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하준은 더욱 자기 아이를 보모의 사랑 속에서 키우고 싶었다.“그럴게. 내 아이는 잘 돌볼 거야.”백지안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미안한테 지금은 널 믿을 수가 없어. 우린 아직 젊으니까 아이 문제는 천천히 생각해 보자.”하준은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이제 그만 가 봐. 난 처리해야 할 일이 좀 많아. 그리고 도시락 만들어서 오지 마. 난 네가 하루 종일 내 곁에서만 맴돌지 말고 네 일에 집중했으면 좋겠어.”그러더니 하준은 의자에 앉아서 바로 일을 시작했다.백지안은 미쳐버릴 지경이었다.그러나 서운한 얼굴을 한 채로 FTT를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그동안 어렵사리 만들어온 이미지의 가면을 강여름도 벗기지 못했는데 겨우 꼬맹이에게 홀랑 벗겨질 줄은 생각도 못했다.이때 곽철규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가서 1억만 좀 만들어 와. 이제 쓸 돈이 다 떨어졌다.”백지안은 머리 끝까지 화가 났다.“1억 준지가 언제라고 벌써 이래? 내가 무슨 현금 인출기야? 1억 벌기가 쉬운 줄 알아?”“힘들지~, 하지만 최하준에게 1억쯤은 아무것도 아니잖아?”곽쳘규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곧 결혼도 할 건데 국내 최고의 부자의 재산 절반이 이제 네 거잖아?”백지안은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래! 결혼할 거야. 하지만 내가 그렇게 몇 억씩 턱턱 써버리면 하준이도 눈치 챌 거라고.”“그냥 쇼핑 좀 했다고 둘러대면 그만이잖아?”곽철규가 짜증스럽게 말했다.“빨리! 급하게 쓸 데가 있다니까!”“제발 돈 주면 그걸 제대로 된 데다 쓰면 안 되겠어? 당신이 도박이며 술 마시는데 다 뿌리고 다니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게다가 아파트에 여자도 종종 데리고 왔지? 나한테 병이라고 옮기기만 해 봐!”“주둥아리 조심해서 놀리라고. 내가 다른 애를 안 델고 놀면? 네가 매일 해결해 줄 거냐? 너랑 노는 게 좋기는 하지만 너랑만 노는 건 질린다고.”백지안은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곧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좋아. 보내줄게.”전화를 끊더니
여름이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여울은 하늘의 손에 카드를 하나 쥐여주었다.“이거 아빠 카드야. 가져. 쓰고 싶을 때 마음대로 써. 난 증조 할아버지가 준 거 있어.”“필요없어.”하늘이 되돌려 주며 말했다.“강여울, 넌 아빠랑 엄마가 다시 같이 살면 좋겠지?”여울의 눈이 반짝였다.“사실은… 아빠가 사진보다 잘생겼더라?”하늘은 당황스러웠다. 아무래도 얼빠인 동생은 믿을만한 존재가 못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아빠는 다른 사람이랑 결혼할 거야. 아빠는 나쁜 사람이야. 옛날에 엄마가 우리를 보호해주지 않았으면 우리는 태어나지도 못했을 거야.”여울의 얼굴이 축 쳐졌다.“게다가 양유진 아저씨가 우리한테 진짜 잘해주잖아?”하늘이 영 기분이 안 좋은 듯 일깨웠다.“아저씨가 내내 몰래 우리 엄마를 기다리고 있다니까.”“알겠어. 아빠랑 엄마랑 안 붙여 좋으면 되잖아.”여울은 고개를 푹 숙였다.그날 유치원에서는 ‘만지지 마세요!’를 배웠다.“여러분, 낯선 사람이 여러분의 얼굴이나 엉덩이나 가슴을 만지려고 하면 못 만지게 해야 돼요. 그리고 절대로 낯선 사람 앞에서는 바지나 옷을 벗으면 안 돼요. 여러분의 몸을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거 아니에요.”여울은 그 말을 듣고 까만 눈썹을 치켜 세우더니 결국 손을 들고 물었다.“선생님, 빨개 벗으면 어떻게 돼요?”“모르는 사람이 그러면 경찰 아저씨를 부를 수 있어요.”선생님이 진지하게 답했다.“그러면 모르는 사람이 아니면요?”여울이 고민스러운 듯 물었다.“큰아빠가 이모를 봤는데요…..”“……”쿨럭쿨럭!선생님은 한참 만에야 간신이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책임을 져야죠. 남자가 여자를 봤으면 책임을 져야 해요. 그러니까 결혼을 하던지 해야지 안 그러면 나쁜 짓이에요.”여울은 알쏭달쏭하기만 했다.‘그래서 엄마가 그렇게 화를 냈나? 아빠가 나쁜 짓을 한 거구나.’수업이 끝나자 여울은 선생님에게 하준에게 전화를 걸어달라고 했다.“큰아빠, 나 유치원 왔어요.”“응, 유치원 재미있
“끊어.”“아니!”하준이 급히 말을 이었다.“그거 타이레놀은 아니었잖아? 이름이 뭔데?”“아 몰라. 약국에 가면 다 팔아!”그러더니 여름은 그대로 탕!하고 끊어버렸다.하준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다시 전화를 걸었다.“아, 뭐 하는 짓이야?”간신히 짬을 내서 낮잠을 자려던 여름은 울컥 짜증이 올라왔다. 여름의 말투에 가득한 짜증을 하준이 못 알아들었을 리 없다. 가뜩이나 감기로 몸 상태가 별로이던 하준은 열이 확 올랐다.“사람이 좋은 마음에 경고나 좀 해줄까 했더니…. 서인천 그 인간 별로야. 발냄새도 나고 남자 좋아한대. 순전히 벨레스 후계자라는 것만 보고 당신한테 접근한 거야. 정말 당신이 좋아서 만나는 걸로 착각하지 말라고.”“당신이 뭔 상관이야!”여름은 목이 아프도록 소리를 질렀다.“아무리 그래도 당신이 내 전처인데 사기나 당하고 다니면 망신스러우니까 그러지.”“고맙지만 나는 서인천 씨가 발 냄새 나는 사람은 아닌 것 같고, 남자를 좋아하는지 어떤지는 이따가 집에 데려가면 알게 되겠지.”여름은 말을 하더니 전화를 끊었다.화가 나서 하준도 수화기를 쾅 내려 놓았다.막 들어와서 보고를 하려고 문을 들어서던 상혁은 매우 민망한 얼굴이었다.‘아오, 진짜. 서인천 님은 발 냄새 같은 거 안 나거든요. 회장님이 이렇게 연적을 까내리려고 아무 말이나 막 하시는 분이었다니….’하준은 있는 대로 성질을 다 내더니 기침을 쿨럭쿨럭해댔다.“아무래도 병원에 가서 진찰 받고 약을 받으시는 게 좋겠는데요. 강 대표님이 의사는 아니잖아요.”얼굴이 온통 벌그레한 채 별 차도가 없어 보이는 하준을 보며 상혁이 말했다.하준은 상혁을 노려보더니 결국 내키지는 않는다는 투로 한 마디 뱉었다.“주혁이나 불러줘.”상혁은 정말이니 민망해 죽을 지경이었다.‘이주혁 선생님이 무슨 개인 전용 닥터냐고요….’어쨌거나 상혁은 이주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주혁도 어이 없어 했지만 그래도 감기약을 들고 와 주었다.“네 가족 주치의 부르면 죽냐?”하준은 약을 열어
비밀스러운 룸.백지안이 10분쯤 기다리니 천천히 문이 열렸다.귀족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미간에는 반쯤은 느른하고 반쯤은 무심한 분위기가 서려있었다.“백지안 씨가 나에게 무슨 일입니까?”“같이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요.”백지안이 그 얼굴을 보면서 평온하게 빙그레 웃었다.“우리가 같이 할 일이 뭐가 있습니까? 저에 대해서 뭔가 오해하신 것 같은데. 전 바쁜 사람입니다. 별 일 없으시면….”“3년 전에 최하준 옆에 있던 지다빈은 가짜죠.”백지안이 입을 열었다.“나중에 지다빈이 죽을 때에야 진짜 지다빈을 데리고 왔어요. 내 추측이 틀리지 않다면 당시에 당신들은 백소영을 백소영을 바꿔치기 하려고 했을 거예요. 최하준이 백소영을 감옥에 처넣으면 강여름과 사이가 벌어질 테니까. 그리고 그 가짜 지다빈은 최하준의 곁에 있을 때 계속해서 최하준의 약에 손을 댔어요. 결국 최하준은 병세가 심해져서 점점 기억을 잃었죠.”남자의 눈이 점점 깊어지면서 차가워졌다.천천히 백지안의 맞은 편에 와서 앉더니 얼굴에 비열한 웃음이 떠올랐다. “백지안 씨는 아시는 게 많군요.”“당시에 내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최하준은 지금쯤 미쳤겠죠.”백지안이 말했다.“아시니 다행이군요. 당신은 내 계획을 망쳤습니다.”남자가 어금니를 물고 말했다.“그래 놓고 지금 나와 협상을 하자는 겁니까?”백지안이 웃었다.“당신의 가면 속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을 텐데요? 난 증거를 가지고 있거든요. 3년 전에 최하준의 건강을 관리하면서 나는 누군가가 하준이의 약에 손을 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아주 교묘한 수법이라 나 같은 의사가 아니면 아마도 들키지 않았겠죠.”남자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이 없었다.백지안이 그에게 차를 따라 주었다.“3년 전의 일은 대충 그렇게 알고 있어요. 당시 다빈이는 강여경이 성형수술을 한 거였죠. 나중에 강여경이 어디로 갔는지는 당신들 밖에는 모르고요.”“당신들?”남자가 웃었다.“하늘과 땅을 속이고 최하준의 친구들까지
이틀 후.밤에 임윤서가 동성에서 돌아왔다.여름은 직접 윤서를 데리러 공항에 나갔다.“아니, 내가 자리 며칠 비웠다고 여울이가 최양하의 딸이 되어 버리다니!”답답했다.“그러면 이제 애들은 나랑 같이 돌아가지 못하잖아? 거기 혼자 있으면 너무 외롭단 말이야. 그냥 서울에 사무실을 얻을까? 이번에 집에 갔더니 엄마 아빠가 나가지 말라고도 하시고.”“그래도 되겠다.”여름이 물었다.“SE에서 내내 너 데려가고 싶어했잖아? SE랑 손잡고 오슬란에 한 방 먹여줘도 좋고.”“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요즘 오슬란에서 허구한 날 전화 온다. 제발 돌아오라고.”그렇게 말하면서 임윤서는 사뭇 의기양양했다.이때 휴대 전화가 울렸다. 위에 ‘송영식’ 석 자가 선명하게 반짝였다.임윤서가 여름에게 눈썹을 찡긋해 보였다. 그러더니 거만하게 거절 버튼을 눌렀다.“하! 뭐야, 이거! 내가 그렇게 애걸할 때는 들은 척도 안 하더니. 이젠 너는 쳐다도 못 볼 어르신이 되었단 말이야.”여름은 ‘푸흣’ 웃었다.“네가 SE랑 손을 잡으면 송영식은 어지간히 골치가 아프겠다. 쿠베라는 자식들이 많아서 송영식은 누나도 있고 동생도 있잖아. 둘 다 대단한 사람들인데 중간에 끼어서 어중간하지. 게다가 사촌이며 육촌까지 많으니 자기가 세운 회사도 제대로 관리 못하면 쿠베라 쪽에서 위신이 떨어질 거 거든.”“그 자식은 쿠베라를 물려 받으면 안 돼. 쿠베라 끝장난다고.”임윤서가 비웃었다.“얌전히 백지안의 충견 노릇이나 하는 게 낫지.”여름이 뭐라고 말을 하려는데 육민관에게 전화가 걸려 오는 바람에 말이 끊기고 말았다. 사뭇 씁쓸한 목소리였다.“젠장, 곽쳘규가 죽었습니다.”여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육민관의 솜씨는 여름이 잘 알았다. ‘민관이가 나이는 어려도 실전 경험이 풍부해서 그렇게 노련한 녀석인데 그런 민관이의 보호 하에 있는 사람을 죽이다니, 대체 어떤 녀석이야?’“잘 지켜보라고 했었잖아? 어떻게 된 거야?”“저녁에 곽철규를 미행하고 있었는데 누님 말씀처럼 누군가가
751화해변가 별장백지안은 전화를 한 통 받았다.“놈은… 깨끗이 처리되었습니다.”백지안의 눈이 반짝했다.“일을 아주 꽤 빨리 처리하시네요. 시체도 깔끔하게 잘 처리했나요?”“야산에 처리했는데 아주 외진 곳이라 아무도 접근하지 않을 겁니다.”“고맙습니다.”전화기 저쪽의 사람이 작게 웃었다.“흠, 인사는 넣어두시죠. 이번에는 내가 도와드렸으니 다음에는 제 쪽에서 부탁드릴 일이 있을 겁니다.”“좋습니다.”백지안은 웃었다. 양다리를 걸친 채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곽철규라는 우환을 처리해 버렸으니 이제는 완전히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된 것이다.곧 밖에서 차 소리가 들렸다.백지안은 후다닥 뛰어 내려갔다.“준, 마침 잘 왔어. 오늘 웨딩 업체에서 평면도를 보내줬거든. 식장은 이렇게 배치하면 될까?”백지안이 휴대전화를 건넸다. 하준은 그냥 대충 보았다.“좋을 대로 해. 나는 좀 씻을게.”백지안은 하준의 등을 보며 서운함에 발을 굴렀다.“최하준, 솔직하게 말해. 나랑 결혼하고 싶지 않은 거 아냐? 결혼 준비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나 혼자서만 하고 있잖아? 우리 다음 주에 결혼식이라고. 그건 알아?”하준이 돌아보았다. 처량한 백지안의 눈을 보니 가슴이 메었다.‘지안이랑 결혼하면 좋을 줄 알았는데 요즘 가슴이 정말 너무 답답해.’백지안은 결국 눈물을 뚝뚝 흘렸다.“여울이 건은 내가 잘못한 거 나도 알아. 하지만 나도 충분히 되돌이켜 봤고 네가 임신에 동의하지 않아서 난 이제 주사도 안 맞아. 대체 나더러 뭘 더 어쩌라는 거야? 이제 날 사랑하지 않는 거야? 매일 새벽부터 나가서 오밤중에 들어오고. 너 예전에는 안 그랬잖아?강여름이 돌아오고 나서부터는….”“그만하지.”하준이 백지안의 말을 끊었다.“아니, 할 말 아직 남았어.”백지안은 이제 정신줄을 놓은 듯 하준에게 마구 소리를 질렀다.“너는 나한테 손만 대면 혐오감이 드니 나는 널 만족시켜줄 수 없다는 거 알아. 하지만 준, 애초에 내가 너한테 매달린 건 아니
최란은 멈칫하더니 잠시 망설였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아들이라고 둘밖에 없던 아들이 사이가 별로 안 좋았는데 여울이가 둘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면 좋겠구나.’“고맙다.”----유치원 입구.하준이 도착했을 때는 아직 하원 시간이 아니었다. 블루 셔츠에 화이트 팬츠에는 주름 하나 잡히지 않았다. 긴 다리와 귀족적인 체형은 절로 보는 사람에게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이 유치원에 보낼 수 있을 정도면 꽤나 드르르한 집안이라 다들 돈깨나 있다는 사람들이었지만 이렇게 강한 아우라를 풍기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저, 어느 아이를 데리러 오셨나요?”“강여울을 찾아왔습니다.”하준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4세반이네요. 지금 4세반은 운동장에서 놀고 있습니다.”경비 아저씨가 공손하게 하준을 데리고 들어갔다. 운동장은 멀지 않아 곧 도착했다.넓은 운동장에 꼬맹이들이 즐겁게 놀고 있었다. 하준은 한눈에 여울을 찾았다. 정말이지 너무 귀엽게 차려입어서 눈에 띄도록 예뻤다.막 여울에게 다가가려는데 여울이 미끄럼틀에서 주루룩 미끄러져 내려오더니 원복을 입고 옆에 서 있던 남자아이의 손을 덥석 잡는 게 보였다.여울은 남자아이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진짜로 나랑 시소 안 탈 거야?”“안 타. 난 시소 싫어.”남자아이는 쿨하게 돌아섰다.“아, 같이 놀자!”여울은 남자아이의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팽팽하게 긴장한 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내가 애진작에 여울이의 저 강아지상이 가진 잠재력을 알아봤다고. 유치원 등원 시작한 지 며칠 되지도 않는데 벌써부터 남자친구라니….“여울아.”하준이 성큼성큼 다가갔다.여울과 하늘은 동시가 깜짝 놀랐다.“큰아빠!”여울은 갑자기 하준에게 후다닥 달려들며 길을 막아섰다.하늘은 그 틈을 타서 후다닥 도망가 버렸다. 작은 몸으로 미끄럼틀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하준은 인상을 썼다. “유치원에서 새로 사귄 친구니? 왜 날 보고 도망가는 거지?”“모르는 아저씨한테 굳이 인사 해야 하나요?”여울이 고개를
753화“…니예에.”여울이 우물쭈물 답했다.“여울아.”하준이 갑자기 앉아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아직은 어리니까 괜찮지만 이제 크면 남자애들 손을 그렇게 함부로 막 잡으면 안 돼.”“네.”여울은 끄덕였다. ‘나도 아무하고나 막 손잡는 거 아니거든요. 하지만 하늘이는 내 쌍둥이인걸.’“여자 친구들이랑 놀면 어떠니?”하준이 권했다.“내 친구는 신경 쓰지 마세요.”여울이 입술을 쭉 내밀었다.하준은 뻘쭘해서 입을 마둘었다.‘뭐, 아직 어리니까 천천히 두고 살펴보면 되겠지.’여울을 데리고 나올 때 하늘이 내내 입구에서 쳐다보고 있었던 것을 하준은 눈치채지 못했다.선생님은 하늘이가 여울이는 어름이 와서 먼저 데려가니 부러워하는 줄 알고 위로했다.“괜찮아. 하늘이 엄마도 곧 오실 거야.”“네.”하늘이는 눈을 내리깔았다.‘저게 우리 아빠구나. 목소리 처음 들었네. 키는 엄청 크구나.하지만 곧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겠지. 난 여울이처럼 멍청하게 홀랑 넘어가지 않을 거야. 난 영원히 아빠를 받아들일 수 없어.’----다음날, 이호 공원묘지.여름고 임중서는 꽃다발을 들고 한참을 헤맨 후에야 백현수와 연화정의 묘를 찾을 수 있었다.묘 앞에는 흰 국화 꽃다발이 하나 놓여 있었다.“누가 성묘를 다녀갔나 봐?”임윤서가 꽃을 보더니 말했다. 꽃은 아직 싱싱했다.“백지안이나 백윤택 그 짐승 같은 것들이 이렇게 꽃을 놓아두고 갈 위인은 아닌데.”“당연히 아니겠지.”여름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현수에게 일이 벌어졌을 때도 그 집안에서는 아무도 병원에 와보지 않았었다.‘추석도 아닌데 대체 누가 다녀간 거지?’“저기… 소영이가 살아있다든지?”임윤서가 불쑥 말했다.여름은 흠칫했다.“소영이는 수영을 못 한다던데. 바다에 빠져서도 살아날 가망은 거의 없지 싶다.”“그건 모르는 일이지.”이때 갑자기 백윤택의 기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름이 돌아보니 백지안 남매가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백지안은 몸에 딱 달라붙는 레드 드레스를 입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