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갑자기 휴대 전화가 “띠링”하고 울렸다.낯선 번호에서 문자가 왔다.열어보니 쇼트 클립이 있었다.컴컴한 가운데 겨우 두 사람이 있다는 정도만 판별될 정도인데 여름의 신음 소리가 들렸다.갑자기 심장이 쫙 찢어지는 것 같았다.두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아도 명확했다.그저 믿고 싶지 않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분명 오늘 밤은 나와 여름 씨의 것이었는데. 내가 이 밤을, 이 밤이 오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라왔는데….처음 동성에서 여름을 보았을 때부터 그녀를 사랑했다.여름 씨가 청혼을 받아주었을 때 난 정말 뛸 듯이 기뻤지. 스몰 웨딩이라고는 하지만 걷는 길에 놓인 꽃 하나까지도 다 직접 신경 써서 고른 것이었어.그런데 이 밤을 내 사람이 최하준과 보내다니.’“최하준, 내가 언젠가는 널 죽도록 힘들게 만들어 주겠어.”눈앞에 보이는 테이블을 발로 걷어찼다. 얼굴은 분노로 한껏 일그러졌다.“강여름… 어떻게,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가 있어?”양유진의 눈에 살기가 가득 찼다.전에는 여름을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컸다.3년 전 여름은 원래 자신의 약혼녀였다. 그러나 여름은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하준에게로 갔다.3년이 지나 여름이 귀국했을 때 여름이 하준을 유혹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괴롭지만 꾹 참았다. 그때는 자신과 사귀겠다는 말이 없었으니 어쩔 수 없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자신의 아내가 신혼 첫날 밤에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긴 것이다.‘강여름, 아무리 최하준이 압박을 하더라도 죽을 각오로 맞설 수는 없었나?’양유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최하준이 증오스러웠다. 그러나 여름도 똑같이 증오했다.한참을 증오에 찬 눈을 이글거리던 양유진은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전 실장, 자나? 잠깐 내 방으로 좀 오지.”“대표님….”전수현은 깜짝 놀랐다. 한밤중에 갑자기 양유진이 왜 자신을 방으로 부르겠는가? 정상적인 업무가 아닐 것은 분명했다.예전에는 그렇게 온갖 방법으로 유혹을 해보려고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에서 오렌지빛 태양이 떠올랐다. 해가 이미 중천이었다.여름은 느릿느릿 피곤한 눈을 떴다.일어나 보니 침대에는 혼자였다. 꽃잎이 어지러웠다.바닷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와 커튼이 흔들렸다.멍하니 앉아 있었다. 자신이 양유진을 두고 바람을 피우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죽도록 반항을 해 보았지만 하준의 광기에 도저히 당할 방법이 없었다. 온몸이 쑤셨다.여름은 이불을 둘둘 말고 들어가 알처럼 동그랗게 자신의 몸을 감쌌다.이곳을 벗어난다 해도 어떻게 양유진의 마음을 마주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난 자격이 없어. 자격이 없어.’이때 방문이 열리더니 나이 지긋한 부인이 정갈하게 개어진 옷을 들고 들어왔다.“사모님, 일어나셨나요? 갈아입으실 옷 가져왔습니다. 목욕물을 받아드릴….”“나가!”여름은 미친 사람처럼 사이드 테이블에 놓여 있던 쟁반을 집어 던졌다. 창백한 얼굴로 머리를 싸맸다. 어깨 위로 어지럽게 머리가 흘러내렸다.부인이 놀라서 뒤로 물러서다가 누군가와 부딪혔다.돌아보더니 당황해서 얼른 한마디 했다.“어머, 회장님.”“나가 봐요. 옷은 주고.”하준이 옷을 받아 들고 침대 가로 다가왔다.하준이 다가오는 것을 보더니 여름은 증오에 찬 눈으로 손에 집히는 것을 마구 던졌다.“실컷 부쉈어?”하준은 내내 부드러운 눈빛이었다.“평생 이불 속에서 살 거야? 옷 안 입을래?”그 말을 듣고 보니 여름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젯밤 입었던 웨딩드레스는 다 찢어져서 그것 말고는 입을 옷도 없었다.“뭐, 그렇다면 알겠어.”하준이 눈을 찡긋하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실은 난 당신이 옷을 안 입고 있어도 좋아.”‘저 변태가….’여름은 화가 나서 얼굴이 빨개졌다.하준이 정말 나가려는 것을 보고 할 수 없이 소리쳤다.“잠깐, 옷은 주고 가야지.”“예이, 여보님.”하준은 돌아서더니 빙그레 웃으며 얼른 옷을 건넸다.“누가 당신 여보야? 난 유진 씨 부인이라고.”여
“저… 저기, 날 다치게 하지 않겠다며? 또 약속을 어기는 거야?”여름이 다급히 말했다.“이거 봐. 당신은 내게 한 약속을 한 번도 지킨 적이 없어.”분노에 이글거리던 하준이 갑자기 멈칫했다. 뭔가가 정곡을 확 찌른 듯했다.여름이 비웃듯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난… 약속을 지키겠어.”잠시 후 똑바로 앉았다. 마음은 고통스럽고 분노가 가득했다.“하지만 자기야, 날 너무 자극하지는 말아줘. 나에게는 당신뿐이야. 지안이랑 사귄 적이 있어도 난 평생 당신 말도 다른 사람에게 손대 본 적은 없어.”여름은 흠칫했지만 곧 비난했다.“내가 바보인 줄 알아? 당신이 백지안이랑 사귄 세월이 십수 년인데, 요 3년은 손대지 않았을지 몰라도 그 오랜 세월을 사귀면서 아무 일이 없었다니 믿을 수 없어.”“그때는 우리 둘 다 어렸잖아. 나중에는 내가 회사를 맡게 되면서 너무나 바빠서 그런 일은 신경 쓸 겨를도 없었어. 그러다가 지안이가 외국으로 나가 실종되었고. 난 평생 당신 하나뿐이었어.”말하다 보니 자기 스스로도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게다가 말하지는 않았지만 지안을 대할 때면 여름의 대할 때처럼 충동적이고 격정적인 마음이 들지 않았다.전에는 잘 몰랐는데 이제 점점 명확해졌다.내내 그렇게 죽도록 백지안을 지키려고 했던 것은 어쩌면 사랑이 아니었다. 예전에는 백지안이 어둠의 터널을 지나던 때의 유일한 빛이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그래서 백지안은 언제나 착하고 아름답다고 굳게 믿었다. 사람이 변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여름을 만나고 나서 하준은 무엇이 사랑인지를 느꼈다. 여름과 함께 있을 때는 편안하고 달콤하고 즐거웠다.안 보면 너무나 보고 싶고 여름이 해준 밥을 먹을 때면 온 세상이 아름답게 보였었다.여름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던 무조건 다 좋았다.“옷은 여기 둘게. 입으면 내려와. 아침 해줄게.”그러더니 하준은 돌아서서 나갔다.한동안 침대에 멍하니 앉아있던 여름은 느릿느릿 기어 나와 샤워를 하러 갔다.뜨거운 물줄기
“웃기시네. 당신 그 알량한 음식 솜씨로 이걸 다 만들었다고?”여름이 콧방귀를 뀌었다.“정말 내가 한 거야. 내가 며칠을 배운 건지 알아? 앞으로는 내가 당신한테 맛있는 거 많이 만들어 줄게. 이거 봐. 요리 배우느라고 내 손이….”하준이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매끈하던 손가락 곳곳에 칼에 베인 상처가 보였다.“아포.”기다란 눈썹이 깜빡거리는 그 잘생긴 얼굴에 넘어가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그러나 여름은 마음이 약해지지 않았다.“다 큰 어른이 ‘아포’가 다 뭐야? 부끄럽지도 않아? 유진 씨는 안 그런다고.”“……”하준의 마음이 ‘유진’ 두 글자 앞에서 산산이 부서졌다.여름은 굳어진 하준의 얼굴은 나 몰라라 하고 그냥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하준은 미워도 배는 고팠다. 밥을 굶으면 앞으로 버틸 힘도 없다.“맛있지?”하준은 지치지 않고 기대에 차서 물었다.여름은 담담히 하준을 한번 흘겨봤다.“별로. 우리 유진 씨가 해준 것처럼 맛있지 않네.”“……”하준이 험한 얼굴로 경고했다.“당신 입에서 다시는 양유진 이름 나오는 거 듣고 싶지 않은데.”“내가 말하면 어쩔 건데?”여름이 냉랭하게 말을 이었다.“뭐? 또 날 해치시게? 그거 봐. 당신의 약속 따위 믿을 수 없다니까.”하준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 이제 여름인 자신의 약점을 꽉 틀어쥐고 있었다. “다시는 당신을 다치게 하지 않아.”하준의 시선이 여름의 촉촉한 입술에 떨어졌다.“하지만 계속 양유진을 찾아대면 당신 입을 막아버리는 수밖에 없지.”그러더니 여름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하준이 훅 들어와 입맞춤으로 여름의 입을 막아버렸다.막 우유를 먹던 참이라 입에서 고소한 우유 맛이 났다.처음에는 그저 입을 막을 생각뿐이었는데 도저히 욕망을 조절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여름은 힘껏 하준을 밀쳐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여름은 화가 나서 하준의 등에 손톱을 박아넣었다.움찔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뒤이어 더 강렬한 키스가 내리눌렀다.질식하고 나서야 끝날 것 같았다.“
구급상자를 들고 오던 집사가 깜짝 놀랐다.“상처가 너무 깊은데요. 의사에게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됐어요. 드레싱이나 해줘. 소독하고 약 좀 바르면 되지.”하준이 나지막이 말했다.드레싱이 끝나고 내려가 보니 여름이 안 보였다. 일하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서재로 갔다고 한다.서재로 들어가 보니 여름은 컴퓨터를 만지고 있었다.그러나 하준의 걸음 소리를 듣고는 놀라서 하준을 노려보았다.“그럴 것 없어. 전원을 다 뽑아 놨거든.”하준이 평온하게 걸어왔다.“그리고 일하는 사람들에게 휴대 전화를 빌려도 소용없어. 말도 안 통하고 국제 전화는 걸 수도 없거든.”“대체 여기가 어디야?”여름은 절망에 빠졌다.“최하준. 어디 할 수 있으면 평생 가둬놔 봐. 그 많은 눈이 보는 데서 끌고 왔으니 납치라고. 우리 아버지가 경찰에 신고도 안 하고 가만 계실 것 같아?”“아버님께는 연락드렸어. 당신이 안위가 걱정된다면 경찰에 신고하지 않는 게 좋다고 말씀드렸지.”하준이 다정하게 여름의 뺨을 만졌다. 누가 보면 연인인 줄 알 지경이었다.“난 정신 질환이 있으니까 다급해 지면 어떤 미친 짓이라도 다 하게 될 거라고.”그렇게 다정하게 자기 아버지를 협박했다는 말을 하는 하준을 보고 여름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준의 손을 탁 쳐냈다.하준은 그저 웃었다.“물론 계속 당신을 돌려보내지 않으면 아버님도 무슨 일이든 벌이시겠지. 그래서… 한 달 뒤에는 돌려보내겠다고 했어. 난 그냥 우리 둘만 보낼 시간이 좀 필요했을 뿐이야. 당신이 다시 날 사랑하게 만들 시간.”“사람 납치하는 인간을 사랑할 생각은 없어.”여름이 소리 질렀다.“여기만 벗어나면 널 끝장내 버릴 거야.”“정말?”하준이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올렸다.처음에는 왜 하준이 웃는지 몰랐는데 잠시 생각해 보고 여름은 몸을 떨었다.왜 한 달을 억류하겠는가? 한 달 동안 관계를 가지면 분명 아이를 가지게 될 것이다.“정말 비열한 인간이네. 난 죽어도 당신 아이를 가질 생각은 없어.”여름이 비명을
입구쯤 걸어갔는데 집사가 약과 물을 가지고 왔다.“먹어.”하준이 여름에게 약을 건넸다.“이게 뭔데?”여름은 떨렸다. 아무 약이나 함부로 먹을 수는 없었다.“사후 피임약”하준이 무거운 얼굴로 설명했다.“그저께까지는 양유진이랑 같이 있었으니까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 수도 있고 만일을 위해서 양유진의 아이가 생기는 건 막아야지.”어이가 없었다. 사실 여름은 아직 양유진과 관계를 가진 적도 없었다. 이 약을 먹어 봐야 어젯밤 임신됐을 가능성을 없애줄 뿐이었다.여름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약을 삼켰다.약을 먹고 나서는 속으로 중얼거렸다.‘요 며칠이 완전히 가임기란 말이야. 무슨 수를 쓰던 임신은 피해야 해.’----밤이 되자 여름은 샤워를 하고 나서 여름은 날카로운 물건으로 허벅지 뒤를 찔러 피를 냈다. 그리고는 피를 속옷에 묻혔다.준비가 끝나가 엶은 하준에게 말했다.“여기 생리대 있어? 생리가 시작됐는데.”“지금?”하준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임신을 피하려고 핑계 대는 거잖아.”못 믿겠으면 와서 직접 보면 될 거 아냐?”여름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침대로 밀쳐졌다.하준은 속옷까지 벗겨 기어코 붉은 피를 보았다.미간이 확 찌푸려지더니 곧 표정이 돌아왔다.어차피 한 달을 잡아 두기로 했으니 한번은 겪을 일이었다. 늦으나 빠르나 똑같았다.“바로 준비시킬게.”바로 사람을 시켜 생리대를 가져오도록 했다.여름이 화장실에 들어갔다 오자 하준은 바로 여름을 안아 침대로 갔다.온밤 내 여름은 하준의 품에 안겨있었다.다음 날 하준은 입맞춤으로 여름을 깨웠다. 매일이 똑같았다.여름은 내내 조심스러웠다. 쓰레기 치우는 사람에게 발각이 될까 싶어 매일 피를 내서 생리대에 묻혀서 버렸다.----7일째.하준은 비키니를 가지고 왔다.“자기야, 이제 끝났어? 오늘은 같이 수영하러 가자.”예쁘고 섹시한 핑크색 비키니였다.그러나 그걸 입으면 하준이 허벅지의 상처를 발견하게 될 게 뻔했다. 오늘 밤은
그 말을 듣고 하준은 헤벌쭉 웃었다.일주일 내내 하준이 아무리 애를 써도 냉담하던 여름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산책을 가려고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니 이제 슬슬 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건가 싶었다.“다녀와.”그렇게 말하고 생각해 보니 여름을 위해 치마를 좀 더 준비할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바로 상혁엥게 전화를 걸었다.“치마 좀 사서 보내줘. 비치 원피스로. 내 와이프 사이즈 맞춰서.”상혁의 입이 씰룩거렸다.‘내 와이프래.그게 다 무슨 말씀이세요.양유진의 아내를 데리고….’“시간 괜찮으시면 잠깐 회사 좀 다녀가시죠.”상혁이 부득이하다는 듯 말했다.“요즘 여론이 너무 안 좋습니다. 어르신들은 지금 싸고 누우셨고요. 식구들이랑 이사님들이 매일 절 찾아오세요. 주가는 지금 폭락했다고요.”“주가는 원래 오르락내리락하는 거야.”하준은 가볍게 답했다.“주혁이한테 연예계 뉴스로 내 스캔들은 좀 덮어달라고 해. 그러면 내 쪽 일은 자연스럽게 덮일 거야.”상혁은 황당해서 말문이 막혔다.‘이주혁 선생님은 얼마나 곤란하겠어요? 회장님의 스캔들을 덮을 만한 사건은 아무것도 없다고요.’“어르신들이 나에 관해 물어보시거든 지금 가문을 위해서 손주 만들고 있다고 말씀드려. 그러면 좀 조용해지실 거야. 돈은 먹고살 만큼만 있으면 되는 거니까 이사 시끄러운 건 그냥 내버려 둬. FTT는 내 거니까 마음에 안 들면 다 나가라고 해.”그러더니 전화를 끊었다.고개를 들어보니 여름이 물방울무늬 스커트를 입고 내려왔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얼굴인데도 눈처럼 흰 피부가 요정처럼 빛났다.하준은 다가가 여름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고는 잠긴 소리로 귀에 속삭였다.“너무 귀여운데.”여름은 하준의 몸에서 바로 변화를 느꼈다.‘이렇게 바로 빳빳해지다니 짐승이야? 그냥 치마로 갈아입은 것만으로 이럴 일이냐고?’“왜 당신 피부는 타지도 않아?”하준은 여름의 어깨를 만졌다. 며칠 동안 밖에 자주 나간 건 아니지만 해변의 햇살은 따가워 하준은 상당히 그을렸는데도 여름은
하준은 아무 말 없이 여름을 안고 별장으로 서둘러 돌아갔다.집사가 곧 의사를 데리고 왔다. 상처가 깊어서 소염 주사를 놓아야 했다.여름은 꾹 참았다. 하준만 눈치채지 못한다면 그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하준은 너무 마음 아파하며 자책했다.“앞으로는 해변에 산책 갈 때 절대 당신만 놓고 자리 비우지 않을게. 또 무슨 일이 벌어지면 어떡해?”여름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매일이 감옥 같은 생활인데 하준이 곁을 떠나지 않고 지키나 안 지키나 다 똑같았다.----밤이 되자 여름은 발코니 소파에서 멍하니 있었다.답답했다. 휴대 전화도 없고, TV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쇼핑할 데도 없고, 아는 사람도 하나 없으니 매일이 그저 책을 읽거나 이러고 멍때리거나 둘 중 하나였다.“심심하지?”하준이 샤워를 하고 나오다가 여름이 멍하니 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심심하면 한 번 할까?”그러더니 여름을 안아 침대에 눕히고는 잠옷을 벗겼다.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고 여름은 거부감이 들었다.“다리 다쳐서 아파. 그냥 가만 좀 두면 안 돼?”잠깐 죄책감이 스치는 듯하더니 그래도 기어코 말했다.“의사한테 물어봤는데 생리 후에 며칠은 임신이 잘 된대.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잖아. 걱정하지 마. 자기 상처는 내가 하나도 안 건드릴게.”그러더니 하준은 바로 격렬하면서도 부드럽게 여름에게 키스했다.다치기 전에도 힘으로 이길 수가 없었는데 지금은 아프기까지 하지 어쩔 도리가 없었다.하준은 굳은 결심을 했으니 절대 물러서지는 않을 것이다. 최고의 가임기는 지났지만 아직까지 안심할 수 있는 날짜는 아니었다.하준의 아이를 가질 것을 생각하니 공포였다.“쭌, 제발, 나한테 이러지 좀 마.”여름이 애걸하듯 하준의 어깨를 잡았다.하준의 몸이 굳었다. 여름이 언젠가 자신을 그렇게 불렀던 것이 기억났다. 그런데 여름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니 어쩐지 너무 익숙했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하준을 그렇게 불렀다.“미안해. 정말.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