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경한은 일어서서 의사들이 소원이 눕힌 침대를 끌고 나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파왔다.그러다 갑자기 눈앞이 어지러워지더니 육경한은 ‘쿵’하고 바닥에 쓰러졌다!가슴에서는 선홍빛 피가 새어 나와 코트를 적시고 있었다.“경한 씨!”진아연은 바닥에 넘어진 그를 안고 큰소리로 외쳤다.“의사 선생님!”곧 의사가 나와 그의 상태를 살펴보기 시작했다.그가 입은 검은색 셔츠를 자르고 보니, 옷은 이미 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셔츠에는 말라버린 핏덩이들이 잔뜩 붙어있었다.“장난하는 겁니까, 지금?!”의사는 눈살을 찌푸리며 화를 냈다.“이건 새로운 상처잖아요! 염증이 생겨서 이렇게 된 겁니다. 보아하니 몇 시간 동안 피를 흘린 것 같은데 살펴보지도 않고... 죽으려고 작정하신 것인지!”진아연은 원한이 가득 찬 눈빛으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역시 남자는 믿을만한 게 아니야. 이번 생에 육경한의 아내가 될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하더니... 그깟 평범한 여자 하나 때문에 목숨을 포기할 정도로!’육경한이 치료를 받고 안정이 되자 진아연은 소원의 병실로 가다 우연히 담당 의사를 만났다. 의사는 그녀를 보고 물었다.“조금 전 그 보호자랑 같이 오신 분인가요?”“네, 저는 그 여자 환자의 제일 친한 친구입니다.”진아연은 슬픔에 잠긴 얼굴을 하고 물었다.“소원이... 진짜 위암 말기인가요? 수술은 가능할까요?”육경한이 쓰러지기 전에 그녀는 수술 동의서를 보았다. 보자마자 그녀는 하늘을 향해 웃고 싶었다.‘이 빌어먹을 여자가 드디어 죽는다니, 너무 잘됐잖아!’의사는 그녀가 얼굴이 어두워진 것을 보고 위로를 건넸다.“환자분 상황이 꽤 심각합니다. 수술로 완치될 가능성은 매우 적어요. 저희는 가족분들께 말기 간호를 할 것을 권장해 드립니다. 그러면 환자를 너무 고통스럽게 만들지 않을 수 있어요.”진아연은 마음속으로 기뻤지만 겉으로는 슬픔이 가득한 얼굴을 했다. 의사가 다시 말했다.“그리고 여기 보니까 전에 입원한 기록이 있더라고요. 이번
소원은 걱정스러워하며 물었다.“설마 너 이준혁한테서 빌려온 거야?!”그러면서 그녀는 카드를 다시 돌려주었다.“나는 이거 필요 없어! 그러니까 빨리 가서 돌려줘. 나 때문에 너까지 괴롭게 만들고 싶지 않아.”윤혜인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이거 준혁 씨한테 빌린 거 아니야. 이 돈은 내가 대학 시절 그린 ‘그리움’이라는 그림을 팔고 번 거야.”“뭐라고? 너 그 그림 팔았어?”놀란 소원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 그림은 윤혜인이 꿈속에서 어머니를 보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은 작품으로, 그녀가 몇 달 동안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작품이었다.당시 그녀는 그림의 일부를 찍어 해외 소셜 미디어에 올렸고 누군가가 그림을 사고 직접 작가와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었다.소원이 윤혜인의 의견을 물었지만, 그녀는 동의하지 않았고 결국 그 포스팅을 삭제했다.하지만 현재 윤혜인은 소원을 위해 그 그림을 팔아 버렸다.소원은 거부했다.“나 이 돈 받을 수 없어. 가서 그림 되찾아와.”“그냥 받아둬. 나 온라인 경매 사이트에서 판 거야. 그래서 내 그림을 산 사람이 누구인지 정보를 알 수조차 없어. 지금 돌려받으려고 해도 이미 받을 수 없게 됐다고.”처음에 소원이 그 작품을 올렸을 때 상대방은 6억을 제안했다고 한다.하지만 시간이 얼마간 흐르자 가격은 바로 10억까지 뛰어올랐고 심지어 경매가 이루어지기도 했다.인터넷상에는 확실히 이상한 사람이 많다. 윤혜인은 매우 신중하게 거래를 마치고 바로 계정을 삭제했다.소원이 여전히 돈을 받기를 거부하자 결국 윤혜인이 다시 말을 꺼냈다.“나 전에 그 집 팔았잖아. 이 돈으로 너희 집 산다고 치자. 그럼 나 앞으로는 집세 안 낼 거야!”“그거랑은 다르지. 우리 집은 6억에도 팔리지 않아, 겨우 4억 정도라면 모를까.”“말 섭섭하게 한다? 자꾸 이러면 네가 날 좋은 친구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여길 거야. 남은 돈은 내가 투자한다고 치면 되잖아. 손해 보면 방법 없는 거고 벌게 되면 나한테 네가 나한테 나눠주면 되지!”윤
윤혜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보며 물었다.“여기서 뭐해요?”그녀는 어젯밤 이미 충분히 자기 의사를 똑똑히 밝혔었다.때문에 이준혁처럼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이 다시는 그녀를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왜, 내가 방해됐어?”남자가 이를 악물고 몇 마디 내뱉었다.‘도대체 내가 뭘 어쨌다고 또 이렇게 불쾌해하는 거야...’하지만 이미 두 사람 사이에는 희망이 없다고 분명히 말했으니 철저히 끝내는 것이 맞았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네, 정말 방해돼요. 제가 어제 분명히 말하지 않았나요, 이준혁 씨?”이준혁의 눈빛이 어두워졌다.“나랑 재결합하지 않겠다는 이유가 한구운 때문이야?”윤혜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자꾸 다른 사람 끌어들이지 않으시면 안 돼요?”그러자 이준혁의 표정이 굳어졌다.“하... 아까 보니까 되게 즐겁게 문자 주고받더라?”‘...혹시 아까 내가 문자 나누는 거 봤나?’하지만 그녀와 한구운은 그저 업무 이야기만 나누었을 뿐이고 두 사람은 정말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다.심지어 지난번 일도 윤혜인은 이준혁을 속이기 위해 그렇게 말했을 뿐,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고 직접 해명한 적이 있다.아마 그는 처음부터 그녀를 믿지 않았던 것 같다.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 가능성이 없으니 윤혜인은 이준혁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마음대로 생각하세요.”해명할 의욕도 없었는지라 윤혜인은 서둘러 문을 열고 들어가려 했다.이준혁은 안색이 갑자기 차가워지더니 손을 뻗어 그녀의 뒤에서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고 몸을 돌려세워 문에 밀어붙였다. 이윽고 그의 입술이 윤혜인의 입술을 덮쳤다.“웁...”윤혜인은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떨어뜨렸다. 밀쳐낼 새도 없이 그의 혀는 이미 그녀의 입안을 마구 헤집고 있었다. 마치 못다 한 욕구를 해소하려는 듯 거센 키스가 이어졌다.윤혜인의 입은 온통 그의 숨결로 가득 찼다. 이런 강제적인 키스가 그녀는 매우 불쾌했다.그래서 강하게
윤혜인은 고개를 숙였다. 눈가가 조금 촉촉이 젖어 들었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열 번을 말해도 똑같아요...”과거의 여러 가지 일들이나 이준혁 부모님의 반대 등... 모두가 그녀에게 이준혁에게 더 이상 미련을 두지 말라고 말하고 있었다.“그럼 하지 마.”이준혁은 고개를 숙여 윤혜인의 얼굴을 감싸더니 그녀의 눈물에 강압적으로 입을 맞췄다.“말하지 마, 듣고 싶지 않으니까.”윤혜인은 여전히 몸부림치려 했지만 이준혁은 그녀를 아주 꼭 껴안았다. 너무 꽉 껴안다 못해 그녀를 자신의 몸속에 녹여 넣으려는 것 같았다.그가 말했다.“알아, 네가 하는 말이 진심이 아닐 거라는 거. 그렇게 빨리 거절하지 말고, 잘 생각한 다음에 나한테 말해줘, 응?”그녀를 껴안는 이준혁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자존심이 강한 그가 현재 모든 주도권을 이 여자에게 넘겨버렸다.그는 자신이 너무 비굴해졌다고 느꼈다. 지금 윤혜인이 단 한마디만 뱉어도 그는 무너질 수 있었으니 말이다.이준혁이 떠난 후, 윤혜인은 문을 열고 온몸에 힘이 빠져 바닥에 주저앉았다.오랫동안 참아왔던 눈물이 마침내 터져 나왔다.다시는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수없이 스스로 다짐했지만, 이준혁과 가까워지기만 하면 마음속 깊이 자리한 뭔지 모를 감정이 꿈틀거렸다.충분히 단호하지 못한 것 같아 후회하면서도 그녀는 동시에 두려움에 사로잡혔다.자신이 깊이 빠져버릴까 봐, 떨어져 내릴까 봐, 산산조각이 나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까 봐......다음 날.윤혜인은 병원에 있는 소원에게 국을 가져다주러 갔다.집을 나서기 전, 그녀는 눈 밑의 다크서클을 가리기 위해 옅게 화장을 했다.막 병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윤혜인은 안에서 들려오는 의사의 목소리를 들었다.“태아에 관한 일은 오직 환자분만이 결정할 수 있습니다. 신중히 생각하시길 바라요.”윤혜인은 온몸이 얼어붙었다.의사가 나간 후,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 소원을 마주 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소원아, 너... 임신했어
하지만 상대방은 양보하지 않았다. 당시 한구운은 투자 은행에서 그의 기를 적잖이 꺾어놨었다. 때문에 방혁수는 이 기회를 빌어 한구운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그는 앞으로 나와서는 두 사람의 길을 막으며 말했다.“뭐야, 여자친구랑 식사하는 거야?”윤혜인은 반박하려 하자 남자의 시선이 갑자기 그녀에게로 돌아갔다.“이쁜이, 그거 알아? 이 사람 회사에서 위반 행위로 해고되었었어. AI한테 해고됐다는 건 한마디로 아무것도 아닌 쓰레기란 말이지. 국내의 어떤 투자 은행에서도 얘를 다시 뽑지 않을거야. 이런 쓰레기랑 미래가 있을 것 같아? 그러니 나를 따라오는 건 어때?”한구운의 안색이 차가워졌다. 그는 늘 분노를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는데 말이다.그는 윤혜인을 자신의 뒤로 물러나게 하고는 말했다.“방혁수, 너 말 좀 조심해. 내 친구 성가시게 하지 말고.”그러자 방혁수가 헤벌쭉하고 웃는 것이다.“이 이쁜이가 반드시 너를 따를 거라고 어떻게 보장해? 넌 지금 직장도 없잖아. 이쁜이 나랑 가자. 오빠가 멋진 거 보여주고 맛있는 거 먹게 해줄게. 어때? 내 카드 다 너한테 맡길게.”한구운은 방혁수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윤혜인을 끌어당겼다.“무시해요. 우리 이만 갑시다.”표면상으로는 차분해 보였지만, 윤혜인은 한구운의 팔이 굳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그가 왜 해고당했는지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구운은 억울하게 누명을 뒤집어써도 절대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방혁수 같은 인간쓰레기에게 모욕을 당하고 있다니, 윤혜인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그녀는 제자리에 우뚝 서서 물었다.“방 대표님이시죠?”“음, 응, 맞아.”주름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방혁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생각 다 한거야, 이쁜이? 가자, 가자. 오빠 따라와.”그가 내민 손을 보자 윤혜인은 역겨움을 느꼈다.“교양이 있으면 어디 가서든 존중을 받습니다. 다음에 외출하실 때는 꼭 함께 챙기시길 바라요.”방혁수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가, 비로소
식사가 반쯤 진행됐을 무렵, 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무대로 올라와 연주하기 시작했다.윤혜인은 그것이 레스토랑의 마케팅 수단이라고 생각하고 조용히 듣고 있었다.곡이 끝나자, 그녀는 연주자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표했다.그때, 갑자기 연주자가 마술처럼 큰 붉은 장미 다발을 꺼내어 윤혜인에게 건넸다. 당황한 윤혜인은 손을 뻗어 받지 않았다.“자, 이번에는 이벤트 시간입니다. 이 아름다운 장미는 우리 레스토랑 2주년 기념 이벤트에 참여한 특별한 손님들 중 가장 아름다운 분께 드리는 선물이예요.”‘아, 이벤트였구나.’윤혜인은 더는 망설이지 않고 장미 다발을 받아들었다.그리고 다음 순간, 한구운이 벌떡 일어나더니 테이블 주위를 돌아 윤혜인에게 다가왔다.그러고는 보석 상자를 꺼내 열었는데 그 안에는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팔찌가 들어있었다.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혜인아, 내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윤혜인은 완전히 멍해졌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오빠가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거지?!’주변에서 식사하던 손님들도 박수를 치며 “받아줘, 받아줘!” 라고 외치고 있었다.부끄러움에 윤혜인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그녀는 한구운에게 조심스럽게 귓속말로 물었다.“오빠, 지금 이게 뭐 하는 거예요?”그러자 한구운은 미소를 띠며 반은 농담 반 진심 반으로 말했다.“아직도 모르겠어? 네가 내 여자친구가 되어줬으면 하는 거잖아.”“네?!”윤혜인은 급히 손을 흔들며 말했다.“저, 전 안 돼요!”그 말을 들은 한구운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이내 한숨을 쉬며 말했다.“혜인아, 아홉 시 방향에 있는 저 여자가 해외에서부터 국내까지 날 따라다녔어. 난 저 여자가 나한테 여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나 좀 도와줄래?”“저...”윤혜인은 사람을 속이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지난번 가짜 연인 행세를 한 것도 어쩔 수 없이 그런 것이었다.그래서 또다시 가짜 연인 행세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정장 차림에 반듯한 체격을 자랑하는 이준혁은 여전히 우아하고 고고한 모습이었다.윤혜인의 얼굴이 갑자기 하얗게 질리면서 흠칫 몸이 떨렸지만 이준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조롱하는 듯한 눈빛으로 한구운을 바라보았다.“내연남이 출세했다고 축하라도 해줘야 하나요? 이렇게 능숙한 걸 봐서 남의 가정을 파탄 낸 게 한두 번이 아닌가 봐요?”다분히 질투가 섞인 말투였지만 이런 말을 듣고도 한구운의 표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차분한 모습을 유지했다.하지만 윤혜인은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이준혁 씨, 대체 언제까지 그런 헛소리를 할 거예요?”이준혁의 잘생긴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내가 틀린 말 했나, 아니면 사건의 전말을 다 잊어버린 거야?”“...”아니라고 말하면 당장이라도 이 망할 남자가 줄줄이 자세한 얘기를 늘어놓을 것만 같았다.한구운은 두 사람이 티격태격 주고받으며 말싸움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알 수 없는 불쾌함을 느꼈다.이준혁은 언뜻 보기에 상관없다는 표정이었지만 같은 남자로서 알 수 있었다. 지금 그의 모습은 분노가 치밀어 도저히 감출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한구운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주저하지 않고 윤혜인의 손을 잡았고, 손바닥에 닿은 작은 손의 부드러움에 순간 심장이 요동쳤다.그는 여자를 만난 적이 없었고 욕구가 생기면 여자를 찾기보다 스스로 해결하려고 했다.그의 눈에 여자는 더러운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윤혜인을 만나고 나니 자신도 여성에 대한 거부감이 그렇게 크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는 작은 손을 꽉 쥐고 이준혁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이 대표님, 혜인이는 이제 제 여자 친구니까 제가 잘 챙길게요. 과거의 일은 상관없지만 대표님께 감사한 건 있네요.”한구운은 잠시 멈칫하더니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그쪽이 혜인이 놓아준 덕분에 저한테 기회가 생겼네요.”이준혁 잘생긴 얼굴이 순식간에 시커멓게 변하며 분노가 역력했다.윤혜인이 화를 낼까 걱정스러운 마음만 아니었다면 당장에 한구운을 두 동강 내 피가 흥건하게 만들었
달칵-차 문이 잠겼다.화가 난 윤혜인은 그의 옷깃을 잡고 마구 때렸다.“이준혁 씨, 미쳤어요? 빨리 내려줘요!”남자가 몸을 숙여 마구 움직이는 그녀의 손을 붙잡아 고정시키려 했지만, 윤혜인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옷깃을 여민 채 그에게서 최대한 몸을 뒤로 뺐다.순식간에 이준혁의 예리한 눈동자가 다시 어두워졌다!그는 그녀의 발목을 잡은 손을 확 들어 올리며 자신의 다리 위에 앉혔다. 그녀의 허벅지가 그의 튼튼하고 얄쌍한 허리에 밀착되었고 시트에 무릎을 꿇은 채 어쩔 수 없이 그에게 기대는 자세가 되었다.윤혜인은 앞좌석과 그의 가슴 사이에 꽉 끼어 꼼짝할 수 없었고, 긴장한 마음에 살짝 움직이자 입술이 바로 튀어나온 그의 목울대에 닿았다.그곳은 남자에게 가장 금기되는 곳이었다.윤혜인은 놀라서 호흡까지 흐트러지며 최대한 그에게서 몸을 멀리 떨어뜨리려 했지만 그럴수록 아래는 더욱 밀착되었다.화악!윤혜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이 망할 남자의 거기가...그녀는 두렵기도 하고 화도 났지만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소리만 질렀다.“왜 이래요, 진짜!”이준혁은 살짝 거칠어진 호흡과 갈라진 목소리로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깨물며 경고했다.“자꾸 건드리면 너 가만 안 둬.”“윽...”윤혜인은 밀려오는 고통에 상체와 하체 모두 불에 덴 듯 화끈거렸고, 무릎을 꿇은 자세는 더욱 비참하고 굴욕적이어서 당장이라도 남자의 뺨을 때리고 싶었지만 두 손은 이미 남자에게 꽉 붙잡힌 상태였다.이 순간, 공포와 분노가 그녀를 잠식하고 있었다.“얌전해졌으니 이제 내가 너한테 따질 차례네.”남자의 위험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자 윤혜인은 그를 노려보았다.“나한테 뭘 따져요?”이준혁은 비장한 표정으로 그녀의 턱을 붙잡고 들어 올리며 말했다.“오늘 밤 누가 저 남자 만나라고 했지?”윤혜인은 그에게 이를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듯 눈을 흘겼고 이참에 그의 화를 돋워 자신을 놓아주길 바라는 마음에 이렇게 반박했다.“어차피 둘 다 솔로인데 안될 게 뭐가 있어요?”
이 둘은 방심한 채로 무기를 소지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문밖에 서 있는 두 경비는 달랐다. 그들은 진짜 총을 들고 있었다.만약 정면으로 뛰쳐나간다면 소원과 그녀의 일행은 접근도 못 하고 총에 맞아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컸다.이 상황에서 유일한 희망은 마당에 있는 픽업트럭이었다.소원은 조금 전에 처리한 경비원의 몸에서 열쇠를 빼냈다.모든 사람을 트럭 안에 숨겨 탈출한다면 성공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터무니없는 방법 같아 보이지만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유일한 선택이었다.산속으로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했다.산속에는 이 지역 지형에 익숙한 경비원들이 있었고 소녀들은 안에서 물과 식량도 없이 있었기에 오래 버틸 수 없을 터였다.구조대가 오기 전에 발견되거나 굶어 죽을 가능성이 컸다.결국 이 계획은 소원이 깊이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성공하지 않으면 모두가 죽는다. 실패가 허용되지 않는 상황이었다.소원은 문밖에 서 있는 경비원 둘 중 한 명이 화장실로 가는 것을 보았다.큰일을 보러 간 듯했는데 이런 경우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예의 따위를 따지는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작은 일이었다면 어디서든 적당히 해결했을 것이었다.그들의 삶의 습성이 거의 야만인과 다름없었다.소원은 남은 경비원이 담배를 피우는 타이밍을 기다렸다가 조용히 작은 초가집으로 다가갔다.그녀는 바깥 문에 달린 자물쇠를 조용히 풀고 문을 열었다.안에서는 작은 소리에도 깜짝 놀란 소녀들이 떨고 있었다.소원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을 때조차도 그들은 몸을 웅크린 채 움직이지 못했다.소원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저랑 함께 나갈 사람 있어요?”방 안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모두 얼어붙은 듯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소원은 다시 한번 물었다.“저랑 함께 나갈 사람 있어요? 구조대를 기다리면 오래 걸릴 거예요. 그 전에 들킬 수도 있고 제가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같이 나간다면 제가 목숨 걸고 여러분을 지킬게요. 완전히
이 남자는 확실히 앞의 남자보다 힘이 셌다.남자가 거칠게 뿌리치며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바람에 소원은 순간적으로 고통이 몰려왔다. 가슴뼈가 몇 개는 부러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웁!”소원의 입에서 선혈이 튀어나와 녹색 풀밭을 붉게 물들였다.눈이 부실 정도로 선명한 피였다.한편, 경비원은 목을 움켜쥐며 간신히 소리를 내보려 했지만 소원이 찔러 넣은 과일 포크는 그의 성대를 관통해 동맥까지 꿰뚫었다.결국 그는 타는 듯한 비명을 지를 뿐, 제대로 된 말을 할 수 없었다.피는 멈추지 않고 쏟아져 나왔다.남자는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점점 아래로 내려가더니 끝내 ‘퍽’ 소리와 함께 무릎을 꿇고 땅에 쓰러졌다.포크가 그의 목에 그대로 박힌 채였기에 아직 완전히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그는 눈을 부릅뜨고 사악한 표정으로 소원을 노려보며 기어오르기 시작했다.이 남자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이런 일을 하며 살아온 그의 성격은 누구보다 강인했다.피를 반 통이나 흘렸음에도 그는 여전히 소원을 죽이기 위해 기어오고 있었다.입에서 나오는 신음 비슷한 소리가 주변의 두 경비원을 깨울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다행히 소원이 남자를 초가집 뒤쪽 잡초가 무성한 곳으로 유인했기에 소리는 쉽게 들리지 않았다.소원은 대략적으로 경비원들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알고 있었다.약 500m 앞에 두 명의 경비원이 더 있었지만 그들은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지금은 사람들이 가장 졸리고 주의력이 흐려지는 시간이었다.설령 낮에 충분히 잠을 잤다고 해도 이 시간대에는 소리나 시각적인 반응에 대한 민감도가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소원의 온몸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다.뼈가 근육을 찌른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움직이려고 해도 팔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쇠약해져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속삭였다.‘죽을 순 없어. 이런 짐승 같은 인간들에게 목숨을 빼앗길 순 없어.’소원이 이렇게까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초가집 안에서 그
남자는 눈을 크게 뜨고 공포에 질린 채 비명을 지르려 했다.하지만 소원은 재빨리 손을 뻗어 남자의 입을 꽉 틀어막아 어떤 소리도 나지 못하게 했다.그녀는 과일 포크를 깊이 찔러 넣어 끝까지 박아 넣었다.남자의 목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며 소원의 손을 온통 끈적이고 축축하게 적셨다.남자는 눈을 부릅뜬 채 마지막 순간을 맞이했고 끝내 소리를 내지 못한 채 숨이 끊어졌다.죽기 전까지 그는 믿을 수 없었다. 이렇게 마른 여자가 자신을 죽일 힘이 있을 줄은 말이다.평생 사람을 물건처럼 팔아치웠던 그가 결국 자신이 취급했던 ‘물건’의 손에 죽게 될 줄이야.이 얼마나 아이러니하고 우스꽝스러운 죽음인가.마치 한 편의 블랙 코미디 같았다.소원은 남자가 숨을 멈춘 것을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그의 몸을 침대 위로 눕혔다.그런 다음 유일한 무기였던 과일 포크를 뽑아냈다.그 순간 목에서 피가 기둥처럼 뿜어져 나와 방 안 곳곳에 튀었다.소원의 몸에도 피가 묻었지만 그녀는 더러운 나무통 따위 신경 쓰지 않고 그 안에 담긴 물로 몸과 포크를 깨끗이 씻어냈다.과일 포크는 그녀에게 생명줄과도 같았다.그것은 목숨을 지켜줄 무기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 그녀를 도울 도구가 될 것이었다.모든 피를 씻어낸 뒤, 소원은 옷을 다시 입고 몸을 정돈했다.그리고 창문 쪽으로 다가가 보니 한 경비원가 의심스러운 듯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소원은 순간적으로 재빨리 침대를 흔들며 의미심장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밖에 있던 경비원은 이 소리를 듣고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발길을 돌렸다.‘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군. 이런 소리만 들으면 진짜 못 참겠다니까!’그는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안에 여자는 못 건드린다고 하지만 이 여자는 불러낸 걸 보니 나중에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군.’경비원은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 멍하니 초가집을 바라보았다.소원은 소리를 내던 것을 멈추고 마음을 가라앉히며 문을 열고 나갔다.문 앞에는 경비원가 풀을 말아 만든 담배를 피우며 서 있었다.소원이
그 나무통은 보기만 해도 오래되어 보였다.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용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지저분한 남자들이었는지를 생각하니 소원은 속이 울렁거렸다.그녀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오빠, 다른 통은 없어요?”남자는 짜증이 난 듯 대답했다.“왜 이렇게 요구가 많아? 이것저것 다 가져오라는 거야? 너 씻을 거야 말 거야? 계속 이러면 밖으로 끌고 나가서 처리해버린다!”“알겠어요. 화내지 마요.”소원은 겁먹은 목소리로 낮게 대답했다.남자는 여전히 나갈 생각이 없는 듯했고 소원은 감히 더 묻지 못했다.남자는 그녀를 재촉하며 말했다.“이제 3시간도 안 남았어. 빨리 안 할래?”소원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네, 네, 지금 바로 씻을게요.”소원은 남자에게서 등을 돌린 채 손을 뻗어 겉옷을 벗었다.이어 작은 민소매까지 벗으니 상체에는 검은색 미니탑 하나만 남았다.뒤에서 드러난 그녀의 매끈한 어깨와 아름다운 날개뼈는 남자의 눈길을 사로잡았다.남자는 침을 흘리며 말했다.“돌아봐, 나 보고 벗어!”그러자 소원은 부끄러운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오빠, 뭔가 어렴풋이 보여야 더 아름답잖아요. 조금 이따가 멋진 거 보여드릴게요.”남자는 ‘멋진 거’라는 말에 흥분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이 여자는 분명 그런 곳에서 일하던 여자일 거야. 보통 겁만 먹는 여자들보다 훨씬 재미있겠는데.’소원은 탑만 남겨둔 상태에서 더 이상 벗지 않고 대신 바지를 벗기 시작했다.그녀의 가늘고 긴 팔이 허리춤에 닿았고 하얗고 매끈한 허리가 드러났다.이 모습을 본 남자는 본능적으로 반응하며 초조한 기색을 보였다.하지만 소원은 천천히, 마치 유혹하듯 움직였고 남자는 더욱 흥분하며 그녀의 행동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소원은 바지를 벗는 동작을 하며 손을 뒤에서 앞으로 이동시켰다.그러고는 손에 과일 포크를 단단히 쥐고 천천히 돌아섰다.이를 모르는 남자는 소원의 아름다운 몸매를 보며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왜 멈춰? 계속 벗어봐!”‘역시, 고급 술집
소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있었어요. 방금 떠났고요.”소원은 속으로 계산했다.‘이 시간대라면... 그럼 우리도 내일 아침쯤에 떠나겠네.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 있으니 완전히 수동적인 상황은 아니야.’하지만 지금은 그다지 늦은 시간이 아니라 밖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깨어 있는 상태였다. 좋은 기회가 아니었다.소원은 잠시 고민하더니 양옆의 사람들에게 조용히 무언가를 속삭였고 그것을 차례로 전달하도록 했다.말이 끝나자 모두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잠들지 못하더라도 눈을 감고 몸을 편히 쉬었다.드디어 밤이 되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닫혀 있던 나무문이 갑자기 열렸다.한 남자가 손전등을 들고 안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씩 비추더니 소원의 얼굴을 비추고는 손짓으로 그녀에게 말했다.“너, 나와.”그 목소리는 소원에게 익숙했다.소원에게 머리를 맞았던 바로 그 남자였다. 설마 했는데 그가 정말로 나타난 것이다.소원은 속으로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말 그대로 기회가 스스로 찾아온 것이었다.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남자에게 다가가더니 마치 이제야 남자를 알아본 것처럼 깜짝 놀라며 말했다.“오빠...”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자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 하는 신호를 보냈다. 소원에게 말을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소원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남자는 문지기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몇 마디 주고받았고 소원은 그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하지만 문지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빨리 움직이라는 손짓을 보냈다.그렇게 남자는 소원을 데리고 작은 초가집으로 향했다.그 초가집은 굉장히 작아 두 사람이 몸을 돌리기에도 비좁은 공간이었다.하지만 내부에는 등불이 있었고 그녀들이 있던 곳보다 훨씬 상태가 나았다.냄새도 심하지 않아 아마도 문지기가 교대할 때 쉬는 공간으로 보였다.문이 닫히자마자 남자는 소원의 손에 묶여 있던 밧줄을 풀어주었다.그러고는 본색을 드러냈다.그는 손을 뻗어 소원의 가슴 쪽으로 만지려고 했다.소원은 몸을 재빨리 비켜 손길을 피했다.그
아마 이런 일을 계속하다 보니 습관이 된 것 같았다.소원은 양옆으로 펼쳐진 길을 관찰했다. 지금은 아마 깊은 산속에 있는 것 같았다.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소원은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다른 두 여자도 졸렸는지 바로 잠에 들었다. 하지만 소원은 손바닥을 꼬집고 입을 악물며 절대 잠들어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다. 이때는 일분일초도 놓치지 말고 기회를 잡아야 했다.아쉽게도 소원은 이 차가 개조한 적이 있는 차라는 걸 발견했다. 잠금이 바깥으로 되어 있어 안에서는 절대 열 수 없는 구조였다. 아마도 안에 있는 사람이 문을 열고 도망갈까 봐 이렇게 설계한 것 같았다.소원은 문을 열고 뛰어내리고 싶은 생각을 일단 접어두고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와 새들을 바라봤다.그렇게 한 시간쯤 달리던 차는 정원 같은 곳에서 멈췄다. 이 정원은 비탈진 산 아래에 지어져 있어 매우 은밀했고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운전기사가 경적을 세 번 울리자 대문이 안에서 열렸다. 운전기사는 차를 운전해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밖에서 봤던 것과 또 다른 풍경이었다. 산길이 길게 쭉 뻗어 있었는데 밖에서 보이던 정원은 그저 나무판자로 만든 가짜 건물이었다.안으로 들어가 험난한 산길을 20분쯤 운전해서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엔 크고 작은 판잣집이 아주 많았다.운전기사가 경적을 두 번 울리자 안에서 무기를 장착한 사람 둘이 걸어 나와 차 문으로 다가오더니 안에 앉은 여자들에게 중얼중얼 시끄럽게 뭐라고 얘기했다. 한국인이 아닌 것 같았고 지금은 내려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소원은 고분고분 차에서 내렸다. 뒤에 있던 여자가 잠깐 넋을 놓고 있자 무기를 들고 앞장선 남자가 여자의 얼굴을 사정없이 후려쳤다.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여자의 입가에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남자는 중얼거리며 계속 뭐라고 말했고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욕하는 것 같았다.여자는 울고 싶었지만 울었다가 매를 맞을까 봐 얼른 구르다시피 차에서 내려왔다.소원은 앞에 선 사람에게 이끌려 어떤 초막으
남자는 얌전하게 창틀에 묶었던 손을 풀더니 두 손을 고쳐 묶고는 차로 압송했다.소원은 터덜터덜 걸어가며 대책을 생각했다.일단 저 차에 오르면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지금보다 더 안 좋은 상황에 놓여 기회를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변에 4, 5명이나 지키고 있어 도망갈 방법이 없었다. 남자는 소원이 너무 느리다고 잡고 있던 밧줄을 확 당겼다.“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좀 걸어.”소원은 좋은 기회를 찾지 못해 희망을 전부 남자에게 걸었다.“오빠...”소원이 소리를 낮추더니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나 너무 무서워요. 지금 어디로 가는 거예요?”남자가 소원을 힐끔 쳐다보더니 경계했다.“내가 말했지. 몰라도 될 건 묻지 말라고.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연홍 누나가 말한 것처럼 정말 도망이라도 갈려고?”소원은 그제야 안경 쓴 여자의 이름이 연홍이라는 걸 알아챘지만 남자가 눈치챌까 봐 일부러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말했다.“내가 어떻게 감히 도망갈 생각을 하겠어요. 오빠가 인상이 좋기도 하고 여기서 아는 사람이 오빠밖에 없으니까 오빠하고만 대화하는 거죠. 오빠는 나 안 때릴 것 같거든요...”남자가 이 말을 듣더니 우쭐거리기 시작했다. 여자의 칭찬을 마다할 남자가 없었다. 그게 예쁜 여자라면 더더욱 말이다.남자가 말했다.“하긴, 이제 행복할 날이 별로 안 남았네. 거기 가면 너 사람으로 봐줄 사람이 있을까?”소원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너무 무서워서 울음이 쏟아져 나왔다.“오빠, 나 가기 싫어요. 나 좀 도와주면 안 돼요...?”남자는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얼른 차 타. 내가 널 왜 놓아줘. 마지막 가는 길에 데려다줄 수는 있지만... 헤헤.”남자가 얍삽하게 웃었다. 아까 했던 생각을 아직 버리진 않은 것 같았다.이 말에 소원의 긴장이 어느 정도 풀렸다. 아직 그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면 기회는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연홍이 말했던 것처럼 남자가 아랫도리를 잘 간수하지 않으면 재수 없어질 수밖에 없다.
남자가 팬티를 벗기 시작하자 소원은 몸에 힘을 바짝 주고 기회를 노렸다.일촉즉발의 순간, 문이 끼익하고 열렸다. 남자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갑자기 날아온 발차기에 의해 쓰러지고 말았다.넋을 잃은 소원은 남자의 비명과 함께 들어온 사람이 전에 본 안경을 낀 점잖은 여자라는 걸 발견했다.발차기 한 번에 남자를 쓰러트리는 걸 봐서는 유단자라는 의미였다. 소원은 그 짧은 순간에 고민을 마쳤는지 손에 들었던 나뭇가지를 바닥에 버리고 발로 밟아 감추고는 마치 괴롭힘이라도 당했다는 듯 그렁그렁한 눈으로 여자를 바라봤다.여자는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앞으로 달려가 남자에게 발차기를 두 번 더 날리더니 욕설을 퍼부었다.“모자란 놈, 아랫도리 관리가 그렇게 안 돼? 물건에 문제라도 생기면 돈은 어떻게 받으려고? 돈 있으면 유흥가에 가든가. 돈만 주면 너랑 자겠다고 나서는 여자들이 줄을 섰을 텐데 꼭 이래야겠니?”“아야. 난... 난 그냥 재미 좀 보려고 그랬던 것뿐이지 정말 뭘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에요.”“퉤.”여자가 전혀 체면을 봐주지 않고 남자의 얼굴에 침을 내뱉더니 말했다.“그 더러운 생각 집어치워. 전에 지성이가 운반하는 물건이랑 잤다가 일 터진 거 몰라? 너도 이 여자 손에 죽고 싶어서 그래?”소원은 여자의 말에서 팀원 중 한 명이 여자에게 나쁜 마음을 품었다가 일이 터진 적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여자의 말투와 전투력만 봐도 남자보다 훨씬 월등했기에 절대 쉽게 건드려서는 안 될 것 같았다.전에 태연하게 신고를 도와주는 척했지만 사실은 팀원의 전화번호를 신고 센터로 고쳐 소원이 믿을 수 있게 유도한 것이었다.이 여자는 머리마저 무서울 정도로 비상한 사람이었다.남자는 다리를 움켜잡고 신음했다.“알았어요. 알았어. 지성이랑 똑같은 잘못은 안 저질러요. 얼마나 쓸모없었으면 여자 하나 못 이겨서 오히려 죽임을 당해. 다행히 얼마 도망가지 못하고 잡히긴 했지만.”남자는 이렇게 말하며 소원을 힐끔 쳐다보더니 에둘러서 경고했다.“잡히면 곱게
어딘가 이상하긴 했지만 몸이 이성을 앞서 통제할 수가 없었다. 순간 사악한 생각에 사로잡힌 남자는 소원의 머리채를 확 잡아당겨 고개를 쳐들게 하더니 욕설을 퍼부었다.“젠장. 발랑 까졌네. 남자 꼬시는 건 어디서 배웠어?”소원은 강직한 성격이었지만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가끔은 성격을 앞세우기보다 머리를 써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특히 지금처럼 불리한 상황에서는 머리를 쓰는 것만이 유일한 살길이었다.“오빠, 도...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소원은 몸을 파르르 떨고 있었지만 손바닥엔 어느새 튼실한 나뭇가지가 들려 있었다. 아까 남자가 잠깐 방심한 틈을 타 바닥에서 주운 것이었다.남자가 소원을 확 끌어당겨 품에 껴안자 소원은 깜짝 놀랐지만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오빠, 지금 이 상태로는 너무 불편한데 손이라도 좀 풀어줄래요?”남자는 소원에게 당한 적이 있었기에 바로 경각심을 세웠다.“무슨 꿍꿍이야?”“아니. 이러면 뭘 하기도 불편하잖아요.”소원이 제안했다.“혹시 걱정되면 한쪽만 풀어주고 다른 한쪽은 창문에 묶어두면 되잖아요. 안 그래요?”남자는 제법 소원의 아이디어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알아서 결박해달라고 하니 정말 땡큐였다.“정말 다른 꿍꿍이 없는 거지? 경고하는데 다른 수작 부리면 당장 그 모가지를 비틀어 버릴 거야.”남자가 소원에게 경고했다.소원은 너무 무서워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겠다는 듯 연기했다.“오빠,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예요? 내가 어떻게 감히 그런 생각을 하겠어요. 사람 하나 죽여도 모를 곳에 버려졌는데 오빠 말이라도 잘 들어야 고통이라도 덜 받을 거 아니에요.”“그래, 총명하긴 하네.”남자가 만족스럽게 말했다.“당연하죠. 오빠, 나 지금 클럽에서 도우미로 일하고 있어서 돈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노는지 다 알고 있어요. 내가 오빠 잘 모실 테니까 제발 때리지만 말아줘요.”어차피 소원이 아가씨라고 신분을 속여도 남자는 그게 진실인지 아닌지 판단할 방법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소원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