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하준은 아무 말이 없었다.‘뭐,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강여름이 하는 음식이랑 여울이 엄마 솜씨가 비슷한가 보지?’“알겠어. 애들 아무 때나 배고픈 것도 지극히 정상이지. 가서… 수플레를 해줄게.”여름은 작은 머리를 쓰다듬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여울은 먹이를 기다리는 아기 고양이처럼 종종 걸음으로 여름을 따라 주방으로 들어갔다.하준은 수플레를 먹어본 적이 없었다. 다만 전에 백지안에게 디저트라고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았다.“밤에 애한테 달달한 거 먹여도 되나?”하준이 인상을 쓰며 지적했다. 아까 휴대 전화를 들려주었다고 지적을 당한 참에 자기도 지적할 거리가 생기자 얼씨구나 싶었던 것이다.여름은 신경도 쓰지 않고 냉장고에서 계란을 꺼내 흰자와 노른자를 분리했다.노른자와 선명히 대비되는 하얀 팔을 보고 있자니 당장 잡아보고 싶었다.하준이 넋을 잃고 보는데 여울이 대답했다.“여름이 이모가 하는 수플레는 단 거 아닌데.”“여울이 네가 어떻게 알아?”하준이 의아해서 물었다.여름은 고개도 들지 않고 답했다.“전에 양하 씨가 종종 애를 봐달라고 했거든. 엄마가 떠나고 나서.”하준은 그제야 납득했다. 그러나 여름과 최양하가 가까운 사이라는 사실을 알면 알수록 불만이 커졌다.여름은 곧 수플레를 만들어 냈다.흰자를 크림처럼 단단하게 거품 내서 위에 건포도와 견과류를 뿌렸기 때문에 영양도 있을 것 같고 밖에서 파는 계란빵 같은 것보다 훨씬 몸에 좋을 것 같았다. 아이들이 먹기에도 좋아 보였다.수플레 굽는 냄새가 퍼지자 하준은 자기도 먹고 싶었다.다 구워지자 여울은 테이블에서 냠냠 맛있게 수플레를 먹었다.하준은 영 여울이 부러웠다.여름에게 해달라면 뭐든 척척 해주는 여울이 너무 부러웠다.하준은 어슬렁어슬렁 주방으로 들어갔다. 낮에는 그렇게 요정처럼 또렷한 인상이더니 어스름한 불빛 아래서 보니 한결 더 부드러운 어머니 같은 모습이었다.“애를 아주 잘 아는 것 같군.”별안간 하준이 입을 열었다.“애를 안 키워본 사람은 애를 대하면 어쩔
다시 여름에게 팩폭을 당하자 하준은 어질어질했다.‘답답해, 젠장 너무 답답하다고.’그러거나 말거나 여름은 하준을 주도 나가버렸다. 여울은 이미 그릇을 깨끗하게 비우고 트림을 하고 있었다.“잘 먹었다. 이제 졸려. 잘래요.”“아유, 귀엽기도. 그런데 자기 전에 치카해야지.”그러더니 여름은 가방에서 새 어린이 치약과 치솔을 꺼냈다.하준은 깜짝 놀랐다.“왜 가방에서 그런 게 나와?”“아까 편의점에서 사왔지. 늦은 시간에 애를 데려오니 우리 집에 재울 것 같아서.”여름은 여울을 데리고 욕실로 갔다.“저기, 내 치솔은?”하준이 물었다.“여울이만 여기 놓고 갈 수는 없으니까 나도 여기서 잘 거야.”“미안하지만 우리 집에 남자는 안 재울 거야. 특히나 백 씨 남매에게 우리 집을 또 내주고 싶지는 않거든.”여름은 떨떠름하게 말했다.“지안이는… 내가 여기 있는 거 몰라.”하준이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난 손님방에서 잘게. 어쨌든 여울이만 놓고는 안 갈 거야.”“이모, 우리 큰아빠도 재워줘요.”여울이 부탁했다.“나도 큰아빠랑 있고 싶어.”여름이 여울에게 눈을 부라렸다. 여울은 얼른 메롱을 해 보였다.“정 그러면 소파에서 자던가. 손님방은 윤서에게 내주었는데 오늘 동성에 가서 잔다고 했거든. 그런데 침대에 물건이 많아서 별로 거기서 자고 싶지 않을 걸.”여름은 그러더니 여울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아버렸다.하준은 손님방으로 가서 슬쩍 열어보았다. 방안은 온통 난장판이었다.‘겉보기는 말쑥한 사람이 어째 잠자는 침대는 저 난리야? 돼지우리가 따로 없구먼.’결국 하준은 소파에서 자는 쪽을 택했다.곧 여름이라지만 밤은 아직 추웠다.깜짝 잠들었다가 너무 추워서 깨가지고 안방으로 가 문을 두드렸다.그런데 문을 열고 나온 것은 여울이었다. 잠이 덜 깬 눈을 비볐다.“왜 그래요, 큰 아빠?”“이모는? 이불 좀 하나 내달라고 말해줄래?하준은 안을 들여다 보았다. 여름은 모습이 보이지 않고 샤워 소리만 들려왔다.“이모는 목욕하는
여름이 의아해서 물었다.“방금 아빠 왔다 갔니?”“응. 아빠가 춥대. 그래서 들어와서 담요 가져가라고 했어.여울은 그러더니 다시 곤히 잠들었다.“……”여름은 담요가 놓여있던 의자에서 문까지 거리를 계산해 보았다. 완전히 욕실이 보이는 루트였다. 게다가 자신은 샤워실 문을 활짝 열고 있지 않았던가.그 장면을 생각하니 너무 수치스러웠다.여울의 귀를 죽 잡아 당겼다.“아빠가 춥던지 말던지 무슨 상관이야? 왜 들여 보냈어? 엄마 샤워하는 거 몰랐어?”“샤워가 왜?”여울이 잠에 덜 깨 게슴츠레한 눈을 끔뻑였다.여름은 울고싶은 심정을 누르고 설명해주었다.“엄마가 늘 그랬잖아, 모르는 사람한테 깨벗은 거 보여주는 거 아니라고. 그러니까 엄마가 샤워하는 것도 보여주면 안 되는 거지, 알겠니?”“아, 그러니까 방금 아빠가 엄마 샤워하는 거 본 거야?”“…….”여름의 얼굴이 빨개졌다. 여울이 제대로 이해를 한 건지 못한 건지 알 수 없었다.“엄마, 얼굴이 엄청 빨개요.”여울이 걱정스러운 투로 말했다.“에휴, 관두자.”더 이상 얘기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엄마, 근데 아빠가 보면 어떻게 되는데?”여울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그럼 아빠 나쁜 사람이야? 경찰 아저씨가 잡아가야 돼?”“그냥… 그냥 안 좋아, 아주아주 안 좋은 거야.”여름은 난처해서 화제를 돌렸다. “참, 그건 그렇고, 오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솔직히 얘기해봐.”“그러니까… 내가 그 나쁜 이모한테 씻겨달라고 했는데… 일부러 좀 귀찮게 했더니 나 밀어 넘어뜨렸어.”여울이 살짝 신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아빠가 얼마나 화나서 나쁜 이모 막 혼내줬는지 모르죠? 그랬더니 그 이모 얼굴이 막….”이야기를 듣던 여름의 얼굴이 굳어졌다.“엄마, 왜 그래?”“왜 그러냐고?!”여름이 여울을 들어올려 엉덩이를 팡팡 때렸다.“네가 그 이모를 혼내주지 않아도 돼. 어린 애가정말….”“엄마….”여울이 울음을 터뜨렸다.여름은 붉어진 눈으로 여울을 노려보았다.
하준은 원래 거의 잔병치레가 없는 편이었는데 이번에는 완전히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다음 날 아침 7시.여울은 아직 잠들어 있었지만 여름은 일찍 일어나 아이들 밥 먹이는 게 습관이 되어 있는 지라 이미 일어나 아침 준비를 시작했다.‘오랜만에 같이 잤는데 아침은 맛있게 먹여야지.’거실을 지날 때 여름은 최대한 소파에 누워있는 형체를 무시하고 지나갔다.“쿨럭쿨럭!”하준이 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은 못 들은 척 하고 냉장고에 가서 호박을 꺼냈다.“나 감기 걸렸어.”하준이 주방 문 앞에서 다 죽어가는 소리를 했다.여름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쳐다도 보지 않았다. 어젯밤 그 민망한 일을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발길질이 나갈 판이었으니 이만하면 잘 참고 있는 셈이었다.“나 감기 걸렸다니까.”하준이 여름에게 다가오더니 가만가만하게 말했다.“당신 감기 걸린 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여름이 획 돌아서며 눈을 쌩그랗게 뜨고 하준을 노려봤다. 얼굴은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그 발그레한 볼을 보고 있자니 하준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진심이 튀어나오고 말았다.“어젯밤에 당신 목욕하는 걸 봐서 그러잖아. 그걸 보고 나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찬물로 샤워를 했다고. 그랬더니 감기 걸렸어.”성인이라면 그 상황에서 찬물로 샤워를 했다는 게 무슨 뜻인지 다 알았다. 그러나 부끄러워하고 앉아 있을 계재가 아니었다.“얼굴도 두꺼워! 누가 밤에 남의 방에 그렇게 멋대로 들어오래?”“이불도 줬으면서…. 추웠다니까. 게다가 누가 그렇게 문을 다 열어놓고 샤워를 하냐?”“애가 밖에 혼자 있는데 어떻게 문을 닫냐?”“……”하준은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한껏 깊어진 눈으로 가만히 여름을 들여다 봤다.함께 지내봤더니 여름이 얼마나 세심한지 알게 된 것이다.‘엄청 세세한 데까지 세심하게 생각을 하네. 애한테 생선을 주면서 가시도 제대로 안 발라서 목에 걸리게 만드는 지안이랑 다르게.강여름이 엄마가 된다면 좋은 엄마가 되겠어.’“왜 사람을 그렇게 쳐다
“저기요, 그건 그냥 기본 상식이거든요? 속 버려도 상관 없으면 지금 바로 약 가져다 줄게”.여름은 한없이 뻔뻔한 하준의 두꺼운 얼굴에 어이가 없어졌다.“나한테 관심 있다는 걸 인정하기가 그렇게 어렵냐?”하준이 끝까지 질척거렸다.“그래서 내가 관심 있다고 인정을 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저기요, 그쪽이 곧 결혼한다는 건 온 세상이 다 알거든요. 최하준 회장님께서 나 같은 여자 때문에 수십 년을 마음에 담았던 소꿉친구 약혼녀를 버리겠다는 말씀은 아니시겠죠?”여름은 한껏 비꼬는 말을 늘어놓고는 주방으로 들어갔다.하준은 아무 말 없이 여름이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자신이 여름에게 어느 정도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것이 지안에 대한 마음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어젯밤 벌어진 일련의 사건으로 하준은 지안에 대한 생각이 조금 흔들리고 말았다.‘지안이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착하고 배려심 깊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어. 반면 강여름은 내 생각처럼 그렇게 못된 인간이 아닌지도 몰라.’곧 심심한 된장국과 함께 상이 차려졌다.하준은 몇 분도 되지 않아서 된장국과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그냥 평범하기 짝이 없는 된장국일 뿐이었는데 여름의 손을 거치니 그렇게 맛이 있을 수가 없었다.여름의 집에서는 언제라도 입맛이 도는 것 같았다.밥을 먹고 나니 여름이 따뜻한 물과 감기약을 한 포 내밀었다.“물에 타서 주면 안 돼?”하준이 꼼짝도 하기 싫어하는 어린애처럼 어리광을 부렸다.“백지안 전화번호 뭐야? 내가 전화해서 당장 와서 타주라고 할 게.”여름은 갈수록 한 술 더 뜨는 인간에게 휴대 전화를 내밀었다. “……”하준은 조용히 일어나서 약을 탔다. 핏기 가신 얼굴이 더욱 불쌍하게 보였다.20분쯤 지났을까, 침실에서 여울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여름은 후다닥 달려갔다. 곧 여울이 울음을 그쳤는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하준이 가서 보니 침대 위에서 여름이 여울의 머리를 땋아주고 있었다. 여울은 공주님처럼 귀여워졌다.
“알아요. 하지만 큰아빠는 결혼하잖아요. 큰아빠가 하루종일 나하고만 놀면 지안이 이모가 안 좋아한대요. 지안이 이모가 날 미워하는 건 싫어요.”여울이 천진하게 말했다.하준은 씁쓸한 얼굴로 여름을 쳐다봤다.“내 말이 틀린가?”여름이 귀엽게 눈을 굴렸다.“백지안이 전혀 신경쓰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예전 같았으면 백지안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나섰겠지만 지금은 확신이 서지 않았다.도리어 여름의 팩폭에 입을 일자로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빨리 가요. 괜히 여울이한테 감기 옮기지 말고.”여름이 다시 하준을 쫓았다.할 수 없이 시키는 대로 얌전히 물러났다.차에 타자 하준이 지시했다.“회사로 가. 약 먹었으니까 병원은 안 가도 돼.상혁은 빠르게 분위기를 파악하고 아무 말 없이 회사로 향했다.‘우리 회장님이 정신과 문제가 좀 있어서 그렇지 평소에는 1년 4계절 감기도 안 걸릴 정도로 강철 체력을 가진 분인데 오늘은 좀 이외네.’“아 참, 양하한테 바로 회사로 오라고 연락하고 급한 일 하나 맡겨.”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최양하가 강여름과 여울이가 다정하게 붙어있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상혁은 하준이 하고 있는 고놈의 속셈이 너무 빤히 보여서 어이가 없었다.“그리고….”하준이 덧붙였다.“가서 서인천 뒤 좀 캐봐.”상혁이 결국 질문을 던졌다.“제가 알기로는 서리그의 자제들은 다들 점잖고 예의바르고 학식도 있고 품행이 단정….”“됐어.”하준이 싸늘한 얼굴로 말을 끊었다.“그런 거 말고 그 녀석의 결점을 찾아오란 말이야. 누구든 결점이 있다고. 바람둥이라던지, 못된 습관이 있다던지 말이야.”상혁은 한숨을 쉬었다.“그런 거 없다던데요. 서인천 님은 구린 것 없이 아주 깨끗한 분입니다. 기본적으로 술집 같은 데는 가지도 않고….”“남들 하는 얘기 들을 것 없어. 그게 다 사실인지 어쩐지도 알 수 없고.”하준이 새삼 상혁을 가르치려고 들었다.“찾아 보라고. 발냄새가 난다던지, 구취가 있
백지안은 깜짝 놀랐지만 열심히 웃음을 지었다.“그럴 리가 있나. 애들이 얼마나 천사처럼 순수하고 귀여운데. 애들 좋아하지.”하준은 얇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백지안이 하준의 손을 잡아 끌며 눈을 내리깔았다.“준, 어제 내가 실수해서 기분 나쁜 거 알아. 하지만 나도 애를 처음 봐서 뭘 어째야 좋을 지 잘 몰라서 그랬어. 앞으로는 안 그럴 거야. 앞으로 여울이 자주 데리고 와. 나도 애기랑 지내는 연습을 해볼 수 있잖아.”여울이가 어제 일을 말하지 않았다면 백지안은 여울을귀신도 모를 방식으로 여울을 휘어잡았을 것이다.심하게 마하면 여울이가 죽는대도 여울의 죽음에서 자신은 아무 관계도 없어 보이도록 만들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연습이라고?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여울이는 아직 어린 애라서 조금만 실수하면 크게 다칠 수도 있어. 생선 가시 하나, 씨 하나라도 잘못 삼켰다가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어.”백지안은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더니 더듬더듬 해명했다.“그, 그런 뜻이 아니고.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아주 아주 조심….”“우리 일단은 아이를 가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하준이 갑자기 말을 끊었다.“왜? 어재 내가 애를 잘 못 봐서 그래?”백지안은 곧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준, 요즘 편애가 너무 심하지 않아? 걔는 네 딸도 아니고 양하 씨 애잖아? 그래? 내가 잘못한 거 인정해.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엄마가 될 권리를 뺏어갈 수는 없어. 내 아이에게는 나도 최선을 다할 거니까.”지안아. 왜 어린애 한테 너와 나 사이에 끼어들지 말라는 소리 같은 걸 했어?”하준은 안 그래도 아픈데 백지안이 울어대니 더욱 짜증이 났다.“나랑 걔 아빠가 사이가 안 좋으니 나중에 내 애가 생기면 내 아이도 아니고 조카인 여울이가 너랑 나 사이에 끼어들면 내가 여울이를 싫어하게 될 거라고 말했다며?”여름은 멍해졌다.어제 위협을 했을 때 여울이 한껏 겁을 집어 먹고 끽 소리도 못하는 것을 보고 충분히 겁을 줬다고 생각했었다.‘보
그래서 하준은 더욱 자기 아이를 보모의 사랑 속에서 키우고 싶었다.“그럴게. 내 아이는 잘 돌볼 거야.”백지안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미안한테 지금은 널 믿을 수가 없어. 우린 아직 젊으니까 아이 문제는 천천히 생각해 보자.”하준은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이제 그만 가 봐. 난 처리해야 할 일이 좀 많아. 그리고 도시락 만들어서 오지 마. 난 네가 하루 종일 내 곁에서만 맴돌지 말고 네 일에 집중했으면 좋겠어.”그러더니 하준은 의자에 앉아서 바로 일을 시작했다.백지안은 미쳐버릴 지경이었다.그러나 서운한 얼굴을 한 채로 FTT를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그동안 어렵사리 만들어온 이미지의 가면을 강여름도 벗기지 못했는데 겨우 꼬맹이에게 홀랑 벗겨질 줄은 생각도 못했다.이때 곽철규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가서 1억만 좀 만들어 와. 이제 쓸 돈이 다 떨어졌다.”백지안은 머리 끝까지 화가 났다.“1억 준지가 언제라고 벌써 이래? 내가 무슨 현금 인출기야? 1억 벌기가 쉬운 줄 알아?”“힘들지~, 하지만 최하준에게 1억쯤은 아무것도 아니잖아?”곽쳘규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곧 결혼도 할 건데 국내 최고의 부자의 재산 절반이 이제 네 거잖아?”백지안은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래! 결혼할 거야. 하지만 내가 그렇게 몇 억씩 턱턱 써버리면 하준이도 눈치 챌 거라고.”“그냥 쇼핑 좀 했다고 둘러대면 그만이잖아?”곽철규가 짜증스럽게 말했다.“빨리! 급하게 쓸 데가 있다니까!”“제발 돈 주면 그걸 제대로 된 데다 쓰면 안 되겠어? 당신이 도박이며 술 마시는데 다 뿌리고 다니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게다가 아파트에 여자도 종종 데리고 왔지? 나한테 병이라고 옮기기만 해 봐!”“주둥아리 조심해서 놀리라고. 내가 다른 애를 안 델고 놀면? 네가 매일 해결해 줄 거냐? 너랑 노는 게 좋기는 하지만 너랑만 노는 건 질린다고.”백지안은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곧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좋아. 보내줄게.”전화를 끊더니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