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 가득한 얼굴로 말하는 권하윤을 이 세상 어떤 남자가 막아낼 수 있을까?성현준은 권하윤의 어깨를 가볍게 끌어안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했다.하지만 권하윤은 좀처럼 울음을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연우도 성현준의 다리를 껴안고 현준 삼촌을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순간 성현준은 냉혈한 같은 유이안이 몹시 원망스러웠다.상황이 어떠하든 그래도 의사인데 어떻게 아픈 사람을 나 몰라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성현준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이혼하면 연우를 치료해주겠대.”권하윤은 어리둥절해졌다.성현준 같은 남자를 유이안이 붙잡고 놓아주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혼을 요구한다니 속으로 자제할 수 없을 만큼 기뻤다.권하윤은 표정을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말했다.“현준아, 연우를 위해서 먼저 이혼하는 척 해주면 안돼? 그리고 연우 병이 다 나으면 다시 유 원장을 쟁취해오면 되잖아. 그때가서 네가 성의를 충분히 보여준다면 너와 재결합 할 거야.”권하윤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현준아, 나도 어쩔 수가 없어서 그래.”성현준은 멍해졌다.방금 전까지도 성현준은 권하윤때문에 유이안과 이혼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만약 유이안과 이혼한다고 해도 그건 두 사람 사이에 문제가 생겨서 이혼하는 것일 뿐 누구 때문에 하는 이혼은 절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왔다.그런데 연우 때문에 유이안과 이혼을 한다고?유씨 가문의 명예와 유이안의 성격으로는 가짜 이혼 따위는 없을 것이고 한번 서명하면 그걸로 관계는 영원히 끝이라는 걸 성현준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사실 성현준과 유이안한테도 몇 년 동안의 좋은 시간이 있었다.그러나 그때는 두 사람 모두 일이 너무 바빴고 지금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아이를 가지지 않았었다.성현준은 비록 동의하지 않았지만 권하윤은 성현준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저녁 무렵 성현준이 떠나려고 하자 연우는 아쉬워하며 성현준을 껴안고 가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다.구구절절 애원하는 연우 때문에 성현준은 눈
유이안은 슈퍼마켓의 주차장으로 차를 몰고 들어갔다.GM 슈퍼마켓은 아시아에서 16%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글로벌 체인점이었다.듣기로는 사장이 B시 사람이라고 하던데 그러면 육만 오백평이나 되는 이곳이 플래그십 스토어인 셈이었다.유이안은 차에서 내리며 작은 케이크나 한 조각 사야겠다고 생각했다.2층 유리 캐비닛에는 예쁘고 정교한 케이크들이 조각조각 놓여 있었다.케이크를 보고 있던 유이안의 귓가에 한 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등학교 때 좋아하던 무스케이크를 아직도 좋아하시나 봐요.”듣기 좋은 중저음 목소리에는 약간의 유쾌함이 섞여 있었다.유이안이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눈길을 돌리자 반짝반짝 빛이 나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뭐랄까...훤칠하면서도 다부진 몸에 걸쳐진 캐주얼한 수트는 꾸밈없는 자연스러움을 보여주었지만 그의 얼굴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성숙미를 내뿜었다.딱 봐도 엘리트 냄새가 물씬 풍겨 나왔다.유이안의 이치대로라면 이렇게 빼어난 인물을 잊었을 리가 없었지만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유이안이 난처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남자는 품위 있는 태도로 손바닥을 내밀며 말했다.“GM 슈퍼마켓의 사장 강원영이에요. 유 선생님과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어요. 유 선생님보다는 두 학년 아래예요... 이렇게 유 선생님을 기억하는 이유는 고등학교 때 유 선생님께서 저를 심폐소생술과 음... 인공 호흡으로 살려준 적이 있어요. 제 생명의 은인이죠.”말을 마친 강원영은 빙긋 웃어 보였다.한참을 생각하던 유이안은 마침내 그 일이 생각났다.그날 그 사건 외에는 학교에서 별다른 교류도 없었는데 십여 년 만에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강원영은 유이안이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풍운아였다.자세히 살펴보니 강원영의 외모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무뚝뚝하고 시크한 쉽게 친해지기 어려운 훈남 스타일.유이안은 예의상 몇 마디 얼버무렸다.강원영은 유이안이 더는 대화를 이어 나가고 싶지 않아 한다는
성현준의 아내 유이안.찰칵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모습을 휴대폰 카메라에 남긴 유이안은 냉랭한 표정으로 성현준과 권하윤을 바라보았다.당황한 성현준은 재빨리 자기 손을 잡고 있는 권하윤을 뿌리치고 유이안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유이안은 냉소를 지으며 물었다.“뭔데요 그럼? 설마 성 대표가 몸을 못 가눠서 권하윤 씨가 부축하는 건가?”성현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유이안, 그렇게 비아냥거릴 필요까진 없잖아.”옆에 있던 권하윤은 재빨리 성현준을 말리며 말했다.“현준이 탓이 아니에요. 유 선생님, 오해하지 마세요. 내가 부주의로 현준이 팔을 잡은 거예요. 탓하려면 절 탓하세요.”권하윤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자신의 따귀를 힘껏 갈겼다.얼굴에는 붉은 자국이 떠올라 보기만 해도 끔찍할 정도로 무서웠다.권하윤은 유이안을 바라보며 애처롭게 말했다.“유 선생님, 제발 나와 현준의 지난 과거 때문에 연우한테 화풀이하지 말아줘요. 연우 이제 겨우 여섯 살이에요. 아직 앞날이 창창할 나이잖아요.”“유 선생님, 제가 무릎이라도 꿇을게요.”권하윤은 연적한테도, 심지어 자기 자신한테도 독한 사람이었다.그녀는 수많은 사람이 있는 슈퍼마켓에서 보란 듯이 유이안 앞에 무릎을 꿇더니 미안하다고 통곡하며 자신을 한 번만 봐달라고 사정했다.체면이 깎인 성현준은 권하윤을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권하윤, 이러지 마.”권하윤은 성현준의 팔을 뿌리치며 무릎을 꿇은 채로 통곡하며 말했다.“현준아, 정말 우리 잘못이야? 우리는 그냥 아이의 생명을 구하고 싶었을 뿐이잖아. 유 선생님은 의사잖아. 현준아... 의사라면 마땅히 환자를 치료하고 살려줘야 되는 거 아니야?”유이안을 바라보는 성현준의 눈에는 원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유이안은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사람탈을 쓴 두 짐승은 마치 한 쌍의 바퀴벌레 같았다.유이안은 손에 쥔 휴대폰을 들어 올리며 성현준을 보고 말했다.“내일 내 변호사가 이혼 소송을 대신할 거예요. 성 대표, 좋게
조은서는 확신할 수 없었다. 바람을 피우는 남자는 두 개의 핸드폰을 갖고 다니는 건가?유선우가 샤워를 하고 있을 때, 그의 애인이 셀카 한 장을 보냈다.아주 젊은 여자였는데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는 비싼 옷들을 입고 있으니 어딘가 부자연스러워 보였다.「선우 씨, 생일 선물 고마워요.」조은서는 눈이 아플 때까지 핸드폰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녀는 유선우 곁에 여자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다만 이런 여자일 줄은 몰랐다. 마음이 아픈 외에, 남편의 취향을 알게 되어 놀랐다.그녀는 미안하다고 생각했다. 우연히 유선우의 비밀을 알게 되었으니까 말이다.등 뒤에서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유선우가 물기에 살짝 젖은 채로 나왔다. 새하얀 샤워 가운은 선이 분명한 복근과 가슴을 가려주고 있었는데 더욱 섹시해 보였다.“언제까지 볼 거야.”그는 조은서 손에서 핸드폰을 뺏고 그녀를 힐긋 보더니 옷을 입기 시작했다.유선우는 아내에게 불륜을 들켜서 미안하다거나, 마음이 찔린다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조은서는 그런 유선우의 태도가 그의 경제 수입에서 온다는 것을 알았다. 조은서는 결혼 전에는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였지만 지금은 그저 유선우가 벌어다 주는 돈으로 사는 가정주부니까.조은서는 그 사진으로 따지고 들지 않았다. 따지고 들 수 없었다.나가려는 유선우를 본 조은서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선우 씨, 나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유선우는 천천히 벨트를 매고 조은서를 보며 작게 웃었다. 아마도 아까 침대에서 가냘픈 목소리로 반응하며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 모양이었다.“또 하려고?”이건 사랑이 아닌 그저 관계일 뿐이다.유선우는 조은서를 아내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실수였을 뿐이고, 어쩔 수 없이 한 결혼이니까.시선을 거둔 유선우는 침대맡에 놓인 파테크 필리프 시계를 손에 차며 담담한 말투로 얘기했다.“오 분 정도밖에 없어. 운전기사가 밑에서 날 기다리고 있고.”조은
6년이다. 조은서는 유선우를 6년 동안 좋아했다.힘이 빠진 조은서는 그냥 그대로 눈을 감았다....유선우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금요일 저녁, 조은서의 친정에는 큰일이 생겼다.조씨 가문의 장남인 조은혁이 JH 그룹의 경제 범죄 사건 때문에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을 수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10년은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치기 충분한 시간이다.그날 밤, 조은서의 아버지는 급성 뇌출혈로 병원에 실려 갔고 상황이 긴급해 수술이 필요했다.조은서는 병원 복도에 서서 계속 유선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지만 유선우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조은서가 포기하려고 할 때, 유선우가 문자를 보냈다.여전히 짧은 문자였다.「H시에 있어. 일이 있으면 진 비서에게 연락해.」조은서가 또 전화를 걸자 유선우는 전화를 받았다. 조은서는 급하게 입을 열었다.“선우 씨, 지금 우리 아빠가...”유선우는 그런 조은서의 말을 끊었다. 귀찮아하는 기색을 드러내며 얘기했다.“돈이 필요한 거잖아? 몇 번을 말해. 돈이 급한 거면 진 비서를 찾아가라고. 조은서, 듣고 있어?”...조은서는 고개를 들어 무표정으로 스크린을 쳐다보았다. 스크린에서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YS의약 그룹 대표 타워랜드 대절, 이성 친구를 위한 불꽃 축제」화면 속에는 불꽃이 예쁘게 터지고 있었다.젊은 여자가 휠체어에 앉아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조은서의 남편인 유선우는 바로 그 휠체어 뒤에서 핸드폰을 쥔 채 그녀와 통화하고 있었다.조은서는 눈을 깜빡였다.그러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선우 씨, 지금 어디예요?”유선우는 잠시 멈칫했다. 조사받는 기분이 좋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저 대충 대답했다.“바빠. 별일 없으면 이만 끊을게. 진 비서한테 연락해.”유선우는 울먹이는 조은서의 말투를 눈치채지 못했다. 다만 고개를 숙여 옆의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이 꽤 다정했다.조은서는 눈앞이 까매지는 기분이었다.아, 유선우에게도 부드러운 면이 있구나.등 뒤에서는 새엄마인 심
3일 후, 유선우는 B시로 돌아왔다.저녁, 어둠이 드리워진 별장에 검은색 차량이 들어와 시동을 껐다.운전기사가 내려서 차 문을 열었다.차에서 내린 유선우는 문을 닫았다. 물건을 들려고 하는 운전기사를 보며 담담하게 얘기했다.“내가 직접 올려갑니다.”거실에 들어서자 고용인들이 몰려왔다.“며칠 전, 장인어른께서 쓰러져서 사모님의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지금은 위층에 계십니다.”조씨 가문의 일은 유선우도 이미 알고 있었다.조금 무거운 심정으로 짐을 들고 올라와 침실 문을 여니 조은서는 화장대 앞에 앉아서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다.짐을 내려놓은 유선우는 넥타이를 풀면서 침대 옆에 앉아 조은서를 쳐다보았다.결혼 후, 조은서는 항상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물건 정리라거나, 디저트 만들기라거나. 만약 그녀의 예쁜 외모와 몸매가 아니었다면 유선우에게는 진짜 가정부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한참이 지나도 조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출장을 다녀온 유선우는 피곤했다. 조은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그도 얘기를 하지 않았다. 그저 옷장에서 가운을 가진 후 샤워실로 들어갔다.샤워를 하면서 그는 생각했다. 조은서처럼 나약한 성격의 사람이라면 유선우가 샤워를 마치고 나올 때쯤이면 이미 그의 짐을 정리하고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원래의 부드러운 아내로 돌아올 것이라고.유선우는 자신만만하게 생각했다.하지만 샤워실에서 나온 그가 원래 자리에 있는 캐리어를 봤을 때, 유선우는 조은서와 얘기를 나눠봐야겠다고 생각했다.유선우는 소파에 앉아서 아무 잡지나 들었다.한참 지나서야 시선을 들어 조은서에게 물었다.“아버님은 좀 어떠셔? 그날 밤은... 이미 진 비서를 혼냈어.”성의 한 톨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말투였다.조은서는 하던 일을 멈추고 시선을 들어 거울 속의 유선우와 시선을 맞추었다.거울 속의 유선우는 선명한 이목구비에 우아한 자태를 가진 남자였다.한참을 보던 조은서는 눈이 뻐근해질 때야 입을 열었다.“선우 씨, 우리 이혼해요.”유선우는 놀라서 굳어버렸
“그래요, 우리 집이 어려우니까 매달 2천만 원씩 주고 있죠. 하지만 그 수표를 받을 때마다 나는 내가 싸구려 여자로 느껴져요. 당신 욕구나 받아주고 받는 돈 같다고요!”...유선우는 차갑게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다.“정말 그렇게 생각해?”유선우는 조은서의 턱을 잡고 물었다.“당신처럼 남자한테 못 맞춰주는 여자가, 신음도 낼 줄 몰라서 고양이처럼 소리 내는 여자가 본인을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이혼하고 싶다고? 당신이 날 떠나서 어떤 삶을 살 것 같아?”조은서는 그런 유선우의 손길이 아파서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하지만 유선우는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차갑게 조은서의 약지를 봤다. 아무것도 없이 깨끗한 약지를 본 그가 물었다.“결혼반지는?”“팔았어요.”조은서는 슬픈 말투로 얘기했다.“그러니까 선우 씨, 우리 이혼해요.”그말을 마친 조은서는 온몸에 힘이 빠졌다. 유선우는 그녀가 6년 동안 사랑한 남자다. 만약 그날 밤이 없었다면, 그날 화려한 불꽃을 보지 못했다면, 이곳에 남아서 사랑도 없는 혼인 생활을 이어 나갔을 것이다.하지만 이미 모든 것을 봐버린 이상, 조은서는 더는 유선우와 함께 지낼 수 없었다.이혼하면 이것보다 더욱 힘들지도 몰랐다. 유선우의 말처럼 상사의 눈치를 보며 몇백만 원의 월급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후회되지는 않았다.말을 마친 조은서는 천천히 자기 손을 빼냈다.그리고 캐리어를 꺼내 자기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유선우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조은서의 여린 몸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는 조은서가 이렇게 행동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전혀 없었다. 갑자기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아무 예고도 없이 이혼하겠다니.유선우의 마음속에는 화가 피어올랐다.그리고 그는 바로 조은서를 안아 들어 침대로 던져버렸다.조은서 위에 유선우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유선우는 조은서와 얼굴을 맞댔다. 눈과 눈, 코끝과 코끝이 닿았다. 뜨거운 기운이 둘 사이를 감쌌다.그러더니 유선우가 입술을 조은서의 귓가로 가져가더니 얘기했다.“
유선우의 이성의 끈은 끊어지기 직전이었다.게다가 유선우 밑에 깔린 조은서의 온기가 전해져 왔다. 유선우는 조은서를 사랑하지는 않지만 이 몸은 사랑한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그는 매우 당연하게 이 몸을 소유하고 싶었다.조은서는 유선우의 어깨를 밀며 흐트러진 호흡으로 얘기했다.“선우 씨, 저 요즘 약을 안 먹어서 임신할지도 몰라요.”그 말을 들은 유선우는 그대로 굳었다.아무리 생각해도 충동적으로 행동해서 두 사람의 아이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한참 지나서 그는 웃더니 얘기했다.“요근래 생각할 게 많았나 봐?”조은서의 반항은 유선우의 눈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유선우는 한 손으로 침대를 짚고, 다른 한 손으로 침대맡의 서랍에서 아직 포장지를 뜯지 않은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 작은 상자에는 영어 자모 세 개가 적혀있었다.포장을 뜯으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유선우는 신경 쓰지 않고 한 손으로 포장을 뜯고 몸을 숙여 조은서에게 입을 맞췄다. 조은서는 여전히 반항하며 도망치려고 했다. 그리고 핸드폰은 계속 울렸다.결국 유선우는 짜증을 내며 핸드폰을 받았다.전화를 건 사람은 유선우의 어머니인 함은숙이었다.함은숙은 담담한 말투로 얘기했다.“선우야, 할머니께서 편찮으시다. 돌아와 봐야 할 것 같아. 맞아, 그 애도 데려와. 할머님이 그 애가 만든 영양 찰떡이 먹고 싶으시대.”함은숙도 조은서를 썩 좋아하지 않았기에 말투는 차가웠다.유선우는 진유진의 몸을 한 손으로 누르며 그녀를 내리깔아 보았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곧 데리고 갈게요.”조은서는 힘이 풀려 침대에 퍼질러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일어나서 옷을 입었다.유선우는 바지 지퍼를 올리고 조은서의 가녀린 뒷모습을 힐끔 보고 또 침대맡의 박스를 보더니 입술을 달싹이고는 먼저 나갔다.조은서가 내려갈 때, 유선우는 차에서 담배를 피고 있었다.이제 하늘은 완전히 어두워져서 불빛이 없이는 앞을 볼 수가 없었다.조은서는 흰 셔츠를 입고 긴 검은 치마까지 입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