제일 먼저 도우려고 나섰던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소원에게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눈이 어두웠네요.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는 정말 톡톡히 교육해야 해요. 얼마든지 책임을 물으세요.”주변 사람들도 같은 입장이었다.입장을 바꿔 생각해 봤을 때 본인이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를 만난다면 분명 화가 날 것이다.게다가 이 모자는 역할 분담이 명확했다. 아들은 말썽을 부리고 엄마는 말재주를 발휘해 변명했다. 누구나 이런 일이 생긴다면 진짜로 화가 날 것이다.구경꾼들이 흩어진 후 육경한은 두 모자의 앞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아이를 내려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시킨 거야?”엄마가 아이를 뒤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다고 했잖아요. 그냥 우리 애가 장난친 거예요.”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왜 이래요... 우리가 그냥... 사과할게요... 아이고, 내가 왜 이렇게 불행한지...”그들은 완전히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피해자인 척하고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고 주위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이상해 보였다.조금 지친 소원이 육경한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됐어, 이만 가자.”“1분만 기다려.”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육경한은 아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압박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누가 너를 시켰는지 말해. 안 그러면 바로 고소할 테니까.”겁이 많은 아이는 바로 오줌을 지리더니 이내 ‘와’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아저씨가...”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육경한이 아이의 엄마를 밀어내고 차가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똑바로 말해!”“어떤 아저씨가... 아주머니와 부딪히면 엄마에게 100만 원을 준다고 했어요... 엄마가 그러면 게임기를 사주겠다고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