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마시던 진유라는 그녀의 안색이 변한 것을 보고 물었다.“왜 그래?”신은지가 미간을 찌푸린 채 정색하며 말했다.“임 관장님이 이탈리아행 티켓을 내 것도 예매했어. 착각하셨나 봐. 전화해 볼게.”“은지야.”진유라가 눈치 빠르게 그녀의 손을 눌렀다.“하늘의 뜻인지도 몰라. 아니면 그냥 가지 그래? 어차피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잖아. 박태준 쪽은 내가 너 대신...”그녀는 원래 대신 지키고 있겠다고 말하려 했지만 아무리 절친이라도 남자를 지키는 일은 대신 해 주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그녀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바꿨다.“곽동건한테 대신 지키고 있다가 조금이라도 이상한 기미가 보이면 즉시 너한테 전화하라고 할게.”신은지가 정말 연애밖에 모르는 바보라면 그냥 내버려뒀을 것이다. 기분 좋게 살면 되지, 대회에 참가하든 안 하든 무슨 상관인가?하지만 신은지는 연애에만 집중하는 사람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이 직업을 매우 사랑한다.진유라는 그녀가 나중에 후회할까 봐 걱정했다. 어쨌든 대회에 참가하는 것뿐이고 다 합해서 한두 달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게다가 그녀는 은지가 가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있다.진유라의 손에 눌려 벗어날 수 없는 신은지는 어이없어하며 웃었다.“참가자 명단은 이미 올라갔어. 내가 지금 간다고 해도 소용없잖아.”말하는 와중에 신은지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박태준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은지야, 항공사 문자 받았어?”“네가 임 관장님께 예매를 부탁했어?”“응, 며칠 전 접대 자리에 나갔다가 마침 임 관장님을 만나서 대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어. 네가 거절했다고 하더구나. 이런 기회는 많지 않고, 너에게도 좋은 경험과 단련이 될 것 같아서 내가 독단적으로 결정하고 지원했어.”박태준은 거짓말을 했다. 사실 우연히 마주친 것이 아니라 신은지가 출전을 거절한 후 이를 안타깝게 여긴 임 관장이 직접 그에게 전화를 걸어 거절 이유를 물었던 것이다.그는 지금 신은지 얼굴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녀가 어떤 반응인지 모른다
중년 남자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다시 아래위로 훑었다.“누구세요? 만져서 망가지면 어떡할 거예요? 배상할 수 있어요?”진유라는 이렇게 건방 떠는 사람을 본 지 오래됐다.“한 번 만져서 망가지는 옷이라면 가게에서도 못 받겠죠.”그녀는 로고를 힐끗 쳐다보았는데, 보지 못한 브랜드였다.“무명 상표 옷을 여기 가져다 팔아요? 여기는 입다가 버리는 쓰레기가 아니라 명품 브랜드 옷을 받는 곳이에요.”제 딴에는 노인을 공경하고 아이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진유라지만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는 이 사람을 까내리지 않고 지나갈 그녀가 아니었다.“수제 남성 수트를 전문으로 하는 프랑스 브랜드인데, 많이 알려지지 않았어.”대답한 것은 신은지였다.“그걸 다 알아?”“응, 태준이 이 브랜드 옷을 많이 입어.”“...”진유라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옷을 힐끗 보더니 다시 신은지를 쳐다보았다.“이 옷이?”‘박태준 거? 은지가 왜 중고, 그것도 남성 수트에 관심을 보이는가 했더니.’‘박태준이 아직 파산하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이 입었던 옷을 입어야 할 정도로 몰락하지는 않았단 말이지.’“태준에게 같은 옷이 있긴 하지만 남자 옷은 디자인이 거기서 거기라 아마 그냥 비슷한 디자인일 거야.”진유라가 고개를 저었다.“그럴 리 없어. 개인 맞춤 제작이라면 같을 수 없어. 대체로 비슷하다 해도 디테일은 똑같을 수 없지. 아니면 너 한번 볼래?”두 사람의 대화는 모두 중년 남자의 귀에 들어갔다.“뭐 하는 거예요? 공공연히 빼앗는 건가요? 말 한마디로 이 옷이 당신 것이 돼요? 그럼 은행 가서 돈이 다 내 거라고 말하면 X발 부자가 되겠네.”그는 몸으로 두 사람의 시선을 가린 채 짜증 내며 손을 저었다.“사지 않겠으면 쓸데없이 끼어들지 말아요.”말하고 나서 그는 눈에 쌍불을 켜고 점원을 바라보았다.“가격이 얼마나 나갈까요? 개인 맞춤 제작이라니 비싸겠죠?”‘이걸 팔면 도박을 몇 번 더 할 수 있는 거야?’‘그 망할 계집애는 이렇게 비싼 옷이 있으
한나절이나 신은지를 보지 못한 박태준은 지금 그녀를 품에 안고 뽀뽀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는데, 무슨 옷을 볼 정신이 있겠는가.하지만 신은지는 그림을 그의 눈앞에 들이댔고, 안 보면 그를 찢어버릴 기세였다.박태준은 고개를 숙여 대충 훑어보았다. 남자 옷은 디자인이 거기서 거기지만 아내가 디자인한 것은 반드시 다른 사람이 한 것보다 보기 좋아야 한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보기 좋아. 곧바로 제작 의뢰할게.”그는 기뻐하며 신은지를 안으려 했다.“앞으로 내 옷은 모두 네가 디자인하는 게 어때? 우리 마누라는 진짜 대단해. 문화재 복원뿐 아니라 옷도 디자인할 줄 알아.”기분 좋은 박태준과 달리 신은지는 지금 쓴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자기 옷도 알아보지 못하면서 옷을 디자인해달라고? 무슨 옷? 꿈도 꾸지 마.’신은지는 손을 내리고 자기가 그린 옷을 보았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미술을 배운 데다 예대를 졸업했기 때문에 그림 솜씨가 좋아서 몇 번 훑어본 옷을 실물과 똑같이 그렸다.“보기 좋아? 근데 내 기억엔 너한테 똑같은 옷이 한 벌 있었던 것 같은데. 오늘 드레스룸에 가서 찾았더니 없었어. 다른 곳에 뒀어?”그제야 눈여겨본 박태준은 이전에 공예지를 구할 때 입었던 옷이라는 것이 생각났다. 당시 그녀의 옷이 찢어진 것을 보고, 그녀에게 던져주면서 입었다가 버리라고 했었다.그래서 그는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잃어버렸어.”자세히 설명하자면 말이 길어지는데, 신은지가 다음 주 월요일에 이탈리아로 떠나면 두 사람은 한 달 넘게 떨어져 있게 된다. 그래서 박태준은 남은 시간을 상관없는 사람 얘기로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이 시간을 이용해 그녀와 더 친밀해지고 싶을 뿐이다.신은지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이렇게 보기 좋은 옷을 잃어버리면 아까운데, 다시 찾을 수 있어?”그녀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박태준은 심지어 좀 질투가 났다.‘나한테는 이렇게 관심을 보인 적이 없잖아. 이제는 옷 한 벌보다도 못한 건가?’“찾지 못해. 네가 좋다면 다시 제
박태준이 말했다."아니, 의사라는 사람이 마음을 나쁘게 먹었네. 할 수 있는 검사라면 하나도 빠짐없이 넣었잖아."검사를 빠짐없이 넣은 것을 넘어서 이 정도면 과잉 검사였다. 에이즈, 매독과 같은 전염병 검사까지 다 포함됐다."..."'그런 말은 좀 내가 없는 곳에서 하면 안 되나?'의사가 막 변명하려고 하는데 문이 닫혔다.사립병원이라서 검사를 하는데 줄을 설 필요가 없었고 다 끝냈는데도 11시밖에 되지 않았다. 초음파를 제외한 다른 검사 결과는 오후가 되어서야 받을 수 있었고 어떤 검사 결과는 2, 3일 정도 기다려야 했다.그는 신은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손가락을 부드럽게 문질렀다."우리 먼저 갈까? 이따가 진 비서를 시켜서 검사 결과를 가져오라고 하면 돼.""주말인데도 사람 부려 먹을 거야? 여자 친구랑 데이트하고 있으면 어쩌려고. 게다가 오후에 검사 결과를 가지고 의사 선생님께 가봐야 해. 그러니까 우리가 가자""…"문을 열자 차가운 칼바람이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신은지는 목을 움츠리고 얼굴을 두꺼운 목수건 속에 묻었다.박태준이 외투를 벗어 그녀를 감쌌다. 그러고는 그녀를 품에 안은 채로 바람이 불어오는 쪽에 서서 거센 칼바람을 막아주었다.신은지는 손을 뻗어 외투를 벗으려고 했다."벗어주지 않아도 괜찮아."그는 안에 얇은 니트만 입고 있었다. 박태준은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차를 주차해 둔 곳까지 거의 다 왔어."차에 탄 그는 차의 시동을 걸었다."먼저 밥 먹고 영화 보러 갈래?"그녀는 힘들었는지 차에 타자마자 좌석 등받이와 한 몸이 되었다. 신은지는 좌석에 기대어 하품을 했다."밥 먹고 호텔 잡아서 좀 자자, 나 너무 졸려."오늘 아침에 일어날 수 있었던 건 모두 끈기로 버텼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졸려서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만약 차 안이 춥지 않았다면 그녀는 그냥 잠들었을 것이었다.박태준의 눈은 맨눈으로도 보아낼 수 있을 만큼 반짝였다."좋아."신은 지는 손가락을 그의 어깨를 툭툭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바라보던 박태준의 입꼬리가 주체할 수 없이 올라갔다."응.”그러나 그가 그녀를 안고 있을 때, 신은지가 볼 수 없는 곳에서 그의 눈은 혼란스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무언가가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지나간 자리에 흉터가 하나둘 남는 것 같아 아프고 괴로웠다.‘은지야, 내가 잊을까 봐 걱정돼'그녀는 박태준의 얼굴을 볼 수 없었고 그의 심정도 짐작할 수 없었다. 그저 자기 허리에 두른 그의 손에 유난히 힘이 들어갔다는 것과 그가 억지로라도 자기를 몸에 쑤셔 넣고 싶어 하는 듯한 것이 느껴질 뿐이었다.그도 자신이 너무 세게 안은 탓에 신은지를 아프게 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그녀를 아프게 하던 손을 놓았다.짧은 순간이었지만 박태준의 평소와 다른 모습이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그녀는 눈썹을 찡그린 채 그의 얼굴을 자세히 쳐다보았다."정말 나한테 숨기는 거 없어?”그런 그녀의 모습에 박태준은 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신은지가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며 피하지 못하게 했다.박형주는 소리 없이 웃었다."사실 있어.”“...”"나는 널 이탈리아에 보내고 싶지 않아. 임 관장에게 신청해 달라고 부탁한 뒤로부터 계속 후회하고 있어. 잘 억누르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어제 캐리어를 보고 실감이 나기 시작한 것 같아. 하루도 너와 헤어지기 싫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어.”그녀는 이를 악물고 그를 자기에게서 밀어버렸다."꺼져.”박태준은 제대로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그녀는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물건들을 피해서 바로 옷을 벗고 침대에 누웠다.박태준도 이불을 젖히고 따라서 눕더니 손을 뻗어 그녀를 가슴에 안았다. 그녀가 어젯밤 너무 피곤했다는 것을 안 그는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신은지는 매우 깊이 잠들었다. 한잠 자고 일어나니 그녀는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고 아침의 몽롱한 상태도 사라졌다.혈액검사, 초음파, 심전도...기초 검사는 박태준이 얼마 전에
박태준은 아버지처럼 사사건건 신은지에게 당부했다.곧 안전 검사를 받을 시간이 되었다. 그의 아쉬움은 순식간에 커졌고 억제할 수 없었다.사람들이 드나드는 공항에서, 박물관에서 일하는 나이 든 아저씨, 아주머니들 앞에서 그는 손을 뻗어 그녀를 품에 안았다."은지야, 조심히 잘 다녀와."그녀가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하는데 그는 이미 그녀를 검사 구역으로 밀었다."어서 가."더 이상 보내지 않으면 그는 다시 신은지를 데려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를 수 없을 것 같았다."?"아쉬워하는 거 다 거짓말이야. 사람을 쫓아내는 속도가 어쩌면 저렇게 빨라?'그녀는 작별 인사도 없이 그냥 돌아섰다.대기실에 들어간 임 관장은 마침내 그녀와 이야기할 기회가 생겼다."박 대표님과 사이가 정말 좋네."신은지는 그의 낮은 EQ를 떠올렸다. 가끔 마음이 확 식었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임 관장 앞에서 티는 내지 않았다."화가 날 때는 때리고 싶을 정도예요."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그러자 임 관장은 이미 겪어봤다는 듯한 말투로 말하기 시작했다."부부는 원래 그렇게 맞춰가는 거야. 근데 나는 지금까지 박 대표님의 성격이 차가운 줄 알았어."이전에 박태준과 단 두 번의 교집합이 있었는데 모두 신은지때문이었다. 그 남자는 자신을 낮은 위치에 두고 부탁을 했지만 결코 세력이 약하지 않았고 말할 때 목소리도 차갑고 싸늘했다.신은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맞아요."그들은 직항 티켓을 예약했는데, 경인 시에서 이탈리아까지 11시간이나 걸렸다. 게다가 이코노미석이라 허리가 뻐근하고 아팠다.휴대폰을 켜자마자 진유라의 문자가 보였다.[은지야, 도착했어?][이탈리아 완전 예쁘지? 내가 요 며칠만 지나면 바로 찾으러 갈 테니, 먼저 가서 구경하지 말고 나를 기다려.] 박태준도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냈는데, 하나는 여기에 있는 부동산 주소였고 다른 두 개는[여보, 도착했어?][여보, 왜 내 메시지에 답장을 안 해?]중간에 30분 간격으로 와 있었다.비행기가 30분 연
"..."그는 일을 처리하면서도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화살표가 자기를 가리켰을 때는 어리둥절했지만 이해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그는 고개를 번쩍 들어 박태준과 시선을 마주치며 중얼거렸다."진짜?"‘굴욕을 자초하겠다는 건가?’그의 이 말은 매우 함축적이어서 박태준은 물론 다들 그의 말 속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하지만 고연우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도 정민아에게 시달렸었기 때문이었다. 그보다 더 비참한 사람은 없었다. 침실에 들어가기 전에 그는 아내의 기분을 살펴 가면서 왼발을 먼저 내디딜지 오른발을 먼저 내디딜지 결정해야 했다. 발을 잘못 디디면 그는 서재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이런 환경에서라면 돼지도 단련되기 마련이었다.그는 신은지가 박태준을 상대하지 않는 이유를 대충 짐작했다.이 관계를 놓고 말해서 박태준은 자신이 있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응."곽동건이 직접 전화를 걸었다.진유라는 지금 어머니와 함께 있었다. 같이 앉아 있으면서 결혼을 왜 해야 되는지에 대한 강의를 듣고 있었다. 이 강의는 듣기만 해서는 안 됐다. 귀를 기울일 뿐만 아니라 자기의 의견을 말해야 했다. 하지만 무조건 어머니의 말을 찬성하는 입장에서 말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매를 맞을 것이었다.이 전화는 그야말로 그녀의 구세주였다."네, 오빠."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밝고 부드러워서 곽동건은 손이 떨려서 하마터면 핸드폰을 내던질 뻔했다.그가 진유라의 모처럼 열정적인 태도에서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데 진유라가 또 말을 걸어왔다.“유물을 사시려고요? 2억 원 이상이요? 급하다고요? 지금 바로 가게로 갈게요!"“전혀 바쁘지 않죠. 바로 갈 수 있어요. 오빠만 좋으시다면 한밤중에 봐도 좋습니다."진유라는 그렇게 말하며 가방을 가지 더니 허둥지둥 집을 나섰다. 나가기 전에 어머니에게 먼저 간다는 손짓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그녀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온 사람이 곽동건이라는 것을 알려주지 못했다. 말했더
물론 진유라는 그가 자포자기로 그녀에게 더 매달릴까 봐 두려워했다.원래는 곽동건이 그녀와 몇 마디 더 할 줄 알았는데 예상 밖으로 그는 매우 시원시원하게 동의했다."그래요, 하지만 헤어지더라도 면전에서 말해야 하지 않겠어요? 당신이 주운 강아지도 말이죠. 이젠 필요 없다고 해도 강아지한테 말해줘야죠. 요즘 매일 문을 지키며 당신이 보러 오는 걸 기다리는데. 불러도 자리를 옮기려고 하지 않아요."진유라는 원래 이번 통화로 이 관계를 끝내려고 했었다. 어쨌든 그들 사이의 시작도 이렇게 어이없는 방식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곽동건이 개 이야기를 꺼내자 그녀는 마음이 약해졌다.‘아이고, 난 정말 착한 선녀야.’"그럼 어디서 밥이나 먹을까요? 강아지를…”그녀는 자신의 입을 툭툭 쳤다. 하마터면 그에게 끌려갈 뻔했다."강아지를 데리고 오세요."사실 그녀는 매우 미안했다. 분명 그 강아지는 그녀를 따라가고 싶어 했는데 그녀는 곽동건한테 넘겨주고 한 번도 보러 가지 않았다.매일 문을 지키며 그녀가 그것을 보러 오는 걸 기다린다는 말을 듣자 마음이 더 약해지고 나른해졌다."요즘 매일 밖에서 먹으니까 좀 역겨워요. 그냥 집에서 먹읍시다. 유라 씨는 무슨 도구를 좋아해요? 아니, 미안해요. 말이 헛나왔네요. 뭐 좋아하세요?" 진유라의 머릿속에 팽팽하게 당겨져 있는 그 선이 누군가에 의해 힘껏 당겨진 듯 '윙'하는 소리가 귀에 온통 울려 퍼졌다.그녀는 손바닥을 힘껏 꼬집으며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겨우 억눌렀다. 법정에서 항상 말발로 상대 변호사를 밀어붙이는 곽 변호사님에게서 말이 헛나오다니? 그는 분명히 고의로 한 것이었다.“마음대로 하세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한편 룸안, 축 처진 박태준을 바라보던 고연우가 발을 들어 그를 퍽퍽 찼다."너 은지 씨한테 어디 미운털 박힌 거 아니냐?""아니, 호텔 갈 때만 해도 멀쩡했는데 자다 깨서 잘 안 받아줘.”“…"고연우는 어이없다는 듯 양미간을 문질렀다. 그는 이런 이성 사이의 화제에 참여하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고연우는 짜증 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던지더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가세요. 나중에 송씨 아주머니한테 작업복 하나 달라고 하세요.”“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하린은 우유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예전에 마사지도 배운 적 있는데, 제가...”“그만 나가.” 고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피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우유가 쏟아지며 더럽혀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는 얼굴은 굳어진 채 입술을 오므렸다. 한참 후에야 한 마디 내뱉었다. “사모님께서 보낸 겁니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하린은 고연우의 차가운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 정말로 사모님께 저를 보내셨습니다.”“나가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서재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린은 금수저 남편을 찾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취직했다. 이를 위해 매니저에게 봉투까지 건넸지만 고연우의 사늘한 태도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서재를 나오자마자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모님...”하린은 갑자기 발걸음 멈추더니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었던 그녀는 사모님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도련님께서 드시지 않았어요...”비록 정민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하린은 괜히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마침 정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번 더 가져다주세요.”하린은 정민아의 말에 담긴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재벌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걸까? 설사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돈이면 충분할 텐데,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겨 상속 분배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 어쩔 생각인지.’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송씨 아주머니한테 익숙해졌는지 저를 좀 꺼리시는 것 같아요. 아
다음 날.정민아와 사연희는 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야...”주소월이었다. 사연희는 정민아의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주소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절친이라도 남의 가정사에 깊이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초대장 몇 개 빼놓고 못 보낸 것 같은데, 금방 보내고 올게. 쇼에 관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주소월을 흘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정민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소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 충분히 더 이상 정씨 가문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주소월이 여전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겠니?” 정민아가 거절할까 봐 주소월은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가 쇼를 열잖아? 오늘 밤 연회에 너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잠재 고객을 몇 명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어.”“지금 그 무리에서 잠재 고객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이세요?”그녀와 최민영의 갈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못한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반면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좋은 사람은 고아 때문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소월은 정민아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아야, 미안해. 엄마가 너를 데려오긴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너한테 이렇게 상처만 줬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를 정씨 가문으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또... 그 미친놈으로부터 구해줘서 고마워요.”마치 세월의 흔적을 덮은 한 자루의 칼처럼 서서히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민아야...” 주소월은 울먹거리며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그
정민아는 문을 열고 지친 몸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갈아신던 중 슬쩍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전화드렸잖아요. 저녁 먹고 온다고,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렸어요?”송씨 아주머니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고연우라는 말을 듣자 정민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렇군요.”“아가씨...”송씨 아주머니가 망설이며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제가요?” 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왜요?”“도련님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는데... 두 분 혹시 싸우신 거 아닌가요?”“그 사람이 기분이 안 좋다고 제가 달래줘야 하나요? 그럼 왕자님, 저녁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정민아는 피식 웃더니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먹든 안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굶으면 되죠.”송씨 아주머니는 시선을 정민아 뒤쪽으로 옮기더니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정민아가 뒤돌아보자 고연우는 난간에 기댄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려 있었고 옷자락은 허리선에 맞춰 깔끔하게 넣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를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배경처럼 흐릿해 보이게 만들었다.고연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사실 그는 조금 더 튕기고 싶었지만 계속 자존심을 부리다 이 무심한 여자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정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먹었어.”“네가 장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서 해결해 줬더니, 겨우 도시락 하나 사주는 거냐? 정민아, 너 정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 없어.”정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하자 덜 말려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치우치며 하얗고 맑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물방울까지 맺혀있어 고연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그 어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방안에 가득 찬 정민아의 향기가 그림자마냥 고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탓에 고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주먹을 말아쥐었다.술기운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고혹적인 자세 때문인지 고연우는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에 정민아는 문을 열고는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내가 불편해지면서까지 다른 사람한테 맞추긴 싫거든. 그러니까 일단 최민영부터 죽이고 와서 사랑 타령해.”“... 다른 건 안 될까?”“다른 거 뭐?”정민아의 산만한 시선이 고연우의 몸에 머물렀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보는 듯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너한테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뭐 다른 게 있긴 해?”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말임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웃긴 건 정민아의 말에 고연우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봐도 돈과 권력 외에는 정민아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몸에 고연우는 고개를 들더니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기생오라비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어.”정민아가 혹여 듣지 못할까 봐 고연우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어려서부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던 고연우는 저에게도 이렇게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필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하지만 정민아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얼굴 자랑 말고 가서 약이나 좀 사지 그래? 내가 너에 대한 흥미는 약의 자극을 받아야만 생길 것 같거든.”머리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아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도 입안에는 분노 가득한 험한 말들이 서러움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넌 앞으로 그냥 말을 하지 마.”
고연우의 질문에 정민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대학 때 후배.”그 말에 고연우는 아까 정민아를 보던 임우빈의 이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물었다.“쟤가 너 좋아해?”“응.”“...”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을 해버리는 정민아에 말문이 막혀버린 고연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너 저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 좋아했었어?”정민아의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임우빈한테 유난히 관대한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민아 앞에서 주책맞게 떠들어 댄 게 자신이었다면 정민아는 진작에 제 머리를 비틀어 화분으로 삼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정민아는 언짢아 보이는 고연우를 보며 말했다.“기생오라비 같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턱선이 당신처럼 뚜렷하진 못해 그래서. 그리고 뒤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격 떨어지는 일이야, 고연우 도련님.”고연우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올라가는 억양을 붙인 게 아무리 봐도 조롱 같았던 고연우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턱선이 나보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려서 그렇다고? 그럼 뭐 나는 늙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내 앞에서 내 아내를 탐내는 데 내가 얼마나 격을 차려야 한다는 거지? 난...”고연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참아냈다.“곧 이혼할 건데 뭘.”“꿈 깨.”혈관 속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느낌에 원래도 나빴던 기분이 더 완벽히 잡쳐버린 고연우는 정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이혼에 합의 안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어.”고연우의 말에 정민아가 문고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그럼 아직 살아있으니까 납골함이라도 직접 골라. 귀신 돼서도 네가 직접 고른 집에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겠지.”“정민아, 너...”고연우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문이 “펑”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탓에 하마터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고연우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누가 이딴 식으로 짜증을 내고 들
말을 안 하고 앉아있는 정민아에 기사는 정민아가 슬퍼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낱 외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답답한지 기사는 의자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진심으로 좋아하면 시험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야죠. 이런 식이면 남자는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남자들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여자의 유혹을 당해낼 남자도 없어요.”“저도 남자예요, 믿어도 좋아요.”끊임없이 말하는 기사가 귀찮았는지 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응, 믿으니까 출발해 빨리.”정민아가 고연우를 시험하는 건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 씨 집안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 보니 이 길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임우빈은 한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려 정민아를 바라보며 그 나이대 특유의 당찬 표정을 하고 말했다.“저렇게 양옆에 여자나 끼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홀려대는 남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누나 관심을 받을 자격도 없죠. 저는 어때요?”임우빈은 제 이두근을 자랑하며 말했다.“젊고 잘생긴 데다가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일편단심이에요. 누나 말곤 아무도 안 봐요, 길가는 암컷 강아지한테 눈길 안 줄 자신 있는데.”“... 너희 엄마는 네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여자를 집안 며느리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 아니?”정민아의 말에 임우빈은 툴툴대며 대답했다.“많이는 아니죠, 고작 세 살인데. 오버는 하지 말죠. 그리고 내가 정말 누나를 집에 데려가면 우리 엄마는 엄청 좋아할걸요. 적어도 앞으로 두 세대는 미모는 보장할 수 있으니까.”임우빈은 정민아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1학년 때 운동장에서 정민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정민아가 퇴학을 해버리는 탓에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정민아가 있다는 경인시까지 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여기서 취직
사연희는 잔뜩 감동한 얼굴로 정민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우리 가게 때문에 민아 씨만 고생했네요.”안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노 대표님의 생각을 바꿀만한 둘레의 허벅지를 찾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시간이 촉박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노 대표님이 술을 깨기 위한 시간이었다.사연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정민아는 해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냥 사연희를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그때 공민찬이 나오면서 말했다.“고 대표님, 방금 룸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사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고연우는 공민찬을 흘겨보며 언짢은 듯 말했다.“너만 입 달렸어?”“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공민찬은 사과 하나는 빨리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사모님께 말씀은 하셨어요?”“...”“대표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사모님 마음 못 돌려요. 사모님이 최민영 씨한테 괴롭힘 당할까 봐 문 앞에 사람까지 세워서 지키시면 뭐해요, 이런 건 대표님이 말씀 안 하시면 사모님은 영영 모르실 텐데요. 그럼 감동도 못 받으실 테고 사모님이 감동하지 못하시면...”그런 공민찬을 보던 사연희는 주먹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민아에게 귓속말을 했다.“안 되겠어,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밖으로 나가기 전 사연희는 한 번 더 공민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사연희가 만약 공민찬처럼 말 많고 사실만 얘기하며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비서를 뒀다면 얼마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을 텐데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고연우를 보니 허벅지 대표님의 성격은 꽤 차분해 보였다.“입 다물어.”그 차분한 고연우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공민찬 손에 들려있던 차 키를 뺏어 들고는 정민아를 보며 말했다.“가자.”“응.”정민아의 대답을 들은 고연우의 발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참 만에 땅에 닿았다.정민아의 조롱 섞인 거절이거나 분노는 너무나 익숙하고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