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뭐든 다 잘한다고요?”곽동건이 눈썹을 씰룩거렸다.“뭐든 다 잘하는 남자가 겨우 만원으로 같이 게임을 놀아줘요? 게다가 자기, 여보라고 하며 불러줘요?”“...”진유라는 말문이 막혔다.만 원은 한 사람의 값이 아니었기 때문이다.두 사람에 만 원이었으니 한 사람에 오천 원인 격이다.하지만 이 사실을 드러내면 분명 비웃음당할 게 뻔했다. 그리고 방금 게임할 때는 남자가 부른 애칭이 전혀 문제없는 것 같았는데 이제 돌이켜보니 너무 부끄러워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고 싶었다.그녀는 곽동건을 힐끔 바라봤다.차가운 얼굴의 그는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그런 얼굴로 그녀에게 ‘자기’라고 말하고 있으니 설레는 감정은커녕 오히려 찬물에 맞은 것처럼 바로 진정이 되었다.게임도 껐으니 괴물 죽일 때의 긴장감도 사라졌다. 그리고 방금 가셨던 취기가 다시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진유라는 너무 피곤해 옆에서 휴대폰을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곽동건을 신경 쓸 새도 없었다.“너무 피곤해요. 나 잘래요.”진유라는 발을 뻗어 신을 신으려고 했다. 분명 거기에 있었는데 막상 발을 내딛고 보니 바닥을 밟은 것이었다.“뭐지?”진유라는 몇 번이나 신을 신으려 했지만 빗나가지 않으면 아예 바닥을 헛디디게 되었다. 어쨌든 보일러 때문에 춥지는 않았지만 말이다.그러다 자리에서 일어서자마자 바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바닥에는 단단한 타일이 깔려 있어 고통을 완화하는 장치가 전혀 없었다.진유라는 넘어진 후 너무 아파 눈물까지 날 지경이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곽동건은 어이가 없었다.그는 진유라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날 줄 몰랐기 때문에 그녀를 미처 잡지 못했다.그녀가 넘어진 걸 보고 다급하게 웅크려 앉아 그녀를 부축하려 했다.“안 다쳤어요?”“움직이지 마요.”진유라가 목소리를 떨며 곽동건의 동작을 제지했다.“아파요.”“어디가 아파요?”허공에 뜬 그의 손은 몇 번이나 그녀를 어루만져주고 싶었지만 다친 곳이 어딘지 몰라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겉으
신은지는 자기의 술버릇이 나쁜 걸 알고 있어 일부러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았다. 사람들을 다 보낸 후 그녀는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목욕하고 팩까지 붙였다.머리 말린 후 옷 입고 욕실을 나선 건 이미 한 시간 후의 일이었다.박태준은 이미 샤워를 마쳐 지금 침대 머리맡에 기대 문자를 하고 있었다.신은지는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 누웠다.그리고 협탁에 있는 휴대폰을 들어 진유라에게 문자를 보냈다.지금쯤 아마 집에 도착했을 테니 말이다.카톡을 열었는데 30분 전에 진유라에게서 게임 초대와 30초짜리 음성 메시지가 와 있다는 걸 발견했다.게임 초대를 보고서야 신은지는 진유라의 말이 비로소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게 되었다.그녀도 최근에 진유라에게 끌려가 게임 몇 판을 했었기에 ‘게임 서비스’라는 게 있는 걸 알았다.하지만 정작 그녀의 뜻을 알아차리게 되니 음성 메시지를 듣기 두려웠다.진유라가 혹시라도 무슨 충격적인 소식을 얘기했을까 봐서 말이다.박태준이 바로 옆에 있었기에 소리를 제일 낮게 틀고 귀에 댄 채 듣지 않은 이상 박태준도 들릴 게 뻔했다.신은지는 무음 모드를 켠 후 진유라에게 집에 도착했는지 물었다. 그리고 음성 메시지를 조금씩 문자로 전환하려고 했다.뒤에 있던 박태준이 갑자기 다가왔다. 도둑이 제 발 저린 신은지는 몸을 흠칫 떨다가 휴대폰을 베개 밑으로 쑤셔 넣었다.“왜 그래?”남자는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턱을 그녀의 어깨에 기대며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유라 씨가 뭐 같이 하자고 해?”그는 샤워를 한 후 바지만 챙겨 입었다. 상반신은 벗은 채 이불을 사이 두고 그녀의 등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신은지는 그가 진유라가 보낸 메시지를 봤는지 몰라 긴장하고 있었기에 다른 ‘꿍꿍이’가 있는 박태준의 생각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빨리 얼렁뚱땅 넘어가고 채팅 기록을 삭제할 생각이었다.신은지는 그의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대답했다.“같이 게임하재.”디테일하게 말 안 한 것뿐이지, 거짓말은 아니었으니까.“그
‘뽀뽀만 하자’는 남자의 말은 절대 믿어서는 안 된다.다음 날.신은지는 침대에서 일어날 힘도 없었다.다행히 오늘은 주말이라 출근을 안 해도 되었다.그녀는 침대에 누워 백 없이 하얀 천장을 바라보며 씩씩거렸다.“박태준, 이 짐승 같은 놈, 거짓말쟁이, 쓰레기!”한창 욕을 하며 신이 났는데 문이 열렸다.문 앞에 선 박태준은 신은지가 이미 깬 걸 확인하자 말했다.“일어나서 밥 먹어.”너무 피곤해서 침대 내려올 힘도 없는 그녀와 달리, 박태준은 그야말로 상쾌하고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어젯밤 대부분 힘을 쓴 사람은 그녀였으니 말이다.아침은 박태준이 직접 만들었다. 반찬 세 가지에 국 하나.신은지는 계단 손잡이를 잡고 느릿느릿 아래층으로 걸어 내려왔다.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것 같았다.박태준이 수저와 그릇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자 마침 이렇게 힘들어하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그는 기분이 좋은지 입꼬리를 씩 올렸다.“안아줄까?”신은지는 자기 몸을 사리지 않는 이런 그의 행동에 불만이 많았다.“너나 잘 챙겨. 걸음도 빨리 못 걷는데 날 안겠다고? 앞으로 정말 다리 못 쓰게 되면 다른 침실에서 잘 줄 알아...”밥을 반쯤 먹었을 때 박태준은 곽동건의 전화를 받았다. 일 때문에 걸려 온 전화였다.신은지는 곽동건이 지금 경찰서에 있다고 들은 것 같았다.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진유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어젯밤에 무슨 상황이었는지 물어보려던 찰나, 진유라가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은지야, 나 사고 친 것 같아.”신은지는 이렇게 조급한 진유라의 목소리는 처음이라 덜컥 겁이 나 밥 먹던 걸 그만두고 바로 현관 쪽으로 향했다.“왜 그래?”“나 곽동건이랑 잤어...”“...”신을 신으려던 신은지가 흠칫했다. 너무나도 예상 밖의 대답이었기 때문이다.방금 박태준의 전화에서 곽동건이 경찰서에 있다는 걸 엿듣긴 했는데 설마 진유라를 성폭행죄로 고소할 건 아니겠지?“너 지금 어디 있어? 내가 갈게.”진유라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집에
진유라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그 사람 아니고 내가 먼저 덮친 거 맞아. 그 사람은 원하지 않았는데 내가 그 사람 위에 올라타며...”진유라는 술에 취한 것뿐이지, 기억을 잃은 건 아니었다.어젯밤 일에 대해서는 비록 세세한 부분까지 생각이 나지 않지만, 어렴풋이 기억은 났다.괴로워하는 그녀를 보며 신은지는 자책감을 느꼈다. 어제 진유라를 신당동에 남겨두었어야 했는데 말이다.“그럼 지금 생각은 어때? 곽동건 씨랑 연애할 거야?”“아니.”신은지는 진유라가 이렇게 단호하게 거절할 줄 몰랐다.“정말 조금도 관심 없어?”조금이라도 호감이 갔어도 이런 일을 겪으면 웬만해서는 단호하게 거절하지 않을 텐데 말이다.“관심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야.”진유라가 입을 가리고는 그녀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못하더라고.”“응? 설마?”신은지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고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곽동건 변호사님 몸매도 좋고 체력도 좋아 보이던데 그렇게 엉망이야?”곽동건과 박태준은 가까운 사이이다. 설마 정말 끼리끼리라는 말이 맞을까?“엉망도 아니고 아예 없었다니까. 엉덩이가 엄청 아픈데 아무래도 엄청 짧고 굵기도 별로고 힘도 없는 모양이야. “진유라는 말하면서 엉덩이를 움직였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엉덩이가 아팠기 때문이다.“거기는 아무렇지도 않아.”신은지가 물었다.“피는 안 났어?”“몰라. 내가 깼을 때 곽동건 몸에 엎드려 있었어. 그 사람 깨울까 봐 신발도 들고 살금살금 나왔다고. 언제 피가 났는지 볼 새가 있었겠어? 그리고 우리는... 거실 바닥에서 한 것 같아. 바닥 타일 색깔이 짙어서...”“두 사람 정말 잔 거 맞아?”“확실...”진유라는 확신 있게 말을 내뱉고는 이내 주춤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관계를 가진 기억은 없고 그녀가 먼저 곽동건에게 키스한 것만 떠올랐다.‘그다음엔? 그다음엔 내가 뭐했지?’진유라는 옷깃을 내리고 고개를 들어 신은지에게 그녀의 목과 쇄골에 남은 흔적을 보여줬다.“가슴엔 손가락
저녁.고연우는 프라이빗 룸 문을 열었다. 안에 박태준만 있는 것을 보고는 궁금한 듯 물었다.“오늘 술 마시자고 하지 않았어? 왜 혼자야?”“할 말이 있어서 너만 불렀어.”그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고연우도 덩달아 진지해졌다.“무슨 일인데?”목이 말랐던 고연우는 먼저 술을 따라 한 모금 마시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술을 삼키기도 전에 박태준이 회색 상자 하나를 꺼냈다. 누가 봐도 반지와 같은 액세서리는 담는 상자였다.“큽...”급하게 술을 삼킨 고연우는 자칫 사레에 걸릴 뻔했다.“이게 뭐야?”박태준은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나 은지한테 프러포즈하려고. 이 반지 어떤지 봐주면 안 돼? 은지가 좋아할까?”고연우는 핑크색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를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이게 정말 예쁘다고 생각하는 건가? 태준이 안목은 진짜 언제 봐도 놀랍다니까... 이젠 어이가 없을 지경이야. 부잣집 자식들은 미적 감각도 키운다고 하지 않았나? 뭐, 시간이 있을 때 그림 전시회도 보고 그러는 거 아니야? 전시회도 어떻게 하지 못한 미적 감각이라면 구제 불능이네.’조명 아래에서 유난히 밝게 빛나는 핑크색 다이아몬드는 비싼 것을 제외하고 장점이 하나도 없었다. 다이아몬드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은 핑크색 유리라고 생각할 것이고, 잘 아는 사람은 차라리 안 사는 게 낫다고 생각할 것이다.고연우는 처음으로 말을 직설적으로 하지 않고 약간 돌렸다.“그건 은지 씨한테 직접 묻는 게 좋지 않을까? 당사자 의견이 가장 중요하니까.”그는 도무지 신은지가 좋아할 거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가 신은지에 대한 인상으로 절대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도 들었다.“프러포즈 반지가 결혼반지도 아니고, 마음에 안 들면 바꿀 수 있잖아.”박태준은 잠깐 고민하다가 일리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이상 반지에 관해 고민하지 않았다.“그럼 프러포즈는 또 어떻게 해야...”그는 말하다 말고 잠깐 멈칫했다. 그러다가 득의양양한 얼굴로 손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
박태준은 고연우를 힐끗 봤다. 그는 공예지가 누구를 닮았는지 알아채지 못했다, 그리고 신경 쓰지도 않았다. 조금 전에는 그냥 모르는 척 지나칠 수 없어서 도왔을 뿐이기 때문이다.“가자.”“잠시만요.”박태준을 불러세운 공예지는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아까는 진짜 고마웠어요. 혹시 연락처나 집 주소를 알려줄 수 있을까요? 옷은 깨끗이 세탁해서 돌려드릴게요.”“됐어요. 그냥 버려요.”말을 마친 그는 고연우와 함께 몸을 돌렸다. 공예지에게는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공예지는 박태준의 외투를 꽉 잡은 채 반짝이는 눈으로 점점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아무리 생각 없이 준 도움이라고 해도 그녀에게는 소중했다.“아까 그 여자 전예은이랑 닮지 않았어? 설마 그것 때문에 도와준 건 아니지?”“아니거든.”박태준은 애초에 공예지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고연우는 그가 불편한 듯 미간을 누르는 것을 보고 물었다.“왜 그래? 어디 아프면 병원에 갈래?”“아니. 최근 너무 무리했나 봐. 두통이 조금 있네.”재경그룹의 상황은 고연우도 잘 알았다. 박태준은 이미 며칠이나 야근했다. 그의 안색이 안 좋은 것을 보고 고연우는 말을 보탰다.“그래도 불편하면 병원에 가 봐.”“알았어.”...반지를 받은 다음 박태준은 계속 프러포즈에 관해 고민했다. 그는 데이트로 유명한 레스토랑을 예약하고 전문 업체도 찾았다. 마지막으로는 달력을 찾아 운수 좋은 날도 골랐다.신은지는 텅 빈 레스토랑을 둘러보며 물었다.“설마 여기 통째로 빌렸어?”이곳은 고급 레스토랑이다. 서비스를 보장하기 위해 하루에 받는 고객의 수량도 제한되어 있을 정도였다. 예약 한 번 하기 어려운 레스토랑이 텅 비어 있을 리는 절대 없다는 뜻이다.박태준은 신은지의 손을 잡으며 대답했다.“응.”레스토랑은 빌딩의 꼭대기 층에 있는데, 창가 자리에 앉으면 경중의 야경이 한눈에 보였다.몽롱한 조명, 우아한 피아노곡, 그리고 활짝 핀 꽃까지... 이 모든 것이 오늘의 식사가 평범하지 않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유로운 척하던 박태준은 다급하게 반지를 꺼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서서히 당황함이 서렸다.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주머니를 뒤졌다. 결혼반지가 사라진 것이다.‘뭐지? 나오기 전에 분명히 확인했는데? 이게 어떻게 없어질 수가 있어?!’분위기는 차갑게 식었다. 환호할 준비를 하던 사람들은 어색한 표정으로 손을 내려놓았다.“설마 반지를 안 가져온 거야?”나유성이 물었지만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고연우도 말이 없었다. 박태준은 공부를 아주 잘했다. 인간성이 뒤떨어진다고 해도 지능은 아주 높았다.아무리 기억력이 나쁘다고 해도 프러포즈하는 날에 반지를 안 가져오는 실수를 저지르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이런 일이 하루 이틀도 아니었다. 지난번에는 그와 백화점에서 만나기로 해놓고 잊은 적도 있었다.고연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상태가 좀 이상한데...”한쪽에서 강혜정이 박용선의 팔을 툭 쳤다. 정말이지 자기 손에 반지를 빼서 박태준에게 주고 싶은 지경이었다.그녀는 하루빨리 손주를 안고 싶었다. 더군다나 여자는 일찍 아이를 낳아야 몸이 빨리 회복했다. 회복이 늦으면 그것대로 고생이었다.진유라와 강태민은 화난 표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반지를 깜빡한 걸 보니, 신은지에게도 그다지 진심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반대로 진선호는 금방이라도 폭소를 터뜨릴 표정이었다. 다양한 표정의 사람 중에서 곽동건만 무덤덤하게 서 있었다.시간이 흐름에 따라 분위기는 점점 경직되었다. 사람들의 표정도 어색함의 극에 달했다. 프러포즈가 대답도 없이 끝날 무렵 신은지가 허리를 숙여 장미꽃 다발을 받아서 들었다.“좋아.”어색한 분위기는 그녀의 대답에 완전히 풀렸다.박태준은 상기된 얼굴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마음속의 걱정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의 기억력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강력한 두통과 함께 이제는 불길한 예감이 들 정도였다.그래도 두 사람은 정식 부부로 이어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전부 몰려와서 축하했고 눈치
여자는 병원의 간호사복을 입고 있었다. 생김새가 미인상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예쁘장한 편이었다.“저를 기억 못 해요?”공예지는 이곳에서 박태준과 마주칠 줄 몰랐다. 안 그래도 옷을 어떻게 돌려줄지 고민하던 참이었기 때문이다.질문을 끝낸 그녀는 괜한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 그녀의 얼굴 상태는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그날 밤 술집 주차장에서 저를 도와주셨잖아요.”“아...”박태준은 작게 머리만 끄덕일 뿐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원래도 생각 없이 도운 것일 뿐이었다.“옷은 깨끗이 세탁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만난 줄 모르고 안 가져왔네요. 집 주로를 알려주면 내일 보내드릴게요.”거물들은 낯선 사람에게 연락처를 남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공예지는 박태준이 준 옷이 무슨 브랜드인지 몰랐지만 딱 봐도 비싼 재질과 색감에 중고로 팔아도 어마어마한 값일 것으로 생각했다.박태준은 옷 한 벌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지만 돌려주지 않으면 그녀의 마음이 부족했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에게 남의 것을 탐하면 안 된다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이때 박태준의 이름이 호명되었다.“박태준 님!”“그냥 버려요.”공예지와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았던 박태준은 또 말을 보탰다.“보낸다고 해도 버릴 테니까 일을 귀찮게 만들지 말죠. 그날 그쪽은 유니폼을 입고 있었고, 저는 직원의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는 규칙 때문에 나섰어요. 다른 사람이었어도 도와줬을 테니까 마음에 두지 말아요.”박태준은 몸을 일으켜 안으로 들어갔다. 공예지는 바로 뒤에서 따라왔다. 그는 기분이 나쁜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공예지는 조부모 손에서 키워졌다. 때로는 친척한테도 가 있고 오빠, 언니들도 있어서 계란 하나 먹는 것도 눈치 봐야 하는 삶을 살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예민한 성격 덕분에 그녀는 단번에 박태준의 기분을 알아차렸다.“저는 여기 인턴이에요.”그녀는 병원에서 간호사로 인턴 중이었다. 오늘 이렇게 마주친 것도 전부 우연이었다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고연우는 짜증 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던지더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가세요. 나중에 송씨 아주머니한테 작업복 하나 달라고 하세요.”“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하린은 우유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예전에 마사지도 배운 적 있는데, 제가...”“그만 나가.” 고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피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우유가 쏟아지며 더럽혀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는 얼굴은 굳어진 채 입술을 오므렸다. 한참 후에야 한 마디 내뱉었다. “사모님께서 보낸 겁니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하린은 고연우의 차가운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 정말로 사모님께 저를 보내셨습니다.”“나가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서재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린은 금수저 남편을 찾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취직했다. 이를 위해 매니저에게 봉투까지 건넸지만 고연우의 사늘한 태도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서재를 나오자마자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모님...”하린은 갑자기 발걸음 멈추더니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었던 그녀는 사모님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도련님께서 드시지 않았어요...”비록 정민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하린은 괜히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마침 정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번 더 가져다주세요.”하린은 정민아의 말에 담긴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재벌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걸까? 설사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돈이면 충분할 텐데,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겨 상속 분배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 어쩔 생각인지.’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송씨 아주머니한테 익숙해졌는지 저를 좀 꺼리시는 것 같아요. 아
다음 날.정민아와 사연희는 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야...”주소월이었다. 사연희는 정민아의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주소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절친이라도 남의 가정사에 깊이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초대장 몇 개 빼놓고 못 보낸 것 같은데, 금방 보내고 올게. 쇼에 관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주소월을 흘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정민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소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 충분히 더 이상 정씨 가문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주소월이 여전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겠니?” 정민아가 거절할까 봐 주소월은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가 쇼를 열잖아? 오늘 밤 연회에 너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잠재 고객을 몇 명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어.”“지금 그 무리에서 잠재 고객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이세요?”그녀와 최민영의 갈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못한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반면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좋은 사람은 고아 때문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소월은 정민아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아야, 미안해. 엄마가 너를 데려오긴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너한테 이렇게 상처만 줬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를 정씨 가문으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또... 그 미친놈으로부터 구해줘서 고마워요.”마치 세월의 흔적을 덮은 한 자루의 칼처럼 서서히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민아야...” 주소월은 울먹거리며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그
정민아는 문을 열고 지친 몸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갈아신던 중 슬쩍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전화드렸잖아요. 저녁 먹고 온다고,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렸어요?”송씨 아주머니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고연우라는 말을 듣자 정민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렇군요.”“아가씨...”송씨 아주머니가 망설이며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제가요?” 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왜요?”“도련님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는데... 두 분 혹시 싸우신 거 아닌가요?”“그 사람이 기분이 안 좋다고 제가 달래줘야 하나요? 그럼 왕자님, 저녁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정민아는 피식 웃더니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먹든 안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굶으면 되죠.”송씨 아주머니는 시선을 정민아 뒤쪽으로 옮기더니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정민아가 뒤돌아보자 고연우는 난간에 기댄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려 있었고 옷자락은 허리선에 맞춰 깔끔하게 넣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를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배경처럼 흐릿해 보이게 만들었다.고연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사실 그는 조금 더 튕기고 싶었지만 계속 자존심을 부리다 이 무심한 여자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정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먹었어.”“네가 장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서 해결해 줬더니, 겨우 도시락 하나 사주는 거냐? 정민아, 너 정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 없어.”정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하자 덜 말려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치우치며 하얗고 맑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물방울까지 맺혀있어 고연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그 어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방안에 가득 찬 정민아의 향기가 그림자마냥 고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탓에 고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주먹을 말아쥐었다.술기운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고혹적인 자세 때문인지 고연우는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에 정민아는 문을 열고는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내가 불편해지면서까지 다른 사람한테 맞추긴 싫거든. 그러니까 일단 최민영부터 죽이고 와서 사랑 타령해.”“... 다른 건 안 될까?”“다른 거 뭐?”정민아의 산만한 시선이 고연우의 몸에 머물렀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보는 듯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너한테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뭐 다른 게 있긴 해?”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말임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웃긴 건 정민아의 말에 고연우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봐도 돈과 권력 외에는 정민아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몸에 고연우는 고개를 들더니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기생오라비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어.”정민아가 혹여 듣지 못할까 봐 고연우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어려서부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던 고연우는 저에게도 이렇게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필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하지만 정민아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얼굴 자랑 말고 가서 약이나 좀 사지 그래? 내가 너에 대한 흥미는 약의 자극을 받아야만 생길 것 같거든.”머리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아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도 입안에는 분노 가득한 험한 말들이 서러움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넌 앞으로 그냥 말을 하지 마.”
고연우의 질문에 정민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대학 때 후배.”그 말에 고연우는 아까 정민아를 보던 임우빈의 이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물었다.“쟤가 너 좋아해?”“응.”“...”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을 해버리는 정민아에 말문이 막혀버린 고연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너 저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 좋아했었어?”정민아의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임우빈한테 유난히 관대한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민아 앞에서 주책맞게 떠들어 댄 게 자신이었다면 정민아는 진작에 제 머리를 비틀어 화분으로 삼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정민아는 언짢아 보이는 고연우를 보며 말했다.“기생오라비 같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턱선이 당신처럼 뚜렷하진 못해 그래서. 그리고 뒤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격 떨어지는 일이야, 고연우 도련님.”고연우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올라가는 억양을 붙인 게 아무리 봐도 조롱 같았던 고연우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턱선이 나보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려서 그렇다고? 그럼 뭐 나는 늙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내 앞에서 내 아내를 탐내는 데 내가 얼마나 격을 차려야 한다는 거지? 난...”고연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참아냈다.“곧 이혼할 건데 뭘.”“꿈 깨.”혈관 속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느낌에 원래도 나빴던 기분이 더 완벽히 잡쳐버린 고연우는 정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이혼에 합의 안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어.”고연우의 말에 정민아가 문고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그럼 아직 살아있으니까 납골함이라도 직접 골라. 귀신 돼서도 네가 직접 고른 집에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겠지.”“정민아, 너...”고연우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문이 “펑”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탓에 하마터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고연우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누가 이딴 식으로 짜증을 내고 들
말을 안 하고 앉아있는 정민아에 기사는 정민아가 슬퍼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낱 외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답답한지 기사는 의자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진심으로 좋아하면 시험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야죠. 이런 식이면 남자는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남자들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여자의 유혹을 당해낼 남자도 없어요.”“저도 남자예요, 믿어도 좋아요.”끊임없이 말하는 기사가 귀찮았는지 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응, 믿으니까 출발해 빨리.”정민아가 고연우를 시험하는 건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 씨 집안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 보니 이 길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임우빈은 한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려 정민아를 바라보며 그 나이대 특유의 당찬 표정을 하고 말했다.“저렇게 양옆에 여자나 끼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홀려대는 남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누나 관심을 받을 자격도 없죠. 저는 어때요?”임우빈은 제 이두근을 자랑하며 말했다.“젊고 잘생긴 데다가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일편단심이에요. 누나 말곤 아무도 안 봐요, 길가는 암컷 강아지한테 눈길 안 줄 자신 있는데.”“... 너희 엄마는 네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여자를 집안 며느리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 아니?”정민아의 말에 임우빈은 툴툴대며 대답했다.“많이는 아니죠, 고작 세 살인데. 오버는 하지 말죠. 그리고 내가 정말 누나를 집에 데려가면 우리 엄마는 엄청 좋아할걸요. 적어도 앞으로 두 세대는 미모는 보장할 수 있으니까.”임우빈은 정민아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1학년 때 운동장에서 정민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정민아가 퇴학을 해버리는 탓에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정민아가 있다는 경인시까지 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여기서 취직
사연희는 잔뜩 감동한 얼굴로 정민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우리 가게 때문에 민아 씨만 고생했네요.”안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노 대표님의 생각을 바꿀만한 둘레의 허벅지를 찾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시간이 촉박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노 대표님이 술을 깨기 위한 시간이었다.사연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정민아는 해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냥 사연희를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그때 공민찬이 나오면서 말했다.“고 대표님, 방금 룸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사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고연우는 공민찬을 흘겨보며 언짢은 듯 말했다.“너만 입 달렸어?”“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공민찬은 사과 하나는 빨리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사모님께 말씀은 하셨어요?”“...”“대표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사모님 마음 못 돌려요. 사모님이 최민영 씨한테 괴롭힘 당할까 봐 문 앞에 사람까지 세워서 지키시면 뭐해요, 이런 건 대표님이 말씀 안 하시면 사모님은 영영 모르실 텐데요. 그럼 감동도 못 받으실 테고 사모님이 감동하지 못하시면...”그런 공민찬을 보던 사연희는 주먹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민아에게 귓속말을 했다.“안 되겠어,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밖으로 나가기 전 사연희는 한 번 더 공민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사연희가 만약 공민찬처럼 말 많고 사실만 얘기하며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비서를 뒀다면 얼마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을 텐데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고연우를 보니 허벅지 대표님의 성격은 꽤 차분해 보였다.“입 다물어.”그 차분한 고연우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공민찬 손에 들려있던 차 키를 뺏어 들고는 정민아를 보며 말했다.“가자.”“응.”정민아의 대답을 들은 고연우의 발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참 만에 땅에 닿았다.정민아의 조롱 섞인 거절이거나 분노는 너무나 익숙하고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