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1화해변가 별장백지안은 전화를 한 통 받았다.“놈은… 깨끗이 처리되었습니다.”백지안의 눈이 반짝했다.“일을 아주 꽤 빨리 처리하시네요. 시체도 깔끔하게 잘 처리했나요?”“야산에 처리했는데 아주 외진 곳이라 아무도 접근하지 않을 겁니다.”“고맙습니다.”전화기 저쪽의 사람이 작게 웃었다.“흠, 인사는 넣어두시죠. 이번에는 내가 도와드렸으니 다음에는 제 쪽에서 부탁드릴 일이 있을 겁니다.”“좋습니다.”백지안은 웃었다. 양다리를 걸친 채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곽철규라는 우환을 처리해 버렸으니 이제는 완전히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된 것이다.곧 밖에서 차 소리가 들렸다.백지안은 후다닥 뛰어 내려갔다.“준, 마침 잘 왔어. 오늘 웨딩 업체에서 평면도를 보내줬거든. 식장은 이렇게 배치하면 될까?”백지안이 휴대전화를 건넸다. 하준은 그냥 대충 보았다.“좋을 대로 해. 나는 좀 씻을게.”백지안은 하준의 등을 보며 서운함에 발을 굴렀다.“최하준, 솔직하게 말해. 나랑 결혼하고 싶지 않은 거 아냐? 결혼 준비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나 혼자서만 하고 있잖아? 우리 다음 주에 결혼식이라고. 그건 알아?”하준이 돌아보았다. 처량한 백지안의 눈을 보니 가슴이 메었다.‘지안이랑 결혼하면 좋을 줄 알았는데 요즘 가슴이 정말 너무 답답해.’백지안은 결국 눈물을 뚝뚝 흘렸다.“여울이 건은 내가 잘못한 거 나도 알아. 하지만 나도 충분히 되돌이켜 봤고 네가 임신에 동의하지 않아서 난 이제 주사도 안 맞아. 대체 나더러 뭘 더 어쩌라는 거야? 이제 날 사랑하지 않는 거야? 매일 새벽부터 나가서 오밤중에 들어오고. 너 예전에는 안 그랬잖아?강여름이 돌아오고 나서부터는….”“그만하지.”하준이 백지안의 말을 끊었다.“아니, 할 말 아직 남았어.”백지안은 이제 정신줄을 놓은 듯 하준에게 마구 소리를 질렀다.“너는 나한테 손만 대면 혐오감이 드니 나는 널 만족시켜줄 수 없다는 거 알아. 하지만 준, 애초에 내가 너한테 매달린 건 아니
최란은 멈칫하더니 잠시 망설였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아들이라고 둘밖에 없던 아들이 사이가 별로 안 좋았는데 여울이가 둘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면 좋겠구나.’“고맙다.”----유치원 입구.하준이 도착했을 때는 아직 하원 시간이 아니었다. 블루 셔츠에 화이트 팬츠에는 주름 하나 잡히지 않았다. 긴 다리와 귀족적인 체형은 절로 보는 사람에게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이 유치원에 보낼 수 있을 정도면 꽤나 드르르한 집안이라 다들 돈깨나 있다는 사람들이었지만 이렇게 강한 아우라를 풍기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저, 어느 아이를 데리러 오셨나요?”“강여울을 찾아왔습니다.”하준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4세반이네요. 지금 4세반은 운동장에서 놀고 있습니다.”경비 아저씨가 공손하게 하준을 데리고 들어갔다. 운동장은 멀지 않아 곧 도착했다.넓은 운동장에 꼬맹이들이 즐겁게 놀고 있었다. 하준은 한눈에 여울을 찾았다. 정말이지 너무 귀엽게 차려입어서 눈에 띄도록 예뻤다.막 여울에게 다가가려는데 여울이 미끄럼틀에서 주루룩 미끄러져 내려오더니 원복을 입고 옆에 서 있던 남자아이의 손을 덥석 잡는 게 보였다.여울은 남자아이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진짜로 나랑 시소 안 탈 거야?”“안 타. 난 시소 싫어.”남자아이는 쿨하게 돌아섰다.“아, 같이 놀자!”여울은 남자아이의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팽팽하게 긴장한 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내가 애진작에 여울이의 저 강아지상이 가진 잠재력을 알아봤다고. 유치원 등원 시작한 지 며칠 되지도 않는데 벌써부터 남자친구라니….“여울아.”하준이 성큼성큼 다가갔다.여울과 하늘은 동시가 깜짝 놀랐다.“큰아빠!”여울은 갑자기 하준에게 후다닥 달려들며 길을 막아섰다.하늘은 그 틈을 타서 후다닥 도망가 버렸다. 작은 몸으로 미끄럼틀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하준은 인상을 썼다. “유치원에서 새로 사귄 친구니? 왜 날 보고 도망가는 거지?”“모르는 아저씨한테 굳이 인사 해야 하나요?”여울이 고개를
753화“…니예에.”여울이 우물쭈물 답했다.“여울아.”하준이 갑자기 앉아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아직은 어리니까 괜찮지만 이제 크면 남자애들 손을 그렇게 함부로 막 잡으면 안 돼.”“네.”여울은 끄덕였다. ‘나도 아무하고나 막 손잡는 거 아니거든요. 하지만 하늘이는 내 쌍둥이인걸.’“여자 친구들이랑 놀면 어떠니?”하준이 권했다.“내 친구는 신경 쓰지 마세요.”여울이 입술을 쭉 내밀었다.하준은 뻘쭘해서 입을 마둘었다.‘뭐, 아직 어리니까 천천히 두고 살펴보면 되겠지.’여울을 데리고 나올 때 하늘이 내내 입구에서 쳐다보고 있었던 것을 하준은 눈치채지 못했다.선생님은 하늘이가 여울이는 어름이 와서 먼저 데려가니 부러워하는 줄 알고 위로했다.“괜찮아. 하늘이 엄마도 곧 오실 거야.”“네.”하늘이는 눈을 내리깔았다.‘저게 우리 아빠구나. 목소리 처음 들었네. 키는 엄청 크구나.하지만 곧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겠지. 난 여울이처럼 멍청하게 홀랑 넘어가지 않을 거야. 난 영원히 아빠를 받아들일 수 없어.’----다음날, 이호 공원묘지.여름고 임중서는 꽃다발을 들고 한참을 헤맨 후에야 백현수와 연화정의 묘를 찾을 수 있었다.묘 앞에는 흰 국화 꽃다발이 하나 놓여 있었다.“누가 성묘를 다녀갔나 봐?”임윤서가 꽃을 보더니 말했다. 꽃은 아직 싱싱했다.“백지안이나 백윤택 그 짐승 같은 것들이 이렇게 꽃을 놓아두고 갈 위인은 아닌데.”“당연히 아니겠지.”여름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현수에게 일이 벌어졌을 때도 그 집안에서는 아무도 병원에 와보지 않았었다.‘추석도 아닌데 대체 누가 다녀간 거지?’“저기… 소영이가 살아있다든지?”임윤서가 불쑥 말했다.여름은 흠칫했다.“소영이는 수영을 못 한다던데. 바다에 빠져서도 살아날 가망은 거의 없지 싶다.”“그건 모르는 일이지.”이때 갑자기 백윤택의 기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름이 돌아보니 백지안 남매가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백지안은 몸에 딱 달라붙는 레드 드레스를 입은
백윤택은 정신을 차리고 와락 임윤서에게 달려들었다.그러나 임윤서는 깔끔한 업어치기로 백윤택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그 바닥이라는 것이 시멘트였기 때문에 백윤택은 오장육부가 다 아팠다.“이게….”“아직도 입이 살았어?”임윤서가 다리를 들어 발길질을 하려고 했다.“오빠!”백지안의 안색이 변하더니 달려들어 임윤서를 저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여름이 한 벌 더 빨리 그 앞에 섰다.“옛 원한을 좀 갚겠다는데 뭘 또 끼어들고 그러시나?”여름의 깔아보는 듯한 말투에 백지안은 울컥했다.백지안은 백윤택에게는 관심도 없었으나 어쨌든 남매인데 코앞에서 맞고 있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자니 괜히 자기 자존심이 상하는 것 같았다.“지안아, 빨리 경찰 불러, 최 회장, 송 대표 불러!”백윤택이 악을 썼다.‘저게 대체 외국에 나가서 뭘 하고 돌아다녔길래 주먹이 아주 쇳덩어리 같네. 아파서 죽을 뻔했잖아.’“야, 이 씨! 두고 봐, 내가 사람 불러서 손 봐줄 테니까. 어디 재주 있으면 도망쳐 보시지, 내가 몇 명 불러서….”“거 주둥아리 더럽네.”임윤서가 달려들었다.공원묘지에 백윤택의 비명소리가 울렸다.백지안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얼른 휴대 전화를 꺼냈다. 하준에게 전화를 걸려다가 요즘 자신에게 유감이 있는 듯한 하준을 떠올리고 결국 송영식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름은 굳이 막지 않았다. 그저 팔짱을 끼고 백지안이 다급히 전화를 거는 꼴을 보고 있었다.이때 공원 관리인이 뛰어왔다.“뭐 하시는 겁니까? 싸움을 하려거든 다른 데 가서 하세요.”백지안이 막 입을 열려는데 임윤서가 입을 막고 ‘응응’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아, 네. 죄송합니다. 이 인간을 보니까 저도 참을 수가 없어서 그만…. 멀쩡하던 우리 삼촌이 이 인간 때문에 화병으로 돌아가셨거든요. 우리 삼촌 아들인데요. 우리 삼촌은 겨우 50대였다니까요. 이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아세요? 제가 몇 년 전에 외국 나가고 나서는 성묘 한 번 안 왔던 인간이었어요.”백윤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해명을 하
임윤서가 위협적으로 눈썹을 치켜세웠다. 백윤택은 겁을 집어먹고 백지안 뒤로 숨었다.“내일은 나랑 최하준의 결혼식이야. 전국의 내로라하는 집안에서는 다들 식장에 올 텐데 당신이 지금 나에게 손을 대면 그건 최하준에게 손대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하준이가 절대로 당신들을 가만두지 않을걸. 생각 잘하라고.”백지안이 손가락을 들어 귀엣머리를 뒤로 넘겼다. 그러자 약지에 끼고 있던 다이아 반지가 번쩍였다.강여름이 흘끗 쳐다보니 백지안은 사뭇 의기양양했다.“어제 하준이가 준 다이아몬드 반지야. 13캐럿짜리인데 좀 작다고 미안해하더라고. 뭐, 마음이 중요한 거지.”임윤서가 끌끌 혀를 찼다.“쯧쯧, 너무 소박하네. 전에 우리 여름이에게는 Heart of Queen 목걸이를 걸어주던데. 들어는 봤나? Heart of Queen?”백지안의 얼굴이 굳어졌다.Heart of Queen이라면 당연히 들여본 적이 있었다. 이름난 가문의 여자라면 다들 들어본 보석이었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누구나 받고 싶어 하는 세기의 주얼리가 아니었던가!하준이 그런 귀한 것을 여름에게 주었었다는 것을 생각하니 열이 뻗쳤다.“됐어. 다 옛날 일인데.”여름이 백지안에게 말했다.“어쨌든 Heart of Queen은 며칠 전에 내가 버렸어. 보니까 나중에 최하준이 주워가던데 당신이 받았겠지?”“……”백지안은 울분을 참지 못해 죽고 싶었다.‘난 목걸이 구경도 못 봤어!게다가 ‘버렸다’는 건 뭔 소리고, ‘주워갔다’는 건 또 뭐야?내가 그걸 받았대도 마치 강여름이 버린 물건을 나에게 받았다는 느낌이잖아?’임윤서가 덧붙였다.“그러면 백지안 씨가 잘 받아둬야겠네. 어쨌든 남이 버리는 쓰레기 주워가는 거 전문이잖아?”“두고 봐. 오늘 가서 당신들이 하준이에게 쓰레기라고 했다고 내가 다 말할 거야.”백지안이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내일이면 저것들은 다 내 발아래야!’“그러시던지. 어쨌든 내가 욕을 안 한 것도 아니니까.”강여름은 꽃다발을 비석 앞에 놓고는 윤서와 같이 절을 했다.
그러나 백지안이 화를 내기 전에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윤서! 당장 지안이에게 사과해.”송영식이 돌계단을 밟으며 성큼성큼 올라오고 있었다.사실 꽤나 매력적인 얼굴인데, 그 얼굴에 한기가 서려 있었다.백윤택은 송영식을 보더니 구세주라도 만난 듯 후다닥 뛰어갔다.“나 좀 살려줘. 저게 얼마나 못됐는지 몰라. 얼굴을 보자마자 날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니까. 내 동생도 때리려고 했어. 자네가 빨리 와 줘서 다행이야.”“영식아, 와줬구나.”백지안이 눈시울을 붉히며 한껏 불쌍한 척을 했다.송영식은 그런 백지안을 보더니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임윤서를 잡을 듯이 노려봤다.“뭔 잘난 척을 하고 앉아 있어? 오늘 내가 너희 둘에게서 사과받기 전에는 여기서 뜰 생각하지도 마.”임윤서는 어이가 없었다.“이상하네. 당신이랑 백지안은 무슨 사이길래 최하준을 찾지 않고 당신을 불렀대? 둘이 뒤에서 몰래 사귀는 거 아니야?”“헛소리하지 마, 난 친구라고.”송영식의 태양혈에 시퍼런 힘줄이 솟았다. 송영식은 이상하게 임윤서와 얽힐 때마다 점점 더 임윤서가 마음에 안 들었다.“거 친구 사이 되게 좋네. 아무 때나 막 불러낼 수도 있고.”임윤서가 부럽다는 듯 백지안을 쳐다봤다.“부럽네. 돈 많은 남친도 있고 아무 때나 불러내면 기사처럼 나타나 보호해 줄 남사친도 있고. 그런데 정말 송영식이 자기를 좋아하는지 모르는 건가?”“무슨 헛소리를 자꾸 지껄이는 거야?”송영식이 당황해서 임윤서를 밀어냈다.“입 다물지 못해!”백지안이라고 다르지 않은 반응이었다. 송영식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임윤서는 거침없이 뱉어서 백지안과 송영식을 완전히 난처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윤서 말이 맞지. 당신이 백지안을 좋아한다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요.”여름이 유유히 덧붙였다.“전에 나더러 최하준과 이혼하라고 종용하기도 했잖아요? 사랑하는 사람의 소원을 이루어 주기 위해서 몰래 뒤에서 힘쓰는 모습은 그야
“나도 다 당신 생각해서 그러는 거지. 백지안은 이제 곧 결혼하는데 오늘이 마지막 기회라고. 한 번 부딪혀 보지 않으면 당신의 사랑은 이제 날아간단 말이야. 뭐, 나한테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요. 난 세상의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 이어지길 바랄 뿐이니까.”임윤서는 손을 흔들더니 여름에게 얼른 출발하라는 신호를 보냈다.송영식은 멍하니 있다가 여름의 차가 일으키는 흙먼지 속에 서 있었다.미쳐버릴 지경이었다.임윤서가 한 말이 정말 정확하게 가장 견디기 힘든 부분을 푹 찔렀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바로 내일 백지안이 결혼을 한다는 사실이었다.송영식이 백지안을 14년 동안 사랑해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16살 그때부터 품어온 사랑을 도저히 한 번도 내려놓을 수 없었다.그때는 지안과 하준이 사귀고 있어서 송영식은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하준은 형제나 다름없는 친구였기 때문에 송영식은 하준의 행복을 빌며 지안을 지키는 오빠 역할을 할 뿐이었다.이제는 그렇게 짝사랑해 온 여자가 마침내 결혼을 한다.지안을 생각하면 기뻤지만 자신을 생각하면 서글펐다.서서히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백지안과 백윤택이 내려오고 있었다.송역식의 눈이 백지안과 마주치자 지안은 씁쓰레한 웃음을 지었다.“걔들 잡았어?”“아니. 차 타고 그대로 도망쳐 버렸어.”송역식이 낮은 소리로 답했다.백윤택은 불만스럽게 구시렁거렸다. 안 그래도 부은 얼굴이 더욱 흉해 보였다.“내가 고것을 잡아서 아주 잡아 죽일 거야.”송영식은 백윤택의 말을 듣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노려봤다. 눈에 혐오감이 그득했다.오늘은 임윤서가 때렸다고는 하지만 예전에 백윤택이 임윤서에게 심각하게 상해를 입혔던 것은 사실인데 그렇게 엄청나게 흉악한 일을 저질러 놓고도 그 일에 대해서는 일말의 반성이 없는 것이 거슬렸다.“오빠, 차 가져와.”백지안이 송영식의 기분을 눈치채고 얼른 말했다.“그래.”백윤택이 자리를 떴다.백지안은 미안한 듯 사과했다.“미안해. 우리 오빠가… 나도 진짜 뭐라고 해야
백윤택이 혀를 끌끌 찼다.“지금 저 송 대표를 보니까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겠다. 야, 너도 참 대단하다. 그 오랜 세월을 최하준은 남자친구로 삼고 한편으로 송 대표를 어장에 넣어두고 관리했다니.”쿠베라가 FTT보다는 못하다고 해도 국내에서 손에 꼽는 대기업이었다. 게다가 쿠베라의 자제들은 정계와 경제계에 골고루 포진해 있었다. FTT는 규모가 어마어마하긴 해도 대부분 최하준 1인의 힘에 기대어 있는 모양새였다.송영식의 삼촌은 내년 새 대통령 후보일 뿐 아니라 가장 당선이 유력한 후보였다.여러 대기업 가문에서 송영식을 탐냈지만 영식은 내내 자기 여동생만 싸고 돌 뿐 밖에서 여자를 만나지 않았다.“사람이라는 건 항상 자신을 위해서 길 하나는 남겨줘야 하는 거야.”백지안이 깊이 한숨을 쉬었다.“혹시라도 하준이가 날 버리면 송영식을 택할 수 있어야지.”“뭔 소릴. 내일 결혼식이잖아?”백윤택은 생각할수록 우쭐했다.“역시 최하준이 낫지. 능력으로 치자면 송 대표는 영 최하준만 못하잖아?”“그렇지. 하지만 그렇다고 영식이를 버릴 수는 없어. 언제든 날 도와줄 수 있는 뒷배로 남겨둬야 해.”백지안은 손톱을 만지작거렸다.‘영식이는 단순해서 하준이보다 후리기 좋지. 날 밑도 끝도 없이 사랑할 타입이라고.’----깊은 밤. 술집.송영식은 혼자서 바에 엎어져 독한 술을 꿀꺽꿀꺽 넘기고 있었다.낮에 백지안이 떠나고 나서 송영식은 혼자서 공원묘지에 1시간은 족히 멍하니 서 있었다.너무나 마음이 괴로웠다.톡이 울렸다. 이주혁이 보낸 톡이었다.-야, 어디냐? 내일 하준이 결혼식인데 한 번 모여야지. 내일 그 자식이 결혼의 무덤으로 들어가는 걸 축하해 줘야 할 거 아니냐?”송영식은 고개를 숙이고 답장을 보냈다.-일이 좀 있어서 못 가겠다. 어쨌든 걔가 결혼이라는 무덤에 처음 걸어 들어가는 것도 아니잖아?그러고 나서 송영식은 바를 탕 내리쳤다.“몇 병 더 줘!”마시다 보니 곧 1시였다.비틀비틀 걸어 나가던 영식은 맞은 편에서 오던 사람과 쿵 하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