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레퍼토리에 윤혜인은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지만, 꾹 참고 들었다.이준혁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임세희 배 속에 있는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야.”윤혜인은 차갑게 웃었다.“이준혁 씨, 내가 그렇게 멍청해 보여요? 준혁 씨 아이가 아니라고요. 그럼 왜 곁에 두고 보살펴 주고 있었는데요?”“세희를 데리고 나온 사람은 내가 맞아. 하지만 난 절대 불쌍해서 마음이 약해져서 데리고 나온 게 아니야. 나에겐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어.”그 이유에 관해선 이준혁은 뜸을 들이며 말했다.“언젠가, 언젠가는 반드시 알려줄게. 아직은 아니야.”너무도 형편없는 변명에 윤혜인은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웃음이 터져 나오려고 했다.이젠 그녀에게 그럴싸한 변명도 지어내지 않았다.확실히 그녀도 들을 자격이 없었다.이준혁은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괜스레 불안해져 그녀의 손을 잡았다.“난 너랑 이혼할 생각 없어. 너도 자꾸만 내 곁을 떠날 생각하지 말아줘, 알겠어?”며칠간 그는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게 될까 봐 회사에서 잠을 잤다.밤잠을 이루지 못할 때 그는 자신이 윤혜인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날 이성을 잃은 것도 그녀가 그의 곁을 몰래 떠나려고 했기 때문이다.그는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윤혜인이 임신한 아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녀를 놓아주지 못하니 차라리 전부 받아들이자는 마음이었다.게다가 그는 은근히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일 수도 있다는 희망을 말이다.여하간에 그간 그는 몇 번이나 충동적으로 그녀의 몸을 탐했었다.교활한 한구운의 말만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하지만 그는 이미 그 아이가 진짜 그의 아이이든 다른 남자의 아이이든 전부 받아들이기로 다짐했고 윤혜인을 잘 타일러 방심하게 한 다음 그녀가 직접 털어놓게 할 생각이었다.윤혜인은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그동안 나 계속 속이고 있었어요?”‘계약 결혼은 무슨. 그냥 날 묶어두기 위한 수단이겠지!'이준혁은 솔
한참 울고 난 뒤 윤혜인은 소원을 부축하며 휴식 공간으로 왔다. 이준혁과 육경한은 그런 그녀들을 따라가지 않았다.두 사람에겐 할 말이 말았을 테니까.휴식 공간으로 온 뒤 윤혜인은 소원에게 물었다.“아저씨가 왜 그러셨는지 알고 있어?”소원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회사 일로...”“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소원은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전미경은 아파 집에 있었고 빈소는 그녀 혼자 지키고 있어야 했다.장례식까지 치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이 모든 상황이 여전히 꿈만 같았고 꿈에서 깨면 소진용이 집에 있을 것 같았다.그녀의 가족은 전처럼 오손도손 모여앉아 즐겁게 웃고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복도를 가득 채운 근조화환이 그녀에게 현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더는 그럴 일 없다고.두 사람은 다시 서로를 끌어안으며 통곡했다.떠나기 전 윤혜인은 소원에게 물었다.“소원아, 혹시 핸드폰 있어? 나 어디로 전화 한 통 좀 하고 싶은데.”소원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그녀는 윤혜인이 핸드폰조차 마음대로 쓰지 못할 줄은 몰랐다. 어쩌면 이준혁의 집착에 힘들게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윤혜인이 떠난 뒤 소원은 계속 빈소에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해가 저물자 빈소에 불청객이 찾아왔다.검은색 코트를 입은 진아연이 국화꽃을 들고 등장했다. 육경한은 마침 담배 태우러 나간 터라 진아연과 마주치지 못했다.진아연은 빈소로 들어가 인사하려고 했지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당장 꺼져!”비록 빈소에 남아 있는 사람은 얼마 없었지만 진아연은 소리치는 그녀에 조금 괘씸하며 악랄하게 말했다.“소원. 난 좋은 마음으로 인사드리려고 온 거야. 내 호의 무시하지 마.”소원은 두 눈을 부릅뜨며 화를 냈다.“더러운 게 감히 깨끗한 우리 아빠 빈소를 더럽히려고 하지 마.”“깨끗하다고?”진아연은 웃으며 되물었다.“넌 정말로 네 아빠가 깨끗하다고 생각해?”소원은 그녀를 상대하고 싶지 않아 차갑게
향로에 있던 뜨거운 재가 진아연의 머리카락에 닿았다.소원은 비록 진아연이 죽길 바랐지만 정말로 향로를 엎어버릴 마음은 없었다.이곳은 빈소였고 소진용의 영혼이 마지막으로 머물다 가는 곳이었다.그녀는 소진용이 보는 앞에서 이런 짓을 해서는 안 되었다.이런 악랄한 사람 때문에 감방에 갈 가치는 없었다.소원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당장 우리 부모님께 사과해!”뜨거운 김을 폴폴 내는 향로가 진아연의 얼굴과 가까워지고 뜨거운 열기가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진아연은 원래 소원이 자신의 말을 들으면 미쳐버릴 거로 생각했다. 그렇게 빈소에서 미쳐 죽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그러나 소원은 향로를 들어 그녀의 얼굴 앞으로 내밀었다.진아연은 소리를 질렀다.“이게 뭐 하는 짓이야! 미쳤어?!”진아연은 빈소에 아무도 없는 것을 원망했다.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일부러 사람이 없을 시간대에 찾아왔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그 순간.소원이 그녀의 머리를 눌러버렸고 이마의 잔머리가 향로에 따면서 꼬불꼬불해졌다.“아아악!”놀란 진아연은 하마터면 바지에 실수할 뻔했고 처량하게 소리를 질렀다.“아아악! 알았어! 할게! 사과할게!”“미안해, 내가 미안해. 내가 네 부모님을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었어. 부모님이 돌아가신 거 겹경사라고 해서는 안 되었어.”“사과했잖아.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소원은 손을 놓았다. 그러자 진아연은 뒤로 털썩 주저앉았다.진아연의 얼굴은 향로의 뜨거운 열기에 빨갛게 되었고 돼지기름이라도 바른 듯 얼굴이 번들거렸다.소원은 놀라 멍하니 앉아 있는 진아연을 보며 차갑게 말했다.“꺼져. 우리 아빠 빈소 더럽히지 말고!”“알았어. 갈게, 갈게...”겁먹은 진아연은 기어가듯 나가버렸다.하지만 속으로는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알고 보니 소원은 그저 그녀에게 겁주기 위해 향로를 들이밀었던 것이었다.그 탓에 그녀는 소원의 앞에서 모든 체면을 깎이게 되었다.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그녀는 고개를 돌려 소원을 노려보았다
소원이 여기서 죽는다고 해도 진아연은 혐의를 벗어날 수 있었다.그러나 지금 상황은 반대였다. 바닥에 누운 사람은 소원이 아닌 그녀였다.진아연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억울하여 미친 사람처럼 소원에게 돌진하려고 했다.“개X아!!!”진아연은 눈조차 뜨기 힘들었기에 소원의 위치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고 그대로 다시 넘어졌다.팔이 바닥에 먼저 닿고 물집은 다시 터져버렸다.누런 고름이 바닥에 묻어났고 물집 껍질도 쓸려 떨어져 향로 가루에 닿았다.순간 엄청난 고통이 잔아연에게 전해졌다.“아아악!!!”바닥에 누운 진아연은 팔을 들었다. 이리저리 뒹굴 엄두도 나지 않았다.‘너무 아파!'그 고통은 칼로 살을 베어내는 것보다 천배 만배였다.진아연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상태로 봐선 얼굴을 괜찮을 거라고. 하지만 계속 버티고 있다간 무조건 얼굴이 망가질 거라고.순간 그녀는 모든 것을 다 인정했다.“아악! 그래, 맞아! 난 원래 널 향로로 밀어버리려고 했어!”계속 버티다간 그녀는 고통 속에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살아만 있으면 그녀는 언제든지 소원을 처리할 수 있었다.소원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난 널 그냥 보내주려고 했는데 넌 날 향로에 밀어버리려고 했다고. 감히 우리 아빠 앞에서 날 죽이려고 했던 거야? 우리 아빠의 영혼이 아직 이 세상에 있는데 그렇게 가만히 내버려 둘 것 같아?!”소진용을 언급하자 진아연은 이상하게도 제 발이 저렸다.소원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날 해치려고 한 게, 정말 이것뿐이야?”진아연은 흠칫했다.함부로 입을 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소원을 해치려고 한 일이 너무도 많아 어떤 대답을 바라는지 몰랐기 때문이다.소원은 그녀의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진아연이 그녀가 어떤 일을 말하는지 모르는 것 같아 직설적으로 말해주었다.“김재성도 네가 시켜서 날 모함하게 했지?”“진찬성도 네가 구치소에 사람을 보내라고 시켜서 나랑 배 속에 있는 아이 죽이려고
진아연의 얼굴과 상반신은 전부 물집과 피고름이 덕지덕지 붙어 있어 아주 흉측해 보였다.그럼에도 진아연은 소원을 모함하고 있었다.“살려줘요! 얼른 날 살려줘요! 이 미친 여자가 정신줄을 놓고 날 죽이려고 해요! 엉엉엉...”진아연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거기다 무서운 얼굴 때문인지 처참하다는 두 글자가 그녀에게 어울렸다.아쉽게도 진아연은 눈을 뜨지 못했고 육경한의 표정도 볼 수 없었다.만약 소원과의 대화를 전부 듣지 못한 거라면 진아연은 또 한 번 그를 속여 넘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육경한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진아연, 나 전부 듣고 있었어.”그의 한 마디에 진아연은 경직되었다.순간 서늘한 한기가 바닥에서 온몸으로 퍼지는 것 같았다.“아니에요... 경한 씨... 그런 거 아니에요. 소원이가 날 협박해서 그렇게 말한 것뿐이에요... 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고요...”진아연은 눈물을 흘렸다. 눈물은 짰다. 상처에 닿자마자 소금이라도 뿌린 것처럼 아파 이를 빠득 갈았다. 그 모습은 아주 추하고 처참해 보였다.그러나 육경한은 더는 그녀에게 마음 약해지지 않았다. 차가운 얼굴로 그녀를 보면서 뼈가 시리도록 싸늘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진아연, 내가 전에도 말했지. 선 넘지 말라고.”진아연이 죽인 소원의 아이는 그의 아이기도 했다. 그의 아이!그 아이만 생각하면 육경한은 진아연을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진아연의 몸에 손을 대는 것조차 싫었다.더러웠기 때문이다.“경한 씨... 정말로 소원이가 날 죽이려고 했다고요. 난 살기 위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 일들은 나랑 연관이 없다고요... 정말이에요...”“찬성 오빠도 멋대로 찾아가 그런 일을 저지른 거라고요! 나랑 아무런 관계도 없어요!”지금 이런 상황에 남매간의 정이라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진아연은 지금의 자리만 지킬 수 있다면 진찬성은 물론이고 친아버지마저 버릴 수 있었다.“지금 상황에서도 날 계속 속일 생각하는 거야?”육경한은 눈을 뜨지 못하는 그녀
그녀는 육경한이 분명 체면을 더 중히 여길 거로 생각했다.육경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진아연은 내 아내가 아니야. 나 결혼 안 했어.”소원은 쓸데없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고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우리 엄마가 어느 병원에 있냐고 물었잖아. 빨리 말해, 지금 보러 갈 거니까.”전미영이 입원한 일은 육경한 말고는 아무도 그녀를 속일 리가 없었다.육경한은 그녀에게 설명했다.“난 해치려고 한 적 없어.”그는 그저 소원이 충격을 받아 현실을 못 받아들이게 될까 봐 숨긴 것이었다.소원은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마저 역겨웠다. 흐릿한 시야로 환각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반드시 정신을 잃게 전에 엄마를 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녀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지금 보러 갈 거라고.”육경한이 말했다.“내가 데려다줄게.”밖으로 나오자 진아연이 아직도 바닥에 누워 울면서 차에 올라타기를 거부하고 있었다.진아연은 소종이 자신을 어디로 데리고 가는지 몰랐기에 너무도 무서웠고 울면서 말했다.“나 경한 씨 만나게 해줘! 경한 씨를 만나야겠다고!”육경한을 발견한 소종이 물었다.“대표님, 어떻게 할까요?”진아연은 들려오는 소종의 목소리에 미친 듯이 기어 다니면서 팔을 휘적거렸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경한 씨, 나한테 이러면 안 되잖아요. 그때 경한 씨를 구해준 사람이 누군지 잊었어요?”육경한은 걸음을 멈추었다. 운전 기사에게 먼저 소원을 데리고 차에 올라타라고 했다.진아연은 바닥에서 계속 울면서 애원했다.“나야! 바로 나라고! 육경한, 생명의 은인을 이렇게 대하면 안 되는 거잖아!”육경한은 진아연이 자신을 구해줬던 일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진아연, 그동안 내가 잘해준 거로는 부족한 거야?”은혜를 갚기 위해 그는 진아연이 돈을 펑펑 써도 신경 쓰지 않았고 몇백억에 달하는 호화로운 저택마저 아낌없이 선물해 주었다.결혼식을 취소하기로 결정한 후에도 그는 이미 계약서를 만들어 두었다. 그를 구해준 대가로 재산 3
감시실 안에서 슬픔이 짙게 깔린 소원을 바라보는 육경한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그녀를 안아주고 싶지만 이젠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추모관에 차를 세운 육경한은 잠든 소원을 발견했다. 이틀 밤낮을 지새우다가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것이다.육경한은 평온하게 잠든 소원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차마 깨울 수가 없어 차 안에서 잠들게 내버려두었다. “흑흑...” 소원은 무슨 꿈을 꾸는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몸은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고 억눌린 흐느낌이 듣는 사람조차 괴롭게 했다.그 순간 육경한의 심장은 쇠사슬로 단단히 옥죄인 듯 피와 살을 조여오는 압박감에 얼굴이 죽은 사람처럼 하얗게 질려버렸다. 그는 손을 뻗어 끝내 참지 못하고 오랫동안 바라던 소원을 품에 꼭 안았다.소원은 꿈속에서 그를 누구로 생각하는지 꼭 껴안았다.육경한은 긴 한숨을 내쉬며 혹시라도 소원이 깰까 봐 꼼짝하지 않았다.잠시 후 육경한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소원도, 그도 오랫동안 잠을 자지 못했다. 내내 자신의 마음을 어지럽혔던 사람이 품에 안기자 마침내 긴장을 풀고 잠이 들었다. 남자의 길고 고른 숨소리가 들리자 소원은 갑자기 눈을 떴고 어둠 속에서 눈이 환하게 빛났다. 맞다, 그녀는 전혀 잠이 들지 않았다. 어떻게 이 악마 같은 남자가 곁에 있는데 잠을 잘 수 있겠나! 그녀의 가녀린 몸은 육경한의 팔에서 쉽게 풀려났고 육경한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 무방비 상태로 잠이 들어 있었다. 달빛이 그의 차갑고 잘생긴 얼굴을 비추었다. 저 매혹적인 얼굴 뒤에 악랄하고 매정한 심장을 감추고 있었다.소원은 운전석의 안전벨트를 바라보았고 마음 한구석에서 그를 죽여야겠다는 사악한 생각이 솟구쳤다. 그녀의 모든 고통과 절망, 그리고 소씨 가문의 멸망은 모두 이 악마 같은 남자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악의 근원을 죽여야만 부모님이 편히 잠들 수 있었다. 그를 죽인 후 자신도
그녀의 얼굴을 손에 가두고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득했다.“소원아, 이제 다 그만하자. 난 널 놓지 않을 거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부탁이 아니라 선포였다.이 순간에 그런 말을 하면 그녀가 얼마나 자신을 원망할지 알면서도 그는 해야만 했다.어차피 자신이 뭘 하든 그녀는 미워할 테니까.“언젠가 너에게 기회를 줄게.”나를 죽일 수 있는 기회.소원은 절망하며 고통에 잠식된 목소리로 흐느꼈다.“육경한, 난 죽어야만 당신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거야?”“꿈도 꾸지 마!”육경한의 눈꺼풀이 파들 떨리며 소리쳤다.“네가 감히 죽으려고 하면 널 도와줬던 사람들 한 명도 무사하지 못할 거야!”소원은 그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죽는 건 두렵지 않지만 늘 증오와 고통을 안고 사는 건 두려웠다.육경한은 그녀를 흔들며 경고했다.“내 말 기억해.”소원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하늘이 밝아오고 오늘은 소진용이 화장되는 날이었다.이준혁, 윤혜인도 마지막 작별을 위해 찾아왔다.화장이 끝난 후 소원은 나지막이 말했다.“육경한, 아빠의 마지막 소원은 바다에 뿌려지는 거였어.”육경한은 얼굴을 찌푸릴 뿐 차마 거절의 말을 뱉을 수가 없었다.차에 타기 전, 소원은 윤혜인에게 말했다.“혜인아, 네 절친이 될 수 있었던 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었어.”한 마디에 윤혜인의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지고 눈물이 비처럼 쏟아졌다.윤혜인은 소원의 손목을 잡고 흐느끼며 말했다.“내가 여기서 기다릴게.”소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육경한의 차에 탔다.육경한은 모든 일을 뒤로 하고 그녀의 곁을 조금도 떠나지 않은 채 지켜보았다.소원은 소매를 걷어 올린 그의 팔에 이빨에 물린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보았다. 안쪽 살이 뒤집힌 걸 보아 상처를 치료하지 않은 것 같았다.육경한은 그녀의 시선을 알아차리고 낮게 말했다.“남겨두려고.”이빨 자국을 말하는 것이다.소원은 충동적으로 그를 깨물었던 걸 후회하며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그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