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이 정신을 차렸다.“왜?”신은지는 입술을 살짝 오므리고 그를 주시했다.“몇 번 불렀는데 줄곧 반응이 없었어.”“미안해.”그는 고개를 숙이고 무심결에 이마를 꼬집으려 했지만, 손을 들자마자 신은지가 보고 있다는 생각에 그대로 멈췄다.“어젯밤에 잘 자지 못해서 좀 졸려.”그의 지친 눈매와 약간 쉰 목소리는 그의 말에 신빙성을 더해주었다.신은지는 의심하지 않는 것 같았다.“그럼 얼른 씻고 자.”“응.”두통이 도진 박태준은 계속 있다가는 신은지에게 들킬 것 같아 그녀의 말대로 일어나 욕실로 갔다.그는 사실 욕조에 몸을 담가 몸살 기운을 빼고 싶었다. 하지만 저가 호텔이라 욕조가 없었고, 있다고 해도 이런 공용 욕조는 별로 쓰고 싶지 않았다.그가 산 집은 호텔에서 좀 멀리 떨어져 있었다. 왕복에 두 시간이 걸리는데, 하루 종일 돌아다닌 신은지가 힘들어해서 집에 돌아가지 않고 호텔에 묵었다.욕실에서 전해지는 물소리를 들으며 신은지는 카톡을 켜고 메시지를 보냈다.[자?]이 시각, 한국은 한밤중이라 답장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카톡을 닫으려 하는데 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아직 안 자는데, 왜?]신은지는 휴대폰을 들고 밖에 나가 상대방의 번호를 누르고 전화를 걸었다.“유성아,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태준이 외국 건축에 좀 무감각해?”그녀가 잘 모르는 박태준의 과거를 나유성은 반드시 알 것이다. 박태준과 더 가까운 사이인 고연우에게 묻는 게 맞지만 그녀는 연우 도련님과 개인적인 친분이 없고 연락처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박태준의 일을 그녀에게 알려주지 않을 수도 있다.나유성은 그녀의 물음에 조금도 놀라지 않고 웃음기 섞인 말투로 물었다.“또 길을 잃었어?”신은지는 약간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걔가 정말... 길치야?”“길치는 아니고, 주변 건물이 비슷할 때 쉽게 헷갈려 하긴 해. 하지만 그런 상황은 두 번밖에 없었고 모두 외국에 있을 때였어. 외국 건축에 무감각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지.”“...”“
박태준은 지나가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했다. 미남 미녀라 일부러 포즈를 취할 필요 없이 너무 이상한 각도만 아니면 초근접 샷도 예쁘게 나온다.찰칵! 둘의 모습이 화면에 담겼다.사진 속의 박태준은 신은지를 뒤에서 껴안은 채 시선을 약간 아래로 하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집중하는 모습은 마치 세상에 그녀 한 사람만 있는 것 같았다. 매서운 이목구비는 따뜻한 불빛 아래 유난히 부드러워 보였고 눈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졌다.박태준이 휴대폰을 건네받은 후 이탈리아어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자 그 사람이 뭐라고 말했다. 신은지는 잘 들리지 않았고 들었다 해도 알아듣지 못한다.“저 사람이 뭐래?”그녀는 고개를 숙여 사진을 뒤적거렸다. 그 사람이 여러 장 찍어줬는데, 그중 한 장은 배경이 흐릿하게 처리되어 희미한 네온사인이 하늘을 가득 채운 현란한 불꽃처럼 보이고 그녀의 눈에 따뜻한 빛이 가득했다.“네가 예쁘다고 했어.”신은지는 사진을 자기 휴대폰에 발송했다.“그럼 이렇게 예쁜 여자친구를 만난 게 굉장한 행운이니 소중히 여기라는 말은 하지 않았어?”“아니.”신은지는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 이 남자는 정말 EQ가 빵점이다. 이럴 때는 그녀의 말을 이어가야 하는 거 아닌가?거저 주는 문제도 받아먹지 못하니, 역시 독설가 특유의 재주라 하겠다.박태준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하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어.”높았다 낮았다 하는 EQ를 어쩌면 좋을까?그래도 그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신은지는 입꼬리를 올렸다.“통과한 것으로 쳐줄게. 가자. 모처럼 나왔는데 구경 좀 해.”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박태준은 바로 사진을 나유성에게 보냈다.[예뻐?][...][싱거운 자식.]박태준은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어차피 그의 목적은 사진을 보게 하는 것이니까. 오히려 나유성이 할 말이 있는 듯했다.“네 몸이 어떻게 된 거야?”“은지가 물었어?”그게 아니라면, 나유성이 갑자기 그의 건강 상태를 궁금해할 리 없다.“은지가 널 걱정하고 있어. 태준아,
폭풍같이 급하게 들이닥친 이 현기증은 날카로운 이명까지 동반했지만 이내 지나가서 기절하지는 않았다.박태준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깨어있긴 했지만 두통은 그대로였다. 그는 습관적으로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문지르려고 했고, 그제야 누군가가 팔을 잡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를 부축한 사람은 공예지였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엄숙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박 대표님, 증상이 심해진 거 아닙니까? 어제 재검사도 오지 않으시고, 이렇게 미루면 점점 더 심각해질 뿐입니다.”박태준은 감사하다고 말한 후 그녀의 손에서 팔을 빼냈다.“아니에요.”그는 지금 얼굴빛이 거의 죽어가는 사람 같고 미간은 잔뜩 구겨져 있고 눈은 새빨갛게 충혈돼 있다. 게다가 방금 우유도 제대로 잡지 못했으니 아니라는 이 말이 조금도 설득력이 없었다.“지금 이 상태로는 오늘 무척 괴로울 것이고 밤에 잠도 주무시지 못할 거예요. 1층 커피숍에 가서 물리치료 해드릴게요.”이전에 박태준이 병원에 가서 재검사할 때도 그녀가 물리치료를 해줬다.“전문 의료기구가 없어서 병원에서 하는 것처럼 효과가 좋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두통은 좀 완화할 수 있어요. 내일 방 박사님이 출근하시면 병원 가보세요.”박태준은 머리가 너무 아파서 집에 가도 자지 못할 것 같았다.“네.”아직 오전이라 카페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 박태준은 우유 한 잔을 시킨 후 가장 안쪽의 테이블에 가서 앉았다. 그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들어 목을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 말했다.“시작해요.”“아니면 먼저 우유를 마시고, 긴장을 좀 푼 후에 다시...”“아니에요.”공예지는 그의 뒤로 가서 손가락을 관자놀이에 올린 후 혈을 따라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손놀림이 전문가답고 힘이 적당했다. 매번 정확히 혈을 찾아 누른 결과, 20분도 안 돼서 심한 두통이 사라졌다. 박태준의 구겨졌던 미간이 천천히 풀리고 머리도 돌기 시작했다.“공예지 씨, 부탁 하나 해도 될까요?”그녀가 고개를 숙이면 남자의 날카롭고 또렷한 이
박태준은 깊이 잠들었지만 오래 자지는 못했다. 깨어났을 때 바깥은 여전히 밝았다. 잠을 자고 나니 머리가 많이 맑아지고 오늘 줄곧 그를 괴롭혔던 두통 증상도 사라졌다.그는 침대 협탁에 놓인 휴대폰을 가져다 확인했다. 수면의 질이 떨어진 후 그는 잠잘 때 휴대폰을 무음으로 설정해 두는 습관이 생겼다. 화면에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들어온 것이 보였다.박태준은 먼저 진영웅에게 전화했다.“무슨 일이야?”“대표님, 한 가지 좋은 소식과 한 가지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어느 걸 먼저 들으시겠습니까?”“...”대답이 없자, 진영웅은 포기하지 않고 자문자답 모드에 들어갔다. 박태준 곁에 오래 있었고 업무 능력도 뛰어나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시끄러워 쫓겨났을 것이다.“그럼 좋은 소식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대표님이 또 스타가 됐습니다. 지금 한국의 18세 소녀부터 80세 할머니까지 모두 하느님께 대표님 같은 남자를 달라고 빌고 있어요...”“알아듣게 말해.”박태준은 귀찮은 듯 그의 말을 잘랐다. 그는 욕실로 들어가 휴대폰을 세면대 위에 놓고 스피커폰을 켠 후 세수하기 시작했다.“대표님이 커피숍에서 만족스러운 얼굴로 여자한테 마사지 받는 화면이 누군가의 카메라에 찍혔는데, 그 사람이 수백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크리에이터랍니다. 대표님의 잘생긴 얼굴 때문에 지금 누리꾼들이 대표님과 결혼하고 싶다고 난리입니다.”기자의 카메라에 찍혔다면 올리기 전에 올려도 되냐고 물었을 텐데, 상대방은 인플루언서라 거리낌이 없었다.사진을 찍은 이유는 박태준의 훈훈한 외모 때문이었다. 사진과 함께 남긴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하느님, 저한테도 이렇게 멋진 남자를 주십시오. 전 남친의 10년 수명과 바꾸겠습니다. 저는 마사지는 물론 잠자리도 함께할 수 있고, 외조와 내조를 모두 잘합니다.]밑에는 그의 여자친구를 부러워하는 댓글 일색이었다.그들이 이 사진을 봤을 때는 이미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와 있었다.하긴 박태준의 얼굴이 건축으로 놓고 말하면 에펠탑 수준이니
신은지는 포크를 내려놓았다."왜 내 기분이 안 좋다고 생각해? 설마 나한테 미안한 일이라도 해서 찔린 건 아니겠지?"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태준은 늦을세라 입을 열었다. 그녀가 혹시나 오해할까 봐 두려웠다."아니야."신은지 : "응."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명 몇 초간의 침묵이었지만 두 사람이 전혀 대화를 하지 않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게 했다."은지야..."박태준은 순간 당황했다. 그는 그녀에게 말을 걸어 얼어붙은 분위기를 깨뜨렸다.사진에 있었던 일을 해명하려면 공예지의 정체를 해명해야 했다. 그러면 몸에 문제가 생긴 걸 숨길 수 없었다."나는 너에게 미안한 일을 하지 않았어, 은지야."박태준은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엄숙하고 진지했다. 이런 방식으로 신은지가 자신을 믿어주길 바라는 그였다."시합이 끝나면 내가 데리러 갈게."그때가 되면 모든 걸 다 설명해 줄 생각이었다. 한 달 동안 나아지지 않는다면 그녀도 알 권리가 있었다. 결혼할지 말지, 그녀에게도 선택권이 있었다. 나아졌다고 해도 숨길 필요는 없었다.신은지는 이번 경기를 매우 중시했다. 그녀의 발목을 잡을 수는 없었다. 그녀가 한눈을 팔지 않게, 시합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해줘야 했다."알겠어."박태준은 계속해서 그녀를 떠봤다. 카페에서 머리를 눌러 주는 사진을 보았는지 슬쩍 물었다. 그녀가 못 봤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그는 긴장했던 마음을 풀었다.그런데 이 사진 일은 정말 좀... 박태준과 전화를 끊자마자 진유라에게서 영상통화가 걸려 왔다."은지야..."그녀는 박태준의 스캔들을 먼저 언급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신은지가 모르고 있을 까봐 걱정됐지만 또 오해인데 자기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호들갑을 떨어서 두 사람의 사이가 불편해질까 봐 무서웠다.그래서 그녀는 먼저 신은지를 떠보기로 했다."오늘 박태준 씨랑 연락했어?"진유라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신은지의 얼굴에 스쳐 지나가는 어떤 작
박태준이 막 술을 마시려는데 손에 들고 있던 컵을 나유성에게 빼앗겼다. 쏟아진 술이 두 사람의 손을 적셨다.“다 죽어가면서 술은 무슨 술이야. 우유 한 잔 주세요.”마지막 한마디는 바텐더에게 하는 말이었다.그는 눈을 들어 나유성을 힐끗 쳐다보았다.그러면서 바텐더가 건네주는 우유를 받아 한 모금 마셨다.“너한테 도움을 청하고 싶은 일이 있어.”그가 나유성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하자 나유성이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아니면 미남계를 써볼까?”미남계?나유성은 자신과 신은지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려 하는 것이 분명했다. 자기가 빈틈을 타고 들어가려고.‘자기 좋은 생각 하고 있네.’“그럼 네가 수고해. 역시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형제야, 의리가 있네. 이 은혜는 내가 기억하고 나중에 꼭 갚을게.”"하."나유성이 썩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걷어찼다.“네가 하라고, 네가.”두 사람이 한참 동안 더 이야기를 나눴다. 나유성은 비로소 정색하며 말했다."너 진짜... 걸린 거냐?”이 사실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겨우 말했다."치매?”예전에 그가 말했을 때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었다. 거짓말을 하는 줄 알았다.박태준은 눈꺼풀을 젖히며 말했다.“응. 좀 지나면 집 가는 길조차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대.”좀 과장된 얘기지만 의사 선생님도 그럴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라고 했다."…."나유성은 어이가 없었다.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입을 열었다."목에 거는 카드 하나 만들어 줄까? 아니면 내가 전에 뉴스를 봤는데 연락처를 네일 무늬로 만든 사람도 있더라고. 카드가 마음에 안 들면 네일아트는 어때?”“꺼져.”목에 거는 카드는 무슨, 강아지 키우는 것도 아니고.잠시 침묵을 지키던 나유성이 또 물었다.“그럼 은지를 잊어버릴 수도 있어?”"아니."박태준은 나유성을 노려보았다.“말도 안 되는 상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나랑 은지는 헤어지지 않을 거거든. 넌 기회조차 없어. 선이나 봐, 소개팅
경기장에는 관람석이 있었지만 모두 복원 사업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아무나 끌어내도 심판을 할 수 있었다. 현장에서는 생방송의 형식으로 공평하고 공정하게 경기를 진행했다.대기실에서 신은지는 박태준과의 채팅창을 열었다. 그가 보낸 마지막 메세지는 30분 전이었다.[나 이미 공항으로 가는 길이야.]신은지가 답장을 보냈다.[도착했어?]메시지가 전달되자마자 대회 관계자가 말했다."경기 중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규칙에 따라 핸드폰을 제출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생활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서 자물쇠가 달린 상자를 준비했습니다.”"상자 안에 휴대전화를 잠글 수 있고 비밀번호와 열쇠는 본인이 보관해 주시면 됩니다.”신은지는 진유라와 박태준에게 문자를 보냈다.도착하면 호텔을 잡아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경기가 끝나면 그들을 찾아가겠다고 말이다.경기장에 갔을 때 그들은 다른 나라 팀과 마주쳤다. 상대방은 그들을 거만하게 훑어보았는데 시선은 주로 신은지에게 집중되었다. 첫째는 그녀가 가장 어렸기 때문이었다. 둘째는 아마도 애초에 관 보유자가 물건을 경인 시 박물관에 기증하면서 그녀를 콕 집어서 복원을 의뢰했기 때문이었다.“너희 나라에는 사람이 없어? 이 정도로 중요한 대회에 이런 계집애를 출전시키다니. 이미 질 거라고 생각해서 두려울 게 없는 거야? 하하하..."한 무리의 사람들이 비아냥거리며 큰소리로 웃었다.평소 같으면 이런 얼토당토않은 사람과 따지기 귀찮았을 텐데 이건 민족과 관계되는 일이었다. 한 사람이 아니라 그 나라의 체면을 깎는 말이었다."문화재 복원이라는 기술을 보는 거지, 누가 더 늙었는지를 보는 게 아니잖아. 관계자에게 말해서 돋보기라도 좀 챙겨다 줘야지 않겠어? 앞이 안 보이는 것 때문에 시합에서 지면 얼마나 억울하겠어.”“저 관은 분명 우리나라 공주의 부장품인데 어찌 너희에게 바친다는 날인가. 만약 대회에서 지면 스스로 알아서 물건을 우리나라에 돌려줘. 기술이 모자라는데 억지를 부리다가 오히려 물건을 망쳐 버리지 말고
박태준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창가에 서 있었다. 3월 밤의 바람은 아직 차가웠다. 하지만 그는 미처 깨닫지 못한 듯 계속 반쯤 열린 창문 앞에 서 있었다. 담배를 찌그러질 정도로 잡고 불을 붙여도 불이 붙지 않았다.평소 빈틈없이 다림질하던 옷도 쭈글쭈글하게 달라붙어 그 가치를 전혀 알 수 없었고 자세히 보면 까맣게 말라붙은 핏자국도 보였다.진유라는 오늘 원래 박태준과 공항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그녀가 도착했을 때 그를 보지 못했다. 시간이 늦을 것 같아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그가 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그는 신은지의 선물을 사러 갔는데 공교롭게도 한 커플이 말다툼하는 바람에 위층에서 웨딩사진 장식품이 떨어졌다. 비록 3층에 불과했지만 모서리가 각지고 재질이 단단했기에 머리를 맞으면 죽지 않는다고 해도 마비될 것이었다.하지만 그때 공예지도 우연히 현장에 있었다. 그녀가 나서서 박태준을 밀어냈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된 것이었다. 한 명은 병원에 실려갔고 한 명은 이탈리아로 가지 못했고 그 커플도 경찰에게 잡혔다."응.”"지난번에 박태준 씨와 스캔들 나신 분이잖아요."진유라는 병상을 가리키며 피를 많이 흘려 얼굴이 창백해진 공예지를 가리키며 말했다."은지는 당신이 그때 불편해서 그랬다고 박태준 씨 편을 들어줬는데 오늘은 뭐예요? 경인 시에 이렇게 크고 작은 거리가 뒤엉켜 있는데 하필이면 만났다는 거죠?"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빈정거렸다.공예지는 진유라가 박태준을 오해하는 것을 원치 않아서 입을 열었다,"그곳에서 박 대표님을 만난 건 정말 우연일 뿐이에요. 저는 그 근처에서 과외를 하고 있어서 매주 가요. 만약 믿기지 않는다면 과외하는 집 전화번호를 드릴게요. 확인해 보셔도 좋아요.”"그럼 정말 운명인가 보네요. 심상치 않은 인연이네요."진유라는 울고불고하는 사람을 싫어하고 남이 말할 때 끼어드는 사람을 더욱 싫어했으며 선을 넘는 사람을 더더욱 싫어했는데 공예지는 이 몇 가지에 모두 포함되었다."그럼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백년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고연우는 짜증 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던지더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가세요. 나중에 송씨 아주머니한테 작업복 하나 달라고 하세요.”“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하린은 우유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예전에 마사지도 배운 적 있는데, 제가...”“그만 나가.” 고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피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우유가 쏟아지며 더럽혀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는 얼굴은 굳어진 채 입술을 오므렸다. 한참 후에야 한 마디 내뱉었다. “사모님께서 보낸 겁니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하린은 고연우의 차가운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 정말로 사모님께 저를 보내셨습니다.”“나가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서재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린은 금수저 남편을 찾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취직했다. 이를 위해 매니저에게 봉투까지 건넸지만 고연우의 사늘한 태도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서재를 나오자마자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모님...”하린은 갑자기 발걸음 멈추더니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었던 그녀는 사모님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도련님께서 드시지 않았어요...”비록 정민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하린은 괜히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마침 정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번 더 가져다주세요.”하린은 정민아의 말에 담긴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재벌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걸까? 설사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돈이면 충분할 텐데,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겨 상속 분배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 어쩔 생각인지.’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송씨 아주머니한테 익숙해졌는지 저를 좀 꺼리시는 것 같아요. 아
다음 날.정민아와 사연희는 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야...”주소월이었다. 사연희는 정민아의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주소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절친이라도 남의 가정사에 깊이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초대장 몇 개 빼놓고 못 보낸 것 같은데, 금방 보내고 올게. 쇼에 관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주소월을 흘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정민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소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 충분히 더 이상 정씨 가문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주소월이 여전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겠니?” 정민아가 거절할까 봐 주소월은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가 쇼를 열잖아? 오늘 밤 연회에 너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잠재 고객을 몇 명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어.”“지금 그 무리에서 잠재 고객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이세요?”그녀와 최민영의 갈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못한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반면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좋은 사람은 고아 때문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소월은 정민아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아야, 미안해. 엄마가 너를 데려오긴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너한테 이렇게 상처만 줬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를 정씨 가문으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또... 그 미친놈으로부터 구해줘서 고마워요.”마치 세월의 흔적을 덮은 한 자루의 칼처럼 서서히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민아야...” 주소월은 울먹거리며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그
정민아는 문을 열고 지친 몸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갈아신던 중 슬쩍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전화드렸잖아요. 저녁 먹고 온다고,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렸어요?”송씨 아주머니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고연우라는 말을 듣자 정민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렇군요.”“아가씨...”송씨 아주머니가 망설이며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제가요?” 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왜요?”“도련님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는데... 두 분 혹시 싸우신 거 아닌가요?”“그 사람이 기분이 안 좋다고 제가 달래줘야 하나요? 그럼 왕자님, 저녁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정민아는 피식 웃더니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먹든 안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굶으면 되죠.”송씨 아주머니는 시선을 정민아 뒤쪽으로 옮기더니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정민아가 뒤돌아보자 고연우는 난간에 기댄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려 있었고 옷자락은 허리선에 맞춰 깔끔하게 넣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를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배경처럼 흐릿해 보이게 만들었다.고연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사실 그는 조금 더 튕기고 싶었지만 계속 자존심을 부리다 이 무심한 여자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정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먹었어.”“네가 장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서 해결해 줬더니, 겨우 도시락 하나 사주는 거냐? 정민아, 너 정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 없어.”정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하자 덜 말려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치우치며 하얗고 맑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물방울까지 맺혀있어 고연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그 어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방안에 가득 찬 정민아의 향기가 그림자마냥 고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탓에 고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주먹을 말아쥐었다.술기운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고혹적인 자세 때문인지 고연우는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에 정민아는 문을 열고는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내가 불편해지면서까지 다른 사람한테 맞추긴 싫거든. 그러니까 일단 최민영부터 죽이고 와서 사랑 타령해.”“... 다른 건 안 될까?”“다른 거 뭐?”정민아의 산만한 시선이 고연우의 몸에 머물렀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보는 듯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너한테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뭐 다른 게 있긴 해?”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말임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웃긴 건 정민아의 말에 고연우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봐도 돈과 권력 외에는 정민아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몸에 고연우는 고개를 들더니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기생오라비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어.”정민아가 혹여 듣지 못할까 봐 고연우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어려서부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던 고연우는 저에게도 이렇게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필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하지만 정민아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얼굴 자랑 말고 가서 약이나 좀 사지 그래? 내가 너에 대한 흥미는 약의 자극을 받아야만 생길 것 같거든.”머리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아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도 입안에는 분노 가득한 험한 말들이 서러움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넌 앞으로 그냥 말을 하지 마.”
고연우의 질문에 정민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대학 때 후배.”그 말에 고연우는 아까 정민아를 보던 임우빈의 이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물었다.“쟤가 너 좋아해?”“응.”“...”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을 해버리는 정민아에 말문이 막혀버린 고연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너 저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 좋아했었어?”정민아의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임우빈한테 유난히 관대한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민아 앞에서 주책맞게 떠들어 댄 게 자신이었다면 정민아는 진작에 제 머리를 비틀어 화분으로 삼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정민아는 언짢아 보이는 고연우를 보며 말했다.“기생오라비 같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턱선이 당신처럼 뚜렷하진 못해 그래서. 그리고 뒤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격 떨어지는 일이야, 고연우 도련님.”고연우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올라가는 억양을 붙인 게 아무리 봐도 조롱 같았던 고연우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턱선이 나보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려서 그렇다고? 그럼 뭐 나는 늙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내 앞에서 내 아내를 탐내는 데 내가 얼마나 격을 차려야 한다는 거지? 난...”고연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참아냈다.“곧 이혼할 건데 뭘.”“꿈 깨.”혈관 속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느낌에 원래도 나빴던 기분이 더 완벽히 잡쳐버린 고연우는 정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이혼에 합의 안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어.”고연우의 말에 정민아가 문고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그럼 아직 살아있으니까 납골함이라도 직접 골라. 귀신 돼서도 네가 직접 고른 집에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겠지.”“정민아, 너...”고연우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문이 “펑”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탓에 하마터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고연우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누가 이딴 식으로 짜증을 내고 들
말을 안 하고 앉아있는 정민아에 기사는 정민아가 슬퍼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낱 외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답답한지 기사는 의자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진심으로 좋아하면 시험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야죠. 이런 식이면 남자는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남자들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여자의 유혹을 당해낼 남자도 없어요.”“저도 남자예요, 믿어도 좋아요.”끊임없이 말하는 기사가 귀찮았는지 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응, 믿으니까 출발해 빨리.”정민아가 고연우를 시험하는 건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 씨 집안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 보니 이 길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임우빈은 한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려 정민아를 바라보며 그 나이대 특유의 당찬 표정을 하고 말했다.“저렇게 양옆에 여자나 끼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홀려대는 남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누나 관심을 받을 자격도 없죠. 저는 어때요?”임우빈은 제 이두근을 자랑하며 말했다.“젊고 잘생긴 데다가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일편단심이에요. 누나 말곤 아무도 안 봐요, 길가는 암컷 강아지한테 눈길 안 줄 자신 있는데.”“... 너희 엄마는 네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여자를 집안 며느리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 아니?”정민아의 말에 임우빈은 툴툴대며 대답했다.“많이는 아니죠, 고작 세 살인데. 오버는 하지 말죠. 그리고 내가 정말 누나를 집에 데려가면 우리 엄마는 엄청 좋아할걸요. 적어도 앞으로 두 세대는 미모는 보장할 수 있으니까.”임우빈은 정민아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1학년 때 운동장에서 정민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정민아가 퇴학을 해버리는 탓에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정민아가 있다는 경인시까지 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여기서 취직
사연희는 잔뜩 감동한 얼굴로 정민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우리 가게 때문에 민아 씨만 고생했네요.”안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노 대표님의 생각을 바꿀만한 둘레의 허벅지를 찾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시간이 촉박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노 대표님이 술을 깨기 위한 시간이었다.사연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정민아는 해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냥 사연희를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그때 공민찬이 나오면서 말했다.“고 대표님, 방금 룸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사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고연우는 공민찬을 흘겨보며 언짢은 듯 말했다.“너만 입 달렸어?”“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공민찬은 사과 하나는 빨리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사모님께 말씀은 하셨어요?”“...”“대표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사모님 마음 못 돌려요. 사모님이 최민영 씨한테 괴롭힘 당할까 봐 문 앞에 사람까지 세워서 지키시면 뭐해요, 이런 건 대표님이 말씀 안 하시면 사모님은 영영 모르실 텐데요. 그럼 감동도 못 받으실 테고 사모님이 감동하지 못하시면...”그런 공민찬을 보던 사연희는 주먹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민아에게 귓속말을 했다.“안 되겠어,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밖으로 나가기 전 사연희는 한 번 더 공민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사연희가 만약 공민찬처럼 말 많고 사실만 얘기하며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비서를 뒀다면 얼마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을 텐데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고연우를 보니 허벅지 대표님의 성격은 꽤 차분해 보였다.“입 다물어.”그 차분한 고연우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공민찬 손에 들려있던 차 키를 뺏어 들고는 정민아를 보며 말했다.“가자.”“응.”정민아의 대답을 들은 고연우의 발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참 만에 땅에 닿았다.정민아의 조롱 섞인 거절이거나 분노는 너무나 익숙하고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