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소미는 첫날만 해도 자신에게 친절하게 음식을 주고 깨끗한 옷을 입혀주던 어부를 떠올렸다.밤이 되자 송소미는 어차피 갈 곳이 없다는 생각에 어부를 따라 그가 가는 섬으로 향했다.하지만 그게 악몽의 시작이라는 걸 전혀 알지 못했다.늙은 어부는 나이를 가리지 않고 여러 여자를 감금했다.한 명이 죽으면 바로 다음 타깃을 물색하곤 했다.송소미가 도착했을 때 바로 앞에 있던 여자는 겨우 숨이 붙어있는 정도였고 다리와 온몸에 칼에 베인 상처가 가득했다.늙은 어부는 상처에 소금을 뿌리며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이래야 썩지 않지.”송소미는 그제야 자신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지옥으로 왔다는 걸 알고 두려움에 다리에 힘이 풀렸지만 감히 저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낮에는 늙은 어부를 위해 요리와 빨래를 하고 밤에는 늙은 어부에게 비인간적인 학대를 당했다. 그는 바다에서 이상한 약을 가져와 먹고는 기운 하나 남지 않을 때까지 괴롭혔다.보통은 밤새도록 지속되며 낮이 되어서야 겨우 잠에 들 수 있었다.송소미는 사람도, 귀신도 아닌 채로 그에게 고문을 당했고 몸 곳곳에서 고름이 나고 썩어가고 있었다.늙은 어부가 그녀를 가두고 다시 고기를 잡으러 나갈 때 그녀는 자신이 죽을 때가 왔다는 것을 알고 두려워했다.이 몸은 더 이상 가치가 없었다.다행히 그날 밤 어부가 아무것도 가지고 돌아오지 않자 송소미는 조심스럽게 늙은 어부에게 술을 먹이며 평소 먹던 약을 술에 잔뜩 탔다.그 약은 너무 많이 먹으면 독이 된다.늙은 어부는 처참하게 죽었고 그녀는 그의 집을 불태운 뒤 그의 배를 훔쳐서 도망쳤다.탈출하기 전에 늙은 어부의 돈을 훔쳐 작은 호텔에 숨어 지내며 감히 나오지 않았다.나중에 뉴스에서 늙은 어부의 섬에 불이 났다는 보도가 나왔고, 많은 시신이 발견되어 경찰이 조사한 결과 늙은 어부가 살인자라는 결론을 내렸다.열흘 정도 숨어 지낸 송소미는 치료비는커녕 돈 한 푼 가지고 있지 않았다.어느 날 그녀가 작은 호텔 방으로 돌아오자 갑자기 침대 위에 여분의 소포가
“네가 살아 있으면 150억이라도 줄 수 있지만 죽으면 한 푼도 못 받는다고 했어!”송소미의 입꼬리가 살짝 휘어지면서 본인은 달콤하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그 얼굴에 보는 이는 소름 끼치는 미소가 지어졌다.“널 무척 아끼는 것 같아!”윤혜인은 이준혁이 그런 말을 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채 당황했고 순간 묘한 감정이 들었다.송소미는 계속 말했다.“처음에는 나도 이준혁이 임세희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속으로는 너 같은 망할 년을 더 좋아할 줄 몰랐어. 나도 임세희한테 속은 거지. 너만 제거하면 그 여자가 네 자리를 차지하고 나도 이씨 가문의 힘을 이용해 정상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첫사랑 임세희도 널 이기지 못할 줄이야!”윤혜인은 익숙한 이름을 듣고 눈을 크게 떴다. “애초에 임세희가 날 납치하도록 시켰다는 말이야?”이전부터 의심은 했지만 임세희는 인정하지 않았고 송소미도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이 일은 임세희가 정신병원에 보내지면서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었다.송소미가 그 사건을 다시 언급하자 윤혜인의 눈에는 핏기가 돌며 목소리가 거칠어졌다.“내 아이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 거지!”송소미의 눈에 윤혜인은 곧 죽을 사람이라 당당하게 모든 걸 말해주었다.“임세희가 돈을 주면서 네가 병동에 있다고 알려준 덕분에 내가 미리 사람을 시켜서 지하 주차장에서 너를 납치했지. 그 여자가 납치당한 건 다 이준혁이 그 여자를 구하러 간 사이 너를 죽일 시간을 벌기 위해 벌인 자작극이었어! 그런데...”송소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윤혜인을 경멸의 눈빛으로 바라봤다.“내가 알려줘도 어쩌겠어, 임세희는 직접 사건에 가담하지도 않았는데 네가 뭘 할 수 있겠어?”윤혜인은 순간 머리끝까지 분노가 치밀어 올라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애초에 그 사건이 임세희와 연관 있을 거라고 이미 예상했다!진실을 알더라도 직접적인 증거를 제시할 수 없도록 영리하게 계략을 꾸민 것이었다.남의 손을 빌려 사람을 죽이다니!이런 극악무도한 여자 같으니라고!송소미도 사실 임
“준혁 오빠, 꽤 빠르네요!”“돈 주면 바로 사람 넘겨!” 이준혁이 말했다.“좋아요, 나도 한동안 준혁 오빠 못 봐서 보고 싶어요. 근데...”송소미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준혁 오빠가 너무 대단해서 내가 조금 무서워요.”이준혁은 참을성 있게 물었다. “원하는 게 뭐야?”“오빠가 먼저 칼로 자기 몸을 두 번 찔러요. 그럼 내가 위치를 알려줄 테니 혼자 들어와요.”이준혁은 차가운 미소를 짓더니 사람 한 명을 휴대폰 앞으로 끌어오며 말했다.“송소미, 네 엄마 목숨과 이 돈이면 충분하지 않나?”카메라 앞에 끌려온 문미정은 머리카락이 흐트러지고 입이 빨갛게 부은 걸 보아 매를 맞은 것 같았다.그녀는 울면서 호소했다.“소미야, 바보 같은 짓 하지 마! 준혁이한테 놓아주겠다고 약속해. 이 돈만 받고 신고하지 않으면 우린 해외로 가면 돼. 어리석은 짓 하지 마!”송소미는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문미정을 만나도 눈빛에 온기가 없고 경멸만이 가득했다.“준혁 오빠, 우리 엄마로 날 협박하려고? 그냥 죽여도 상관없어!”“그래?” 이준혁은 침착하게 말했다.“그럼 던져.”시속 100킬로미터가 넘는 고속도로에서 내동댕이친다는 것은 죽음으로 내모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문미정은 울부짖었다.“소미야,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난 네 엄마야! 어떻게 엄마를 죽게 내버려둘 수 있어!”송소미는 영상 너머로 격하게 소리를 질렀다.“엄마가 쓸모없는 인간만 아니었어도 내가 이 지경이 됐겠어? 그러게 왜 애초에 돈 많은 사람 꼬시지 않고 그런 겁쟁이를 만나서 일이 생기니까 바로 나를 내쫓게 했어. 다 엄마 탓이야. 엄마가 제대로 모시지 않아서 그 남자가 우릴 도와주지 않는 거라고! 내가 선택할 수 있다면 당신 같은 쓸모없는 엄마는 절대 선택하지 않았을 거야!”문미정은 당황해서 할 말을 잃었다.애지중지 키운 딸이 엄마의 목숨은 안중에도 없이 이런 식으로 얘기할 줄은 몰랐다.이기적인 송소미는 부모고 혈육이고 안중에도 없이 오직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지
이준혁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몸에 손을 댔고 칼날이 통째로 살에 박혔다.그의 잘생긴 얼굴은 순식간에 미세한 구슬땀으로 물들었고 고통을 억지로 참으며 칼을 빼냈다.“아악!”윤혜인은 입을 막은 채로 가슴 아픈 비명을 내뱉었다!“아아악!”말을 할 수 없었기에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며 화면을 향해 머리를 세차게 가로저었다.슬픔의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하지 마요!준혁 씨, 저 말 믿지 마요!송소미는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안타깝게도 이준혁은 이 소리 없는 외침을 들을 수 없었다.그녀는 이미 송소미의 의도를 간파했다. 이준혁이 힘을 잃기를 기다려 둘을 함께 죽일 생각이었다.애초에 그들을 보내주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그 순간 윤혜인의 가슴은 커다란 돌덩어리로 꽉 눌려 짓누르는 것만 같아 숨을 쉴 수가 없었다.대체 언제부터 이 남자를 신경 쓰기 시작한 걸까.그녀는 다시는 그렇게 쉽게 넘어지지 않겠다고 수없이 스스로에게 경고했다.하지만 이 순간, 그녀는 마음속에 굳어버린 단단한 얼음이 또다시 남자 때문에 녹아내려 흐르는 강물이 되고 말았다.“하하하하...”송소미는 화면을 보며 우는 것보다 더 듣기 싫은 웃음소리를 내더니 잔뜩 비꼬며 말했다.“준혁 오빠, 아주 잘했어요!”이 칼질 한 번에 송소미는 통쾌하고 속이 시원해서 곧바로 재촉했다.“아직 한번 남았어요.”푹-이준혁은 마디가 두드러진 손으로 칼자루를 꽉 움켜쥐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다리를 찌른 뒤 곧바로 칼을 뽑아 바닥에 던졌다.“이제 됐어?” 이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됐어요. 이제 혼자 갈대숲을 따라 들어와요. 다른 사람들이 보이면 내가 바로...”송소미는 칼을 윤혜인의 목에 대고 목을 긋는 동작을 취했다.순식간에 날카로운 칼날이 연약한 피부를 스치며 윤혜인의 목에는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알아요! 혜인이는 건드리지 마!”이준혁의 표정이 확 굳어지며 으름장을 놓았다.늘 침착하고 차분하던 남자가 순식간에 이성을
송소미가 흥분한 채 다시 한번 칼을 들어 베기를 기다리던 윤혜인은 기회를 엿보다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서걱-송소미의 칼날이 마침 윤혜인 손에 묶여있던 밧줄을 베었지만 동시에 윤혜인의 팔에도 상처가 났고 순식간에 피가 솟구쳤다.윤혜인은 고통을 견디며 칼을 향해 돌진했다.송소미는 오랫동안 학대를 당해 온 터라 몸이 약해진 탓에 윤혜인보다 힘이 강하지 않았다.원래는 이준혁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준혁이 무력해질 때까지 계속 고문한 다음, 윤혜인을 한 방에 찔러서 고통스럽게 끝낼 생각이었고 그렇게 두 사람을 동시에 보내려 했다.그런데 윤혜인이 먼저 반격할 줄이야!지금 송소미의 유일한 무기는 손에 쥔 칼뿐이라 필사적으로 칼을 휘두르며 윤혜인의 얼굴을 베려고 했다.윤혜인은 막아내지 못하고 연이어 후퇴하며 기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윤혜인의 손에 묶인 결박은 사라졌지만 팔의 부상으로 인해 거동이 크게 불편해졌다.송소미는 피식 웃으며 일어서더니 얼굴이 일그러지고 흉측하게 변했다.“이 나쁜 년, 너를 제대로 고문하고 괴롭히다가 죽이려고 했는데 그렇게 원하니 지금 당장 죽여주마!”그녀는 칼을 휘두르며 미친 듯이 달려들었고 윤혜인은 싸우지 않고 뒤로 피하기만 했다.이제 통제에서 벗어난 그녀는 이준혁이 오기만 기다린 뒤 별다른 위협만 없다면 두 사람이 함께 송소미 한 명을 상대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하지만 역시나 송소미의 미친 상태를 과소평가한 그녀는 송소미가 주머니에서 하얀 알약 몇 알을 꺼내 그대로 삼키는 것을 보았다.이건 늙은 어부가 먹던 흥분제로 바다 밑 물고기 기름으로 만든 것인데, 매번 두 알을 먹고 나면 그는 힘이 거대해져 밤새도록 괴롭혀댔다.송소미는 마지막에 알약 열 몇 개를 가루로 만들어 그를 죽일 수 있었다.지금 몇 알 먹었다고 죽지는 않겠지만 힘은 무척 세질 것이다.송소미는 윤혜인을 향해 힘차게 돌진하며 독하게 욕설을 내뱉었다.“이 나쁜 년! 지옥에나 가!”털썩-윤혜인은 그녀에 의해 바닥에 쓰러졌다.날카로운
바닥에 쓰러진 이준혁은 몇 번을 애를 써도 일어나지 못했다.다리를 못 쓰는 사람처럼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는 느낌이 들었다.마치 심장마저 멈춘 듯 온몸이 굳어버렸다.“대표님!”사람들과 함께 들어온 주훈은 이준혁의 시선을 따라 바닥에 어두운 그림자와 크게 벌어진 피 웅덩이를 보았다.크고 작은 일들을 많이 봐왔지만 그도 눈앞에 펼쳐진 장면을 보고는 영혼이 날아갈 것 같았다!입을 벙긋하던 주훈은 목이 메었다.“사모님...”이준혁은 부축하려는 주훈의 손을 뿌리치고 검은 그림자를 가리켰다.“가... 확인해.”직접 눈으로 보기 전에 그는 믿지 않을 것이다.“네!”주훈은 즉시 앞으로 나아가 어두운 그림자 쪽으로 가서 확인했다.그러나 사람은 아래를 향한 채 떨어졌고 넘어지면서 심하게 다쳐 여성으로 보이는 형체를 제외하고는 얼굴은 진작 훼손된 상태였다.바닥에는 커다란 피 웅덩이가 고였고 끈적끈적한 선홍색 피가 뿜어져 나오는 걸 보아 머리가 터진 것 같았다. 그 장면은 너무 끔찍해서 누구도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경호원 한 명이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구토를 했다.주훈은 몸을 웅크린 채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장신구 같은 것이 있는지 확인하려 했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사모님이 맞든 아니든 이대로 놔두는 것도 좋지 않았기에 주훈은 사람을 시켜 검은 천으로 시체를 덮게 했다.“맞아?”뒤에서 얼음장처럼 차가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주훈이 뒤를 돌아보자 어느 틈엔가 이준혁이 다가와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대답했다.“대표님, 죄송하지만 정말 모르겠습니다.”이준혁이 차갑게 쏘아붙였다.“비켜!”주훈은 그의 의도를 감지했다. 직접 확인하려는 듯했으나 그 형체는 차마 보기 흉했다. 만약 진짜 사모님이라면 이는 평생 그의 악몽이 될 것 같았다.그가 나서서 말렸다. “대표님, 차라리 의사의 판단을 기다리시죠. 보기 그렇습니다.”그는 에둘러 말했다. 현장은 보통 보기 힘든 게 아니라 눈 뜨고 봐줄 수 없는 지경이었다.선홍색과 붉
“윤혜인...”윤혜인은 고개를 돌려 남자에게 물었다. “오빠, 괜찮아요?”한구운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입가에는 아직도 피가 고여 있었고 혹시 장기라도 다친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괜찮아... 혹시나 잘못되면 우리 부모님 좀 부탁해...”“그럴 리 없어요!” 윤혜인은 단호하게 말하며 얼굴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오빠 괜찮을 거예요, 괜찮을 거야...”윤혜인의 머릿속은 아직 멍한 상태였다. 조금 전 지쳐서 몸부림치는 것을 포기하자 송소미의 칼이 그녀의 살갗을 스쳐 지나갔고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한구운이 튀어나와 단숨에 송소미에게 달려들어 아래로 함께 떨어졌다.윤혜인은 바닥에 흩뿌려진 피를 보며 그도 죽었다는 생각에 무너져 내리기 직전이었다.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키자 다행히 아직 의식을 잃지 않고 누워있는 선배를 보며 윤혜인의 마음은 감사함으로 가득 찼다.다행히 선배는 죽지 않았지만 자칫 자신 때문에 그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았을 것이다!다행이라 여기면서도 여전히 마음이 쿵쾅거렸다.조금만, 아주 조금만 늦었어도 얼굴이 일그러진 채 바닥에 누워 있는 사람이 자신이 될 뻔했다.이준혁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그녀가 연락이 끊긴 순간부터 그의 심장은 단 1초도 긴장을 늦출 틈도 없이 팽팽히 당겨져 있었다.언뜻 바닥에 쓰러진 사람이 그녀라고 생각했을 때 그의 심장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심하게 찢어지는 것 같았고 지금까지도 통증이 느껴졌다.무사한 그녀의 모습에 얼마나 가슴이 뛰었는지, 너무도 기쁜 나머지 그대로 그녀를 품에 안고 싶은 걸 얼마나 참았는지 오직 하늘만이 알 것이다.하지만 그녀는...그녀의 눈에는 오직 한구운만 보이는 듯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을 쳐다보지 않았다.그 순간 이준혁의 심장은 다시 한번 칼에 찔린 듯했고 뼈가 시릴 정도로 차가워졌다.그는 자신이 여기 서 있는 자체가 그토록 초라하게 우습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구급대원들이 이준혁에게 들것에 타라고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그는 심하게 다친 다리를 고통스럽게 앞으로 끌고 가면서 이 고통을 조금 더 단단히 기억하고 싶었다.나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저 여자를 위해 다시는 멍청한 짓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윤혜인은 차갑고 무정한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누군가 심장을 움켜쥐는 듯 마음이 괴로웠다.주훈은 자신의 상사를 대신해서 한 소리 했다.“사모님, 방금 대표님께서 바닥에 쓰러진 사람이 사모님인 줄 알았을 때 일어나지도 못하셨습니다.”꾹 참던 윤혜인의 눈은 순식간에 빨개졌다.그는 지금 화가 나서 해명할 기회도 주지 않는 것이다.“주 비서님, 병원 가면 어떻게 됐는지 저한테 알려주실 수 있나요?”주훈이 해서는 안 될 말이었지만 지금 그는 규정 따위 개의치 않고 솔직하게 말했다.“대표님께서는 진심으로 걱정하셨어요. 이쪽 일 마무리되면 직접 대표님을 보러 오시는 게 제가 전하는 것보다 더 도움이 될 거예요.”이렇게 말한 후 그는 서둘러 뒤를 따랐고 경호원들은 모두 철수했다.윤혜인은 구급차 안에서 간단히 외상을 치료한 뒤 경찰서로 가서 진술했다.송소미가 납치했다는 사실은 분명했기 때문에 윤혜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서 밖으로 나왔다.그녀는 몸에 묻은 핏자국을 보며 고민 끝에 일단 옷을 갈아입고 이준혁과 한구운을 만나러 병원에 갔다.병원에 도착했지만 주훈과 연락이 닿지 않았다.한참을 수소문한 끝에 이준혁이 치료를 마치고 위층 VIP 병실로 옮겼으며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조마조마하던 윤혜인은 마침내 안도할 수 있었다.그 순간 주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고 윤혜인은 황급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그런데 주훈은 지금 만나기 불편하다는 말을 전했고 전화기 너머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며 간간이 이씨 집안 내외의 목소리도 들리는 듯했다.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알겠어요.”만약 그의 부모님이 계시는 거라면 그녀가 가기 불편한 건 사실이었다.그녀는 뒤돌아 2층에 있는 한구운을 찾아갔다
남자는 재밌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만약 제가 당신에게 기회를 준다면요?”“무슨 기회요?”진아연은 자신이 누구와 거래하는지 잊지 않고 전전긍긍하며 물었다.남자의 두 눈은 마치 별을 숨긴듯 하였다. 그는 반혹적인 어조로 말했다.“육경한을 죽일 기회를 줄게요. 만약 그 사람을 죽일 수 있으면 저는 당신의 잘못을 추궁하지 않고 평안히 출국할 수 있게 해줄 수 있어요. 진아연 씨, 어떻게 생각해요?”“정말이에요?”진아연은 그의 말을 정말 믿기 어려웠다.제트를 마주할 떄 진아련은 항상 착각에 빠졌다. 사실은 육경한을 죽이는 것보다 제트를 마주하는게 더 어려웠다. 이 두 문제를 함께 놓으면 비교가 될 것이다.왜냐하면 그는 아주 신비하기에 누구도 그의 배경과 내력을 알 수 없어 그와 상대할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육경한의 약점은 아주 많다. 소원이와 그녀 뱃속에 있는 아이, 그리고 망할 놈 유진이... 심지어 하나하나의 나쁜 계획은 이미 진아연의 마음속에서 형태를 갖추게 되며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제트는 고개를 끄덕이였다. “물론 정말이에요, 당신이 성공하면 저는 말한 대로 다시는 따지지 않을 것이에요. ”말하는 사이에 남자는 뒤에 쫓아오는 세 대의 차를 가볍게 따돌렸다.이 제트는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사람마냥 무섭기 그지없었다.하지만 진아연의 마음속에 있는 제트는 탁월한 능력이 있어서 그녀가 아무리 숨기려 해도 그의 눈을 피할 수 없어 놀라지 않았다.진아연은 눈앞의 남자를 보면서 자신의 충성심을 알려 주었다.“제트 씨, 안심해요, 저는 반드시 임무를 완수할 거니까. 당신은 저를 죽이지만 않으면 됩니다.”“음, 기대가 되네요.”“...”뒤따라오던 세 대의 차가 앞차를 잃어버린 후, 경비원들은 실시간 정보를 병실의 VIP 라운지에 전달했다.유진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남자는 황수진보고 유진이의 휴식에 방해 안 되는 대기실에 오라고 했다.지금 육경한의 안색은 매우 안 좋았다.경호원들이 전송해 오는 화면
남자는 짜증을 내며 말했다.“잡히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 또 오다니 정말 바보 중의 바보예요! ”“제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이곳 경비원은 다른 동네 분들과 다를 줄은, 이곳 경비원은 정말 최고급 경호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여자가 원망하자 옆에 있던 남자가 말했다. “진아연, 당신은 내가 본 것 중 가장 멍청한 사람인 것 같아요. ”진아연은 순간 자신의 이름을 듣고도 반응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 사람은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을가 라는 생각에 그녀는 그를 경계하면서 물어봤다.“누구세요? “남자는 침묵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얼굴 가리려고 마스크를 썼지만, 눈빛에 드러나는 냉랭함은 숨길 수 없었다. 진아연은 그의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 나서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 당신이 바로 제트 씨이세요? ”남자는 그녀를 상대하지도 않고 부인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다 설명했다. 진아연은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바지에 실수까지 할 뻔했다. 누가 알았겠는가, 늑대 무리에서 도망쳐 나와 호랑이 굴에 들어갈 줄을... "제트 씨... 아주 죄송해요, 제가 일부러 여기에 나타난 건 아니예요. 지금 당장 꺼질게요. ”놀라움은 하여금 진아연의 이성을 잃게 만들어 고속도로에서 차 문을 열고 뛰어내릴 생각까지 하였다.제트와 비교했을 때, 지금 뒤에서 자신을 쫓아오는 경비원들이 구세주라고 생각되었다. 진아연은 제트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라고 느꼈다. 필경 지난번에 그의 손에서 죽을 뻔했으니까... 진아연의 손이 차 문손잡이에 닿았을 때, 차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진아연은 절망 속에서 두 손을 비비며 용서를 비는 자세를 취했다. “죄송해요... 제트 씨... 저 진짜 멀리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니까 저를 놓아주세요. ”안장이 좁아서 진아연은 무릎을 꿇을 수 없어 두 손을 끊임없이 비비며 아주 작은 희망을 찾고 있었다.남자는 역시 수단과 방법을 숨기고 있었다. 뒤차의 추격을 피하는 동시에
여자가 작은 골목에 들어섰을 때, 경비원이 말했다. “아가씨, 길을 잘못 들었어요. 13동은 저쪽에 있어요.”여자는 할 수 없이 돌아섰는데 경비원이 다시 말했다. “아가씨, 친구 보러 처음 오셨어요?”여자는 이곳의 경비원이 왜 범인을 검문하는 것처럼 자신을 물어보는지 이해 안 가 속으로 욕했다.여자는 대충 대답했다.“네네, 처음 왔어요.”13동 문 앞에 오자 경비원이 직접 603의 초인종을 눌렀고 방울 소리가 울리자, 안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여보세요?”경비원은 여자보고 말하라고 고개를 돌렸다.“...”정말 어쩔 수 없어 여자는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아이고, 배가 너무 아파요.”여자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말하자 경비원은 즉시 구급차를 불러주었다. 그리고 경비원이 구급차를 부르는 사이에 여자는 작은 틈을 놓치지 않고 도망쳤다.“거기서요!”경비원은 일반인보다 더 빠르게 반응해 무전기에 대고 빨리 저 검은 옷 입은 여자를 잡으라는 말을 했다.여자는 자신의 눈앞에서 점점 닫혀 가는 문을 보며 당황해 어리둥절했다.“닫지 말아요.”안에서 경비원이 소리를 듣고 여자 쪽으로 돌진해 왔다. 그들은 마치 여기서 여자를 기다리고 있는 듯 일반 경비원보다 속도가 더욱 빨랐다.바로 얼마 전 육씨 그룹이 이곳의 부동산을 사서 전문적인 경호원으로 바꾸어 수상한 인물을 주시하여 남자와 여자를 막론하고 의심이 가는 사람들을 모두 붙잡아 파출소로 보냈다. 여자는 온몸에 힘이 빠진 채 어디로 도망갈지 몰랐다. “저 여자 잡아요.”전에 여자와 얘기하던 경비원이 소리쳤다. 여자가 잡힐 것만 같았는데 갑자기...펑!큰 소리가 나 그곳을 보자 검은색의 지프차 한 대가 돌진해 들어와 난간에 부딪혀 부서지는 것이 보였다.대중들은 모두 이 갑작스러운 변고에 어리둥절하여 반응하지 못했지만, 지프차가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자, 경비원들은 모두 재빨리 몸을 피했다.유독 여자만 제자리에서 자신한테 향해 오는 것을 멍하니 보며 어찌할 바
소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마음이 놓이지 않아. 유진이를 보러 갈래”“필요 없어”육경한은 단호히 거절하다 멈칫했다. 그러다 소원이 자신이 아이를 못 본다고 오해 할가봐 천천히 입을 열었다“내가 보고 있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일도 다 병원에 가지고 갈 거니까. 넌 휴식이 필요해. 알았어? “유진이 병으로 쓰러진 후 소원은 며칠 동안 거의 밤새 자지 못해 눈 밑에는 이미 짙은 다크써클이 생겼지만 그녀는 억지로 버티는 중이었다.소원은 유진이 자신을 찾지 못할까 봐 걱정되어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육경한은 무슨 일이든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직접 휴대폰 음성 메시지를 소원이에게 들려주었다.“아빠, 엄마 보고 잠자고 있으래요. 만약 성공하지 못하면 저는 삼촌이라고 부를 거예요. ”“엄마보고 많이 휴식하고 있으래요. 그렇지 않으면 뱃속의 아기가 천천히 자랄 거예요. 저는 아기를 빨리 만나고 싶어요. 아기한테 오빠가 지금 힘이 세니까 아기를 업을 수 있다고 알려주고 싶어요. ”캐톡에서 유진이의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협박한 것을 보니 두 사람의 사이가 아주 좋은 것 같았다. 유진이의 소리는 듣기에도 정신이 맑고 괜찮아 보였다.소원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생각해 보니 자기가 쉬지 않은 것을 아이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금 내가 자신의 건강에 대한 책임은 즉 유진에게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기에 소원이는 말 듣고 차에서 내려서 휴식을 취하러 갔다.네 명의 경호원은 육경한의 분부에 따라 두 명은 아파트 입구에 두 명은 계단 입구를 엄중히 지켜 사수의 파리 한 마리조차 날아 들어갈 수 없었다.육경한의 차가 떠나자 멀지 않은 곳에서 한 여인이 사방을 둘러보며 나타났다.그녀는 벙거지 모자를 쓰고 얼굴을 절반 이상 가린 채 마스크를 쓰고 수상한 모습으로 나타나 동네 경비원의 주의를 불러일으켰다.“저기요, 당신은 어느 건물로 가나요? 여기에서 뭘 하고 있습니까? “여인은 경비원한테 놀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요... 사람을 찾고
주석훈이 웃으며 말했다.“허허. 몰랐죠? 저 평소엔 되게 허당이에요.”“변호사님 은근히 유머가 넘친다니까요.”주석훈은 언변에 능했기에 단 몇 마디에 간호사가 함박꽃 같은 웃음을 지었다.“저기는 왜 저런 거래요? 아까 길을 잘못 들었는데 막더라고요.”주석훈이 물었다.“아, 저기요.”간호사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어떤 여자애 한 명 들어왔는데 가족이 살해당했다나 뭐라나. 실어증에 걸려서 한마디도 못 했는데 평소 믿고 따르던 언니가 와서 입을 열었다고 들었어요.”주석훈이 물었다.“여자애요? 많이 놀랐나 보네요.”“그러게요.”간호사가 대답했다.“가족이 칼 맞고 죽었는데 누가 견딜 수 있겠어요.”“억울한 사건이 얼마나 많은데 범인만 잡아도 다행 아니겠어요?”주석훈이 말했다.“어려울 것 같던데요?”간호사가 말했다.“뭐 유용한 단서가 안 나왔나 보더라고요. 아빠가 여자애를 지키겠다고 같이 들어가지 않아서 아무것도 못 봤대요. 진술한 상황이 경찰이 알고 있는 상황과 별반 다를 게 없어서 경찰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숨만 내쉬더라고요.”간호사가 이렇게 많은 내용을 알 수 있었던 건 안지영의 간호를 책임진 간호사가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다.주석훈이 더 물으려는데 다른 간호사가 들어왔다.“어? 이 간호사 있었네? 저쪽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니까 빨리 가봐.”이 간호사가 말했다.“알겠어요. 이것만 마무리하고 갈게요.”치료를 받은 주석훈이 이 간호사에게 고맙다고 말하자 이 간호사가 얼굴을 붉히며 괜찮다고 말했다.주석훈이 멀리 가고 나서야 다른 간호사가 이렇게 말했다.“이 간호사, 아까 저 사람이랑 무슨 얘기 했어? 저 병실에서 나온 얘기는 함부로 하면 안 돼.”“저 별말 안 했어요. 다들 아는 내용 얘기해준 거예요.”이 상황에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인정하면 바보나 다름없었다.“그래. 앞으로 조심해. 자칫하다간 징계 먹을 수도 있어.”나이 많은 간호사가 귀띔했다.“알아요.”이 간호사가 얼른 대답했다.“아
소원이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잘됐다. 정말 너무 잘됐어요. 이번엔 하느님이 제 소원을 들어주셨네요.”소원이 주석훈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래도 제가 신세를 졌으니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줘요.”감염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확률이 반반이라 주석훈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을 텐데 주석훈의 마음이 그만큼 단단하니 망정이지 다른 사람 같으면 진작 멘탈이 무너졌을 것이다.소원은 다시 한번 주석훈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별거 아니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마요.”주석훈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소원 씨가 여기 있다는 건 유진도 여기 입원해 있는 건가요?”소원이 고개를 저었다.“유진은 여기 없어요. 아는 동생 좀 보려고 여기 온 거예요.”“동생이요?”주석훈이 물었다.“소원 씨에게 동생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혹시 괜찮으면 같이 보러 갈까요?”뜬금없는 초대였지만 원래도 열정적인 주석훈이 말하니 뭔가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소원이 별다른 생각 없이 이렇게 말했다.“괜찮아요. 이미 만나고 나오는 길에요. 전에 알고 지내던 동생인데 지금쯤 이미 쉬려고 누웠을 거예요.”“아.”주석훈이 말했다.“그러면 데려다줄까요?”“아니요. 아니요.”소원이 얼른 대답했다.“데려다줄 사람이 있어요.”말이 끝나기 바쁘게 육경한이 다가왔다. 까만 트렌치코트가 육경한의 키를 더 커 보이게 했는데 강압적인 아우라를 뿜어내며 소원에게로 걸어왔다.“가자.”육경한은 옆에 선 주석훈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육경한과 구면인 주석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대표님.”육경한은 작은 변호사 따윈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것처럼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다. 이에 난감해진 소원이 분위기를 만회하려고 이렇게 말했다.“나오다가 마침 주 변호사님을 만났어.”육경한이 그제야 옆에 선 주석훈을 보며 ‘응’이라고 대답했다.주석훈은 전혀 난감해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두 분 사이가 좋아 보이네요. 변호사로서 의뢰인과 피고가 잘 지내고 있으니 뿌
제일 의심 가는 사람은 진아연이었다. 안상철은 여자관계가 간단한 편이었고 오랫동안 여자 친구 하나 사귀지 않고 싱글을 유지하면서 모든 심혈을 딸과 어른을 모시는 데 썼다.박혜순도 안상철을 여러 번 타일렀지만 그럴 때마다 안상철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 싫다며 거절했다. 그렇다면 싱글인 안상철이 이렇게 격렬하게 다툴 수 있는 사람은 진아연일 가능성이 컸다.경찰 조사가 끝나고 안지영도 검사를 받고 쉬어야 했기에 강민혜는 소원과 함께 병실을 나섰다. 밖으로 나와서야 소원은 자신의 추측을 털어놓았다.소원은 진아연의 힘으로 안상철을 죽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한 방도 아닌 60방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안상철은 180은 되는 큰 키를 가졌기에 큰 부상을 입어 몸이 허약해 툭하면 쓰러지는 진아연을 이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진아연은 얼마 전에 손목을 그으면서 피를 많이 흘렸던 터라 짧은 시간 내에 회복하긴 어려웠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 진아연 말고도 다른 사람이 개입했다는 의미였다.멀쩡히 살아움직이는 사람을 60번이나 찔렀다는 건 웬만한 정신상태로 저지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런 사이코패스가 잡히지 않고 사회에 섞여 들어간다면 악영향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강민혜의 생각도 소원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진아연이 입원했을 때 강민혜도 만나본 적이 있어서 알고 있었다. 진아연은 절대 안상철을 쓰러트릴 만큼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부검 결과를 보면 약물을 사용한 흔적이 없는데 그렇다는 건 안상철을 그렇게 만든 사람이 진아연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다른 건 몰라도 진아연 같은 몸집이라면 3, 4명이 더 와도 절대 안상철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그래도 일단 진아연을 잡는 게 우선이었다. 진아연을 잡아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지만 문제는 진아연이 어디로 숨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소원은 의문만 가득 품은 채 병원 밖으로 나가다가 주석훈과 마주쳤다.“소원 씨, 여기서 마주치네요.”주석훈이 소원을 향해 헤벌쭉 웃자 소원이 멍한 표정으로 물었
“내가 너무 욕심이 많았어요.”소원은 안지영이 하는 말을 조용히 들어줬다.“내가 바이올린 계속하겠다고 하지만 않았어도 아버지가 그 돈을 다시 찾으러 가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될 일도 없었을 텐데.”안지영이 갈라질 대로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안상철이 소원에게 사건의 전말을 들려줄 때 진아연이 그 돈을 줬는지 말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안상철의 말대로라면 진아연이 돈을 주려다가 결국 주지 않았으니 그 돈이 없어야 맞았지만 실제로 안상철은 그때 돈을 받은 것이다. 하긴 안상철이 바보도 아니고 아무런 보수 없이 그런 위험한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상대가 딸의 병을 고쳐주겠다고 약속해도 외국으로 나가야 가능한 일이었기에 확실치도 않은 약속을 쉽게 믿지 못했을 테고 일단은 확실한 무언가, 즉 돈을 줘야만 안상철이 소진용을 찾아갈 결심을 내렸을 것이다.하지만 안상철은 결국 이 일을 소원에게 말하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했다면 소원은 안상철이 그 돈을 찾으러 가지 못하게 막았을 것이고 그 돈은 결국 경찰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결국 안상철의 탐욕이 그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소원이 안지영을 위로했다.“아니에요. 그게 왜 지영 씨 탓이에요. 나쁜 사람이 몹쓸 짓을 저지른 건데. 지영 씨도 아버지가 그렇게 될 줄은 몰랐잖아요. 지영 씨, 일단 그날 있었던 일을 경찰에게 알리는 게 좋겠어요. 최대한 자세하게 빠트린 것 없이 말해야 경찰도 빨리 범인을 찾을 수 있고 삼촌도 편히 눈 감을 수 있을 거예요.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죠?”안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지영도 말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그저 너무 무서울 뿐이었는데 소원이 곁에 있으니 무서움이 한결 가시는 것 같았다. 어릴 적부터 소원을 믿고 의지해왔는데 최근에는 소원 덕분에 살아날 수 있었다.안지영은 경찰 조사를 받을 때 두려움을 가시기 위해 소원에게 옆에 앉아 있어 달라고 제안했고 강민혜도 안지영의 제안을 받아들여 진술하는 내내 소원이 옆에 있을 수 있도록 했다.안지
소원의 설명을 들은 육경한이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명확해진 게 아니니까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도 안전에는 조심해야 되니까 사람 4명 붙여줄게. 유진이는 내가 알아서 보안 강화하고.”육경한은 소원이 거절할 것 같아 그러는지 얼른 한마디 덧붙였다.“너는 지금 홀몸이 아니야. 내가 이러는 것도 다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고.”육경한의 말이 맞았기에 소원도 거절하지 않았다. 이제 홀몸이 아니었고 유진도 엄마가 없어서는 안 되기에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어떻게든 조심하면서 안전에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육경한이 골라준 보디가드는 의심할 여지 없는 안전한 사람들이었기에 소원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안상철도 소진용이 제일 믿고 맡긴 사람이었지만 결국 아버지를 배신한 걸 보면 이 세상에 영원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지금 갈 거지? 내가 데려다줄게.”육경한은 소원이 반대하지 않자 경찰이 지정한 병원으로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병원에 도착한 두 사람은 강민혜의 안내를 받아 안지영의 병실에 도착했다.문을 열어보니 안지영이 자그마한 몸집으로 무릎을 꽉 끌어안은 채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며칠 사이에 종이 인형처럼 삐쩍 마른 안지영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가까이 다가간 소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지영 씨...”안지영이 소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들지도, 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자 소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지영 씨, 지금 어떤 기분인지 알아요. 하지만 경찰에게 단서를 줘야만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잡을 수 있어요...”가족을 잃은 슬픔은 소원도 겪어봐서 잘 알았다. 마지막 인사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을 보며 했으니 그 아쉬움과 후회는 사람을 통째로 집어삼킬 만큼 컸다. 소원은 그때 왜 아버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는지, 왜 같이 밥을 먹고 얘기를 나누지 않았는지 후회했지만 그땐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안지영을 다독이던 소원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지영을 꼭 끌어안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