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준은 마음이 싸해졌다.다른 사람이 그런 소리를 했다면 안 믿었겠지만 여울은 이제 겨우 4살 된 아이였다. 단순해서 누굴 속이거나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다. 그러니 그런 여울은 있는 대로만 말할 터였다.‘지안이가 그렇게 사나운 소리를 하는 걸 들어본 적은 없는데.아까 밥 먹을 때 몇 마디 했다고 애를 나무란 건가?이런 지안이는 처음인데….지안이는 따뜻하고 배려심 깊고 발랄한 사람인데.우리 아이가 생기면 지안이는 인내심으로 충만한 엄마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오늘 여울이를 데리고 와서 보니 어린애를 대하는 태도가 그렇게 좋지가 않네.이제 막 엄마를 잃은 애한테 말을 너무 잔인하게 했어.지안이가 변한 걸까, 아니면 내내 그런 성격이었는데 내가 알아보지 못했던 걸까?’“여울이 방금 목욕탕에서 어쩌다가 넘어졌는지 큰아빠한테 얘기해 줄 수 있어?”하준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여울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뭔가를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큰아빠는 솔직한 아이를 좋아하는데.”하준이 진지하게 말했다.“욕조에서 나오는데 너무 추웠거든요. 그래서 내가 이모를 꽉 안았거든요. 그래서 이모 옷이 젖었어. 그랬더니 이모가 나를 탁 쳐서 자빠졌어요.”마지막에 가서 여울은 울었다.“이모한테 뭐라고 하지 마세요. 그러면 이모가 날 더 미워할 거야. 여울이는… 여름이 이모가 보고 싶다. 여름이 이모는 날 좋아하는데. 큰아빠 집은 싫어.”“그래, 그래. 같이 여름이 이모네 가자. 울지 마.”하준은 여울을 안고 나왔다.“여울이 이제 안 아프니? 병원에 가 볼까?”소리를 듣고 백지안이 후다닥 달려와 걱정스럽게 물었다.하준은 지안을 돌아보았다. 너무 낯설었다. 마음에는 의문이 가득했다.‘지안이는 정말 여울이를 걱정하는 걸까?여울이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렇게 무서운 말은 왜 했을까?왜 겨우 옷이 젖은 정도로 아이를 차가운 타일 바닥에 밀쳐버렸을까?’하준은 갑자기 지안이 모르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저 얼굴 뒤에는 내가 모르는 지안이가 숨겨져
“서인천 씨랑”여름이 담담히 답했다.“……”하준의 얼굴이 싸해졌다. 여름에게 한 소리 하고 싶었지만 생각해보면 둘은 이미 이혼을 했다. 여름을 지적할 이유가 없었다.“당장 집으로 와. 여울이가 다쳤어. 지금 당신 집 앞이야.”“뭐?”여름의 긴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어쩌다 애가 다쳤어? 양하 씨는?”“몰라. 양하는 무책임한 녀석이라고. 아, 빨리 와. 여울이 울고 있어. 여름이 이모만 보고 싶다고 난리야.”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사실 여울이 여름의 딸도 아닌데 당장 달려올까 싶었다.그런데 뜻밖에도 여름은 즉답했다.“알았어. 지금 바로 갈게.”전화를 끊고 하준은 고개 숙여 여울을 바라보았다.‘자기 딸도 아닌데 이렇게나 마음을 써주는구나.’----한편 여름은 전화를 끊자 바로 서인천에게 말했다.“미안해요. 집에 급한 일이 있어서 지금 바로 가봐야할 것 같아요.”“모셔다 드리겠습니다.”서인천이 일어났다.“괜찮아요. 차를 가져왔으니 제가 운전하고 가면 돼요.”바로 영화관을 빠져 나온 여름은 차에 타자마자 최양하에게 전화했다.“여울이가 왜 하준 씨에게 가 있어요? 애가 다쳤다는데 알고 있어요? 양하 씨, 여울이가 친딸은 아니라도 조카잖아요? 좀 잘 봐주시면 안 돼요?”“다쳤대요?”최양하가 기함을 했다.“저는 억울합니다. 꼬마 아가씨가 한사코 형님네 집에 가서 자겠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저더러 밤에 놀러간다며 자길 형님에게 맡겨 달라고… 저라도 이렇게 무책임한 아빠 연기하는 게 쉬운 줄 아십니까?”“……”여울은 골치가 아팠다.“얘가 대체 무슨 짓이람?”“여울이 말로는 나쁜 이모를 좀 혼내 주겠다던데….”여름은 이마를 문질렀다.“알겠어요. 미안해요. 내가 괜히 오해했군요. 지금 하준 씨가 애를 데리고 우리 집 앞에 와 있대요. 지금 가는 길이에요.”“가만 보니 여울이가 솜씨가 보통이 아닌가 보네요. 오밤중에 형님을 형수 집 앞으로 데리고 가다니. 아무래도 형수님이랑 형님이 재결합하기를 바라나 봐요.”최양하가 웃으며 놀
하준은 지적을 당하자 여름을 노려보았다.“잘도 그런 소리를 하는군. 당신이 그렇게 야단치지 않았다면 애가 휴대전화를 깰 일도 없지. 당신이 먼저 시작한 거잖아?”“최하준 씨, 저렇게 어린애는 시력이 다 발달하지 않아서 함부로 디지털 기기 화면 보여주면 안 좋다는 거 몰라요?여름이 매우 엄한 얼굴로 여울 앞으로 다가갔다.“내 말이 맞지?”하준은 여울이 무서워서 울 줄 알았다. 그래서 막 여름에게 한 소리 하려는데 여울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닌가! “잘못했어요. 앞으로는 휴대 전화 놀지 않을게요.”“만호가 보고 싶으면 텔레비전을 켜서 보는 거예요. 이제 휴대 전화는 절대로 안 돼.”여름의 말투가 다시 부드러워졌다.여울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여름을 꼭 안았다.여름도 포옹을 되돌려 주었다. 여울은 작은 얼굴을 여름의 품에 폭 묻었다.모르는 사람이 보면 영락없는 모녀로 보일 터였다.하준은 그 모습을 보며 매우 놀랐다.막 생각에 잠기려는데 여름이 하준을 돌아보았다.“애한테 핸드폰을 줘서 문제를 해결하지 말아요. 중독된다고. 애를 평생 망칠 셈이야? 이번에 휴대 전화 떨어트린 걸 교훈으로 삼으라고.”“……”‘그러니까 난 핸드폰 망가진 걸로도 모자라서 망할 누명까지 써야 하는 구먼.’하준은 부루퉁했다.“당신이 일찍 왔으면 나도 여울이 심심할까 봐 휴대 전화 따위 들려주지도 않았을 거라고. 통화하고 나서 40분이나 기다렸다고. 그렇게 서인천이랑 헤어지기가 싫었나?”“네! 당신이 갑자기 나타나지만 않았더라면 둘이 같이 돌아오려고 했는데! 사람 그냥 돌려보내서 얼마나 섭섭했는지 알아요?”여름이 열쇠를 꺼내며 하준을 흘겨보았다.“어? 안지 얼마나 된다고 남자를 집으로 들이고 말이야. 강여름, 너무 쉽잖아.”하준은 완전히 미칠 것 같았다. 여름과 서인천이 한 침대에 있는 장면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살의가 올라올 지경이었다.여울은 하준의 눈빛이 변하는 것을 보고 여름의 뒤로 숨었다.“큰아빠 무서워졌어.”
최하준은 아무 말이 없었다.‘뭐,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강여름이 하는 음식이랑 여울이 엄마 솜씨가 비슷한가 보지?’“알겠어. 애들 아무 때나 배고픈 것도 지극히 정상이지. 가서… 수플레를 해줄게.”여름은 작은 머리를 쓰다듬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여울은 먹이를 기다리는 아기 고양이처럼 종종 걸음으로 여름을 따라 주방으로 들어갔다.하준은 수플레를 먹어본 적이 없었다. 다만 전에 백지안에게 디저트라고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았다.“밤에 애한테 달달한 거 먹여도 되나?”하준이 인상을 쓰며 지적했다. 아까 휴대 전화를 들려주었다고 지적을 당한 참에 자기도 지적할 거리가 생기자 얼씨구나 싶었던 것이다.여름은 신경도 쓰지 않고 냉장고에서 계란을 꺼내 흰자와 노른자를 분리했다.노른자와 선명히 대비되는 하얀 팔을 보고 있자니 당장 잡아보고 싶었다.하준이 넋을 잃고 보는데 여울이 대답했다.“여름이 이모가 하는 수플레는 단 거 아닌데.”“여울이 네가 어떻게 알아?”하준이 의아해서 물었다.여름은 고개도 들지 않고 답했다.“전에 양하 씨가 종종 애를 봐달라고 했거든. 엄마가 떠나고 나서.”하준은 그제야 납득했다. 그러나 여름과 최양하가 가까운 사이라는 사실을 알면 알수록 불만이 커졌다.여름은 곧 수플레를 만들어 냈다.흰자를 크림처럼 단단하게 거품 내서 위에 건포도와 견과류를 뿌렸기 때문에 영양도 있을 것 같고 밖에서 파는 계란빵 같은 것보다 훨씬 몸에 좋을 것 같았다. 아이들이 먹기에도 좋아 보였다.수플레 굽는 냄새가 퍼지자 하준은 자기도 먹고 싶었다.다 구워지자 여울은 테이블에서 냠냠 맛있게 수플레를 먹었다.하준은 영 여울이 부러웠다.여름에게 해달라면 뭐든 척척 해주는 여울이 너무 부러웠다.하준은 어슬렁어슬렁 주방으로 들어갔다. 낮에는 그렇게 요정처럼 또렷한 인상이더니 어스름한 불빛 아래서 보니 한결 더 부드러운 어머니 같은 모습이었다.“애를 아주 잘 아는 것 같군.”별안간 하준이 입을 열었다.“애를 안 키워본 사람은 애를 대하면 어쩔
다시 여름에게 팩폭을 당하자 하준은 어질어질했다.‘답답해, 젠장 너무 답답하다고.’그러거나 말거나 여름은 하준을 주도 나가버렸다. 여울은 이미 그릇을 깨끗하게 비우고 트림을 하고 있었다.“잘 먹었다. 이제 졸려. 잘래요.”“아유, 귀엽기도. 그런데 자기 전에 치카해야지.”그러더니 여름은 가방에서 새 어린이 치약과 치솔을 꺼냈다.하준은 깜짝 놀랐다.“왜 가방에서 그런 게 나와?”“아까 편의점에서 사왔지. 늦은 시간에 애를 데려오니 우리 집에 재울 것 같아서.”여름은 여울을 데리고 욕실로 갔다.“저기, 내 치솔은?”하준이 물었다.“여울이만 여기 놓고 갈 수는 없으니까 나도 여기서 잘 거야.”“미안하지만 우리 집에 남자는 안 재울 거야. 특히나 백 씨 남매에게 우리 집을 또 내주고 싶지는 않거든.”여름은 떨떠름하게 말했다.“지안이는… 내가 여기 있는 거 몰라.”하준이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난 손님방에서 잘게. 어쨌든 여울이만 놓고는 안 갈 거야.”“이모, 우리 큰아빠도 재워줘요.”여울이 부탁했다.“나도 큰아빠랑 있고 싶어.”여름이 여울에게 눈을 부라렸다. 여울은 얼른 메롱을 해 보였다.“정 그러면 소파에서 자던가. 손님방은 윤서에게 내주었는데 오늘 동성에 가서 잔다고 했거든. 그런데 침대에 물건이 많아서 별로 거기서 자고 싶지 않을 걸.”여름은 그러더니 여울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아버렸다.하준은 손님방으로 가서 슬쩍 열어보았다. 방안은 온통 난장판이었다.‘겉보기는 말쑥한 사람이 어째 잠자는 침대는 저 난리야? 돼지우리가 따로 없구먼.’결국 하준은 소파에서 자는 쪽을 택했다.곧 여름이라지만 밤은 아직 추웠다.깜짝 잠들었다가 너무 추워서 깨가지고 안방으로 가 문을 두드렸다.그런데 문을 열고 나온 것은 여울이었다. 잠이 덜 깬 눈을 비볐다.“왜 그래요, 큰 아빠?”“이모는? 이불 좀 하나 내달라고 말해줄래?하준은 안을 들여다 보았다. 여름은 모습이 보이지 않고 샤워 소리만 들려왔다.“이모는 목욕하는
여름이 의아해서 물었다.“방금 아빠 왔다 갔니?”“응. 아빠가 춥대. 그래서 들어와서 담요 가져가라고 했어.여울은 그러더니 다시 곤히 잠들었다.“……”여름은 담요가 놓여있던 의자에서 문까지 거리를 계산해 보았다. 완전히 욕실이 보이는 루트였다. 게다가 자신은 샤워실 문을 활짝 열고 있지 않았던가.그 장면을 생각하니 너무 수치스러웠다.여울의 귀를 죽 잡아 당겼다.“아빠가 춥던지 말던지 무슨 상관이야? 왜 들여 보냈어? 엄마 샤워하는 거 몰랐어?”“샤워가 왜?”여울이 잠에 덜 깨 게슴츠레한 눈을 끔뻑였다.여름은 울고싶은 심정을 누르고 설명해주었다.“엄마가 늘 그랬잖아, 모르는 사람한테 깨벗은 거 보여주는 거 아니라고. 그러니까 엄마가 샤워하는 것도 보여주면 안 되는 거지, 알겠니?”“아, 그러니까 방금 아빠가 엄마 샤워하는 거 본 거야?”“…….”여름의 얼굴이 빨개졌다. 여울이 제대로 이해를 한 건지 못한 건지 알 수 없었다.“엄마, 얼굴이 엄청 빨개요.”여울이 걱정스러운 투로 말했다.“에휴, 관두자.”더 이상 얘기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엄마, 근데 아빠가 보면 어떻게 되는데?”여울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그럼 아빠 나쁜 사람이야? 경찰 아저씨가 잡아가야 돼?”“그냥… 그냥 안 좋아, 아주아주 안 좋은 거야.”여름은 난처해서 화제를 돌렸다. “참, 그건 그렇고, 오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솔직히 얘기해봐.”“그러니까… 내가 그 나쁜 이모한테 씻겨달라고 했는데… 일부러 좀 귀찮게 했더니 나 밀어 넘어뜨렸어.”여울이 살짝 신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아빠가 얼마나 화나서 나쁜 이모 막 혼내줬는지 모르죠? 그랬더니 그 이모 얼굴이 막….”이야기를 듣던 여름의 얼굴이 굳어졌다.“엄마, 왜 그래?”“왜 그러냐고?!”여름이 여울을 들어올려 엉덩이를 팡팡 때렸다.“네가 그 이모를 혼내주지 않아도 돼. 어린 애가정말….”“엄마….”여울이 울음을 터뜨렸다.여름은 붉어진 눈으로 여울을 노려보았다.
하준은 원래 거의 잔병치레가 없는 편이었는데 이번에는 완전히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다음 날 아침 7시.여울은 아직 잠들어 있었지만 여름은 일찍 일어나 아이들 밥 먹이는 게 습관이 되어 있는 지라 이미 일어나 아침 준비를 시작했다.‘오랜만에 같이 잤는데 아침은 맛있게 먹여야지.’거실을 지날 때 여름은 최대한 소파에 누워있는 형체를 무시하고 지나갔다.“쿨럭쿨럭!”하준이 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은 못 들은 척 하고 냉장고에 가서 호박을 꺼냈다.“나 감기 걸렸어.”하준이 주방 문 앞에서 다 죽어가는 소리를 했다.여름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쳐다도 보지 않았다. 어젯밤 그 민망한 일을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발길질이 나갈 판이었으니 이만하면 잘 참고 있는 셈이었다.“나 감기 걸렸다니까.”하준이 여름에게 다가오더니 가만가만하게 말했다.“당신 감기 걸린 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여름이 획 돌아서며 눈을 쌩그랗게 뜨고 하준을 노려봤다. 얼굴은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그 발그레한 볼을 보고 있자니 하준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진심이 튀어나오고 말았다.“어젯밤에 당신 목욕하는 걸 봐서 그러잖아. 그걸 보고 나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찬물로 샤워를 했다고. 그랬더니 감기 걸렸어.”성인이라면 그 상황에서 찬물로 샤워를 했다는 게 무슨 뜻인지 다 알았다. 그러나 부끄러워하고 앉아 있을 계재가 아니었다.“얼굴도 두꺼워! 누가 밤에 남의 방에 그렇게 멋대로 들어오래?”“이불도 줬으면서…. 추웠다니까. 게다가 누가 그렇게 문을 다 열어놓고 샤워를 하냐?”“애가 밖에 혼자 있는데 어떻게 문을 닫냐?”“……”하준은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한껏 깊어진 눈으로 가만히 여름을 들여다 봤다.함께 지내봤더니 여름이 얼마나 세심한지 알게 된 것이다.‘엄청 세세한 데까지 세심하게 생각을 하네. 애한테 생선을 주면서 가시도 제대로 안 발라서 목에 걸리게 만드는 지안이랑 다르게.강여름이 엄마가 된다면 좋은 엄마가 되겠어.’“왜 사람을 그렇게 쳐다
“저기요, 그건 그냥 기본 상식이거든요? 속 버려도 상관 없으면 지금 바로 약 가져다 줄게”.여름은 한없이 뻔뻔한 하준의 두꺼운 얼굴에 어이가 없어졌다.“나한테 관심 있다는 걸 인정하기가 그렇게 어렵냐?”하준이 끝까지 질척거렸다.“그래서 내가 관심 있다고 인정을 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저기요, 그쪽이 곧 결혼한다는 건 온 세상이 다 알거든요. 최하준 회장님께서 나 같은 여자 때문에 수십 년을 마음에 담았던 소꿉친구 약혼녀를 버리겠다는 말씀은 아니시겠죠?”여름은 한껏 비꼬는 말을 늘어놓고는 주방으로 들어갔다.하준은 아무 말 없이 여름이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자신이 여름에게 어느 정도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것이 지안에 대한 마음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어젯밤 벌어진 일련의 사건으로 하준은 지안에 대한 생각이 조금 흔들리고 말았다.‘지안이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착하고 배려심 깊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어. 반면 강여름은 내 생각처럼 그렇게 못된 인간이 아닌지도 몰라.’곧 심심한 된장국과 함께 상이 차려졌다.하준은 몇 분도 되지 않아서 된장국과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그냥 평범하기 짝이 없는 된장국일 뿐이었는데 여름의 손을 거치니 그렇게 맛이 있을 수가 없었다.여름의 집에서는 언제라도 입맛이 도는 것 같았다.밥을 먹고 나니 여름이 따뜻한 물과 감기약을 한 포 내밀었다.“물에 타서 주면 안 돼?”하준이 꼼짝도 하기 싫어하는 어린애처럼 어리광을 부렸다.“백지안 전화번호 뭐야? 내가 전화해서 당장 와서 타주라고 할 게.”여름은 갈수록 한 술 더 뜨는 인간에게 휴대 전화를 내밀었다. “……”하준은 조용히 일어나서 약을 탔다. 핏기 가신 얼굴이 더욱 불쌍하게 보였다.20분쯤 지났을까, 침실에서 여울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여름은 후다닥 달려갔다. 곧 여울이 울음을 그쳤는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하준이 가서 보니 침대 위에서 여름이 여울의 머리를 땋아주고 있었다. 여울은 공주님처럼 귀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