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레퍼토리에 윤혜인은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지만, 꾹 참고 들었다.이준혁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임세희 배 속에 있는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야.”윤혜인은 차갑게 웃었다.“이준혁 씨, 내가 그렇게 멍청해 보여요? 준혁 씨 아이가 아니라고요. 그럼 왜 곁에 두고 보살펴 주고 있었는데요?”“세희를 데리고 나온 사람은 내가 맞아. 하지만 난 절대 불쌍해서 마음이 약해져서 데리고 나온 게 아니야. 나에겐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어.”그 이유에 관해선 이준혁은 뜸을 들이며 말했다.“언젠가, 언젠가는 반드시 알려줄게. 아직은 아니야.”너무도 형편없는 변명에 윤혜인은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웃음이 터져 나오려고 했다.이젠 그녀에게 그럴싸한 변명도 지어내지 않았다.확실히 그녀도 들을 자격이 없었다.이준혁은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괜스레 불안해져 그녀의 손을 잡았다.“난 너랑 이혼할 생각 없어. 너도 자꾸만 내 곁을 떠날 생각하지 말아줘, 알겠어?”며칠간 그는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게 될까 봐 회사에서 잠을 잤다.밤잠을 이루지 못할 때 그는 자신이 윤혜인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날 이성을 잃은 것도 그녀가 그의 곁을 몰래 떠나려고 했기 때문이다.그는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윤혜인이 임신한 아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녀를 놓아주지 못하니 차라리 전부 받아들이자는 마음이었다.게다가 그는 은근히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일 수도 있다는 희망을 말이다.여하간에 그간 그는 몇 번이나 충동적으로 그녀의 몸을 탐했었다.교활한 한구운의 말만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하지만 그는 이미 그 아이가 진짜 그의 아이이든 다른 남자의 아이이든 전부 받아들이기로 다짐했고 윤혜인을 잘 타일러 방심하게 한 다음 그녀가 직접 털어놓게 할 생각이었다.윤혜인은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그동안 나 계속 속이고 있었어요?”‘계약 결혼은 무슨. 그냥 날 묶어두기 위한 수단이겠지!'이준혁은 솔
한참 울고 난 뒤 윤혜인은 소원을 부축하며 휴식 공간으로 왔다. 이준혁과 육경한은 그런 그녀들을 따라가지 않았다.두 사람에겐 할 말이 말았을 테니까.휴식 공간으로 온 뒤 윤혜인은 소원에게 물었다.“아저씨가 왜 그러셨는지 알고 있어?”소원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회사 일로...”“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소원은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전미경은 아파 집에 있었고 빈소는 그녀 혼자 지키고 있어야 했다.장례식까지 치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이 모든 상황이 여전히 꿈만 같았고 꿈에서 깨면 소진용이 집에 있을 것 같았다.그녀의 가족은 전처럼 오손도손 모여앉아 즐겁게 웃고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복도를 가득 채운 근조화환이 그녀에게 현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더는 그럴 일 없다고.두 사람은 다시 서로를 끌어안으며 통곡했다.떠나기 전 윤혜인은 소원에게 물었다.“소원아, 혹시 핸드폰 있어? 나 어디로 전화 한 통 좀 하고 싶은데.”소원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그녀는 윤혜인이 핸드폰조차 마음대로 쓰지 못할 줄은 몰랐다. 어쩌면 이준혁의 집착에 힘들게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윤혜인이 떠난 뒤 소원은 계속 빈소에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해가 저물자 빈소에 불청객이 찾아왔다.검은색 코트를 입은 진아연이 국화꽃을 들고 등장했다. 육경한은 마침 담배 태우러 나간 터라 진아연과 마주치지 못했다.진아연은 빈소로 들어가 인사하려고 했지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당장 꺼져!”비록 빈소에 남아 있는 사람은 얼마 없었지만 진아연은 소리치는 그녀에 조금 괘씸하며 악랄하게 말했다.“소원. 난 좋은 마음으로 인사드리려고 온 거야. 내 호의 무시하지 마.”소원은 두 눈을 부릅뜨며 화를 냈다.“더러운 게 감히 깨끗한 우리 아빠 빈소를 더럽히려고 하지 마.”“깨끗하다고?”진아연은 웃으며 되물었다.“넌 정말로 네 아빠가 깨끗하다고 생각해?”소원은 그녀를 상대하고 싶지 않아 차갑게
향로에 있던 뜨거운 재가 진아연의 머리카락에 닿았다.소원은 비록 진아연이 죽길 바랐지만 정말로 향로를 엎어버릴 마음은 없었다.이곳은 빈소였고 소진용의 영혼이 마지막으로 머물다 가는 곳이었다.그녀는 소진용이 보는 앞에서 이런 짓을 해서는 안 되었다.이런 악랄한 사람 때문에 감방에 갈 가치는 없었다.소원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당장 우리 부모님께 사과해!”뜨거운 김을 폴폴 내는 향로가 진아연의 얼굴과 가까워지고 뜨거운 열기가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진아연은 원래 소원이 자신의 말을 들으면 미쳐버릴 거로 생각했다. 그렇게 빈소에서 미쳐 죽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그러나 소원은 향로를 들어 그녀의 얼굴 앞으로 내밀었다.진아연은 소리를 질렀다.“이게 뭐 하는 짓이야! 미쳤어?!”진아연은 빈소에 아무도 없는 것을 원망했다.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일부러 사람이 없을 시간대에 찾아왔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그 순간.소원이 그녀의 머리를 눌러버렸고 이마의 잔머리가 향로에 따면서 꼬불꼬불해졌다.“아아악!”놀란 진아연은 하마터면 바지에 실수할 뻔했고 처량하게 소리를 질렀다.“아아악! 알았어! 할게! 사과할게!”“미안해, 내가 미안해. 내가 네 부모님을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었어. 부모님이 돌아가신 거 겹경사라고 해서는 안 되었어.”“사과했잖아.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소원은 손을 놓았다. 그러자 진아연은 뒤로 털썩 주저앉았다.진아연의 얼굴은 향로의 뜨거운 열기에 빨갛게 되었고 돼지기름이라도 바른 듯 얼굴이 번들거렸다.소원은 놀라 멍하니 앉아 있는 진아연을 보며 차갑게 말했다.“꺼져. 우리 아빠 빈소 더럽히지 말고!”“알았어. 갈게, 갈게...”겁먹은 진아연은 기어가듯 나가버렸다.하지만 속으로는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알고 보니 소원은 그저 그녀에게 겁주기 위해 향로를 들이밀었던 것이었다.그 탓에 그녀는 소원의 앞에서 모든 체면을 깎이게 되었다.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그녀는 고개를 돌려 소원을 노려보았다
소원이 여기서 죽는다고 해도 진아연은 혐의를 벗어날 수 있었다.그러나 지금 상황은 반대였다. 바닥에 누운 사람은 소원이 아닌 그녀였다.진아연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억울하여 미친 사람처럼 소원에게 돌진하려고 했다.“개X아!!!”진아연은 눈조차 뜨기 힘들었기에 소원의 위치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고 그대로 다시 넘어졌다.팔이 바닥에 먼저 닿고 물집은 다시 터져버렸다.누런 고름이 바닥에 묻어났고 물집 껍질도 쓸려 떨어져 향로 가루에 닿았다.순간 엄청난 고통이 잔아연에게 전해졌다.“아아악!!!”바닥에 누운 진아연은 팔을 들었다. 이리저리 뒹굴 엄두도 나지 않았다.‘너무 아파!'그 고통은 칼로 살을 베어내는 것보다 천배 만배였다.진아연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 상태로 봐선 얼굴을 괜찮을 거라고. 하지만 계속 버티고 있다간 무조건 얼굴이 망가질 거라고.순간 그녀는 모든 것을 다 인정했다.“아악! 그래, 맞아! 난 원래 널 향로로 밀어버리려고 했어!”계속 버티다간 그녀는 고통 속에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살아만 있으면 그녀는 언제든지 소원을 처리할 수 있었다.소원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난 널 그냥 보내주려고 했는데 넌 날 향로에 밀어버리려고 했다고. 감히 우리 아빠 앞에서 날 죽이려고 했던 거야? 우리 아빠의 영혼이 아직 이 세상에 있는데 그렇게 가만히 내버려 둘 것 같아?!”소진용을 언급하자 진아연은 이상하게도 제 발이 저렸다.소원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날 해치려고 한 게, 정말 이것뿐이야?”진아연은 흠칫했다.함부로 입을 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소원을 해치려고 한 일이 너무도 많아 어떤 대답을 바라는지 몰랐기 때문이다.소원은 그녀의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진아연이 그녀가 어떤 일을 말하는지 모르는 것 같아 직설적으로 말해주었다.“김재성도 네가 시켜서 날 모함하게 했지?”“진찬성도 네가 구치소에 사람을 보내라고 시켜서 나랑 배 속에 있는 아이 죽이려고
진아연의 얼굴과 상반신은 전부 물집과 피고름이 덕지덕지 붙어 있어 아주 흉측해 보였다.그럼에도 진아연은 소원을 모함하고 있었다.“살려줘요! 얼른 날 살려줘요! 이 미친 여자가 정신줄을 놓고 날 죽이려고 해요! 엉엉엉...”진아연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거기다 무서운 얼굴 때문인지 처참하다는 두 글자가 그녀에게 어울렸다.아쉽게도 진아연은 눈을 뜨지 못했고 육경한의 표정도 볼 수 없었다.만약 소원과의 대화를 전부 듣지 못한 거라면 진아연은 또 한 번 그를 속여 넘어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육경한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진아연, 나 전부 듣고 있었어.”그의 한 마디에 진아연은 경직되었다.순간 서늘한 한기가 바닥에서 온몸으로 퍼지는 것 같았다.“아니에요... 경한 씨... 그런 거 아니에요. 소원이가 날 협박해서 그렇게 말한 것뿐이에요... 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고요...”진아연은 눈물을 흘렸다. 눈물은 짰다. 상처에 닿자마자 소금이라도 뿌린 것처럼 아파 이를 빠득 갈았다. 그 모습은 아주 추하고 처참해 보였다.그러나 육경한은 더는 그녀에게 마음 약해지지 않았다. 차가운 얼굴로 그녀를 보면서 뼈가 시리도록 싸늘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진아연, 내가 전에도 말했지. 선 넘지 말라고.”진아연이 죽인 소원의 아이는 그의 아이기도 했다. 그의 아이!그 아이만 생각하면 육경한은 진아연을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진아연의 몸에 손을 대는 것조차 싫었다.더러웠기 때문이다.“경한 씨... 정말로 소원이가 날 죽이려고 했다고요. 난 살기 위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 일들은 나랑 연관이 없다고요... 정말이에요...”“찬성 오빠도 멋대로 찾아가 그런 일을 저지른 거라고요! 나랑 아무런 관계도 없어요!”지금 이런 상황에 남매간의 정이라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진아연은 지금의 자리만 지킬 수 있다면 진찬성은 물론이고 친아버지마저 버릴 수 있었다.“지금 상황에서도 날 계속 속일 생각하는 거야?”육경한은 눈을 뜨지 못하는 그녀
그녀는 육경한이 분명 체면을 더 중히 여길 거로 생각했다.육경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진아연은 내 아내가 아니야. 나 결혼 안 했어.”소원은 쓸데없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고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우리 엄마가 어느 병원에 있냐고 물었잖아. 빨리 말해, 지금 보러 갈 거니까.”전미영이 입원한 일은 육경한 말고는 아무도 그녀를 속일 리가 없었다.육경한은 그녀에게 설명했다.“난 해치려고 한 적 없어.”그는 그저 소원이 충격을 받아 현실을 못 받아들이게 될까 봐 숨긴 것이었다.소원은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마저 역겨웠다. 흐릿한 시야로 환각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반드시 정신을 잃게 전에 엄마를 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녀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지금 보러 갈 거라고.”육경한이 말했다.“내가 데려다줄게.”밖으로 나오자 진아연이 아직도 바닥에 누워 울면서 차에 올라타기를 거부하고 있었다.진아연은 소종이 자신을 어디로 데리고 가는지 몰랐기에 너무도 무서웠고 울면서 말했다.“나 경한 씨 만나게 해줘! 경한 씨를 만나야겠다고!”육경한을 발견한 소종이 물었다.“대표님, 어떻게 할까요?”진아연은 들려오는 소종의 목소리에 미친 듯이 기어 다니면서 팔을 휘적거렸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경한 씨, 나한테 이러면 안 되잖아요. 그때 경한 씨를 구해준 사람이 누군지 잊었어요?”육경한은 걸음을 멈추었다. 운전 기사에게 먼저 소원을 데리고 차에 올라타라고 했다.진아연은 바닥에서 계속 울면서 애원했다.“나야! 바로 나라고! 육경한, 생명의 은인을 이렇게 대하면 안 되는 거잖아!”육경한은 진아연이 자신을 구해줬던 일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진아연, 그동안 내가 잘해준 거로는 부족한 거야?”은혜를 갚기 위해 그는 진아연이 돈을 펑펑 써도 신경 쓰지 않았고 몇백억에 달하는 호화로운 저택마저 아낌없이 선물해 주었다.결혼식을 취소하기로 결정한 후에도 그는 이미 계약서를 만들어 두었다. 그를 구해준 대가로 재산 3
감시실 안에서 슬픔이 짙게 깔린 소원을 바라보는 육경한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그녀를 안아주고 싶지만 이젠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추모관에 차를 세운 육경한은 잠든 소원을 발견했다. 이틀 밤낮을 지새우다가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것이다.육경한은 평온하게 잠든 소원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차마 깨울 수가 없어 차 안에서 잠들게 내버려두었다. “흑흑...” 소원은 무슨 꿈을 꾸는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몸은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고 억눌린 흐느낌이 듣는 사람조차 괴롭게 했다.그 순간 육경한의 심장은 쇠사슬로 단단히 옥죄인 듯 피와 살을 조여오는 압박감에 얼굴이 죽은 사람처럼 하얗게 질려버렸다. 그는 손을 뻗어 끝내 참지 못하고 오랫동안 바라던 소원을 품에 꼭 안았다.소원은 꿈속에서 그를 누구로 생각하는지 꼭 껴안았다.육경한은 긴 한숨을 내쉬며 혹시라도 소원이 깰까 봐 꼼짝하지 않았다.잠시 후 육경한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소원도, 그도 오랫동안 잠을 자지 못했다. 내내 자신의 마음을 어지럽혔던 사람이 품에 안기자 마침내 긴장을 풀고 잠이 들었다. 남자의 길고 고른 숨소리가 들리자 소원은 갑자기 눈을 떴고 어둠 속에서 눈이 환하게 빛났다. 맞다, 그녀는 전혀 잠이 들지 않았다. 어떻게 이 악마 같은 남자가 곁에 있는데 잠을 잘 수 있겠나! 그녀의 가녀린 몸은 육경한의 팔에서 쉽게 풀려났고 육경한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 무방비 상태로 잠이 들어 있었다. 달빛이 그의 차갑고 잘생긴 얼굴을 비추었다. 저 매혹적인 얼굴 뒤에 악랄하고 매정한 심장을 감추고 있었다.소원은 운전석의 안전벨트를 바라보았고 마음 한구석에서 그를 죽여야겠다는 사악한 생각이 솟구쳤다. 그녀의 모든 고통과 절망, 그리고 소씨 가문의 멸망은 모두 이 악마 같은 남자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악의 근원을 죽여야만 부모님이 편히 잠들 수 있었다. 그를 죽인 후 자신도
그녀의 얼굴을 손에 가두고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득했다.“소원아, 이제 다 그만하자. 난 널 놓지 않을 거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부탁이 아니라 선포였다.이 순간에 그런 말을 하면 그녀가 얼마나 자신을 원망할지 알면서도 그는 해야만 했다.어차피 자신이 뭘 하든 그녀는 미워할 테니까.“언젠가 너에게 기회를 줄게.”나를 죽일 수 있는 기회.소원은 절망하며 고통에 잠식된 목소리로 흐느꼈다.“육경한, 난 죽어야만 당신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거야?”“꿈도 꾸지 마!”육경한의 눈꺼풀이 파들 떨리며 소리쳤다.“네가 감히 죽으려고 하면 널 도와줬던 사람들 한 명도 무사하지 못할 거야!”소원은 그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죽는 건 두렵지 않지만 늘 증오와 고통을 안고 사는 건 두려웠다.육경한은 그녀를 흔들며 경고했다.“내 말 기억해.”소원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하늘이 밝아오고 오늘은 소진용이 화장되는 날이었다.이준혁, 윤혜인도 마지막 작별을 위해 찾아왔다.화장이 끝난 후 소원은 나지막이 말했다.“육경한, 아빠의 마지막 소원은 바다에 뿌려지는 거였어.”육경한은 얼굴을 찌푸릴 뿐 차마 거절의 말을 뱉을 수가 없었다.차에 타기 전, 소원은 윤혜인에게 말했다.“혜인아, 네 절친이 될 수 있었던 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었어.”한 마디에 윤혜인의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지고 눈물이 비처럼 쏟아졌다.윤혜인은 소원의 손목을 잡고 흐느끼며 말했다.“내가 여기서 기다릴게.”소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육경한의 차에 탔다.육경한은 모든 일을 뒤로 하고 그녀의 곁을 조금도 떠나지 않은 채 지켜보았다.소원은 소매를 걷어 올린 그의 팔에 이빨에 물린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보았다. 안쪽 살이 뒤집힌 걸 보아 상처를 치료하지 않은 것 같았다.육경한은 그녀의 시선을 알아차리고 낮게 말했다.“남겨두려고.”이빨 자국을 말하는 것이다.소원은 충동적으로 그를 깨물었던 걸 후회하며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그녀
남자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은 채 한 걸음 다가왔다.차갑고 섬뜩한 육경한의 검은 눈동자를 마주하고도 속으로 긴장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만약 그가 화를 낸다면 지금 그의 집에 있는 상황에서 소원이 저항하기는 매우 힘들 것이다.“지금 나 위협하고 있는 거야?”육경한이 입을 떼자마자 강렬한 압박감이 그녀를 덮쳤다.소원은 무의식적으로 손에 힘을 주며 평온한 눈빛으로 그의 시선을 마주한 채 대답했다.“위협이 아니야. 단지 거래지. 내가 현재를 지켜달라고 부탁하는 이유는 현재가 유진이의 생명의 은인이라서야. 그때 그 해변 절벽에서 현재가 없었다면 나는 이미 유진이와 함께 떨어져 죽었을 거야. 현재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와 유진이는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고.”소원은 육경한의 약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 그를 자극하는 것은 자신에게도, 서현재에게도 불리했다.지금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유진이의 안전을 보장하면서 동시에 육경한에게 서현재의 안전도 지켜달라고 하는 것이다.이건 육경한에게 있어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 그녀에게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변화무쌍한 서울에서 뿌리 없는 두 사람이 스스로 살아남으려면 정말 쉽지 않았다.더군다나 그녀는 이미 수많은 적을 만들어 놓은 상태였으니 말이다.비록 그 적들이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지만 소원은 어쩔 수 없이 맞서야만 했다.지난밤 만약 영숙의 말이 아니었다면 소원은 지금 이토록 빠르게 마음을 고치지 못했을 것이다.영숙이 말했다.“스스로 살아가는 게 고결하게 보일 거라는 착각은 하지 마. 오히려 스스로만 의지해서 초라하게 산다면 사람들의 조롱거리밖에 안 될 거야. 똑똑한 사람은 자신에게 유리한 모든 기회를 붙잡는 법이지. 법을 어기지만 않으면 자신을 도울 수 있는 길은 옳은 길이야. 쓸데없는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 쓸 필요 없어...”영숙의 위로에 소원은 많은 것을 깨달았다.그동안 수없이 부딪혀 왔던 벽들, 이제는 좀 더 똑똑하게 자신이 지키고 싶은 사람들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
소원은 눈앞에 놓인 담백하고 향긋한 보양식을 보며 희미하게 쓴웃음을 지었다.‘몸이 다쳤을 때는 보양식으로 보충할 수 있다지만 마음은 어떡해야 하지? 상처 입은 마음은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비록 입맛은 없었지만 그녀는 억지로 음식을 삼켰다.건강한 몸이 필요했다.절식하며 저항하는 건 미성숙한 아이들이나 할 짓이었다.약해진 몸으로는 아무런 계획도 세울 수 없고 제대로 된 판단도 할 수 없었다.억지로 먹긴 했지만 그 양은 겨우 생명을 유지할 정도에 불과했다.정상적인 사람이 배부르게 먹을 양에는 한참 못 미쳤다.남은 음식을 도우미가 들고 나갈 때, 육경한은 그 모습을 흘낏 보며 시선을 거두고 말했다.“연근을 좋아하니까 다음 끼니엔 연근 요리를 준비해.”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지만 도우미는 속으로 생각했다.‘연근 같은 사소한 취향까지 기억하다니... 이 여자는 정말 육 대표님께 특별한 존재임이 틀림없어.’다음 날 아침, 소원은 아침 식사를 마친 뒤 도우미에게 말했다.“육 대표님을 불러주세요.”그녀에게는 삼일이나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유진이의 안전은 단 한순간도 미룰 수 없는 문제였다.곧이어 육경한이 방 안에 들어서자 방 안의 분위기는 한순간에 무겁게 가라앉았다.소원이 입을 열었다.“조건 받아들일게.”이 결정에 육경한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사람은 약점이 있으면 잡히기 마련이었으니 말이다.소원의 약점은 언제나 그녀의 소중한 사람들이었다.그녀는 어머니를 포기할 수도, 아이를 포기할 수도 없었다.그런 사람들이 있는 한, 소원을 굴복시키는 건 어렵지 않았다.하지만 육경한은 그동안 그런 수를 쓰지 않았다.자신에게 아직 그 알량한 자신감이 남아 있었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결국 육경한은 그 자신감이 얼마나 허망한지 깨달았고 소원은 그에게 남아 있는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하지만 나도 조건이 있어.”소원이 덧붙였다.육경한은 그녀가 조건을 제시하는 일에 대해 전혀 놀라지 않았다.오히려 조건을 내놓지 않는다면 그건 소원
육경한은 눈앞의 여자를 산산조각 내버리고 싶을 정도로 분노와 욕망이 뒤섞였다.조금 전의 짧은 접촉만으로도 그의 온몸의 세포가 깨어난 듯했다.그녀를 지금 이 자리에서 눌러 제 몸 어디 한 부분에라도 붙여두고 싶었다.다시는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더는 다른 남자를 유혹하지 못하도록 말이다.특히 그녀가 술에 취해 무의식적으로 내뱉었던 ‘현재야’라는 말은 마치 날카로운 가시처럼 그의 가슴속을 파고들었다.그는 지금 당장 서현재를 붙잡아 바다 깊숙이 가라앉히고 싶은 충동을 억누를 수 없었다.“육경한, 양심에 손을 얹고 우리 모자에게 부끄럽지 않아? 왜 내가 당신에게 빌어야 하지? 유진이는 당신 아들 아니야?!”소원은 눈가가 붉게 달아오를 정도로 격분하며 그를 노려보았다.눈앞의 이 남자가 자신을 위협하는 모습에 깊은 증오를 느꼈다.육경한은 차분히 말했다.“내가 두 사람에게 잘못한 건 인정해. 하지만 네가 나한테 그걸 만회할 기회를 준 적이 없었잖아.”그의 말은 소원에게는 터무니없게 들렸다.그렇지만 육경한은 개의치 않았다.소원을 곁에 둘 수만 있다면 비웃음을 사는 것쯤은 상관없었다.“네가 유진이의 엄마로 돌아와 내 곁에 머문다면 내가 필요한 권리를 줄 거야. 하지만 네가 유진이의 엄마가 아니라면 그 권리는 너와 아무 상관없어.”육경한의 말은 현실적이고도 냉정했다.교환을 원하는 것이었다.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무언가를 희생해야 한다고 그는 분명히 했다.곧 소원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육경한, 당신 왜 이래? 이건 사랑이 아니야! 우리 둘 사이엔 사랑 따윈 없어!”극도로 지친 소원은 무력감을 느꼈다.육경한은 이기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지만 결과는 항상 같았다.그를 이길 수 없었고 심지어 서현재조차 위험에 빠져 있었다.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눈빛이 어두워진 채 육경한은 그녀의 상처를 조심스레 손끝으로 쓰다듬었다.“이제 와서 사랑이니 뭐니 하는 건 중요하지 않아.”그는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남자는 소원의 손가락을 단단히 얽으며 열 손가락을 맞물렸다.그리고 조금씩 그녀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가며 낮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그 키스는 어젯밤 일에 대한 대가야. 이제부터가 내가 내놓을 조건이야.”소원은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이번엔 또 뭘 하려는 거야!”“뭘 하겠어? 당연히...”눈을 가늘게 뜨더니 육경한은 고개를 숙였다.“널 가질 거야.”뒤이어 거칠고 압도적인 키스가 다시금 그녀에게 덮쳐왔다.이번 키스는 이전 것보다 훨씬 강렬하고 더 거침없었다.조금 전의 키스는 단순한 장난처럼 느껴질 정도였다.소원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남자의 가슴을 치며 몸부림쳤다.그녀의 손톱이 등과 목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남겼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남자는 소원을 침대 위로 강제로 밀어 눕히고 그녀의 다리를 가슴 위로 억누르며 반항할 여지를 완전히 차단했다.그의 뜨겁고 거친 키스는 소원의 입술에서 목덜미로 이어졌고 술에 취한 듯한 짙은 욕망이 가득했다.남자의 손은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부드러운 곡선을 타고 내려가며 탐욕스럽게 그녀를 더듬었다.서로 뒤엉킨 숨소리는 남자가 흥분했을 때만 내뱉는 거친 숨결이었다.정신이 아득해지며 소원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육경한이 이렇게 폭력적으로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분명 최근에는 자신과 거리를 두려는 태도를 보였던 그가 왜 갑자기 이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눈빛에 진한 욕망의 빛이 서린 채 육경한은 거친 숨을 내쉬며 그녀를 잠시 놓아주었다.“아까 나한테 물었었지? 내가 원하는 게 뭐냐고.”그는 낮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내 조건은 간단해. 널 내게 줘. 그러면 내가 유진이의 엄마로 만들어줄게.”소원은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멍해졌다.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유진이의 엄마’라니. 유진이는 원래부터 그녀의 아이다.‘난 이미 유진이의 엄마잖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혼란스러웠다.육경한은 소원이 자신의 말뜻을
소원의 숨이 순간 멎었다.물론이다. 당연히 유진이의 양육권을 원했다.그것만이 유진이의 안전을 완벽히 보장할 수 있는 길이었으니 말이다.유진이는 원래부터 몸이 약하고 허약했다.다른 사람이 조금만 속임수를 써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 있는 상황이었고 그래서 소원이 이렇게까지 모든 것을 걸고 방민아를 육경한 대표 부인 자리에서 끌어내리려는 것이었다.유진이의 몸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었다.게다가 의사는 유진이의 건강 상태가 많이 좋아졌으며 적합한 기증자를 찾는 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이런 상황에서 유진이를 반드시 자신의 곁으로 데려와야 했고 이 일이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소원은 평생을 후회할 것이었다.“나는 당연히...”하지만 소원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육경한이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막으며 조용히 ‘쉿’하고 말했다.약간 거친 그의 손가락 끝은 마치 사포처럼 꺼끌꺼끌한 촉감을 남겼고 전류가 흐르는 듯한 낯선 감각이 스쳤다.몸에 소름이 돋으며 소원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육경한은 가볍게 비웃으며 한 걸음 더 다가섰다.“원한다면 진심을 보여야지.”소원은 잠시 멍해졌다가 곧 한 발 더 물러섰다.“원하는 게 뭔데?”그녀가 다시 묻기도 전에 육경한의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육경한은 소원을 옷장 문에 밀어붙였고 열기가 느껴지는 입술이 붉게 부어오른 그녀의 입가에 닿았다.그것은 마치 시험하듯 시작되었고 이내 그녀의 입술로 깊숙이 파고들었다.술 냄새가 코를 찌르자 소원은 한순간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소원이 손발을 모두 사용해 그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육경한은 무릎으로 그녀의 두 다리를 꽉 누르고 한 손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잡아 거칠게 키스했다.그의 입술은 거칠었고 심지어는 물기까지 했다.소원은 그의 강압적인 키스에 벗어나려 몸부림쳤지만 키가 190cm에 육박하는 남자의 힘 앞에서는 그녀의 저항은 무력할 뿐이었다.결국 육경한의 입술이 소원의 것을 물어 피가 묻어났고 그것이 누구의 피인지 알 수 없었지만
잠시 동안 육경한은 소원이 자신을 속이고 있는지 판단할 수 없었다.그는 담담하게 소원의 얼굴빛을 살폈고 소원은 태연하게 말했다.“당신이 유진이의 안전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엄마인 내가 할 수밖에 없지. 내일...”“모든 사람들에게 당신들 모두의 진짜 모습을 보여줄 거야.”소원의 단호한 말투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육경한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어쩌면 그녀가 정말로 백업 파일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는 물었다.“그리고 나면?”소원은 잠시 멈칫했다.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육경한은 다시 입을 열었다.“네가 공개한다고 해도 연주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르지 않을 거야. 우리 누나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최악의 경우 해외로 나가 잠잠해질 때까지 시간을 보내다 돌아오면 그만이지. 연주의 이후 삶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거라고.”“방민아와 방민기도 마찬가지야. 방씨 가문이 뒤를 봐주고 있는데 네가 벌이는 이 작은 사건이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만약 돈과 인맥을 써서 이슈를 만들어낸다고 해도 무슨 의미가 있겠어?”육경한은 술잔을 내려놓으며 냉담하게 말했다.“그들의 대응 방식은 연주와 다를 게 없어. 이런 일들은 그들에게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할 거야.”그리고 그는 냉랭하게 덧붙였다.“소원, 꿈같은 소리 하지 마. 난 방민아와 결혼하지 않아도 다른 여자와 결혼할 거야. 근데 내가 그 여자들이 유진이에게 나쁜지 좋은지 일일이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해?”육경한의 말을 들어보니 생각지도 못했던 점들이 속속 보였다.그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지금 그녀가 가진 영상은 방민아를 육경한 대표님 부인 자리에서 내려오게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다음은? 또 그다음은?그녀가 그 사람들의 진짜 모습을 어떻게 판별할 수 있겠는가.결국 육경한이 유진이를 놓아주지 않는 이상 양육권은 여전히 그의 손에 있으며 잠재적인 위험은 피할 수 없었다.그녀는 잠시 혼란에 빠
하지만 곧 그녀는 이 생각을 부정했다.영숙을 의심할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이 안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영숙을 그렇게 의심하고 싶지는 않았다.만약 영숙이 소원을 해치려 했다면 기회는 많았을 것이다. 처음부터 도와줄 필요도 없었고 지금 같은 시점에 와서 그녀를 해칠 이유도 없었다.그렇다면 이건 분명 육경한이 알아챈 것이다.소원은 육경한이 이렇게까지 똑똑할 줄은 몰랐다.‘내가 육연주와 방민아를 몰래 찍어둘 줄 어떻게 알아챘지?’소원은 재빨리 손을 뻗어 그 초소형 카메라를 빼앗으려 했고 겨우 손에 넣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남자의 조용한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이미 소용없어.”확인해 보니 과연 카메라 안의 저장카드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생각해보면 당연했다. 육경한이 이걸 손에 넣고 안에 있는 내용을 봤다면 그녀에게 돌려줄 리 없었다.그 안의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은 그의 조카, 약혼녀, 그리고 그의 큰처남이었다.그들과의 관계가 워낙 가깝기에 육경한이 이들을 곤경에 빠뜨리도록 놔둘 리 없었다.소원은 고개를 돌려 말했다.“저장카드를 가져갔다면 그 안의 내용도 이미 보셨겠죠, 육 대표님.”“응, 봤어.”육경한은 솔직히 인정했다.“봤다면 당신 약혼녀가 한 말을 들었을 텐데요?”소원은 약간 흥분하며 물었다.“그 여자가 정말 유진이 새엄마로 적합하다고 생각해요?”육경한은 그 영상을 보고 난 뒤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하지만 이 순간, 문득 어젯밤 무의식중에 소원이 흘린 한마디가 떠올랐다.“현재야...”그리고 그동안 소원이 자신에게 얼마나 냉담했는지,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장난처럼 다루었는지, 그 안에 조금의 연민조차 없었던 것들이 떠올랐다.그래서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을 바꾸었다.“그 여자가 아니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될 거야. 유진이는 어쨌든 새엄마가 필요하니까. 누구도 유진이를 친자식처럼 보살필 수 없다면 차라리 나에게 가장 유리한 사람이 낫지.”이 말은 그야말로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자신의 아이를 이익의 발판으로 삼
소원은 그제야 마음이 약간 놓이는 듯했다.하지만 지금은 육경한과 이런 일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어젯밤, 소원이 영숙에게 시간에 맞춰 전화를 걸게 한 것은 방민아의 수를 깨뜨릴 수 있는 사람이 육경한 외에는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방민아의 수를 깨뜨리지 못하면 유진이를 지킬 방법은 없었다.그녀는 오로지 이 방법밖에 없었기에 육경한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고 이것이 아니었다면 어떤 일이 있어도 그를 이용하지 않았을 것이다.이후 소원은 영숙에게 부탁해 숨겨 둔 소형 카메라를 가져오게 했다.현재 그 증거는 영숙의 손에 있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변수가 생길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그녀는 서둘러 그것을 손에 넣어야 했다.그래야만 육경한과 조건을 논할 수 있었다.그녀는 확신했다. 이 증거를 본다면 육경한도 미우 그룹의 체면을 버리면서까지 방민아와 결혼을 강행하지는 않을 것이라고.설사 결혼을 강행하려 해도 그녀가 제시하는 조건을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었다.소원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나가야겠어. 내 옷 줘.”지금 입고 있는 이 잠옷은 너무 헐렁해 입고 나가면 거의 입지 않은 것처럼 보일 정도로 민망했다.육경한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네 옷? 그 찢어진 천 조각들을 다시 입고 나가겠다고?”소원은 잠시 생각하더니 그도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젯밤 싸움으로 옷이 모두 찢겨나갔던 것이다.“그럼 부탁할게. 내가 입을 수 있는 옷 좀 찾아줘.”그러나 육경한은 냉소하며 말했다.“왜 내가 널 위해 옷을 찾아줘야 하지? 나가고 싶으면 그냥 지금 입은 채로 나가.”소원은 그의 말에 화가 치밀어 곧바로 이불을 걷어내고 지금 입은 그대로 나가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하지만 문까지 걸음을 떼기도 전에 육경한이 발로 문을 차며 문을 닫아버렸다.소원은 냉랭한 표정으로 물었다.“무슨 뜻이야?”“정말 그렇게 나가려는 거야?”육경한의 눈빛은 차가웠고 말투는 뭔가 숨은 의도를 담고 있는 듯했다.속이 덜컥 내려앉았
피가 끝없이 번져가 끝내는 눈까지 뒤덮자 소원은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눈이 핏발로 가득 차 있었고 머릿속은 웅웅거려 터질 것만 같았다.낯선 방을 둘러보며 그녀는 잠시 어리둥절해 했다.이전의 일을 떠올리려 애쓰다가 문득 기억이 되살아났다.방민아가 쉽게 자신을 놓아줄 리 없다는 걸 알았기에 그녀는 그 룸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해 두었었다.그리고 영숙이 약속된 시간에 전화를 걸어왔고 그다음은 육경한이 그녀를 데려간 장면이 이어졌다.머리를 감싸 쥐고 문질렀지만 머리는 여전히 아팠고 정신도 완전히 맑지 않았다.공기 중에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냄새가 맴돌았다.순진무구한 소녀가 아닌 소원은 그 냄새에 머리가 어지러웠다.저절로 미간도 찌푸려졌다.‘어젯밤...’소원은 서둘러 이불을 걷어내고 자신을 살펴보기 시작했다.방민아, 방민기와 몸싸움을 벌이며 생긴 상처들 외에 민감한 곳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하지만 허리에 남은 손자국이 의심스러웠다.그 자국은 너무 깊어서 마치 박혀 있는 것 같았다. 어떤 흔적이라 표현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분명 싸움에서 생긴 자국은 아닌 것 같은데 자세히 생각하려니 겁이 났다.옷차림을 다시 살펴보았다. 본래 소원이 입고 있었던 옷이 아니었다.그때, 문이 갑자기 열렸다.육경한이 성큼 들어오더니 침대 위에 앉아 있는 소원을 보고 무심히 말했다.“깼네.”말을 끝내자마자 커다란 베개가 그의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육경한은 손을 살짝 들어 그것을 쳐냈고 베개는 그의 얼굴을 살짝 스치며 바닥에 떨어졌다.곧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했다.“구해줬더니 이렇게 보답하는 건가?”“나한테 무슨 짓 했어?”소원은 이를 악물고 날카롭게 물었다.육경한은 그녀가 화가 난 모습을 보며 얇은 입술을 살짝 비틀어 웃었다.그러고는 침대 머리맡에 도우미가 가져다 놓은 얼음이 담긴 위스키를 들고 한 모금 마신 뒤, 느긋하게 말했다.“내가 뭘 했다면 네가 아무 느낌도 없었을 것 같아?”순간 멍해졌지만 소원은 이내 그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