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피로연장의 사람이 모두 하준을 쳐다봤다.이 나라 최고의 재벌이 가장 아끼는 것을 잃은 어린아이처럼 낭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잠시 후 하준은 곧 낮은 소리로 웃었다. 너무나 음산해서 듣는 사람은 등줄기가 서늘해질 지경이었다.“양유진, 내가 누군지 아직 모르는 것 같군. 강여름은 내 여자야. 죽을 때까지 내 여자라고. 혼인신고를 했어도 상관없어. 그까짓 종이 쪼가리 따위가 뭐라고.”하준은 싸늘하게 한 걸음씩 다가섰다. 얼굴에는 광기가 가득했다.양유진과 여름은 너무나 깜짝 놀랐다. 아무래도 최하준의 광기를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 싶었다.“적당히 해야지.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잖아?”결국 여름은 소리쳤다. 벌써 몇 번째 하는 소리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괜찮아. 내가 당신을 사랑하니까.”하준은 다가와 여름의 손을 잡았다. 양유진은 즉시 하준과 싸우기 시작했다.그러나 곧 양유진은 밀리기 시작했다.“삼촌, 도와드릴게요.”한선우가 바로 튀어나왔다. 양유진 집안 남자들이 나와 둘러싸고 도왔다.그러나 광기 어린 하준을 상대하기에는 무리였다. 순식간에 십수 명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다들 들어와!”가슴을 부여잡고 힘겹게 몸을 일으킨 양유진이 밖에다 외쳤다.그러나 아무리 불러도 반응이 없더니 곧 덩치가 우락부락한 낯선 사람들만 우르르 들어오더니 하준에게 공손하게 보고했다.“밖은 정리되었습니다.”“수고했어.”하준이 끄덕였다. 여름의 눈에 하준이 악마처럼 보였다.결국 서경주가 버럭했다.“그만하게. 그래, 자네 가 힘으로 여름이를 끌고 갈 수야 있겠지. 하지만 남이 유부녀를 강탈하는 문제로 인해서 자네 집안과 FTT에 먹칠을 하게 될 거란 생각은 안 하나? 지금 여긴 기자도 잔뜩 있으니 자네의 이런 행실이 알려지게 되면 자네도 자네 집안도 온통 손가락질을 받게 될 거야.”“그래요, 형님. 진정하세요.”최양하도 다급하게 일어서 말렸다.“이 모습을 어르신들이 아시면 쓰러지세요.”“오늘은 아무도 날
“그래. 신고는 안 된다.”양유진의 아버지도 씩씩거렸다.“걔는 포기해라. 돌아오거든 이혼이나 해.”“제 일이에요. 신경 끄세요.”양유진은 무표정하게 자리를 벗어났다.여울과 하늘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는 곧 어쩔 줄 모르고 최양하를 바라보았다.“삼촌, 이제 어떡해요? 아빠가 엄마를 잡아가 버렸어.”여울이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방금 본 아빠의 모습은 너무나 무서웠다.하늘은 초조해졌다.“삼촌, 아빠가 엄마를 어떻게 하지는 않겠죠?”“걱정하지 마라. 아빠는 그냥 엄마가 유진이 아저씨랑 있는 게 마음에 안 든 거뿐이야.”최양하도 입으로는 아이들을 위로했지만 속으로는 떨고 있었다.최하준은 정상이 아니었다. 언제 정신 질환이 발작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전에도 발작했을 때 강여름을 다치게 한 적이 있지 않았던가. 부디 이번에는 발작이 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이거 보통 일이 아니야. 빨리 돌아가서 어르신들께 말씀드려야겠다.”최양하가 한숨을 쉬었다. 이번에 최하준이 벌인 일로 집안의 명예는 철저히 땅에 떨어질 것이고 엄청난 사회적인 지탄을 받을 게 뻔했다.----룸에서 양유진은 급히 저쪽으로 전화를 걸었다.“사람 좀 붙여주십시오. 최하준을 죽여야겠습니다.”“지금은 안 됩니다.”그 사람이 조용히 말했다.“진정하세요. 큰일을 하려면 인내할 줄 알아야지요. 이미 몇 년을 참았는데 조금만 더 참아요.”“하지만 제 아내를 데려갔단 말입니다.”양유진이 흥분했다.“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요.”“사람을 우르르 데리고 나타나면 강여름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생각해 봤습니까? 강여름도, 최하준도 바로 당신을 의심할 텐데.”그 사람이 냉랭하게 말을 이었다. “육민관 사건의 배후에 당신이 있다는 걸 강여름이 알게 되면 얼마나 부들부들 떨겠습니까?”양유진은 갑자기 등줄기가 서늘했다.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저 휴대 전화를 쥔 손에 힘줄이 시퍼렇게 올라올 뿐이었다. 저쪽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게다가 강여름이 최하
“……”상혁은 머리가 굳어버린 것 같았다. 하준이 벌인 미친 짓은 이미 전국에 다 알려졌다.온라인은 온통 하준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장악했다.FTT 공식 홈페이지는 아미 다운되어버렸다.‘일이 이 지경인데 결혼식을 하시겠다고?지금 결혼하시려는 그 분은 이미 다른 사람이랑 결혼한 분이거든요.회장님 병이 도진 건 아닐까?’그러나 대놓고 하준에게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저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5시간 뒤.헬기는 하준의 개인 섬에 도착했다. 섬 정중앙에는 큰 별장이 있었다.하준은 여름을 조심스럽게 침실의 큰 침대에 뉘였다.전면 창밖으로는 파다가 넘실거리는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섬은 매우 조용해서 하준도 좀 차분해졌다. 심지어 가만히 여름을 들여다 보고 있자니 사랑하는 아내를 보는 것 같았다. 이곳에서는 아무도 이 둘 사이를 방해할 수 없었다.뉘엿뉘엿 넘어가는 해가 여름의 새하얀 원피스를 물들이는 게 눈에 들어오자 하준은 기분이 과히 좋지 않았다.“가서 웨딩드레스 가져오지.”곧 눈부신 흰색의 드레스가 전달되었다. 하준은 직접 여름의 옷을 갈아입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름은 아픈 목을 잡고 일어나 앉았다.낯선 공간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당황한 듯했다.자세히 보니 자신이 본 적이 없던 웨딩드레스까지 입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드레스 자락에 작은 진주가 가득 비딩된 머메이드 드레스였다.‘그런데. 여기가 어디야?내가 왜 이런 데 있지?’여름은 양유진과 결혼식을 하던 중에 최하준이 처들어온 뒤에 기절한 것만 기억이 났다. 안색이 확 변했다. 창밖을 보니 이미 어둠이 깔려있었다.이때 하준이 쟁반을 받쳐 들고 들어왔다. 흰 셔츠와 조끼까지 슈트를 차려입고 있었다. 머리는 뒤로 넘겨 미모를 시원하게 드러냈다.“깼어? 디저트 좀 먹을래?”하준이 다정하게 쟁반을 침대 옆 테이블에 놓았다.“이 미치광이가? 대체 날 어디로 끌고 온 거야?”여름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하준은 신경도 쓰지 않고 무작정 밖으
어쩐 일인지 이런 하준을 보고 있자니 여름은 소름이 돋았다.그렇게 폭력적으로 쳐들어와 사람을 납치하더니 이 다정함은 대체 뭐란 말인가?‘이중인격이야?’잠시 망설이다가 조금 있다가 틈을 봐서 도망쳐야지 싶은 생각이 들어서 일단 슬리퍼를 신기로 했다.하준이 여름을 놓자마자 여름은 미친 듯이 밖으로 내달았다.완전히 낯선 곳이었다. 성처럼 큰 곳이었다. 벽은 온통 꽃과 리본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마치 곧 결혼식이라도 열리는 예식장처럼 사랑스러운 분위기였다. 뛰쳐나가면서 보니 흑인, 백인이 섞인 고용인은 모두 싱글벙글 웃으며 인사를 보냈다.“안녕하세요~”여름은 등에 솜털이 쭈뼛했다. 걸음은 더욱 빨라졌다.정원으로 뛰어 나가자 한없이 펼쳐진 장원이 보였다.한참을 뛰었다. 숲까지 뛰어 들었지만 그 끝에 있는 것은 망망대해였다.여름은 멍해졌다.‘여기가 어디야? 우리나라가 아닌가?’여름은 휴대 전화를 안 가지고 있었다. 뒤에서 걸음소리가 들렸다. 후다닥 뒤를 돌아보았다. 하준이 모래를 밟으며 다가왔다. 검은 눈동자는 그 뒤로 깔린 밤처럼 깊었다.여름은 미칠 지경이었다.“이 미친…. 대체 날 어디로 끌고 온 거야? 난 이미 유진 씨랑 결혼했다니까? 남의 부인을 끌고 오다니, 이건 엄연히 범죄라고.”“양유진이 경찰에 신고를 해야 범죄가 되지. 양유진은 신고 못 해. 그러면 범죄는 성립되지 않거든.”하준은 주머니에 손을 꽂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여유롭게 웃었다.여름은 움찔했다.‘내가 납치가 됐는데 유진 씨가 경찰에 신고를 안 했다고?’“유진 씨를 협박했지?”여름이 고개를 쳐들고 분노에 찬 눈으로 하준을 노려보았다.“내 협박을 받아들였다면 당신이 그 녀석에게 그렇게 소중하지 않다는 말이지.”하준은 고개를 숙이고 여름을 들여다보았다. 숱 많은 여름의 머리카락이 바닷바람에 흩날렸다.하준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넘겨주려고 했다. 그러나 손이 닿기도 전에 탁하고 채였다.여름이 하준을 노려보았다.“회사를 가지고 협박했겠지. 입장
하준의 눈에 절망이 떠올랐다.여름은 벌써 여러 번이나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준도 이제 정말 여름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았다.여름이 철저히 자신에게 마음을 닫도록 만든 건 자신이었다.“전에는 당신이 날 사랑해 주었지만 이제부터는 내가 당신을 사랑할게. 당신은 날 괴롭혀. 그러면 공평하지?”하준의 여름의 팔을 잡아당겨 세게 품에 안았다.“뭐 하는 거야? 놔. 내가 당신을 괴롭히는 게 아니라 여전이 당신이 날 괴롭히고 있잖아?”분노해서 소리치고 주먹까지 휘둘렀다.여름은 윤민관에게 호신술을 배웠지만 도저히 하준을 해 넘길 수는 없었다.하준은 여름을 억지로 별장에 끌고 갔다. 집사가 다가왔다.“예배당 쪽에 준비를 해두었습니다.”불길한 예감이 몰려왔다. 예배당까지 끌려갔을 때 예식장처럼 꾸며진 것을 보고는 완전히 당황했다.“뭐 하려는 거야? 난 아까 이미 유진 씨랑 결혼했다고.”“잊어버려. 오늘은 당신이랑 나랑 결혼하는 거야.”하준이 억지로 여름을 주례 앞에 세웠다.“이제 시작해 주시죠.”“네.”주례가 빙긋이 웃으며 하준을 쳐다보았다.“최하준 군은 강여름 양을 합법적 아내로 맞아 앞으로 늘 그녀를 사랑하며 존중하고 위로하고 아껴주며 죽을 때까지 마음이 변치 않을 것을 맹세합니까?”하준이 빙그레 웃었다.“네, 맹세합니다.”주례가 여름을 바라보았다.“강여름 양, 최하준 군을 합법적인 남편으로 맞아 앞으로 늘 그를 사랑하며 존중하고 위로하고 아껴주며 죽을 때까지 마음이 변치 않을 것을 맹세합니까?”“아니….”“당연히 강여름도 맹세합니다.”하준은 말을 가로채며 여름의 입을 막았다.여름은 하준을 걷어찼지만 하준은 전혀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여름의 손을 들더니 다이아몬드 반지를 뽑아서 던져 버리고는 주머니에서 핑크색 반지를 꺼내 여름의 손에 끼웠다.주례가 빙긋이 웃었다.“이제 신랑은 신부에게 키스해도 좋습니다.”여름은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하준의 키스에 눌리고 말았다.마구 입술을
“자기야, 여긴 우리 방이야. 마음에 들어?”하준이 여름을 침대에 누이고 몸을 숙여 입을 맞추었다.“가까이 오지 마.”여름은 온몸으로 하준을 막아냈다. 눈물이 터져 나왔다.“당연히 가까이 가야지. 난 당신 남편인데. 오늘 밤은 우리 허니문이란 말이야.”하준의 몸이 눌러왔다. 무릎 하나는 침대에 댄 채 엄청남 남성의 힘으로 여름을 압박해 왔다.“당신은 내 남편이 아니야. 내 남편은 양유진이라고”결국 여름은 비명을 질렀다.“당신이 아무리 날 데리고 결혼식을 올리고 맹세를 하고 신혼집을 준비했어도 나랑 유진 씨가 결혼했다는 사실이 지워지지는 않아. 이미 혼인 신고를 했어. 법적으로 완벽한 부부야.”“조용!”하준이 갑자기 여름을 밀어 눕혔다. 오른손으로 여름의 입을 눌렀다. 깊은 눈에는 싸늘한 빛이 흘렀다.애써서 그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어째서 계속해서 그 사실을 말해서 가슴을 콕콕 찌르는 건지 알 수 없었다.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다 못해 터져 나갈 지경이었다. 하준은 지금 있는 힘껏 억누르는 중이었다. 병이 도질까 봐, 도져서 여름을 다치게 할까 봐 두려웠다.여름은 입을 벌릴 수 없게 되자 눈물 가득한 눈으로 절박하게 애원했다.오늘 밤을 하준과 보내게 된다면 평생 하준을 원망하게 될 터였다. 남편이 있는 상태에서 다른 남자와 밤을 보냈다는 오명을 쓰게 될 상황이다. 평생을 두고도 양유진에게 갚을 수 없는 마음의 빚을 지게 된다.“울지 마.”하준이 고개를 숙여 부드럽게 여름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마음이 아팠다. 이 밤이 양유진과 여름의 것이 아니라 자신과 여름의 것임을 기억해 주길 바랐다. “최하준, 정 이러겠다면 난 영원히 당신을 증오할 거야. 내 평생, 죽어서도 영원히 당신을 용서 못 해.”여름이 고통스럽게 한 자 한 자에 힘을 담아 말했다.“미워해도 좋아. 최소한 날 기억해 줄 거잖아. 평생, 죽어도 영원토록 날 기억해 줘.”하준은 넥타이를 풀어 여름의 두 손을 묶었다.당황해서 엉엉 소리 내어 우는 여름을 보니 너무
이때 갑자기 휴대 전화가 “띠링”하고 울렸다.낯선 번호에서 문자가 왔다.열어보니 쇼트 클립이 있었다.컴컴한 가운데 겨우 두 사람이 있다는 정도만 판별될 정도인데 여름의 신음 소리가 들렸다.갑자기 심장이 쫙 찢어지는 것 같았다.두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아도 명확했다.그저 믿고 싶지 않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분명 오늘 밤은 나와 여름 씨의 것이었는데. 내가 이 밤을, 이 밤이 오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라왔는데….처음 동성에서 여름을 보았을 때부터 그녀를 사랑했다.여름 씨가 청혼을 받아주었을 때 난 정말 뛸 듯이 기뻤지. 스몰 웨딩이라고는 하지만 걷는 길에 놓인 꽃 하나까지도 다 직접 신경 써서 고른 것이었어.그런데 이 밤을 내 사람이 최하준과 보내다니.’“최하준, 내가 언젠가는 널 죽도록 힘들게 만들어 주겠어.”눈앞에 보이는 테이블을 발로 걷어찼다. 얼굴은 분노로 한껏 일그러졌다.“강여름… 어떻게,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가 있어?”양유진의 눈에 살기가 가득 찼다.전에는 여름을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컸다.3년 전 여름은 원래 자신의 약혼녀였다. 그러나 여름은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하준에게로 갔다.3년이 지나 여름이 귀국했을 때 여름이 하준을 유혹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괴롭지만 꾹 참았다. 그때는 자신과 사귀겠다는 말이 없었으니 어쩔 수 없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자신의 아내가 신혼 첫날 밤에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긴 것이다.‘강여름, 아무리 최하준이 압박을 하더라도 죽을 각오로 맞설 수는 없었나?’양유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최하준이 증오스러웠다. 그러나 여름도 똑같이 증오했다.한참을 증오에 찬 눈을 이글거리던 양유진은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전 실장, 자나? 잠깐 내 방으로 좀 오지.”“대표님….”전수현은 깜짝 놀랐다. 한밤중에 갑자기 양유진이 왜 자신을 방으로 부르겠는가? 정상적인 업무가 아닐 것은 분명했다.예전에는 그렇게 온갖 방법으로 유혹을 해보려고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에서 오렌지빛 태양이 떠올랐다. 해가 이미 중천이었다.여름은 느릿느릿 피곤한 눈을 떴다.일어나 보니 침대에는 혼자였다. 꽃잎이 어지러웠다.바닷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와 커튼이 흔들렸다.멍하니 앉아 있었다. 자신이 양유진을 두고 바람을 피우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죽도록 반항을 해 보았지만 하준의 광기에 도저히 당할 방법이 없었다. 온몸이 쑤셨다.여름은 이불을 둘둘 말고 들어가 알처럼 동그랗게 자신의 몸을 감쌌다.이곳을 벗어난다 해도 어떻게 양유진의 마음을 마주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난 자격이 없어. 자격이 없어.’이때 방문이 열리더니 나이 지긋한 부인이 정갈하게 개어진 옷을 들고 들어왔다.“사모님, 일어나셨나요? 갈아입으실 옷 가져왔습니다. 목욕물을 받아드릴….”“나가!”여름은 미친 사람처럼 사이드 테이블에 놓여 있던 쟁반을 집어 던졌다. 창백한 얼굴로 머리를 싸맸다. 어깨 위로 어지럽게 머리가 흘러내렸다.부인이 놀라서 뒤로 물러서다가 누군가와 부딪혔다.돌아보더니 당황해서 얼른 한마디 했다.“어머, 회장님.”“나가 봐요. 옷은 주고.”하준이 옷을 받아 들고 침대 가로 다가왔다.하준이 다가오는 것을 보더니 여름은 증오에 찬 눈으로 손에 집히는 것을 마구 던졌다.“실컷 부쉈어?”하준은 내내 부드러운 눈빛이었다.“평생 이불 속에서 살 거야? 옷 안 입을래?”그 말을 듣고 보니 여름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젯밤 입었던 웨딩드레스는 다 찢어져서 그것 말고는 입을 옷도 없었다.“뭐, 그렇다면 알겠어.”하준이 눈을 찡긋하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실은 난 당신이 옷을 안 입고 있어도 좋아.”‘저 변태가….’여름은 화가 나서 얼굴이 빨개졌다.하준이 정말 나가려는 것을 보고 할 수 없이 소리쳤다.“잠깐, 옷은 주고 가야지.”“예이, 여보님.”하준은 돌아서더니 빙그레 웃으며 얼른 옷을 건넸다.“누가 당신 여보야? 난 유진 씨 부인이라고.”여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