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우는 겁에 질려 그 인형을 꼭 안고 조심스럽게 그들을 쳐다보았다. 성현준은 권하윤에게 말했다. “아이를 겁주지 마. 그냥 물로 씻으면 돼.” 그 말을 마치고 그는 양복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작은 식탁 위에 올려놓고 병실에 딸린 화장실로 들어갔다. 성현준의 휴대폰 비밀번호는 권하윤이 몰래 본 적이 있었다. 화장실 안에서 물소리가 들려오는 동안 권하윤은 살짝 성현준의 휴대폰을 집어 들고 연우를 향해 경고했다. 연우는 엄마가 말한 대로 얌전히 있었다. 왜냐하면 말을 듣지 않으면 엄마는 자신을 거리로 내쫓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권하윤은 성현준과의 이혼 진행 상황만 확인하려 했을 뿐이었는데 차 안에서 자신과 성현준이 나눈 열정적인 순간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이 영상은 유이안이 성현준에게 보낸 것이었다. 권하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이 영상이 퍼지면 성현준과 유이안의 관계는 다시는 회복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문이 퍼지면 유이안은 성현준과 완전히 선을 그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권하윤은 재빨리 성현준의 휴대폰으로 영상을 촬영했다. 모든 작업이 끝나자 성현준이 화장실에서 나왔다. 휴대폰은 원래 자리로 돌아갔고 연우는 고개를 숙인 채 인형을 만지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엄마가 아까 겁을 주면서 말을 하면 병원 밖으로 내쫓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성현준은 그리 오래 머물지 않았다. 저녁 7시쯤, 그는 병실을 나섰고 차에 올라타 유이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자 결국 메시지를 보냈다. 한 글자 한 글자 신중히 써 내려갔다. [이안아, 지금 어디 있어?] ...유이안은 강원영의 집에 있었다. 퇴근할 때 강원영이 전화를 걸어 집에 와서 아이를 봐달라고 요청했다. 유이안은 그에게 신세를 졌으니 그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고 비서를 통해 전달 사항을 정리한 후 주차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녀가 지하로 내려왔을 때 롤스로이스 고스트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강원영이 차 옆에 서 있
비록 강원영의 태도는 느긋했지만 유이안은 성숙한 여자로서 그가 조심스럽게 떠보는 것을 날카롭게 눈치챘다. 유이안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나의 이혼에 대해 묻고 싶은 거지?”강원영은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대답하지도 않았고 더 이상 추궁하지도 않았다. 남자의 깊은 눈빛은 그의 마음을 말하고 있었고 성숙한 여자라면 누구나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잠시 짧은 침묵이 흘렀고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었다. 유이안은 약간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운전해.” 강원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시동을 걸었다. 이후 한참 동안 그들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유이안은 옆으로 고개를 돌려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후, 그녀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 “강원영, 난 성현준처럼 되고 싶지 않아. 관계는 깨끗하게 시작되어야 해. 우리 지금은 그저 동창이거나 의사와 환자의 관계일 뿐이고 기껏해야 평범한 친구야. 만약 네가...” 강원영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마세요, 저는 선을 넘지 않을 거예요.”유이안은 침묵했다.그가 유이안의 말을 끊어버렸고 유이안이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모른다. ...아마 차 안 분위기가 너무 답답했는지 강원영은 손을 뻗어 음악을 틀었다. 그는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고 취향이 유이안과 비슷했다. 조용하고 시끄럽지 않는 음악이었다. 유이안은 YS 병원의 원장이자 최고의 외과 의사이기도 하여 체력 소모가 컸다. 그래서 의자에 기대어 음악을 듣자 어느새 잠이 들었다. 몽롱한 상태에서 유이안은 남성용 외투가 자신의 몸을 덮고 있는 것을 느꼈고 그 외투에는 상쾌한 향과 함께 은은한 담배 향이 섞여 있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인식한 것은 강원영도 담배를 피우는 사실이었다. 30분 후, 차는 한 별장으로 들어섰다. 차가 막 멈추자 유이안은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자마자 고성 같은 별장과 끝없이 펼쳐진 초록색 잔디가 보였다. 유이안은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 이 별장의 규모가 적
유이안은 강원영보다도 두 살 위였다.그런데 딸에게 그녀를 언니라고 부르도록 하다니... 어이가 없어진 유이안은 얼른 그를 매섭게 쏘아보고는 고개를 돌려 부드럽게 웃으며 소녀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이안 이모라고 불러도 돼. 이모가 다음에 만나면 케이크 사줄게.”그러자 강윤은 아빠를 껴안고 연신 애교를 부리며 기뻐했다.“우와, 예쁜 이안 이모 좋아요.”‘사회생활 한번 잘하네.’유이안은 똑똑한 아이의 말에 연신 혀를 내둘렀고 한편, 강원영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정말 미안해요, 유선생님. 내 기억 속에서 당신은 여전히 고등학교 때 모습 그대로네.”유이안이 아무리 무디다고 해도 숨겨진 비밀을 깨닫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강원영은 애초에 병에 걸린 적이 없다.강원영은 결국 핑계를 대고 유이안을 집에 초대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여 유이안은 바로 떠날 수가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첫째, 그래도 체면을 지켜야 했다. 둘째, 품에 안긴 여자아이가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귀여웠다. 마치 말캉한 찹쌀떡처럼 얼굴이 탱글탱글했고 작은 얼굴에는 땀방울이 맺혔지만 몸 곳곳에는 향기로운 냄새가 배어있었다.그때, 강원영은 갑자기 손을 들어 셔츠 단추를 두 개 풀며 유이안에게 말을 건넸다.“잠깐만 아이와 같이 있어 줘요. 제가... 밥할게요.”밥을 한다고? 그러나 유이안에게 있어 이건 불필요할 정도로 성대한 의식이었다. 강원영이 평소에 집에서 밥을 할 거라는 건 믿지 않았다.그런데 그런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했는지 강원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저도 가끔은 집에서 요리해 먹어요. 제 요리 솜씨는 꽤 괜찮은데.”심지어 말을 하며 윤이에게 윙크를 날리기도 했다.그러자 스위치가 작동하기라도 한 듯 강윤은 곧바로 박수를 쳐주며 강원영의 말에 리액션을 해주었다.“아빠 최고!”부녀를 바라보는 유이안은 이제 진심으로 강원영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여섯 살짜리 아이가 이렇게까지 리액션을 잘 해주고 그와 잘 어울릴 수 있다는 건 평소에 그
유이안은 미디엄 웰던을 선택했다.그러자 강원영은 더욱 짙어진 듯한 검은 눈동자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그럼 미디엄 웰던으로 할게요.”강원영은 목소리가 정말 듣기 좋았다. 그 목소리를 듣다 보면 마치 강원영이 귓가에 대고 사랑의 속삭임을 하는 것마냥 저도 모르게 귓불이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유이안은 동시에 화가 나기도 했다. 강원영은 원래 솔로로 지내며 와이프가 없는데 곳곳에서 이렇게 여자를 꼬시는 건 아닐까?남자는 화가 난듯한 유이안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더니 갑자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아주머니, 우리 이안 아가씨에게 제가 평소에 어떻게 철벽을 치고 다니는지 말해줘요.”그러자 오씨 아주머니도 다급히 해명을 늘어놓았다.“말했어요! 미리 맞춰놓은 멘트도 잊지 않았으니... 사장님은 걱정 붙들어 매세요.”그 말에 강원영도 씩 웃으며 당당한 표정을 지었다.유이안 역시 아무리 화가 나도 강윤이 옆에 앉아 그녀의 팔을 껴안고 달콤하고 말캉한 목소리로 이모라고 부르며 애교를 부리니 저 너머 하늘 끝까지 솟아오른 화도 한 번에 팍 식는 기분이었다... 그러자 강원영은 다시 한번 강윤을 향해 윙크를 날렸다.“...”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강원영의 요리실력이 훌륭한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게다가 강씨 가문은 식사 분위기도 매우 화기애애했다.강윤은 어른의 보살핌도 없이 홀로 큰 밥그릇 하나를 들고 음식을 맛보고 있었다. 그릇 안에는 맛있는 음식들이 가득 쌓여있었는데 이를 보며 유이안은 알 수 있었다. 오늘의 저녁 메뉴는 양식이지만 강원영은 특별히 강윤을 위해 한식 반찬을 가득 만들어주었다... 유이안은 의사로서 병원에서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을 봐왔고 그중에는 야박한 남자들도 셀 수 없이 많았다. 하여 강원영 정도라면 정말 훌륭한 아버지라고 할 수 있었다.순간 가슴이 뭉클해진 유이안이 강원영을 쳐다보았다. 강원영은 셔츠 소매를 걷어붙이고 유이안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그녀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역시나 요리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강원영의 말에는 사실 조금 모호한 기류가 담겨있었다.유이안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차마 말을 잇지 못했고 강원영은 대수롭지 않게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찍고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밤의 정취가 물씬 풍기고 롤스로이스는 고요한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두 사람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자의 의도가 너무 뻔하다는 이유로, 여자는 아직 남자의 마음을 받아들일 의사가 없다는 이유로 두 사람은 가늘 길 내내 침묵을 지켰지만 그 침묵도 마냥 나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마음이 편했다.유이안은 성현준과의 신혼집을 떠난 후, 그녀가 데려간 고용인은 유씨 저택에 돌려보냈고 자신은 병원 근처의 아파트에서 임시로 거주하게 되었다. 그녀는 전문적인 아주머니를 집에 들이지 않았다. 매일 그녀의 비서가 사람을 불러 유이안의 집을 청소해주었고 하루 세끼는 대부분 병원에서 해결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가끔 집에서 쉬게 되면 간단한 요리도 해 먹곤 했다.30분 후, 그들이 탄 자동차는 아파트 아래층에 멈춰 섰다.강원영은 운전석에 앉아 옆에 있는 유이안을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오늘 윤이와 함께 해줘서 고마워요. 오늘 밤 너무 즐거웠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나중은 없어.”“강원영, 당신도 우린 안된다는 거 알잖아.”어두운 차 안에서 강원영의 그 눈빛은 더욱 깊이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비로소 다시 입을 열었다.“전 나중이라고 했지 지금이라고는 말하지 않았어요. 유이안, 난 당신을 난처하게 하지 않아.”그 순간, 무언가가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의 정곡을 찔렀다.그동안 유이안은 줄곧 자신에게는 남자가 필요 없다고 생각해왔었다. 하여 성현준과의 결혼도 그녀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강원영의 한마디에 어렵게 쌓아온 탑이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이 너무 오랫동안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혼생활을 하면서 성현준은 자신의 모든 포
유이안은 이제 해명하고 싶지 않았다.만약 유이안이 강원영과의 관계를 해명하면 성현준은 또 그녀의 마음속에는 아직 그가 있다고 여길 것이다. 하여 유이안은 힘껏 성현준을 밀어내고 엘리베이터 입구를 가리키며 썩 꺼지라고 욕설을 읊조렸지만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성현준은 한사코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유이안을 끌어당기더니 고개를 숙여 키스를 퍼부으며 그녀의 몸을 탐하기도 했다.강원영은 지워버리고 그녀의 남편이라는 존재를 새겨두고 싶었던 것이다.성현준은 과거의 열정을 떠올리게 하고 싶었다.하지만 이를 유이안이 허락할 리가 없었다. 애초에 이사하는 순간부터 유이안은 그들의 결혼은 막바지에 이르렀다고 확신했다. 한편, 성현준이 무력을 사용하기 시작하자 유이안은 곧바로 가방 안에서 늑대 방지용 스프레이를 꺼내 성현준의 얼굴에 대고 힘껏 뿌렸다. 그건 다름 아닌 고추 물이었고 성현준은 더 이상 유이안을 침범할 생각을 못 하고 얼굴을 감싸 쥔 채 고통에 몸부림쳤다.궁지에 몰린 성현준은 꼴이 말이 아니었다.유이안은 그 틈을 타 재빨리 성현준을 걷어차고 다른 엘리베이터를 타 집으로 돌아왔다. 아파트 문이 닫히고 유이안은 입구에 기대어 숨을 몰아쉬었다. 주위가 조용해지고 뒤늦게 피곤이 몰려오자 유이안은 한숨을 푹 내쉬며 긴 머리를 살짝 쓸어 넘겨버렸다.그녀는 진즉 성현준을 포기하고 이 결혼을 포기했다.하지만 성현준은 결코 믿지 않았다.한참 후에야 유이안은 비로소 마음을 가라앉히고 바바리코트를 벗어 핸드백에서 핸드폰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성현준의 전화가 여러 통 걸려왔고 수많은 메시지가 도착했지만 그녀의 핸드폰은 오후 내내 무음 상태였기에 보지 못했다.유이안이 고개를 살짝 젖혀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실패한 결혼에는 진정한 승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유이안도 성현준과 마찬가지로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그런데 문득 강원영이 떠올랐다. 여자로서 또 강원영의 정성스러운 대접을 받고 나니 성현준과 어느 정도 비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강원
날카로운 브레이크 소리가 귀를 찌르고 검은색 벤틀리가 갓길에 급정거했다.차가 멈춰 서자 성현준은 휴대폰을 손에 쥔 채 옆에 있던 유이안을 바라보았고 얼음장같이 차가운 표정과 눈빛과는 달리 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가벼웠다.“유이안, 유 원장, 그렇게 날 떠나고 싶었어? 그렇게 날 부숴버리고 강원영 곁으로 가고 싶었어?”유이안이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또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겁니까?”“왜 동영상을 내보냈어? 유이안, 난 네가 원하는 걸 모두 줄 수 있어. 너만 바라보는 결혼과 너만을 위한 사랑, 난 전부 너에게 줄 수 있어. 그런데 왜 그걸 퍼뜨렸어... 강원영 때문이야? 왜? 이제 강원영을 사랑하게 된 거야?”영상?“성현준 씨, 그 동영상은 제 손에만 있는 게 아니에요. 당신 손에도 있죠. 그런데 현준 씨는 그 동영상이 당신으로부터 유출되지 않았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전 굳이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어요. 가치도 없고요. 저 그렇게 한가한 사람 아닙니다. 하지만 당신의 그 더러운 행위가 대중들에게 드러났으니 이제 우리도 깔끔하게 해결하죠. 저도 변호사를 불러 이혼 소송을 제기하도록 하겠습니다.”이 일은 논쟁할 가치도 없었다. 유이안은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성현준은 이미 그녀가 퍼뜨린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아마 성현준은 유이안이 강원영을 사랑해서 그를 배신한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조급함과 분노, 상실감, 말로 이룰 수 없는 감정이 성현준을 뒤덮었고 순간 이성을 잃은 성현준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유이안의 뺨을, 과거 누구보다 그를 사랑해주었던 애인의 뺨을 내리쳤다.뜨겁고 팽팽한 공기가 순식간에 굳어버리고 좁은 차 안에는 서로의 숨소리만 남았다.얼굴이 돌아가고 한참이 지나서야 유이안은 굳어버렸던 눈을 깜빡였다. 이윽고 그녀는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성현준을 바라보았다. 이 지경까지 밑바닥을 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성현준이 앞뒤 상황도 제대로 알아보지 않은 채 그녀의 뺨을 내리쳤다.유이안
그는 회사 꼭대기 층의 버튼을 누른 뒤, 그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은 표정으로 점점 올라가는 빨간 숫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시 후, 성현준이 조용히 물었다.“회사 법무팀에서는 뭐래? 이번 사태를 어떻게 대처할 거래?”그러자 주 비서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법무팀도 현재 상황이 좋은 건 아닙니다. 여러 방안을 생각해보았지만 오직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고 합니다... 바로 대표님께서 사모님과 합의 이혼을 했다는 것을 대중들에게 공개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래야 대표님께서도 법적이나 도덕적인 면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이 정도면 대중들도 두 날 정도 토론을 하다가도 전부 잊어버릴 겁니다.”잠시 침묵을 지키던 성현준이 아연실색하며 입을 열었다.“한참을 연구해서 연구해낸 게 이것밖에 없어? 아니, 난 절대 대중들에게 합의 이혼을 했다는 입장을 내세우지 않을 거야. 난 애초에 이혼할 마음이 없으니까.”이 상황에서는 주 비서도 최대한 그의 맞장구를 쳐줄 수밖에 없었다.“그러게요. 대표님께서 사모님을 얼마나 사랑하시는데.”이윽고 그녀는 또 투덜거리기 시작했다.“대체 누가 저지른 짓인지... 정말 몰상식하기 그지없네요.”순간 멈칫한 성현준이 마른 침을 삼켰다. 그때,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성현준은 밖으로 나가며 입을 열었다.“유이안이야.”네? 주 비서가 멍하니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아니, 이건 불가능한 일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란 말이다.이윽고 성현준은 장장 두 시간을 거쳐 이번 사태에 대한 회의를 열었고 오전 시간이 지나고 아니나 다를까 권성기술회사의 주식은 롤러코스터처럼 직선으로 추락했다. 이제 회사 측에서 부부 사이의 금술 좋은 영상을 아무리 내보내도 역부족이었다. 주식 투자자들은 쓰레기 남의 주식을 사주지 않는다. 더욱이 쓰레기 남 주제에 성공하는 꼴은 더더욱 못 본다.10시 반.성현준은 회의실에 혼자 앉아 묵묵히 줄담배를 피워댔다. 그때,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하고 유이안의 전화라 여긴 성현준은 한 치의 망설임도
화려한 룸 안에는 두세 명의 손님뿐이었는데 유이준이 그중 하나였다.진안영은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아서 아까부터 돌아다니고 있었고 알아주는 아내 바보인 조진범은 그녀가 힘들까 봐 걱정스레 바라보며 도와주고 있었고 와 있던 남자 손님 셋은 앉아서 카드게임을 하고 있었다.그때 진은영이 마침 안으로 들어오자 한 사람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마침 사람 하나가 모자랐는데 은영 씨도 같이해요.”그 말에 유이준이 들고 있던 카드를 내려놓자 그 사람은 빠르게 호칭을 바꾸어보았다.“진 대표님?”그때 옆에 있던 사람들이 팔꿈치로 그를 치며 눈치를 주었다.“형수님이라고 불러야지.”그에 유이준은 아무렇지 않은 척 한마디 했다.“재미없어.”그런데 조진범이 또 눈치 없이 진은영에게 머그잔을 건네주며 유이준의 심기를 건드릴만한 말을 꺼냈다.“호칭은 똑바로 해야지, 우리 처형 남자친구 있어, 26살 된 미소년이라고.”조진범이 유이준 들으라고 그러는 걸 알기에 잘못한 것도 없었던 진은영은 굳이 해명을 하지 않고 그의 손에서 머그잔을 받아들며 고맙다는 말만 했다.그에 유이준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조진범을 보고 있었고 조진범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럼 잘 놀다가.”조진범이 나가자 진은영을 바라보고 있던 유이준의 자신의 옆자리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진은영더러 앉으라고 했다.진은영도 거절하지 않고 앉았는데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 그런가 능수능란하게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걸 보니 유이준은 또 뭐가 불만인지 뚱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진은영의 상대편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유이준, 오늘 우리 술만 마시는 건데 왜 혼자서 질투를 하고 있어. 그러다가 은영 씨 남자친구가 데리러 오기라도 하면 아주 오늘 상 엎는 거 아니야?”그에 유이준은 낮은 음성으로 차분하게 대꾸했다.“안 올까 봐 이러는 거야.”어이없는 대답에 진은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유이준 씨, 내 일이 당신이랑 아무 상관없어요.”“그래요?”카드를 내고 진은영을 바라보는
샤워를 마친 진안영은 젖은 머리를 닦아내고 베란다에 서서 불어오는 밤바람을 만끽했다.진별이가 유이준 집에 가 있으니 전과 달리 자유시간이 많아져서 그 시간에서 카페도 가고 진안영과 함께 쇼핑도 할 수 있어서 좋았다.하지만 진은영은 딱 거기까지였다.임하민 일이 있고 나서 진은영은 생각이 이리도 다른 사람끼리 함께 있어 봐야 부딪치기만 할 것 같아 유이준과 확실히 선을 긋고 원망을 떨쳐버리고 자신도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그래서 2, 3개월 동안 둘 사이에는 사랑을 기반으로 한 어떠한 대화도 오가지 않았었다.진은영이 이런 상황에 만족하고 있을 때 진안영과 조진범이 그에게 남자를 하나 소개해줬는데 유능한 디자이너에 성격도 좋고 다정한 사람이었지만 나이가 26으로 진은영보다는 한참 어린 나이였다.진은영은 저런 남자를 만나는 건 어린 애한테 못 할 짓인 것 같아 망설였는데 진안영이 남자는 집안도 좋은데 심지어 막내라 가업을 물려받지 않고 회사의 지분 15%만 가지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된다고 자꾸 진은영을 부추겼다.진안영이 했던 말들이 떠올랐던 진은영은 고개를 숙여 자신을 훑어보았다. 도대체 어디가 매력적이라서 젊고 조건 좋은 남자가 저에게 흔들리는 것인지 진은영은 결국 찾아내지 못했다.그때 진은영의 눈에 슬랙스를 입은 채로 검은색 차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는 유이준이 들어왔다.어두운 밤하늘과 대비되게 유난히 하얗고 맑은 피부를 가진 유이준이었다.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이 그가 뱉어낸 담배 연기를 헤집어놓았고 유이준의 머리칼도 바람에 따라 흩날렸다.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잘생긴 모습에 진은영은 저도 몰래 유이준을 주시하고 있었고 때마침 고개를 든 유이준은 그런 진은영과 눈을 맞추었다.유이준은 손을 귓가에 가져다 대며 진은영에게 전화를 하라고 했지만 진은영은 고개를 저으며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대화도 못 하고 그저 유이준을 바라보기만 했다.그런 진은영의 뜻을 알아차린 유이준도 아직은 자신에게 다가올 준비가 채 되지 않은 그녀를 다그치지 않고 마
하지만 임하민은 추태를 보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해 참으며 진별이와도 작별인사를 했다.진별이는 통 크게 자신이 좋아하는 과자를 임하민에게 나누어주었다.그에 임하민은 나지막하게 말했다.“고마워.”임하민의 말을 듣고 난 진별이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밥을 입에 욱여넣기 시작했다.밥을 잘 먹어야 빨리 커서 엄마를 지켜줄 수 있을 것만 같아서....저택을 나가자 푸르른 잔디와 그 위를 날아다니는 반딧불이들이 눈에 들어왔다.그 옆에는 가지가 무성한 큰 나무도 하나 있었는데 유이준은 그 아래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서른 살 남짓한 나이의 남자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잘생겨 보였다.그런 유이준을 오래도록 원해왔던 임하민은 오늘에서야 모든 건 저의 짝사랑일 뿐이었다는 걸 깨달았다.유이준도, 유 씨 집안사람들도 자신이라면 치를 떨지만 그냥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것뿐이었다.임하민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는 사람이었기에 모든 걸 명확하게 알게 된 지금은 관계의 마침표를 찍어야 할 때인 것 같았다.임하민이 다가가자 마침 담배를 다 피운 유이준이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시작했다.“내가 하는 말이 너한테 상처가 될 걸 알지만 그래도 이런 건 확실히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 나 사실 너 좋아한 적 없어. 그때 너한테 헤어지자고 한 건 별이 때문만은 아니야. 나 은영 씨 좋아해, 그게 아니면 내 조건에 이렇게 오랜 시간 혼자인 게 말이 안 되잖아. 진작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겠지.”달빛이 드리워진 임하민의 표정은 나라를 잃은 사람처럼 어두워져 있었다.“그럼 나는 지금까지 은영 씨 대타였던 거네, 그저 네가 잠시 머물다 가는 존재?”임하민의 말에 돌아오는 게 유이준의 침묵이라 그녀의 마음은 더욱더 아파왔다.한동안의 정적 끝에 유이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미안해, 전에는 내가 남녀 사이의 거리에 대한 개념이 없어서 은영 씨한테 상처를 준 것 같아. 앞으로는 우리 거리를 좀 두자.”임하민의 감정이 격해지자 유이준은 기사더러 그녀를 데려다주라고 하고는 흰색 차
진은영은 아직 저를 사랑할 텐데 왜 둘 사이의 일이 채 해결되지도 않은 이때 선을 보는 건지 유이준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그래서 물어보려고 하는데 하연이 먼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새 인생 시작하고 싶대, 더 이상 혼자 힘들기도 싫고 다른 사람 바라보는 자네한테 매달리기도 싫대.”그 말에 어이가 없어진 유이준의 자신의 코를 만지며 말했다.“아줌마, 은영 씨 말 듣지 마세요, 저 어디 가서 부끄러운 짓 한 적 없어요.”비록 하연이 평소에 유이준을 좋아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제 딸을 모른 척하고 사위를 감싸고 돌 사람은 아니었다.“그래도 내 딸이잖아.”롤스로이스 뒷좌석에 앉아 사랑을 받을 만큼 받아서 혼자서도 잘 놀던 진별이는 문이 닫히는 소리에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아빠 또 화났어요?”유이준은 바로 몸을 돌리며 제 딸을 향해 떠보듯 물었다.“요즘 엄마 어떤 아저씨랑 자주 연락한 적 있어?”그 말에 곰곰이 생각하던 진별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준식 아저씨가 저번 주에 귀국했다고 엄마한테 밥 사줬어요. 엄마가 엄청 이쁜 옷 입고 향수까지 뿌리고 나갔어요.”또 나타나서 진은영을 만나는 박준식에 유이준은 표정을 굳혔지만 다행히도 그는 이미 재혼을 한 탓에 진은영과는 친구 이상으로 발전할 수가 없었다.그러니 유이준이 지금 제일 신경 쓰이는 건 진은영이 선 자리에서 만났다는 젊고 미혼인 남자였다.그에 블록을 가지고 놀던 진별이가 말했다.“어차피 아빠는 하민 아줌마 있잖아요.”임하민의 이름이 언급되자 유이준의 표정은 아까보다 더 어두워졌다.이제는 다른 남자를 찾는 것보다 유이준에게 계속 들이대는 게 더 승산 있다고 여긴 건지 진별이의 존재에도 상관없다는 듯 매일 매일 유이준을 쫓아다니는 임하민이었다.유이준은 이미 임하민의 전화는 완전히 씹고 있었지만 임하민은 아랑곳하지 않고 매일 유이준의 집에 출근 도장을 찍고 있었다. 유선우와 조은서도 다 아는 사람이라 얼굴을 붉히기는 싫어 여러 번이나 돌려서 말해봤지만 모른 척하는 임하민에
그러다가 그의 시야에 진은영과 진별이가 들어오자 그는 빠르게 담배를 끄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전처럼 도우미에게 아이를 넘기고 계단도 오르지 않은 채 다시 차 문을 열려던 진은영은 갑자기 들려오는 유이준의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추었다.“왜 안 들어와요? 시간도 늦었는데 밥이라도 먹고 가요.”사실 유이준도 이미 부모님의 여러 차례나 되는 요청을 거절한 걸 보고 진은영이 정말 저와는 선을 그으려 한다고 확신했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할 그가 아니었다.유이준은 자신의 등 뒤에 서 있는 저택을 보며 말했다.“별이 위해서라도 같이 식사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그에 진은영은 담담히 웃으며 대꾸했다.“별이를 위해서 거리를 두는 거예요. 애 혼란스럽게 하면 안 되니까요. 같이 식사도 하고 그러면 우리가 다시 화해했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잖아요.”“다시 잘 지내면 안 되는 거예요?”유이준이 코웃음을 치며 물었지만 진은영은 그 질문에는 답을 하고 싶지 않았다.그때 유이준의 핸드폰이 울려왔고 발신자가 임하민인 걸 본 유이준은 바로 끊었지만 진은영은 누군지 알 것 같아 자신과 유이준 사이에 남은 건 별이 뿐이라고 다시 한번 되새기며 입을 열었다.“이제라도 틀린 건 바로잡아야죠. 유이준 씨 결혼 상대는 애초에 임하민 씨였잖아요.”그 말에 아이를 안고 있던 유이준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진짜 웃기는 사람이네요 은영 씨. 전에 내 목 끌어안으면서 떨어지기 싫다고 키스하던 사람은 다른 사람이었나 보죠? 왜 이제 와서 바로잡자는 건데요?”그 말에 진은영이 표정을 굳히자 진별이는 작은 주먹을 꽉 쥐며 진은영을 응원해주었다.유이준은 정말 진별이가 배신자 같아 보였다.“나는 아빠가 더 좋아요.”바로 제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진별이였지만 유이준은 그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진은영이 차를 몰고 떠나자 유이준도 그만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여름이라 짧은 면 치마를 입고 있던 진별이는 나비처럼 유선우의 품 안으로 뛰어들더니 이번에는 조은서의 품에 안겨 한참 동안
유이준이 멍하니 서 있자 진은영은 힘겨워하며 입을 열었다.“내가 박준식 씨를 처음 만나는 그날 주차장에서 임하민 씨랑 당신이 같이 있는 걸 봤어요. 임하민 씨가 우니까 당신이 엄청 안쓰러워하며 안아주더라고요.”진은영의 말에 잊고 있던 일을 떠올리던 유이준은 별이 분유를 사러 가던 날 주차장에서 우는 임하민을 마주친 걸 기억해냈다.그날은 그저 지인이니까 그냥 지나칠 수도 없고 해서 위로해준 것인데 그걸 진은영이 봤을 줄은 생각도 못 했었다.하지만 유이준은 제 생각을 그녀에게 똑똑히 전해야만 했기에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나 걔한테 아무 감정도 없어요.”그 말에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이던 진은영은 내일 아침에 진별이를 데려간다는 말만 남기고는 유이준의 만류에도 호텔 방을 나가버렸다.진은영이 나가고 한참 동안 가만히 서 있던 유이준은 셔츠를 벗어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진은영은 자신이 바람을 피운다고 의심하고 있었고 유이준은 그녀가 작은 일로 성급히 헤어지길 결정하는 것에 화가 났지만 그보다 더 그를 열 받게 했던 건 화장실에서 스타킹을 꺼내오는 임하민이었다.그 생각만 하면 당장이라도 임하민을 죽여버리고 싶었기에 유이준은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이튿날 아침, 유이준이 아직 깨어나지 않았을 때 진은영은 진별이를 데리러 왔다.유이준은 사실 공적인 일은 다 마무리한 상태여서 진은영과 함께 B 시로 갈 수 있었지만 C 시에서 시간을 더 보내며 사이를 회복하고 싶었지만 진은영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안돼요.”진은영은 진별이에게 옷을 입혀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요즘 회사도 바쁘고 엄마도 퇴원해야 해서 시간 없어요.”가운만 입고 있었던 유이준은 그대로 가운을 벗어 던지고 검은색 슬랙스를 입고는 듬직한 어깨를 드러내자 진별이는 바로 작은 손으로 눈을 가리며 말했다.“아빠, 변태예요? 왜 옷을 안 입어요!”어젯밤부터 자신을 무시하며 밤에 자다 깨서도 유이준이 타준 분유는 먹지도 않던 진별이가 드디어 입을 열자 유이준은 기뻐하며 쭈그
검은 먹물처럼 새까만 밤하늘을 등지고 선 유이준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고작 이런 일로 나랑 헤어지겠다고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좋았잖아요 우리.”“좋았죠.”“그때는 내가 누군가한테 소중한 사람이 된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지금 이준 씨가 하는 말과 행동은 내가 존중받을 가치도 없는 사람인가 하는 의심이 들게 해요. 우리의 시작이 완벽하지 않아서 나는 유이준 씨의 존중도 못 받는 건가요? 임하민 씨 집안과 유 씨 집안이 좋은 사이라서 임하민 씨는 이준 씨 관심도 받고 실연하면 위로도 해주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임하민 씨에 비해 한참 부족한 나는 무시받아 마땅한 거예요?”...말을 할수록 진은영은 가슴이 먹먹해졌다.처음에는 그녀도 이렇게 말을 길게 할 생각이 없었다.누군가와 비교를 하면 할수록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고 또 유이준과도 얼굴을 붉힐 것 같아 둘 사이에 있는 진별이를 위해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자고 생각했는데 점점 감정이 산으로 가고 있는 것 같았다.그래서 진은영은 뒤로 물러나며 나지막이 말했다.“당신한테도 나한테도 좋은 결정일 거예요. 나는 내가 생각했던 삶을 살고 당신은 앞으로도 자유롭게 살면 돼요.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니까 우리 서로 탓하지 말아요. 그리고 별이는 같이 키워요.”그 말에 유이준은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뭐가 좋은 결정인데요.”“차라리 날 욕하고 때려요, 어떻게 헤어지자는 말을 이렇게 쉽게 해요? 은영 씨한테 나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어요? 언제든지 마음에서 지워버릴 수 있는 사람이었냐고요.”진은영이 낮은 목소리로 부정하려 할 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김 비서가 따라온 줄로만 알고 문을 열던 유이준은 문밖에 서 있는 임하민에 눈을 크게 떴다.섹시한 드레스를 입고 손에는 예쁜 쇼핑백 같은 걸 들고 있던 임하민이 안쪽을 힐끔거리며 물었다.“은영 씨 화났어? 내가 들어가서 사과할까?”유이준은 그녀를 돌려보내려 했지만 임하민은 미꾸라지처럼 틈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가 진은영에게 사과했다
많고 많은 여자들이 진은영에게는 상처로 남아있었다.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지만 언제부턴가 점점 변해가며 밖에서 다른 여자들과 몸을 섞고 혼외자를 집으로 데려오는 아빠 때문에 엄마의 결혼생활은 매일매일이 고통이었다.진은영의 기분이 안 좋아진 걸 눈치챈 진별이는 그녀의 품에 안겼다.사실 진별이도 유이준 때문에 화난 건 마찬가지였다....진은영이 그런 딸을 호텔까지 데려다주며 위로해주자 유이준은 그녀가 오바하는 거라며 말했다.“별이 그렇게 나약한 애 아니에요, 그리고 나랑 임하민은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라니까요.”“앞으로도 아무 사이도 아닐 수 있어요?”“이준 씨, 별이 예민한 아이예요, 어릴 때가 내가 직접 못 키운 게 나는 아직도 미안해요.”“별이 이미 화났어요. 자꾸 어른들만의 생각으로 한 아이의 생각을 엿보려 하지 마요. 내가 낳은 내 딸이니까 나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어요.”...말을 마친 진은영은 진별이에게 이불을 덮어주고는 창문을 등지고 서서 생각에 잠겼다.물론 진은영은 아직 유이준을 사랑하고 있었지만 유이준과는 생각부터 크게 다른 사람이기에 서로의 행복을 위해서 같은 길을 걸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그 시각 유이준도 검은 눈동자로 진은영을 주시하고 있었다.살면서 한 번도 여자의 속박을 받아본 적이 없는 그인지라 오늘 밤 일이 기분 나쁘긴 했지만 저보다 더 기분 나빠 보이는 진은영에 유이준은 임하민과의 관계에 대해 해명을 하기 시작했다.밤이 깊어질 때가 돼서야 끝난 유이준의 말에 진은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준 씨가 하는 말 다 믿어요. 하지만 이준 씨가 바꾸지 않는다면 우리가 계속 같이 걷는 건 힘들 것 같아요. 말은 안 했지만 이준 씨는 다시 시작하고 싶은 거잖아요.”진은영은 뒤돌아서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이성과는 거리를 두고 배우자를 존중해줬으면 좋겠어요.”그 말을 들은 유이준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 망신까지 당한 오늘 일이 너무 억울해서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래서 자연스레 안 좋은 소리부터 나갔다.“우
연회 장소는 여기서 약 10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원래 김 비서는 차로 진은영을 데려다주려 했지만, 진은영은 택시를 타겠다며 거절했다.C 성의 봄밤은 꽤 차가웠다.진은영은 얇은 패딩을 입고 있었지만, 몸이 떨릴 정도로 추웠다. 사실 그녀 스스로도 날씨가 추운 건지, 마음이 더 시린 건지 알 수 없었다. 유이준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커서 그 스캔들을 보는 순간, 그녀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아무리 유이준을 좋아한다 해도 그녀는 자신의 입장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었다.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끝없는 기다림이 될 테니까.남자는 결혼 전에 길들이는 것이 좋다. 결혼한 후에 이런 일들로 시끄럽게 싸울 거라면 그런 결혼은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낫다.파란색 택시가 천천히 다가오자 진은영은 몸을 굽혀 차에 탔다. 그녀가 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하자 기사는 감탄하며 말했다.“오늘 거기 아주 떠들썩하더라고요. 호텔 입구에 고급 차들이 줄지어 서 있고 예쁜 여배우들이 한가득 이에요.”진은영은 무표정하게 응수했다.그녀는 오랫동안 사업을 해왔기에 그런 자리의 음탕함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진별이를 데리러 C 성에 오기로 결심했던 것이다.유이준이 아무리 방탕하더라도 아이를 데리고 그런 곳에 가는 건 바람직하지 않았다.문득 그녀의 마음속에 서글픔이 밀려왔지만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과 유이준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몰라 너무 불안했다...택시 뒤로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따라왔다.김 비서였다.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듯 그녀도 참 난감했다.하지만 그녀도 여자인 만큼 유이준에게 미리 알리지 않았다. 그녀도 마음속으로 유이준의 행동이 잘못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유 대표님이 진은영 씨를 선택했다면 마땅히 다른 여자들과는 거리를 두어야지 이렇게 진은영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건 잘못된 것이었다...반 시간 뒤, 진은영은 연회장에 나타났다.유이준은 임하민과 춤을 추고 있었는데 이 바닥에서는 지극히 평범한 일이었다. 단지 춤 파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