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창의 선팅이 아무리 짙게 되어 있어도 손으로 누르면 그림자가 보였다.수치심과 분노가 밀려온 윤혜인이 발로 그를 걷어차려는데 남자의 무릎이 그녀의 종아리를 꽉 누르고 있었다.그렇게 한 번씩 움직일 때마다 거센 힘에 차가 몇 번이고 흔들렸다.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목소리를 낮췄다.“그렇게 움직이다가 차까지 망가지겠네!”윤혜인은 곧바로 행동을 멈추고 당황하며 밖을 보려고 했지만 남자가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그녀가 몸부림치자 옷이 말아 올라가며 하얗고 가는 허리가 살짝 드러났다.이준혁의 차가운 손가락 마디가 매끄러운 허리선에 닿았고 흐르는 온천물에 흘러 들어가는 듯한 편안함에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그는 몸을 가까이 밀착한 채 매혹적인 중저음 목소리로 말했다.“차가 이렇게 흔들리면 밖에서 무슨 생각을 할까?”순식간에 윤혜인의 하얗고 작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차가 흔들린다면 당연히 그런 쪽으로 생각할 게 뻔했다.윤혜인은 분노에 몸서리쳤다.“미친!”그녀는 뒤척이며 몇 마디 욕설만 내뱉을 뿐, 달리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물기를 머금은 눈으로 그를 매섭게 노려볼 뿐이었다. 조금 전 거친 행동으로 향긋한 입술이 살짝 벌어진 채 나지막이 숨을 몰아쉬던 그녀는 이 모습이 얼마나 유혹적인지 알지 못했다.이준혁의 눈빛이 가라앉더니 손을 뻗어 여자의 입술을 천천히 어루만지며 서늘한 목소리로 경고했다.“내 말대로 당장 헤어져. 다음엔 저놈 앞에서 정말 무슨 짓 할지 몰라.”그냥 해보는 말이 아니었다. 생각만 해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다.그 본인도 무슨 짓을 할지 장담하지 못했다.그는 최면이라도 건 듯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했다.“난 네가 다른 남자 만나는 걸 용납할 수 없어.”오랜 시간 운동으로 다져진 남자의 손끝에는 거친 살결이 살짝 느껴졌고, 그가 입술을 짓누르자 온몸에 전기가 통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순식간에 윤혜인은 얼굴이 달아오르고 발끝마저 움츠러들면서 어색하게 시선을 내렸다.“손 아프니까
윤혜인은 머리에 벼락이라도 맞은 듯 하얘졌고 몸속의 피가 빠르게 말라가는 것 같았다.그녀는 상대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입술을 몇 번이나 벙긋하다가 이름을 불렀다.“송소미!”이름 세 글자에 윤혜인은 잇새 사이로 증오를 가득 담아 뱉었다.그녀의 배 속에 있던 아이를 죽인 독한 여자가 다시 나타났다!“오호, 눈썰미가 좋네. 이런 모습인데도 알아보고.”웃는 송소미의 목소리는 불꼬챙이에 목을 덴 듯 거칠어서 이 늦은 밤에 특히 더 무서웠다.그녀는 얼굴의 절반을 가리는 챙이 큰 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쓰고 있었는데 윤혜인이 눈빛만으로는 자신을 알아볼 줄이야.윤혜인은 속이 들끓었고 꽉 움켜쥔 손에 뼈마디가 하얗다 못해 투명하게 변해갔다.그녀는 송소미를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네가 어떻게 감히 여기에 나타나!”송소미의 눈동자에 음침한 빛이 번뜩였다.“허, 내가 왜 여기 오면 안 되는데? 내가 오지 않으면 어떻게 날 이 지경으로 만든 언니를 처리하겠어!”갈라진 그녀의 목소리에 광기가 서려 있었다.윤혜인은 잔뜩 경계하며 가방 속 스프레이를 찾으면서 상대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송소미, 넌 이제 수배범이 됐어. 같은 실수 반복하지 말고 빨리 자수해!”송소미의 눈동자가 시뻘겋게 빛나며 독하게 웃었다. “망할 년, 내가 오늘 너 지옥으로 끌고 가려고 왔어!” 그리고는 스프레이를 꺼내 윤혜인을 향해 힘껏 뿌렸다.이상한 냄새가 코를 찌르자 윤혜인은 급히 입과 코를 가렸지만 이미 늦었다.이미 숨결을 타고 들어와 어지럼증을 느끼며 벽을 붙잡은 채 뒤로 물러났다.그녀의 가방에는 스프레이가 없었고 어디에 떨어뜨렸는지도 알 수 없었다.윤혜인은 눈앞에 환각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송소미를 향해 격하게 가방을 내리쳤지만 그녀는 가볍게 옆으로 피했다.송소미는 여전히 버티고 있는 윤혜인을 바라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발버둥 치지 마, 소용없어.” 이 스프레이는 ‘1분 스프레이’로 불리는 것으로서 아무리 강한 사람이나 사나운 짐승도 맞으면 1
...검은색 고급 승용차 안에서 이준혁은 카시트 위에 놓인 작은 물건을 만져보더니 ‘호신용 스프레이'라고 적힌 것을 보았다.순간 잘생긴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이 여자가 날 정말 변태로 보네.’“띠리링-”그때 좌석에 놓아둔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번쩍이는 이름을 본 이준혁은 깜짝 놀라 순간 믿기지 않았다.웬일로 이 여자가 그에게 먼저 전화를 건 걸까!그는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곧바로 통화버튼을 눌러 다소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야?”그런데 지직거리며 전기가 흐르는 소리만 들리다가 갑자기 오리의 목을 인두로 지진 듯 갈라져서 듣기 불쾌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이준혁의 동공이 순식간에 움츠러들며 정교한 이목구비가 굳어버렸다.전화는 그대로 툭 끊겼다.“차 돌려. 당장 Z아파트로 돌아가!”이준혁의 얼굴은 폭풍우가 몰아칠 듯 먹구름이 가득했고, 그는 운전기사에게 윤혜인의 아파트로 가라고 명령하는 동시에 주훈에게 지시했다.“집사람 위치 확인해!”주훈은 당황했다. 이혼한 것도 잊어버리고 ‘집사람’이라는 호칭을 쓰는 걸 보니 대표님이 어지간히 초조한 게 아닌 것 같았다.주훈은 노트북을 열어 재빨리 네트워크 부서에 윤혜인의 위치를 찾으라고 알렸고 5분 만에 결과가 나왔다.주훈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사모님 휴대폰 신호가 10시 15분 Z아파트에서 마지막으로 잡혔고 그 이후로는 연결이 끊겼습니다!”회사 고위 네트워크 부서에서는 휴대폰의 전원이 꺼졌든 물에 빠졌든, 불에 타거나 망가져도 위치를 찾아낼 수 있었다.하지만 연결이 끊겼다는 것은 상대방 역시 특수한 기술을 이용해 휴대폰을 파괴한 고급 해커의 도움을 받았다는 뜻이었다.이준혁은 냉랭한 표정으로 말했다.“전에 송소미를 찾으라고 보냈던 사람들에게 무슨 소식 없는지 연락해 봐.”주훈은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송소미가 사라진 후부터 대표님은 추적에 나섰고 가장 최근에 연해 지역에서 소식이 들려왔었다.몇 분 뒤, 주훈은 이렇게 보고했다.“대표님, 송소미는 더 이상
날카롭게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고 도자기처럼 하얀 목이 차가운 공기에 닿자 살짝 떨렸다.“아!”윤혜인은 놀라서 비명을 질렀고, 약효가 채 가시지 않아 몸에 힘이 없어 손조차 들 수 없었다.“하... 하지 마세요.”그녀는 온 힘을 다해 뒤로 물러섰고 눈물이 눈동자를 가린 천을 적셨다.흐릿하게 보이던 모습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그래도 똑똑하게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실루엣만으로 상대가 이준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남자는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않고 한참 동안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몸을 앞으로 기울이자 낯선 남성의 향기가 강하게 밀려왔다.윤혜인은 문득 익숙한 느낌이 들었지만 왜 익숙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놀란 듯 말했다.“뭐 하는 거예요?”남자의 손끝이 윤혜인의 목에 닿아 부드럽게 아래로 움직이더니, 그녀의 목에 걸려 있던 평화의 펜던트를 잡아당겼다.“이게 당신 건가?”남자의 목소리는 마치 변조한 목소리처럼 거칠었다.윤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제 것 맞아요. 귀한 물건은 아니니까 가져가지 마세요. 돈은 원하시는 대로 드릴게요.”그 평화의 펜던트는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목에 걸고 다니던 것이었는데, 나중에 알 수 없는 이유로 외할머니가 빼서 보관하고 있다가 돌아가시기 전에 다시 건네주었다.윤혜인은 이 펜던트에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담겨 있어 잃고 싶지 않았다.남자는 더 가까이 가지 않고 자리에 멈췄다.한참 후 가벼운 한숨이 묻어나는 어투로 말했다.“어떻게 네가 여기에...”그의 목소리에는 형언할 수 없는 떨림이 묻어나는 듯했다.윤혜인은 놀란 와중에 낯선 기운이 다시 그녀에게 가까이 오자 두려움에 몸이 굳어버렸고 더 이상 뒤로 물러설 곳도 없었다.그런데 남자는 그녀에게 펜던트를 다시 걸어주었고 그 움직임은 진지하고 세심했다.순간 그녀는 남자의 다정함을 느꼈다.다정이라...윤혜인은 머릿속으로 곰곰이 생각했지만 지끈거리며 아플 뿐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쾅!소리와
송소미는 첫날만 해도 자신에게 친절하게 음식을 주고 깨끗한 옷을 입혀주던 어부를 떠올렸다.밤이 되자 송소미는 어차피 갈 곳이 없다는 생각에 어부를 따라 그가 가는 섬으로 향했다.하지만 그게 악몽의 시작이라는 걸 전혀 알지 못했다.늙은 어부는 나이를 가리지 않고 여러 여자를 감금했다.한 명이 죽으면 바로 다음 타깃을 물색하곤 했다.송소미가 도착했을 때 바로 앞에 있던 여자는 겨우 숨이 붙어있는 정도였고 다리와 온몸에 칼에 베인 상처가 가득했다.늙은 어부는 상처에 소금을 뿌리며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이래야 썩지 않지.”송소미는 그제야 자신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지옥으로 왔다는 걸 알고 두려움에 다리에 힘이 풀렸지만 감히 저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낮에는 늙은 어부를 위해 요리와 빨래를 하고 밤에는 늙은 어부에게 비인간적인 학대를 당했다. 그는 바다에서 이상한 약을 가져와 먹고는 기운 하나 남지 않을 때까지 괴롭혔다.보통은 밤새도록 지속되며 낮이 되어서야 겨우 잠에 들 수 있었다.송소미는 사람도, 귀신도 아닌 채로 그에게 고문을 당했고 몸 곳곳에서 고름이 나고 썩어가고 있었다.늙은 어부가 그녀를 가두고 다시 고기를 잡으러 나갈 때 그녀는 자신이 죽을 때가 왔다는 것을 알고 두려워했다.이 몸은 더 이상 가치가 없었다.다행히 그날 밤 어부가 아무것도 가지고 돌아오지 않자 송소미는 조심스럽게 늙은 어부에게 술을 먹이며 평소 먹던 약을 술에 잔뜩 탔다.그 약은 너무 많이 먹으면 독이 된다.늙은 어부는 처참하게 죽었고 그녀는 그의 집을 불태운 뒤 그의 배를 훔쳐서 도망쳤다.탈출하기 전에 늙은 어부의 돈을 훔쳐 작은 호텔에 숨어 지내며 감히 나오지 않았다.나중에 뉴스에서 늙은 어부의 섬에 불이 났다는 보도가 나왔고, 많은 시신이 발견되어 경찰이 조사한 결과 늙은 어부가 살인자라는 결론을 내렸다.열흘 정도 숨어 지낸 송소미는 치료비는커녕 돈 한 푼 가지고 있지 않았다.어느 날 그녀가 작은 호텔 방으로 돌아오자 갑자기 침대 위에 여분의 소포가
“네가 살아 있으면 150억이라도 줄 수 있지만 죽으면 한 푼도 못 받는다고 했어!”송소미의 입꼬리가 살짝 휘어지면서 본인은 달콤하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그 얼굴에 보는 이는 소름 끼치는 미소가 지어졌다.“널 무척 아끼는 것 같아!”윤혜인은 이준혁이 그런 말을 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채 당황했고 순간 묘한 감정이 들었다.송소미는 계속 말했다.“처음에는 나도 이준혁이 임세희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속으로는 너 같은 망할 년을 더 좋아할 줄 몰랐어. 나도 임세희한테 속은 거지. 너만 제거하면 그 여자가 네 자리를 차지하고 나도 이씨 가문의 힘을 이용해 정상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첫사랑 임세희도 널 이기지 못할 줄이야!”윤혜인은 익숙한 이름을 듣고 눈을 크게 떴다. “애초에 임세희가 날 납치하도록 시켰다는 말이야?”이전부터 의심은 했지만 임세희는 인정하지 않았고 송소미도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이 일은 임세희가 정신병원에 보내지면서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었다.송소미가 그 사건을 다시 언급하자 윤혜인의 눈에는 핏기가 돌며 목소리가 거칠어졌다.“내 아이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 거지!”송소미의 눈에 윤혜인은 곧 죽을 사람이라 당당하게 모든 걸 말해주었다.“임세희가 돈을 주면서 네가 병동에 있다고 알려준 덕분에 내가 미리 사람을 시켜서 지하 주차장에서 너를 납치했지. 그 여자가 납치당한 건 다 이준혁이 그 여자를 구하러 간 사이 너를 죽일 시간을 벌기 위해 벌인 자작극이었어! 그런데...”송소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윤혜인을 경멸의 눈빛으로 바라봤다.“내가 알려줘도 어쩌겠어, 임세희는 직접 사건에 가담하지도 않았는데 네가 뭘 할 수 있겠어?”윤혜인은 순간 머리끝까지 분노가 치밀어 올라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애초에 그 사건이 임세희와 연관 있을 거라고 이미 예상했다!진실을 알더라도 직접적인 증거를 제시할 수 없도록 영리하게 계략을 꾸민 것이었다.남의 손을 빌려 사람을 죽이다니!이런 극악무도한 여자 같으니라고!송소미도 사실 임
“준혁 오빠, 꽤 빠르네요!”“돈 주면 바로 사람 넘겨!” 이준혁이 말했다.“좋아요, 나도 한동안 준혁 오빠 못 봐서 보고 싶어요. 근데...”송소미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준혁 오빠가 너무 대단해서 내가 조금 무서워요.”이준혁은 참을성 있게 물었다. “원하는 게 뭐야?”“오빠가 먼저 칼로 자기 몸을 두 번 찔러요. 그럼 내가 위치를 알려줄 테니 혼자 들어와요.”이준혁은 차가운 미소를 짓더니 사람 한 명을 휴대폰 앞으로 끌어오며 말했다.“송소미, 네 엄마 목숨과 이 돈이면 충분하지 않나?”카메라 앞에 끌려온 문미정은 머리카락이 흐트러지고 입이 빨갛게 부은 걸 보아 매를 맞은 것 같았다.그녀는 울면서 호소했다.“소미야, 바보 같은 짓 하지 마! 준혁이한테 놓아주겠다고 약속해. 이 돈만 받고 신고하지 않으면 우린 해외로 가면 돼. 어리석은 짓 하지 마!”송소미는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문미정을 만나도 눈빛에 온기가 없고 경멸만이 가득했다.“준혁 오빠, 우리 엄마로 날 협박하려고? 그냥 죽여도 상관없어!”“그래?” 이준혁은 침착하게 말했다.“그럼 던져.”시속 100킬로미터가 넘는 고속도로에서 내동댕이친다는 것은 죽음으로 내모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문미정은 울부짖었다.“소미야,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난 네 엄마야! 어떻게 엄마를 죽게 내버려둘 수 있어!”송소미는 영상 너머로 격하게 소리를 질렀다.“엄마가 쓸모없는 인간만 아니었어도 내가 이 지경이 됐겠어? 그러게 왜 애초에 돈 많은 사람 꼬시지 않고 그런 겁쟁이를 만나서 일이 생기니까 바로 나를 내쫓게 했어. 다 엄마 탓이야. 엄마가 제대로 모시지 않아서 그 남자가 우릴 도와주지 않는 거라고! 내가 선택할 수 있다면 당신 같은 쓸모없는 엄마는 절대 선택하지 않았을 거야!”문미정은 당황해서 할 말을 잃었다.애지중지 키운 딸이 엄마의 목숨은 안중에도 없이 이런 식으로 얘기할 줄은 몰랐다.이기적인 송소미는 부모고 혈육이고 안중에도 없이 오직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지
이준혁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몸에 손을 댔고 칼날이 통째로 살에 박혔다.그의 잘생긴 얼굴은 순식간에 미세한 구슬땀으로 물들었고 고통을 억지로 참으며 칼을 빼냈다.“아악!”윤혜인은 입을 막은 채로 가슴 아픈 비명을 내뱉었다!“아아악!”말을 할 수 없었기에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며 화면을 향해 머리를 세차게 가로저었다.슬픔의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하지 마요!준혁 씨, 저 말 믿지 마요!송소미는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안타깝게도 이준혁은 이 소리 없는 외침을 들을 수 없었다.그녀는 이미 송소미의 의도를 간파했다. 이준혁이 힘을 잃기를 기다려 둘을 함께 죽일 생각이었다.애초에 그들을 보내주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그 순간 윤혜인의 가슴은 커다란 돌덩어리로 꽉 눌려 짓누르는 것만 같아 숨을 쉴 수가 없었다.대체 언제부터 이 남자를 신경 쓰기 시작한 걸까.그녀는 다시는 그렇게 쉽게 넘어지지 않겠다고 수없이 스스로에게 경고했다.하지만 이 순간, 그녀는 마음속에 굳어버린 단단한 얼음이 또다시 남자 때문에 녹아내려 흐르는 강물이 되고 말았다.“하하하하...”송소미는 화면을 보며 우는 것보다 더 듣기 싫은 웃음소리를 내더니 잔뜩 비꼬며 말했다.“준혁 오빠, 아주 잘했어요!”이 칼질 한 번에 송소미는 통쾌하고 속이 시원해서 곧바로 재촉했다.“아직 한번 남았어요.”푹-이준혁은 마디가 두드러진 손으로 칼자루를 꽉 움켜쥐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다리를 찌른 뒤 곧바로 칼을 뽑아 바닥에 던졌다.“이제 됐어?” 이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됐어요. 이제 혼자 갈대숲을 따라 들어와요. 다른 사람들이 보이면 내가 바로...”송소미는 칼을 윤혜인의 목에 대고 목을 긋는 동작을 취했다.순식간에 날카로운 칼날이 연약한 피부를 스치며 윤혜인의 목에는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알아요! 혜인이는 건드리지 마!”이준혁의 표정이 확 굳어지며 으름장을 놓았다.늘 침착하고 차분하던 남자가 순식간에 이성을
그 누구든 오랫동안 보지 못한 아이를 본다면 차분함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게다가 윤아름처럼 아이를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윤아름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멍한 표정이었다.원진우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번에는 정말 연기가 아닌 진짜였다. 윤혜인의 쓸모도 이제 끝났기에 원진우는 윤혜인의 손에 올렸던 발을 뗐고는 입을 열었다.“온도 영하 80도로 내려.”“!”윤혜인이 화들짝 놀랐다. 이건 윤혜인을 산채로 냉동시켜 저번에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내겠다는 뜻이었다. 원진우가 시야에서 점점 멀어지자 윤혜인은 이번 기회를 놓치고 원진우가 문밖으로 나서는 날에는 죽음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어떻게 해야만 살 수 있을까...’윤혜인은 죽기 싫었다. 살아서 엄마를 구하고 오빠가 오기를 기다리고 싶었다. 윤혜인은 윤아름의 얼굴을 떠올리다 갑자기 자지러지게 소리를 질렀다.“원진우!”윤혜인이 성까지 붙여서 부르자 아니나 다를까 원진우가 걸음을 멈추더니 윤혜인을 돌아봤다. 윤혜인은 혀끝을 꽉 깨물었다. 피비린내가 혀끝에서 느껴져서야 윤혜인은 정신을 조금 차릴 수 있었다. 윤혜인의 목은 마르고 갈라져 있었다.“내가 누구 딸인지 생각해 본 적 없어요?”윤혜인을 보는 원진우의 눈빛에서 보기 드물게 두려움이 묻어났다. 비록 몇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윤혜인이 그 눈빛을 캐치하고는 반은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머지 반이야말로 윤혜인이 살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는 핵심이었다. 윤혜인은 원진우에게 고민할 기회도 주지 않고 꿋꿋하게 말했다.“삼촌, 그렇게 총명하신 분이 이미 눈치채고 계신 거 아니에요? 경천 오빠랑 나랑 친 남매가 아닌 건 알고 있잖아요. 아버지가 왜 직접 낳지 않고 남자아이를 입양했는지 생각해 본 적 없어요?”원진우가 윤혜인을 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혹시 지금 내 딸이라고 하고 싶은 거예요?”“머리는 썼는데 나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서 그렇게 쉽게 속지 않아요.”원진우가 이렇게 말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
턱에서 전해진 고통에 윤혜인은 호흡이 가빠졌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했다.“엄마 좀 만나게 해줘요... 딱 한 번만요... 그다음에는 어떻게 하든 다 좋아요...”“꿈도 꾸지 마요.”원진우가 윤혜인을 바닥으로 내팽개치더니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원진우가 여신으로 받드는 사람이 다른 남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았다니, 이런 오점은 반드시 지워야 했다.윤혜인은 턱이 빠질 것처럼 아팠지만 여전히 울면서 애원했다.“딱 한 번만요. 한 번만 엄마를 만나게 해줘요. 제발 부탁이에요... 죽어도 눈은 감고 죽어야죠...”원진우는 윤혜인이 죽음을 앞두고 자기 걱정보다는 엄마를 만나고 싶다는 말에 흥미를 느꼈다.“혜인 씨는 만나고 싶어도 아름이는 생각이 다를 수도 있죠.”이 말에 윤혜인이 고개를 저었다.“거짓말하지 마요. 엄마가 왜 나를 만나려 하지 않겠어요? 엄마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당신이 납치하면서 나를 버리지만 않았어도 우리는 행복하게 살았을 거라고요.”“명을 재촉하는 꼴이라니.”원진우가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그렇다면 만족시켜 줄게요.”원진우가 손뼉을 치자 대문 하나가 열렸다. 불빛이 들어와서야 윤혜인은 지금 있는 곳이 냉동창고라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원진우는 전혀 추위를 타지 않았다. 특수 제작한 옷을 입고 있어 냉동창고에 있어도 추위를 막을 수 있었다. 까만 옷을 입은 사람이 휠체어를 밀고 들어왔다. 하지만 반사 때문에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 누군지 잘 보이지 않았다. 원진우가 그쪽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받아와 가까이 밀고 와서야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윤혜인은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릴 적 기억들이 물밀듯 밀려왔다. 여자가 자장가를 부르며 아이를 달래는 장면, 여자가 어린 윤혜인의 손을 잡고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는 장면이 떠올랐다. 시간이 흘러도 여자의 얼굴은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윤혜인과 자매라고 해도 믿을 사람이 적지 않을
“당신...”윤혜인이 이를 악물었다. 너무 흥분해서 그런지 이 말을 빼고는 다른 말이 나가지 않았다.“급해할 거 없어요. 천천히 해요.”원진우가 오히려 웃으며 윤혜인을 다독였다. 윤혜인은 손에 칼만 있었다면 앞에 앉아 있는 이 남자를 죽이고 싶었지만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니, 칼이 있다고 해도 절대 이 남자를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경계가 삼엄한 배씨 정원에서 윤혜인을 납치했다는 건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말이었다. 윤혜인은 속으로 원망해도 흥분해도 쓸데없다고 자기 자신을 타일렀다. 이런 남자를 상대하려면 최대한 차분함을 유지하며 기회를 찾아야 했다. 윤혜인은 주먹을 꽉 움켜쥐는 것으로 최대한 차분해지려 애썼다.“왜 나를 죽이려는 거예요?”윤혜인이 물었다. 이 문제가 약간은 바보 같아 보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원진우가 윤혜인을 죽이고 싶어 하는 이유라면 아마도 윤혜인이 윤아름의 아이여서일 것이다. 그리고 윤혜인이 관찰한 데 의하면 원진우는 총명한 사람을 싫어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멍청한 척, 무서운 척하며 상대의 경계심을 푸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사실 윤혜인도 원진우가 어떻게 윤혜인이 어릴 때 찾아온 건지 알고 싶었다.원진우는 순진해 보이는 윤혜인의 얼굴을 보며 온화하게 웃었다.“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점이 생기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죠. 윤혜인 씨의 존재가 딱 그 오점이거든요.”“...”윤혜인은 할 말을 잃었다. 원진우는 미친 게 틀림없었다. 윤혜인이 입술을 앙다물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어릴 때는 어떻게 찾아온 거예요?”“그때는 우연히 마주친 거예요.”원진우가 웃으며 말했다.“양아버지가 혜인 씨를 그렇게 보호할 줄은 몰랐는데. 명이 질기네요.”원진우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웃음이 점점 음침해졌다.“춥디추운 그날 밤에도 죽지 않고 살았고, 쓰레기 봉지에 담아놔도 안 죽고 살아있으니...”윤혜인이 화들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당신이었어요...?”저 정도면 답을 준 거나 마
이에 양아버지는 남자가 어린 윤혜인을 노린다는 걸 확신했다. 그 시절 화려한 옷을 입고 비싼 차를 끌고 다니는 남자를 유괴범이라 외친다면 믿을 사람도 없을뿐더러 성가신 일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작은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돈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런 짓을 절대 하지 않을 거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그러니 이 남자도 대담하게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양아버지는 남자가 느긋하게 두 사람을 향해 걸어오자 얼른 어린 윤혜인을 안고 앞으로 뛰기 시작했다. 어린 윤혜인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길이 없었기에 케이크가 바닥에 떨어지자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아빠, 케이크... 케이크...”아이의 눈에 케이크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어린 윤혜인이 눈시울을 붉히며 망가진 케이크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양아버지의 품에서 벗어나려 하자 양아버지가 숨을 헐떡이며 다독였다.“착하지. 아빠가 다시 사줄게.”어린 윤혜인은 너무 속상해 양아버지의 몸에 엎드린 채 양아버지의 등 뒤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거리를 내다봤다. 어린 윤혜인은 양아버지가 왜 갑자기 이렇게 뛰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양아버지의 당황한 모습을 보며 이내 얌전하게 양아버지의 목을 감싸더니 어깨에 기대어 북받치는 서러움을 꾹꾹 눌렀다. 어린 윤혜인은 나이가 어렸기에 양아버지처럼 곧 들이닥칠 위험을 감지하지는 못했다. 차갑고 끈적한 구덩이에 빠져있는 어린 윤혜인은 빨간 벨벳 슈트를 입은 남자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윤혜인은 너무 무서워 눈을 부릅뜬 채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두려움과 울분이 목에 걸려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 남자는 5미터쯤 떨어진 곳에 멈추더니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진 다리를 들더니 양아버지의 얼굴에 던져버렸다.“허허.”남자가 음침하게 웃더니 제 딴에는 재밌다고 생각하는 말을 내뱉었다.“그러게 누가 그렇게 빨리 달리래? 그러니까 다리까지 나가떨어지는 거 아니야.”남자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먹구름이 밀려오
칠흑 같은 밤과 뼈저린 추위, 그리고 아까 맞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비까지, 모든 상황이 똑같이 맞아떨어졌다. 양아버지가 어린 윤혜인을 안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길에서 달리다가 바닥에 철퍼덕 넘어졌다. 작고 연약한 어린 윤혜인은 포물선을 그리다 옆에 있던 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의 몸과 얼굴은 흙이 잔뜩 묻었고 무성한 갈대에 가려져 시커먼 진흙과 한 몸이 되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이 겨우 몸을 일으켜 양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려는데 양아버지가 어린 윤혜인을 향해 힘껏 고개를 저었다. 넘어져서 몸을 다친 양아버지는 몸이 찢어질 듯이 아팠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어린 윤혜인을 안았던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어린 윤혜인은 그런 양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구덩이에 빠져있는 걸 양아버지도 분명히 봤는데 양아버지가 왜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내달리는지 말이다. 어린 윤혜인은 그렇게 넋을 놓고 한참 동안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빨간 스포츠카가 하늘이 떠나갈 것 같은 엔진소리와 함께 양아버지 뒤를 쫓았다. 앞에서 달리던 양아버지는 그렇게 차에 치여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은 양아버지의 다리가 몸에서 완전히 분리되더니 다른 곳으로 날아가는 걸 목격했다. 심지어 그중 한쪽이 어린 윤혜인 앞에 떨어졌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뭉개진 다리였다. 바닥에 쓰러진 양아버지의 얼굴도 어린 윤혜인을 향해 있었다. 눈을 부릅뜬 모습이 마치 절대 소리를 내면 안 된다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어린 윤혜인은 초점을 잃고 퀭한 양아버지의 두 눈을 보며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목구멍에 뭐가 걸린 것처럼 정말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어린 윤혜인은 죽을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범퍼가 깨진 스포츠카에서 빨간 벨벳 슈틀 입은 남자가 내려왔다. 어린 윤혜인은 얼굴은 매혹적이고 잘생긴 남자가 얼마나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르는지 똑똑히 보았다. 남자는 몸통이 절반 뜯어져 나간 양아버지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윤혜인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배남준은 바로 사람을 데리고 원진우를 가둬둔 곳으로 향해 굳게 닫힌 문을 열었지만 안에 누워있는 사람은 원진우를 데리고 옷을 갈아입으러 간 도우미였다. 원진우가 입고 있던 하얀 슈트를 입고 있는 도우미는 이미 숨이 끊어진 지 오래였다.CCTV를 확인한 배남준은 사각지대에서 나온 두 사람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발견했다. ‘원진우’의 걸음걸이가 어딘가 이상했다. 원진우와 도우미는 체격이 달랐다. 이미 숨이 끊어진 도우미의 신발을 벗겨보니 안에서 진흙이 가득 나왔다. 다시 영상을 확인해 보니 뒤에서 걸어가는 도우미는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었고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때 이미 도우미가 바뀌었으니 가둔 사람은 원진우가 아닌 도우미였다. 도우미의 시신 상태를 보면 아마 원진우가 준 독을 먹고 문을 닫자마자 바로 독이 온몸으로 퍼져 숨을 끊은 것 같았다.이준혁은 영상에서 원진우가 입은 옷을 관찰했다. 전에 조사한 것과 다른 착장이었다. 이준혁이 조사한 데 의하면 원진우는 계절을 막론하고 구두를 신는다고 나왔지만 오늘 신은 건 긴 부츠였다. 이준혁은 바로 원진우가 처음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렇다면 곽경천도 위험을 피치는 못할 것이다. 이를 깨달은 순간 이준혁은 곽경천에게 전화를 걸었다.현재 북안도를 떠날 수 있는 구멍은 다 막힌 상태였다. 이준혁이 미리 상부에 연락해 모든 루트를 봉쇄하고 원진우를 수배했다. 이준혁은 원진우가 힘들게 윤혜인을 납치해 갔으니 절대 죽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필요 없는 사람은 바로 죽이는 게 원진우 스타일이지만 윤혜인을 데려갔다는 건 쓸모가 있다는 말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쓸모일지는 윤혜인도 알 수 없었다.원진우의 별장으로 향하는 길에 이준혁은 굉음을 듣게 되었다. 원진우의 별장이 있는 방향에서 하늘을 찌를 듯한 연기가 솟아 올라오더니 버섯 모양의 구름을 만들었다.화들짝 놀란 배남준이 체면을 차릴 겨를 없이 큰 소리로 말했다.“경천아.”
곽경천은 갑자기 손으로 내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오랫동안 어머니의 실종은 마음에 박힌 가시와도 같았다. 비록 윤아름이 친엄마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고 짧은 만남이었지만 윤아름에게서 받은 사랑은 적지 않았다. 윤아름은 곽경천을 친자처럼 아끼며 보살펴줬다. 그때부터 곽경천은 앞으로 엄마와 동생을 잘 보호해야겠다고 다짐했지만 크면서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 윤혜인도 옆에 있고 어머니와도 곧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래도 꾹 참고 손을 뻗는데 급박한 전화 소리가 울렸다. 곽경천이 들고 온 건 위성 전화라 배남준만 알고 있었다. 곽경천은 전화를 받으면서도 여자의 머리만 뚫어져라 쳐다봤다.“여보세요?”“30초, 30초밖에 안 남았어요. 얼른 나와요.”수화기 너머로 들린 건 배남준의 목소리가 아니라 이준혁이었다. 이준혁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형님, 그 지하실에 폭탄이 가득 설치되어 있어요. 얼른 사람들 데리고 나와요.”곽경천이 넋을 놓고 있는데 이준혁이 급박하게 말했다.“형님, 함정이에요. 원진우는 이미 도망갔어요. 처음부터 형님이 세운 계획을 알고 있었더라고요. 지금 당장 나와요.”곽경천은 이준혁이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포기하기는 싫었다.“폭탄이 설치되어 있으니까 얼른 나가요. 얼른.”같이 들어온 사람들이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래도 곽경천이 같이 떠나길 기다렸다.“먼저 나가요. 명령이에요. 나도 곧 따라 나갈게요.”곽경천이 이렇게 말했다. 팀원들이 어쩔 수 없이 명령에 따라 밖으로 나가고 곽경천이 손을 내밀어 ‘여자’의 어깨를 잡고 돌렸다.데굴데굴.여자의 머리가 곽경천의 발치로 굴러떨어졌다. 깜짝 놀란 곽경천은 순간 목구멍에서 단내가 느껴졌다.‘설... 설마 엄마?’한 번 더 자세히 보다 보니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죽은 지 꽤 오래된 시신인지 목 부분에 부패가 시작되었지만 얼굴은 아직 보존이 잘 되어 있었다. 북안도의 날씨가 유독 추웠기에
원진우를 기다리고 있는 건 한번 들어가면 굳게 닫히는 문이었다. 이게 곽경천이 세운 2번째 방안이었다. 첫 번째 방안인 술이 실패하면 원진우를 무력으로 제압하기 어려운 데다가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모르기에 일단은 특정한 방으로 유인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다. 윤아름을 차질 없이 구해내면서 다른 사상자를 내지 않는 제일 좋은 방법은 바로 원진우를 안에 가둬놓는 것이었다.윤혜인은 원진우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마음이 불안해져 다른 사람이 와서 술을 권하는 것도 보지 못했다. 배남준은 현장에 원진우가 보낸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얼른 윤혜인에게 귀띔했다. 잘못하면 원진우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경계하면 계획이 틀어질 수도 있다.그렇게 10분쯤 지났을까, 윤혜인의 이어폰에서 비서 도지훈의 목소리가 들렸다.“누나, 원진우 안에 가뒀어요.”윤혜인은 그제야 길게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악당을 가뒀으니 곽경천도 일단 한시름 놓고 윤아름을 구해낼 일만 남았다. 윤혜인이 배남준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배남준은 바로 무슨 뜻인지 알아채고는 다른 사람에게 윤혜인이 몸이 좋지 않아 먼저 일어난다고 하고는 현장을 빠져나갔다. 잠깐 얼굴을 비췄던 아이들은 너무 칭얼대서 다시 데리고 들어갔다.사실 두 아이는 곽경천이 주문 제작한 인형이었다. 실제와 다를 것 없이 잘 만들기도 했고 미리 녹음한 아이의 녹음 소리를 안에 넣어뒀다. 곽경천은 처음에 밖에서 다른 아이 둘을 찾아 대체하는 게 어떻겠냐고 했지만 윤혜인이 거절했다. 엄마가 되고 나서 아이가 곧 엄마에겐 목숨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심전심으로 자기 아이가 다치는 게 싫다면 다른 사람의 아이를 위험에 빠트리는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오늘 날씨가 추워 아이는 인큐베이터에 누워 있었기에 멀리서 볼 수밖에 없었고 칭얼대는 소리로 퍽 리얼해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 있었다.윤혜인은 방으로 돌아와 초조하게 곽경천의 소식을 기다렸다. 마음이 불안해서 그런지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방안을 계속
윤혜인은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들어 원진우를 향해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삼촌, 제가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한 잔 먼저 마시겠습니다.”그러더니 금세 잔을 비웠다.그녀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잔에 들어 있던 술에는 몇 시간 동안 상대를 잠들게 하는 특수 성분이 들어 있었다.그러나 윤혜인은 미리 해독제를 복용해둔 상태였고 원진우의 경계를 풀게 하려고 같은 술을 마신 것처럼 보이게 했다.원진우 같은 교활한 상대에게는 대화나 교섭보다는 이런 방법이 가장 안전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윤혜인이 잔을 비워도 원진우는 여전히 미동조차 없이 술잔을 들지 않았다.초조해진 윤혜인은 도우미를 다시 불러 그의 잔을 채우게 했다.“앞으로도 저 잘 봐주셨으면 하니까 또 한잔 올리겠습니다.”한국인 사이에서 ‘두 잔’은 최고의 예우를 의미하기 때문에 원진우도 어른으로서 이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만약 거절한다면 그의 인품에 오점이 생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마침내 원진우는 천천히 잔을 들고 그녀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그러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잔이 입술에 가까워지려는 순간, 그는 갑자기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아, 깜빡했군. 오기 전에 집에서 의사에게 받은 약을 먹었는데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세 시간 동안은 물도 마실 수 없다고 했어요.”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윤혜인은 분노로 속이 끓어올랐지만 원진우가 댄 이유가 합리적이었기에 반박할 수 없었다. 첫 번째 계획은 명백히 실패한 셈이었다.곧 원진우가 자리를 뜨려 하자 윤혜인은 재빨리 다음 계획으로 전환했다.원진우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 그녀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하며 말했다.“들은 바에 의하면 해외 무역에 아주 조예가 깊으시다고 하던데 저희 집도 국제 해운업에 종사하고 있어서 몇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시간 괜찮으신가요?”그러자 원진우는 잠시 멈춰서서 따뜻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물어봐요.”이윽고 윤혜인은 몇 가지 질문을 던졌는데 모두 해외 무역의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