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이안은 그의 손을 확 밀쳐냈다. 그녀는 조용히 남편을 바라보며 반문했다. “현준 씨, 지금 우리 관계에서 내가 굳이 당신을 미행해야 할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당신과 권하윤이 함께 어울려 다니고 심지어 그녀가 사는 아파트 근처에서 마치 부부처럼 행동하고 게다가 그녀에게 집을 사주고 모든 일을 다 챙겨주니 난 당신을 중혼죄로 고소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현준 씨, 난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아요. 내 인생에 그렇게 낭비할 시간이 없거든요.” ... 성현준은 순간적으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유이안의 손을 꽉 쥐고 남자다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씩 말했다. “유이안, 넌 항상 너의 인생, 너의 커리어만 생각하지. 내가 어떤 기분일지 생각해본 적 있어? 나도 가정의 따뜻함과 여자의 다정함이 필요해.” 유이안은 그의 가스라이팅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차갑게 말했다. “그런 건 권하윤에게서 이미 다 얻었잖아요? 현준 씨, 도대체 왜 이렇게 미친 듯이 구는 거예요? 뭘 더 바라는 거죠? 부도 얻고 자유도 얻었으니 이제 권하윤과 결혼 서류만 작성하면 되겠네요. 그 여자는 당신한테 그토록 많은 노력을 쏟았는데 적어도 권하윤에게 책임은 져야 하지 않겠어요?” 성현준은 유이안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유이안의 차가운 웃음은 사라졌고 성현준의 얼굴을 바라보며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현준 씨, 난 지쳤고 피곤해요. 지난 몇 년 동안 우리에게도 화해할 기회는 있었지만 권하윤의 전화 한 통이면 당신은 그녀에게로 달려갔잖아요. 그런데 나는 성현준의 아내일 뿐만 아니라 병원의 운영과 수많은 환자의 생명을 책임지고 있어요. 당신 때문에 감정이 휘둘리면 나 자신도 망가지게 돼요. 오늘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 그래도 아직은 서로 깨끗하게 끝내고 싶어서예요.”성현준은 맥없이 뒤로 물러섰다. 잠시 후, 그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배은망덕하다는 거지, 그렇지?”유이안은 여전히 담담하게 말
성현준은 지금껏 이렇게 비참한 적이 없었다. 결혼 7년 만에 그들은 결국 서로의 체면을 벗어던졌고 더 이상 상대에게 여지를 주지 않았다. 유이안은 이 결혼에서 온전히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녀의 마음에는 상처가 있었고 성현준은 상처 입은 짐승 같았다. 특히, 유이안이 경멸하는 목소리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라고 말했을 때 그는 모욕감을 느꼈다. 성현준은 유이안을 노려보고는 혼자 서재로 가서 의사를 불러 상처를 치료해 달라고 부탁했다. 내일 중요한 주주총회가 있었기 때문에 이마에 상처가 남아 있으면 보기에 너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재에서 유리장에 비친 자신의 상처를 살펴보던 성현준은 문득 하얀 셔츠에 묻은 립스틱 자국을 발견했고 오늘 유이안은 화장을 하지 않았던 것을 기억해 냈다. 이 립스틱 자국이 권하윤의 것일까? 성현준의 기분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때, 바깥에서 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큰 짐을 옮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성현준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서둘러 밖으로 나가 보았고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왔다 갔다 하며 짐을 옮기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옮기는 건 모두 유이안의 짐이었고 밤늦은 시간이라 복도에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리고 그의 아내, 유이안은 이미 검은색 트렌치코트를 걸치고 단정하게 정돈된 모습이었다. 한 손에 20인치 캐리어를 들고 아래로 내려가고 있는 아내를 보자 성현준은 이마의 상처도 잊고 그녀를 쫓아가 물었다. “이안아,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유이안은 차갑게 웃으며 단호하게 선언했다. “성현준 씨, 우리 결혼은 끝났으니 더 이상 함께 살 이유가 없어요. 내일 내 변호사가 이혼 서류를 당신 회사로 보낼 거니 시간을 내서 잘 읽어보길 바라요. 이건 우리 인생의 새로운 시작이자 합리적인 끝이에요.”그녀는 너무나 이성적이었다. 성현준은 이 말에 매우 불쾌했고 그는 이삿짐을 옮기는 직원들을 피해 가며 차갑게 말했다. “네가 이혼하자고 한다고 우리가 이혼할 수 있을
고용인은 그를 믿지 않았지만 주인에게 반박하지 않았다. 성현준의 머리가 맞아 멍청해졌고 헛된 상상을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때, 정원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다. 성현준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유이안이 자신에게 아직 마음이 있어서 돌아온 것이라고 확신했고 그들의 7년간의 결혼을 그녀가 쉽게 포기할 리 없다고 그는 믿었다. 방금 했던 말은 그저 화가 나서 한 말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성현준은 참지 못하고 그녀를 맞이하러 나갔다. 그러나 차가 가까이 오자 그는 그것이 유이안이 아니라 자신이 부른 의사의 차라는 것을 알았다. 달빛 아래서 성현준의 잘생긴 얼굴에는 말할 수 없는 상실감이 가득했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보다 더 슬펐다. 의사가 집에 들어오자마자 뭔가 잘못되었음을 눈치챘다. 여주인의 물건들이 모두 옮겨졌고 집안은 텅 비어 있었으나 의사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성현준의 상처를 치료한 후 진료비를 받은 뒤 서둘러 떠났다. 하지만 장 의사는 소문을 퍼트리기 좋아하는 사람이라 집에 돌아가자마자 아내에게 성급히 말했다. “권성기술회사의 성 대표님이 아내와 별거 중이래.” 의사가 떠나고 난 뒤 성현준은 침실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텅 빈 침실을 보기가 싫었고 부부가 별거 중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어려웠다. 그는 계속 서재에서 일을 처리했고 창문을 열어둔 채 밤바람을 맞으며 고독하게 밤을 보냈다. ...아침이 되어서야 그는 침실로 돌아가 몸을 단정히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아침 9시 정각, 그는 권성기술회사 회의실에 앉아 주주총회를 힘차게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사업적으로 성공하기만 하면 유이안이 자신을 더 높게 평가하고 이혼을 쉽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강원영보다 자신이 절대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회의가 끝난 후 성현준은 비서실로 돌아갔다. 주 비서가 그에게 커피를 내밀며 미소 지었다. “성 대표님, 김 변호사라는 분이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사모님께서 보내셨다고 하네요..
어쩔 수 없이 김 변호사는 USB 하나를 꺼냈다. 그는 성현준에게 말했다. “이건 유이안 씨의 마지막 자비입니다. 성 대표님, 이혼 때문에 체면을 잃고 싶진 않으시죠? 제 생각에는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유이안 씨는 협의서에서 성 대표님의 재산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두 분 사이에 재정 문제는 없으니 이건 정말 흔치 않은 일입니다. 다른 여자였다면 성 대표님 같은 경우에는 파산하지 않는다고 해도 큰 타격을 입으셨을 겁니다.”성현준의 눈가가 약간 붉어졌다. 그는 차갑게 말했다. “이혼하고 싶으면 유이안이 직접 와서 나랑 얘기하게 해요.” 김 변호사는 성현준이 마음을 돌리길 기다렸지만 결국 아무런 성과 없이 떠나야 했다. 하지만 이날부터 유이안은 별거를 신청했고 이는 성현준이 끝까지 손을 놓지 않더라도 별거가 2년이 지나면 법적으로 이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저녁 무렵, 황혼의 시간이었다. 성현준은 권하윤의 전화를 받고 연우를 보러 가는 것과 동시에 의사와 연우의 치료 방안을 논의하러 갔다. 하지만 그가 병실에 도착했을 때 권하윤은 병실에 없었다. 그는 연우에게 물었다. 연우는 침대에 앉아 새로 받은 인형을 안고 있었고 그녀의 얼굴에는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엄마는 아빠를 배웅하러 갔어요. 아빠가 연우를 보러 오셨거든요.” 성현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연우의 아빠? 권하윤은 연우의 아버지와 이미 완전히 끝났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 남자는 연우의 생사에 대해 한 번도 신경을 쓴 적이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입원 병동의 비상 계단에서 권하윤과 30대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준수하게 생겼지만 그의 옷은 낡고 색이 바랜 상태였으며 권하윤이 입고 있는 명품 옷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권하윤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유신 씨,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나 좀 찾지 말라고요, 제발 나 좀 그만 찾아요! 당신 왜 내 말을 못 알아들어요? 당신이 여기 와서 연우를 본다고 무슨 소용이 있
오는 사람은 성현준이었다. 하지만 그가 도착했을 때 비상 계단에는 권하윤 혼자뿐이었다... 그녀는 한없이 연약한 모습으로 성현준을 보자마자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현준아, 유신은 정말 나쁜 사람이야! 연우가 여기서 치료받고 있다는 걸 알고는 우리 모녀에게 찾아와서 괴롭혀. 인형 하나로 연우를 속여 좋은 아빠인 척했지만 너도 알다시피 유신은 평소에 연우가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아. 그런데 이제 와서 연우를 이용해 4000만 원을 달라며 협박하고 있어... 노력하지 않고 도박으로 한몫 잡으려는 생각만 하고 있어. 현준아, 나는 너무 불행해. 내가 사람을 잘못 만난 건 받아들일 수 있지만 연우는 아무 죄가 없잖아. 이번에는 유신을 쫓아냈지만 언제 또 찾아와서 문제를 일으킬지 모르겠어.” ...권하윤의 연기는 정말 뛰어났고 성현준은 이를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앞에 있는 이 연약한 여자는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임신 중에 부잣집 아들과 엮였고 그 때문에 딸 연우가 선천적으로 심장병을 앓게 되었다는 사실을 그는 꿈에도 몰랐다. 물론 그 부잣집 아들은 그녀를 가지고 놀다 결국 버렸다. 결과적으로 고통받는 건 오로지 연우뿐이었다. 성현준은 너무나도 마음이 아팠다. 그는 권하윤을 위로하며 말했다. “걱정 마, 내가 그 어떤 사람도 너를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야.” 그가 이 말을 할 때 그는 이미 유이안을 잊고 있었고 그가 유이안을 되찾고 싶어 했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지금 그의 눈에는 오직 눈물을 흘리며 가엾게 보이는 권하윤만이 있었다. 권하윤의 입술은 계속 떨리고 있었다. 잠시 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성현준의 품에 안겼고 눈물은 비처럼 쏟아졌다. “현준아, 만약 네가 없었다면 나와 연우는 어떻게 됐을지 정말 상상도 못 하겠어... 유신은 분명 연우를 데려가서 팔아넘기려고 했을 거야. 유신은 양심이라고는 없는 사람이야.”성현준은 마음이 산산조각나는 것 같았다. 그는 계속해서 권하윤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
연우는 겁에 질려 그 인형을 꼭 안고 조심스럽게 그들을 쳐다보았다. 성현준은 권하윤에게 말했다. “아이를 겁주지 마. 그냥 물로 씻으면 돼.” 그 말을 마치고 그는 양복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작은 식탁 위에 올려놓고 병실에 딸린 화장실로 들어갔다. 성현준의 휴대폰 비밀번호는 권하윤이 몰래 본 적이 있었다. 화장실 안에서 물소리가 들려오는 동안 권하윤은 살짝 성현준의 휴대폰을 집어 들고 연우를 향해 경고했다. 연우는 엄마가 말한 대로 얌전히 있었다. 왜냐하면 말을 듣지 않으면 엄마는 자신을 거리로 내쫓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권하윤은 성현준과의 이혼 진행 상황만 확인하려 했을 뿐이었는데 차 안에서 자신과 성현준이 나눈 열정적인 순간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이 영상은 유이안이 성현준에게 보낸 것이었다. 권하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이 영상이 퍼지면 성현준과 유이안의 관계는 다시는 회복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문이 퍼지면 유이안은 성현준과 완전히 선을 그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권하윤은 재빨리 성현준의 휴대폰으로 영상을 촬영했다. 모든 작업이 끝나자 성현준이 화장실에서 나왔다. 휴대폰은 원래 자리로 돌아갔고 연우는 고개를 숙인 채 인형을 만지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엄마가 아까 겁을 주면서 말을 하면 병원 밖으로 내쫓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성현준은 그리 오래 머물지 않았다. 저녁 7시쯤, 그는 병실을 나섰고 차에 올라타 유이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자 결국 메시지를 보냈다. 한 글자 한 글자 신중히 써 내려갔다. [이안아, 지금 어디 있어?] ...유이안은 강원영의 집에 있었다. 퇴근할 때 강원영이 전화를 걸어 집에 와서 아이를 봐달라고 요청했다. 유이안은 그에게 신세를 졌으니 그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고 비서를 통해 전달 사항을 정리한 후 주차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녀가 지하로 내려왔을 때 롤스로이스 고스트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강원영이 차 옆에 서 있
비록 강원영의 태도는 느긋했지만 유이안은 성숙한 여자로서 그가 조심스럽게 떠보는 것을 날카롭게 눈치챘다. 유이안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나의 이혼에 대해 묻고 싶은 거지?”강원영은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대답하지도 않았고 더 이상 추궁하지도 않았다. 남자의 깊은 눈빛은 그의 마음을 말하고 있었고 성숙한 여자라면 누구나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잠시 짧은 침묵이 흘렀고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었다. 유이안은 약간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운전해.” 강원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시동을 걸었다. 이후 한참 동안 그들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유이안은 옆으로 고개를 돌려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후, 그녀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 “강원영, 난 성현준처럼 되고 싶지 않아. 관계는 깨끗하게 시작되어야 해. 우리 지금은 그저 동창이거나 의사와 환자의 관계일 뿐이고 기껏해야 평범한 친구야. 만약 네가...” 강원영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마세요, 저는 선을 넘지 않을 거예요.”유이안은 침묵했다.그가 유이안의 말을 끊어버렸고 유이안이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모른다. ...아마 차 안 분위기가 너무 답답했는지 강원영은 손을 뻗어 음악을 틀었다. 그는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고 취향이 유이안과 비슷했다. 조용하고 시끄럽지 않는 음악이었다. 유이안은 YS 병원의 원장이자 최고의 외과 의사이기도 하여 체력 소모가 컸다. 그래서 의자에 기대어 음악을 듣자 어느새 잠이 들었다. 몽롱한 상태에서 유이안은 남성용 외투가 자신의 몸을 덮고 있는 것을 느꼈고 그 외투에는 상쾌한 향과 함께 은은한 담배 향이 섞여 있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인식한 것은 강원영도 담배를 피우는 사실이었다. 30분 후, 차는 한 별장으로 들어섰다. 차가 막 멈추자 유이안은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자마자 고성 같은 별장과 끝없이 펼쳐진 초록색 잔디가 보였다. 유이안은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 이 별장의 규모가 적
유이안은 강원영보다도 두 살 위였다.그런데 딸에게 그녀를 언니라고 부르도록 하다니... 어이가 없어진 유이안은 얼른 그를 매섭게 쏘아보고는 고개를 돌려 부드럽게 웃으며 소녀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이안 이모라고 불러도 돼. 이모가 다음에 만나면 케이크 사줄게.”그러자 강윤은 아빠를 껴안고 연신 애교를 부리며 기뻐했다.“우와, 예쁜 이안 이모 좋아요.”‘사회생활 한번 잘하네.’유이안은 똑똑한 아이의 말에 연신 혀를 내둘렀고 한편, 강원영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정말 미안해요, 유선생님. 내 기억 속에서 당신은 여전히 고등학교 때 모습 그대로네.”유이안이 아무리 무디다고 해도 숨겨진 비밀을 깨닫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강원영은 애초에 병에 걸린 적이 없다.강원영은 결국 핑계를 대고 유이안을 집에 초대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여 유이안은 바로 떠날 수가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첫째, 그래도 체면을 지켜야 했다. 둘째, 품에 안긴 여자아이가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마치 말캉한 찹쌀떡처럼 얼굴이 탱글탱글했고 작은 얼굴에는 땀방울이 맺혔지만 몸 곳곳에는 향기로운 냄새가 배어있었다.그때, 강원영은 갑자기 손을 들어 셔츠 단추를 두 개 풀며 유이안에게 말을 건넸다.“잠깐만 아이와 같이 있어 줘요. 제가... 밥할게요.”밥을 한다고? 그러나 유이안에게 있어 이건 불필요할 정도로 성대한 의식이었다. 강원영이 평소에 집에서 밥을 할 거라는 건 믿지 않았다.그런데 그런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했는지 강원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저도 가끔은 집에서 요리해 먹어요. 제 요리 솜씨는 꽤 괜찮은데.”심지어 말을 하며 윤이에게 윙크를 날리기도 했다.그러자 스위치가 작동하기라도 한 듯 강윤은 곧바로 박수를 쳐주며 강원영의 말에 리액션을 해주었다.“아빠 최고!”부녀를 바라보는 유이안은 이제 진심으로 강원영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여섯 살짜리 아이가 이렇게까지 리액션을 잘 해주고 그와 잘 어울릴 수 있다는 건 평소에 그
밖에 나와서도 화가 풀리지 않은 유이준은 진은영을 데리고 구석진 곳으로 가더니 그녀의 입술을 마음껏 탐했다.작은 감각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온 힘을 다해 숨결을 나누다가 마침내 멈춘 유이준은 여전히 진은영과 이마를 맞붙인 채로 물었다.“왜 나 안 밀쳐내요? 나 싫어하잖아요.”일부러 괜찮은 척하지만 유이준과 몇 년이나 만난 진은영은 그도 자신의 남자 문제에 대해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저번에 유이준이 박준식과의 관계에 대해 오해할 때는 화가 나서 부정도 안 했는데 오늘에는 다른 사람이 그 이야기를 술안주 삼으니 진은영은 유이준에게 만큼이라도 제대로 해명을 해주고 싶어 그의 팔뚝을 잡으며 말했다.“나도 다른 남자랑 한 적 없었어요.”...그 말이 너무나도 기뻤던 유이준은 진은영을 꽉 껴안더니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허리를 지분거리며 뜨거운 숨결을 담아 말했다.“왜 진작 얘기 안 했어요? 저번에 얘기했으면 이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있지도 않았을 텐데.”마치 먹잇감을 탐내는 늑대처럼 이글거리는 눈으로 말하는 유이준에 그가 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음을 눈치챘지만 진은영은 오늘만은 그에게 따라주고 싶었다.유이준의 성격으로 아까 그 일을 참아낸 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고 또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진은영을 감싸주기까지 했기에 보호받고 싶어 하는 여자 중 한 명인 진은영 또한 그런 유이준의 행동에 기분이 묘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하지만 유이준은 거기서 끝내지 않고 바로 연하남과 연락을 끊으라고 질투 난 남자처럼 졸라댔다.“걔랑은 시작도 안 했어요.”그에 진은영은 벽에 기댄 채로 유이준을 올려다보며 말했지만 그는 믿지 못하고 진은영의 핸드폰으로 직접 연하남에게 문자까지 보내고 나서야 진은영을 데리고 나갔다.목적지는 알려주지 않았지만 진은영도 굳이 묻지 않았다.뜨거운 여름날 밤, 진은영도 한 번쯤은 호르몬에 지배된 밤을 느껴보고 싶었다....차에 올라탄 뒤 진은영은 유이준이 저를 호텔이나 집으로 데려갈 줄 알았지만 차는 예상외로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든 진은영은 계속 손을 씻으며 담담히 말했다.“이준 씨 생각은 안 나더라고요. 계속 나이 얘기하는 거 보니까 이준 씨도 나이에 신경이 많이 쓰이나 봐요. 왜요, 몸이 안 따라줘서 이제는 돈으로 사야 해요?”유이준은 계속 담배를 피우며 여전히 못된 말만 내뱉는 진은영에 고개를 저었다.연하가 저런 여자를 어떻게 버텨내는지, 아니면 그놈 앞에서는 저런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유이준의 기분은 순식간에 나빠졌다.유이준은 자신과 진은영 사이에 아이가 있으니 소유욕이 더 불타올라 진은영이 결혼을 몇 번을 한대도 그녀는 자신의 여자이고 그녀와 자신만이 어울리는 짝이라고 생각했다.조명은 어두웠고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는 물소리가 배경음악처럼 깔려 있어 유이준은 진은영의 몸매에 저절로 침이 삼켜졌다.몸에 딱 달라붙는 검은 원피스는 옆이 조금 트여있었고 총 6개의 금색 단추가 달려있는 우아하면서도 섹시하기까지 한 옷이었다.그런데 조진범의 생일파티를 위해 이렇게까지 차려입었다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잡친 유이준은 팔을 뻗어 화장실 문을 닫아버렸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미간을 찌푸리는 진은영에 유이준은 태연자약한 얼굴로 답했다.“나쁜 짓 하는 거예요.”빠르게 진은영을 세면대에 앉힌 유이준은 진득한 시선으로 그녀의 얼굴부터 몸 곳곳을 훑어보며 마지막으로 하얀 그녀의 다리에 시선을 고정시켰다.마르긴 했지만 그래도 나올 데 나오고 들어갈 데 들어간 완벽한 몸매의 소유자인 진은영은 햇빛을 싫어해 다리가 하얗다 못해 빛이 나고 있었다.그 탄력 있는 허벅지가 눈에 들어오자 아까 룸에서부터 간질거렸던 유이준은 더는 참지 못하고 진은영의 다리를 주무르며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옷은 왜 이렇게 야하게 입었어요, 아까 방에서 다들 은영 씨 다리만 보고 있었어요.”“이준 씨 말고 그렇게 변태 같은 사람은 없을걸요?”“정말 남자를 모르네요.”유이준이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진은영은 물론 아무 의도도 없었겠지만
화려한 룸 안에는 두세 명의 손님뿐이었는데 유이준이 그중 하나였다.진안영은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아서 아까부터 돌아다니고 있었고 알아주는 아내 바보인 조진범은 그녀가 힘들까 봐 걱정스레 바라보며 도와주고 있었고 와 있던 남자 손님 셋은 앉아서 카드게임을 하고 있었다.그때 진은영이 마침 안으로 들어오자 한 사람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마침 사람 하나가 모자랐는데 은영 씨도 같이해요.”그 말에 유이준이 들고 있던 카드를 내려놓자 그 사람은 빠르게 호칭을 바꾸어보았다.“진 대표님?”그때 옆에 있던 사람들이 팔꿈치로 그를 치며 눈치를 주었다.“형수님이라고 불러야지.”그에 유이준은 아무렇지 않은 척 한마디 했다.“재미없어.”그런데 조진범이 또 눈치 없이 진은영에게 머그잔을 건네주며 유이준의 심기를 건드릴만한 말을 꺼냈다.“호칭은 똑바로 해야지, 우리 처형 남자친구 있어, 26살 된 미소년이라고.”조진범이 유이준 들으라고 그러는 걸 알기에 잘못한 것도 없었던 진은영은 굳이 해명을 하지 않고 그의 손에서 머그잔을 받아들며 고맙다는 말만 했다.그에 유이준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조진범을 보고 있었고 조진범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럼 잘 놀다가.”조진범이 나가자 진은영을 바라보고 있던 유이준의 자신의 옆자리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진은영더러 앉으라고 했다.진은영도 거절하지 않고 앉았는데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 그런가 능수능란하게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걸 보니 유이준은 또 뭐가 불만인지 뚱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진은영의 상대편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유이준, 오늘 우리 술만 마시는 건데 왜 혼자서 질투를 하고 있어. 그러다가 은영 씨 남자친구가 데리러 오기라도 하면 아주 오늘 상 엎는 거 아니야?”그에 유이준은 낮은 음성으로 차분하게 대꾸했다.“안 올까 봐 이러는 거야.”어이없는 대답에 진은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유이준 씨, 내 일이 당신이랑 아무 상관없어요.”“그래요?”카드를 내고 진은영을 바라보는
샤워를 마친 진안영은 젖은 머리를 닦아내고 베란다에 서서 불어오는 밤바람을 만끽했다.진별이가 유이준 집에 가 있으니 전과 달리 자유시간이 많아져서 그 시간에서 카페도 가고 진안영과 함께 쇼핑도 할 수 있어서 좋았다.하지만 진은영은 딱 거기까지였다.임하민 일이 있고 나서 진은영은 생각이 이리도 다른 사람끼리 함께 있어 봐야 부딪치기만 할 것 같아 유이준과 확실히 선을 긋고 원망을 떨쳐버리고 자신도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그래서 2, 3개월 동안 둘 사이에는 사랑을 기반으로 한 어떠한 대화도 오가지 않았었다.진은영이 이런 상황에 만족하고 있을 때 진안영과 조진범이 그에게 남자를 하나 소개해줬는데 유능한 디자이너에 성격도 좋고 다정한 사람이었지만 나이가 26으로 진은영보다는 한참 어린 나이였다.진은영은 저런 남자를 만나는 건 어린 애한테 못 할 짓인 것 같아 망설였는데 진안영이 남자는 집안도 좋은데 심지어 막내라 가업을 물려받지 않고 회사의 지분 15%만 가지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된다고 자꾸 진은영을 부추겼다.진안영이 했던 말들이 떠올랐던 진은영은 고개를 숙여 자신을 훑어보았다. 도대체 어디가 매력적이라서 젊고 조건 좋은 남자가 저에게 흔들리는 것인지 진은영은 결국 찾아내지 못했다.그때 진은영의 눈에 슬랙스를 입은 채로 검은색 차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는 유이준이 들어왔다.어두운 밤하늘과 대비되게 유난히 하얗고 맑은 피부를 가진 유이준이었다.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이 그가 뱉어낸 담배 연기를 헤집어놓았고 유이준의 머리칼도 바람에 따라 흩날렸다.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잘생긴 모습에 진은영은 저도 몰래 유이준을 주시하고 있었고 때마침 고개를 든 유이준은 그런 진은영과 눈을 맞추었다.유이준은 손을 귓가에 가져다 대며 진은영에게 전화를 하라고 했지만 진은영은 고개를 저으며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대화도 못 하고 그저 유이준을 바라보기만 했다.그런 진은영의 뜻을 알아차린 유이준도 아직은 자신에게 다가올 준비가 채 되지 않은 그녀를 다그치지 않고 마
하지만 임하민은 추태를 보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해 참으며 진별이와도 작별인사를 했다.진별이는 통 크게 자신이 좋아하는 과자를 임하민에게 나누어주었다.그에 임하민은 나지막하게 말했다.“고마워.”임하민의 말을 듣고 난 진별이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밥을 입에 욱여넣기 시작했다.밥을 잘 먹어야 빨리 커서 엄마를 지켜줄 수 있을 것만 같아서....저택을 나가자 푸르른 잔디와 그 위를 날아다니는 반딧불이들이 눈에 들어왔다.그 옆에는 가지가 무성한 큰 나무도 하나 있었는데 유이준은 그 아래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서른 살 남짓한 나이의 남자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잘생겨 보였다.그런 유이준을 오래도록 원해왔던 임하민은 오늘에서야 모든 건 저의 짝사랑일 뿐이었다는 걸 깨달았다.유이준도, 유 씨 집안사람들도 자신이라면 치를 떨지만 그냥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것뿐이었다.임하민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는 사람이었기에 모든 걸 명확하게 알게 된 지금은 관계의 마침표를 찍어야 할 때인 것 같았다.임하민이 다가가자 마침 담배를 다 피운 유이준이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시작했다.“내가 하는 말이 너한테 상처가 될 걸 알지만 그래도 이런 건 확실히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 나 사실 너 좋아한 적 없어. 그때 너한테 헤어지자고 한 건 별이 때문만은 아니야. 나 은영 씨 좋아해, 그게 아니면 내 조건에 이렇게 오랜 시간 혼자인 게 말이 안 되잖아. 진작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겠지.”달빛이 드리워진 임하민의 표정은 나라를 잃은 사람처럼 어두워져 있었다.“그럼 나는 지금까지 은영 씨 대타였던 거네, 그저 네가 잠시 머물다 가는 존재?”임하민의 말에 돌아오는 게 유이준의 침묵이라 그녀의 마음은 더욱더 아파왔다.한동안의 정적 끝에 유이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미안해, 전에는 내가 남녀 사이의 거리에 대한 개념이 없어서 은영 씨한테 상처를 준 것 같아. 앞으로는 우리 거리를 좀 두자.”임하민의 감정이 격해지자 유이준은 기사더러 그녀를 데려다주라고 하고는 흰색 차
진은영은 아직 저를 사랑할 텐데 왜 둘 사이의 일이 채 해결되지도 않은 이때 선을 보는 건지 유이준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그래서 물어보려고 하는데 하연이 먼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새 인생 시작하고 싶대, 더 이상 혼자 힘들기도 싫고 다른 사람 바라보는 자네한테 매달리기도 싫대.”그 말에 어이가 없어진 유이준의 자신의 코를 만지며 말했다.“아줌마, 은영 씨 말 듣지 마세요, 저 어디 가서 부끄러운 짓 한 적 없어요.”비록 하연이 평소에 유이준을 좋아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제 딸을 모른 척하고 사위를 감싸고 돌 사람은 아니었다.“그래도 내 딸이잖아.”롤스로이스 뒷좌석에 앉아 사랑을 받을 만큼 받아서 혼자서도 잘 놀던 진별이는 문이 닫히는 소리에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아빠 또 화났어요?”유이준은 바로 몸을 돌리며 제 딸을 향해 떠보듯 물었다.“요즘 엄마 어떤 아저씨랑 자주 연락한 적 있어?”그 말에 곰곰이 생각하던 진별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준식 아저씨가 저번 주에 귀국했다고 엄마한테 밥 사줬어요. 엄마가 엄청 이쁜 옷 입고 향수까지 뿌리고 나갔어요.”또 나타나서 진은영을 만나는 박준식에 유이준은 표정을 굳혔지만 다행히도 그는 이미 재혼을 한 탓에 진은영과는 친구 이상으로 발전할 수가 없었다.그러니 유이준이 지금 제일 신경 쓰이는 건 진은영이 선 자리에서 만났다는 젊고 미혼인 남자였다.그에 블록을 가지고 놀던 진별이가 말했다.“어차피 아빠는 하민 아줌마 있잖아요.”임하민의 이름이 언급되자 유이준의 표정은 아까보다 더 어두워졌다.이제는 다른 남자를 찾는 것보다 유이준에게 계속 들이대는 게 더 승산 있다고 여긴 건지 진별이의 존재에도 상관없다는 듯 매일 매일 유이준을 쫓아다니는 임하민이었다.유이준은 이미 임하민의 전화는 완전히 씹고 있었지만 임하민은 아랑곳하지 않고 매일 유이준의 집에 출근 도장을 찍고 있었다. 유선우와 조은서도 다 아는 사람이라 얼굴을 붉히기는 싫어 여러 번이나 돌려서 말해봤지만 모른 척하는 임하민에
그러다가 그의 시야에 진은영과 진별이가 들어오자 그는 빠르게 담배를 끄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전처럼 도우미에게 아이를 넘기고 계단도 오르지 않은 채 다시 차 문을 열려던 진은영은 갑자기 들려오는 유이준의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추었다.“왜 안 들어와요? 시간도 늦었는데 밥이라도 먹고 가요.”사실 유이준도 이미 부모님의 여러 차례나 되는 요청을 거절한 걸 보고 진은영이 정말 저와는 선을 그으려 한다고 확신했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할 그가 아니었다.유이준은 자신의 등 뒤에 서 있는 저택을 보며 말했다.“별이 위해서라도 같이 식사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그에 진은영은 담담히 웃으며 대꾸했다.“별이를 위해서 거리를 두는 거예요. 애 혼란스럽게 하면 안 되니까요. 같이 식사도 하고 그러면 우리가 다시 화해했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잖아요.”“다시 잘 지내면 안 되는 거예요?”유이준이 코웃음을 치며 물었지만 진은영은 그 질문에는 답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때 유이준의 핸드폰이 울려왔고 발신자가 임하민인 걸 본 유이준은 바로 끊었지만 진은영은 누군지 알 것 같아 자신과 유이준 사이에 남은 건 별이 뿐이라고 다시 한번 되새기며 입을 열었다.“이제라도 틀린 건 바로잡아야죠. 유이준 씨 결혼 상대는 애초에 임하민 씨였잖아요.”그 말에 아이를 안고 있던 유이준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진짜 웃기는 사람이네요 은영 씨. 전에 내 목 끌어안으면서 떨어지기 싫다고 키스하던 사람은 다른 사람이었나 보죠? 왜 이제 와서 바로잡자는 건데요?”그 말에 진은영이 표정을 굳히자 진별이는 작은 주먹을 꽉 쥐며 진은영을 응원해주었다.유이준은 정말 진별이가 배신자 같아 보였다.“나는 아빠가 더 좋아요.”바로 제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진별이였지만 유이준은 그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진은영이 차를 몰고 떠나자 유이준도 그만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여름이라 짧은 면 치마를 입고 있던 진별이는 나비처럼 유선우의 품 안으로 뛰어들더니 이번에는 조은서의 품에 안겨 한참 동안
유이준이 멍하니 서 있자 진은영은 힘겨워하며 입을 열었다.“내가 박준식 씨를 처음 만나는 그날 주차장에서 임하민 씨랑 당신이 같이 있는 걸 봤어요. 임하민 씨가 우니까 당신이 엄청 안쓰러워하며 안아주더라고요.”진은영의 말에 잊고 있던 일을 떠올리던 유이준은 별이 분유를 사러 가던 날 주차장에서 우는 임하민을 마주친 걸 기억해냈다.그날은 그저 지인이니까 그냥 지나칠 수도 없고 해서 위로해준 것인데 그걸 진은영이 봤을 줄은 생각도 못 했었다.하지만 유이준은 제 생각을 그녀에게 똑똑히 전해야만 했기에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나 걔한테 아무 감정도 없어요.”그 말에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이던 진은영은 내일 아침에 진별이를 데려간다는 말만 남기고는 유이준의 만류에도 호텔 방을 나가버렸다.진은영이 나가고 한참 동안 가만히 서 있던 유이준은 셔츠를 벗어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진은영은 자신이 바람을 피운다고 의심하고 있었고 유이준은 그녀가 작은 일로 성급히 헤어지길 결정하는 것에 화가 났지만 그보다 더 그를 열 받게 했던 건 화장실에서 스타킹을 꺼내오는 임하민이었다.그 생각만 하면 당장이라도 임하민을 죽여버리고 싶었기에 유이준은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이튿날 아침, 유이준이 아직 깨어나지 않았을 때 진은영은 진별이를 데리러 왔다.유이준은 사실 공적인 일은 다 마무리한 상태여서 진은영과 함께 B 시로 갈 수 있었지만 C 시에서 시간을 더 보내며 사이를 회복하고 싶었지만 진은영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안돼요.”진은영은 진별이에게 옷을 입혀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요즘 회사도 바쁘고 엄마도 퇴원해야 해서 시간 없어요.”가운만 입고 있었던 유이준은 그대로 가운을 벗어 던지고 검은색 슬랙스를 입고는 듬직한 어깨를 드러내자 진별이는 바로 작은 손으로 눈을 가리며 말했다.“아빠, 변태예요? 왜 옷을 안 입어요!”어젯밤부터 자신을 무시하며 밤에 자다 깨서도 유이준이 타준 분유는 먹지도 않던 진별이가 드디어 입을 열자 유이준은 기뻐하며 쭈그
검은 먹물처럼 새까만 밤하늘을 등지고 선 유이준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고작 이런 일로 나랑 헤어지겠다고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좋았잖아요 우리.”“좋았죠.”“그때는 내가 누군가한테 소중한 사람이 된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지금 이준 씨가 하는 말과 행동은 내가 존중받을 가치도 없는 사람인가 하는 의심이 들게 해요. 우리의 시작이 완벽하지 않아서 나는 유이준 씨의 존중도 못 받는 건가요? 임하민 씨 집안과 유 씨 집안이 좋은 사이라서 임하민 씨는 이준 씨 관심도 받고 실연하면 위로도 해주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임하민 씨에 비해 한참 부족한 나는 무시받아 마땅한 거예요?”...말을 할수록 진은영은 가슴이 먹먹해졌다.처음에는 그녀도 이렇게 말을 길게 할 생각이 없었다.누군가와 비교를 하면 할수록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고 또 유이준과도 얼굴을 붉힐 것 같아 둘 사이에 있는 진별이를 위해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자고 생각했는데 점점 감정이 산으로 가고 있는 것 같았다.그래서 진은영은 뒤로 물러나며 나지막이 말했다.“당신한테도 나한테도 좋은 결정일 거예요. 나는 내가 생각했던 삶을 살고 당신은 앞으로도 자유롭게 살면 돼요.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니까 우리 서로 탓하지 말아요. 그리고 별이는 같이 키워요.”그 말에 유이준은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뭐가 좋은 결정인데요.”“차라리 날 욕하고 때려요, 어떻게 헤어지자는 말을 이렇게 쉽게 해요? 은영 씨한테 나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어요? 언제든지 마음에서 지워버릴 수 있는 사람이었냐고요.”진은영이 낮은 목소리로 부정하려 할 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김 비서가 따라온 줄로만 알고 문을 열던 유이준은 문밖에 서 있는 임하민에 눈을 크게 떴다.섹시한 드레스를 입고 손에는 예쁜 쇼핑백 같은 걸 들고 있던 임하민이 안쪽을 힐끔거리며 물었다.“은영 씨 화났어? 내가 들어가서 사과할까?”유이준은 그녀를 돌려보내려 했지만 임하민은 미꾸라지처럼 틈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가 진은영에게 사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