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경한이 몸을 돌려보니 진아연이었다.진아연이 담배를 싫어하는 것을 떠올린 그는 무의식중에 담배를 꺼버렸다.진아연은 그의 행동에 불안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육경한은 절대 그녀를 탓하지 않을 것이고 그녀가 그 여자를 죽였다고 해도 그녀에게만은 매몰차게 굴지 못할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어떻게 온 거야?”육경한이 물었다.진아연은 보온병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아침을 챙겨 왔어요. 당신이 제일 좋아하는 해물 수프에요.”육경한의 눈빛이 따뜻해졌다. 해외에서 지내는 동안 진아연이 끓여준 수프는 그의 유일한 온기였다.두 사람은 VIP 병동의 식당으로 왔다.진아연은 뚜껑을 열고 직접 한 그릇 떠서 그에게 건넸다.육경한은 몇 모금에 그릇을 말끔히 비웠다.“맛있어요? 예전과 같은 맛인가요?”진아연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맛있어.”진아연은 또다시 한 그릇 떠서 그에게 건네다가 손에 힘이 풀려 수프를 쏟고 손등에 화상을 입었다.“악-”그녀는 비명을 질렀다.육경한은 급히 그녀를 안아 들고 냉수로 통증을 가라앉히고는 간호사를 찾아 약을 발랐다.약을 바르는 내내 진아연은 육경한의 품에 안겨 그의 셔츠를 잡고 설움을 토해냈고 하도 눈물을 흘려서 그의 옷이 흠뻑 젖었다.육경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간호사를 꾸짖었다.“할 줄 알아요?”깜짝 놀란 간호사는 손이 떨렸고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육경한의 관심에 진아연은 기뻤고 너그러워졌다.“경한 씨, 난 괜찮아요. 너무 그러지 말아요.”육경한은 그제야 불안한 마음을 억눌렀다.약을 바른 후.육경한 화장실에서 옷에 튄 얼룩을 처리하고 간호사 스테이션 옆을 지나갔다. 그때 두 간호사가 대화하는 소리를 들었다.“어제 VIP 병동에 온 여자와 함께 온 남자를 봤어?”“누구?”“이마에 흉터가 있고 약간 사나운데 아주 아주 잘생긴 그 남자.”“아, 그 잘생긴 오빠? 왜?”“방금 VIP 구역에서 어떤 여자를 안고 있었어.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왔더라고. 그 여자가 얼마나 연기를 잘하는지, 뜨겁지
그는 손을 만지며 말했다.“내가 지난번에 얼굴은 건드리면 안 된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진아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마.”이대론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뜻이었다.진아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라면 앞으로 어떻게 가문에서 신뢰를 얻을 수 있겠는가?그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부추긴 것이었다.그녀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어제 일은 모두 내 탓이에요. 기분 잡치게 했어도 흥분하면 안 됐어요. 내가 그들을 말렸어야 했어요.”육경한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뭐라고 했는데?”머뭇거리던 진아연이 말했다.“화내지 않겠다고 약속해요.”“응.”“소씨 가문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 아니라면 당신과 잠자리를 하지 않았을 거라며 당신을 보는 것만으로도 역겹다고 했어요. 특히 등에 흉터는 악몽을 꿀 정도로 끔찍하다고 했어요...”진아연은 점점 일그러지는 육경한의 얼굴을 보고는 일부러 분노하며 말했다.“당신이 밖에서 여자들과 노는 것은 아무렇지 않아요. 하지만 당신을 이렇게 말하는 건 참을 수 없어요.”육경한의 눈이 차갑게 변하고 손등의 핏줄이 튀어나왔다.그는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잠자리를 하고 난 후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짓던 소원이 떠올랐다.힘 있는 사람에게 굽신거리는 그녀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었다.그녀 눈에 그는 역겨워서 두려운 존재였다니.하지만 그녀 또한 그보다 고귀한 건 아니었다.그 당시 소씨 가문의 반발이 없었다면 육씨 가문도 심한 타격을 입고 서울에서 퇴출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그만 잊어버려요. 내가 말하지 않았던 셈 쳐요. 내 마음속에서는 당신이 최고예요.”진아연은 윤경한의 품에 기댔다. 그녀의 얼굴에는 사악한 미소로 가득했다.호텔 문을 열었을 때 여자의 몸이 사랑을 받은 흔적으로 덮여있는 것을 본 진아연은 마음속의 질투심을 억제할 수 없었다.망할 년!그녀는 꼭 육경한이 직접 소원을 망가뜨리게 할 것이다.육경한은 불편한 심기를 거두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육...경...한!”그녀의 찢어진 목소리에서 남자의 이름이 하나씩 튀어나왔다.공기는 점점 희박해지고 그녀는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머릿속에 그녀를 사랑하는 어머니가 케익을 들고 그녀의 생일 축하하는 모습이 그려졌다.“소원아, 소원 빌어야지!”어머니는 자애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귀한 보물처럼 바라보고 있었다.그녀가 죽으면 어머니는 살아갈 수 있을까?그녀의 눈에서 커다란 구슬이 툭툭 떨어졌다.그녀는 도대체 무슨 잘못을 한 걸까?육경한의 이글거리는 눈은 악마를 집어삼킨 듯 했다. 손에 힘이 점점 강해져 소원의 가느다란 목이 부러질 것 같았다.그는 자신이 너무 우스꽝스러웠다.이 여자에게 연민을 느껴 밤새 바보처럼 그녀를 걱정했다.아버지가 감옥에서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투신자살했던 그때, 그의 인생이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이 여자가 어떻게 그를 비웃었는지조차 한켠에 접어뒀다.하지만 이 여자는?그녀는 그가 역겹다고 하고 있다.그때 영상 속과 똑같은 말투로 그가 역겹다고, 멍청하다며 놀림거리가 된 그를 비웃었다...분노가 마치 칼날이 되어 그를 난도질했다.육경한은 입꼬리를 올리며 살기 어린 냉소를 지었다.그는 더 이상 그녀를 동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한 행동은 동정할 받을 가치가 없다.그녀가 죽지 않는 한, 이번 생에는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그는 평생 그녀를 무자비하게 괴롭힐 것이다.육경한의 시린 눈이 그녀를 응시했다. 그는 그녀의 귓가에 악마처럼 속삭였다.“난 널 평생 괴롭힐 거야.”그녀는 아무 반응 없었다. 풀린 동공과 상기된 얼굴에 육경한은 손을 놓았고 이성을 되찾았다.호흡이 돌아온 소원은 숨을 헐떡이며 산소를 들이켰다.그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침대 시트와 우의를 가릴 수 없을 정도였다.그녀는 자신이 꾼 터무니없는 꿈을 떠올렸다.그녀가 잠든 동안 육경한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품에 안고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마치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하지만 그 다정한 육경한은 꿈속에만
“하하. 하하...”소원은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헝클어뜨린 채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왜 맞았는지 네가 더 잘 알 거 아니야!”“넌 인간도 아니야! 넌 짐승이야!”“날 죽도록 괴롭히고 싶은 거지?”“네 소원을 들어줄게.”소원은 피를 토하듯 흐느꼈다.그녀는 갑자기 이불을 들추고 침대에서 일어나 맨발로 창문으로 달려갔다.육경한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소원은 이미 창턱에 올라갔다.그녀는 저 아래 바닥을 바라보며 참담한 미소를 지었다.“여기가 10층이지? 떨어지면 많이 못생겨 있겠지?”“당장 내려와!”육경한은 다급하게 외쳤다.“이미 너무 못생겨졌어. 이렇게 큰 흉터 때문에 어떤 옷을 입어도 어울리지 않을 거야...”소원은 실성한 듯 중얼거렸다.마음이 너무 황량했고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했다.육경한이 돌아온 이후로 그녀의 생활은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났다.그는 그에 대한 그녀의 환상을 산산조각 냈다.그는 그녀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소원의 눈에 슬픔은 너무 짙어 가실 줄 몰랐다.“난 너에게 미안한 짓을 한 적 없다고 거듭 말했지만, 넌 한 번도 믿지 않았어. 내가 한 말이 거짓이라고 쳐. 근데 육경한 난 널 사랑했었어!”육경한이 겪은 고통을 감당할 수 있었다.그러면 서로 빚진 것이 없게 된다.그녀는 과거형으로 말하고 있다...육경한은 가볍게 웃으며 이 거짓말쟁이가 또 자신을 속이려 한다고 생각했다.그녀에게 속지 않을 것이다!절대!더럽고 지조도 없는 이런 여자는 사랑을 입에 담을 자격이 없다.그의 혀끝이 뼈를 에는 듯한 한기를 뿜었다.“뛰어내리면 한이그룹을 서울에서 영원히 퇴출시킬 것이고 네 부모들도 너의 뒤를 따라가게 할 거야. 그리고 네가 아끼는 사람들이 영원히 고통받으며 너의 죽음으로 드리운 그림자 속에서 살도록 할 거야!”육경한의 눈에 광기 어린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순식간에 사람을 집어삼킬 듯했다.그의 허락 없이 그녀는 절대 죽을 수 없다.너무 미운 그
육경한은 적대적인 눈빛으로 말했다.“오냐오냐하니까 아주 멋대로구네?”소원은 화가 난 육경한의 모습을 보고는 환하게 웃었다.“그건 3년 내 결혼 하지 않는 거야. 내가 고상을 떠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연녀란 꼬리표는 달지 않을 거야.”진아연이 매일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 육경한의 신부가 되어 그녀를 철저히 밟아 버리려는 것 아닌가?그러면 그녀의 뜻대로 되게 하지 않을 것이다.그녀는 누구나 건드릴 수 있는 내연녀는 하지 않을 것이다.육경한은 분노가 치밀었다.“네까짓 게 무슨 자격으로 하라 마라야! 내가 결혼하든 안 하든 넌 내 노리개가 되어야 해!”“육경한, 난 지금 너와 상의하는 게 아니야. 어차피 넌 우리 가문을 놔주지 않을 테니,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그녀의 목소리가 가벼워졌다. 하지만 의미는 무거웠다.“끝까지 가.”육경한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몇 미터 밖에서도 간담이 서늘하게 하는 웃음이었다.끝까지란 말을 그는 좋아했다.그는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좋아.”그는 앞으로 한 발짝 다가가며 손을 내밀었다.소원도 망설임없이 그의 손을 잡고 내려왔고 그대로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육경한은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몸 아래 짓눌렀다. 그리고 그녀의 허리를 감싸다가 아래로 손을 뻗었다.“네가 날 자극했으니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어떤 건지 똑똑하게 알려줄게. 후회하기엔 이미 늦었어.”그의 지옥을 그녀가 모두 경험하게 해줘야겠다.더 이상 따스함을 찾아볼 수 없는 그의 목소리는 극도로 차가워졌다.그는 거칠게 움직이며 말했다.“내 지옥에 온 것을 환영해.”반쪽눈만 드러낸 소원은 여전히 요염한 눈빛을 뿜었다.그녀는 육경한의 목을 감고 핏기가 도는 입술로 그의 귓볼을 삼켰다.그리고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육경한, 난 이미 지옥이었어.”네가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순간부터!네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시작한 순간부터!다른 사람이 함부로 날 대하게 한 순간부터!육경한, 난 매 순간 지옥에서 살고 있었어
육경한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비웃었다.“넌 나에게 빌게 될 거야.”하지만 자신이 끝까지 용서를 구하는 그녀를 기다리지 못하게 될 줄을 그는 몰랐다.그는 3년이란 시간이 길다고 생각했고 그녀를 괴롭히기에는 충분하다고 여겼다.하지만 그들은 반년도 넘기지 못했다.소원이 아무런 생기도 없이 그의 품에 안겼을 때 그는 자신의 목숨으로 그녀를 되찾으려 했다.그 깊은 사람의 감정은 증오의 공허함 속에서 흐려졌다.그는 결국 그녀를 망가뜨리고 말았다....이준혁 사무실.주훈은 병원에서 윤혜인과 나눈 대화를 그대로 보고했다.이준혁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조사해.”주훈은 고개를 끄덕이고 사무실을 나가려 했다. 그때 이준혁이 그를 불렀다.“그날 생일 파티에 관한 사실이 아닌 내용들도 전부 내려.”사무실을 나선 주훈은 마주 향해 오는 송휘재를 보고 그를 불러세웠다.“LM 회의 당일 대표님 사무실 입구 감시카메라 영상을 복사해 줘요.”잠시 당황한 송휘재는 표정을 숨기며 대답했다.“네, 알겠습니다.”얼마 지나지 않아 송휘재는 영상이 든 메모리 카드를 건넸다.주훈이 그에게 물었다.“요즘 세희 아가씨를 모시느라 힘들지는 않아요?”송휘재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힘들지 않아요. 대표님의 부담을 덜어 드리는 것이 제 일인 걸요.”주훈은 고개를 끄덕였다.“대표님께서 앞으로는 더 이상 세희 아가씨의 지시를 들을 필요 없이 회사에 남아서 일을 하라고 했어요.”“왜요?”송휘재는 아무 생각 없이 말을 뱉었다.주훈은 눈썹을 치켜세웠다.“회사로 돌아오고 싶지 않아요?”송휘재는 황급히 말투를 바꿨다.“당연히 아니죠. 그저 너무 갑작스러워서요.”주훈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난 휘재 씨가 세희 아가씨에게 마음이 있는 줄 알았어요.”“그럴 리가요. 그 여자는 성격도 안 좋아서 하루빨리 회사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에요.”“그래요? 어쨌든 이제 그 사람은 우리와 아무 상관 없으니, 지시를 들을 필요도 없어요.”주훈이 덧붙였다.“이
윤혜인은 억지로 이 사실을 잊으려 하고 있었다.하지만 임세희의 생일 파티 다음 날, 헤어졌다가 재회한 두 연인이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는 소식이 쏟아져 나왔고 모든 매체에서 이 소식을 보도했다.또한 생일 파티에서 직접 목격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모두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좋은 일이 곧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인시켜 주고 있었다.이런 소식이 퍼질 수 있다는 것은 이준혁도 묵인하고 있다는 뜻이다.그의 능력이면 보도를 막는 것쯤은 일도 아닐 테니 말이다.의도적으로 잊고 있었던 일이 다시 제기되었으니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것은 거짓이었다.씁쓸한 무언가가 그녀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그는 시선을 떨구고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이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한구운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얘기하기 싫으면 얘기하지 마, 난 그냥 네가 예전처럼 행복하길 바래.”윤혜인은 다시 말을 꺼냈다.“선배, 미안해요. 앞으로는 거리를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우리 다시 만나지 말아요.”그녀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던 한구운은 커피잔을 든 손이 통제력을 잃을 뻔했다.하지만 이내 감정을 추스르며 그가 다정하게 물었다.“왜 그래? 그 사람이 협박했어?”윤혜인은 고개를 저었다.“선배가 절 만날 때마다 상처받아서 제가 너무 죄송해서요. 모두 나 때문이라 만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윤혜인은 아주 단순했다. 그녀는 그저 지인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한구운도 그녀가 백지처럼 순수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하지만 그럴수록 그는 더더욱 더럽히고 싶었다.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난 두렵지 않아.”하지만 윤혜인이 고개를 저었다.“미안해요. 선배. 전 이미 다짐했어요. 제 마음이 너무 불편하고 선배한테 너무 죄송해요. 선배를 더는 해칠 수 없어요.”윤혜인의 단호한 태도에 항상 따뜻했던 한구운의 눈이 차갑게 번쩍였다.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네가 결정했으니 널 존중할게.”“이
그는 차갑게 말했다.“그럼 안 꺼지고 뭐 하는 거죠?”“그건…”한구운은 잠시 멈칫하며 야망을 선명하게 드러냈다.“혜인이는 너무 훌륭하죠. 아주 마음에 들고요.”남자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노려보았다.“마음에 들어요? 스스로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지 돌아보는 게 어때요?”한구운은 웃음을 터뜨렸다.“당신이 이렇게 해도 혜인의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을 거예요.”이준혁은 화가 치밀어올라 하마터면 폭발할 뻔했다.그 말은 두 사람이 방금 그들 부부에 대해 말했단 거야?주먹을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이내 주먹을 풀었다.이 자식은 일부러 그를 자극하고 있었다.그는 턱을 살짝 올리며 차갑게 웃었다.“우리는 부부고 혜인이는 내 거예요.”한구운은 열받은 남자를 보며 더 자극해야 할 것 같아 장난스럽게 말했다.“주인이 있으면 더 흥미롭지 않을까요?”퍽-힘 센 주먹이 한구운을 향해 날아갔다.순간, 한구운의 코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는 얼굴은 감싸며 최후의 점잖음을 유지했다.이준혁의 분노는 이미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광기로 가득했다. 그의 발이 한구운을 향했다.“그만!”급히 달려온 윤혜인이 두 팔을 벌려 한구운 앞에 막아섰다.“뭐 하는 짓이에요.”한구운을 보호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이준혁은 눈이 가늘어졌다. 심장이 아파왔다.그는 냉소를 지었다.“왜? 내가 너희들 달콤한 시간을 방해 했어?”“그게 무슨 말이에요?”윤혜인은 큰소리로 비난했다.다른 남자를 감싸 있는 그녀에 이준혁은 평온함을 잃었고 말이 날카로워졌다.“넌 부끄러운 줄도 모르면서 나한텐 말도 못 하게 하는 거야?”얼굴이 하얗게 질린 윤혜인은 숨을 쉬기 힘겨웠다.피곤, 무감각, 실망, 여러 감정들이 얽혀서 그녀는 너무 힘들었다.이미 너무 실망하고 있었다. 실망보다 더한 감정이 있을까?없다.그녀는 몸을 돌려 한구운을 부축했다.“선배, 우리 가요.”“멈추지 못해?”이준혁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그는 윤혜인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한구운이 막아섰다.
소종은 육경한이 아이들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교도소 안에 있을 때 육경한은 모든 사람들의 면회를 거절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늘 두 아이를 그리워했다.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다.“타세요, 대표님.”소종이 침묵을 깨며 한마디 했다.육경한이 차에 타자 소종은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이 대표님 가족이 소 대표님을 잘 돌봐주셨어요. 아이들끼리도 친하게 지내고... 그리고 김 대표님도 하정이와 유진이를 돌봐주셨어요... 그리고 윤혜인 사모님의 오빠가 8년 전에 결혼했어요. 집 가정부의 딸 구지윤 씨와 결혼했어요. 처음에 할아버지가 많이 반대했지만 지금은 행복하게 잘살고 있어요. 딸을 낳으면서 할아버지도 받아들이셨고요... 아, 참. 예전에 소 대표님과 친하게 지냈던 여경 강민혜 씨, 기억하시죠? 소 대표님의 친동생이었더라고요. 당시 소 대표님의 어머니가 과다 출혈로 위독하셨을 때 그 여경이 수혈해 줬거든요. 소 대표님이 두 사람의 혈액형이 같은 것을 알고 친자 확인을 했더니 강민혜 씨가 정말 친동생이었어요. 예전에 도둑맞아 죽었다고 알려졌던 아이가 사실은 살아 있었던 거죠...”소종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차는 어느새 호화로운 호텔 앞에 도착했다.그들이 육경한을 위해 환영회를 준비한 듯했다.육경한이 말했다.“이런 거 필요 없어. 어떤 모임에도 참석하고 싶지 않아. 그냥 쉬고 싶어.”그러자 소종이 바로 말했다.“안 돼요. 오늘 식사 자리에는 꼭 가야 해요.”황진수도 말했다.“맞아요, 육경한 씨. 소소하게 준비한 것이니 우리 마음을 봐서라도 꼭 참석해 주세요.”마지못해 차에서 내린 육경한은 호텔 룸에 들어간 순간 방 안에 익숙한 얼굴들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예쁜 소녀가 육경한에게 다가오더니 큰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고 말했다.“그쪽이 우리 아빠예요?”자신과 닮은 소녀의 눈매에 육경한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육하정이 계속 말했다.“엄마가 말했어요. 아빠가 잘못을 저질러
법정 안, 판사가 선고했다.“피고인 육경한, 살인죄로... 그러나 피해자와의 갈등 관계를 고려하고 증인의 증언을 종합하여 본 법정은 다음과 같이 판결합니다. 육경한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합니다...”“대표님...”방금 깨어나서 법정에 나와 주석훈의 살인을 증언한 소종은 울며 육경한을 불렀다.뒤에 서서 두 달 된 아기를 안고 있는 소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시울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아기의 얼굴과 핑크색 이불을 본 육경한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는 더 이상 소원에게 할 말이 없었다. 대신 소종을 보며 한마디 했다.“잘 돌봐줘.”육경한이 누구를 말하는지 바로 캐치한 소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요.”...15년 후, 구치소 대문 앞.15년 전 입소할 때 입었던 옷을 입고 나온 육경한은 여전히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걸었다.교도소에 있는 동안 좋은 표현 덕분에 감형을 받아 조기 출소했다.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육경한의 얼굴에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더 깊고 온화한 매력을 내뿜었다.구치소 밖에서는 황진수와 소종이 육경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종이 가장 먼저 달려와 그를 붙잡고 울었다.“대표님, 고생 많으셨어요!”키가 185cm나 되는 팔이 하나뿐인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대표님...”옆에 있던 황진수가 육경한에게 담배를 건네자 담배를 받은 육경한은 깊게 빨아들인 뒤 말했다.“내 재봉 솜씨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 나중에 너희들에게 옷 한 벌 만들어 줄게.”소종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슬픈 분위기가 육경한의 한 마디에 완전히 뒤바뀌었다.소종이 울다가 웃으며 말했다.“대표님, 기대하고 있을게요.”육경한이 코웃음을 쳤다.“꺼져.”먼 곳을 바라본 육경한은 소종과 황진수 외에 그를 맞이하러 온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왠지 실망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들었다.그녀가 오지 않아도... 괜찮았다.결코 좋은
“두 번째 것을 선택할게.”죽어도 소원을 구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온 육경한이었기에 고민할 필요 없이 바로 대답했다.“허허, 육 대표가 소원을 정말 많이 아끼나 봐.”주석훈이 비꼬는 듯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그럼 시작하지. 육 대표, 6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죽은 소녀의 이름이 뭔지 기억나?”자리에 얼어붙은 육경한은 주석훈이 혹시라도 소원을 해칠까 봐 바로 앞으로 두 걸음 걸었다. 덫이 ‘탁탁’ 소리를 내며 그의 두 다리를 집었고 이내 피가 철철 흘렀지만 육경한은 극심한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몰라.”손에 칼을 움켜쥔 주석훈은 이를 갈며 말했다.“그 소녀의 이름은 수정이야. 육 대표처럼 모든 지원을 다 받아 치료받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겠지.”큰 고통 속에도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육경한이 입을 열었다.“그 교통사고에서 소녀가 죽은 것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나는 우리 미우 그룹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어. 그 사람들이 나를 먼저 치료한 이유는 대동맥이 눌러져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소녀도 나와 똑같이 심각한 상태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어. 그래서 그 후에 소녀의 가족에게 위로금도 보냈어.”육경한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소녀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 그녀의 부모님이 통곡하는 모습을 본 육경한은 소종을 시켜 소녀의 가족에게 2억 원의 위로금을 전달했다.“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주석훈이 매서운 눈빛을 내뿜으며 큰소리로 외쳤다.“어쨌든 넌 살아남았고 나의 수정이는 떠났어. 아무도 우리 수정이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주석훈은 더 이상 게임 따위 생각하지 않은 채 미친듯이 울부짖었다.“너희들은 모두 냉혈 인간들이야. 너희들은 죽어도 싸!”말을 마친 주석훈이 칼을 휘둘러 소원의 배를 찌르려 하자 육경한은 재빨리 몸을 날려 자신의 종아리로 칼을 막았다.소원을 밀어낸 육경한은 격렬한 고통을 참으며 주석훈과 맞붙었다.팔다리가 멀쩡한 주석훈은 이내 다리가 다친 육경한보다 우위를 점했다.도우려고 한 발 나선 소
이후 남자는 기분이 좋은 듯 소원의 입에 물린 천을 빼주며 말했다.“어떻게 여기에!”소원은 깜짝 놀랐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그녀를 계속 도와주던 주석훈이었다!자신에게 접근한 의도를 의심한 적은 있었지만 나중에 그의 여자친구가 병으로 사망했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과는 원한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이 모든 사건의 배후가 주석훈이라니...“소원, 많이 놀랐지?”가면을 벗어 던진 주석훈은 마치 조금 전까지 잔인했던 사람이 본인이 아닌 듯 아주 평온해 보였다.“왜... 이렇게까지?”소원은 처음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왼손을 사용해 물건을 잡는 모습을 보고 바로 깨달았다.“너였어!”소원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상철 삼촌과 진아연을 죽인 사람이 너! 맞지?!”주석훈은 부인하지 않았고 그의 표정 또한 모든 걸 말해주듯 가볍게 웃으며 한마디 했다.“소원, 그 사람들은 죽어도 싼 사람들이야. 그들이 죽었으니 네가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사람들이 공모해서 네 아버지를 죽였잖아?”“아니야!”소원은 단호하게 부정했다.“그 사람들은 단순히 조종당한 희생양일 뿐이야. 내 아버지를 죽인 진짜 범인이 너였어?! 넌 그냥 증거 인멸을 한 거야!”“소원, 정말 똑똑하네?!”칭찬하듯 한마디 한 주석훈의 말에 소원은 분노로 가득 차올라 외쳤다.“왜! 아빠가 뭘 잘못했다고 죽인 건데?!”주석훈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원, 네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이유? 알고 싶어? 나와 육경한 사이에 깊은 원한이 있기 때문이야.”“그게 아빠와 무슨 상관인데!”소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렇게 간단한 이치를 모른다고?”주석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진용이 죽어야만 너와 육경한의 갈등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 넌 내 손에 있는 최고의 무기야. 넌 육경한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 줄 수 있는 존재지. 지난 5년 동안, 본인만의 원칙이 있는 사람이 그것을 깨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즐거운
소원이 두 손을 머리 위로 든 채 남자의 방향으로 걸어가자 남자는 다친 전미영을 바닥에 내던졌다.전미영은 이미 의식을 잃었기에 지금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다.소원은 체념한 듯 보였지만 사실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몰래 반지 속의 장치를 작동시켰다.이내 독이 묻은 바늘로 남자의 팔을 찌르자 팔이 곧바로 마비되기 시작한 남자는 저린 감각이 팔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망할 년! 감히 날 속여?”남자는 분노하며 소원을 발로 걷어찼다.배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돌린 소원은 엉덩이가 세게 걷어차인 바람에 비틀거리며 앞으로 두 걸음 나아갔다. 다행히 앞에 소파가 있었기에 소파를 붙잡고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은 뒤 있는 힘껏 소리쳤다.“살려 주세요! 도와주세요...!”그러나 남자가 바로 달려와 순식간에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최면제의 효과가 서서히 올라옴과 동시에 문을 걷어차는 소리와 몇 발의 총성이 희미하게 울리는 것이 들렸다.소원은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제발 엄마를 구해 주세요...’그러고는 있는 힘을 다해 목걸이를 바닥으로 내던진 뒤 점점 의식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희미하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운송 차 안인 듯한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었다.입안에는 천이 틀어막혀 있었고 팔도 밧줄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순간 소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결국 구출되지 못하고 가면을 쓴 남자에게 끌려온 것이다.주위에 전미영이 보이지 않자 소원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엄마가 같이 끌려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야.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엄마를 병원으로 옮겼을 거야. 그러면 희망이 있어.’하지만 엄마의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없었기에 속으로 행운을 빌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이 납치범에 대한 분노가 가슴 속 깊이 밀려왔다.‘이 사람은 대체 우리와 무슨 원한이 있길래 이런 짓을 하는 거지?’덜컹거리며 달리는 차 안에 있는 소원은 졸음이 밀려왔다.임신 후기라서 그런지 이런 상황에서도 극심한 피
육경한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바로 그 여경을 찾아서 같이 있도록 해. 이 사람이 아직도 쇼핑몰 안에 있을 가능성이 커. 나도 지금 돌아가는 중이야...”소원은 순간 숨을 죽인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앞을 응시했다.바로 앞에 하얀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한 중년 여성을 붙잡고 있었다. 그 중년 여성이 바로 모두가 찾는 전미영이었다.육경한의 말대로 그녀의 엄마는 정말 여기에 있었다.육경한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계속 들렸지만 소원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전미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가면을 쓴 이 교활한 남자는 사람을 쇼핑몰 안에 붙잡아둔 채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짜 번호판 차량은 아마도 이 남자가 미리 파놓은 함정일 것이다.그녀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똑똑한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심리를 읽을 줄 알았다.가면 쓴 남자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소원에게 말을 하지 말고 전화를 끊으라는 뜻을 내비쳤다.자기 엄마가 상대방의 손에 있기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전화를 끊은 후 가면을 쓴 남자가 그녀에게 한마디 지시했다.“전화기를 꺼서 이쪽으로 던져.”소원은 남자의 말대로 순순히 전화기를 끄고 그의 앞에 던진 후 한마디 물었다.“누구세요? 지금 뭘 원하는 거예요? 제발 우리 엄마만 해치지 마세요!”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소원은 남자를 향해 두 가지 질문을 던졌지만 그녀의 유일한 요구는 상대방이 엄마를 해치지 않는 것이었다.말을 하면서도 소원은 몰래 주변을 관찰했다. 가면 쓴 신비로운 남자는 정말 교묘한 장소를 선택했다.화장실은 휴게실 제일 안 쪽에 있었고 뒤쪽에 있는 창문과 거리가 가까웠다.남자는 전미영을 붙잡고 입구 쪽에서 소원과 정면으로 마주서 있었다. 이렇게 하면 좁은 포위망이 형성되어 소원을 한 구석에 가둘 수 있다.남자는 손에 흉기를 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제작한 권총 비슷한 것
강민혜는 즉시 지시를 내려 이 수상한 차량을 중점적으로 조사하라고 했다. 육경한이 회사의 위기 대응팀과 협력해 조사하라고 지시하자 그들은 이내 차량의 이동 경로를 찾아냈다.육경한은 즉시 차량을 출동시켜 추적하도록 했지만 소원더러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현재 상대방의 목표가 소원의 엄마가 아니라 임신 중인 소원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게다가 차량 추격은 너무 자극적이어서 소원 같은 임산부에게 위험할 수 있었다.소원은 육경한이 그녀를 배려하기 위해 이렇게 하는 것임을 알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원이 차량 추격에 참여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어머니를 찾지 못하고 본인까지 안 좋은 상황이 되면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친 셈이 된다.육경한의 부탁에 소원은 그의 말에 따라 자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육경한은 회사 경호원 한 팀을 불러 상대방의 차량을 추적하도록 했다.쇼핑몰에 남아 있는 경호원들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소원을 경호했다. 소원의 걱정을 덜기 위해 육경한도 차량 추적에 나섰다.이렇게 되어 여러 대의 차량이 CCTV에 찍힌 그 검은 차를 추적하기 시작했다.소원은 쇼핑몰의 휴게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불안감에 휩싸인 그녀는 심박 수가 빨라져 의사가 와서 경고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그녀의 몸에도 해로울 뿐만 아니라 조산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소원이 걱정된 강민혜는 현장에 남아 그녀를 달랬고 소원이 화장실에 갈 때도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했다.소원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를 했고 강민혜도 옆에서 그녀를 위로했다.“소원 씨,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님은 분명 괜찮을 거예요. 그렇게 큰 고비도 넘겼는데 별일 없을 거예요. 게다가 경찰과 육 대표님이 모두 추적하고 있잖아요. 그러니 마음 놓으세요.”본인이 아무리 불안해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소원은 육경한이 좋은 소식을 전해주길 간절히 기다렸다. 하지만 불편한 몸 때문에 자꾸 구역질이 났다.이때 소원의 전화가 울렸다.육경한이었다.당황한
육경한이 성큼성큼 다가가 물었다.“왜 그래, 장모님은?”“엄마가 사라졌어...”소원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충돌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전미영은 그녀 곁에 서 있었다.어떻게 된 일일까... 눈 깜짝할 사이에 전미영이 사라졌다.전미영은 걸을 수는 있지만 말을 잘하지 못하고 지능도 두세 살 아이 수준인데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소원이 급히 찾으러 가려 하자 육경한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달랬다.“너무 급해 하지 마. 우선 CCTV를 보자. 경호원들에게 찾으라고 했어. 네가 걷는 것보다 경호원들이 움직이는 게 빨라.”소원도 육경한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최대한 침착한 마음가짐으로 엄마를 찾아야 했다. 절대 당황하면 안 되었다.두 사람이 CCTV 실로 향했을 때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전미영이 사라지는 영상을 찾아냈다.영상을 보니 전미영은 처음에는 경호원의 뒤, 소원 곁에 서 있었다.하지만 조금 전 말싸움이 일어나면서 그 남자가 경호원과 몸싸움을 하려 하자 경호원들은 소원이 다칠까 봐 소원과 육경한 주변으로 몰렸다.그러면서 전미영은 자연스럽게 뒤에 갔다. 원래대로라면 전미영도 별일 없어야 했지만 무슨 일인지 전미영이 갑자기 혼자 모퉁이 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그곳에 그녀를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그녀는 불과 7, 8걸음 되는 모퉁이까지 아주 빠른 속도로 걸어갔다. 한편 소원과 육경한에게 정신이 팔린 경호원들은 전미영을 발견하지 못했고 전미영이 뒤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다음 모퉁이의 CCTV에는 소원이 비상구로 들어가는 것이 찍었다. 계단에 CCTV가 없었고 출구에 CCTV가 한 대 있었지만 전미영의 모습은 어디에도 찍히지 않았다. 즉 전미영이 출구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그렇다면 유일한 통로는 지하 주차장이었다. 하지만 지하 주차장 출구의 CCTV가 때마침 고장이 나 있어 전미영이 그 출구로 나갔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전미영이 실종된 지 불과 몇 분, 실종자를 한 시간 이내에
두 모자가 가식적으로 불쌍한 척하며 사람들의 동정을 구걸한 것을 안 사람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 모자를 제일 먼저 도우려고 나섰던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소원에게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눈이 어두웠네요.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는 정말 톡톡히 교육해야 해요. 얼마든지 책임을 물으세요.”주변 사람들도 같은 입장이었다.입장을 바꿔 생각해 봤을 때 본인이 이런 말썽꾸러기 아이를 만난다면 분명 화가 날 것이다.게다가 이 모자는 역할 분담이 명확했다. 아들은 말썽을 부리고 엄마는 말재주를 발휘해 변명했다. 누구나 이런 일이 생긴다면 진짜로 화가 날 것이다.구경꾼들이 흩어진 후 육경한은 두 모자의 앞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더니 아이를 내려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시킨 거야?”엄마가 아이를 뒤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다고 했잖아요. 그냥 우리 애가 장난친 거예요.”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왜 이래요... 우리가 그냥... 사과할게요... 아이고, 내가 왜 이렇게 불행한지...”그들은 완전히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피해자인 척하고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고 주위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모습은 보기에도 이상해 보였다.조금 지친 소원이 육경한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됐어, 이만 가자.”“1분만 기다려.”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육경한은 아이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압박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누가 너를 시켰는지 말해. 안 그러면 바로 고소할 테니까.”겁이 많은 아이는 바로 오줌을 지리더니 이내 ‘와’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아저씨가...”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육경한이 아이의 엄마를 밀어내고 차가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똑바로 말해!”“어떤 아저씨가... 아주머니와 부딪히면 엄마에게 100만 원을 준다고 했어요... 엄마가 그러면 게임기를 사주겠다고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