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혁은 여름이 정말이지 사람을 잘도 속여 넘기는구나 싶어 혀를 내둘렀다.그러나 하준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여름이 환장하겠구나 싶기도 한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알아보겠습니다.”어쩔 수 없이 석주 쪽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그러나 여름이 어느 호텔에 묵었는지 기록이 없었다.‘그쪽이 자기 집을 따로 가지고 계신 건가?’다시 공항 쪽에 전화를 넣어봤다. 역시나 여름이 석주로 간 비행 기록도 없었다. 그런데 여름과 윤서가 동성으로 간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갑자기 머리가 띵했다.‘대체 갑자기 동성은 왜 가신 걸까? 그러면서 외부에는 석주로 출장을 가신다고 말씀해 놓으시고. 우리 회장님에게 숨겨야 할 사정이 있는 건가?’상당히 그럴싸한 생각이었다.막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하준이 전화를 걸었다.“비행기 표는 샀나?”“아직입니다. 저…석주에 강 대표님의 숙박 기록이 나오질 않습니다. 아마도 개인 부동산을 가지고 계신 것 같습니다.”상혁은 순식간에 판단을 내렸다. 여름이 하준에게서 뭔가를 숨기려고 한다면 역시나 어울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안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화신 쪽에서 하는 말로는 이삼일이면 출장에서 돌아오신다고 하니까요. 아마도 내일이면 돌아오시지 않을까요?”“그러면 같이 돌아올 거야. 됐어. 전 당주에게 찾아보라고 하지.”하준은 전화를 끊더니 바로 전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무래도 상혁보다는 지룡 쪽의 발이 더 넓은 편이니까.30분쯤 지나서 전성에게서 소식이 왔다.“회장님, 항편을 조사해 보니 강 대표님은 석주로 출장 가신 게 아니라 임윤서 씨와 동성으로 가셨습니다.”“동성을 왜 가지?”하준의 눈이 무거워졌다.“그런데 김 실장은 석주로 갔다고 하던데.”“회사 내부적으로는 석주로 출장 간다고 말씀하셨더군요. 그런데 실상은 그쪽으로 가시지 않은 겁니다.”전성이 말했다.“동성의 호텔에도 숙박하신 기록은 없습니다만 그쪽 출신이시니 옛날 집에 다시 들어가던지 했겠지요.”생각할수록 이상했다. ‘왜 윤
여름이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고 생각하자 하준은 완전히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보이지 않는 힘이 심장을 꽉 움켜쥐는 것처럼 너무나 아팠다.여름에 대한 감정이 상상 이상으로 강렬했던 것이다.모든 것을 깡그리 태워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여름이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가는 길에 죽어라 여름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그러나 전화를 받는 사람이 없었다.----한편 FTT 사무실.상혁은 하준이 급히 헬기를 부른 것을 알고 한참을 망설인 끝에 여름의 개인 휴대 전화로 연락했다.“김 실장님, 무슨 일이에요?”여름의 목소리가 들리자 상혁은 한숨이 나왔다.“강 대표님, 대체 몰래 동성에 가서 뭘 하시는 겁니까? 지금 회장님이 완전히 당황하셨어요. 지금 헬기까지 불러서 움직이려고 합니다.”“털썩!”옆에 있던 윤서가 손에 든 웨딩슈즈를 떨어트렸다.“저 오늘 결혼해요.”여름이 조그맣게 말했다.“네?”상혁은 너무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아니, 누… 누구랑 결혼을 하십니까? 일언반구 없으셨잖아요?”꿈이 아닌가 싶어서 얼굴을 세게 꼬집어 보았다.“유진 씨랑요.”여름이 미소를 띠고 답했다.“나, 유진 씨, 최하준은 오랜 세월 서로 얽혀있었어요. 지난번 일로 유진 씨가 내게 제일 잘해주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 마음을 소중히 여기고 싶어요. 하지만 최하준이 알까 봐 조용히 결혼식을 올리려는 거예요. 그런데… 아무래도 최하준이 뭔가를 알아버린 것 같군요. 모른다고 여기 와서 조금만 알아보면 금방 들켜버리겠군요.”“……”이 빅뉴스에 대체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강 대표님, 정말이지… 그 큰일을 조용히도 벌이셨군요.”상혁이 쓴웃음을 지었다.“회장님께서 아시면 난리가 날 겁니다.”‘심지어 뭔가 아주 극단적인 일을 벌이시겠지.’앞으로 공포의 최하준을 상대할 생각을 하니 벌써 등줄기가 서늘한 것이 사표라도 던지고 싶었다.‘크흡….’“아무래도 회장님이 무조건 최고속도로 동성으로 향하실 것 같으니 2시간 반이
“진짜 너 불쌍해 죽겠다. 어쩌다가 하필 초특급 금수저를 건드려가지고.”윤서가 한숨을 쉬었다“떼어내지도 못하고. 저는 멋대로 널 버려도 남에게 버려지는 꼴은 참지 못하는 그런 놈을….”그런 소리를 들으니 울컥하고 원망이 올라왔다.소중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길 줄도 모르는 최하준이 너무나 미웠다.----오전 11시.양유진의 친지가 속속 도착했다. 다들 신부를 보러 왔다.여름은 높은 웨딩슈즈를 신고 일어났다. 양유진의 누나이자 한선우의 어머니인 양수영이 마침 눈에 들어왔다. 한선우도 서도윤과 함께 들어왔다.생각해보니 몇 년 동안 한선우를 본 적도 없었다. 여름이 동성을 떠날 때 한선우는 한주그룹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서도윤과 사귀더니 아직 함께하고 있었던 것이다.“오랜만이야.”한선우가 복잡한 심경으로 여름을 바라보았다.3년 못 본 사이에 여름은 매우 아름답게 변해있었다. 특히나 눈부시게 흰 웨딩드레스를 입고 화사한 솜씨로 메이크 업까지 한 여름은 여신처럼 아름다웠다.어릴 때는 여름과 결혼하는 꿈을 수도 없이 꾸었는데 그 여름이 자기 삼촌과 결혼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아내 분이셔? 아름다우시네.”여름은 빙그레 웃으며 서도윤에게 가볍게 인사를 했다.“안녕하세요, 외숙모님.”서도윤도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자기 남편이 내내 마음에 두고 잊지 못하던 전 여친인 강여름이 양유진과 결혼을 하게 되니 여름에게 딱히 호감이 있지 않았지만 이제 악감정도 녹아내렸다.‘외숙모님’소리에 여름은 흠칫했다.강여경에게 ‘외숙모’소리를 듣고 싶었던 자신이 생각났다.‘쳇, 강여경이 한선우와 헤어질 줄은 몰랐지.’“어머, 얘가 새색시구나? 예쁘다.”양유진의 친척이 갑자기 양수영을 둘러싸고 떠들기 시작했다.양수영은 경멸하는 듯한 시선으로 여름을 내려다봤다.“예쁘기야 예쁘지. 중고라서 그렇지.”친척의 표정은 제각각이었다.“아니, 유진이가 왜 돌싱을 데려와? 유진이는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사업가인데. 저런 애는 너무 기울지 않나?”“뭐, 어쩔
한선우가 그 말을 듣더니 얼굴이 흙색이 되었다. 그러나 예전의 일을 떠올리고는 괴로운 듯 말했다.“그때는…여경이에게 속은 줄 몰랐어. 아, 그 뒤로 여경이 소식은 좀 있어?”여경의 이름을 듣고 여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3년 전에 다른 사람 얼굴로 성형을 하고 나타났었는데 그 뒤로 실종상태야. 배후에 뭔가 대단한 사람이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었는데.”한선우는 듣더니 불안한 얼굴이 되었다.“다시는 안 나타났으면 좋겠다.”“누가 아니래.”윤서가 한숨을 쉬었다.“백지안 하나 상대하기도 골치 아픈데 강여경까지 나타나면 완전 골 때리지.”여름이 얼굴을 찌푸렸다. 늘 강여경은 백지안보다도 교활한 데다 언젠가는 다시 나타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이거 내 연락처야. 이제… 친척이니까.”한선우가 내키지 않는 얼굴로 명함을 내밀었다.“전에는 내가 잘못해서 상처 줘서 미안해. 나중에 우리 삼촌이 괴롭히거나 우리 어머니가 뭐라고 하면 언제든 연락해. 내가 아무리 무능해도 영원히 네 ‘선우 오빠’니까. 그리고 나중에 나도 서울로 올라가게 될 거야.”여름은 깜짝 놀랐다.“한주그룹이 서울로 진출하는 거야?”“아니, 내가 한주그룹에서 떠나.”한선우가 고개를 저었다.“진영은 지금 점점 몸집이 커지고 있어서 이제 의약업계 최고의 기업이 되었으니까. 어머니가 이제 삼촌 밑에 들어가서 일 배우래.”“그렇구나. 열심히 해 봐.”여름이 명함을 받아 들었다.한선우가 자리를 뜨자 윤서가 눈을 찡긋거렸다.“그렇게 선우 오빠네 외숙모가 되고 싶어 하더니 이제 외숙모도 되고 오빠가 너네 신랑 부하직원으로 들어오네?”“됐어. 언제적 얘기니?”여름이 피식 웃었다.곧 예식이 시작되었다.결혼행진곡에 맞추어 서경주가 여름의 손을 잡고 걸어가 양유진에게 다가갔다. 뒤에서는 여울과 하늘이 꽃바구니에서 꽃을 꺼내 뿌리며 걸었다.예식장은 크지 않았지만 대단히 예쁘고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장식된 꽃들도 하나 같이 해외에서 실어 온 것들이었다.흩날리는 달
여울은 입을 비죽거리더니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하늘이 여울을 보더니 침착한 얼굴로 다정하게 말했다.“왜 그래? 엄마가 떠나는 것 같아? 아니야. 우리 엄마는 늘 우리와 함께 있을 거야.”“거짓말. 엄마는 유진이 아저씨랑 결혼하면 아가들을 낳을 거야. 그러면 엄마는 우리를 예뻐하지 않을걸.”여울은 코를 훌쩍거렸다. 너무 슬펐다.양유진이 잘해주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친아빠는 아니었다.‘이게 다 아빠 때문이야. 아빠는 바보야. 내가 그렇게 말을 해줬는데도 왜 아직까지 안 오는 거야?뭐, 이제 결혼식이 끝났으니까 어쩔 수 없지.’“아니야.”하늘이 일자 입을 하더니 여울의 손을 꼭 잡았다.“엄마는 그런 치사한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넌 영원히 내 동생이니까 내가 널 사랑해 줄게.”“하늘아….”여울은 다시 울었다. 하늘의 입에서 이렇게 다정한 말을 들은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예식이 끝나자 기자들이 웨딩 사진을 올리기 시작했다.양유진도 여름이 손을 잡고 두 사람이 반지를 낀 사진을 SNS에 올렸다.-꼭 잡은 이 손, 늙을 때까지 놓지 않겠습니다. 당신을 안 지 오늘로 1257일, 나는 내내 오늘을 기다려왔습니다.양유진은 그리 SNS를 활발하게 하는 타입은 아니라 사람들이 보기에 그렇게 화려하고 요란한 삶을 사는 재벌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 포스팅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맙소사, 이건 뭐 했다 하면 초대형 포스팅만 하는 건가?-와, 전생에 우주를 구했나, 양유진이랑 결혼하다니. 누군지 엄청 행복하겠다. 잘생겨, 돈 많아, 저런 남자 아무리 뒤져도 나한테는 안 걸리던데.-방금 뉴스 나온 거 봤는데 양유진 와이프가 강여름임.-강여름이라니? 그 강여름? 말도 안 돼.-바로 그 강여름 맞음. 최하준의 전 여친, 전처.-이게 모야? 양유진이 왜 강여름하고 얽힘? 게다가 번갯불에 콩 궈 먹듯 결혼이라니? -진짜인 듯. 기자들이 현장 사진 겁나 올림. 강여름이 인생 승자네. 최하준은 목 빼고 돌아오라고 기다리는데 쌩까고 돌아
“뭘 몰라?”하준은 심장이 철렁했다. 그다음 말을 듣기가 두려웠다.그렇다, 두려움.하준은 다시 엄청난 두려움에 직면했다. 자신의 아이를 가진 여름을 밀쳤을 때 여름을 데리고 병원으로 향하던 길에 느꼈던 바로 그 두려움이었다. 가장 소중한 것이 자신의 손을 서서히 빠져나가는 것을 뻔히 보면서 전혀 막을 수 없을 때 느꼈던 그 엄청난 공포.“강여름이 양유진하고 동성에서 결혼했어.”이주혁이 어쩔 수 없이 말을 이었다.“결혼식 끝났어. 양유진은 이미 공식 발표했고, 현장에서 기자들이 찍은 사진이 엄청나게 퍼졌어. 뉴스 열어 봐봐.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어.”“……”하준은 마른 세수를 했다. 거친 소리로 웃었다.“거짓말하지 마. 오늘 만우절이냐?”“아니야. 하준아, 강여름은 정말로 결혼했다니까. 정신 차리고 돌아와. 영식이랑 같이 술이나 한잔하자.”“닥쳐! 여름이가 결혼했을 리가 없어. 아직 12시도 안 됐다고.”하준이 고함쳤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예식을 오전으로 당긴 모양이야.”이주혁이 달랬다.“진정해. 강여름이랑 이혼할 정도였잖아. 그렇게 네가 사랑하는 것도 아니라고. 그냥 네 사람이 아니게 되니까…”“툭”하준은 전화를 끊어버렸다.‘이 감정이 그냥 소유욕이라고?아니야, 난 여름이를 사랑해.사랑한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너무 갑자기 깨달았던 것뿐이지. 하지만 난 여름이를 사랑하게 되었어.여름이를 닮은 아이를 낳고 여름이와 평생을 함께 보내고 싶어.그래, 내가 여름이에게 상처를 줬었지. 하지만 너무나 후회하고 있다고.매분 매초 후회한다고. 밤에 잠이 오지 않을 정도야.’하준은 머리가 텅 비었다. 한참 만에야 용기를 내 휴대 전화로 뉴스를 검색했다.굳이 검색할 필요도 없이 모든 언론의 메인 뉴스가 강여름과 양유진의 결혼 소식을 전하고 전국의 네티즌이 모두 댓글에 달려든 듯싶었다.온라인은 온통 두 사람의 웨딩 포토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름은 보조개가 쏙 들어가도록 웃고 있었다. 예쁜 것은
피로연.여름은 우아한 화이트 원피스로 갈아입었다. 몸매를 달 드러내는 심플한 라인에 목에는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오늘의 신부인 여름은 내내 빛나는 모습이었다.“삼촌, 외숙모… 어머니, 축하드립니다.”친척이 모인 테이블에 도착하자 한선우가 복잡한 심경으로 잔을 들었다.“고마워.”여름이 잔을 들고 입에 대려는데 양유진이 부드럽게 한마디 했다.“무리하지 말아요. 그냥 입에만 댔다가 떼도 괜찮아요.”“어머나, 벌서 와이프 챙기는 거 봐.”친지들이 웃으며 놀렸다.“신부는 조금만 마셔도 되지만 신랑은 원샷이지.”“유진 씨를 너무 곤란하게 하지 마세요.”여름이 애교스럽게 웃었다.“오후에 신혼여행지로 가는 비행기는 탈 수 있어야죠.”“어허, 유진아. 와이프가 벌써 이렇게 널 챙기는 거냐? 좀 더 마셔야겠는걸?”작은아버지는 물러서기는커녕 더 밀어붙였다.“그러네요.”양유진은 사랑스럽다는 듯 여름을 바라보았다.“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술은 좀 마시거든요.”“하지만….”“이렇게 날 아껴주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좋은걸요.”양유진은 마음에서 우러난 기쁨을 드러냈다.아이처럼 웃는 유진을 보며 여름은 찌릿하게 가슴 한구석이 아팠다. 앞으로 더 잘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이때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누군가 외쳤다.“누구야? 누가 헬기를 착륙시키잖아?”“어느 재벌 집 회장인가 보지.”다들 심드렁하게 불만을 늘어놓는 가운데 여름은 안색이 확 변했다. 최하준이 개인 헬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상혁이 이 시간이면 닿을 거라고 했던 말도 기억났다.자신의 결혼식 이야기가 이렇게 퍼져나갈 줄도 몰랐지만, 하준이 어떻게든 알아내고 이렇게 오다니 뜻밖이었다.양유진도 눈치를 챈 든 무의식적으로 여름의 손을 꽉 잡았다.“걱정하지 말아요. 밖에 내가 사람을 배치해 두었어요. 동성은 우리 바닥인데 설마하니 최하준이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남의 아내를 채 가지는 못할 거예요.”여름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다른 사람
“어머, 최하준이래. 너무 잘생겼네. 사진보다 실물이 나은데?”“양유진이 꽤 잘생긴 줄 알았는데 최하준이랑 비교하니 볼 거 없네.”“시끄러워, 이것아. 입 다물어.”“……”수군거리는 소리가 양유진의 귀에 들어오자 얼굴이 무거워졌다.조용히 여름의 앞으로 한걸음 나섰다. 하준은 하객 무리 속에서도 한눈에 여름을 알아보았다. 하얀 원피스가 너무나 눈부셨다. 눈처럼 흰 피부에 장미처럼 붉은 뺨을 보니 심장이 두근거렸다.‘내 여자야.’이때 양유진이 갑자기 여름의 손을 잡았다. 여름은 작은 짐승처럼 양유진의 몸 뒤로 숨었다.싸늘한 기운이 휘몰아쳤다.하준은 성큼성큼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일자로 다문 입술은 서릿발 같은 냉기가 흘렀다. 누가 봐도 결혼식을 축하하러 온 모양새는 아니었다.“결혼식을 축하하러 왔다면 환영하겠지만 망치러 왔다면 너무 늦었습니다. 여름 씨는 이미 내 아내예요.”양유진은 무거운 시선으로 하준을 마주했다.“남의 아내를 괴롭힐 생각은 마시죠.”“남의 아내?”하준이 낮은 소리로 큭큭 웃었다. 어쩐지 사뭇 슬프게 들렸다.‘한때는 내 아내였던 사람이야.내 손으로 압박해서 그녀가 이혼 서류에 사인하게 만들었지.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다시 돌아가서 나를 아주 세게 후려갈기고 싶다. 백지안을 싸고도느라 네가 어떤 여자를 잃게 되는지 잘 보라고.그래서 얼마나 큰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는지 말해주고 싶다.’“결혼식은 결혼식일 뿐이지. 아직 혼인 신고도 안 해잖아?”하준이 싸늘하게 웃었다.양유진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하준을 똑바로 쳐다봤다.“이미 했습니다. 혼인 신고는 어제 마쳤어요. 최 회장, 난 당신과 달라요. 아내를 맞을 때는 서류상 절차도 진행하지만 합당한 예식으로 맞습니다.”하준의 눈에서 마지막 남은 희망이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목으로 뭐가 뜨거운 것이 울컥하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제대로 서 있기 힘들었다.며칠 만에 여름이 다른 남자와 혼인 신고를 하고 식까지 모두 마쳤다는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