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초... 30초... 1분...방 안은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조용했고, 그녀가 주시하고 있는 곳에서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공예지가 막 긴장을 풀려고 할 때 갑자기 ‘쾅쾅’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누구야?”그녀는 사진을 넣은 후 문 뒤의 호신용 쇠몽둥이를 집어들고 경계하는 표정으로 문을 노려보았다.“공예지 씨.”이웃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공예지는 급히 쇠몽둥이를 내려놓고 문을 열었다. 이웃 중년 여인은 짙은 시골 말투가 섞인 표준어를 썼다.“예지 씨, 우리 여기 도둑이 들었어요. 빨리 뭐 잃어버린 것이 없는지 봐요.”“네?”“몇 집에 도둑이 들었어요. 멍해 있지 말고 빨리 확인해 봐요. 이따 경찰한테 말해야 하니까.”공예지는 집에 귀중품이 없다. 그녀가 유일하게 걱정하는 것은 도둑이 아니라...잠시 후 도착한 경찰은 아무도 잃어버린 물건이 없어 진술만 받고 가버렸다....다음 날 신은지가 잠에서 깨니 방에는 또 그녀 혼자 있었다. 박태준은 얼마 전 출국하는 바람에 일이 잔뜩 쌓여 돌아온 후부터 줄곧 아침 일찍 나가고 저녁 늦게 들어오는 바쁜 일상을 보냈다.그녀는 이미 차가워진 침대 옆자리를 만지며 얼굴을 베개에 파묻은 채 한참 꾸물거리다가 결국 배고픔을 견딜 수 없어서 일어나 화장실에 세수하러 갔다.화장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안에서 ‘쿵’하고 뭔가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태준이니?”그녀는 초조한 나머지 프라이버시고 뭐고 직접 문을 열고 들어갔다. 욕실 안의 광경을 본 신은지는 잠시 멍해졌다가 급히 뛰어갔다.“어쩌다 넘어졌어?”그녀는 손을 뻗었지만 2차 피해가 발생할까 봐 감히 부축하지 못했다.박태준의 성격으로 볼 때, 일어나지 못하는 게 아니라면 그녀가 소리쳤을 때 이미 일어났을 것이다.하지만 신은지가 달려와 옆에 웅크리고 앉을 때까지도 그는 미간을 구긴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방금 진영웅에게 문자를 답장하면서 발밑을 보지 않아 부주의로 미끄러졌어.”신은지는 그의 팔을 잡았지만
공예지는 탁자 위에 놓인 손을 꽉 맞잡았는데, 얼굴에 갈등하고 주저하는 기색이 역력했다.“은지 씨, 직접 박 대표님께 물어보세요. 그때 마사지는 우연히 마주쳤는데 괴로워하시길래 해드린 것뿐이에요. 마침 제가 이전에 선생님한테 혈을 누르는 방법을 배운 게 있어서 도와드렸어요. 하지만 박 대표님의 건강 상태가 어떤지는 잘 몰라요.”“그래요?”신은지는 소리를 길게 끌었다. 그녀가 공예지를 찾은 원인은, 우선 그녀의 직업 때문이다. 그리고 박태준에게 마사지를 해주었으니 분명 속사정을 알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럼 오늘 저녁에 다시 물어볼게요.”그녀는 몹시 실망한 모습이었고 웃음조차 억지로 짜낸 느낌이었다.이를 본 공예지가 부러운 듯 말했다.“두 분은 사이가 참 좋네요.”“네.”신은지는 그녀를 향해 씩 웃고 대화를 이어가지 않았다. 건강 문제 외에 그녀는 공예지와 박태준에 관한 어떤 얘기도 하고 싶지 않았다.커피숍에서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그녀는 숟가락으로 커피를 저은 후 위에 있던 크림이 짙은 갈색 액체에 천천히 녹아드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공예지의 입에서 원하는 정보를 캐낼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었다.“정말 부럽네요.”그녀의 말에서 답답한 마음을 읽은 신은지가 무심결에 물었다.“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네.”공예지는 연정을 품은 소녀의 수줍음과 달콤함이 가득 담긴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그 사람은 아직 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기다리고 있어요.”그녀는 신은지를 보면서 이 말을 했다. 여자의 직감, 그리고 그동안 진유라한테 들은 요사하고 천박한 년의 특징을 떠올리던 그녀는 저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했다.“...그러면 사람을 바꿔서 좋아해봐요.”“바꿀 수 없어요. 좋아한 지 오래 됐거든요.”그녀가 오랫동안 좋아했다는 말을 듣고 신은지는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이 박태준’이라는 의심을 떨쳐냈다. 그런데 공예지가 이어서 말했다.“훌륭한 사람이고, 저를 구해준 적도 있어요.”“...”친하지 않
신은지는 손으로 다가오는 남자의 얼굴을 막은 후 입꼬리를 올리며 헛웃음을 지었다.“내가 공예지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알고 싶지 않아?”박태준은 관심이 없었다.오랫동안 잠자리를 하지 않은 탓인지, 아침에 신은지가 그를 침대로 부축해 갈 때 가운의 끈이 풀어진 것을 본 그는 오전 내내 마음이 뒤숭숭했다. 그녀의 쇄골 아래 옷섶에 가려져서 보일랑 말랑한 뽀얀 피부가 자꾸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탓에 오전에 처리한 업무가 평소에 한 시간에 처리한 것보다도 적었다.워낙 주말 야근은 빨리 끝내고 빨리 퇴근하는 게 정석인데, 오전이 다 가도록 절반도 처리하지 못했다. 진영웅도 은근히 화나지만 말은 못하는 눈빛으로 그를 몇 번이나 쳐다보았다.그러나 ‘빨리 내게 물어봐’라고 말하는 듯한 신은지의 반짝반짝 빛나는, 기대 어린 눈빛을 보고 그는 눈치 있게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줬다.“그 여자와 무슨 얘기했는데?”그녀가 무슨 정보를 알아내서 한시라도 빨리 공유하려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네가 아픈 거 아니냐고 물었더니 뭐라고 대답했는지 알아?”공예지한테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해서 박태준을 떠볼 생각이다.그녀의 허리를 감싼 박태준의 손이 굳어졌고 머리와 몸이 따로 놀았다. 머리로는 어떻게 감쪽같이 숨길까 생각하고 있는데, 입으로는 이미 말이 튀어나왔다.“뭐라 했는데?”간신히 주도권을 잡은 신은지가 어찌 쉽게 그를 놓아주겠는가?“내가 너한테 묻고 있잖아. 네가 먼저 대답해.”“그 여자가 너에게 뭐라 했는지 모르겠지만...”이내 냉정을 되찾은 박태준이 말했다.“은지야, 내가 절대 제 몸을 가지고 장난치지 않을 거니까 나를 믿어. 정말 문제가 있다면 꼭 제대로 치료할 거야. 아직 적인지 벗인지도 모르는데, 그 여자 말을 너무 믿지 마.”그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그녀도 잠시 의구심을 내려놓았다. 어쩌면 정말 그녀가 너무 예민해 잡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원래는 밥 먹은 후 돌아갈 생각이었다. 요즘 너무 바삐 보내서 쉴 때면 침대에서 일어나기 싫고 휴대
이 말은 크게 상처가 되는 말이 아니지만 지극히 모욕적이었다.“곽동건 씨, 지금 제가 멍청하다고 말한 거예요?”남자는 ‘알면서 왜 굴욕을 자초하느냐’는 눈빛을 던지면서도 능구렁이처럼 시치미를 뗐다.“아니요.”진유라는 원래 무엇을 해도 상관없었고, 방탈출은 순전히 무작위로 찍은 것이다. 하지만 승부욕이 발동한 그녀는 이 시각 반드시 이 게임을 해야 했다. 곽동건이야 원래 목적이 진유라와 데이트하는 것이기 때문에 뭘 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방탈출이 있는 3층에 도착한 후 진유라가 곽동건에게 물었다.“뭐가 제일 무서워요?”곽동건은 가게 입구의 포스터를 훑어보고는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귀신이요.”“그럼, 우리 공포 테마를 골라요.”그녀는 점원이 건네주는 팸플릿을 받아들고 말했다.“빨리 봐요. 어떤 걸 좋아해요? 우리 가장 무서운 걸로 해요.”곽동건은 으스스하고 무서운 화면들을 보고 말했다.“일부러 그랬죠?”“당신은 몰라요. 이래야 체험감이 있어요. 아니면 집의 뒷마당을 구경하는 것과 뭐가 달라요?”진유라는 입만 열면 뻥쳤다. 속으로는 ‘한 번 죽어봐라’고 생각하면서 입으로는 다른 말을 했다.“무서워하지 말아요. 제가 있잖아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담대해서 ‘진대담’이라는 별명이 있었어요. 저만 믿으세요.”말하고 나서 그녀는 곽동건의 팔을 툭 쳤다.“...”방탈출을 해본 적이 없는 진유라는 이 시각 흥미진진하게 팸플릿 내용을 연구하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이 청춘 드라마를 볼 때, 그녀는 혼자 공포영화를 봤고 심지어 불을 끄고 보는 것을 좋아했다.다만 매번 문과 창문을 꼭꼭 닫고 커튼을 치고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쓴 채 머리만 내밀고도 무서워서 벌벌 떨었다. 즉 담력이 없으면서 놀기 좋아했다.그녀는 그 중 한 페이지에 시선이 머물더니 흥분하며 곽동건에게 물었다.“우리 영혼결혼식 할래요?”남자는 눈살을 찌푸렸다.“불길해요. 다른 거로 바꿔요.”진유라는 너무 싫다는 듯 눈을 흘기며 혀를 찼다.“미신이에요.”그러면서도 한 페
진유라는 급히 곽동건을 끌고 쫓아갔다.“빨리 따라와요.”남자의 시야에는 출렁이는 인파만 보였고, 그 속에서 낯익은 얼굴은 발견하지 못했다.“누굴 봤는데요?”“공씨 내연녀의 도박꾼 아버지요.”이 호칭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곽동건은 한참 후에야 그녀가 누구를 말하는지 알아차리고 어이없는 듯 말했다.“내연녀라니요? 태준 씨는 저 여자와 그런 사이 아니에요.”“그건 박태준이 그 여자에게 곁을 주지 않아 되고 싶어도 못 된 거예요. 저랑 내기할래요? 그 여자가 박태준에게 그런 뜻이 없다면 제가 방탈출을 100번 같이 해줄게요.”위장을 아무리 잘해도 눈빛은 속일 수 없다.“...”“내연녀 아버지는...”남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을 띠자 진유라는 짜증을 내며 말을 바꾸었다.“그래요, 공예지, 공예지라고 부를게요. 그 여자 아버지는 인정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는 도박꾼이에요. 딸을 완전히 현금 인출기로 생각하고, 돈을 주지 않으면 때리고 욕하고 어떤 듣기 싫은 말도 다 하는데 지금 앞을 봐요...”그녀는 곽동건이 공예지 아버지를 모른다는 것이 생각나서 손가락으로 앞쪽을 가리켰다.“저기 왼손으로 여자애 손을 잡고 오른손에 어린이 용품을 가득 든 저 남자, 저 사랑이 넘치는 표정을 봐요. 저건 사람을 보는 게 아니라 보물 금덩이를 보는 눈빛이 아닌가요? 쥐면 부서질까, 놓으면 날아갈까 노심초사하는 모습이 틀림없이 부녀 사이에요.”진유라가 이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를 볼 때 이렇기 때문이다.“저 사람이 도박 때문에 친딸에게 폭언을 퍼붓고 두들겨 죽이려 한다면 믿어져요?”그녀는 말하면서 사진을 찍어 신은지에게 보냈다. 그러고는 문자를 입력하느라 손가락이 바삐 움직였다.[은지야, 내가 공예지 그 도박꾼 아버지를 봤어. 아이를 데리고 쇼핑 중인데, 애를 굉장히 애지중지해. 공예지를 대하는 태도와 딴판이야. 공예지 그 여자가 이 사람 친딸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야.]신은지는 그때 박태준과 함께 신당동으로 돌아가는 차에 있
박태준은 신은지가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왜?”그녀는 진유라가 공예지의 아버지께서 여자애를 데리고 쇼핑을 한 것을 쇼핑몰에서 목격했다는 이야기를 했다."나는 밀크티 한 잔 사러 갈 테니 가서 봐."공예지는 이미 그들을 알아차리고 절뚝거리며 그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박태준은 신은지를 잡아당겨 그녀의 손을 맞잡고 말했다."이따가 같이 사러 갈게.""공예지 씨가 특별히 당신을 부른 건 아마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서일 거야.""듣지 못할 건 없지."그가 이곳에 온 것은 공예지를 안정시키고 그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가짜라는 사실이 확실해질 때까지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공예지가 걸어왔다. 그녀는 방금 하마터면 부딪힐 뻔했던 충격에서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온몸이 통제되지 않고 떨리고 있다. 눈에는 방황과 근심 걱정이 가득했다."박 대표님, 방금..."대략적인 상황은 방금 전화 통화에서 이미 들었기 때문에 그가 물었다."차 번호는 봤어요?""차가 너무 빨라서 바로 저를 향해 돌진했어요.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피할 생각에 제대로 보지 못했어요."평소에 아무리 어른스럽게 행동해도, 결국에는 4학년 학생일 뿐이기 때문에 이런 생사가 걸린 상황이 닥치면 여전히 두려웠다."그쪽 사람이 확실해요?"공예지가 대답했다."확실하지는 않지만 그 사람이 차를 몰고 나에게 돌진해 왔을 때 침착한 모습이었고 절대 단순한 사고는 아니었어요."공예지의 눈시울이 붉어졌고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지경이었다."제가 이렇게 오랫동안 진전이 없는 것을 보고 경고를 하러 온 것 같아요.""이미 저를 의심하기 시작한 걸 수도 있고요."그녀는 눈시울을 붉혔다.그녀가 말하는 동안 박태준의 시선은 줄곧 그녀에게 있었고 그녀의 얼굴에 있는 작은 감정 변화도 놓치지 않았다.박태준은 고개를 돌려 신은지를 바라보았다.그가 공예지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녀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녀와 손을 잡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녀의 존재
신은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냥 가버렸다. 그를 기다리거나 그가 어떻게 처리하는지 볼 마음이 전혀 없었다. 떠날 때 그가 손에 들고 있던 밀크티도 가져갔다.하이힐 소리는 멀어져 갔지만 박태준의 텅 빈 손은 여전히 허공에 있었다.공예지는 손으로 땅을 짚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관절 부위의 상처는 그녀의 움직임에 의해 다시 벌어져서 새빨간 피가 그녀의 하얀 종아리를 따라 흘러내렸다.옆에 지나가던 사람이 입을 열었다."아이고, 여자애가 이렇게 피를 많이 흘려서 쓰나? 정말 나쁜 짓을 했네. 빨리 사람을 데리고 병원에 가서 붕대를 감아주지 않고 뭐해? 남자 친구가 맞긴 해?"박태준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입만 열면 허튼소리를 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다만 그가 말하기도 전에, 공예지가 먼저 소리를 내어 설명했다."아주머니, 이분은 제 남자 친구가 아니에요."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구급차라도 불러드려요?""괜찮아요, 대표님. 이 까짓 상처는 괜찮아요."그녀는 휴지로 종아리의 핏자국을 닦아냈다. 그러자 다리의 오래된 흉터도 드러났다.공예지는 입술을 오므리더니 그를 향해 웃으면서 말했다. 평소의 성격을 되찾은 듯했다."아까는 제가 너무 무서워서 은지 씨의 오해를 산 것 같아요. 미안해요."박태준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서 차를 향해 걸어갔다.차 문을 여니 신은지가 뒷좌석에 앉아 밀크티를 마시고 있었다. 소리를 들은 그녀가눈동자를 젖히면서 말했다."공예지 씨... 전예은 씨랑 좀 닮지 않았어?"그녀는 고개를 돌려 공예지 쪽을 바라보았다. 공예지는 이미 가서 택시를 잡았는데 아직 바짓가랑이를 내리지 않아서 상처가 보였다. 상처의 피는 멈췄지만 여전히 매우 충격적이었다.신은지는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그래? 자세히 보지 않아서 모르겠어."박태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신은지는 웃는 듯 웃지 않는 듯 느릿느릿 빨대를 물었다."그렇구나, 나는
"..."신은지는 말을 마치고 더 이상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 천천히 고개를 숙여 식사를 하려고 했다. 스테이크 하나를 썰었는데 미처 입에 넣기도 전에 박태준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일부러 그런 거야?""네가 그랬잖아. 다 된다고."그녀는 턱으로 박태준 앞에 놓인 금속 식기를 가리키며 말했다."매번 물어보면 다 된다고, 아무렇게나 해달라고 하는 게 너무 싫었다. 밥 먹는 열정은 반쯤 식어버리는 것 같았다.박태준은 몸을 기울이더니 그녀의 손을 잡고 방금 잘라낸 스테이크를 한입에 먹어 치웠다."..."식사를 마치자 하늘은 완전히 어두워졌고 밤이 된 온천 펜션은 낮보다 더 아련하게 아름다웠다. 나무에 걸려있는 여러 가지 색깔의 등불, 잔디밭에는 해파리 전등이 가득 꽂혀있어 낭만이 가득했다.박태준은 미리 스위트룸을 예약했고 또 한적한 곳에 온천탕을 예약해 두었다. 그러고는 식사를 하기 전에 웨이터를 보내 배치해 두었다.만약 두 사람이 함께 보낸 추억이 조금이라도 더 많다면, 언젠가 정말 치매가 되더라도, 모두 잊어버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정말로 있었던 일은, 분명 약간이라도 인상이 남아 있을 것이었다.‘나중에 이렇게 로맨틱한 배치를 보면 깜짝 놀랄 거야.'박태준은 이미 머릿속으로 두 사람의 오늘 밤 낭만적인 데이트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도중에 성가신 사람이 튀어나올 줄 생각지도 못했다. 두 사람이 얼마 가지도 않았는데 뒤에서 여자의 흥분된 목소리가 들려왔다."은지야!""..."진유라였다.박태준은 이제 그 소리만 들어도 조건반사로 머리가 아팠다. 거의 본능적인 반응이 되어 버렸다.진유라는 이미 수영복으로 갈아입은 채 뒤에서 달려들어 손을 뻗어 신은지의 어깨를 감쌌다."가자, 가자. 제일 잘생긴 남자가 많은 연못을 찾아서 온천을 즐기자. 뒤에 있는 두 남자가 알아서 하라고 해."그녀는 잘생긴 남자를 보는 건 좋아했지만 잘생긴 남자를 갖고 싶진 않았다."..."박태준의 안색은 이미 완전히 어두워졌다.정성껏 꾸민 로맨틱한 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