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로에 있던 뜨거운 재가 진아연의 머리카락에 닿았다.소원은 비록 진아연이 죽길 바랐지만 정말로 향로를 엎어버릴 마음은 없었다.이곳은 빈소였고 소진용의 영혼이 마지막으로 머물다 가는 곳이었다.그녀는 소진용이 보는 앞에서 이런 짓을 해서는 안 되었다.이런 악랄한 사람 때문에 감방에 갈 가치는 없었다.소원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당장 우리 부모님께 사과해!”뜨거운 김을 폴폴 내는 향로가 진아연의 얼굴과 가까워지고 뜨거운 열기가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진아연은 원래 소원이 자신의 말을 들으면 미쳐버릴 거로 생각했다. 그렇게 빈소에서 미쳐 죽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그러나 소원은 향로를 들어 그녀의 얼굴 앞으로 내밀었다.진아연은 소리를 질렀다.“이게 뭐 하는 짓이야! 미쳤어?!”진아연은 빈소에 아무도 없는 것을 원망했다.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일부러 사람이 없을 시간대에 찾아왔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그 순간.소원이 그녀의 머리를 눌러버렸고 이마의 잔머리가 향로에 따면서 꼬불꼬불해졌다.“아아악!”놀란 진아연은 하마터면 바지에 실수할 뻔했고 처량하게 소리를 질렀다.“아아악! 알았어! 할게! 사과할게!”“미안해, 내가 미안해. 내가 네 부모님을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었어. 부모님이 돌아가신 거 겹경사라고 해서는 안 되었어.”“사과했잖아.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소원은 손을 놓았다. 그러자 진아연은 뒤로 털썩 주저앉았다.진아연의 얼굴은 향로의 뜨거운 열기에 빨갛게 되었고 돼지기름이라도 바른 듯 얼굴이 번들거렸다.소원은 놀라 멍하니 앉아 있는 진아연을 보며 차갑게 말했다.“꺼져. 우리 아빠 빈소 더럽히지 말고!”“알았어. 갈게, 갈게...”겁먹은 진아연은 기어가듯 나가버렸다.하지만 속으로는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알고 보니 소원은 그저 그녀에게 겁주기 위해 향로를 들이밀었던 것이었다.그 탓에 그녀는 소원의 앞에서 모든 체면을 깎이게 되었다.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그녀는 고개를 돌려 소원을 노려보았다
소원이 여기서 죽는다고 해도 진아연은 혐의를 벗어날 수 있었다.그러나 지금 상황은 반대였다. 바닥에 누운 사람은 소원이 아닌 그녀였다.진아연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억울하여 미친 사람처럼 소원에게 돌진하려고 했다.“개X아!!!”진아연은 눈조차 뜨기 힘들었기에 소원의 위치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고 그대로 다시 넘어졌다.팔이 바닥에 먼저 닿고 물집은 다시 터져버렸다.누런 고름이 바닥에 묻어났고 물집 껍질도 쓸려 떨어져 향로 가루에 닿았다.순간 엄청난 고통이 잔아연에게 전해졌다.“아아악!!!”바닥에 누운 진아연은 팔을 들었다. 이리저리 뒹굴 엄두도 나지 않았다.‘너무 아파!'그 고통은 칼로 살을 베어내는 것보다 천배 만배였다.진아연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상태로 봐선 얼굴을 괜찮을 거라고. 하지만 계속 버티고 있다간 무조건 얼굴이 망가질 거라고.순간 그녀는 모든 것을 다 인정했다.“아악! 그래, 맞아! 난 원래 널 향로로 밀어버리려고 했어!”계속 버티다간 그녀는 고통 속에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살아만 있으면 그녀는 언제든지 소원을 처리할 수 있었다.소원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난 널 그냥 보내주려고 했는데 넌 날 향로에 밀어버리려고 했다고. 감히 우리 아빠 앞에서 날 죽이려고 했던 거야? 우리 아빠의 영혼이 아직 이 세상에 있는데 그렇게 가만히 내버려 둘 것 같아?!”소진용을 언급하자 진아연은 이상하게도 제 발이 저렸다.소원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날 해치려고 한 게, 정말 이것뿐이야?”진아연은 흠칫했다.함부로 입을 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소원을 해치려고 한 일이 너무도 많아 어떤 대답을 바라는지 몰랐기 때문이다.소원은 그녀의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진아연이 그녀가 어떤 일을 말하는지 모르는 것 같아 직설적으로 말해주었다.“김재성도 네가 시켜서 날 모함하게 했지?”“진찬성도 네가 구치소에 사람을 보내라고 시켜서 나랑 배 속에 있는 아이 죽이려고
진아연의 얼굴과 상반신은 전부 물집과 피고름이 덕지덕지 붙어 있어 아주 흉측해 보였다.그럼에도 진아연은 소원을 모함하고 있었다.“살려줘요! 얼른 날 살려줘요! 이 미친 여자가 정신줄을 놓고 날 죽이려고 해요! 엉엉엉...”진아연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거기다 무서운 얼굴 때문인지 처참하다는 두 글자가 그녀에게 어울렸다.아쉽게도 진아연은 눈을 뜨지 못했고 육경한의 표정도 볼 수 없었다.만약 소원과의 대화를 전부 듣지 못한 거라면 진아연은 또 한 번 그를 속여 넘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육경한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진아연, 나 전부 듣고 있었어.”그의 한 마디에 진아연은 경직되었다.순간 서늘한 한기가 바닥에서 온몸으로 퍼지는 것 같았다.“아니에요... 경한 씨... 그런 거 아니에요. 소원이가 날 협박해서 그렇게 말한 것뿐이에요... 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고요...”진아연은 눈물을 흘렸다. 눈물은 짰다. 상처에 닿자마자 소금이라도 뿌린 것처럼 아파 이를 빠득 갈았다. 그 모습은 아주 추하고 처참해 보였다.그러나 육경한은 더는 그녀에게 마음 약해지지 않았다. 차가운 얼굴로 그녀를 보면서 뼈가 시리도록 싸늘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진아연, 내가 전에도 말했지. 선 넘지 말라고.”진아연이 죽인 소원의 아이는 그의 아이기도 했다. 그의 아이!그 아이만 생각하면 육경한은 진아연을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진아연의 몸에 손을 대는 것조차 싫었다.더러웠기 때문이다.“경한 씨... 정말로 소원이가 날 죽이려고 했다고요. 난 살기 위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 일들은 나랑 연관이 없다고요... 정말이에요...”“찬성 오빠도 멋대로 찾아가 그런 일을 저지른 거라고요! 나랑 아무런 관계도 없어요!”지금 이런 상황에 남매간의 정이라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진아연은 지금의 자리만 지킬 수 있다면 진찬성은 물론이고 친아버지마저 버릴 수 있었다.“지금 상황에서도 날 계속 속일 생각하는 거야?”육경한은 눈을 뜨지 못하는 그녀
그녀는 육경한이 분명 체면을 더 중히 여길 거로 생각했다.육경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진아연은 내 아내가 아니야. 나 결혼 안 했어.”소원은 쓸데없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고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우리 엄마가 어느 병원에 있냐고 물었잖아. 빨리 말해, 지금 보러 갈 거니까.”전미영이 입원한 일은 육경한 말고는 아무도 그녀를 속일 리가 없었다.육경한은 그녀에게 설명했다.“난 해치려고 한 적 없어.”그는 그저 소원이 충격을 받아 현실을 못 받아들이게 될까 봐 숨긴 것이었다.소원은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마저 역겨웠다. 흐릿한 시야로 환각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반드시 정신을 잃게 전에 엄마를 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녀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지금 보러 갈 거라고.”육경한이 말했다.“내가 데려다줄게.”밖으로 나오자 진아연이 아직도 바닥에 누워 울면서 차에 올라타기를 거부하고 있었다.진아연은 소종이 자신을 어디로 데리고 가는지 몰랐기에 너무도 무서웠고 울면서 말했다.“나 경한 씨 만나게 해줘! 경한 씨를 만나야겠다고!”육경한을 발견한 소종이 물었다.“대표님, 어떻게 할까요?”진아연은 들려오는 소종의 목소리에 미친 듯이 기어 다니면서 팔을 휘적거렸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경한 씨, 나한테 이러면 안 되잖아요. 그때 경한 씨를 구해준 사람이 누군지 잊었어요?”육경한은 걸음을 멈추었다. 운전 기사에게 먼저 소원을 데리고 차에 올라타라고 했다.진아연은 바닥에서 계속 울면서 애원했다.“나야! 바로 나라고! 육경한, 생명의 은인을 이렇게 대하면 안 되는 거잖아!”육경한은 진아연이 자신을 구해줬던 일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진아연, 그동안 내가 잘해준 거로는 부족한 거야?”은혜를 갚기 위해 그는 진아연이 돈을 펑펑 써도 신경 쓰지 않았고 몇백억에 달하는 호화로운 저택마저 아낌없이 선물해 주었다.결혼식을 취소하기로 결정한 후에도 그는 이미 계약서를 만들어 두었다. 그를 구해준 대가로 재산 3
감시실 안에서 슬픔이 짙게 깔린 소원을 바라보는 육경한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그녀를 안아주고 싶지만 이젠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추모관에 차를 세운 육경한은 잠든 소원을 발견했다. 이틀 밤낮을 지새우다가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것이다.육경한은 평온하게 잠든 소원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차마 깨울 수가 없어 차 안에서 잠들게 내버려두었다. “흑흑...” 소원은 무슨 꿈을 꾸는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몸은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고 억눌린 흐느낌이 듣는 사람조차 괴롭게 했다.그 순간 육경한의 심장은 쇠사슬로 단단히 옥죄인 듯 피와 살을 조여오는 압박감에 얼굴이 죽은 사람처럼 하얗게 질려버렸다. 그는 손을 뻗어 끝내 참지 못하고 오랫동안 바라던 소원을 품에 꼭 안았다.소원은 꿈속에서 그를 누구로 생각하는지 꼭 껴안았다.육경한은 긴 한숨을 내쉬며 혹시라도 소원이 깰까 봐 꼼짝하지 않았다.잠시 후 육경한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소원도, 그도 오랫동안 잠을 자지 못했다. 내내 자신의 마음을 어지럽혔던 사람이 품에 안기자 마침내 긴장을 풀고 잠이 들었다. 남자의 길고 고른 숨소리가 들리자 소원은 갑자기 눈을 떴고 어둠 속에서 눈이 환하게 빛났다. 맞다, 그녀는 전혀 잠이 들지 않았다. 어떻게 이 악마 같은 남자가 곁에 있는데 잠을 잘 수 있겠나! 그녀의 가녀린 몸은 육경한의 팔에서 쉽게 풀려났고 육경한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 무방비 상태로 잠이 들어 있었다. 달빛이 그의 차갑고 잘생긴 얼굴을 비추었다. 저 매혹적인 얼굴 뒤에 악랄하고 매정한 심장을 감추고 있었다.소원은 운전석의 안전벨트를 바라보았고 마음 한구석에서 그를 죽여야겠다는 사악한 생각이 솟구쳤다. 그녀의 모든 고통과 절망, 그리고 소씨 가문의 멸망은 모두 이 악마 같은 남자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악의 근원을 죽여야만 부모님이 편히 잠들 수 있었다. 그를 죽인 후 자신도
그녀의 얼굴을 손에 가두고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득했다.“소원아, 이제 다 그만하자. 난 널 놓지 않을 거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부탁이 아니라 선포였다.이 순간에 그런 말을 하면 그녀가 얼마나 자신을 원망할지 알면서도 그는 해야만 했다.어차피 자신이 뭘 하든 그녀는 미워할 테니까.“언젠가 너에게 기회를 줄게.”나를 죽일 수 있는 기회.소원은 절망하며 고통에 잠식된 목소리로 흐느꼈다.“육경한, 난 죽어야만 당신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거야?”“꿈도 꾸지 마!”육경한의 눈꺼풀이 파들 떨리며 소리쳤다.“네가 감히 죽으려고 하면 널 도와줬던 사람들 한 명도 무사하지 못할 거야!”소원은 그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죽는 건 두렵지 않지만 늘 증오와 고통을 안고 사는 건 두려웠다.육경한은 그녀를 흔들며 경고했다.“내 말 기억해.”소원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하늘이 밝아오고 오늘은 소진용이 화장되는 날이었다.이준혁, 윤혜인도 마지막 작별을 위해 찾아왔다.화장이 끝난 후 소원은 나지막이 말했다.“육경한, 아빠의 마지막 소원은 바다에 뿌려지는 거였어.”육경한은 얼굴을 찌푸릴 뿐 차마 거절의 말을 뱉을 수가 없었다.차에 타기 전, 소원은 윤혜인에게 말했다.“혜인아, 네 절친이 될 수 있었던 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었어.”한 마디에 윤혜인의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지고 눈물이 비처럼 쏟아졌다.윤혜인은 소원의 손목을 잡고 흐느끼며 말했다.“내가 여기서 기다릴게.”소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육경한의 차에 탔다.육경한은 모든 일을 뒤로 하고 그녀의 곁을 조금도 떠나지 않은 채 지켜보았다.소원은 소매를 걷어 올린 그의 팔에 이빨에 물린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보았다. 안쪽 살이 뒤집힌 걸 보아 상처를 치료하지 않은 것 같았다.육경한은 그녀의 시선을 알아차리고 낮게 말했다.“남겨두려고.”이빨 자국을 말하는 것이다.소원은 충동적으로 그를 깨물었던 걸 후회하며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그녀
파도는 거칠었고 육경한은 눈을 크게 뜨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는 망설임 없이 난간을 넘어 뛰어내리려 했지만 뒤따라오던 소종이 붙잡았다.“대표님, 안 돼요! 이 가파른 절벽에서 떨어졌다가 바위에 부딪히기라도 하면...” 소종은 뒷말을 생략했다. 그때 가서 응급조치를 해봐야 소용없었다.소원은 죽을 것이다.“이거 놔!”육경한은 악마처럼 사나운 눈빛과 처절한 목소리로 외쳤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른 바다에서 지체하는 동안 소원이 살 가능성도 줄어든다.“대표님! 소원 씨는 이미 죽으려고 결심했어요!”소종은 어쩔 수 없이 사실대로 말했다.“오늘 아침 전미영 씨 병원 계좌에 앞으로 50년의 병원비를 감당할 수 있는 거액의 돈이 들어왔고 돈을 보낸 사람은 소원 씨였습니다.”누가 봐도 확실한 징조였다. 어쩌면 어제 어머니를 만났을 때 그녀는 죽을 결심을 했을지도 모른다.순간 육경한은 온몸의 피가 멈추는 것 같았다.그녀는 이미 결심을 했다… 그의 곁에 있느니 죽는 게 나았던 것이다.순간 육경한은 심장이 찢기는 듯한 통증을 느꼈고 피에 물든 상처가 점점 더 벌어지는 것 같았다. 통증이 심장에서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고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어두운 하늘과 푸른 바다 사이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경한 씨... 경한 씨...” 한 번씩 부를 수록 심장이 산 채로 찢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소종이 그를 일으켜 세우자 육경한이 시선을 옮겼다.“내가 올라오지 않으면 찾았을 때 같이 묻어줘.”이윽고 그는 훅 뛰어내렸고 그의 몸은 순식간에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바다에 삼켜졌다.“대표님!” 소종이 비명을 질렀다.그리고는 곧바로 관리실을 찾아 여러 척의 요트를 보내 수색에 나섰다. 육경한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다음 날 되었다. 소종이 데리고 온 구조대가 그를 구했던 것이다.한 시간 가까이 바다를 수색한 끝에 육경한을 발견했을 때 그는 너무 지쳐서 바닥에 가라
육경한이 천천히 다가왔다. 이국땅에서 맨손으로 늑대도 찢어 죽이던 손이 지금은 파킨슨병 환자처럼 주체할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힘겹게 하얀 천이 벗겨지고 순간 무언가 머리를 세게 내리친 듯했다.주위에 적막이 감돌았다.순간 이명이 들린 육경한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그는 감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피투성이가 되어도 얼굴 윤곽이 소원의 얼굴과 일치했다.“말도 안 돼! 내가 네 속임수를 모를 것 같아, 소원!”육경한의 눈은 무서울 정도로 시뻘겋게 빛났고 그는 미친 사람처럼 갈아입힌 시체 옷을 찢었다.소종이 깜짝 놀라며 제지했다.“대표님!”허리 자락을 들어 올리자 가느다란 허리에 유일하게 남은 피부 조각에 작은 붉은 점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이 너덜너덜한 시체랑은 어울리지 않게.“헉!”새빨간 피가 흰 천에 튀었다.육경한은 치명적인 한 방을 맞은 듯 피를 토했다.잔인한 현실은 거짓말을 용납하지 않았다.“아아악!!!”육경한은 너덜너덜해진 시체를 안은 채 바닥에 무릎을 꿇었고 극심한 고통의 비명이 방 전체에 울려 퍼졌다.요란한 소리 뒤엔 숨 막힐 듯한 적막감이 돌았다.기억 속에 단 한 번도 떨어지지 않았던 눈물이 남자의 눈에서 툭툭 떨어졌다.“소원아, 더는 널 가두지 않을게. 돌아와 제발, 곁에 묶어두지 않고 자유롭게 보내줄게… 내가 잘못했어, 내가...”육경한은 미련이 가득한 모습으로 뼈가 다 드러난 머리에 얼굴을 갖다 댔다. 소종은 이 시체를 보고 소름이 돋았다. 솔직히 말해서 진아연의 흉측한 얼굴보다 더 소름 끼쳤다.진자연은 기껏해야 아주 못생겼을 뿐 그래도 숨 쉬고 움직이는 사람이었다.이 시체는 피투성이가 되어 음산한 분위기를 뿜었고, 특히 움푹 파인 두 눈은 사람의 영혼까지 송두리째 뽑아갈 정도로 오싹했다.육경한은 진아연의 소름 끼치는 모습은 싫어하면서 품 안에 피투성이가 된 시체는 내치지 않았다.“소원아, 제발 돌아와, 제발. 내 목숨이라도 줄 테니...”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품에 안긴
“안녕하세요.”달콤한 목소리의 여자가 병실 문을 열며 들어왔다.육경한이 고개를 들어 보니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여자는 육경한을 본 순간 눈빛에 놀라움이 스치더니 다가와 말했다.“안녕하세요. 저는 픽업트럭에 있던 사람 중 하나입니다. 모두를 대표해서 감사 인사를 드리러 왔어요.”그녀는 들고 온 과일 바구니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육경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여자는 갈 생각도 없는 듯했다.구해준 사람이 이렇게 잘생겼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그의 외모는 남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음에도 흠잡을 데 없는 이목구비가 돋보였다.마치 드라마 속에서나 볼 법한 ‘냉철한 대표님’ 같았다.날카로운 눈빛과 잘생긴 얼굴은 그녀 같은 평범한 여자들이 평생 가까이할 수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제가 사과 깎아드릴까요?”여자가 먼저 제안했다.하지만 그녀가 사과를 집어 드는 순간, 육경한이 차갑게 말했다.“필요 없어요. 나가세요.”그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갑고 단호했다.여자는 순간 멈칫하며 사과를 손에 든 채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그러고는 이내 눈가가 붉어졌다.“저는 그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을 뿐이에요.”“고마워할 필요 없어요.”육경한은 냉담하게 대꾸했다.“나는 당신들을 구하려고 한 게 아니었으니까요.”이 말을 듣고 여자는 눈이 휘둥그레졌다.‘우리를 구하려 한 게 아니면 왜 목숨을 걸고 그런 위험한 싸움에 뛰어든 거지? 그토록 무모한 일을...’옆에서 육경한의 말을 듣고 있던 소종은 속이 답답해졌다.최근 구급차에서 찍힌 사진이 온라인에 퍼지며 언론은 육경한이 수많은 여성을 구한 영웅이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그 덕분에 미우 그룹의 이미지는 하늘로 치솟았고 주식도 단기간에 급등했다.지금 병원 밖에는 그를 인터뷰하려는 기자들이 몰려 있었다.하지만 육경한의 이런 모습이 퍼지면 언론의 긍정적인 관심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말 것이었다.하여 소종은 재빨리 상황을 수습했다.“죄송합니다. 저희 대표님이 머리를 다쳐서 지금 조
의료진들이 내려와 먼저 소원을 들것에 눕히고 이어 남자도 들것에 옮겨 눕혔다.구급차에 실려 가는 동안, 소원의 마음속은 기쁨이 가득 차 있었다.그녀는 들것에 누운 채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며 감사의 인사를 전하려 했다.하지만 그 순간 닦여진 남자의 얼굴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날카롭게 솟은 눈썹, 칠흑같이 검은 눈동자, 얇고 날렵한 입술.그 얼굴은 다름 아닌 육경한이었다.순간, 소원의 목에서는 감사 인사가 걸려 나오지 않았다.‘왜 저 사람이 여기 있는 거지? 왜 하필 육경한이...’동시에 커다란 절망감이 온몸에 퍼졌다.‘웃기네. 내가 내 원수를 직접 구했다니... 이게 대체 무슨 어이없는 농담이냐고.’하늘은 정말 잔인하게도 그녀를 조롱하고 있었다.남자 역시 소원이 자신을 알아보았음을 눈치챘다.그러나 그는 심각한 부상을 입고 연기를 너무 많이 들이마셔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소원을 향한 그의 검은 눈동자는 복잡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그는 소원보다 더 큰 충격에 휩싸였고 이 상황을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그는 소원이 자신을 구하려 했을 때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음을 알았다.그녀는 육경한을 철저히 낯선 사람으로 여겼고 그런 그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세상에, 어쩌면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구급차 문이 닫히면서 두 사람의 시야는 차단되었다.소원은 현실이 너무 잔혹하다고 느꼈다.왜 육경한이 여기 있는지, 왜 그녀를 구하려 했는지, 왜 결국 자신이 육경한을 구해야 했는지.모든 것이 이해되지 않았고 이해할 수 없었다.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며 결국 그녀는 생각을 멈추고 천천히 잠에 들었다.육경한도 깊은 잠에 빠져 하루 밤낮을 지나서야 깨어났다.눈을 떴을 때, 그의 침대 곁에는 소종이 눈물을 흘리며 앉아 있는게 보였다.“대표님!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정말 돌아가시는 줄 알았습니다!”소종은 울먹이며 말했다.육경한은 여전히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문지르며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썼다.그러나 소종
남자는 말을 할 수 없었지만 손가락을 살짝 움직여 소원의 말을 들었다는 신호를 보냈다.소원은 말했다.“우리에게 기회는 한 번뿐이에요. 반드시 호흡을 맞춰야 해요. 내가 그쪽 손을 잡고 하나, 둘, 셋 하면 그쪽은 그쪽 인생에서 가장 큰 힘을 다해 저와 함께 나와야 해요.”남자는 손가락을 움직였지만 협조하기를 꺼리는 듯했다.그 위험성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만약 실패하면 두 사람 모두 죽을 것이 분명했다.그러나 지금 소원이 그냥 떠난다면 최소한 한 명은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었다.소원이 남자의 손을 잡으려 하자 남자는 주먹을 꽉 쥔 채 그녀의 시도를 거부했다.그러자 소원이 조급한 목소리로 말했다.“왜 그래요? 시간이 없어요!”뒷좌석은 여전히 불길에 휩싸여 있었고 차의 후미는 이미 골격만 남아 있었다.조금 전 절벽으로 떨어진 은색 미니밴은 검은 잔해로 변해버렸고 그 광경은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끔찍했다.시간은 점점 다급해지고 있었다.남자가 끝내 협조하지 않자 소원은 손바닥을 펼치며 말했다.“제 손바닥에 하고 싶은 말 적어주세요.”남자는 소원의 말을 듣고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의 손바닥에 급히 글자를 적었다.“가.”그는 그녀에게 빨리 떠나라고, 도망치라고 재촉하고 있었다.그러나 소원은 남자가 손을 빼려 하자 그의 손가락을 꽉 붙잡으며 말했다.“날 믿어줘요. 우리는 반드시 함께 살아남을 거예요.”남자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지만 소원은 포기하지 않았다.“만약 그쪽이 나를 믿지 않는다면 나도 여기 남아 있을게요. 5분도 안 걸려서 이 차는 절벽 아래로 떨어질 거예요. 함께 죽든지, 아니면 살아남든지 선택은 그쪽에게 달렸어요.”남자의 손가락이 갑자기 움찔했다.소원의 말이 그의 마음에 닿은 듯했다.마침내 그는 손을 돌려 소원의 손을 감싸 쥐었다.그것은 동의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행동이었다.곧 소원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말했다.“그럼 시작할게요.”손바닥과 등은 이미 땀으로 흥건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
어떤 여자들은 다리까지 심하게 다쳐 이미 상처가 곪아가고 있었다.더 나은 내일을 꿈꾸며 힘들게 나왔지만 현실은 그녀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가혹했다.다행히 아직 한국의 국경 안에 있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다른 나라로 끌려갔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더 끔찍한 일이 그녀들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고맙다는 말 필요 없어요. 빨리 가요!”소원은 이 말을 남기고 검은색 차량으로 혼자 달려갔다.몸에 상처가 있는 그녀는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고통이 밀려왔지만 지금은 죽음과의 경주였다.단 한 걸음만 늦어도 차는 절벽 아래로 추락할 게 분명했다.겨우 차에 도달했을 때, 차 안이 짙은 연기로 가득 차 있는 게 보였다.다행히 차창이 조금 전 미니밴에서 발사된 총알로 인해 깨져 있었기에 연기가 일부 빠져나가고 있었다.만약 창문이 깨지지 않았다면 차가 추락하거나 폭발하기도 전에 차 안의 사람들이 연기에 질식해 죽었을 것이다.차 안은 정적만이 감돌았다.운전석에는 한 남자가 조용히 누워 있었는데 얼굴이 옆으로 기울어진 상태로 연기에 질식해 의식을 잃은 듯했다.소원은 조심스럽게 차 문을 당겼다.차체는 이미 한계에 다다른 상태라 사소한 움직임 하나로도 균형이 무너져 차가 추락할 수 있었다.자칫하면 그녀 자신도 함께 떨어질 위험이 있었다.그러나 조금 전 이 남자가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들을 구해냈던 걸 떠올리며 소원은 자신도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결과가 어떻든 간에 그녀는 차 안의 모든 사람들의 기대를 짊어지고 포기하지 않기로 결심했다.그렇게 소원은 움직임을 최대한 부드럽게 하며 조금씩 차 문을 열었다.문이 열리자마자 운전석의 남자가 의식을 잃고 피투성이가 된 채로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그의 이마에서 흐르는 피 때문에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다.소원은 먼저 안전벨트를 풀기 위해 남자의 안전벨트 걸쇠를 손으로 더듬었다.그의 몸은 안전벨트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다행히 앞쪽에 충돌이 없어 에어백이 터지지 않았던 덕분에 상황은 상대적으로
은색 미니밴은 이제 주도권을 잡았고 더 이상 검은색 차량과 정면으로 맞붙지 않으려 했다.그들의 목표는 픽업트럭과 트럭에 타고 있는 사람들 전부였다.만약 그들이 구해진다면 자신들의 기지는 끝장날 게 뻔했다.은색 미니밴은 픽업트럭을 향해 추격하던 중, 다시 한번 총구를 들어 트럭을 조준했다.목표는 단 하나, 트럭을 전복시켜 절벽 아래로 추락하게 만드는 것이었다.소원은 뒤따라오는 차가 계속 자신들을 조준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손은 전보다 더 떨려 안정감을 잃었고 뒷좌석에서는 공포에 질린 듯한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다들 다음 총알이 누구에게 향할지 몰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공포 앞에서 아무도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소원은 뒤차에서 어떤 모션이 나올지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필사적으로 차를 몰아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었다.멈추는 순간 위험은 더 커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은색 미니밴이 다시 픽업트럭을 조준하려는 순간, 검은색 차량이 갑자기 속도를 내어 커브 길에서 추월했다.그러고는 차체를 던져 승합차와 픽업트럭 사이에 끼어들며 총알을 막아냈다.하지만 이번 상황은 심각했다.총알을 막아낸 직후, 검은색 차량의 뒷좌석에서 불꽃이 튀어 오르더니 곧장 거센 불길로 번졌다.뒷좌석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고 차 안은 금세 아수라장이 되었다.미니밴 역시 이 광경에 놀라 멈칫했다.그러나 검은색 차량의 운전자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불길이 치솟는 뒷좌석을 강제로 승합차에 밀어붙였다.결국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미니밴은 중심을 잃고 휘청이다가 산 아래로 추락했다.곧이어 미니밴에서도 거대한 불길이 치솟았다.한편, 검은색 차량은 미니밴을 밀어붙인 여파로 인해 간신히 멈췄으나 뒷좌석은 절벽 밖으로 튀어 나가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상태가 되었다.지금은 운전자가 움직이지 않아도 불길이 더 번지면 차체가 균형을 잃고 결국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게 뻔했다.SUV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죽음
상대는 뛰어난 운전 실력으로 은색 미니밴을 압도하며 그를 몰아붙였다.검은색 SUV는 마치 밤의 사냥꾼처럼 두 개의 강렬한 헤드라이트를 번쩍이며 자신의 먹잇감을 정확히 노렸다.은색 미니밴은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상황에 몰렸다.검은색 SUV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구원자 같았고 그 틈을 타 소원은 잠시 숨을 고르며 다시 속도를 올렸다.소원이 검은색 SUV를 돕지 않은 것은 일부러가 아니었다.우선, 자신의 운전 실력이 명백히 검은색 SUV의 운전자에 미치지 못했고 괜히 멈췄다가는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었다.게다가 소원은 한 사람의 목숨이 아닌 차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희망을 짊어지고 있었다.이 꽃다운 나이의 소녀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소원은 반드시 그녀들을 넓은 도로까지 안전하게 데려가야 했다.검은색 SUV의 도움 덕분에 소원은 은색 미니밴과 거리를 벌릴 수 있었다.하지만 백미러로 여전히 두 차량이 치열하게 맞붙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검은색 SUV가 교묘한 기술로 미니밴을 몰아붙였다면 은색 미니밴은 마치 물뱀처럼 교활하고 악랄한 움직임으로 대응했다.몇 차례나 검은색 SUV를 절벽 아래로 밀어버리려는 시도가 있었다.이들은 모두 죽음을 각오한 사람들이었다. 한쪽이 죽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싸움이었다.상황이 매우 위태로웠지만 검은색 SUV의 운전자는 상당히 노련했고 미니밴의 계략을 여러 번 피하며 반격했다.오히려 미니밴을 바위로 몰아가 차체에 더 큰 손상을 입혔다.그 바람에 미니밴의 옆면에 있던 백미러가 부서지고 차체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었다.검은색 SUV는 이를 계산이라도 한 듯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아 미니밴이 뒤에서 들이받도록 유도했다.그리고 곧이어 SUV는 날렵하게 방향을 틀며 다른 쪽 백미러도 바위에 부딪혀 부서지게 만들었다.결국 은색 미니밴은 양쪽 백미러를 모두 잃었는데 이런 험난한 산길에서는 백미러가 없는 상태로 운전한다는 것은 눈 한쪽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었다.검은색 S
소원은 마침 차 안에서 발견한 가위를 사용해 머리를 짧게 잘랐다.그리고 모자를 쓰고 얼굴에 흙을 조금 묻히니 얼핏 보면 그 남자와 닮아 보이기까지 했다.차에서 내리지 않기만 하면 충분히 속일 수 있을 것 같았다.모든 준비를 마친 후, 소원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열쇠를 꽂은 뒤 가속 페달을 밟아 시동을 걸었다.차량이 움직였지만 밖에 있는 경비원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졸음이 몰려오는 시간이라 동료가 돌아오지 않은 것조차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소원은 차량을 문 앞까지 몰고 가 남자의 신분증을 꺼내 보여주었다. 경비원은 대충 한 번 보고는 손짓으로 통과를 허락했다.차량이 대문을 지나가는 순간, 소원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첫 번째 관문을 넘었다고 끝난 게 아니었다.두 번째, 세 번째 관문이 여전히 기다리고 있었다.이 조직은 매우 교묘하게 여러 겹의 관문을 설계해 두었기에 혼자든, 둘이든, 무리로 도망치려고 해도 도보로는 절대 빠져나갈 수 없었다.첫 번째 관문조차도 벗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뒤이은 두 번째 관문에서도 소원은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신분증을 보여주자 경비원은 별다른 의심 없이 바로 통과시켰다.이 남자가 조직의 주요 인물들과 연관이 깊었는지 신분증만 보여주면 경비원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길을 열어줬다.생각해 보면 조직의 상층부와 관련이 없었다면 남자는 한밤중에 이런 곳까지 자유롭게 다닐 수 없었을 것이다.그 뒤로 검문하는 사람이 없었고 소원은 꿈에도 이렇게 순조롭게 진행될 줄 몰랐다.그러나 마지막 관문에서 문제가 발생했다.소원이 신분증을 보여주자 옆에 있던 경비원이 한 번 보고는 손짓으로 통과를 허락했다.그렇게 떠나려던 순간, 남자의 허리에 걸려 있던 무전기가 울리기 시작했다.무전기에서 무언가 급박한 말이 쏟아졌고 소원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표정이 심각해지더니 경비원은 갑자기 사냥총을 들어 소원을 겨누며 말했다.“내려!”어설픈 한국어로 소원에게 명령한 것이다.소원
상대방은 소원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녀의 손짓은 대략적으로 이해한 듯했다.그는 총으로 소원의 머리를 툭툭 건드리며 고개를 한쪽으로 젖히고 말했다.“가!”그가 가리킨 곳은 나무 오두막이었다. 아마도 그곳에 가서 사실 확인을 해보겠다는 의미 같았다.소원의 심장이 곧 목을 뚫고 나올 듯 했다.나무 오두막 안에는 그 남자의 시체와 피로 물든 바닥뿐이었다.그곳으로 간다면 사실확인 같은 건 말할 것도 없고 상황을 보고 바로 총알이 자신의 머리를 뚫을 가능성이 컸다.마지못해 오두막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던 소원은 일부러 손에 쥐고 있던 열쇠를 땅에 떨어뜨렸다.부드러운 흙바닥이라 소리는 나지 않았다.소원은 협조하는 척하며 이 감시자가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을 이용해 어색한 한국어로 차 안에 있던 소녀들에게 조용히 말했다.“열쇠, 땅에 있어요. 내가 이따가 잡을 테니까, 다들 도망쳐요. 뒤돌아보지 말고.”이 한마디는 거의 마지막 작별 인사와 다름없었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맨몸으로 총을 가진 사람과 맞서 싸우는 것은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소원이 생각하는 ‘붙잡는 방법’은 총을 빼앗아 이 경비원과 함께 죽는 길뿐이었다.결과가 좋을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선택지가 없었다.소원에게 후회하냐고 물어본다면 그녀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답할 것이다.열 명이라도 살릴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니 말이다.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미안한 마음은 남아 있었다.유진이와 제대로 작별 인사조차 나누지 못한 채 떠나야 한다니, 자신이 좋은 엄마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그녀를 더욱 아프게 했다.‘유진아, 엄마를 용서해줘. 끝까지 널 되찾아 오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소원은 발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그 발은 마치 수백 킬로그램의 쇠사슬에 묶인 것처럼 무거웠다.경비원은 소원의 태도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총의 개머리판으로 그녀의 등을 툭툭 치며 성급하게 말했다.“빨리...”“쿵!”갑작스러운 소리에 경비원이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졌다.소
이 둘은 방심한 채로 무기를 소지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문밖에 서 있는 두 경비는 달랐다. 그들은 진짜 총을 들고 있었다.만약 정면으로 뛰쳐나간다면 소원과 그녀의 일행은 접근도 못 하고 총에 맞아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컸다.이 상황에서 유일한 희망은 마당에 있는 픽업트럭이었다.소원은 조금 전에 처리한 경비원의 몸에서 열쇠를 빼냈다.모든 사람을 트럭 안에 숨겨 탈출한다면 성공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터무니없는 방법 같아 보이지만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유일한 선택이었다.산속으로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했다.산속에는 이 지역 지형에 익숙한 경비원들이 있었고 소녀들은 안에서 물과 식량도 없이 있었기에 오래 버틸 수 없을 터였다.구조대가 오기 전에 발견되거나 굶어 죽을 가능성이 컸다.결국 이 계획은 소원이 깊이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성공하지 않으면 모두가 죽는다. 실패가 허용되지 않는 상황이었다.소원은 문밖에 서 있는 경비원 둘 중 한 명이 화장실로 가는 것을 보았다.큰일을 보러 간 듯했는데 이런 경우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예의 따위를 따지는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작은 일이었다면 어디서든 적당히 해결했을 것이었다.그들의 삶의 습성이 거의 야만인과 다름없었다.소원은 남은 경비원이 담배를 피우는 타이밍을 기다렸다가 조용히 작은 초가집으로 다가갔다.그녀는 바깥 문에 달린 자물쇠를 조용히 풀고 문을 열었다.안에서는 작은 소리에도 깜짝 놀란 소녀들이 떨고 있었다.소원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을 때조차도 그들은 몸을 웅크린 채 움직이지 못했다.소원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저랑 함께 나갈 사람 있어요?”방 안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모두 얼어붙은 듯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소원은 다시 한번 물었다.“저랑 함께 나갈 사람 있어요? 구조대를 기다리면 오래 걸릴 거예요. 그 전에 들킬 수도 있고 제가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같이 나간다면 제가 목숨 걸고 여러분을 지킬게요. 완전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