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번 누군가 보러 올 때마다 이준혁의 눈빛은 밝아졌다가 다시 어두워지는 걸 보아 분명 원하는 사람이 오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문이 닫히는 소리에 눈을 감은 채 쉬고 있던 이준혁이 눈을 떴다.방문객을 본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외면했다.표정만 봐도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을 본 게 분명했다.순간 윤혜인의 마음이 다시 아프면서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그녀는 입술을 다물고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못한 채 제자리에 서 있었다.한참 동안 침묵이 흐른 뒤, 그녀는 보온병을 들고 고개를 숙인 채 들어와 물었다.“준혁 씨, 다친 데는 좀 괜찮아요?”시선을 돌린 이준혁의 잘생긴 얼굴에 짜증이 가득 담겨 있었다. “누가 들어오래?”그의 말투와 표정이 윤혜인에게 정말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순식간에 윤혜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돌아서서 떠나고 싶은 충동이 가슴속에서 솟구쳤지만 발은 뿌리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그녀는 손을 꽉 말아쥐며 그래도 해명하려 애썼다.“어제는 준혁 씨를 신경 쓰지 않은 게 아니라 선배가 눈앞에서 떨어지는 걸 보고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순간 당황해서 잠깐 이성을 잃었어요. 그땐 그냥 무서워서...”누군가 자신의 목숨을 구하려다 죽는 건 생각만 해도 다리에 힘이 풀렸고, 자연스레 더 다친 사람에게 먼저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그녀의 양심과 본능 모두 이준혁에게 먼저 다가갈 수 없게 했다.또한 사실이 그러하듯 한구운은 조금 더 심하게 다쳐 지금까지도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그녀가 말을 이어갔다.“나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다치게 하는 준혁 씨 모습에 진심으로 감동했어요...”이준혁은 차마 들어줄 수가 없었다.감동?누가 감동 따위 바랬나.한구운이 나타난 게 수상해 어젯밤 휠체어를 타고 한구운이 있는 병동으로 내려가 혹시나 단서가 있는지 살펴봤다.그 결과 윤혜인이 남자의 침대에 엎드려 밤새 남자의 곁을 지키는 모습이 보였다.마음이 있다면 밤에 그를 보러 왔어야지.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는 자신을 무시하고 있었다
자신감이 없는 듯 윤혜인의 목소리는 매우 낮았다.한 번도 먼저 다가선 적이 없었는지라 그의 옆에 붙어 있는 팔은 긴장해서 굳어 있었다.이준혁은 무심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맞으면 어떻고, 또 아니면 어때?”수치심을 버리고 윤혜인은 가장 어려운 첫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그의 차가운 표정을 보자 이내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도 자신을 구해줄 때의 그를 생각하며 애써 참아냈다.그녀는 물러서지 않고 이준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정말로 절 보고 싶지 않다면, 다신 귀찮게 안 할게요.”눈앞에 있는 꽃잎 같은 입술에서는 마치 달콤한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이준혁은 별다른 표정 없이 손가락을 더욱 꽉 쥐었다. 피도 점차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분명 무슨 스킬을 쓴 것도 아니고 그저 가볍게 닿은 것뿐인데 그는 윤혜인을 바로 눕혀버리고 싶었다.그러나 어젯밤의 장면을 떠올리니 곧 마음이 다시 식어버렸다.“네 남자친구는 어디에 두고 이러는 거야?”놀란 윤혜인은 한동안 이준혁이 누구를 말하는지 알아채지 못했다.하지만 금세 떠올리고 막 해명하려던 찰나, 이준혁이 조롱 가득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아니면 두 사람 다 갖고 싶은 거야?”윤혜인은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마음도 무언가에 세게 잡아당겨 지는 듯했다.‘여태 날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팽팽하던 공에 바람이 빠진 것처럼, 혼란스러웠던 머리가 갑자기 맑아진 것 같았다.어렵게 쌓아 올린 용기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이제 두 사람은 몇 마디 말로 해결할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윤혜인은 조금 전 자신의 충동적이었던 행동을 매우 후회하며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미안해요, 방해해서.”말을 마치고 나서 그녀는 투명인간처럼 바로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하지만 돌아서려는 순간 그녀는 이준혁에게 손목을 덥석 잡히고 말았다.곧이어 그는 윤혜인의 손을 단단히 쥐고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선택하기 그렇게 어려워?”이준혁은 정말이지 윤혜인 때문에
그때, 원지민의 손목을 바라본 윤혜인은 순간 충격을 받아 얼굴이 창백해졌다.원지민이 착용하고 있는 옥 팔찌는 바로 윤혜인이 문현미에게 돌려준 팔찌였기 때문이었다.윤혜인은 복잡한 눈빛으로 그 옥 팔찌를 잠시 바라보다가 마침내 손을 내밀어 가볍게 악수를 했다.그러고는 문현미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아주머니, 그럼 두 분 얘기 나누세요. 저는 먼저 가볼게요.”“어머님”이 아닌 “아주머니”라고 부른 것만으로도 현재 그녀의 태도가 드러났다.문현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윤혜인이 막 발을 내딛으려는 순간, 이준혁의 냉랭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가지 마.”윤혜인은 걸음을 멈칫했지만 이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급하게 침대에서 내려오던 이준혁은 상처가 벌어져 “윽.”하고 짧게 신음소리를 냈다.문현미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파 서둘러 그를 막았고 원지민에게 눈짓을 하며 말했다.“지민아, 네가 여기서 준혁이 좀 돌봐줘. 난 혜인 씨 배웅하러 가봐야 할 것 같다.”곧 다시 눕혀진 이준혁이 창백해진 입술로 힘겹게 말을 꺼냈다.“혜인이한테 말해줘요. 아직 할 말이 남았다고.”안색이 어두워졌지만 문현미는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고는 밖으로 윤혜인을 따라가 그녀를 불러세웠다.“혜인 씨, 잠시 얘기할 수 있을까요?”윤혜인은 거절하지 않았고 얼마 후 문현미가 입을 열었다.“소미 사건에 대해 다 알고 있어요.”문현미의 표정은 그닥 좋지 않았다. 송소미가 비참하게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비록 그녀도 송소미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죽었으니 기분이 언짢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게다가 문미정은 이준혁을 찾아와 그가 윤혜인을 위해 송소미를 몰아붙이지 않았더라면 송소미가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떠들어댔다.결국, 송소미는 처참한 결말을 맞이했다.친척 간에 교류가 없더라도 문현미는 사람 목숨이 걸린 일로 번지기를 원치 않았다.그녀가 신중하게 말했다.“지민이는 준혁이랑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윤혜인은 살짝 웃으며 거절하지 않고 말했다.“생각 해보겠습니다.”사실 윤혜인은 원래 해외로 나갈 계획이 있었고 굳이 문현미에게 불편을 주고 싶지 않았다. 아무래도 문현미를 진심으로 좋아했었고 자신의 어머니처럼 생각했으니 말이다.문현미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할 말을 마치고 두 사람은 다시 각자 있어야 할 곳으로 떠났다.한편 병실 안.원지민은 병색이 도는 듯하지만 여전히 잘생긴 이준혁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오랜만에 만나면 꼭 한 번 세게 안아주려고 했는데, 이렇게 약해진 줄은 몰랐네.”그러자 이준혁이 물었다.“왜 이렇게 꾸미고 다녀?”예전의 원지민은 항상 남자아이처럼 다녔었고 심지어 어릴 때의 이준혁은 그녀를 남자아이라 착각하고 함께 놀았었다.15,16살이 될 때까지도 원지민은 남자아이처럼 꾸미고 다녔다.그 후엔 그녀가 유학을 떠나면서 거의 만나지 못했다.이준혁의 물음에 원지민의 표정이 굳어졌다.“왜, 별로야?”이준혁은 긍정도 부정도, 아무런 평가도 하지 않았다.예쁘고 안 예쁜 것에 그닥 신경 쓰는 타입은 아니었으나 원지민은 처음 윤혜인과 마주쳤을 때 그녀의 미소에 마음이 녹아버렸다.조금 전 상황을 되돌려보며 웃다가 원지민은 다시 평소처럼 돌아와 어깨로 이준혁을 툭 쳤다.“보기 불편하면 그냥 예전의 원지민을 생각해. 어차피 난 변하지 않았으니까.”그렇게 원지민을 살펴보던 이준혁은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꽉 잡더니 물었다.“이 팔찌 어디서 난 거야?”원지민은 손목이 아파 얼굴을 찌푸렸다.“이모가 주신 거야.”이준혁도 눈살을 찌푸리더니 가감 없이 말했다.“빼.”그러자 놀란 원지민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이준혁, 너 왜 이렇게 옹졸해졌어?”이준혁은 딱히 설명할 마음도 없었다.“얼른 빼라니까.”정말이지 화가 나서 원지민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그렇게 팔찌를 빼려고 손을 뻗었는데 너무 힘을 주다가 그만 땅에 떨어뜨렸다.“쨍그랑.”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옥 팔찌가 두 동강 났고 이준혁은 그걸 보며
‘절단이라니?! 그렇게 심각한 건가?!’윤혜인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의사 선생님이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나요?”박미선은 슬픔에 잠겨 울며 말했다.“그래요, 누구보다 유능하고 훌륭한 내 아들... 다리가 없어지면 어떻게 살겠어요!”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윤혜인도 충격을 받긴 마찬가지였다.‘그렇게 뛰어난 사람인데... 선배 어떻게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이때 박미선이 갑자기 말했다.“혜인 씨, 우리 구운이 버리지 않을 거지? 혜인 씨 구하다가 구운이 이렇게 된 거잖아. 버리지 않을 거지?”윤혜인은 멍해졌다.‘우리 둘이 가짜 연인 사이라는 거... 설마 아직 알려드리지 않았나?’곧 그녀가 중얼거렸다.“아주머니, 저랑 구운 오빠는...”하지만 그녀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박미선이 통곡하며 무릎을 꿇었다.“풀썩!”박미선은 눈물 콧물을 흘리며 말했다.“혜인 씨, 내가 이렇게 빌게. 제발 인제 와서 우리 구운이를 버리지 말아줘. 절대 그 충격을 견딜 수 없을 거야. 우리 아들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도 콱 죽어버릴 거야!”박미선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윤혜인이 얼른 손을 뻗어 그녀를 부축하려 했다.주변을 지나가는 의사와 간호사들은 윤혜인을 마치 배은망덕한 사람처럼 보는 것 같았다.어떻게 해도 일으켜 세울 수 없자 윤혜인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아주머니, 일어나서 말씀해주세요, 네?”하지만 박미선은 일어나기는커녕 오히려 한재철도 불러들였다.“여보, 빨리 와서 우리 며느리한테 구운이 버리지 말라고 빌어봐.”윤혜인은 할 말을 잃었다.다행히도 비교적 이성적이었던 한재철은 다가와서 박미선을 나무랐다.“당신 뭐 하는 거야?”한재철이 박미선을 일으켜 벤치에 앉혔지만 그녀는 계속 울고 있었다.물론 한재철의 얼굴도 좋지 않았다.“미안해요, 애 엄마가 너무 흥분해서... 많이 놀랐죠?”윤혜인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이해할 수 있어요.”이런 큰일 앞에서 누구나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려운 법이다.한재철은 부드럽게 말했
윤혜인은 한구운을 바라보며 진심으로 말했다.“당연히 알죠. 오빠 다리가 저 때문에 다친 거니까, 제가 책임지고 치료를 도와야 해요.”그녀의 말을 들은 한구운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역시, 그녀는 단순했다. 다른 생각이 있을 리 없었다.그렇게 한구운은 후속 치료 계획을 받아들였고 해외 전문가와도 연락을 마쳤으며 이틀 후에는 수술을 위해 출국할 준비까지 했다.경찰이 나중에 기록을 작성하러 왔을 때 한구운은 그날 밤 왜 그곳에 있었는지 설명했다. 그날 밤 윤혜인이 걱정되어 집으로 갔다가 송소미가 그녀를 납치하는 것을 보고 추적하여 구해냈다고 말이다.남아있는 감시 카메라 경로와 시간대도 일치했다.시간을 계산해본 윤혜인은 휴가를 연장해야겠다는 결론을 지었다.수술과 이동 시간을 포함하면 최소 한 달은 휴가를 내야 했으나 회사에서 그렇게 긴 휴가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그래서 사직을 고려하게 되었다.주로 한구운의 이번 일에 그녀가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다 생각했기 때문이다.만약 그가 없었다면, 끔찍한 결과를 맞이한 사람은 분명 그녀 자신이었을 것이다.하지만 이게 웬일이었을까, 예상과 다르게 상사는 윤혜인의 상황을 이해하고 그녀의 자리를 남겨주기로 했다. 또 그녀가 가르치던 학생들도 전화를 걸어와 잘 공부하겠다고 다짐했다.특히 이하진은 180도 변한 태도로 자신 있게 그녀에게 약속했다. 그녀가 돌아오면 최소한 50등은 오를 거라며 말이다.이 말에 윤혜인은 한결 마음이 놓였다. 자신이 직접 가르친 학생들이기에 그녀도 쉽게 떠나기 어려웠다.떠나기 전에 그녀는 요양원에 가서 이태수를 만나, 해외로 한구운의 치료를 도우러 갈 것이라는 말 대신 학술 교류를 위해 간다고 말했다. 온전히 이태수가 걱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아니나 다를까 이태수는 매우 기뻐하며 윤혜인이 큰일을 해냈다고 칭찬했다.그 후, 그녀는 소원을 만나러 갔다. 소원은 병원에서 퇴원해 회사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어디서 돈을 마련했는지 모르겠지만 소원은 이미 은행에 160억 원
윤혜인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괜찮아요.”원지민도 따라서 미소를 지었다.“그리고 저랑 준혁이는 그냥 좋은 친구일 뿐입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고 준혁이는 절 한번도 여자로 본 적 없습니다.”윤혜인은 원지민이 이런 말을 할 줄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이준혁의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오해한 적 없습니다.”원지민이 웃으며 대답했다.“오해하지 않았다니 다행이네요. 만약 저 때문에 두 사람이 싸우게 된다면 많이 미안할 것 같았거든요.”그러자 윤혜인이 다급히 설명했다.“저 준혁 씨랑 아무런 사이 아닙니다. 그러니 신경 안 쓰셔도 돼요.”“아무런 사이가 아니라뇨? 두 사람...”원지민이 더 말하려고 하자 이준혁이 끼어들었다.“너 갈 거야 말 거야?”그의 말투는 매우 성가신 듯했다.원지민은 말을 멈추고 윤혜인에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럼 전 이만 갈게요. 나중에 기회 되면 다시 얘기해요.”윤혜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닫히면서, 원지민이 이준혁에게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살짝 밀더니 웃으며 무언가를 말하는 모습이 보였다.당당한 그녀의 모습은 이준혁과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곧 엘리베이터가 닫히고, 내부에는 익숙한 차가운 향기와 함께 다른 여자의 향기가 감돌았다.그 냄새를 맡은 윤혜인은 코끝이 시큰해짐과 동시에 갑자기 눈앞이 흐려졌다.병실로 돌아온 윤혜인은 간호사가 한구운의 상처에 붕대를 갈아주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여러 겹의 붕대 아래로 보이는 흉측한 상처와 약물 냄새, 강한 피비린내가 섞여 윤혜인은 속이 메슥거렸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내며 버티고 있었다.그때, 간호사가 그녀에게 말했다.“저기, 이쪽에 있는 붕대 좀 잡아주실 수 있을까요?”윤혜인은 겨우 대답했다.“네... 웁!”그녀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구역질이 났다.윤혜인의 격한 반응에 간호사와 한구운의 안색이 모두 변했다.“죄송해요. 아무래도 뭘 잘못 먹었나 봐요...
“그럴 일 없을 거예요.”윤혜인이 한구운을 달래며 말했다.“내 말은 만약에...”한구운이 잠시 하던 말을 멈칫했다. 은은한 불빛 속에서 그의 온화한 얼굴이 조금 차갑게 보였다.“너 나랑 평생 함께 있어 줄 거야?”윤혜인은 사실 그렇게 먼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그래서 그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이 짧은 몇 초의 망설임이 한구운은 매우 불쾌했다. 그는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의 다른 손을 꽉 잡았다.그러자 어리둥절해진 윤혜인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곧이어 한구운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한 말을 기억해.”윤혜인은 잠시 멍하니 있었다. 그 순간, 한구운이 조금 낯설게 느껴져서 말이다.그때였다.“끼익!”급정거 소리가 나더니 차가 급히 멈췄고 뒤이어 차 문이 ‘쾅' 하고 열렸다.차 문 앞에 서 있던 이준혁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두 사람이 꽉 잡고 있는 손을 응시하더니 갑자기 코웃음을 쳤다.혐오감이 가득 담긴 그의 눈빛에 윤혜인은 마치 온몸이 찢기는 것 같았다.“내려.”이준혁이 차갑게 명령했다.윤혜인은 거의 반사적으로 손을 빼려 했지만, 한구운이 꽉 잡고 있어서 움직일 수 없었다.한구운은 이준혁과 눈을 맞추며 담담하게 말했다.“이준혁 씨, 미안하지만 저희는 비행기를 타야 해서요.”이준혁은 그를 한 번 쓱 훑어보더니 이내 무시하고 윤혜인을 강제로 차 밖으로 끌어냈다.하지만 그런데도 한구운이 손을 놓지 않아 윤혜인은 곧 몸이 두 동강 날 것 같았다.“아파요.”그녀의 외침에 이준혁은 손을 놓았고 한구운도 손을 풀었다.그 순간, 이준혁은 윤혜인을 번쩍 안아 자신의 차로 데리고 갔다.한구운은 뒤에서 담담하게 말했다.“혜인아, 기다릴게.”그 말에 윤혜인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비행기 타러 가야 하는데... 이 사람 뭐 하려는 거지?’그녀는 차갑게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이준혁 씨, 저 내려 줘요.”그러나 이준혁은 못 들은 척하고 그녀를 차 뒷좌석에 밀어 넣었
은색 미니밴은 이제 주도권을 잡았고 더 이상 검은색 차량과 정면으로 맞붙지 않으려 했다.그들의 목표는 픽업트럭과 트럭에 타고 있는 사람들 전부였다.만약 그들이 구해진다면 자신들의 기지는 끝장날 게 뻔했다.은색 미니밴은 픽업트럭을 향해 추격하던 중, 다시 한번 총구를 들어 트럭을 조준했다.목표는 단 하나, 트럭을 전복시켜 절벽 아래로 추락하게 만드는 것이었다.소원은 뒤따라오는 차가 계속 자신들을 조준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손은 전보다 더 떨려 안정감을 잃었고 뒷좌석에서는 공포에 질린 듯한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다들 다음 총알이 누구에게 향할지 몰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죽음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공포 앞에서 아무도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소원은 뒤차에서 어떤 모션이 나올지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필사적으로 차를 몰아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었다.멈추는 순간 위험은 더 커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은색 미니밴이 다시 픽업트럭을 조준하려는 순간, 검은색 차량이 갑자기 속도를 내어 커브 길에서 추월했다.그러고는 차체를 던져 승합차와 픽업트럭 사이에 끼어들며 총알을 막아냈다.하지만 이번 상황은 심각했다.총알을 막아낸 직후, 검은색 차량의 뒷좌석에서 불꽃이 튀어 오르더니 곧장 거센 불길로 번졌다.뒷좌석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고 차 안은 금세 아수라장이 되었다.미니밴 역시 이 광경에 놀라 멈칫했다.그러나 검은색 차량의 운전자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불길이 치솟는 뒷좌석을 강제로 승합차에 밀어붙였다.결국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미니밴은 중심을 잃고 휘청이다가 산 아래로 추락했다.곧이어 미니밴에서도 거대한 불길이 치솟았다.한편, 검은색 차량은 미니밴을 밀어붙인 여파로 인해 간신히 멈췄으나 뒷좌석은 절벽 밖으로 튀어 나가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상태가 되었다.지금은 운전자가 움직이지 않아도 불길이 더 번지면 차체가 균형을 잃고 결국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게 뻔했다.SUV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죽음
상대는 뛰어난 운전 실력으로 은색 미니밴을 압도하며 그를 몰아붙였다.검은색 SUV는 마치 밤의 사냥꾼처럼 두 개의 강렬한 헤드라이트를 번쩍이며 자신의 먹잇감을 정확히 노렸다.은색 미니밴은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상황에 몰렸다.검은색 SUV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구원자 같았고 그 틈을 타 소원은 잠시 숨을 고르며 다시 속도를 올렸다.소원이 검은색 SUV를 돕지 않은 것은 일부러가 아니었다.우선, 자신의 운전 실력이 명백히 검은색 SUV의 운전자에 미치지 못했고 괜히 멈췄다가는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었다.게다가 소원은 한 사람의 목숨이 아닌 차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희망을 짊어지고 있었다.이 꽃다운 나이의 소녀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소원은 반드시 그녀들을 넓은 도로까지 안전하게 데려가야 했다.검은색 SUV의 도움 덕분에 소원은 은색 미니밴과 거리를 벌릴 수 있었다.하지만 백미러로 여전히 두 차량이 치열하게 맞붙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검은색 SUV가 교묘한 기술로 미니밴을 몰아붙였다면 은색 미니밴은 마치 물뱀처럼 교활하고 악랄한 움직임으로 대응했다.몇 차례나 검은색 SUV를 절벽 아래로 밀어버리려는 시도가 있었다.이들은 모두 죽음을 각오한 사람들이었다. 한쪽이 죽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싸움이었다.상황이 매우 위태로웠지만 검은색 SUV의 운전자는 상당히 노련했고 미니밴의 계략을 여러 번 피하며 반격했다.오히려 미니밴을 바위로 몰아가 차체에 더 큰 손상을 입혔다.그 바람에 미니밴의 옆면에 있던 백미러가 부서지고 차체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있었다.검은색 SUV는 이를 계산이라도 한 듯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아 미니밴이 뒤에서 들이받도록 유도했다.그리고 곧이어 SUV는 날렵하게 방향을 틀며 다른 쪽 백미러도 바위에 부딪혀 부서지게 만들었다.결국 은색 미니밴은 양쪽 백미러를 모두 잃었는데 이런 험난한 산길에서는 백미러가 없는 상태로 운전한다는 것은 눈 한쪽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었다.검은색 S
소원은 마침 차 안에서 발견한 가위를 사용해 머리를 짧게 잘랐다.그리고 모자를 쓰고 얼굴에 흙을 조금 묻히니 얼핏 보면 그 남자와 닮아 보이기까지 했다.차에서 내리지 않기만 하면 충분히 속일 수 있을 것 같았다.모든 준비를 마친 후, 소원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열쇠를 꽂은 뒤 가속 페달을 밟아 시동을 걸었다.차량이 움직였지만 밖에 있는 경비원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졸음이 몰려오는 시간이라 동료가 돌아오지 않은 것조차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소원은 차량을 문 앞까지 몰고 가 남자의 신분증을 꺼내 보여주었다. 경비원은 대충 한 번 보고는 손짓으로 통과를 허락했다.차량이 대문을 지나가는 순간, 소원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첫 번째 관문을 넘었다고 끝난 게 아니었다.두 번째, 세 번째 관문이 여전히 기다리고 있었다.이 조직은 매우 교묘하게 여러 겹의 관문을 설계해 두었기에 혼자든, 둘이든, 무리로 도망치려고 해도 도보로는 절대 빠져나갈 수 없었다.첫 번째 관문조차도 벗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뒤이은 두 번째 관문에서도 소원은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신분증을 보여주자 경비원은 별다른 의심 없이 바로 통과시켰다.이 남자가 조직의 주요 인물들과 연관이 깊었는지 신분증만 보여주면 경비원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길을 열어줬다.생각해 보면 조직의 상층부와 관련이 없었다면 남자는 한밤중에 이런 곳까지 자유롭게 다닐 수 없었을 것이다.그 뒤로 검문하는 사람이 없었고 소원은 꿈에도 이렇게 순조롭게 진행될 줄 몰랐다.그러나 마지막 관문에서 문제가 발생했다.소원이 신분증을 보여주자 옆에 있던 경비원이 한 번 보고는 손짓으로 통과를 허락했다.그렇게 떠나려던 순간, 남자의 허리에 걸려 있던 무전기가 울리기 시작했다.무전기에서 무언가 급박한 말이 쏟아졌고 소원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표정이 심각해지더니 경비원은 갑자기 사냥총을 들어 소원을 겨누며 말했다.“내려!”어설픈 한국어로 소원에게 명령한 것이다.소원
상대방은 소원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녀의 손짓은 대략적으로 이해한 듯했다.그는 총으로 소원의 머리를 툭툭 건드리며 고개를 한쪽으로 젖히고 말했다.“가!”그가 가리킨 곳은 나무 오두막이었다. 아마도 그곳에 가서 사실 확인을 해보겠다는 의미 같았다.소원의 심장이 곧 목을 뚫고 나올 듯 했다.나무 오두막 안에는 그 남자의 시체와 피로 물든 바닥뿐이었다.그곳으로 간다면 사실확인 같은 건 말할 것도 없고 상황을 보고 바로 총알이 자신의 머리를 뚫을 가능성이 컸다.마지못해 오두막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던 소원은 일부러 손에 쥐고 있던 열쇠를 땅에 떨어뜨렸다.부드러운 흙바닥이라 소리는 나지 않았다.소원은 협조하는 척하며 이 감시자가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을 이용해 어색한 한국어로 차 안에 있던 소녀들에게 조용히 말했다.“열쇠, 땅에 있어요. 내가 이따가 잡을 테니까, 다들 도망쳐요. 뒤돌아보지 말고.”이 한마디는 거의 마지막 작별 인사와 다름없었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맨몸으로 총을 가진 사람과 맞서 싸우는 것은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소원이 생각하는 ‘붙잡는 방법’은 총을 빼앗아 이 경비원과 함께 죽는 길뿐이었다.결과가 좋을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선택지가 없었다.소원에게 후회하냐고 물어본다면 그녀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답할 것이다.열 명이라도 살릴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니 말이다.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미안한 마음은 남아 있었다.유진이와 제대로 작별 인사조차 나누지 못한 채 떠나야 한다니, 자신이 좋은 엄마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그녀를 더욱 아프게 했다.‘유진아, 엄마를 용서해줘. 끝까지 널 되찾아 오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소원은 발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그 발은 마치 수백 킬로그램의 쇠사슬에 묶인 것처럼 무거웠다.경비원은 소원의 태도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총의 개머리판으로 그녀의 등을 툭툭 치며 성급하게 말했다.“빨리...”“쿵!”갑작스러운 소리에 경비원이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졌다.소
이 둘은 방심한 채로 무기를 소지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문밖에 서 있는 두 경비는 달랐다. 그들은 진짜 총을 들고 있었다.만약 정면으로 뛰쳐나간다면 소원과 그녀의 일행은 접근도 못 하고 총에 맞아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컸다.이 상황에서 유일한 희망은 마당에 있는 픽업트럭이었다.소원은 조금 전에 처리한 경비원의 몸에서 열쇠를 빼냈다.모든 사람을 트럭 안에 숨겨 탈출한다면 성공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터무니없는 방법 같아 보이지만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유일한 선택이었다.산속으로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했다.산속에는 이 지역 지형에 익숙한 경비원들이 있었고 소녀들은 안에서 물과 식량도 없이 있었기에 오래 버틸 수 없을 터였다.구조대가 오기 전에 발견되거나 굶어 죽을 가능성이 컸다.결국 이 계획은 소원이 깊이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성공하지 않으면 모두가 죽는다. 실패가 허용되지 않는 상황이었다.소원은 문밖에 서 있는 경비원 둘 중 한 명이 화장실로 가는 것을 보았다.큰일을 보러 간 듯했는데 이런 경우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예의 따위를 따지는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작은 일이었다면 어디서든 적당히 해결했을 것이었다.그들의 삶의 습성이 거의 야만인과 다름없었다.소원은 남은 경비원이 담배를 피우는 타이밍을 기다렸다가 조용히 작은 초가집으로 다가갔다.그녀는 바깥 문에 달린 자물쇠를 조용히 풀고 문을 열었다.안에서는 작은 소리에도 깜짝 놀란 소녀들이 떨고 있었다.소원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을 때조차도 그들은 몸을 웅크린 채 움직이지 못했다.소원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저랑 함께 나갈 사람 있어요?”방 안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모두 얼어붙은 듯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소원은 다시 한번 물었다.“저랑 함께 나갈 사람 있어요? 구조대를 기다리면 오래 걸릴 거예요. 그 전에 들킬 수도 있고 제가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같이 나간다면 제가 목숨 걸고 여러분을 지킬게요. 완전히
이 남자는 확실히 앞의 남자보다 힘이 셌다.남자가 거칠게 뿌리치며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바람에 소원은 순간적으로 고통이 몰려왔다. 가슴뼈가 몇 개는 부러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웁!”소원의 입에서 선혈이 튀어나와 녹색 풀밭을 붉게 물들였다.눈이 부실 정도로 선명한 피였다.한편, 경비원은 목을 움켜쥐며 간신히 소리를 내보려 했지만 소원이 찔러 넣은 과일 포크는 그의 성대를 관통해 동맥까지 꿰뚫었다.결국 그는 타는 듯한 비명을 지를 뿐, 제대로 된 말을 할 수 없었다.피는 멈추지 않고 쏟아져 나왔다.남자는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점점 아래로 내려가더니 끝내 ‘퍽’ 소리와 함께 무릎을 꿇고 땅에 쓰러졌다.포크가 그의 목에 그대로 박힌 채였기에 아직 완전히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그는 눈을 부릅뜨고 사악한 표정으로 소원을 노려보며 기어오르기 시작했다.이 남자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이런 일을 하며 살아온 그의 성격은 누구보다 강인했다.피를 반 통이나 흘렸음에도 그는 여전히 소원을 죽이기 위해 기어오고 있었다.입에서 나오는 신음 비슷한 소리가 주변의 두 경비원을 깨울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다행히 소원이 남자를 초가집 뒤쪽 잡초가 무성한 곳으로 유인했기에 소리는 쉽게 들리지 않았다.소원은 대략적으로 경비원들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알고 있었다.약 500m 앞에 두 명의 경비원이 더 있었지만 그들은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지금은 사람들이 가장 졸리고 주의력이 흐려지는 시간이었다.설령 낮에 충분히 잠을 잤다고 해도 이 시간대에는 소리나 시각적인 반응에 대한 민감도가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소원의 온몸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다.뼈가 근육을 찌른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움직이려고 해도 팔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쇠약해져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속삭였다.‘죽을 순 없어. 이런 짐승 같은 인간들에게 목숨을 빼앗길 순 없어.’소원이 이렇게까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초가집 안에서 그
남자는 눈을 크게 뜨고 공포에 질린 채 비명을 지르려 했다.하지만 소원은 재빨리 손을 뻗어 남자의 입을 꽉 틀어막아 어떤 소리도 나지 못하게 했다.그녀는 과일 포크를 깊이 찔러 넣어 끝까지 박아 넣었다.남자의 목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며 소원의 손을 온통 끈적이고 축축하게 적셨다.남자는 눈을 부릅뜬 채 마지막 순간을 맞이했고 끝내 소리를 내지 못한 채 숨이 끊어졌다.죽기 전까지 그는 믿을 수 없었다. 이렇게 마른 여자가 자신을 죽일 힘이 있을 줄은 말이다.평생 사람을 물건처럼 팔아치웠던 그가 결국 자신이 취급했던 ‘물건’의 손에 죽게 될 줄이야.이 얼마나 아이러니하고 우스꽝스러운 죽음인가.마치 한 편의 블랙 코미디 같았다.소원은 남자가 숨을 멈춘 것을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그의 몸을 침대 위로 눕혔다.그런 다음 유일한 무기였던 과일 포크를 뽑아냈다.그 순간 목에서 피가 기둥처럼 뿜어져 나와 방 안 곳곳에 튀었다.소원의 몸에도 피가 묻었지만 그녀는 더러운 나무통 따위 신경 쓰지 않고 그 안에 담긴 물로 몸과 포크를 깨끗이 씻어냈다.과일 포크는 그녀에게 생명줄과도 같았다.그것은 목숨을 지켜줄 무기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 그녀를 도울 도구가 될 것이었다.모든 피를 씻어낸 뒤, 소원은 옷을 다시 입고 몸을 정돈했다.그리고 창문 쪽으로 다가가 보니 한 경비원가 의심스러운 듯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소원은 순간적으로 재빨리 침대를 흔들며 의미심장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밖에 있던 경비원은 이 소리를 듣고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발길을 돌렸다.‘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군. 이런 소리만 들으면 진짜 못 참겠다니까!’그는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안에 여자는 못 건드린다고 하지만 이 여자는 불러낸 걸 보니 나중에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군.’경비원은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 멍하니 초가집을 바라보았다.소원은 소리를 내던 것을 멈추고 마음을 가라앉히며 문을 열고 나갔다.문 앞에는 경비원가 풀을 말아 만든 담배를 피우며 서 있었다.소원이
그 나무통은 보기만 해도 오래되어 보였다.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용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지저분한 남자들이었는지를 생각하니 소원은 속이 울렁거렸다.그녀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오빠, 다른 통은 없어요?”남자는 짜증이 난 듯 대답했다.“왜 이렇게 요구가 많아? 이것저것 다 가져오라는 거야? 너 씻을 거야 말 거야? 계속 이러면 밖으로 끌고 나가서 처리해버린다!”“알겠어요. 화내지 마요.”소원은 겁먹은 목소리로 낮게 대답했다.남자는 여전히 나갈 생각이 없는 듯했고 소원은 감히 더 묻지 못했다.남자는 그녀를 재촉하며 말했다.“이제 3시간도 안 남았어. 빨리 안 할래?”소원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네, 네, 지금 바로 씻을게요.”소원은 남자에게서 등을 돌린 채 손을 뻗어 겉옷을 벗었다.이어 작은 민소매까지 벗으니 상체에는 검은색 미니탑 하나만 남았다.뒤에서 드러난 그녀의 매끈한 어깨와 아름다운 날개뼈는 남자의 눈길을 사로잡았다.남자는 침을 흘리며 말했다.“돌아봐, 나 보고 벗어!”그러자 소원은 부끄러운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오빠, 뭔가 어렴풋이 보여야 더 아름답잖아요. 조금 이따가 멋진 거 보여드릴게요.”남자는 ‘멋진 거’라는 말에 흥분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이 여자는 분명 그런 곳에서 일하던 여자일 거야. 보통 겁만 먹는 여자들보다 훨씬 재미있겠는데.’소원은 탑만 남겨둔 상태에서 더 이상 벗지 않고 대신 바지를 벗기 시작했다.그녀의 가늘고 긴 팔이 허리춤에 닿았고 하얗고 매끈한 허리가 드러났다.이 모습을 본 남자는 본능적으로 반응하며 초조한 기색을 보였다.하지만 소원은 천천히, 마치 유혹하듯 움직였고 남자는 더욱 흥분하며 그녀의 행동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소원은 바지를 벗는 동작을 하며 손을 뒤에서 앞으로 이동시켰다.그러고는 손에 과일 포크를 단단히 쥐고 천천히 돌아섰다.이를 모르는 남자는 소원의 아름다운 몸매를 보며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왜 멈춰? 계속 벗어봐!”‘역시, 고급 술집
소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있었어요. 방금 떠났고요.”소원은 속으로 계산했다.‘이 시간대라면... 그럼 우리도 내일 아침쯤에 떠나겠네.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 있으니 완전히 수동적인 상황은 아니야.’하지만 지금은 그다지 늦은 시간이 아니라 밖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깨어 있는 상태였다. 좋은 기회가 아니었다.소원은 잠시 고민하더니 양옆의 사람들에게 조용히 무언가를 속삭였고 그것을 차례로 전달하도록 했다.말이 끝나자 모두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잠들지 못하더라도 눈을 감고 몸을 편히 쉬었다.드디어 밤이 되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닫혀 있던 나무문이 갑자기 열렸다.한 남자가 손전등을 들고 안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씩 비추더니 소원의 얼굴을 비추고는 손짓으로 그녀에게 말했다.“너, 나와.”그 목소리는 소원에게 익숙했다.소원에게 머리를 맞았던 바로 그 남자였다. 설마 했는데 그가 정말로 나타난 것이다.소원은 속으로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말 그대로 기회가 스스로 찾아온 것이었다.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남자에게 다가가더니 마치 이제야 남자를 알아본 것처럼 깜짝 놀라며 말했다.“오빠...”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자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 하는 신호를 보냈다. 소원에게 말을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소원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남자는 문지기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몇 마디 주고받았고 소원은 그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하지만 문지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빨리 움직이라는 손짓을 보냈다.그렇게 남자는 소원을 데리고 작은 초가집으로 향했다.그 초가집은 굉장히 작아 두 사람이 몸을 돌리기에도 비좁은 공간이었다.하지만 내부에는 등불이 있었고 그녀들이 있던 곳보다 훨씬 상태가 나았다.냄새도 심하지 않아 아마도 문지기가 교대할 때 쉬는 공간으로 보였다.문이 닫히자마자 남자는 소원의 손에 묶여 있던 밧줄을 풀어주었다.그러고는 본색을 드러냈다.그는 손을 뻗어 소원의 가슴 쪽으로 만지려고 했다.소원은 몸을 재빨리 비켜 손길을 피했다.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