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동안 계속 보냈는데 아무런 회신이 없었다. 그때 나유성은 그녀한테 마음이 없다고 생각해 보낸 편지를 버렸어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그러자 박태준은 꿋꿋이 서 있었고 정말 중요한 자리 빼고는 다 서게 되었다.신은지는 아무 생각 없이 물어본 거지 그 어떤 답을 얻으려는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박태준이 이상하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지금 박태준은 속으로 말할까 말하지 말까라고 고민하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사실 사랑하는 여인을 얻기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노력해야 하는 것도 맞는 말이긴 하지만 지난번에 신은지한테 거짓말을 이미 한번 했다. 그때는 자기한테 타당한 이유를 찾을 수 있었지만 편지 이 일에 대해 더 숨기면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박태준이 고민한 사이에 신은지는 서둘러 카드를 치워 박태준한테 넘겼다. “됐어. 어거 얼른 치워.”두 사람은 1층 창가에 앉아 있어서 그 카드들은 사람들 눈에 쉽게 띄기 마련이다. 신은지는 옆에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이 자기 네 쪽으로 쳐다 보는 걸 보게 되었다.그녀는 가게에서 나가 누구한테 당할 가봐 겁이 났다.“지금 뭐 결정된 게 아무것도 없잖아. 그리고 또 내가 다른 남자 좋아할 수도 있잖아. 그건 다 모르는 일이야.”신은지는 단순히 박태준을 놀리려고 말한 거였다. 능력 있고 잘 생긴 남자를 만나 본 여자는 눈이 높아 쉽게 다른 사람을 좋아하기 힘들다고 했다. 박태준처럼 얼굴도 반반하고 재력도 있는 사람도 찾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단점이라고 하기에는 잠자리할 때 스킬이 부족하고 부드럽지 못한 것이었다. 근데 이건 여러 번 시도하면서 좋아지는 거지 당장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헉.”신은지는 목을 가다듬고 쓸데없는 생각하고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사실 신은지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나중에 박태준처럼 이렇게 눈의 확 띄는 남자를 쉽게 만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박태준은 아무런 고민 없이 단정했다. “넌 다른 사람 좋아할 기회도 없어.”“왜?”“그렇게 되면 내가 마음 아파할 거니까.”신은
박태준은 고개를 숙이고 신은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얼굴에 불어오는 그의 뜨거운 숨결에 신은지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남자의 부드러운 입술이 그녀의 이마에 닿았다. 그리고…….그리고 아무런 일도 없었다.박태준은 그대로 몸을 일으키고 신은지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말했다.“일찍 자.”“…….”몸은 이미 뜨거워졌고 느낌도 왔는데 신은지가 상상했던 일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그렇다고 정색하면, 내가 너무 허기져 보이잖아.’그래서 신은지는 이불을 한방에 차버리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엉뚱한 일로 성질을 부리기 시작했다.“자긴 뭘 자! 아직 씻지도 않았는데. 몸에 먼지가 얼마나 많은데, 어떻게 그대로 침대에 내려놓을 수가 있어? 얼마나 더러운지 알아?”말을 마친 그녀는 박태준이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빠른 걸음으로 욕실에 들어갔다.박태준이 차에서부터 안고 온 탓에 신은지는 아직 외출 신발을 신고 있었다.슬리퍼를 갈아신기 불편해서 신발을 벗고 그냥 맨발로 걸어갔다.신은지가 샤워를 마치하고 나왔을 땐, 박태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그녀의 슬리퍼만 욕실 밖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아직 이른 시간이라 신은지는 잠이 오지 않았다. 술을 마셔서 속이 불편한 그녀는 일 층에 내려가 우유 한잔 데워서 마시기로 했다.‘박태준 그 녀석, 꽃다발을 받은 후부터 뭔가 이상하단 말이야.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걸 보니, 나한테 알려주고 싶지 않은 건가?’신은지는 이렇게 생각하며 우유를 한 잔 더 데웠다.방금 내려올 때, 서재 문틈 사이에서 새어나온 불빛을 봤다. 그래서 신은지는 우유를 들고 서재로 걸어갔다.그녀가 문을 두드리려는 찰나, 서재에서 탄내가 나는 걸 맡았다.‘설마 자살하려는 건 아니겠지?’신은지는 노크할 새도 없이 손잡이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그러자 책상 위에 놓인 향로에 불길이 이글거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향로 안에 던지려던 박태준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고 문 쪽을 쳐다보았다.이때 마침 박태준이 들고 있는
그와 동시에 다급한 목소리가 신은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장경준, 당신 아들이 납치됐습니다. 납치범이 장경준 씨랑 통화하고 싶답니다. 10초 밖에 없어요. 시간이 지나면 당신 아들을 죽이겠다고 했으니까, 얼른 받으세요.”수화기를 뺏으려던 신은지의 손이 허공에서 굳어버렸다.그리고 자기가 장경준 입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할 거란 걸 깨달았다.장경준의 아내와 아들의 안전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해도 장경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장경준은 일그러진 얼굴로 유리창에 덮쳐들며 횡설수설했다.“나 장경준이에요. 알았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그러니까 제 아들 놔주세요. 제발.”그는 이렇게 말하며 연신 머리로 유리를 박았다.“제발. 제가 이렇게 빌게요.”교도관은 장경준의 자해 행동을 미처 막지 못했다. 너무 세게 박은 이마에서 피가 났다.신은지는 유리를 따라 흘러내리는 피를 보며 넋을 잃었다.면회실에서 나왔을 때, 그녀의 손발은 아주 차가웠다.너무 기뻐서 울먹거리는 장경준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감사합니다. 감사해요.”교도소에서 나오자, 여름의 뜨거운 햇볕이 내리비췄다. 하지만 신은지는 따뜻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고, 그저 춥기만 했다.마음에서 전해져 나온 한기에 그녀의 두뇌마저 얼어버리고 말았다.신은지는 차에 탔다.교도소의 주차장은 뻥 뚫려 있어서 그늘진 곳이 전혀 없었다.뜨거운 햇볕 아래 오래 달궈진 차 안은 후끈했다.그러나 신은지는 마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것처럼 에어컨도 켜지 않고 그냥 앉아있었다.그러다 몸이 견디지 못하고 생리적인 항의를 하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그녀는 얼른 시동을 걸고 에어컨을 최대한 시원하게 틀었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신은지의 핸드폰이 울렸다.진유라한테 걸려 온 영상통화였다.신은지는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뭐해?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진유라는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나 콘서트 티켓 두 장 샀어. 너랑 나, 둘이 가면 딱 맞겠다. 드디어 나한테도 이런 기회가
공기 중에 가죽이 타는 악취가 진동했다. 창가 자리의 가장자리는 형체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부식되며 거품이 끓어올랐고 좌석 등받이에도 황산이 튄 곳이 모두 부식되었다. 만약 곽동건이 급 브레이크를 밟아 신은지를 향해 가던 황산의 방향을 틀지 않았다면, 지금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은 그녀의 얼굴이었을 것이다. 신은지는 진유라와 함께 반대편 차문 쪽에 바짝 붙어 앉아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팔뚝에 화상을 입었다. 곽동건이 막 소리치는 것을 들은 신은지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창문을 닫았지만, 반응 속도가 늦어 창문을 닫는 속도가 너무 느렸다. 그러나 신은지가 늦게 반응한 찰나의 순간은 이미 잘 준비되어 있는 상대방에게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신은지가 손을 떼고 뒤로 물러섰지만 부상은 이미 피할 수 없었다. 또한 결정적인 순간 진유라가 신은지를 잡아당겼기에 진유라의 손에도 황산이 튀었다. 그 차는 이미 유유히 그들을 지나갔다. 바람에 휩쓸린 낙엽 몇 개와 피할 수 없는 독설만이 남았다. ”똑바로 봐요, 이건 경고일 뿐이에요.” 곽동건은 차를 세우고 입고 있던 셔츠를 벗어 신은지에게 던졌다. ”상처에 묻은 황산을 깨끗이 닦아요.” 곽동건은 진유라의 팔뚝에 선홍 빛 화상을 힐긋 쳐다보며 말했다. "살갗이 벗겨지지 않도록 조심해요. 차 안에 물이 있어요?” "트렁크에 있어요.” 진유라는 이미 고통을 참을 수 없을 만큼 아픔을 느끼고 있었다. 진유라의 두 눈은 토끼처럼 빨갛게 물들어 있었고 엉엉 울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이성적으로 고통을 참고 있었다. 그녀는 다 큰 어른이 고통스러워 우는 것이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흉터가 남을까?” 신은지 진유라의 상처에 남아있는 황산을 닦아내는데 집중하며 말했다. "아니, 내가 제일 잘하는 피부과를 찾아서 가장 비싼 약을 사용해서라도 상처 안 남게 해 줄게.”곽동건의 셔츠 원단은 부드럽고 흡수력이 높아 피부에 2차 손상을 주지 않고 황산을 닦을 수 있었다. 진유라는 너무 아
곽동건의 전화를 받았을 때 박태준은 회의 중이었는데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고 주위에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있던 박태준은 온몸에 힘이 빠진 듯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조차 힘들었다. 10여 초가 지나서야 빠져나간 힘이 서서히 돌아왔다. 박태준은 굳은 표정으로 아무 말없이 일어나 성큼성큼 회의실을 걸어 나갔다. 한참이 지난 지금까지 자리에 있던 임원들은 박태준의 얼굴이 얼마나 흉악하고 우울했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미안해.” 둘 다 상태가 좋지 않았다. 신은지가 마치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정신세계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면 박태준은 마치 생명력 없는 인형 같았다. 박태준이 신은지의 손을 세게 잡자 그녀가 정신을 차렸다. “실버.” 신은지의 흐트러졌던 시선이 마침내 집중되어 차가운 박태준의 얼굴을 보았다. ”그들이 나를 공격했어.” "알고 있어.” 곽동건이 이미 전화로 그에게 간단히 보고했다. "유라에게 나를 데리러 오라고 하지 않았으면, 유라는 다치지 않았을 거야.” 박태준은 흉터 입지 않은 신은지의 다른 손목을 잡아 자신의 품에 그녀를 안았다. 박태준은 신은지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고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에 안겼다. “넌 모든 일을 예측할 수 있는 신이 아니야. 널 탓할 필요 없어.” 신은지는 박태준의 품에 안겨 익숙한 향을 들이마셨다. 박태준은 신은지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박태준의 무거운 호흡이 그녀의 귓가에 들렸고 그의 가슴은 심하게 오르락내리락거리고 있었다. 박태준의 품에 안긴 신은지는 마치 분출구를 찾은 기분이 들었다. 교도관이 전화기를 들고 회견장으로 돌진했을 때의 실망과 낙심, 그리고 진유라에게 해를 입혔다는 자책과 슬픔, 배후세력에 대한 거리낌 없는 분노, 그리고 수많은 감정 속에 감춰둔 두려움이 박태준의 품에 안기는 순간 닫혔던 마음에서 쏟아져 나왔다. 이 순간 강한 버팀목이 모두 무너졌다.박태준의 셔츠 자락을 움켜쥔 신은지는 셔츠가 상처를 스치며 통증을 유발했지만 손을 놓지
일을 마친 뒤, 몸에 힘이 다 빠진 신은지는 채 가시지 않은 욕망의 여운을 느끼며 침대 위에 누워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인 찢어진 콘돔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방에 어떻게 이런 게 있을 수 있지?” 박태준는 신은지를 씻어주기 위해 그녀를 침대에서 안아 들고 욕실로 가며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을 대비해서.” 손에 물이 닿지 않게 씻어야 하는 신은지를 위해 박태준은 그녀를 세면대 위에 앉혀 놓고 욕조에 물을 채웠다. 지루함을 느낀 신은지는 세면대 아래 서랍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시간을 보냈다. 지루함을 달래기 위한 행동이었기에 서랍은 좁은 폭으로 열렸다 닫혔다 했다. 그러던 중 서랍이 조금 길게 빠지자 신은지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서랍 안에 들어있던 파란색 상자를 본 신은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이게 화장실에서도 필요할 때가 있어?” 욕조에 물이 거의 다 차자 박태준은 신은지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박태준은 그녀를 안고 욕조로 가지 않고 무릎을 굽혀 그녀의 다리를 벌린 후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보라고 손짓하며 말했다. "이 자리가 딱 좋아.” "……” 신은지는 더 견딜 수가 없었다. 박태준이 다가와 키스하려 하자 신은지는 발을 들어 그의 가슴에 대었다. "오늘부터 나랑 3미터 떨어져 있어. 그렇지 않으면 넌 이 인턴 기간을 통과하지 못할 거야.” 신은지는 말을 마친 뒤 재빨리 발을 내렸고 세면대에서 내려왔다. ”지금 당장 욕실에서 나가.” 박태준은 조심히 신은지를 뒤에서 껴안았다.마침내 가까워진 관계가 다시 이전으로 되돌아왔다. "네가 물어봐서 대답한 것뿐이야. 항상 예쁜 너를 두고 장식용으로 사용했다고 말하수도 없잖아. 아니면 넌 내가 핑계를 대고 널 속였으면 좋겠어?” "……” 신은지는 화가 좀 가라앉았지만 매섭게 박태준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거 또 어디에 있어?” 혹시라도 나중에 누가 와서 서랍을 열고 이걸 본다면, 신은지는 그 자리에서 죽을 만큼 부끄러울 것이다. "……” 박태
신은지는 진유라를 보며 물었다. "어떻게 했을 것 같아?”‘ "나라면 너에게 미끼를 던지고 너를 유인한 다음 일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이야기할 거야. 첫째, 오늘일을 이야기한다. 둘째, 네가 아이를 해외로 보내고 그 교수를 그의 주치의가 되도록 성공시킨다. 세 번째는 내가 해외에서 정착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한다." 진유라의 말에는 허점이 있기는 했지만 꽤 설득력이 있었다. “인성이 그래서 가족과 친구들은 아직 완전히 믿을 수 없어. 속아서 미얀마로 간 사람들 봐봐. 스스로가 욕심을 부려서 간 것 외에 다 아는 사람에게 속아서 간 거야.” "그 사람은 네 어머니를 치어 죽인 범인이야. 만약 들고 있는 카드가 없으면 어떻게 할 수 있었겠어? 만약 장경준이 정말 돈 때문에 무고한 사람을 죽일 정도로 미쳤다면, 그는 선량한 사람이 아니라는 소리야. 그 사람이 과연 네가 관대한 성모 마리아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 "……” 신은지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진유라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그 전화가 있든 없든 간에 너는 네가 원하는 것을 들을 수 없었어. 그렇다면, 너는 자책할 필요가 없어." 진유라는 도톰한 입술과 섹시한 미모를 지녔다. 진유라는 멜론 한 조각을 신은지의 입에 넣어주며 말했다. “사람은 자신과 타협하는 법을 배워야 해. 모든 것을 짊어지려고 하지 마. 90kg의 몸이 1000kg의 짐을 지려고 하면 힘들지 않겠어?” "진실은 바로 거기에 있어. 어디 도망갈 곳도 없다고. 이번에 찾지 못하면 계속 조사하면 돼. 이 문이 막히면 우리는 창문을 찾으면 돼. 길은 찾아서 뚫으면 돼.” 입안 가득 멜론의 단맛을 느낀 신은지의 우울한 마음은 마치 먹구름 낀 하늘이 걷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유라야, 네가 문화재 가게를 차린 건 정말 재능낭비야.” "안 그러면 주민위원회 반장이라도 될까? 아니면 매일 봉사활동복을 입고 호숫가를 돌아다니며 실의에 빠진 젊은이들에게 힘을 내라고 설득하며 다닐까?" 진유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
신은지는 깜짝 놀랐다. 박태준은 이미 신은지의 옆 의자를 당겨 앉아 그녀의 의자 등받이에 팔을 걸치고 앉았다. 그의 태도는 신은지에 대한 소유욕이 넘치는 자세였다. "강 어르신, 강씨 가문의 가족 수십 명은 어르신이 통제하기에 부족한가 봅니다. 이제 어르신 손이 저희 박씨 가문까지 닿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강태민은 덤덤한 표정으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손을 탁자 위에 얹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박 대표와 은지 씨는 이미 이혼하지 않았나? 내가 왜 박씨 가문까지 손을 뻗는다고 하나?” "저와......” 박태준은 자신과 신은지가 사귀고 있다고 말하려다가, 문득 자신은 아직 정규직으로 전환되지 않은 정식 남자친구가 아니기 때문에 신은지가 대외적으로 공개할 수 없다고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박태준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처라도 해도 다른 사람에게 속아 넘어가는 걸 보고만 있을 수도 없고, 저는 지금 은지를 쫓아다니고 있어요…" 신은지는 책상 밑에서 재빨리 박태준의 양복바지를 잡아당겼다. 강태민이 오늘 신은지를 찾아온 것은 그녀와 공적인 이야기를 나누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강태민은 지금 그녀의 사장으로 앉아있는 것이다. 방금 박태준은 신은지의 사장 앞에서 그녀에게 고백을 한 것과 다름없었다. 이게 무슨 낯 뜨거운 상황인가?신은지는 박태준의 말을 끊었다. "여긴 왜 왔어?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 그녀의 말에 박태준은 입을 오므렸다. "집 경호원이 어떤 남자가 널 데려갔다고 하면서 막을 수 없었다고 나한테 전화했어.” 그는 사실 줄곧 신당동에 있었다. 황산을 뿌린 사람을 찾아냈고, 집 뒤에 있는 가사 도우미 방에 그를 가둬두었다. 박태준은 신은지를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고, 게다가 심문 과정에 피비린내가 날 수밖에 없어서 그녀에게 말하지 않았다. 박태준은 철저하게 조사한 후에 신은지에게 알려 줄 계획이었다. "내가 안 왔으면 너는 이 늙은 남자에게 속아 넘어갈 거야.” 박태준은 불만 가득
정민아는 팔짱을 끼고는 고연우가 들고 있는 꽃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연우 도련님, 이건 또 무슨 의미야?”“공 비서가 오늘이 여성의 명절이라고 했어.”“그래서?”주위는 조용하고 잔잔한 음악 소리가 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왔다.고연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정민아, 우리 이혼하지 말자.”너무 진부한 이야기였다. 정민아는 더 이상 이 주제를 논의할 의욕조차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 담뱃갑을 더듬었다. 옆의 재떨이엔 얇은 층으로 쌓인 담배꽁초가 있었고 그 중 절반 이상이 정민아가 피운 것임을 립스틱 자국이 말해주고 있었다.고연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민아가 담배를 피우는 걸 싫어하면서도 막지 않았다.얇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정민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담뱃불은 희미하게 밝아졌다가 사라지며 그녀의 눈을 비췄다. 그 순간, 눈 속의 차가운 무관심이 한층 누그러져 보였다. 은빛 실처럼 가늘게 펴지는 연기 너머로 정민아는 당당하고 제멋대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정민아가 그렇게 웃을 때마다 고연우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다음 순간 정민아가 말했다.“고연우, 너 이상한 거 아니야?”“그렇지. 이상하지 않았다면 여기 서 있지도 않았을 거야.”고연우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손목시계를 가리켰다.“시간 됐어. 레스토랑으로 가자. 예약해 놨어.”정민아는 이미 샘플 수정으로 지쳐 있었는데 고연우의 집요함이 정민아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고연우의 고급스러운 코트가 눈에 들어오자 정민아의 머릿속에 문득 나쁜 생각이 스쳤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그의 코트에 대고 눌렀다.‘치...’불꽃이 꺼지면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타는 냄새가 코트에서 퍼져 나왔다.정민아는 차가운 얼굴로 꺼진 담배꽁초를 옆의 쓰레기통에 던졌다.“꺼져.”고연우는 자신이 입고 있는 코트의 타는 자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민아의 손을 잡았다.“이 코트는 가격이 6자리 숫자야. 디자인에서 완성까지 3개월이 걸렸어. 나와 저녁 정도는 함께 먹어줘야 하
고연우는 벨트를 풀며 말했다. 남자는 원래 이런 상황에서 승부욕이 강해지기 마련인데 특히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그 감정이 더욱 크게 드러났다.“그런 암흑 같은 분위기는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아.”정민아는 원래 고연우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고연우는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을 것이니 고연우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정민아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고연우는 옷을 반쯤 벗었고 단단한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었으며 술기운에 물든 피부는 은은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공기 중에는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마치 곧 무언가가 터질 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가끔 고연우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정민아가 말했다.“요즘 운동 안 했어?”고연우는 어이없었다.“?”정민아는 손바닥을 고연우의 가슴 아래쪽에 대고 살짝 눌러보았다. 그러고는 평가하듯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육이 좀 줄었네.”“...”정민아는 마치 중대한 결정을 앞둔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확신에 찬 눈빛으로 고연우를 응시했다. 고연우는 모른 척하려 했지만, 결국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옷을 다시 입고 정민아의 손을 자기 몸에서 조심스레 떼어내더니 문을 향해 나가며 화가 난 듯 정민아를 한번 매섭게 쳐다보았다.“네가 이겼어.”완전히 흥미가 사라졌다....며칠 동안 고산그룹 대표실이 있는 층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있었다.공민찬이 급한 서류 묶음을 들고 고연우에게 사인을 받으려 일어서던 순간, 엘리베이터에서 소리가 났다. 그때 최민영이 가방을 들고나와 미소를 지으며 공민찬에게 인사를 건넸다.“공 비서님.”공민찬은 다가서며 말했다.“최민영 씨.”최민영은 사무실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연우 씨 사무실에 있나요?”“최민영 씨, 잠시만요”공민찬은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께서 지금 바쁘십니다. 우선 접대 실에서 잠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최민영은 눈썹
고연우는 짜증 내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던지더니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나가세요. 나중에 송씨 아주머니한테 작업복 하나 달라고 하세요.”“도련님, 혹시 어디 불편하세요?”하린은 우유를 들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저 예전에 마사지도 배운 적 있는데, 제가...”“그만 나가.” 고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손을 피하다가 우유를 엎지르고 말았다. 우유가 쏟아지며 더럽혀진 셔츠를 내려다보며 그는 얼굴은 굳어진 채 입술을 오므렸다. 한참 후에야 한 마디 내뱉었다. “사모님께서 보낸 겁니까?”그는 이를 악물고 한 글자 한 글자 뱉어냈다.하린은 고연우의 차가운 눈빛에 그 자리에 굳어진 채 말을 더듬었다. “도련님, 정말로 사모님께 저를 보내셨습니다.”“나가세요. 앞으로 제 허락 없이는 서재에 들어오지 마세요.” 하린은 금수저 남편을 찾기 위해 가사 도우미로 취직했다. 이를 위해 매니저에게 봉투까지 건넸지만 고연우의 사늘한 태도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품지 못했다. 서재를 나오자마자 난간에 기댄 채 그녀를 쳐다보는 정민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모님...”하린은 갑자기 발걸음 멈추더니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품었던 그녀는 사모님을 보면 본능적으로 불안했다. “도련님께서 드시지 않았어요...”비록 정민아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하린은 괜히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을 때 마침 정민아가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번 더 가져다주세요.”하린은 정민아의 말에 담긴 뜻을 단번에 눈치챘다.그녀는 자신이 잘못 이해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재벌 부인이 자신의 남편에게 여자를 찾아주는 걸까? 설사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돈이면 충분할 텐데,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겨 상속 분배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 어쩔 생각인지.’그녀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도련님께서 송씨 아주머니한테 익숙해졌는지 저를 좀 꺼리시는 것 같아요. 아
다음 날.정민아와 사연희는 쇼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아야...”주소월이었다. 사연희는 정민아의 과거에 대해 완전히 알지는 못했지만 주소월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자식을 챙기지 않는 엄마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설령 절친이라도 남의 가정사에 깊이 개입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노트북을 들고 일어나 말했다. “초대장 몇 개 빼놓고 못 보낸 것 같은데, 금방 보내고 올게. 쇼에 관한 건 나중에 다시 얘기해.”그녀는 주소월을 흘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다. 정민아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소월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어젯밤에 충분히 더 이상 정씨 가문과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전달했다고 생각했지만 주소월이 여전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오늘 밤에 연회가 있는데, 같이 가겠니?” 정민아가 거절할까 봐 주소월은 서둘러 한 마디 덧붙였다. “너희가 쇼를 열잖아? 오늘 밤 연회에 너와 같은 나이의 사람들이 많이 올 거야. 잠재 고객을 몇 명 발전시킬 기회가 될 수도 있어.”“지금 그 무리에서 잠재 고객을 발전시키라는 말씀이세요?”그녀와 최민영의 갈등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못한 사람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꺼렸고 반면 집안이 최씨 가문보다 좋은 사람은 고아 때문에 굳이 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주소월은 정민아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민아야, 미안해. 엄마가 너를 데려오긴 했지만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너한테 이렇게 상처만 줬네...”“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저를 정씨 가문으로 데려와 줘서 고마워요. 그 마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줘서, 그리고 또... 그 미친놈으로부터 구해줘서 고마워요.”마치 세월의 흔적을 덮은 한 자루의 칼처럼 서서히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민아야...” 주소월은 울먹거리며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그
정민아는 문을 열고 지친 몸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신발을 갈아신던 중 슬쩍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보았다.“아주머니, 제가 전화드렸잖아요. 저녁 먹고 온다고,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차렸어요?”송씨 아주머니는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아직 저녁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고연우라는 말을 듣자 정민아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2층으로 올라갔다. “아, 그렇군요.”“아가씨...”송씨 아주머니가 망설이며 그녀를 불렀다. “도련님께서 아가씨가 돌아오시면 같이 식사하자고 불러달라고 하셨습니다.”“제가요?” 정민아는 걸음을 멈추고 의아해하며 돌아봤다. “왜요?”“도련님께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셨는데... 두 분 혹시 싸우신 거 아닌가요?”“그 사람이 기분이 안 좋다고 제가 달래줘야 하나요? 그럼 왕자님, 저녁 드세요라고 말이라도 해야겠네요?” 정민아는 피식 웃더니 입가에 맴돌던 웃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먹든 안 먹든 마음대로 하라고 하세요. 먹기 싫으면 굶으면 되죠.”송씨 아주머니는 시선을 정민아 뒤쪽으로 옮기더니 표정이 조금 일그러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 도련님...”정민아가 뒤돌아보자 고연우는 난간에 기댄 채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방금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가 약간 젖어 있었고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셔츠에 검은색 정장 바지를 입은 채 단추는 몇 개 풀려 있었고 옷자락은 허리선에 맞춰 깔끔하게 넣었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에 긴 다리를 뽐내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배경처럼 흐릿해 보이게 만들었다.고연우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저녁 먹자.”사실 그는 조금 더 튕기고 싶었지만 계속 자존심을 부리다 이 무심한 여자는 그냥 가버릴 것 같았다.정민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난 이미 먹었어.”“네가 장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서 해결해 줬더니, 겨우 도시락 하나 사주는 거냐? 정민아, 너 정
“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 없어.”정민아가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하자 덜 말려진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치우치며 하얗고 맑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는데 그 위에는 물방울까지 맺혀있어 고연우의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었다.그 어떤 뜨거운 것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방안에 가득 찬 정민아의 향기가 그림자마냥 고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탓에 고연우는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주먹을 말아쥐었다.술기운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저 고혹적인 자세 때문인지 고연우는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그에 정민아는 문을 열고는 손님을 배웅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내가 불편해지면서까지 다른 사람한테 맞추긴 싫거든. 그러니까 일단 최민영부터 죽이고 와서 사랑 타령해.”“... 다른 건 안 될까?”“다른 거 뭐?”정민아의 산만한 시선이 고연우의 몸에 머물렀다. 사람이 아니라 상품을 보는 듯 곳곳을 훑어보고 있었다.“너한테 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만한 뭐 다른 게 있긴 해?”상처가 되는 말은 아니었지만 모욕적인 말임은 틀림없었다.하지만 웃긴 건 정민아의 말에 고연우가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아무리 봐도 돈과 권력 외에는 정민아가 관심을 가질만한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몸에 고연우는 고개를 들더니 그래도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그 기생오라비보다는 내가 더 잘생겼어.”정민아가 혹여 듣지 못할까 봐 고연우는 기생오라비라는 단어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어려서부터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던 고연우는 저에게도 이렇게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필하는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었다.하지만 정민아는 관심 없다는 듯 입꼬리를 움직이며 말했다.“얼굴 자랑 말고 가서 약이나 좀 사지 그래? 내가 너에 대한 흥미는 약의 자극을 받아야만 생길 것 같거든.”머리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이 아까의 설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도 입안에는 분노 가득한 험한 말들이 서러움과 함께 맴돌고 있었다.“넌 앞으로 그냥 말을 하지 마.”
고연우의 질문에 정민아는 사실대로 대답했다.“대학 때 후배.”그 말에 고연우는 아까 정민아를 보던 임우빈의 이상한 눈빛을 떠올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물었다.“쟤가 너 좋아해?”“응.”“...”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인정을 해버리는 정민아에 말문이 막혀버린 고연우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너 저렇게 기생오라비 같은 놈 좋아했었어?”정민아의 성격 때문에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임우빈한테 유난히 관대한 것만은 보아낼 수 있었다.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민아 앞에서 주책맞게 떠들어 댄 게 자신이었다면 정민아는 진작에 제 머리를 비틀어 화분으로 삼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정민아는 언짢아 보이는 고연우를 보며 말했다.“기생오라비 같은 게 아니라 어린 거야. 턱선이 당신처럼 뚜렷하진 못해 그래서. 그리고 뒤에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건 격 떨어지는 일이야, 고연우 도련님.”고연우 도련님이라는 단어에 올라가는 억양을 붙인 게 아무리 봐도 조롱 같았던 고연우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턱선이 나보다 뚜렷하지 못하고 어려서 그렇다고? 그럼 뭐 나는 늙었다는 소리야? 그리고 내 앞에서 내 아내를 탐내는 데 내가 얼마나 격을 차려야 한다는 거지? 난...”고연우는 간신히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참아냈다.“곧 이혼할 건데 뭘.”“꿈 깨.”혈관 속에서 불꽃이 튀기는 것 같은 느낌에 원래도 나빴던 기분이 더 완벽히 잡쳐버린 고연우는 정민아를 노려보며 말했다.“난 이혼에 합의 안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사이에 사별은 있어도 이혼은 없어.”고연우의 말에 정민아가 문고리를 잡아 내리며 대꾸했다.“그럼 아직 살아있으니까 납골함이라도 직접 골라. 귀신 돼서도 네가 직접 고른 집에 있으면 기분이라도 좋겠지.”“정민아, 너...”고연우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눈앞에서 문이 “펑” 소리를 내며 닫혀버린 탓에 하마터면 거기에 얼굴을 맞을 뻔한 고연우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누가 이딴 식으로 짜증을 내고 들
말을 안 하고 앉아있는 정민아에 기사는 정민아가 슬퍼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다고 한낱 외부인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 답답한지 기사는 의자에서 앞뒤로 움직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진심으로 좋아하면 시험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솔직하게 알려줘야죠. 이런 식이면 남자는 점점 더 밀려날 수밖에 없어요. 모든 남자들이 저런 여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여자의 유혹을 당해낼 남자도 없어요.”“저도 남자예요, 믿어도 좋아요.”끊임없이 말하는 기사가 귀찮았는지 정민아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꾸했다.“응, 믿으니까 출발해 빨리.”정민아가 고연우를 시험하는 건 그가 저를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주 씨 집안 간의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지금 보니 이 길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았다.임우빈은 한 손으로 좌석 등받이를 당기며 고개를 돌려 정민아를 바라보며 그 나이대 특유의 당찬 표정을 하고 말했다.“저렇게 양옆에 여자나 끼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 홀려대는 남자는 믿음직스럽지 못하잖아요. 누나 관심을 받을 자격도 없죠. 저는 어때요?”임우빈은 제 이두근을 자랑하며 말했다.“젊고 잘생긴 데다가 체력도 좋고 무엇보다 일편단심이에요. 누나 말곤 아무도 안 봐요, 길가는 암컷 강아지한테 눈길 안 줄 자신 있는데.”“... 너희 엄마는 네가 자기보다 몇 살이나 많은 여자를 집안 며느리로 들이려 한다는 사실 아니?”정민아의 말에 임우빈은 툴툴대며 대답했다.“많이는 아니죠, 고작 세 살인데. 오버는 하지 말죠. 그리고 내가 정말 누나를 집에 데려가면 우리 엄마는 엄청 좋아할걸요. 적어도 앞으로 두 세대는 미모는 보장할 수 있으니까.”임우빈은 정민아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1학년 때 운동장에서 정민아를 처음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결혼하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제대로 들이대 보지도 못하고 정민아가 퇴학을 해버리는 탓에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정민아가 있다는 경인시까지 와서 대학원을 다니고 여기서 취직
사연희는 잔뜩 감동한 얼굴로 정민아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우리 가게 때문에 민아 씨만 고생했네요.”안 그래도 하룻밤 사이에 노 대표님의 생각을 바꿀만한 둘레의 허벅지를 찾는 건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시간이 촉박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은 그저 노 대표님이 술을 깨기 위한 시간이었다.사연희가 오해한 걸 알아차린 정민아는 해명하기도 귀찮아져 그냥 사연희를 데리고 나가려 했는데 그때 공민찬이 나오면서 말했다.“고 대표님, 방금 룸까지 다 확인했습니다. 사모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그 말이 끝나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고연우는 공민찬을 흘겨보며 언짢은 듯 말했다.“너만 입 달렸어?”“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소릴 했네요.”공민찬은 사과 하나는 빨리하며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사모님께 말씀은 하셨어요?”“...”“대표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사모님 마음 못 돌려요. 사모님이 최민영 씨한테 괴롭힘 당할까 봐 문 앞에 사람까지 세워서 지키시면 뭐해요, 이런 건 대표님이 말씀 안 하시면 사모님은 영영 모르실 텐데요. 그럼 감동도 못 받으실 테고 사모님이 감동하지 못하시면...”그런 공민찬을 보던 사연희는 주먹을 말아쥐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민아에게 귓속말을 했다.“안 되겠어, 나 여기 더는 못 있겠어.”밖으로 나가기 전 사연희는 한 번 더 공민찬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사연희가 만약 공민찬처럼 말 많고 사실만 얘기하며 아픈 데를 콕콕 찌르는 비서를 뒀다면 얼마 참지 못하고 짜증을 냈을 텐데 무표정으로 듣기만 하는 고연우를 보니 허벅지 대표님의 성격은 꽤 차분해 보였다.“입 다물어.”그 차분한 고연우도 더는 듣기 싫었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공민찬 손에 들려있던 차 키를 뺏어 들고는 정민아를 보며 말했다.“가자.”“응.”정민아의 대답을 들은 고연우의 발이 허공에 잠시 머물렀다가 한참 만에 땅에 닿았다.정민아의 조롱 섞인 거절이거나 분노는 너무나 익숙하고 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