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은 그녀를 업고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분석했다. "강이연에게는 대비책이 있을 거야.” "음." 강이연의 과거 행동 스타일을 보면 알 수 있다. 신은지는 좀 짜증이 났다. 쇼핑하러 나오지 말걸 하고 생각했다가 쇼핑하러 나오지 않아도 강이연은 분명 다른 방법으로 자신을 괴롭힐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이번 문제는 좀 까다롭다. 그 중년 여자가 아들에게 신붓감을 찾아주려는 이유는 높은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막다른 골목에 몰린 아들을 위한 것이었다. 이유가 있든 없든 어쨌든 그 중년 여자는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현대 과학으로 아들을 구할 수 없으니 마지막 희망인 샤머니즘이라도 붙잡아야 했다. 엄마는 강하다. 그 중년 여자는 아들을 위해서라면 분명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강이연이 말한 남편, 자식, 집안을 잘 되게 할 타고난 팔자설을 정말로 믿는다면, 박태준의 경고 한마디 때문에 포기할 리가 없다. 신은지의 답답한 심정을 알아차린 박태준은 부드럽게 그녀를 달래며 말했다. "이 일을 해결할 방법이 있어.” "뭐?” "혼인신고서. 혼인관계증명서가 있으면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어. 그리고 네가 아무리 팔자가 좋다고 해도 이미 결혼한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어쩔 수 없어 .” "……" 함축적인 뜻으로 말한 박태준의 말의 의미를 신은지는 한참을 생각하고 나서야 이해했다. "박 대표님, 아직 인턴 기간도 마치지 못한 임시 남자친구라는 걸 잊지 마세요. 인턴도 못 채운 사람을 사장 자리에 앉힐 수 있어요?” "능력만 있으면 스펙은 상관없이 예외를 두고 뽑으셔도 됩니다.” 그는 거만하게 말했다.아무리 파격적이어도 팀장 정도로 승진될 수는 있어도 사장님으로 승진되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럼 네 회사에 그동안 그렇게 파격적인 승진이 몇 번이나 있었는데?” "한번." 박태준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진짜 있었다고? 신은지는 수상쩍게 그를 쳐다보았지만 그녀의 눈에는 그의 옆모습
박태준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맞는 말이었다. 이러쿵저러쿵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라는 말이다. 강태민은 박태준을 비웃으며 말했다. "그건 박 대표가 걱정할 필요 없어요. 이 혼약은 내가 처리해요. 내 명예를 위해 자손에게 식물인간에게 시집가라고 강요하는 그런 짓은 절대 하지 않을 거예요.” “……” 강태민은 신은지가 정말 그의 딸이라 해도 윗대의 빚을 갚기 위해 식물인간에게 시집가도록 강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박태준은 기쁘지 않았다. "말을 바꾸는 것은 신사적이지 않은 행동이라 비난받기 쉬워요.” "박 대표가 그렇게 신경 써주니 고마워요. 나도 이렇게 오랫동안 살면서 크고 작은 일들을 많이 겪었고, 앞으로 누구에게도 위협을 받지 않을 거예요." 강태민은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그녀의 아들에게 우리 강씨 가문이 은혜를 입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만으로 우리 강씨 가문이 멀쩡한 아가씨를 식물인간에게 시집 보낼 수는 없어요. 당시 아버지께서도 의사가 그녀의 아들이 깨어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혼약을 승낙한 거예요.” "오명을 뒤집어쓰는 일이 있더라도 그런 부도덕한 짓은 할 수 없어요.” 박태준은 정색하는 강태민을 보고 화가 나서 가슴이 아팠다. 강태민, 당신 정말 고상해! 아주 대단해! 드디어 강씨네 집안이 왜 이렇게 오랫동안 군천시에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이런 구부러지지 않는 성격으로는 경인시에서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 강태민이 말했다. "박 대표 일어나나요? 육지한에게 배웅하라고 할게요. 박태준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괜찮습니다. 혼자 갈게요.” 강태민은 욕을 먹더라도 그 혼사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면 신은지가 결혼을 했든 안 했든 아무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강태민이 박태준을 보는 관점은 그 식물인간과 같은 수준일 것이므로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좋다.박태준이 일어나 떠나려 하자 강태민은 그가 자지고 온 바둑을 다시 포장해 박태준에게 건넸다."이 선물은 너무 귀한 거라 받을 수
곽동건은 고개를 숙여 흥건히 젖은 자신의 가슴을 바라보았다. 젖은 셔츠가 몸에 달라붙어 가슴과 복부의 매끄러운 라인이 은은하게 비쳤다. 말끔한 정장에 넥타이를 매고 있는 곽동건의 손에 서류가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업무를 위해 온 것으로 보였다. 10여 초 동안, 아니 어쩌면 더 오랜 시간 정적이 흘렀다. 진유라에게 1초가 하루 아니 1 년과 같았다. 진유라는 자신이 지난번에 곽동건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 잊지 않았다. 당시 그녀는 곽동건에게 앞으로 자신과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겨우 며칠 만에 다시 만났다. 원수는 외 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곽동건 옆에는 의뢰인처럼 보이는 중년 여자가 어쩔 줄 몰라하며 입을 열었다 “곽……곽 변호사. 일단 닦아요." 그녀는 급히 두리번거리며 휴지를 찾았다. 곽동건은 젖은 셔츠를 손으로 털었다. "진유라 씨는 어떻게 이렇게 가는 곳마다 이 말썽이에요?”그의 말은 즉, 그녀가 가는 곳마다 재수가 없고, 마치 몸에 귀신이 붙어있는 것처럼 본인도 재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해를 입힌다는 말과 같았다. 진유라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스스로를 탓하며 말했다. "아마 적어도 천 년 동안은 재수가 없을 것 같네요.” "진유라 씨는 정말 자기 정체성이 뛰어나네요.” “??” 스스로를 비꼬는 것은 괜찮지만 다른 사람 자신을 비꼬니 진유라는 기분이 나빠졌다. 이 일도 그렇다, 사실 그녀 역시 피해자다. 곽동건은 그 두 가해자를 두고 추궁하지 않고, 굳이 진유라를 탓했다. 진유라가 고의로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 이 나쁜 놈은 믿지 않았다. “곽동건 씨, 당신이 변호사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내가……” 신은지는 급히 손을 들어 진유라의 입을 막았다. 진유라의 말은 모두 '우우'하는 소리가 되었다. 진유라는 고개를 돌려 억울한 표정으로 신은지를 바라보며 눈빛으로 말했다. [너는 내 절친인데 왜 저 남자 편을 들어!] "곽 변호 편을 드는 것
진유라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 곽 변호사님, 어쨌든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에 이렇게 독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요.” 곽동건에 비하면 박태준은 정말 신사다. 곽동건이 말했다. "진유라 씨 당신 스스로 약속한 거 아닌가요?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지 나더러 독하다고요?” “……” 이 상황을 돈으로 때울 수는 없겠지? 곽동건은 얼굴을 찡그리며 자신의 축축하게 젖어 몸에 달라붙어 매우 불쾌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셔츠를 잡으며 말했다. "진유라 씨 때문에 물벼락을 맞았는데 미안해서라도 나랑 같이 가서 옷 한 벌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럼 여기 일 어떻게 하고요?" 1천2백만 원이나 하는 배상금 문제가 남아 있는데, 필요 없다고? "비서가 알아서 해줄 거예요.” "그래도 안 돼요." 진유라는 오늘 선을 보기 위해 6센티미터 높이의 구두를 신고 있었다. 곽동건의 요구에 따라 그 몇 개의 초대형 쇼핑몰을 다 돌아보지 않으면 그는 절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면 그녀는 자신이 내일 침대에서 내려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은지 혼자 돌아가게 할 수 없어요. 내 마음이 놓이지 않아요.” 곽동건은 턱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박 대표가 데리러 왔어요.” 진유라가 그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니, 문밖에서 박태준이 들어오고 있었다. “……” 박태준은 밖에서 대치하고 있는 몇 사람을 보며 신은지에게 다가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신은지는 벌어진 일을 대충 말해주었다.박태준의 표정은 처음에는 아무렇지도 않다가, 그 여자가 신은지에게 음료를 뿌렸다는 것을 듣자마자 순식간에 얼굴이 차갑게 변하고 살기 가득한 눈으로 그 여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여자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배를 움켜쥐고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저... 배가... 배가 아파요." 여자가 많이 놀란 것 같았다. "……” 신은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기 귀찮은 박태
차실 안.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30분째 마주 앉아 있다. 강태민이 차를 우려 신은지의 앞으로 건넸다.“다른 질문은 없으십니까?”강이연이 신은지의 신분을 폭로한 지 3일이 다 되어 간다. 다른 집안에서는 신은지가 이혼했다는 사실을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그녀에게는 어떠한 문자도 받지 못했다.신은지는 컵을 쥐어 보였다.“한 씨 아주머니는 왜 석류산에 안 가는 거예요?”“...”강태민이 듣고 싶어하는 질문이 아니다. 신은지는 그가 직접 귀띔 하지 않는 이상 절대로 먼저 말하지 않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그날 이연이가 했던 말에 대해서 궁금한 거라도 없습니까?”그녀는 없습니다, 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강태민의 눈치를 살피고 하려던 말을 멈추었다.“강이연이 한 말이 사실이예요?”“네.”“혼약에 대한 일이요.”당시에 강이연은 그녀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처럼 행동했다. 곱게 자란 강 씨 집안의 아가씨도 거절하고 이러한 방법으로 벗어나려고 하는 모습이 어이가 없었다.만약 상대가 그녀의 말을 그대로 믿어 버리고 자신에게 불똥이 튀면 어찌하는가.“그 혼약은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임 씨 가문이 신은지를 귀찮게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신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모습이다.사실 신은지도 언제부터 강태민이 자신의 아버지가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지금까지 서로의 존재를 몰랐을뿐더러 찾은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신은지 씨를 강 씨 집안으로 들일 수 없을 것 같습니다.”혹여나 상대가 오해를 할까,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아무래도 집안 상황이 어수선하다 보니, 갑작스럽게 은지 씨의 존재를 밝히는 건 좋지 않아 보입니다. 은하랑 헤어질 때도 임신 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마지막 한 마디가 다시는 보지 않겠다는 말이었습니다.”강태민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주름 가득한 눈가에서 씁쓸함이 느껴졌다.“헤어지고 나서 저는 군천시로 돌아왔습니다. 군천시로 돌아
눈치 없는 박태준은 상황 파악을 하지 못했다.“군천시에는 원하시는 인물이 없을 겁니다. 경인에서 찾으시는 건 어떻겠습니까?”강태민이 코웃음을 쳤다. 이어서 이를 꽉 깨물고 말했다.“박 대표님 말씀이 맞습니다. 지한아, 경인에서 박 대표님을 제외하고 우수한 청년들 리스트로 만들어 와.”지시를 내리고 신은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하루에 두 명씩 만나보고 재미 삼아 사귀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싫증 나면 바로 다른 사람을 바꾸는 것도..”박태준은 혹여나 강태민의 사상이 신은 자에게 주입 될까, 서둘러 말을 끊었다. 자칫하면 매일 따라다녀야 하는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어머님은 아마 아버님의 이러한 성격 때문에 도망가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강태민은 곧이어 신은지의 시선을 느끼고 무엇이 자업자득인지 깨달았다.“은지 씨, 은하와 헤어졌던 이유를 단 몇 마디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이미 지난 일이다. 게다가 자신의 모친은 이미 고인이 된 지 10년이 넘게 흘렀다. 그녀는 두 사람이 헤어진 사유보다 한 씨 아주머니가 더 궁금했다.“어떻게 한 씨 아주머니가 석류산에 가지 않는다고 확신하시는 거죠?”강태민은 그녀의 말에 서류를 건네주었다.“한미나의 본명은 류정. 어렸을 때 부터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부모님이 남존여비 사상을 가지고 있던 탓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남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공장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10년 전에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강태석을 만나 인연이 되었지요. 하지만 겨우 한달도 되지 않아 강태석이 류정을 찾아가는 날이 급격히 적어졌습니다. 그 탓에 저희도 확실한 증거를 찾지 못했습니다.”과거, 중학교 졸업 출신에 짧게 만났던 여자라면 쉽게 찾을 수 없겠지만 그 여자가 한미나 라면 상황이 달라진다.그는 강태석의 별장에서 들었던 대화를 신은지에게 알려 주었다.“그 여자는 한미나가 확실 합니다. 언제 경인으로 왔는지 모르지만 제가 사람을 시켜 관찰한 결과, 밖으로는 절대로 안 나온다는 점을 알아냈습니다. 감
신당동.신은지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박태준이 뒤에서 그녀를 안았다.“강태민이 친아버지야?”신은지는 눈을 커다랗게 뜬 채 물었다.“몰랐어?“응, 몰랐어.”“몰랐는데 ‘아버님’이라고 말이 나와?”신은지는 뻔뻔한 그의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 그녀는 박태준이 정확히 파악한 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남자 소개 해주려고 하시는 모습에 내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 어떻게든 내가 주도권을 잡아야 하지 않겠어?”박태준의 말투에는 원망스러움과 억울함이 섞였다.“그리고 너도 가만히 있었잖아.”신은지가 답했다.“막 거절하던 참에 네가 들어올 줄은 몰랐지.”그녀의 말 한마디에 그의 기운이 다시 살아났다. 입가에 미소가 번지더니 큰 강아지처럼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하지만 키가 큰 탓에 전혀 편하지 않았다.“은지야, 이번 달 18일이 100년에 한번 있을 법한 좋은 날이야. 먼저 혼인 신고부터 하자. 그리고 내가 좋은 신랑감이라고 생각이 들 때 결혼식 올리는 게 어때?”박태준은 강태민이 신은지를 강 씨 가문에 정식으로 들이기 전에 서둘러 확실한 관계를 맺어야겠다고 생각했다.지금도 만만치 않은 도화살을 자랑하지만 이후에 강 씨 가문의 아가씨라는 신분까지 더해지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남자들이 달려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업계에서 몇 년 동안 종사한 그는 ‘선수를 치는 것이 유리하다’라는 점을 확실하게 알고 있다.신은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이 혼인 신고를 할 적절한 시기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의 흑심 가득한 제안이 마냥 싫지는 않았다.달라진 그녀의 태도를 보고 박태준은 계속 말을 이었다. 유창한 그의 말에 신은지는 순간 넘어갈 뻔했다.상대는 자신을 ‘신은지’ 로 대하는 것이 아닌 마치 사업 파트너처럼 대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자신의 어깨에서 밀어냈다. 그리고 그제야 다시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지금은 안돼.”“그럼 언제 할 거야?”“...”뚫어져라 쳐다보는 상대방의 시선
박태준이 말했다.“왔었어. 매번 네 다음 순서로 찾아 왔을 뿐이야. 네가 한번만 돌아 왔으면 내가 절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걸.”신은지는 못마땅한 얼굴로 그를 쳐다 보았다.“절 하고 다시 돌아 오는 사람 본 적 있어? 다시 돌아오면 묘지에서 돈이라도 주는 거야?”“..”두 사람은 인사를 끝내고 묘원을 나왔다. 박태준은 신은지의 차를 자신의 기사에게 부탁하여 신당동으로 보냈다.신당동과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주위에서 밥을 먹기로 했다. “나한테 빚진 선물은 언제쯤 갚아 줄 거야?”이미 여러 번 방해 받는 바람에 제대로 선물을 받지 못했다. 박태준은 마치 선물에 원한이 맺힌 사람 같았다. 그는 입맛이 별로 없어 젓가락을 내려 놓았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은지에게 선물을 받은 적이 없지 않은 가.신은지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밥 먹고 갈래?” 라며 물었다. 박태준은 순간 기분이 좋아져서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응, 좋아.”식사를 끝낸 두 사람은 식당에서 나왔다. 박태준은 차를 가지러 잠시 자리를 떴고, 신은지는 식당 문 앞에서 그를 기다렸다.이때, 강태민에게 전화가 걸려왔다.“한미나를 빼냈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좋지는 않아요.”상황이 좋지 않다는 말을 듣자 긴장감이 그녀를 맴돌았다.“어떤 상황이예요?”“물어봐도 대답 하지 않아요. 계속 울기만 할 뿐 입니다.”한편, 강태민은 미간을 짓누르고 있다. 거실에 앉아 있어도 훌쩍 거리는 소리가 여전히 귀에 맴돌아 머리가 아팠다.신은지는 엄숙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지금 가겠습니다.”곧이어 강태민은 주소를 알려 주었다.“안전하게 지한이를 보낼까요?”“아니요, 박태준이랑 같이 가겠습니다.”“..”참 끈질긴 놈이다. 오늘은 평일이 아닌가, 재경 그룹 일은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인가. 강태민은 이번 일이 끝나면 서둘러 신은지를 강 씨 집안으로 데려가 하늘 별장으로 이사를 시킬 생각이다, 만약 싫다고 하면 또 다른 별장을 사주면 되지 않은가.박태준은 차를 끌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고연우는 짜증 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던지더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가세요. 나중에 송씨 아주머니한테 작업복 하나 달라고 하세요.”“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하린은 우유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예전에 마사지도 배운 적 있는데, 제가...”“그만 나가.” 고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피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우유가 쏟아지며 더럽혀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는 얼굴은 굳어진 채 입술을 오므렸다. 한참 후에야 한 마디 내뱉었다. “사모님께서 보낸 겁니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하린은 고연우의 차가운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 정말로 사모님께 저를 보내셨습니다.”“나가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서재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린은 금수저 남편을 찾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취직했다. 이를 위해 매니저에게 봉투까지 건넸지만 고연우의 사늘한 태도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서재를 나오자마자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모님...”하린은 갑자기 발걸음 멈추더니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었던 그녀는 사모님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도련님께서 드시지 않았어요...”비록 정민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하린은 괜히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마침 정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번 더 가져다주세요.”하린은 정민아의 말에 담긴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재벌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걸까? 설사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돈이면 충분할 텐데,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겨 상속 분배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 어쩔 생각인지.’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송씨 아주머니한테 익숙해졌는지 저를 좀 꺼리시는 것 같아요. 아
다음 날.정민아와 사연희는 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야...”주소월이었다. 사연희는 정민아의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주소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절친이라도 남의 가정사에 깊이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초대장 몇 개 빼놓고 못 보낸 것 같은데, 금방 보내고 올게. 쇼에 관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주소월을 흘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정민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소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 충분히 더 이상 정씨 가문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주소월이 여전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겠니?” 정민아가 거절할까 봐 주소월은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가 쇼를 열잖아? 오늘 밤 연회에 너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잠재 고객을 몇 명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어.”“지금 그 무리에서 잠재 고객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이세요?”그녀와 최민영의 갈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못한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반면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좋은 사람은 고아 때문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소월은 정민아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아야, 미안해. 엄마가 너를 데려오긴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너한테 이렇게 상처만 줬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를 정씨 가문으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또... 그 미친놈으로부터 구해줘서 고마워요.”마치 세월의 흔적을 덮은 한 자루의 칼처럼 서서히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민아야...” 주소월은 울먹거리며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그
정민아는 문을 열고 지친 몸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갈아신던 중 슬쩍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전화드렸잖아요. 저녁 먹고 온다고,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렸어요?”송씨 아주머니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고연우라는 말을 듣자 정민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렇군요.”“아가씨...”송씨 아주머니가 망설이며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제가요?” 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왜요?”“도련님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는데... 두 분 혹시 싸우신 거 아닌가요?”“그 사람이 기분이 안 좋다고 제가 달래줘야 하나요? 그럼 왕자님, 저녁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정민아는 피식 웃더니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먹든 안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굶으면 되죠.”송씨 아주머니는 시선을 정민아 뒤쪽으로 옮기더니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정민아가 뒤돌아보자 고연우는 난간에 기댄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려 있었고 옷자락은 허리선에 맞춰 깔끔하게 넣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를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배경처럼 흐릿해 보이게 만들었다.고연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사실 그는 조금 더 튕기고 싶었지만 계속 자존심을 부리다 이 무심한 여자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정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먹었어.”“네가 장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서 해결해 줬더니, 겨우 도시락 하나 사주는 거냐? 정민아, 너 정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 없어.”정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하자 덜 말려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치우치며 하얗고 맑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물방울까지 맺혀있어 고연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그 어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방안에 가득 찬 정민아의 향기가 그림자마냥 고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탓에 고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주먹을 말아쥐었다.술기운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고혹적인 자세 때문인지 고연우는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에 정민아는 문을 열고는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내가 불편해지면서까지 다른 사람한테 맞추긴 싫거든. 그러니까 일단 최민영부터 죽이고 와서 사랑 타령해.”“... 다른 건 안 될까?”“다른 거 뭐?”정민아의 산만한 시선이 고연우의 몸에 머물렀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보는 듯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너한테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뭐 다른 게 있긴 해?”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말임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웃긴 건 정민아의 말에 고연우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봐도 돈과 권력 외에는 정민아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몸에 고연우는 고개를 들더니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기생오라비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어.”정민아가 혹여 듣지 못할까 봐 고연우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어려서부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던 고연우는 저에게도 이렇게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필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하지만 정민아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얼굴 자랑 말고 가서 약이나 좀 사지 그래? 내가 너에 대한 흥미는 약의 자극을 받아야만 생길 것 같거든.”머리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아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도 입안에는 분노 가득한 험한 말들이 서러움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넌 앞으로 그냥 말을 하지 마.”
고연우의 질문에 정민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대학 때 후배.”그 말에 고연우는 아까 정민아를 보던 임우빈의 이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물었다.“쟤가 너 좋아해?”“응.”“...”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을 해버리는 정민아에 말문이 막혀버린 고연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너 저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 좋아했었어?”정민아의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임우빈한테 유난히 관대한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민아 앞에서 주책맞게 떠들어 댄 게 자신이었다면 정민아는 진작에 제 머리를 비틀어 화분으로 삼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정민아는 언짢아 보이는 고연우를 보며 말했다.“기생오라비 같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턱선이 당신처럼 뚜렷하진 못해 그래서. 그리고 뒤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격 떨어지는 일이야, 고연우 도련님.”고연우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올라가는 억양을 붙인 게 아무리 봐도 조롱 같았던 고연우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턱선이 나보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려서 그렇다고? 그럼 뭐 나는 늙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내 앞에서 내 아내를 탐내는 데 내가 얼마나 격을 차려야 한다는 거지? 난...”고연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참아냈다.“곧 이혼할 건데 뭘.”“꿈 깨.”혈관 속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느낌에 원래도 나빴던 기분이 더 완벽히 잡쳐버린 고연우는 정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이혼에 합의 안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어.”고연우의 말에 정민아가 문고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그럼 아직 살아있으니까 납골함이라도 직접 골라. 귀신 돼서도 네가 직접 고른 집에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겠지.”“정민아, 너...”고연우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문이 “펑”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탓에 하마터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고연우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누가 이딴 식으로 짜증을 내고 들
말을 안 하고 앉아있는 정민아에 기사는 정민아가 슬퍼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낱 외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답답한지 기사는 의자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진심으로 좋아하면 시험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야죠. 이런 식이면 남자는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남자들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여자의 유혹을 당해낼 남자도 없어요.”“저도 남자예요, 믿어도 좋아요.”끊임없이 말하는 기사가 귀찮았는지 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응, 믿으니까 출발해 빨리.”정민아가 고연우를 시험하는 건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 씨 집안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 보니 이 길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임우빈은 한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려 정민아를 바라보며 그 나이대 특유의 당찬 표정을 하고 말했다.“저렇게 양옆에 여자나 끼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홀려대는 남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누나 관심을 받을 자격도 없죠. 저는 어때요?”임우빈은 제 이두근을 자랑하며 말했다.“젊고 잘생긴 데다가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일편단심이에요. 누나 말곤 아무도 안 봐요, 길가는 암컷 강아지한테 눈길 안 줄 자신 있는데.”“... 너희 엄마는 네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여자를 집안 며느리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 아니?”정민아의 말에 임우빈은 툴툴대며 대답했다.“많이는 아니죠, 고작 세 살인데. 오버는 하지 말죠. 그리고 내가 정말 누나를 집에 데려가면 우리 엄마는 엄청 좋아할걸요. 적어도 앞으로 두 세대는 미모는 보장할 수 있으니까.”임우빈은 정민아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1학년 때 운동장에서 정민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정민아가 퇴학을 해버리는 탓에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정민아가 있다는 경인시까지 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여기서 취직
사연희는 잔뜩 감동한 얼굴로 정민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우리 가게 때문에 민아 씨만 고생했네요.”안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노 대표님의 생각을 바꿀만한 둘레의 허벅지를 찾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시간이 촉박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노 대표님이 술을 깨기 위한 시간이었다.사연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정민아는 해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냥 사연희를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그때 공민찬이 나오면서 말했다.“고 대표님, 방금 룸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사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고연우는 공민찬을 흘겨보며 언짢은 듯 말했다.“너만 입 달렸어?”“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공민찬은 사과 하나는 빨리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사모님께 말씀은 하셨어요?”“...”“대표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사모님 마음 못 돌려요. 사모님이 최민영 씨한테 괴롭힘 당할까 봐 문 앞에 사람까지 세워서 지키시면 뭐해요, 이런 건 대표님이 말씀 안 하시면 사모님은 영영 모르실 텐데요. 그럼 감동도 못 받으실 테고 사모님이 감동하지 못하시면...”그런 공민찬을 보던 사연희는 주먹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민아에게 귓속말을 했다.“안 되겠어,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밖으로 나가기 전 사연희는 한 번 더 공민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사연희가 만약 공민찬처럼 말 많고 사실만 얘기하며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비서를 뒀다면 얼마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을 텐데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고연우를 보니 허벅지 대표님의 성격은 꽤 차분해 보였다.“입 다물어.”그 차분한 고연우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공민찬 손에 들려있던 차 키를 뺏어 들고는 정민아를 보며 말했다.“가자.”“응.”정민아의 대답을 들은 고연우의 발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참 만에 땅에 닿았다.정민아의 조롱 섞인 거절이거나 분노는 너무나 익숙하고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