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은 크게 상처가 되는 말이 아니지만 지극히 모욕적이었다.“곽동건 씨, 지금 제가 멍청하다고 말한 거예요?”남자는 ‘알면서 왜 굴욕을 자초하느냐’는 눈빛을 던지면서도 능구렁이처럼 시치미를 뗐다.“아니요.”진유라는 원래 무엇을 해도 상관없었고, 방탈출은 순전히 무작위로 찍은 것이다. 하지만 승부욕이 발동한 그녀는 이 시각 반드시 이 게임을 해야 했다. 곽동건이야 원래 목적이 진유라와 데이트하는 것이기 때문에 뭘 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방탈출이 있는 3층에 도착한 후 진유라가 곽동건에게 물었다.“뭐가 제일 무서워요?”곽동건은 가게 입구의 포스터를 훑어보고는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귀신이요.”“그럼, 우리 공포 테마를 골라요.”그녀는 점원이 건네주는 팸플릿을 받아들고 말했다.“빨리 봐요. 어떤 걸 좋아해요? 우리 가장 무서운 걸로 해요.”곽동건은 으스스하고 무서운 화면들을 보고 말했다.“일부러 그랬죠?”“당신은 몰라요. 이래야 체험감이 있어요. 아니면 집의 뒷마당을 구경하는 것과 뭐가 달라요?”진유라는 입만 열면 뻥쳤다. 속으로는 ‘한 번 죽어봐라’고 생각하면서 입으로는 다른 말을 했다.“무서워하지 말아요. 제가 있잖아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담대해서 ‘진대담’이라는 별명이 있었어요. 저만 믿으세요.”말하고 나서 그녀는 곽동건의 팔을 툭 쳤다.“...”방탈출을 해본 적이 없는 진유라는 이 시각 흥미진진하게 팸플릿 내용을 연구하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이 청춘 드라마를 볼 때, 그녀는 혼자 공포영화를 봤고 심지어 불을 끄고 보는 것을 좋아했다.다만 매번 문과 창문을 꼭꼭 닫고 커튼을 치고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쓴 채 머리만 내밀고도 무서워서 벌벌 떨었다. 즉 담력이 없으면서 놀기 좋아했다.그녀는 그 중 한 페이지에 시선이 머물더니 흥분하며 곽동건에게 물었다.“우리 영혼결혼식 할래요?”남자는 눈살을 찌푸렸다.“불길해요. 다른 거로 바꿔요.”진유라는 너무 싫다는 듯 눈을 흘기며 혀를 찼다.“미신이에요.”그러면서도 한 페
진유라는 급히 곽동건을 끌고 쫓아갔다.“빨리 따라와요.”남자의 시야에는 출렁이는 인파만 보였고, 그 속에서 낯익은 얼굴은 발견하지 못했다.“누굴 봤는데요?”“공씨 내연녀의 도박꾼 아버지요.”이 호칭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곽동건은 한참 후에야 그녀가 누구를 말하는지 알아차리고 어이없는 듯 말했다.“내연녀라니요? 태준 씨는 저 여자와 그런 사이 아니에요.”“그건 박태준이 그 여자에게 곁을 주지 않아 되고 싶어도 못 된 거예요. 저랑 내기할래요? 그 여자가 박태준에게 그런 뜻이 없다면 제가 방탈출을 100번 같이 해줄게요.”위장을 아무리 잘해도 눈빛은 속일 수 없다.“...”“내연녀 아버지는...”남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을 띠자 진유라는 짜증을 내며 말을 바꾸었다.“그래요, 공예지, 공예지라고 부를게요. 그 여자 아버지는 인정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는 도박꾼이에요. 딸을 완전히 현금 인출기로 생각하고, 돈을 주지 않으면 때리고 욕하고 어떤 듣기 싫은 말도 다 하는데 지금 앞을 봐요...”그녀는 곽동건이 공예지 아버지를 모른다는 것이 생각나서 손가락으로 앞쪽을 가리켰다.“저기 왼손으로 여자애 손을 잡고 오른손에 어린이 용품을 가득 든 저 남자, 저 사랑이 넘치는 표정을 봐요. 저건 사람을 보는 게 아니라 보물 금덩이를 보는 눈빛이 아닌가요? 쥐면 부서질까, 놓으면 날아갈까 노심초사하는 모습이 틀림없이 부녀 사이에요.”진유라가 이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를 볼 때 이렇기 때문이다.“저 사람이 도박 때문에 친딸에게 폭언을 퍼붓고 두들겨 죽이려 한다면 믿어져요?”그녀는 말하면서 사진을 찍어 신은지에게 보냈다. 그러고는 문자를 입력하느라 손가락이 바삐 움직였다.[은지야, 내가 공예지 그 도박꾼 아버지를 봤어. 아이를 데리고 쇼핑 중인데, 애를 굉장히 애지중지해. 공예지를 대하는 태도와 딴판이야. 공예지 그 여자가 이 사람 친딸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야.]신은지는 그때 박태준과 함께 신당동으로 돌아가는 차에 있
박태준은 신은지가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왜?”그녀는 진유라가 공예지의 아버지께서 여자애를 데리고 쇼핑을 한 것을 쇼핑몰에서 목격했다는 이야기를 했다."나는 밀크티 한 잔 사러 갈 테니 가서 봐."공예지는 이미 그들을 알아차리고 절뚝거리며 그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박태준은 신은지를 잡아당겨 그녀의 손을 맞잡고 말했다."이따가 같이 사러 갈게.""공예지 씨가 특별히 당신을 부른 건 아마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서일 거야.""듣지 못할 건 없지."그가 이곳에 온 것은 공예지를 안정시키고 그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가짜라는 사실이 확실해질 때까지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공예지가 걸어왔다. 그녀는 방금 하마터면 부딪힐 뻔했던 충격에서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온몸이 통제되지 않고 떨리고 있다. 눈에는 방황과 근심 걱정이 가득했다."박 대표님, 방금..."대략적인 상황은 방금 전화 통화에서 이미 들었기 때문에 그가 물었다."차 번호는 봤어요?""차가 너무 빨라서 바로 저를 향해 돌진했어요.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피할 생각에 제대로 보지 못했어요."평소에 아무리 어른스럽게 행동해도, 결국에는 4학년 학생일 뿐이기 때문에 이런 생사가 걸린 상황이 닥치면 여전히 두려웠다."그쪽 사람이 확실해요?"공예지가 대답했다."확실하지는 않지만 그 사람이 차를 몰고 나에게 돌진해 왔을 때 침착한 모습이었고 절대 단순한 사고는 아니었어요."공예지의 눈시울이 붉어졌고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지경이었다."제가 이렇게 오랫동안 진전이 없는 것을 보고 경고를 하러 온 것 같아요.""이미 저를 의심하기 시작한 걸 수도 있고요."그녀는 눈시울을 붉혔다.그녀가 말하는 동안 박태준의 시선은 줄곧 그녀에게 있었고 그녀의 얼굴에 있는 작은 감정 변화도 놓치지 않았다.박태준은 고개를 돌려 신은지를 바라보았다.그가 공예지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녀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녀와 손을 잡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녀의 존재
신은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냥 가버렸다. 그를 기다리거나 그가 어떻게 처리하는지 볼 마음이 전혀 없었다. 떠날 때 그가 손에 들고 있던 밀크티도 가져갔다.하이힐 소리는 멀어져 갔지만 박태준의 텅 빈 손은 여전히 허공에 있었다.공예지는 손으로 땅을 짚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관절 부위의 상처는 그녀의 움직임에 의해 다시 벌어져서 새빨간 피가 그녀의 하얀 종아리를 따라 흘러내렸다.옆에 지나가던 사람이 입을 열었다."아이고, 여자애가 이렇게 피를 많이 흘려서 쓰나? 정말 나쁜 짓을 했네. 빨리 사람을 데리고 병원에 가서 붕대를 감아주지 않고 뭐해? 남자 친구가 맞긴 해?"박태준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입만 열면 허튼소리를 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다만 그가 말하기도 전에, 공예지가 먼저 소리를 내어 설명했다."아주머니, 이분은 제 남자 친구가 아니에요."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구급차라도 불러드려요?""괜찮아요, 대표님. 이 까짓 상처는 괜찮아요."그녀는 휴지로 종아리의 핏자국을 닦아냈다. 그러자 다리의 오래된 흉터도 드러났다.공예지는 입술을 오므리더니 그를 향해 웃으면서 말했다. 평소의 성격을 되찾은 듯했다."아까는 제가 너무 무서워서 은지 씨의 오해를 산 것 같아요. 미안해요."박태준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서 차를 향해 걸어갔다.차 문을 여니 신은지가 뒷좌석에 앉아 밀크티를 마시고 있었다. 소리를 들은 그녀가눈동자를 젖히면서 말했다."공예지 씨... 전예은 씨랑 좀 닮지 않았어?"그녀는 고개를 돌려 공예지 쪽을 바라보았다. 공예지는 이미 가서 택시를 잡았는데 아직 바짓가랑이를 내리지 않아서 상처가 보였다. 상처의 피는 멈췄지만 여전히 매우 충격적이었다.신은지는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그래? 자세히 보지 않아서 모르겠어."박태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신은지는 웃는 듯 웃지 않는 듯 느릿느릿 빨대를 물었다."그렇구나, 나는
"..."신은지는 말을 마치고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 천천히 고개를 숙여 식사를 하려고 했다. 스테이크 하나를 썰었는데 미처 입에 넣기도 전에 박태준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일부러 그런 거야?""네가 그랬잖아. 다 된다고."그녀는 턱으로 박태준 앞에 놓인 금속 식기를 가리키며 말했다."매번 물어보면 다 된다고, 아무렇게나 해달라고 하는 게 너무 싫었다. 밥 먹는 열정은 반쯤 식어버리는 것 같았다.박태준은 몸을 기울이더니 그녀의 손을 잡고 방금 잘라낸 스테이크를 한입에 먹어 치웠다."..."식사를 마치자 하늘은 완전히 어두워졌고 밤이 된 온천 펜션은 낮보다 더 아련하게 아름다웠다. 나무에 걸려있는 여러 가지 색깔의 등불, 잔디밭에는 해파리 전등이 가득 꽂혀있어 낭만이 가득했다.박태준은 미리 스위트룸을 예약했고 또 한적한 곳에 온천탕을 예약해 두었다. 그러고는 식사를 하기 전에 웨이터를 보내 배치해 두었다.만약 두 사람이 함께 보낸 추억이 조금이라도 더 많다면, 언젠가 정말 치매가 되더라도, 모두 잊어버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정말로 있었던 일은, 분명 약간이라도 인상이 남아 있을 것이었다.‘나중에 이렇게 로맨틱한 배치를 보면 깜짝 놀랄 거야.'박태준은 이미 머릿속으로 두 사람의 오늘 밤 낭만적인 데이트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도중에 성가신 사람이 튀어나올 줄 생각지도 못했다. 두 사람이 얼마 가지도 않았는데 뒤에서 여자의 흥분된 목소리가 들려왔다."은지야!""..."진유라였다.박태준은 이제 그 소리만 들어도 조건반사로 머리가 아팠다. 거의 본능적인 반응이 되어 버렸다.진유라는 이미 수영복으로 갈아입은 채 뒤에서 달려들어 손을 뻗어 신은지의 어깨를 감쌌다."가자, 가자. 제일 잘생긴 남자가 많은 연못을 찾아서 온천을 즐기자. 뒤에 있는 두 남자가 알아서 하라고 해."그녀는 잘생긴 남자를 보는 건 좋아했지만 잘생긴 남자를 갖고 싶진 않았다."..."박태준의 안색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졌다.정성껏 꾸민 로맨틱한 데
스물몇 명을 부른 건 사실이지만 그녀는 당시 어떤 선을 넘는 일도 하지 않았고 손도 대지 않은 채 내내 단정하게 앉아서 노래만 불렀었다.그러나 박태준이 계속 쳐다보니 신은지는 약간 찔렸는지 자기도 모르게 건조해진 입술을 핥았다."응."박태준은 그녀를 자기 옆으로 끌어당기더니 말했다."내가 지금 머리가 좀 어지러워서 방으로 돌아가서 이 문제에 대해 잘 얘기하도록 하자."옆에 있던 진유라는 곽동건의 팔을 비틀고 있었다. 그의 근육이 너무 단단해서 꼬인 손이 시큰거렸지만 상대방은 눈살도 찌푸리지 않았다."왜 은지까지 말해서 이 난리를 피워요? 지금 이간질하는 거 알아요?""미안해요, 직업병이 도져서 습관적으로 진실대로 말했어요.""..."차라리 설명하지 않는 게 더 나았다. 설명하면 할수록 더 복잡해졌다.박태준이 신은지를 끌고 가려 하자 진유라가 급히 해명했다."그 사람들은 모두 제가 불렀어요. 스물몇 명 모두 제 옆에 앉았고요."이 일은 그녀가 저지른 것이니 박태준과 신은지가 이 일로 싸우게 해서는 안 된다.박태준은 그녀를 한 번 쳐다보고는 어두웠던 안색이 좀 풀렸다.진유라가 짜증 났지만 그래도 신은지에게 잘해줬기에 그는 그녀를 계속 참아줬다."은지야."나유성은 한 발 앞으로 나와서 말했다."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그는 가운을 걸쳤지만 끈을 매지 않았기에 앞가슴과 복부, 섹시한 라인이 다 드러났고 늘씬하고 힘센 다리까지 숨김없이 드러났다.박태준이 한 걸음 앞으로 나오자 큰 체구의 두 사람이 사이에 있는 신은지를 가려 신은지의 시선을 꽁꽁 막아버렸다.나유성은 말랐지만 에잇 팩을 가지고 있다.그는 웃으며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신은지는 박태준의 손에 이끌려 호텔 쪽으로 향하던 중 진유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방금 온천 옆에 있는 장식이나 디저트들, 다 태준 씨가 특별히 사람을 시켜서 한 거야. 정말 멍청하기도 하지. 널 위해서 그렇게 많이 했는데도 말도 안 하고..."진유라도 전에 온천 펜션에 와 본 적이 있었는데 그것
신은지는 눈을 내리깔고 그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을 보더니, 고개를 들면서 퉁명스럽게 박태준을 노려보았다."내가 너를 믿지 않았다면, 너는 지금 이미 이불을 끌어안고 복도에서 자고 있었을 거야."박태준이 찾은 포토그래퍼와 메이크업 담당 선생님이 이미 문 앞에 있었고 그는 문을 열고 사람들을 들어오게 했다.신은지는 피부 베이스가 좋은 데다 박태준은 사진과 실제 사람의 차이가 크지 않아야 한다고 요구했기 때문에 화장, 스타일링, 옷 고르기에 이르기까지 전체 과정이 30분을 넘지 않았다.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됐고 두 사람은 전문 모델은 아니지만 비주얼은 물론 몸매까지 좋아 이상한 각도만 아니면 어떻게 찍어도 예뻤다."아주 좋아요. 침대에서 장난치는 사진 몇 장만 더 찍으면 촬영 끝이에요."신은지가 침대에 앉자마자 사람이 굳어졌다.이 침대...흔들린다.이 침대는 커플을 위한 움직이는 침대였고 그녀는 마침내 왜 스위트룸으로 불리는지 알게 되었다.사진작가는 고개를 숙인 채 찍었던 사진을 뒤적이다가 침대 옆에 가만히 앉아 있는 신은지를 보고 말했다."신부분, 긴장하지 마세요."신은지는 고개를 돌려 박태준을 보았지만 남자는 옷을 정리하고 있어서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그녀는 헛기침을 두 번 하면서 그에게 암시했다.박태준이 눈을 들어 보니 신은지는 몸을 굳힌 채 움직이지 않았고 눈빛은 끊임없이 아래 침대를 가리켰다.그녀의 뜻을 알아챈 박태준은 빙그레 웃으면서 그녀를 놀리려고 했지만 그녀를 화나게 할까 봐 화를 내며 웃음을 참았다."오늘 촬영은 여기까지 하죠. 지금 저희가 입고 있는 옷은 내일 스튜디오에 보내드리도록 할게요.""알겠습니다, 박 대표님."곧 방 안에는 신은지와 박태준 두 사람만 남았고 그가 다가가 그녀의 옆자리에 앉자 그의 움직임에 따라 침대가 오르락내리락했다. 신은지의 몸도 통제되지 않고 몇 번이고 움직였다."마음에 들어?"남자의 숨결이 감돌았고 외부인은 없어졌기 때문에 신은지의 몸은 이미 완전히 풀린 상태였다. 그녀는 두
신은지의 동작이 멈추자 지수호는 궁금증을 풀지 못해서 물었다."왜요?"그녀는 대답 대신 조금 가까이 다가가 내색하지 않고 숨을 들이마셨지만, 어떤 고전적인 오드콜로뉴 냄새만 맡았다.신은지는 코를 비볐는데 자신이 잘못 맡았는지, 어디서 그 향을 맡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잔을 받아든 그녀는 아무 핑계를 대며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야, 아침에 아침을 거른 탓인지 저혈당이 와서 방금 잠깐 어지러웠어."그녀는 서랍에서 사탕을 꺼내 입에 물었다. 그때 그녀는 지수호가 자기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엄밀히 말하면 그녀의 손에 있는 사탕을 응시했다."..."상대하고 싶지 않았지만 너무 군침이 돌아 하는 그의 모습에 신은지가 물었다."사탕이 먹고 싶어요?"그녀는 자기가 잘못 이해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보통 남자들은 단 걸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좋아한다고 해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어린애처럼 남을 걱정할 정도는 아니지만.""응."지수호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이 사탕은 이전 동료가 준 것이기에 오직 한 알뿐이었다. 신은지는 지수호를 보고는 다시 그녀의 입술에 거의 닿을 것 같은 사탕을 보았고 남자의 간절한 눈빛에도 망설임 없이 자신의 입에 넣었다."휴가를 30분 줄 테니 사 오세요."그의 신분으로 보아, 박물관을 찾은 건 이력서를 쓰기 위해서였을 것이었다.신은지 역시 그에게 무엇을 시킬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매우 시원스럽게 허락했고 심지어 그가 줄곧 자기 앞에 얼씬거리지 않기를 바랄 정도로 그녀는 일하는 데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지수호는 신은지의 불룩한 한쪽 뺨을 보더니 재미있다는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사탕을 사러 돌아섰다.20분 후, 남자는 돌아와서 신은지에게 아침 식사를 가져다주었다."무엇을 좋아하는지 몰라서 그냥 좀 샀습니다.""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전 보통 아침밥을 안 먹는 편이어서요."그녀는 단지 낯선 사람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아서 아무렇게나 말한 것이었다. 박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고연우는 짜증 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던지더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가세요. 나중에 송씨 아주머니한테 작업복 하나 달라고 하세요.”“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하린은 우유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예전에 마사지도 배운 적 있는데, 제가...”“그만 나가.” 고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피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우유가 쏟아지며 더럽혀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는 얼굴은 굳어진 채 입술을 오므렸다. 한참 후에야 한 마디 내뱉었다. “사모님께서 보낸 겁니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하린은 고연우의 차가운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 정말로 사모님께 저를 보내셨습니다.”“나가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서재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린은 금수저 남편을 찾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취직했다. 이를 위해 매니저에게 봉투까지 건넸지만 고연우의 사늘한 태도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서재를 나오자마자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모님...”하린은 갑자기 발걸음 멈추더니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었던 그녀는 사모님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도련님께서 드시지 않았어요...”비록 정민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하린은 괜히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마침 정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번 더 가져다주세요.”하린은 정민아의 말에 담긴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재벌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걸까? 설사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돈이면 충분할 텐데,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겨 상속 분배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 어쩔 생각인지.’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송씨 아주머니한테 익숙해졌는지 저를 좀 꺼리시는 것 같아요. 아
다음 날.정민아와 사연희는 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야...”주소월이었다. 사연희는 정민아의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주소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절친이라도 남의 가정사에 깊이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초대장 몇 개 빼놓고 못 보낸 것 같은데, 금방 보내고 올게. 쇼에 관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주소월을 흘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정민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소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 충분히 더 이상 정씨 가문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주소월이 여전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겠니?” 정민아가 거절할까 봐 주소월은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가 쇼를 열잖아? 오늘 밤 연회에 너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잠재 고객을 몇 명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어.”“지금 그 무리에서 잠재 고객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이세요?”그녀와 최민영의 갈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못한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반면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좋은 사람은 고아 때문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소월은 정민아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아야, 미안해. 엄마가 너를 데려오긴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너한테 이렇게 상처만 줬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를 정씨 가문으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또... 그 미친놈으로부터 구해줘서 고마워요.”마치 세월의 흔적을 덮은 한 자루의 칼처럼 서서히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민아야...” 주소월은 울먹거리며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그
정민아는 문을 열고 지친 몸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갈아신던 중 슬쩍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전화드렸잖아요. 저녁 먹고 온다고,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렸어요?”송씨 아주머니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고연우라는 말을 듣자 정민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렇군요.”“아가씨...”송씨 아주머니가 망설이며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제가요?” 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왜요?”“도련님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는데... 두 분 혹시 싸우신 거 아닌가요?”“그 사람이 기분이 안 좋다고 제가 달래줘야 하나요? 그럼 왕자님, 저녁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정민아는 피식 웃더니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먹든 안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굶으면 되죠.”송씨 아주머니는 시선을 정민아 뒤쪽으로 옮기더니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정민아가 뒤돌아보자 고연우는 난간에 기댄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려 있었고 옷자락은 허리선에 맞춰 깔끔하게 넣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를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배경처럼 흐릿해 보이게 만들었다.고연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사실 그는 조금 더 튕기고 싶었지만 계속 자존심을 부리다 이 무심한 여자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정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먹었어.”“네가 장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서 해결해 줬더니, 겨우 도시락 하나 사주는 거냐? 정민아, 너 정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 없어.”정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하자 덜 말려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치우치며 하얗고 맑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물방울까지 맺혀있어 고연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그 어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방안에 가득 찬 정민아의 향기가 그림자마냥 고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탓에 고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주먹을 말아쥐었다.술기운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고혹적인 자세 때문인지 고연우는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에 정민아는 문을 열고는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내가 불편해지면서까지 다른 사람한테 맞추긴 싫거든. 그러니까 일단 최민영부터 죽이고 와서 사랑 타령해.”“... 다른 건 안 될까?”“다른 거 뭐?”정민아의 산만한 시선이 고연우의 몸에 머물렀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보는 듯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너한테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뭐 다른 게 있긴 해?”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말임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웃긴 건 정민아의 말에 고연우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봐도 돈과 권력 외에는 정민아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몸에 고연우는 고개를 들더니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기생오라비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어.”정민아가 혹여 듣지 못할까 봐 고연우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어려서부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던 고연우는 저에게도 이렇게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필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하지만 정민아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얼굴 자랑 말고 가서 약이나 좀 사지 그래? 내가 너에 대한 흥미는 약의 자극을 받아야만 생길 것 같거든.”머리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아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도 입안에는 분노 가득한 험한 말들이 서러움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넌 앞으로 그냥 말을 하지 마.”
고연우의 질문에 정민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대학 때 후배.”그 말에 고연우는 아까 정민아를 보던 임우빈의 이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물었다.“쟤가 너 좋아해?”“응.”“...”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을 해버리는 정민아에 말문이 막혀버린 고연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너 저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 좋아했었어?”정민아의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임우빈한테 유난히 관대한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민아 앞에서 주책맞게 떠들어 댄 게 자신이었다면 정민아는 진작에 제 머리를 비틀어 화분으로 삼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정민아는 언짢아 보이는 고연우를 보며 말했다.“기생오라비 같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턱선이 당신처럼 뚜렷하진 못해 그래서. 그리고 뒤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격 떨어지는 일이야, 고연우 도련님.”고연우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올라가는 억양을 붙인 게 아무리 봐도 조롱 같았던 고연우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턱선이 나보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려서 그렇다고? 그럼 뭐 나는 늙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내 앞에서 내 아내를 탐내는 데 내가 얼마나 격을 차려야 한다는 거지? 난...”고연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참아냈다.“곧 이혼할 건데 뭘.”“꿈 깨.”혈관 속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느낌에 원래도 나빴던 기분이 더 완벽히 잡쳐버린 고연우는 정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이혼에 합의 안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어.”고연우의 말에 정민아가 문고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그럼 아직 살아있으니까 납골함이라도 직접 골라. 귀신 돼서도 네가 직접 고른 집에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겠지.”“정민아, 너...”고연우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문이 “펑”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탓에 하마터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고연우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누가 이딴 식으로 짜증을 내고 들
말을 안 하고 앉아있는 정민아에 기사는 정민아가 슬퍼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낱 외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답답한지 기사는 의자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진심으로 좋아하면 시험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야죠. 이런 식이면 남자는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남자들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여자의 유혹을 당해낼 남자도 없어요.”“저도 남자예요, 믿어도 좋아요.”끊임없이 말하는 기사가 귀찮았는지 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응, 믿으니까 출발해 빨리.”정민아가 고연우를 시험하는 건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 씨 집안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 보니 이 길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임우빈은 한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려 정민아를 바라보며 그 나이대 특유의 당찬 표정을 하고 말했다.“저렇게 양옆에 여자나 끼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홀려대는 남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누나 관심을 받을 자격도 없죠. 저는 어때요?”임우빈은 제 이두근을 자랑하며 말했다.“젊고 잘생긴 데다가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일편단심이에요. 누나 말곤 아무도 안 봐요, 길가는 암컷 강아지한테 눈길 안 줄 자신 있는데.”“... 너희 엄마는 네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여자를 집안 며느리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 아니?”정민아의 말에 임우빈은 툴툴대며 대답했다.“많이는 아니죠, 고작 세 살인데. 오버는 하지 말죠. 그리고 내가 정말 누나를 집에 데려가면 우리 엄마는 엄청 좋아할걸요. 적어도 앞으로 두 세대는 미모는 보장할 수 있으니까.”임우빈은 정민아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1학년 때 운동장에서 정민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정민아가 퇴학을 해버리는 탓에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정민아가 있다는 경인시까지 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여기서 취직
사연희는 잔뜩 감동한 얼굴로 정민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우리 가게 때문에 민아 씨만 고생했네요.”안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노 대표님의 생각을 바꿀만한 둘레의 허벅지를 찾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시간이 촉박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노 대표님이 술을 깨기 위한 시간이었다.사연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정민아는 해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냥 사연희를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그때 공민찬이 나오면서 말했다.“고 대표님, 방금 룸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사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고연우는 공민찬을 흘겨보며 언짢은 듯 말했다.“너만 입 달렸어?”“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공민찬은 사과 하나는 빨리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사모님께 말씀은 하셨어요?”“...”“대표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사모님 마음 못 돌려요. 사모님이 최민영 씨한테 괴롭힘 당할까 봐 문 앞에 사람까지 세워서 지키시면 뭐해요, 이런 건 대표님이 말씀 안 하시면 사모님은 영영 모르실 텐데요. 그럼 감동도 못 받으실 테고 사모님이 감동하지 못하시면...”그런 공민찬을 보던 사연희는 주먹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민아에게 귓속말을 했다.“안 되겠어,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밖으로 나가기 전 사연희는 한 번 더 공민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사연희가 만약 공민찬처럼 말 많고 사실만 얘기하며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비서를 뒀다면 얼마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을 텐데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고연우를 보니 허벅지 대표님의 성격은 꽤 차분해 보였다.“입 다물어.”그 차분한 고연우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공민찬 손에 들려있던 차 키를 뺏어 들고는 정민아를 보며 말했다.“가자.”“응.”정민아의 대답을 들은 고연우의 발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참 만에 땅에 닿았다.정민아의 조롱 섞인 거절이거나 분노는 너무나 익숙하고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