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에 쓰러진 이준혁은 몇 번을 애를 써도 일어나지 못했다.다리를 못 쓰는 사람처럼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는 느낌이 들었다.마치 심장마저 멈춘 듯 온몸이 굳어버렸다.“대표님!”사람들과 함께 들어온 주훈은 이준혁의 시선을 따라 바닥에 어두운 그림자와 크게 벌어진 피 웅덩이를 보았다.크고 작은 일들을 많이 봐왔지만 그도 눈앞에 펼쳐진 장면을 보고는 영혼이 날아갈 것 같았다!입을 벙긋하던 주훈은 목이 메었다.“사모님...”이준혁은 부축하려는 주훈의 손을 뿌리치고 검은 그림자를 가리켰다.“가... 확인해.”직접 눈으로 보기 전에 그는 믿지 않을 것이다.“네!”주훈은 즉시 앞으로 나아가 어두운 그림자 쪽으로 가서 확인했다.그러나 사람은 아래를 향한 채 떨어졌고 넘어지면서 심하게 다쳐 여성으로 보이는 형체를 제외하고는 얼굴은 진작 훼손된 상태였다.바닥에는 커다란 피 웅덩이가 고였고 끈적끈적한 선홍색 피가 뿜어져 나오는 걸 보아 머리가 터진 것 같았다. 그 장면은 너무 끔찍해서 누구도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경호원 한 명이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구토를 했다.주훈은 몸을 웅크린 채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장신구 같은 것이 있는지 확인하려 했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사모님이 맞든 아니든 이대로 놔두는 것도 좋지 않았기에 주훈은 사람을 시켜 검은 천으로 시체를 덮게 했다.“맞아?”뒤에서 얼음장처럼 차가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주훈이 뒤를 돌아보자 어느 틈엔가 이준혁이 다가와 있었다.그는 망설이다가 대답했다.“대표님, 죄송하지만 정말 모르겠습니다.”이준혁이 차갑게 쏘아붙였다.“비켜!”주훈은 그의 의도를 감지했다. 직접 확인하려는 듯했으나 그 형체는 차마 보기 흉했다. 만약 진짜 사모님이라면 이는 평생 그의 악몽이 될 것 같았다.그가 나서서 말렸다. “대표님, 차라리 의사의 판단을 기다리시죠. 보기 그렇습니다.”그는 에둘러 말했다. 현장은 보통 보기 힘든 게 아니라 눈 뜨고 봐줄 수 없는 지경이었다.선홍색과 붉
“윤혜인...”윤혜인은 고개를 돌려 남자에게 물었다. “오빠, 괜찮아요?”한구운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입가에는 아직도 피가 고여 있었고 혹시 장기라도 다친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괜찮아... 혹시나 잘못되면 우리 부모님 좀 부탁해...”“그럴 리 없어요!” 윤혜인은 단호하게 말하며 얼굴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오빠 괜찮을 거예요, 괜찮을 거야...”윤혜인의 머릿속은 아직 멍한 상태였다. 조금 전 지쳐서 몸부림치는 것을 포기하자 송소미의 칼이 그녀의 살갗을 스쳐 지나갔고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한구운이 튀어나와 단숨에 송소미에게 달려들어 아래로 함께 떨어졌다.윤혜인은 바닥에 흩뿌려진 피를 보며 그도 죽었다는 생각에 무너져 내리기 직전이었다.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키자 다행히 아직 의식을 잃지 않고 누워있는 선배를 보며 윤혜인의 마음은 감사함으로 가득 찼다.다행히 선배는 죽지 않았지만 자칫 자신 때문에 그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살았을 것이다!다행이라 여기면서도 여전히 마음이 쿵쾅거렸다.조금만, 아주 조금만 늦었어도 얼굴이 일그러진 채 바닥에 누워 있는 사람이 자신이 될 뻔했다.이준혁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그녀가 연락이 끊긴 순간부터 그의 심장은 단 1초도 긴장을 늦출 틈도 없이 팽팽히 당겨져 있었다.언뜻 바닥에 쓰러진 사람이 그녀라고 생각했을 때 그의 심장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심하게 찢어지는 것 같았고 지금까지도 통증이 느껴졌다.무사한 그녀의 모습에 얼마나 가슴이 뛰었는지, 너무도 기쁜 나머지 그대로 그녀를 품에 안고 싶은 걸 얼마나 참았는지 오직 하늘만이 알 것이다.하지만 그녀는...그녀의 눈에는 오직 한구운만 보이는 듯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을 쳐다보지 않았다.그 순간 이준혁의 심장은 다시 한번 칼에 찔린 듯했고 뼈가 시릴 정도로 차가워졌다.그는 자신이 여기 서 있는 자체가 그토록 초라하게 우습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구급대원들이 이준혁에게 들것에 타라고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그는 심하게 다친 다리를 고통스럽게 앞으로 끌고 가면서 이 고통을 조금 더 단단히 기억하고 싶었다.나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저 여자를 위해 다시는 멍청한 짓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윤혜인은 차갑고 무정한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누군가 심장을 움켜쥐는 듯 마음이 괴로웠다.주훈은 자신의 상사를 대신해서 한 소리 했다.“사모님, 방금 대표님께서 바닥에 쓰러진 사람이 사모님인 줄 알았을 때 일어나지도 못하셨습니다.”꾹 참던 윤혜인의 눈은 순식간에 빨개졌다.그는 지금 화가 나서 해명할 기회도 주지 않는 것이다.“주 비서님, 병원 가면 어떻게 됐는지 저한테 알려주실 수 있나요?”주훈이 해서는 안 될 말이었지만 지금 그는 규정 따위 개의치 않고 솔직하게 말했다.“대표님께서는 진심으로 걱정하셨어요. 이쪽 일 마무리되면 직접 대표님을 보러 오시는 게 제가 전하는 것보다 더 도움이 될 거예요.”이렇게 말한 후 그는 서둘러 뒤를 따랐고 경호원들은 모두 철수했다.윤혜인은 구급차 안에서 간단히 외상을 치료한 뒤 경찰서로 가서 진술했다.송소미가 납치했다는 사실은 분명했기 때문에 윤혜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서 밖으로 나왔다.그녀는 몸에 묻은 핏자국을 보며 고민 끝에 일단 옷을 갈아입고 이준혁과 한구운을 만나러 병원에 갔다.병원에 도착했지만 주훈과 연락이 닿지 않았다.한참을 수소문한 끝에 이준혁이 치료를 마치고 위층 VIP 병실로 옮겼으며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조마조마하던 윤혜인은 마침내 안도할 수 있었다.그 순간 주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고 윤혜인은 황급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그런데 주훈은 지금 만나기 불편하다는 말을 전했고 전화기 너머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며 간간이 이씨 집안 내외의 목소리도 들리는 듯했다.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알겠어요.”만약 그의 부모님이 계시는 거라면 그녀가 가기 불편한 건 사실이었다.그녀는 뒤돌아 2층에 있는 한구운을 찾아갔다
매번 누군가 보러 올 때마다 이준혁의 눈빛은 밝아졌다가 다시 어두워지는 걸 보아 분명 원하는 사람이 오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문이 닫히는 소리에 눈을 감은 채 쉬고 있던 이준혁이 눈을 떴다.방문객을 본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외면했다.표정만 봐도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을 본 게 분명했다.순간 윤혜인의 마음이 다시 아프면서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입술을 다물고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못한 채 제자리에 서 있었다.한참 동안 침묵이 흐른 뒤, 그녀는 보온병을 들고 고개를 숙인 채 들어와 물었다.“준혁 씨, 다친 데는 좀 괜찮아요?”시선을 돌린 이준혁의 잘생긴 얼굴에 짜증이 가득 담겨 있었다. “누가 들어오래?”그의 말투와 표정이 윤혜인에게 정말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순식간에 윤혜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돌아서서 떠나고 싶은 충동이 가슴속에서 솟구쳤지만 발은 뿌리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그녀는 손을 꽉 말아쥐며 그래도 해명하려 애썼다.“어제는 준혁 씨를 신경 쓰지 않은 게 아니라 선배가 눈앞에서 떨어지는 걸 보고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순간 당황해서 잠깐 이성을 잃었어요. 그땐 그냥 무서워서...”누군가 자신의 목숨을 구하려다 죽는 건 생각만 해도 다리에 힘이 풀렸고, 자연스레 더 다친 사람에게 먼저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그녀의 양심과 본능 모두 이준혁에게 먼저 다가갈 수 없게 했다.또한 사실이 그러하듯 한구운은 조금 더 심하게 다쳐 지금까지도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그녀가 말을 이어갔다.“나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다치게 하는 준혁 씨 모습에 진심으로 감동했어요...”이준혁은 차마 들어줄 수가 없었다.감동?누가 감동 따위 바랬나.한구운이 나타난 게 수상해 어젯밤 휠체어를 타고 한구운이 있는 병동으로 내려가 혹시나 단서가 있는지 살펴봤다.그 결과 윤혜인이 남자의 침대에 엎드려 밤새 남자의 곁을 지키는 모습이 보였다.마음이 있다면 밤에 그를 보러 왔어야지.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는 자신을 무시하고 있었다
자신감이 없는 듯 윤혜인의 목소리는 매우 낮았다.한 번도 먼저 다가선 적이 없었는지라 그의 옆에 붙어 있는 팔은 긴장해서 굳어 있었다.이준혁은 무심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맞으면 어떻고, 또 아니면 어때?”수치심을 버리고 윤혜인은 가장 어려운 첫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그의 차가운 표정을 보자 이내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도 자신을 구해줄 때의 그를 생각하며 애써 참아냈다.그녀는 물러서지 않고 이준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정말로 절 보고 싶지 않다면, 다신 귀찮게 안 할게요.”눈앞에 있는 꽃잎 같은 입술에서는 마치 달콤한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이준혁은 별다른 표정 없이 손가락을 더욱 꽉 쥐었다. 피도 점차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분명 무슨 스킬을 쓴 것도 아니고 그저 가볍게 닿은 것뿐인데 그는 윤혜인을 바로 눕혀버리고 싶었다.그러나 어젯밤의 장면을 떠올리니 곧 마음이 다시 식어버렸다.“네 남자친구는 어디에 두고 이러는 거야?”놀란 윤혜인은 한동안 이준혁이 누구를 말하는지 알아채지 못했다.하지만 금세 떠올리고 막 해명하려던 찰나, 이준혁이 조롱 가득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아니면 두 사람 다 갖고 싶은 거야?”윤혜인은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마음도 무언가에 세게 잡아당겨 지는 듯했다.‘여태 날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팽팽하던 공에 바람이 빠진 것처럼, 혼란스러웠던 머리가 갑자기 맑아진 것 같았다.어렵게 쌓아 올린 용기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이제 두 사람은 몇 마디 말로 해결할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윤혜인은 조금 전 자신의 충동적이었던 행동을 매우 후회하며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미안해요, 방해해서.”말을 마치고 나서 그녀는 투명인간처럼 바로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하지만 돌아서려는 순간 그녀는 이준혁에게 손목을 덥석 잡히고 말았다.곧이어 그는 윤혜인의 손을 단단히 쥐고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선택하기 그렇게 어려워?”이준혁은 정말이지 윤혜인 때문에
그때, 원지민의 손목을 바라본 윤혜인은 순간 충격을 받아 얼굴이 창백해졌다.원지민이 착용하고 있는 옥 팔찌는 바로 윤혜인이 문현미에게 돌려준 팔찌였기 때문이었다.윤혜인은 복잡한 눈빛으로 그 옥 팔찌를 잠시 바라보다가 마침내 손을 내밀어 가볍게 악수를 했다.그러고는 문현미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아주머니, 그럼 두 분 얘기 나누세요. 저는 먼저 가볼게요.”“어머님”이 아닌 “아주머니”라고 부른 것만으로도 현재 그녀의 태도가 드러났다.문현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윤혜인이 막 발을 내딛으려는 순간, 이준혁의 냉랭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가지 마.”윤혜인은 걸음을 멈칫했지만 이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급하게 침대에서 내려오던 이준혁은 상처가 벌어져 “윽.”하고 짧게 신음소리를 냈다.문현미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파 서둘러 그를 막았고 원지민에게 눈짓을 하며 말했다.“지민아, 네가 여기서 준혁이 좀 돌봐줘. 난 혜인 씨 배웅하러 가봐야 할 것 같다.”곧 다시 눕혀진 이준혁이 창백해진 입술로 힘겹게 말을 꺼냈다.“혜인이한테 말해줘요. 아직 할 말이 남았다고.”안색이 어두워졌지만 문현미는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고는 밖으로 윤혜인을 따라가 그녀를 불러세웠다.“혜인 씨, 잠시 얘기할 수 있을까요?”윤혜인은 거절하지 않았고 얼마 후 문현미가 입을 열었다.“소미 사건에 대해 다 알고 있어요.”문현미의 표정은 그닥 좋지 않았다. 송소미가 비참하게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비록 그녀도 송소미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죽었으니 기분이 언짢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게다가 문미정은 이준혁을 찾아와 그가 윤혜인을 위해 송소미를 몰아붙이지 않았더라면 송소미가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떠들어댔다.결국, 송소미는 처참한 결말을 맞이했다.친척 간에 교류가 없더라도 문현미는 사람 목숨이 걸린 일로 번지기를 원치 않았다.그녀가 신중하게 말했다.“지민이는 준혁이랑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윤혜인은 살짝 웃으며 거절하지 않고 말했다.“생각 해보겠습니다.”사실 윤혜인은 원래 해외로 나갈 계획이 있었고 굳이 문현미에게 불편을 주고 싶지 않았다. 아무래도 문현미를 진심으로 좋아했었고 자신의 어머니처럼 생각했으니 말이다.문현미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할 말을 마치고 두 사람은 다시 각자 있어야 할 곳으로 떠났다.한편 병실 안.원지민은 병색이 도는 듯하지만 여전히 잘생긴 이준혁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오랜만에 만나면 꼭 한 번 세게 안아주려고 했는데, 이렇게 약해진 줄은 몰랐네.”그러자 이준혁이 물었다.“왜 이렇게 꾸미고 다녀?”예전의 원지민은 항상 남자아이처럼 다녔었고 심지어 어릴 때의 이준혁은 그녀를 남자아이라 착각하고 함께 놀았었다.15,16살이 될 때까지도 원지민은 남자아이처럼 꾸미고 다녔다.그 후엔 그녀가 유학을 떠나면서 거의 만나지 못했다.이준혁의 물음에 원지민의 표정이 굳어졌다.“왜, 별로야?”이준혁은 긍정도 부정도, 아무런 평가도 하지 않았다.예쁘고 안 예쁜 것에 그닥 신경 쓰는 타입은 아니었으나 원지민은 처음 윤혜인과 마주쳤을 때 그녀의 미소에 마음이 녹아버렸다.조금 전 상황을 되돌려보며 웃다가 원지민은 다시 평소처럼 돌아와 어깨로 이준혁을 툭 쳤다.“보기 불편하면 그냥 예전의 원지민을 생각해. 어차피 난 변하지 않았으니까.”그렇게 원지민을 살펴보던 이준혁은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꽉 잡더니 물었다.“이 팔찌 어디서 난 거야?”원지민은 손목이 아파 얼굴을 찌푸렸다.“이모가 주신 거야.”이준혁도 눈살을 찌푸리더니 가감 없이 말했다.“빼.”그러자 놀란 원지민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이준혁, 너 왜 이렇게 옹졸해졌어?”이준혁은 딱히 설명할 마음도 없었다.“얼른 빼라니까.”정말이지 화가 나서 원지민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그렇게 팔찌를 빼려고 손을 뻗었는데 너무 힘을 주다가 그만 땅에 떨어뜨렸다.“쨍그랑.”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옥 팔찌가 두 동강 났고 이준혁은 그걸 보며
‘절단이라니?! 그렇게 심각한 건가?!’윤혜인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의사 선생님이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나요?”박미선은 슬픔에 잠겨 울며 말했다.“그래요, 누구보다 유능하고 훌륭한 내 아들... 다리가 없어지면 어떻게 살겠어요!”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윤혜인도 충격을 받긴 마찬가지였다.‘그렇게 뛰어난 사람인데... 선배 어떻게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이때 박미선이 갑자기 말했다.“혜인 씨, 우리 구운이 버리지 않을 거지? 혜인 씨 구하다가 구운이 이렇게 된 거잖아. 버리지 않을 거지?”윤혜인은 멍해졌다.‘우리 둘이 가짜 연인 사이라는 거... 설마 아직 알려드리지 않았나?’곧 그녀가 중얼거렸다.“아주머니, 저랑 구운 오빠는...”하지만 그녀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박미선이 통곡하며 무릎을 꿇었다.“풀썩!”박미선은 눈물 콧물을 흘리며 말했다.“혜인 씨, 내가 이렇게 빌게. 제발 인제 와서 우리 구운이를 버리지 말아줘. 절대 그 충격을 견딜 수 없을 거야. 우리 아들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도 콱 죽어버릴 거야!”박미선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윤혜인이 얼른 손을 뻗어 그녀를 부축하려 했다.주변을 지나가는 의사와 간호사들은 윤혜인을 마치 배은망덕한 사람처럼 보는 것 같았다.어떻게 해도 일으켜 세울 수 없자 윤혜인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아주머니, 일어나서 말씀해주세요, 네?”하지만 박미선은 일어나기는커녕 오히려 한재철도 불러들였다.“여보, 빨리 와서 우리 며느리한테 구운이 버리지 말라고 빌어봐.”윤혜인은 할 말을 잃었다.다행히도 비교적 이성적이었던 한재철은 다가와서 박미선을 나무랐다.“당신 뭐 하는 거야?”한재철이 박미선을 일으켜 벤치에 앉혔지만 그녀는 계속 울고 있었다.물론 한재철의 얼굴도 좋지 않았다.“미안해요, 애 엄마가 너무 흥분해서... 많이 놀랐죠?”윤혜인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이해할 수 있어요.”이런 큰일 앞에서 누구나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려운 법이다.한재철은 부드럽게 말했
윤혜인이 문 앞으로 다가가 힘껏 문을 두드리며 큰 소리로 불렀다.“엄마... 엄마...”화들짝 놀란 도우미가 얼른 달려와 윤혜인을 막았다.“아가씨,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만하세요.”도우미가 윤혜인을 안더니 힘껏 침대 쪽으로 끌어당겼다. 윤혜인은 문을 두드릴 수 없어 큰 소리로 외칠 수밖에 없었다.“엄마. 엄마. 엄마.”윤혜인이 큰 소리로 외치자 바깥에서 들리던 웅얼거리는 소리가 달라졌다.쿵.문이 격렬하게 흔들렸다.쿵. 쿵. 쿵.휠체어로 문을 힘껏 부수는 소리와 도우미가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사모님... 사모님. 안 됩니다. 이러시면 안 돼요.”윤혜인이 더 높은 소리로 불렀다.“엄마. 엄마. 엄마.”방 안에 있던 도우미가 윤혜인의 입술을 틀어막자 윤혜인이 팔다리를 마구 버둥대며 웅얼웅얼 소리를 냈다.문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흔들리더니 탈칵 하는 소리와 함께 열쇠가 망가졌다. 문이 열리더니 검은 그림자가 안으로 쌩하고 들어왔다. 윤아름은 큰 꽃병 하나를 이고 들어와 윤혜인의 입을 막고 있는 도우미를 내리쳤다. 도우미는 피를 철철 흘리며 바닥에 쓰러지더니 고통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윤아름이 휠체어에서 겨우 일어나 윤혜인을 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윤혜인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정말 오랜만에 엄마를 다시 안아보는 거라 윤혜인도 엄마를 꼭 끌어안았다. 도우미는 바닥에 쓰러져 피를 흘리는 다른 도우미를 보고 윤아름을 말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긴 윤아름은 아까 정신이 살짝 나간 것 같았다. 게다가 원진우가 윤아름을 다치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했기에 과분하게 말렸다가 윤아름이 다치는 날에는 도우미에게 불똥이 튈 수도 있다.이때 소식을 들은 원진우가 다급하게 걸어왔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는 모녀를 보게 되었다. 원진우는 멈칫하더니 그 자리에 멈춰 섰다.울다가 웃기를 반복하는 윤혜인은 정상 같아 보이지 않았지만 적어도 멍하던 예전과 비기면 정서라는 게 생겼다. 윤혜인이 확실히 윤아름을 치유
원진우는 연속 몇 시간이나 윤혜인을 관찰했다. 관찰한 시간이 오래면 오랠수록 원진우는 윤혜인이 자는 모습이 자신과 쏙 빼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낯선 곳에서 안전함을 느끼지 못하고 언제든 경계 태세에 들어가는 것도 말이다.“일어났으면 뭐 좀 먹어요. 도우미에게 이쪽으로 가져다주라고 할게요.”원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차분하고 온화한 말투로 말했다. 만약 윤혜인에게 예전 경력이 없었다면 원진우를 좋은 사람이라고 여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적어도 그렇게 잔혹한 사이코패스 성향을 뒤로 잘 숨긴 것 같았다.윤혜인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들었다가는 원망을 이겨내지 못할 것 같았다. 정서도 도라는 게 있어 일정한 포인트까지 닿으면 되지 아니면 원진우가 오히려 경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원진우는 그렇게 생각한다기보다 그저 윤혜인이 보면 볼수록 귀엽다고 생각했다.“혜인 씨, 이름은 엄마가 지어준 거예요?”윤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혜인의 몸에는 금패가 하나 있는데 위에 윤혜인의 이름이 적힌 금패였다. 양아버지가 길다가 그녀를 줍고 주변과 경찰서에 윤혜인이라는 아이가 실종됐는지 물었지만 윤혜인이라는 아이를 잊어버린 적은 없다고 했다. 전에 조사가 어려웠던 건 윤혜인이 원진우의 의해 먼곳에 던져졌기 때문이다. 그때는 기술이 좋지 않아 실종자를 찾는 것도 힘든 일이긴 했다. 게다가 양아버지는 인자한 사람이었기에 윤혜인의 아버지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다고만 말할 뿐 이기적이게 그녀의 모든 걸 묵살하지는 않았다. 원래 이름을 쓰겠다고 한 것도 어느 날 친부모님을 만나면 그들이 자기를 알아볼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듣기 좋네요.”원진우가 말했다. 윤혜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원진우가 뭔가 말하려다가 방향을 잃었다.“일찍 쉬어요.”원진우가 이렇게 말하더니 방에서 빠져나갔다. 도우미가 아침을 가져다줬는데 그야말로 진수성찬이었다. 윤혜인은 그 요리와 밥을 이미 보며 원진우가 아직 독을 타지는 않았을 거라는
윤혜인은 다시 눈을 감으며 잠을 자야 체력을 보존할 수 있다고 자기 자신을 타일렀다. 오빠가 사람을 데리고 오기 전까지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자기 자신을 타일러도 윤혜인의 잠자리는 여전히 뒤숭숭했고 악몽만 연거푸 꿨다. 엄마가 여기 있고, 아버지를 죽인 원수도 여기 있다는 생각에 잠에 들 수가 없었다. 그렇게 겨우 동이 틀 때까지 버틴 윤혜인이 눈을 뜨자 침대맡에 놓인 의자에 누군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원진우였다. 윤혜인은 순간 얼굴을 굳히더니 혹시나 하지 말아야 할 잠꼬대를 하면서 마음에 담아뒀던 말을 전부 쏟아낸 게 아닌지 걱정했다.“깼어요?”원진우는 그런 윤혜인을 보며 덤덤하게 물었다. 윤혜인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지만 표정만큼은 매우 덤덤했다.“네.”“어제 잠을 설치는 것 같던데요?”원진우가 대수롭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차갑디차가운 눈동자에 담긴 의미가 뭔지는 알아내기 힘들었다.윤혜인은 혹시나 실수한 건 아닌지 의심되어 심장이 철렁했다. 얼른 머리를 굴린 윤혜인이 주먹을 꽉 움켜쥐고 이렇게 말했다.“네. 잠을 잘 자지 못한 건 맞아요. 어제 겪었던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무섭거든요. 나는 정말 거기서 죽는 줄 알았어요.”윤혜인이 솔직하게 말하자 원진우의 눈빛도 살짝 풀렸다.“내가 그렇게 무서워요?”원진우가 물었다.“네. 너무 무서워요. 나를 세 번이나 죽이려고 했는데 어떻게 안 무섭겠어요?”윤혜인은 두려움을 전혀 위장하지 않았다. 원진우와 말할 때도 몸을 살짝 움츠리며 뒤로 빼고는 경계 태세를 취했다. 이에 원진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평소 곽진명과는 어떻게 지내는데요?”윤혜인은 원진우가 무슨 뜻으로 묻는지 몰라 잠깐 넋을 잃었다.“곽진명과도 이렇게 지내요?”원진우가 물었다. 윤혜인은 그제야 원진우가 자기를 윤혜인의 아버지로 대입해 곽진명과 비교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곽진명을 떠올리자 윤혜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아빠는 내게 무척이나 잘해줬어요. 그래서 한 번도 무섭다고
원진우가 눈길을 돌리더니 차분한 표정으로 묵묵히 다짐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총명한 여자라는 걸 알아챘으니 윤혜인이 한 말과 보이는 행동을 믿으면 함정에 빠지는 거나 다름없다고 말이다. 원진우는 윤아름을 한참 동안 뚫어져라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무릎을 꿇더니 윤아름의 어깨를 잡고 힘껏 흔들었다.“아름아,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윤아름의 동공은 여전히 풀려 있었고 원진우가 무슨 말을 하든 아무 반응이 없었다. 원진우는 윤아름의 어깨를 점점 더 억세게 부여잡더니 이를 악물고 캐물었다.“말해. 말하라고. 있어, 없어?”“...”윤아름은 여전히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흥흥거릴 뿐이었다. 진우희가 그렇게 된 걸 본 다음부터 줄곧 이 상태였다.원진우는 윤아름의 멘탈이 이렇게 약할 줄은 몰랐다. 양자를 총으로 쐈다는 소식부터 먼저 알려주고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있는 진우희의 시신까지 보여줬다. 지하실에 갇혀 있으면서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친 윤아름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미쳐버리고 말았다. 다 자기 잘못이라고 자책하고 있었다. 곽경천도 그녀를 구하려다 총에 맞았고 진우희도 그녀를 도우려다 원진우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이 모든 건 다 그녀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런 생각이 든 순간 이성의 끈이 끊어지고 말았고 그 뒤에 아무리 다시 이어주려 해도 이어지지 않았다. 무의식적인 흥얼거림과 가끔 입가로 흘러내리는 침은 윤아름을 모두가 알아주던 미녀에서 바보로 전락하게 했다. 하지만 미인은 미인인지라 치매에 바보가 되어도 예쁘기만 했다.윤아름은 초점 없는 동공으로 무의식적으로 모니터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때 미약하게나마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윤아름의 눈동자가 다시 초점을 되찾더니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휠체어에서 바닥으로 넘어졌다. 원진우가 부축하려 했지만 윤아름이 그 손을 탁 쳐내더니 미친 듯이 모니터가 있는 쪽으로 기어갔다. 화면으로 보이는 윤혜인은 어느새 몸을 웅크리고 있
그 누구든 오랫동안 보지 못한 아이를 본다면 차분함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게다가 윤아름처럼 아이를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윤아름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멍한 표정이었다.원진우는 마음이 복잡했다. 이번에는 정말 연기가 아닌 진짜였다. 윤혜인의 쓸모도 이제 끝났기에 원진우는 윤혜인의 손에 올렸던 발을 뗐고는 입을 열었다.“온도 영하 80도로 내려.”“!”윤혜인이 화들짝 놀랐다. 이건 윤혜인을 산채로 냉동시켜 저번에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내겠다는 뜻이었다. 원진우가 시야에서 점점 멀어지자 윤혜인은 이번 기회를 놓치고 원진우가 문밖으로 나서는 날에는 죽음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어떻게 해야만 살 수 있을까...’윤혜인은 죽기 싫었다. 살아서 엄마를 구하고 오빠가 오기를 기다리고 싶었다. 윤혜인은 윤아름의 얼굴을 떠올리다 갑자기 자지러지게 소리를 질렀다.“원진우!”윤혜인이 성까지 붙여서 부르자 아니나 다를까 원진우가 걸음을 멈추더니 윤혜인을 돌아봤다. 윤혜인은 혀끝을 꽉 깨물었다. 피비린내가 혀끝에서 느껴져서야 윤혜인은 정신을 조금 차릴 수 있었다. 윤혜인의 목은 마르고 갈라져 있었다.“내가 누구 딸인지 생각해 본 적 없어요?”윤혜인을 보는 원진우의 눈빛에서 보기 드물게 두려움이 묻어났다. 비록 몇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윤혜인이 그 눈빛을 캐치하고는 반은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머지 반이야말로 윤혜인이 살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는 핵심이었다. 윤혜인은 원진우에게 고민할 기회도 주지 않고 꿋꿋하게 말했다.“삼촌, 그렇게 총명하신 분이 이미 눈치채고 계신 거 아니에요? 경천 오빠랑 나랑 친 남매가 아닌 건 알고 있잖아요. 아버지가 왜 직접 낳지 않고 남자아이를 입양했는지 생각해 본 적 없어요?”원진우가 윤혜인을 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혹시 지금 내 딸이라고 하고 싶은 거예요?”“머리는 썼는데 나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서 그렇게 쉽게 속지 않아요.”원진우가 이렇게 말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
턱에서 전해진 고통에 윤혜인은 호흡이 가빠졌지만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했다.“엄마 좀 만나게 해줘요... 딱 한 번만요... 그다음에는 어떻게 하든 다 좋아요...”“꿈도 꾸지 마요.”원진우가 윤혜인을 바닥으로 내팽개치더니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원진우가 여신으로 받드는 사람이 다른 남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았다니, 이런 오점은 반드시 지워야 했다.윤혜인은 턱이 빠질 것처럼 아팠지만 여전히 울면서 애원했다.“딱 한 번만요. 한 번만 엄마를 만나게 해줘요. 제발 부탁이에요... 죽어도 눈은 감고 죽어야죠...”원진우는 윤혜인이 죽음을 앞두고 자기 걱정보다는 엄마를 만나고 싶다는 말에 흥미를 느꼈다.“혜인 씨는 만나고 싶어도 아름이는 생각이 다를 수도 있죠.”이 말에 윤혜인이 고개를 저었다.“거짓말하지 마요. 엄마가 왜 나를 만나려 하지 않겠어요? 엄마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당신이 납치하면서 나를 버리지만 않았어도 우리는 행복하게 살았을 거라고요.”“명을 재촉하는 꼴이라니.”원진우가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그렇다면 만족시켜 줄게요.”원진우가 손뼉을 치자 대문 하나가 열렸다. 불빛이 들어와서야 윤혜인은 지금 있는 곳이 냉동창고라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원진우는 전혀 추위를 타지 않았다. 특수 제작한 옷을 입고 있어 냉동창고에 있어도 추위를 막을 수 있었다. 까만 옷을 입은 사람이 휠체어를 밀고 들어왔다. 하지만 반사 때문에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 누군지 잘 보이지 않았다. 원진우가 그쪽으로 다가가 휠체어를 받아와 가까이 밀고 와서야 휠체어에 앉은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윤혜인은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릴 적 기억들이 물밀듯 밀려왔다. 여자가 자장가를 부르며 아이를 달래는 장면, 여자가 어린 윤혜인의 손을 잡고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는 장면이 떠올랐다. 시간이 흘러도 여자의 얼굴은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윤혜인과 자매라고 해도 믿을 사람이 적지 않을
“당신...”윤혜인이 이를 악물었다. 너무 흥분해서 그런지 이 말을 빼고는 다른 말이 나가지 않았다.“급해할 거 없어요. 천천히 해요.”원진우가 오히려 웃으며 윤혜인을 다독였다. 윤혜인은 손에 칼만 있었다면 앞에 앉아 있는 이 남자를 죽이고 싶었지만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니, 칼이 있다고 해도 절대 이 남자를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경계가 삼엄한 배씨 정원에서 윤혜인을 납치했다는 건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말이었다. 윤혜인은 속으로 원망해도 흥분해도 쓸데없다고 자기 자신을 타일렀다. 이런 남자를 상대하려면 최대한 차분함을 유지하며 기회를 찾아야 했다. 윤혜인은 주먹을 꽉 움켜쥐는 것으로 최대한 차분해지려 애썼다.“왜 나를 죽이려는 거예요?”윤혜인이 물었다. 이 문제가 약간은 바보 같아 보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원진우가 윤혜인을 죽이고 싶어 하는 이유라면 아마도 윤혜인이 윤아름의 아이여서일 것이다. 그리고 윤혜인이 관찰한 데 의하면 원진우는 총명한 사람을 싫어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멍청한 척, 무서운 척하며 상대의 경계심을 푸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사실 윤혜인도 원진우가 어떻게 윤혜인이 어릴 때 찾아온 건지 알고 싶었다.원진우는 순진해 보이는 윤혜인의 얼굴을 보며 온화하게 웃었다.“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점이 생기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죠. 윤혜인 씨의 존재가 딱 그 오점이거든요.”“...”윤혜인은 할 말을 잃었다. 원진우는 미친 게 틀림없었다. 윤혜인이 입술을 앙다물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어릴 때는 어떻게 찾아온 거예요?”“그때는 우연히 마주친 거예요.”원진우가 웃으며 말했다.“양아버지가 혜인 씨를 그렇게 보호할 줄은 몰랐는데. 명이 질기네요.”원진우가 잠깐 뜸을 들이더니 웃음이 점점 음침해졌다.“춥디추운 그날 밤에도 죽지 않고 살았고, 쓰레기 봉지에 담아놔도 안 죽고 살아있으니...”윤혜인이 화들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당신이었어요...?”저 정도면 답을 준 거나 마
이에 양아버지는 남자가 어린 윤혜인을 노린다는 걸 확신했다. 그 시절 화려한 옷을 입고 비싼 차를 끌고 다니는 남자를 유괴범이라 외친다면 믿을 사람도 없을뿐더러 성가신 일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작은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돈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런 짓을 절대 하지 않을 거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그러니 이 남자도 대담하게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양아버지는 남자가 느긋하게 두 사람을 향해 걸어오자 얼른 어린 윤혜인을 안고 앞으로 뛰기 시작했다. 어린 윤혜인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길이 없었기에 케이크가 바닥에 떨어지자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아빠, 케이크... 케이크...”아이의 눈에 케이크는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어린 윤혜인이 눈시울을 붉히며 망가진 케이크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양아버지의 품에서 벗어나려 하자 양아버지가 숨을 헐떡이며 다독였다.“착하지. 아빠가 다시 사줄게.”어린 윤혜인은 너무 속상해 양아버지의 몸에 엎드린 채 양아버지의 등 뒤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거리를 내다봤다. 어린 윤혜인은 양아버지가 왜 갑자기 이렇게 뛰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양아버지의 당황한 모습을 보며 이내 얌전하게 양아버지의 목을 감싸더니 어깨에 기대어 북받치는 서러움을 꾹꾹 눌렀다. 어린 윤혜인은 나이가 어렸기에 양아버지처럼 곧 들이닥칠 위험을 감지하지는 못했다. 차갑고 끈적한 구덩이에 빠져있는 어린 윤혜인은 빨간 벨벳 슈트를 입은 남자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윤혜인은 너무 무서워 눈을 부릅뜬 채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두려움과 울분이 목에 걸려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 남자는 5미터쯤 떨어진 곳에 멈추더니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진 다리를 들더니 양아버지의 얼굴에 던져버렸다.“허허.”남자가 음침하게 웃더니 제 딴에는 재밌다고 생각하는 말을 내뱉었다.“그러게 누가 그렇게 빨리 달리래? 그러니까 다리까지 나가떨어지는 거 아니야.”남자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먹구름이 밀려오
칠흑 같은 밤과 뼈저린 추위, 그리고 아까 맞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비까지, 모든 상황이 똑같이 맞아떨어졌다. 양아버지가 어린 윤혜인을 안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길에서 달리다가 바닥에 철퍼덕 넘어졌다. 작고 연약한 어린 윤혜인은 포물선을 그리다 옆에 있던 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의 몸과 얼굴은 흙이 잔뜩 묻었고 무성한 갈대에 가려져 시커먼 진흙과 한 몸이 되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이 겨우 몸을 일으켜 양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려는데 양아버지가 어린 윤혜인을 향해 힘껏 고개를 저었다. 넘어져서 몸을 다친 양아버지는 몸이 찢어질 듯이 아팠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어린 윤혜인을 안았던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어린 윤혜인은 그런 양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구덩이에 빠져있는 걸 양아버지도 분명히 봤는데 양아버지가 왜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내달리는지 말이다. 어린 윤혜인은 그렇게 넋을 놓고 한참 동안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빨간 스포츠카가 하늘이 떠나갈 것 같은 엔진소리와 함께 양아버지 뒤를 쫓았다. 앞에서 달리던 양아버지는 그렇게 차에 치여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어린 윤혜인은 양아버지의 다리가 몸에서 완전히 분리되더니 다른 곳으로 날아가는 걸 목격했다. 심지어 그중 한쪽이 어린 윤혜인 앞에 떨어졌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뭉개진 다리였다. 바닥에 쓰러진 양아버지의 얼굴도 어린 윤혜인을 향해 있었다. 눈을 부릅뜬 모습이 마치 절대 소리를 내면 안 된다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어린 윤혜인은 초점을 잃고 퀭한 양아버지의 두 눈을 보며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목구멍에 뭐가 걸린 것처럼 정말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어린 윤혜인은 죽을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범퍼가 깨진 스포츠카에서 빨간 벨벳 슈틀 입은 남자가 내려왔다. 어린 윤혜인은 얼굴은 매혹적이고 잘생긴 남자가 얼마나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르는지 똑똑히 보았다. 남자는 몸통이 절반 뜯어져 나간 양아버지를 이리저리 돌려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