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들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옥상에 있는 남자를 보았다.소원의 입술이 찢어지고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을 발견한 소방관은 그녀에게 물을 건네며 달랬다.“소원 씨,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 동료들이 이미 설득하러 올라갔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아버님께선 어쩌면 순간의 충동으로...”소원은 물을 받으며 감사 인사를 하려던 순간 누군가가 경악에 찬 비명을 질렀다.“꺄아아아아악! 뛰어내렸어요!!!”소원은 고개를 확 들었다. 그러자 검은 형체가 빠르게 옥상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그 모습은 꼭 영혼도 생명도 없는 돌덩이 같았고 기이한 자세로 떨어졌다.쿵!빗소리보다 더 센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의 비명도 이내 들려왔다.귀가 찢어질 듯한 비명 말이다.순간 소원은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툭.들고 있던 생수병이 바닥에 떨어져 데굴데굴 굴러갔다.소원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빗물이 그녀의 입과 코로 흘러 들어갔다.숨 막혀오는 절망에 순간 정신을 잃어버린 것이다.한참 후, 그녀의 시야가 드디어 밝아졌다.“아아... 아아아!!!”소원은 입을 벌렸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고 울부짖으며 피로 물든 형체가 있는 곳으로 기어갔다.그녀는 보았다.사람인지 아닌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그 시체를 보았다...시체가 입고 있는 네이비 정장은 오늘 아침 그녀가 직접 골라준 정장이었다. 거기다 파란색 땡땡이 넥타이도 있었다.그녀의 머릿속에 아침까지 소진용에게 애교를 부리던 장면이 떠올랐다.“아빠, 그렇게 입으시니까 한 십 년은 더 젊어지신 것 같아요.”소진용은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젊으면 좋지. 젊으면 활력이 있어 보이잖아. 그러면 아무도 우리 원이를 다치게 할 수 없겠지...”비는 더 세차게 내렸다.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가 빗물에 씻겨 소원의 손까지 닿았다.그것은 그녀의 아빠의 피였다. 그녀를 낳고 길러준 아빠의 피...‘대체 왜 그러셨어요!'그녀는 이성을 잃어 미친 사람처럼 달려갔다. 그러자 소방관들이 그녀의 팔을 꽉
만족하냐는 말이 순간 육경한의 숨통을 조여왔다.소씨 집안은 결국 처참하게 끝났다. 그는 정말로 만족하고 있을까?아니었다.오히려 반대였다.그는 사실 소진용이 죽지 않기를 바랐다. 소진용이 죽는다는 것은 소원을 휘두를 방법이 하나 줄어든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울리는 머리 탓에 그는 생각을 이어가기도 힘들었다.지금도 믿기지 않았다. 소진용이 자살을 했다니.대체 왜 그런 것일까? 정말로 그 빚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일까?소원이 그의 아이를 낳아주면 그가 당연히 그들의 빚을 갚아주지 않겠는가?“나랑 약속했잖아. 그 계약서 없애기로 약속했었잖아! 그런데 그 계약서를 이용해서 우리 아빠를 사지로 몰아?”“이 배신자! 비열한 놈!”소원은 너무 소리를 질러 가슴이 아파졌다. 원래부터 그녀는 목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런데 자꾸만 소리를 지르니 더 쉬어버린 것이다.그녀의 말에 육경한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그때 없애버렸던 계약서는 사실 원본이 아니었다. 그는 원본을 몰래 남겨두어 집안 금고에 넣어두었다. 그런데 그게 왜...그는 소원에게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만족한 적 없다고, 계약서로 소진용을 사지로 몰아넣지 않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그러나 입에 접착제라도 붙은 것인지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 계약서의 출처는 그가 확실했으니 말이다.그와 무조건 연관이 있었다.소원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그를 보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그 계약서를 위해서 구치소에서 얼마나 많은 괴롭힘을 견뎌냈는지 알아? 그때 아이유 유산한 거로는 부족했어?”“육경한, 너 그 아이 유전자 검사는 해봤니? 그 아이 네 아이야! 아직도 속죄하기엔 부족한 거야?”아이를 언급하자 육경한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부족하지 않았다. 부족할 리가 없었다.그 아이에게서 느낀 아쉬운 마음 때문에 그는 그녀에게 아이를 하나 더 낳아달라며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소원은 울먹였다.“우리 가족이 전부 죽어야 속이 시원하겠어?”육경한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아니...”
육경한은 항상 그녀에게 보상을 주겠다고 한다. 그놈의 보상!그의 말은 영원히 믿을 것이 못 되었다.육경한은 가슴 언저리에서 통증을 느꼈다. 숨쉬기도 어려워지는 것 같았다.뭐라 설명하고 싶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소원은 이미 그에게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넌 꼭 내가 지옥으로 떨어지고 처참하게 사는 꼴을 봐야 속 시원하겠어?”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그렇게 해줄게...”육경한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소원은 이미 몸을 틀어 시멘트로 만든 화단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퍽 소리가 났다.화단엔 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순간 육경한의 몸이 경직되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저 본능적으로 빠르게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품에 끌어안았다.“소원아!”그는 그녀의 어깨를 꽉 안으면서 소리를 질렀다.“미쳤어?!”소원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무력감을 느끼고 있었다. 죽는 것마저 힘이 부족해 제대로 죽지 못했으니 말이다.이마에 흐른 피가 그녀의 얼굴 반쪽을 적시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모습마저 아름다워 보였다.그런 그녀의 모습은 육경한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소원은 점차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고 끊임없이 중얼거렸다.“육경한... 돌려줄게... 네가 살려낸 목숨... 돌려줄게...”그렇게 그녀는 끝없는 어둠에 의식이 삼켜졌고 겉모습은 거의 죽은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육경한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식은땀을 흘리며 차갑게 말했다.“소원아, 바보 같은 짓 하지 마! 너한테 어머님이 계시잖아! 너 죽으면 어머님은! 어머님 생각은 안 해봤어?”여하간에 그녀는 자신이 짐승보다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쉽게 자살 시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계속 살아가길 바랐다.육경한의 말은 독 묻은 비수가 되어 그녀의 가슴에 푹 박혀버렸다.그는 그녀를 알아도 너무 잘 알았다.이 세상에 그녀의 가족이 한 명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는 그녀를 절대 놓아주지
퍽!이때 누군가가 진아연을 발로 차 넘어지게 했다.진아연은 소원보다 더 많이 바닥에 구르게 되었다.“아윽... 누가 감히... 어떤 X이야!”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진아연은 자신을 차버린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지 못했다.그녀는 허리에 손을 올리며 일어나자 육경한이 이미 소원을 안아 든 채 차에 태우고 있었다.얼른 따라가 보았지만 급하게 출발하는 차에 빗물을 뒤집어쓰게 되었다.진아연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아아아아악!!!!!”여기서 포기할 수 없었던 그녀는 얼른 따라갔다.차 안.육경한의 팔에서는 계속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보지 못한 사람처럼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차는 비를 뚫고 달려 장례식장으로 왔다.소원은 너무도 조용해 꼭 죽은 사람 같았다.그녀는 구석에 몸을 한껏 웅크리고 있었다. 육경한이 조금이라도 다가가려고 하면 그녀는 소리를 지르면서 발작을 일으켰고 몸에 무리가 갔는지 피를 토해내기도 했다.육경한은 그녀의 곁으로 다가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그 짧은 몇 분이 그에겐 수십 년처럼 느껴졌다.만약 그녀에게 힘이 많이 남아 있었더라면...만약 각진 곳에 머리를 박았더라면...그는 아마 영원히 그녀를 잃게 될 것이다.상상만 해도 그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장례식장 안.장례지도사는 소진용의 시체를 깨끗하게 닦아주고 있었다.소원은 의자에 앉기 싫어했고 입구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그녀의 모습은 꼭 버려진 강아지 같았다. 동글동글한 두 눈으로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이 안에... 우리 아빠가 있어...'어릴 때 비가 오면 항상 마중을 나와 그녀에게 겉옷과 우산을 씌워주던 아빠였다.아빠가 살아있을 땐 그녀는 항상 든든한 기분을 느꼈다.그런데 지금은... 없었다.그녀의 버팀목이 사라졌다.문이 열리고 소원은 기어가듯 들어갔다.육경한은 그녀에게 다가가면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발작을 일으킬까 봐 손을 댈 엄두도 나지 않았다.소진용은 하얀 천을 덮고 있었다.소원은 그런 소
진아연은 방금 자신을 발로 차버린 사람이 누군지 보지 못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녀의 뒤엔 육경한뿐이었다.만약 그 사람이 육경한이라면 그녀의 은혜는 이미 육경한이 소원을 향한 마음을 능가했다는 것이었다.진아연은 미쳐버릴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는 이성을 잃어서는 안 되었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똑바로 차려 챙길 것은 챙겨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녀는 부드럽고 아량이 넓은 사람 연기를 해야 한다.독하게 육경한을 깨물던 소원과 대비되게 연기를 해야 육경한의 마음을 다시 잡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경한 씨, 괜찮아요? 아까...”진아연은 빨갛게 물든 그의 소매를 가리키며 걱정스레 물었다.“그 여자가 깨물었는데 괜찮아요?”육경한은 멍하니 그녀의 꼴을 몇 초간 지켜보다가 담담하게 답했다.“괜찮아.”“방금은 미안했어요. 소원한테 그런 큰일이 있었을 줄은 몰랐거든요. 그냥 경한 씨의 팔을 꽉 물고 있길래 나도 모르게 급해서... 이따가 내가 직접 소원이한테 사과할게요...”진아연은 시선을 내리깔며 처연한 모습을 연기했다.육경한은 그녀의 웨딩드레스를 빤히 보았다. 순간 이상하게도 눈에 거슬렸다.“괜찮아. 오늘 많이 속상했지. 나중에 보상해줄 테니까 오늘은 이만 먼저 돌아가.”진아연은 화가 치밀었다. 육경한이 그녀에게 먼저 돌아가라고 했으니 말이다. 그는 분명 이곳에 남아 소원의 곁에 있어 줄 것이 틀림없었다.다행인 것은 육경한의 태도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는 것이다.그녀는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나 먼저 가 볼게요.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육경한은 떠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가 다시 소원을 떠올리면서 자신과 소원의 사이도 이렇게 평화로웠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진아연은 몸을 틀자마자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그녀는 똑똑히 들었다. 육경한이 소원의 어머니를 언급한 것을. 아마 위독한 상태인 듯했다.‘설마 하루 사이에 둘이나 죽는다고?'‘이런 좋은 소식 당연히 소원이도 알아야지.'그녀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임세희는 몸을 돌려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어머, 윤혜인 씨가 여긴 어쩐 일이에요?”그녀는 꼭 우연인 것처럼, 꼭 자기가 이선 그룹의 안주인이 된 것처럼 말을 건넸다.윤혜인의 두 눈이 분노에 충혈되고 손발마저 차가워졌다.그녀는 살짝 튀어나온 임세희의 배를 발견했다. 같은 여자로서 윤혜인은 그것이 뱃살이 아니라 임신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아마 그녀보다 꽤 일찍 임신한 것 같았다. 다만 누렇게 변한 얼굴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이상하게도 티가 나는 것 같았다.순간 윤혜인은 배신감을 느꼈다.이준혁이 줄곧 그녀를 속이고 있었기 때문이다.정신병동에 있다느니 복수를 해주겠다느니 전부 거짓말이었다.이준혁은 임세희를 곁으로 부른 것도 모자라 임신까지 시켰다.“윤혜인 씨, 사실 전 줄곧 혜인 씨한테 사과하고 싶었어요...”임세희는 윤혜인을 보면서 울먹거렸다.“전에는 다 제가 철이 없어서 주제도 모르고 준혁 오빠한테 들러붙어 혜인 씨 기분만 상하게 했어요.”제멋대로 굴던 모습은 사라지고 누렇게 뜬 얼굴로 울먹이니 확실히 가련해 보이긴 했다.그러나 윤혜인은 전혀 넘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향한 증오만 더 깊어져 갔다.송소미는 죽기 직전에 임세희가 그녀의 아이를 없애버리라고 지시했다는 사실을 직접 인정했다.윤혜인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고 이내 짝 소리와 함께 뺨을 때렸다.털썩.뺨을 맞은 임세희는 소파 모서리에 부딪히며 넘어졌다.“아야...”그녀는 배를 감싸 안았다. 그러면서 아주 고통스러운 듯 앓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다른 각도에서는 어떻게 보일지는 몰라도 그녀의 맞은편에 있는 윤혜인은 똑똑히 보았다.그녀의 손힘으론 절대 이 정도로 넘어질 리가 없었다.임세희는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지금도 연기를 하며 누명을 씌우고 있었으니 말이다.그렇게나 연극을 좋아하니 그녀는 맞춰줄 생각이었다.윤혜인은 임세희에게 다가가 손을 잡으며 물었다.“괜찮아요?”임세희는 입술을 짓이기더니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달았다. 그런데 누렇게 뜬 얼굴로 그
“윤혜인!”이때 이준혁이 다가와 그녀를 확 잡아당기며 이 소란을 종결시켰다.“내 몸에 손대지 말아요!”윤혜인은 이준혁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역겨워.'그녀는 눈앞에 있는 쓰레기남과 쓰레기녀가 너무도 역겹게 느껴졌다.순간 속이 울렁거리며 눈앞이 어질하여 휘청거리게 되었다.이준혁은 급하게 손을 뻗어 그녀를 부축하려고 했다.그러나 윤혜인은 뒤로 물러나면서 이를 빠득 갈았다.“이준혁 씨, 우리 계약도 그만하죠. 번거롭겠지만 이혼 서류에 일찍이 사인해주길 바라요. 안 그러면 사람 많은 곳에서 난동을 피울 거예요.”말을 마친 윤혜인은 바로 떠나려고 했다. 더는 눈을 더럽히는 남녀를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이준혁은 그녀를 따라가려고 했지만, 뒤에 있던 임세희가 갑자기 그의 바짓자락을 붙잡으며 당황한 듯 말했다.“준혁 오빠, 나 배가... 배가 너무 아파... 피가 나는 것 같아...”바닥은 어느새 피로 물들어 있었다.이준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곤 주훈을 불렀다.“주 비서, 당장 세희를 병원으로 데려가. 모든 과정에 곁에서 딱 붙어 지켜봐. 절대 문제 생기지 않게.”말을 마친 뒤 그는 바닥에 주저앉은 임세희를 무시하고 얼른 윤혜인을 붙잡으러 나갔다.임세희는 이를 빠득 갈았다. 그녀의 몸에서는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이준혁은 무시하고 나가버렸다.감히 난동을 피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여하간에 정신병동에서 지냈던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으니 말이다.그녀는 일단 힘부터 키워야 했다. 절대 윤혜인과 맞서 싸워서는 안 되었다. 그랬다면 이준혁이 절대 그녀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임세희는 주먹을 꽉 쥐며 이 치욕은 잠깐이리라 생각했다.‘난 반드시 윤혜인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고 말 거야!'이준혁은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경호원과 다투는 윤혜인을 발견했다.“비켜요! 당신들이 뭔데 자꾸만 내 자유를 빼앗는데요! 비켜요!”이준혁은 경호원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두 경호원은 길을 내어주었다.윤혜인이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이준혁
익숙한 레퍼토리에 윤혜인은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지만, 꾹 참고 들었다.이준혁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임세희 배 속에 있는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야.”윤혜인은 차갑게 웃었다.“이준혁 씨, 내가 그렇게 멍청해 보여요? 준혁 씨 아이가 아니라고요. 그럼 왜 곁에 두고 보살펴 주고 있었는데요?”“세희를 데리고 나온 사람은 내가 맞아. 하지만 난 절대 불쌍해서 마음이 약해져서 데리고 나온 게 아니야. 나에겐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어.”그 이유에 관해선 이준혁은 뜸을 들이며 말했다.“언젠가, 언젠가는 반드시 알려줄게. 아직은 아니야.”너무도 형편없는 변명에 윤혜인은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웃음이 터져 나오려고 했다.이젠 그녀에게 그럴싸한 변명도 지어내지 않았다.확실히 그녀도 들을 자격이 없었다.이준혁은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괜스레 불안해져 그녀의 손을 잡았다.“난 너랑 이혼할 생각 없어. 너도 자꾸만 내 곁을 떠날 생각하지 말아줘, 알겠어?”며칠간 그는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게 될까 봐 회사에서 잠을 잤다.밤잠을 이루지 못할 때 그는 자신이 윤혜인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날 이성을 잃은 것도 그녀가 그의 곁을 몰래 떠나려고 했기 때문이다.그는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윤혜인이 임신한 아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녀를 놓아주지 못하니 차라리 전부 받아들이자는 마음이었다.게다가 그는 은근히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일 수도 있다는 희망을 말이다.여하간에 그간 그는 몇 번이나 충동적으로 그녀의 몸을 탐했었다.교활한 한구운의 말만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하지만 그는 이미 그 아이가 진짜 그의 아이이든 다른 남자의 아이이든 전부 받아들이기로 다짐했고 윤혜인을 잘 타일러 방심하게 한 다음 그녀가 직접 털어놓게 할 생각이었다.윤혜인은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그동안 나 계속 속이고 있었어요?”‘계약 결혼은 무슨. 그냥 날 묶어두기 위한 수단이겠지!'이준혁은 솔
윤혜인이 문 앞으로 다가가 힘껏 문을 두드리며 큰 소리로 불렀다.“엄마... 엄마...”화들짝 놀란 도우미가 얼른 달려와 윤혜인을 막았다.“아가씨,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만하세요.”도우미가 윤혜인을 안더니 힘껏 침대 쪽으로 끌어당겼다. 윤혜인은 문을 두드릴 수 없어 큰 소리로 외칠 수밖에 없었다.“엄마. 엄마. 엄마.”윤혜인이 큰 소리로 외치자 바깥에서 들리던 웅얼거리는 소리가 달라졌다.쿵.문이 격렬하게 흔들렸다.쿵. 쿵. 쿵.휠체어로 문을 힘껏 부수는 소리와 도우미가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사모님... 사모님. 안 됩니다. 이러시면 안 돼요.”윤혜인이 더 높은 소리로 불렀다.“엄마. 엄마. 엄마.”방 안에 있던 도우미가 윤혜인의 입술을 틀어막자 윤혜인이 팔다리를 마구 버둥대며 웅얼웅얼 소리를 냈다.문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흔들리더니 탈칵 하는 소리와 함께 열쇠가 망가졌다. 문이 열리더니 검은 그림자가 안으로 쌩하고 들어왔다. 윤아름은 큰 꽃병 하나를 이고 들어와 윤혜인의 입을 막고 있는 도우미를 내리쳤다. 도우미는 피를 철철 흘리며 바닥에 쓰러지더니 고통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윤아름이 휠체어에서 겨우 일어나 윤혜인을 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윤혜인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정말 오랜만에 엄마를 다시 안아보는 거라 윤혜인도 엄마를 꼭 끌어안았다. 도우미는 바닥에 쓰러져 피를 흘리는 다른 도우미를 보고 윤아름을 말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긴 윤아름은 아까 정신이 살짝 나간 것 같았다. 게다가 원진우가 윤아름을 다치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했기에 과분하게 말렸다가 윤아름이 다치는 날에는 도우미에게 불똥이 튈 수도 있다.이때 소식을 들은 원진우가 다급하게 걸어왔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는 모녀를 보게 되었다. 원진우는 멈칫하더니 그 자리에 멈춰 섰다.울다가 웃기를 반복하는 윤혜인은 정상 같아 보이지 않았지만 적어도 멍하던 예전과 비기면 정서라는 게 생겼다. 윤혜인이 확실히 윤아름을 치유
원진우는 연속 몇 시간이나 윤혜인을 관찰했다. 관찰한 시간이 오래면 오랠수록 원진우는 윤혜인이 자는 모습이 자신과 쏙 빼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낯선 곳에서 안전함을 느끼지 못하고 언제든 경계 태세에 들어가는 것도 말이다.“일어났으면 뭐 좀 먹어요. 도우미에게 이쪽으로 가져다주라고 할게요.”원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차분하고 온화한 말투로 말했다. 만약 윤혜인에게 예전 경력이 없었다면 원진우를 좋은 사람이라고 여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적어도 그렇게 잔혹한 사이코패스 성향을 뒤로 잘 숨긴 것 같았다.윤혜인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었다가는 원망을 이겨내지 못할 것 같았다. 정서도 도라는 게 있어 일정한 포인트까지 닿으면 되지 아니면 원진우가 오히려 경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원진우는 그렇게 생각한다기보다 그저 윤혜인이 보면 볼수록 귀엽다고 생각했다.“혜인 씨, 이름은 엄마가 지어준 거예요?”윤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혜인의 몸에는 금패가 하나 있는데 위에 윤혜인의 이름이 적힌 금패였다. 양아버지가 길다가 그녀를 줍고 주변과 경찰서에 윤혜인이라는 아이가 실종됐는지 물었지만 윤혜인이라는 아이를 잊어버린 적은 없다고 했다. 전에 조사가 어려웠던 건 윤혜인이 원진우의 의해 먼곳에 던져졌기 때문이다. 그때는 기술이 좋지 않아 실종자를 찾는 것도 힘든 일이긴 했다. 게다가 양아버지는 인자한 사람이었기에 윤혜인의 아버지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다고만 말할 뿐 이기적이게 그녀의 모든 걸 묵살하지는 않았다. 원래 이름을 쓰겠다고 한 것도 어느 날 친부모님을 만나면 그들이 자기를 알아볼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듣기 좋네요.”원진우가 말했다. 윤혜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원진우가 뭔가 말하려다가 방향을 잃었다.“일찍 쉬어요.”원진우가 이렇게 말하더니 방에서 빠져나갔다. 도우미가 아침을 가져다줬는데 그야말로 진수성찬이었다. 윤혜인은 그 요리와 밥을 이미 보며 원진우가 아직 독을 타지는 않았을 거라는
윤혜인은 다시 눈을 감으며 잠을 자야 체력을 보존할 수 있다고 자기 자신을 타일렀다. 오빠가 사람을 데리고 오기 전까지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자기 자신을 타일러도 윤혜인의 잠자리는 여전히 뒤숭숭했고 악몽만 연거푸 꿨다. 엄마가 여기 있고, 아버지를 죽인 원수도 여기 있다는 생각에 잠에 들 수가 없었다. 그렇게 겨우 동이 틀 때까지 버틴 윤혜인이 눈을 뜨자 침대맡에 놓인 의자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원진우였다. 윤혜인은 순간 얼굴을 굳히더니 혹시나 하지 말아야 할 잠꼬대를 하면서 마음에 담아뒀던 말을 전부 쏟아낸 게 아닌지 걱정했다.“깼어요?”원진우는 그런 윤혜인을 보며 덤덤하게 물었다. 윤혜인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지만 표정만큼은 매우 덤덤했다.“네.”“어제 잠을 설치는 것 같던데요?”원진우가 대수롭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차갑디차가운 눈동자에 담긴 의미가 뭔지는 알아내기 힘들었다.윤혜인은 혹시나 실수한 건 아닌지 의심되어 심장이 철렁했다. 얼른 머리를 굴린 윤혜인이 주먹을 꽉 움켜쥐고 이렇게 말했다.“네. 잠을 잘 자지 못한 건 맞아요. 어제 겪었던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무섭거든요. 나는 정말 거기서 죽는 줄 알았어요.”윤혜인이 솔직하게 말하자 원진우의 눈빛도 살짝 풀렸다.“내가 그렇게 무서워요?”원진우가 물었다.“네. 너무 무서워요. 나를 세 번이나 죽이려고 했는데 어떻게 안 무섭겠어요?”윤혜인은 두려움을 전혀 위장하지 않았다. 원진우와 말할 때도 몸을 살짝 움츠리며 뒤로 빼고는 경계 태세를 취했다. 이에 원진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평소 곽진명과는 어떻게 지내는데요?”윤혜인은 원진우가 무슨 뜻으로 묻는지 몰라 잠깐 넋을 잃었다.“곽진명과도 이렇게 지내요?”원진우가 물었다. 윤혜인은 그제야 원진우가 자기를 윤혜인의 아버지로 대입해 곽진명과 비교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곽진명을 떠올리자 윤혜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아빠는 내게 무척이나 잘해줬어요. 그래서 한 번도 무섭다고
원진우가 눈길을 돌리더니 차분한 표정으로 묵묵히 다짐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총명한 여자라는 걸 알아챘으니 윤혜인이 한 말과 보이는 행동을 믿으면 함정에 빠지는 거나 다름없다고 말이다. 원진우는 윤아름을 한참 동안 뚫어져라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무릎을 꿇더니 윤아름의 어깨를 잡고 힘껏 흔들었다.“아름아,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윤아름의 동공은 여전히 풀려 있었고 원진우가 무슨 말을 하든 아무 반응이 없었다. 원진우는 윤아름의 어깨를 점점 더 억세게 부여잡더니 이를 악물고 캐물었다.“말해. 말하라고. 있어, 없어?”“...”윤아름은 여전히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흥흥거릴 뿐이었다. 진우희가 그렇게 된 걸 본 다음부터 줄곧 이 상태였다.원진우는 윤아름의 멘탈이 이렇게 약할 줄은 몰랐다. 양자를 총으로 쐈다는 소식부터 먼저 알려주고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있는 진우희의 시신까지 보여줬다. 지하실에 갇혀 있으면서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친 윤아름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미쳐버리고 말았다. 다 자기 잘못이라고 자책하고 있었다. 곽경천도 그녀를 구하려다 총에 맞았고 진우희도 그녀를 도우려다 원진우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이 모든 건 다 그녀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런 생각이 든 순간 이성의 끈이 끊어지고 말았고 그 뒤에 아무리 다시 이어주려 해도 이어지지 않았다. 무의식적인 흥얼거림과 가끔 입가로 흘러내리는 침은 윤아름을 모두가 알아주던 미녀에서 바보로 전락하게 했다. 하지만 미인은 미인인지라 치매에 바보가 되어도 예쁘기만 했다.윤아름은 초점 없는 동공으로 무의식적으로 모니터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때 미약하게나마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윤아름의 눈동자가 다시 초점을 되찾더니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휠체어에서 바닥으로 넘어졌다. 원진우가 부축하려 했지만 윤아름이 그 손을 탁 쳐내더니 미친 듯이 모니터가 있는 쪽으로 기어갔다. 화면으로 보이는 윤혜인은 어느새 몸을 웅크리고 있
그 누구든 오랫동안 보지 못한 아이를 본다면 차분함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게다가 윤아름처럼 아이를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윤아름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멍한 표정이었다.원진우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번에는 정말 연기가 아닌 진짜였다. 윤혜인의 쓸모도 이제 끝났기에 원진우는 윤혜인의 손에 올렸던 발을 뗐고는 입을 열었다.“온도 영하 80도로 내려.”“!”윤혜인이 화들짝 놀랐다. 이건 윤혜인을 산채로 냉동시켜 저번에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내겠다는 뜻이었다. 원진우가 시야에서 점점 멀어지자 윤혜인은 이번 기회를 놓치고 원진우가 문밖으로 나서는 날에는 죽음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어떻게 해야만 살 수 있을까...’윤혜인은 죽기 싫었다. 살아서 엄마를 구하고 오빠가 오기를 기다리고 싶었다. 윤혜인은 윤아름의 얼굴을 떠올리다 갑자기 자지러지게 소리를 질렀다.“원진우!”윤혜인이 성까지 붙여서 부르자 아니나 다를까 원진우가 걸음을 멈추더니 윤혜인을 돌아봤다. 윤혜인은 혀끝을 꽉 깨물었다. 피비린내가 혀끝에서 느껴져서야 윤혜인은 정신을 조금 차릴 수 있었다. 윤혜인의 목은 마르고 갈라져 있었다.“내가 누구 딸인지 생각해 본 적 없어요?”윤혜인을 보는 원진우의 눈빛에서 보기 드물게 두려움이 묻어났다. 비록 몇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윤혜인이 그 눈빛을 캐치하고는 반은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머지 반이야말로 윤혜인이 살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는 핵심이었다. 윤혜인은 원진우에게 고민할 기회도 주지 않고 꿋꿋하게 말했다.“삼촌, 그렇게 총명하신 분이 이미 눈치채고 계신 거 아니에요? 경천 오빠랑 나랑 친 남매가 아닌 건 알고 있잖아요. 아버지가 왜 직접 낳지 않고 남자아이를 입양했는지 생각해 본 적 없어요?”원진우가 윤혜인을 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혹시 지금 내 딸이라고 하고 싶은 거예요?”“머리는 썼는데 나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서 그렇게 쉽게 속지 않아요.”원진우가 이렇게 말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
턱에서 전해진 고통에 윤혜인은 호흡이 가빠졌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했다.“엄마 좀 만나게 해줘요... 딱 한 번만요... 그다음에는 어떻게 하든 다 좋아요...”“꿈도 꾸지 마요.”원진우가 윤혜인을 바닥으로 내팽개치더니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원진우가 여신으로 받드는 사람이 다른 남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았다니, 이런 오점은 반드시 지워야 했다.윤혜인은 턱이 빠질 것처럼 아팠지만 여전히 울면서 애원했다.“딱 한 번만요. 한 번만 엄마를 만나게 해줘요. 제발 부탁이에요... 죽어도 눈은 감고 죽어야죠...”원진우는 윤혜인이 죽음을 앞두고 자기 걱정보다는 엄마를 만나고 싶다는 말에 흥미를 느꼈다.“혜인 씨는 만나고 싶어도 아름이는 생각이 다를 수도 있죠.”이 말에 윤혜인이 고개를 저었다.“거짓말하지 마요. 엄마가 왜 나를 만나려 하지 않겠어요? 엄마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당신이 납치하면서 나를 버리지만 않았어도 우리는 행복하게 살았을 거라고요.”“명을 재촉하는 꼴이라니.”원진우가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그렇다면 만족시켜 줄게요.”원진우가 손뼉을 치자 대문 하나가 열렸다. 불빛이 들어와서야 윤혜인은 지금 있는 곳이 냉동창고라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원진우는 전혀 추위를 타지 않았다. 특수 제작한 옷을 입고 있어 냉동창고에 있어도 추위를 막을 수 있었다. 까만 옷을 입은 사람이 휠체어를 밀고 들어왔다. 하지만 반사 때문에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 누군지 잘 보이지 않았다. 원진우가 그쪽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받아와 가까이 밀고 와서야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윤혜인은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릴 적 기억들이 물밀듯 밀려왔다. 여자가 자장가를 부르며 아이를 달래는 장면, 여자가 어린 윤혜인의 손을 잡고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는 장면이 떠올랐다. 시간이 흘러도 여자의 얼굴은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윤혜인과 자매라고 해도 믿을 사람이 적지 않을
“당신...”윤혜인이 이를 악물었다. 너무 흥분해서 그런지 이 말을 빼고는 다른 말이 나가지 않았다.“급해할 거 없어요. 천천히 해요.”원진우가 오히려 웃으며 윤혜인을 다독였다. 윤혜인은 손에 칼만 있었다면 앞에 앉아 있는 이 남자를 죽이고 싶었지만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니, 칼이 있다고 해도 절대 이 남자를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경계가 삼엄한 배씨 정원에서 윤혜인을 납치했다는 건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말이었다. 윤혜인은 속으로 원망해도 흥분해도 쓸데없다고 자기 자신을 타일렀다. 이런 남자를 상대하려면 최대한 차분함을 유지하며 기회를 찾아야 했다. 윤혜인은 주먹을 꽉 움켜쥐는 것으로 최대한 차분해지려 애썼다.“왜 나를 죽이려는 거예요?”윤혜인이 물었다. 이 문제가 약간은 바보 같아 보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원진우가 윤혜인을 죽이고 싶어 하는 이유라면 아마도 윤혜인이 윤아름의 아이여서일 것이다. 그리고 윤혜인이 관찰한 데 의하면 원진우는 총명한 사람을 싫어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멍청한 척, 무서운 척하며 상대의 경계심을 푸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사실 윤혜인도 원진우가 어떻게 윤혜인이 어릴 때 찾아온 건지 알고 싶었다.원진우는 순진해 보이는 윤혜인의 얼굴을 보며 온화하게 웃었다.“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점이 생기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죠. 윤혜인 씨의 존재가 딱 그 오점이거든요.”“...”윤혜인은 할 말을 잃었다. 원진우는 미친 게 틀림없었다. 윤혜인이 입술을 앙다물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어릴 때는 어떻게 찾아온 거예요?”“그때는 우연히 마주친 거예요.”원진우가 웃으며 말했다.“양아버지가 혜인 씨를 그렇게 보호할 줄은 몰랐는데. 명이 질기네요.”원진우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웃음이 점점 음침해졌다.“춥디추운 그날 밤에도 죽지 않고 살았고, 쓰레기 봉지에 담아놔도 안 죽고 살아있으니...”윤혜인이 화들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당신이었어요...?”저 정도면 답을 준 거나 마
이에 양아버지는 남자가 어린 윤혜인을 노린다는 걸 확신했다. 그 시절 화려한 옷을 입고 비싼 차를 끌고 다니는 남자를 유괴범이라 외친다면 믿을 사람도 없을뿐더러 성가신 일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작은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돈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런 짓을 절대 하지 않을 거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그러니 이 남자도 대담하게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양아버지는 남자가 느긋하게 두 사람을 향해 걸어오자 얼른 어린 윤혜인을 안고 앞으로 뛰기 시작했다. 어린 윤혜인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길이 없었기에 케이크가 바닥에 떨어지자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아빠, 케이크... 케이크...”아이의 눈에 케이크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어린 윤혜인이 눈시울을 붉히며 망가진 케이크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양아버지의 품에서 벗어나려 하자 양아버지가 숨을 헐떡이며 다독였다.“착하지. 아빠가 다시 사줄게.”어린 윤혜인은 너무 속상해 양아버지의 몸에 엎드린 채 양아버지의 등 뒤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거리를 내다봤다. 어린 윤혜인은 양아버지가 왜 갑자기 이렇게 뛰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양아버지의 당황한 모습을 보며 이내 얌전하게 양아버지의 목을 감싸더니 어깨에 기대어 북받치는 서러움을 꾹꾹 눌렀다. 어린 윤혜인은 나이가 어렸기에 양아버지처럼 곧 들이닥칠 위험을 감지하지는 못했다. 차갑고 끈적한 구덩이에 빠져있는 어린 윤혜인은 빨간 벨벳 슈트를 입은 남자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윤혜인은 너무 무서워 눈을 부릅뜬 채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두려움과 울분이 목에 걸려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 남자는 5미터쯤 떨어진 곳에 멈추더니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진 다리를 들더니 양아버지의 얼굴에 던져버렸다.“허허.”남자가 음침하게 웃더니 제 딴에는 재밌다고 생각하는 말을 내뱉었다.“그러게 누가 그렇게 빨리 달리래? 그러니까 다리까지 나가떨어지는 거 아니야.”남자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먹구름이 밀려오
칠흑 같은 밤과 뼈저린 추위, 그리고 아까 맞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비까지, 모든 상황이 똑같이 맞아떨어졌다. 양아버지가 어린 윤혜인을 안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길에서 달리다가 바닥에 철퍼덕 넘어졌다. 작고 연약한 어린 윤혜인은 포물선을 그리다 옆에 있던 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의 몸과 얼굴은 흙이 잔뜩 묻었고 무성한 갈대에 가려져 시커먼 진흙과 한 몸이 되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이 겨우 몸을 일으켜 양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려는데 양아버지가 어린 윤혜인을 향해 힘껏 고개를 저었다. 넘어져서 몸을 다친 양아버지는 몸이 찢어질 듯이 아팠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어린 윤혜인을 안았던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어린 윤혜인은 그런 양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구덩이에 빠져있는 걸 양아버지도 분명히 봤는데 양아버지가 왜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내달리는지 말이다. 어린 윤혜인은 그렇게 넋을 놓고 한참 동안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빨간 스포츠카가 하늘이 떠나갈 것 같은 엔진소리와 함께 양아버지 뒤를 쫓았다. 앞에서 달리던 양아버지는 그렇게 차에 치여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은 양아버지의 다리가 몸에서 완전히 분리되더니 다른 곳으로 날아가는 걸 목격했다. 심지어 그중 한쪽이 어린 윤혜인 앞에 떨어졌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뭉개진 다리였다. 바닥에 쓰러진 양아버지의 얼굴도 어린 윤혜인을 향해 있었다. 눈을 부릅뜬 모습이 마치 절대 소리를 내면 안 된다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어린 윤혜인은 초점을 잃고 퀭한 양아버지의 두 눈을 보며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목구멍에 뭐가 걸린 것처럼 정말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어린 윤혜인은 죽을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범퍼가 깨진 스포츠카에서 빨간 벨벳 슈틀 입은 남자가 내려왔다. 어린 윤혜인은 얼굴은 매혹적이고 잘생긴 남자가 얼마나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르는지 똑똑히 보았다. 남자는 몸통이 절반 뜯어져 나간 양아버지를 이리저리 돌려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