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걸 예상하지 못했던지라 너무 놀랐다. 너무 어리석은 행동이었기 때문이다.신호연의 얼굴색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하지만 재빨리 마음을 진정시키고 말했다.“그 사람 도혜선 내연남이야!”예상 밖으로 빠른 신호연의 눈치에 나는 순간 멈칫했다. “여보, 제발 나 좀 믿어줘. 마지막으로 나에게 기회를 한 번만 더 줘! 지금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천우 그룹과의 프로젝트를 따내는 것이잖아. 이런 작은 일에 목매다가는 프로젝트도 놓칠 수 있다니까. 당신이 직접 두 손으로 세운 신흥 건재잖아. 그런 신흥 건재가 더 크게 발전할 기회를 당신도 놓치기 싫잖아. 남편인 내가 실수할 때 당신이라도 정신을 차려야지!”신호연은 나를 꼭 끌어안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지아야, 내가 잘못했어. 정말 미안해.”나는 할 말을 잃었다. 신호연의 가장 비겁한 점을 말하자면 바로 내 약점이 무엇인지 꿰뚫고 있다는 것이었다.나는 신호연을 밀어내고는 천천히 그의 사무실을 나왔다. 나는 맘속으로 되뇌이면서 자신을 경고했다.‘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한 걸음이라도 잘못 내디뎌서는 안 돼.’신호연이 지금까지 신연아를 너무 철저히 보호하고 있는 탓에 아무런 약점도 잡을 수 없었다.나는 사무실로 돌아가자마자 이번 일에 관한 모든 기사를 다 찾아보았다. 확실히 놓친 점이 있었다. 바로 목격자의 신원이 잘 보호되어 공개되지 않은 것이었다.나는 이미연을 시켜 기사를 쓴 기자들에게 압력을 가하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관련 기사 댓글 창에는 목격자가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댓글이 달렸다.보잘것없어 보이는 댓글 하나가 수많은 연쇄 반응을 일으켰다. 조회수는 순식간에 상승했고 관련 기사를 공유하는 사람들도 부단히 많아졌다. 이게 바로 구경꾼들이 가지고 있는 무시할 수 없는 힘이었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고 신호연이 바로 과한 호기심에 피해를 보게 될 고양이었다.신호연 사무실에서 제때 나왔기에 다행이지 아니면 기사를 본 직원들의 호기심 가득한 시
신호연은 말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자신감이 없다는 듯 입을 닫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는 손에 있던 주방일을 계속하면서 예전처럼 주동적으로 신호연을 위해 해결책을 내주지 않았다. 피해자인 내가 신호연을 위해 해결책을 찾아준다는 게 말이 안 되었다.바로 이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둘은 동시에 멈칫했다.신호연이 걸어가서 문을 열어보니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하게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은 바로 이미연이었다.이미연은 있는 힘껏 문을 쾅 하고 닫고 들어오면서 큰 소리로 신호연을 비난했다.“신호연, 넌 진짜 사람이 아니야! 널 뭐라고 욕하면 내 속이 시원할까, 한심한 자식!”신호연은 이미연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이미연은 예전부터 성격이 털털했고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면서 사는 직설적인 사람이었다. 게다가 이미연과 내가 절친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신호연은 이미연의 이런 행위가 하나도 놀랍지 않았다.신호연은 고개를 숙이고는 잘 보이기 위해 성심성의껏 반성하는 모습을 드러냈다.“내가 너한테 몇 번이고 경고했잖아, 주의하라고, 밖에서 이 여자 저 여자 건들며 다니지 말라고! 지금 경고할 때마다 네가 나한테 한 다짐이 다 진심이 아니었다는 거잖아!”이미연은 화를 내면서 끝없이 신호연을 비난했다. 날 위해 화풀이해 주려는 의도가 선명했다.“넌 지아한테 미안하지도 않니? 지아가 너 따라 이 먼 서울까지 올라와서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면서 오로지 너만 바라보며 사는데 넌 그런 짓 할 때 지아가 속상해할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니?”“...미안해.”신호연은 머리를 숙이고는 눈치를 보며 사과했다.“눈이 먼 것도 아닌데 눈 좀 똑바로 뜨고 다녀. 지아가 네가 밖에서 만난 그 여자들보다 못한 게 뭐가 있는데!”“한지아, 너도 너무 해. 이런 큰일이 일어났는데 어떻게 나한테 연락조차 안 할 수 있어? 지금 서울에 퍼지고 퍼진 게 신호연이 바람피웠다는 소문인데 이걸 어떻게 참아? 한지아, 날 절친으로 생각하는 거 맞아?”이미연의 예상치 못한 행
주문한 배달 음식을 받은 후 이미연은 집주인처럼 얼른 와서 밥 먹으라고 나와 신호연을 재촉했다.“빨리 와서 밥 먹어. 아무리 힘들어도 밥은 챙겨 먹어야지. 한국인은 밥심인 거 몰라? 배부터 채우고 생각해. 그리고 한지아, 지금 네 꼴을 봐봐. 사람이 나뭇가지처럼 말라 있잖아.”이미연은 내가 속을 엄청 많이 태워 몰골이 말이라는 티를 팍팍 냈다.신호연은 나를 힐끔 보더니 음식을 짚어 내 밥그릇에 담아줬다.“신호연, 더 큰 피해를 보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 일을 수습할 방법을 찾아. 지금 지아뿐만 아니라 너희 회사까지 피해를 보고 있어. 그렇다고 회사가 망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이미연은 정확히 신호연의 약점을 명중했다.“이런 여론이 퍼지기 시작하면 항상 회사에도 영향이 가는 법이야. 신흥 건재가 얼마나 힘겹게 세워지고 또 너희가 신흥 건재를 위해 얼마나 많은 정성을 기울였는지 다 봐온 사람으로서 하는 충고야.”“나도 생각했었어, 하지만...”신호연은 더는 참지 못하고 나를 보면서 말을 이어갔다.“하지만... 지아가 속상해할까 봐 얘기 못 했어.”“어휴... 쓸데없는 변명은 그만하고 얼른 말이나 해. 지아가 속상해하는 걸 걱정하면서 바람을 피워? 애초에 그런 생각을 했다면 바람을 피지 말았어야지.”이미연은 신호연을 향해 팩폭을 했다.신호연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검은 물감처럼 어두워졌고 어금니를 깨물면서 화를 참고 있는 듯했다. 이를 깨문 힘이 얼마나 컸는지 안면 근육이 다 일그러졌다.“지아도 나랑 말하지 않아서 너희 회사 상황에 대해서는 나도 아는 게 별로 없어. 아니, 한지아...너 입에 자물쇠라도 걸어뒀어? 내가 네 절친이 맞긴 해? 어쩌면 나랑 한마디도 안 할 수가 있어?”이미연은 불만을 토로했다.“아무튼, 이 시국에 제일 급하고 제일 중요한 건 이번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수습하는 거야.”이미연은 신호연을 보면서 물었다.“신호연, 네 생각도 한번 말해봐. 백지장도 맞들면 가볍다고 우리도 빨리 해결책을 생각해 내야지! 아무리
이미연이 내 쪽을 한번 힐긋 쳐다보자 나는 그녀를 보며 눈을 깜빡이었다. “지아야, 너도 너무 화내지는 마! 이미 일은 이렇게 됐고... 함께 이겨내 나가자.” 그녀가 따뜻하고 친절한 말투로 나를 위로하자 나의 눈시울이 붉어져 급히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얼른 핸드폰을 꺼내 서강훈에게 카톡을 보내고 한 번 더 세수를 마친 뒤 다시 나갔다. “너희가 말해줘. 나 어떻게 할까? 나... 진짜 뻔뻔하게 할 거야.” 말이 끝나기 바쁘게 눈물이 또 흘러나왔다. 정말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이때 갑자기 신호연의 전화가 울렸다. 깜짝 놀란 그는 재빨리 누구인지 확인한 후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 안에서 도대체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얼굴이 하얗게 질린 그가 바르르 떨리는 입술 사이로 차갑게 말을 뱉어냈다. “알았어!”전화를 끊은 뒤 그는 고개를 푹 떨구고는 의기소침해 있었다. 나는 눈썹을 찌푸리고 고개를 들자 눈을 동그랗게 크게 뜨고는 나를 바라보는 이미연과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잠시 후 신호연은 고개를 들어 나를 보더니 급하게 말을 꺼냈다. “나 잠깐 처리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잠시 나갔다 올게. 금방 돌아올 거야! 이미연, 지아 좀 챙겨줘.”“뭐 하러 가는데?” 나는 일부러 살짝 불쾌한 말투로 물어봤다.“걱정하지 마. 금방 올 거야! 응?”그는 나를 달래고는 급하게 뒤 돌아 나갔다. 그의 발걸음 소리는 점점 멀어졌고 나는 얼른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통화음만 들려 올뿐 받는 사람이 없었다.이미연은 귓속말로 소곤소곤 물어보았다. “쟤 얘기도 아직 안 끝났는데 어디를 가는 거야? 설마 이렇게 그냥 가는 건 아니겠지?”“걱정하지 마. 내가 다 미리 생각하고 준비해둔게 있으니까.” 나는 다 계획이 있다는 듯 말했다. 그러고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땐 누군가 내 전화를 받았고 나는 바로 입을 열었다. “당신들이 하는 대화 모두 다 녹음해 줘요!”이미연은 입을 딱 벌리고 물었다. “... 한지아, 설... 설마 이거 다 네가
그녀는 ‘쾅’ 소리와 함께 사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그녀는 정말 흉악한 모습을하고는 나에게 소리쳤다. “한지아씨, 정말 자유로워 보이네요. 한가하게 여기서 남을 부려 먹으면서 사모님 행세나 부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세요?”나는 의자에 앉아 차분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때 서강훈이 들어오면서 그녀를 말렸다. “아가씨,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일이 있으면 집에 가서 해결하면 안 돼요? 보는 눈이 이렇게나 많은데... 회사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요!”“무슨 영향을 끼친다고 그래? 저 사람이 그런 걸 무서워할 거 같아? 쟤가 뭔데?” 신연아는 입이 정말 거칠었다.나는 유리창 너머로 거실 사무실의 사람들이 모두 일어서서 우리를 보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나는 서강훈에게 말했다. “저들을 조기퇴근 시켜버려요. 지금 당장!”서강훈은 서둘러 나가 구경하는 직원들을 해산시켰다. 그들은 모두 마지못해 꾸물대며 사무실을 나갔다. 예전 같았으면 2시간 미리 퇴근시키는 게 아니라 20분만 앞당겨도 부리나케 사무실을 나가던 사람들이였는데...나는 여유롭게 앉아서 신연아를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계속 말해봐. 아까 한 말들 계속 말해보라고.”눈치가 빠른 서강훈은 만일에 대비해 우리 둘 사이에 서 있었다. 신연아는 도대체 무슨 소문을 들은 건지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너 진짜 내 앞에서 가식 작작 떨어. 이렇게 큰 사달이 났는데 넌 그냥 손 뻗어서 돈만 가지면 다야? 혹시 네가 수작 부린 건 아니야? 도대체 우리 오빠한테 무슨 약을 먹인 거야?”나는 이제야 그녀가 왜 화났는지, 무엇을 보고 그렇게 달려왔는지 알 수 있었다. 방금 입금된 저축금 때문이었다.“너도 사태가 심각하다는걸 아나 봐? 그럼 도대체 이 사태는 누가 냈는데?”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덤덤히 그녀에게 되물었다. “사태가 아무리 심각해진다 해도 이건 우리 부부 사이의 일이야. 네가 뭔데 그리 급해해?”나는 여전히 의자에 평온하게 앉아
“됐어! 다들 조용히 해!” 신호연은 또 나를 향해 소리쳤다.“너 또 쟤 편드는 거지? 넌 정말 오빠로 딱 맞아. 맨날 자기 품 안에 숨겨주고, 사사건건 쟤가 하라는 대로 하고... 나는 쟤가 네 여동생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야. 딱 보니까 쟤가 네 아내네. 쟤 말이라면 무조건 복종하잖아!”“한지아...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언제쯤이면 좀 철이 들고 관건적인 일을 위해 고려할거야?” 신호연은 순간 얼굴색이 변했고 나를 세게 밀쳐냈다. 이에 나는 살짝 비틀거렸고 그걸 본 서강훈이 깜짝 놀라서 나를 붙잡아 주었다. “지아누님...”나는 다시 똑바로 서서 신호연을 바라보았다.“오빠, 오빠도 봤지? 쟤는 무슨 일이 생기면 항상 자기밖에 생각할 줄 모른다니까... 언제 한 번이라도 오빠를 걱정해 준 적이 있어?”신연아는 신호연의 뒤에서 불난 집에 부채질했다. “한지아, 기억해. 신흥은 우리 신씨 가문의 회사라. 법인은 신호연이고 당신이랑 아무 상관이 없다고. 오늘 이후 신 씨 가문의 회사 빼앗을 꿈도 꾸지 마. 당신이 창시자라고? 풉.”“신호연, 이거 네 뜻이야? 응?” 나는 신호연을 바라봤다.신호연의 얼굴색은 누렇게 변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는 어금니를 꾹 깨물고 나의 감정을 억누르면서 애써 눈물을 참았다.“신호연. 만약에 쟤 말대로 네가 정말로 배은망덕하고 흉악무도한 사람이라면 지금부터내가 하는 말 똑바로 들어. 내가 처음에 신흥을 어떻게 일으켜 세웠는지 난 다 기억하고 있어. 나보고 지금 또 신흥을 하나 더 세워라 해도 난 똑같이 세울 수 있어. 나는 걔가 네 여동생이든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든 관심없어. 다시 한번 내 앞에서 떠들어 대면 네 여동생이 절대 감당하지 못하게 될 결과를 보게 될거야!”그러고는 지금도 신호연 뒤에 붙어서 의기양양해하는 신연아를 보며 말했다. “신연아,너도 잘 들어. 날 너무 얕잡아 보지마. 신호연 아직 내 남자야, 네가 그렇게 급해봤자 소용이 없어! 네가 어떤 물건이든 어떤 사람이든 가지고 싶거든 나라는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가 지금 서 있는 이곳은 산들로 에워싸여 있고, 강줄기가 굽이굽이 흘러 빼어난 경치를 자랑한다. 마치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듯하다.“여기는 어디예요?” 나는 조심히 물어봤다.“도원경이에요.” 그의 굵은 목소리 톤은 매우 매력적이고 인상 깊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옆에 서 있는 키가 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 사람이 곁에 있어 나는 안정감을 찾은 것 같았다. 나의 심장이 속도를 더해 가며 가쁘게 뛰었다. 그와 함께 있을 때면 혼이 쏙 빠진 것처럼 자아가 없어지는 것 같고 무조건 따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나 자신도 깜짝 놀랐다. 최근에 나의 삶은 평범한 것 같지만, 위태로운 날들의 연속이었다. 곧 가족이라고 생각했던 사람한테서 버림받게 될 여인인데, 그 와중에 또 다른 사람한테서 의문의 감정이 들다니 정말 염치가 없다. 눈에 들어온 건 끔찍하리만치 잘생긴 얼굴이었다. 시선을 확 잡아챌 정도의 날렵한 얼굴 옆선과 강렬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어 사람을 현혹한다.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는데, 나는 틀림없이 바보같이 멍한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손을 들어, 내 얼굴의 잔 머리카락을 살며시 뒤로 넘기면서 말했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살이 더 빠진 것 같네요. 너무 마르면 저녁에 사람들이 귀신이라고 착각하겠어요.” 나는 코웃음을 치며 그의 손을 피해 아무 일 없듯이 가뿐하게 앞으로 걸어갔다. “여신은 몸무게가 백을 넘어서지 않는데요! 나름대로 여신관리법이에요.”내 말에 나 자신도 소름이 돋았다. ‘여신 소리하고 있네. 주제 파악도 잘 못 하는 상황에...’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이곳의 공기조차 달콤하게 느껴졌다. “여기 너무 아름다워요!”먼저 전망대에 올라가 난간에 기대어 먼 곳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서울에 몇 년이나 있었는데 이렇게 좋은 곳이 있는지는 몰랐어요. 예전의 저는 바보와 같이 남을 위해서만 힘들게 살아왔는데, 지금 다시 되돌아보니 남는
내가 몸을 돌리는 찰나에 그는 내 손목을 잡았다. 마치 내 손목을 부러뜨릴 것처럼 꽉 움켜쥐었다.더 이상 그의 눈을 쳐다볼 엄두가 나지 않아 꼭두각시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가지도 못하고, 남아도 난처한 상황이다. 우리는 한참을 꼼짝하지 않고 대치 중이었는데 그가 살짝 힘을 주더니 다시 나를 그의 품으로 끌고 왔다. 자연스럽게 나의 얼굴이 그의 가슴에 파묻혔다.“그 사람한테서 빨리 벗어나세요!”이 말이 촉매제가 되어 내가 막 쌓아 올린 단단해진 마음의 벽을 동요시켰다.“직접 제 손으로 복수하고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려놓아야만 지금까지 제가 허비한 시간을 보상할 수 있어요. 지옥 끝까지 쫓아가더라도 그들이 저랑 제 딸한테 한 짓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고 잃은 모든 것도 되찾을 것이에요.”나는 두 팔을 벌려 배현우의 허리를 두르고 그의 품에 꼭 안기며 안정을 찾으려 했다.“저는 이 치욕을 스스로 씻어낼 거예요. 저를 이해할 거죠?” 고개를 들어 눈물을 머금은 채 배현우를 바라본다.“그래야만 나 자신과 나를 위해 희생하신 부모님께 떳떳할 수 있단 말이에요!”“저를 따라오세요.”배현우는 내 손을 잡고 아름다운 경치를 지나 별장에 도착했다. 휴양지가 아닌가 싶은 곳이었다. 가는 곳마다 정성 들여 가꿔 놓은 듯 장인의 손길이 느껴졌다.그러나 지금의 나는 풍경을 감상할 여유가 없다.배현우는 나를 위층에 있는 넓은 스위트룸으로 데려갔다. 나를 소파에 앉힌 뒤 자료 한 다발을 건넸는데, 모두 프로젝트에 대한 상세한 소개였다.나는 그를 한 번 보고 무슨 의도인지 눈빛으로 물어봤으나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계속 보라고 손짓했다.배현우는 나만 방에 남긴 채 나갔다.나는 몸을 한번 풀고 자료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첫 문장부터 나의 관심을 일으켰고 나는 금세 자료에 몰입했다. 받아온 자료를 확인하는 내내, 배현우의 정보력에 감탄했다.어느덧 날이 어두워졌고 배현우가 다시 들어오면서 불을 켰다. 뒤에는 웨이터가 같이 들어오면서 한창 저녁 식사를 준비 중이다.
나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서강민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서강민 씨, 먼저 들어가시죠. 언니가 깨서 서강민 씨를 보면 또 흥분할 것 같은데... 지금 같은 상황에 언니가 회복하는 게 제일 중요하잖아요.”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한마디 더 보탰다.“어떤 일들은 천천히 해야 해요. 언니한테 시간을 좀 주세요. 서로 생각을 정리해 봐요.”서강민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깊은 잠에 빠진 도혜선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발길을 돌리기 전에도 아쉬움에 한 번 더 뒤돌아보며 나한테 말했다.“고생해 줘요.”나도 담담히 답했다.“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언니에게 시간을 좀 줘요. 언니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할 수 있잖아요.”내가 말하는 회복이 뭔지는 서강민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건 도혜선이 마음에 입은 상처였다. 오늘 도혜선의 행동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그녀의 상처는 아물 수 없을 것이다. 언급만 해도 피가 흘러내릴 만한 상처였다.잠시 후, 서강민은 한발 물러섰지만, 눈길은 여전히 도혜선에게 머물러 있었다. 평온해 보이는 모습 아래에서 어떠한 파도가 휘몰아치는지 나는 몰랐다.한참 전 도혜선이 했던 말들은 마디마디가 주옥이었다. 모두 그녀가 마음속으로만 담아두었던 것들이었고 또한 서강민의 약점이었다. 얼마나 아플지는 서강민 본인만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쓰디쓴 독주도 그는 혼자 삼켜내야만 했다.도혜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와 깨어나려는 낌새가 보이고 나서야 서강민은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나는 마음이 아파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어 도혜선의 손을 맞잡았다.인제야 하루 종일 배현우에게서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쪽에는 어떤 상황인지, 김우연에게서는 소식이 없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도혜선을 보니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 같아 살며시 그녀의 손을 놓고 일어서려 했을때, 그녀는 다시 나를 잡으며 미약한 목소리로 말했다.“가지 마...”나는 너무 놀라 얼른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서강민은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하는 걸까?’“당시의 사고는 내가 저지른 거야. 그녀도 나 때문에 다쳐서 지금처럼 된 거고… 나는 좋은 남편이 아니야. 아내가 식물인간이 되었는데 나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말이야...”서강민은 여기까지 말하며 후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너무 죄책감이 들고 고민스러워. 나 또한 발버둥 쳐봤지.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의 일탈을 받아들일 수 있어 해. 그녀한테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내가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거야...”“강민 씨!”도혜선은 꾸짖는 듯한 말투로 그의 말을 잘랐다.“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당신 아내가 듣고 있을 거예요. 저를 끌어들여서 같이 속죄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의 구세주가 아니에요. 저는 그냥 사람답게 살고 싶은 평범한 여자라고요. 저 좀 그냥 내버려둘 순 없어요?”도혜선은 말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이 일그러지며 그녀는 한 손으로 본능적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녀 앞으로 갔다.“혜선 언니, 움직이지 마! 위험해...”늑골 골절과 뇌진탕이 있는 환자다 보니 이러한 행동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위험했다.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녀를 안으려고 하는 한지아를 제지했다.“제가 오늘 한 말이 아직도 이해가 안 되나요? 서강민 씨, 저의 인생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당신한테 묶여 당신의 부속품이 되었었는데 저도 자존심이 있어요. 더 이상 당신처럼 지난날의 죄책감을 짊어지며 답답하게 살아가지 않을 거예요.”도혜선은 여전히 분노에 차 외치고 있었다.“매일 제 앞으로 와 지난날의 행동에 대해 속죄하라고 일깨워 주실 필요 없어요! 당신을 보면 저는 지난날 모든 서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치욕적인 과거가 떠올라요. 당신은 마음 가는 대로 해요. 당신은 아내와 했던 약속을 지켜야 해요.”말을 마친 도혜선은 숨이 차올랐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도혜선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계속하여 들려왔다.“당신은 아무런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저 같은 여자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아도 돼요.”그녀는 자기비하적인 말을 내뱉었다.”선아...”“설사 강민 씨가 와이프와의 약속을 안 지킨다 해도 당신의 신분과 지위로 당신에게 더 어울릴만한 사람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저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물며 당신네 부부 눈에는 저는 그냥 염치없고 미천한 사람일 뿐이죠. 저 같은 사람은 본처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아요. 사모님이라는 호칭도 어울리지 않죠.”“나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오해하지 마.”서강민은 조급함에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해명하려 했다.하지만 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를 막아섰다.“강민 씨... 해명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의 행동이 모든 걸 설명해 주고 있어요! 장담하건대 아직 당신들이 어떤 의도로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보가 된 건 아니에요. 그녀는 정말 대단하네요. 죽을 때까지도 제가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녀는 아무리 병상에 누워있어도 고상한 사람이고 저는 그냥 미천한 사람일 뿐이니 말이에요.”도혜선은 말을 내뱉으며 입가에 처량한 미소를 비췄다. 누가 봐도 가슴 아픈 미소였다.“이전의 저는 확실히 허례허식에 차 있는 사람이었지만 저도 성장했어요. 정신 차렸어요. 당신 앞에 있는 저의 진정한 가치가 어떤 것인지 깨달았어요. 저는 하나의 도구, 들러리뿐이었지만 원망하지 않았어요.”그녀는 여기까지 말하고 한숨 돌렸다. 얼굴빛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하지만 이제 저는 자존감을 챙기며 살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의탁하지 않고 쓰레기같은 취급을 받더라도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살고 싶어졌어요.”점점 더 차가워지는 도혜선을 바라보며 서강민은 답했다.“혜선아, 나는 널 한 번도 무시한 적 없어. 나는 그냥 내가 뭘 하든지 네가 다 이해해 줄 줄 알았어.”도혜선의 서강민의 말을 듣고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안색은 더 창백해져 있었다.“이해? 당신이 어떤 말을
방금 허투루 한 말이 어머니의 진실인가 싶다. 보아하니 어머니가 나를 속이는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마음속의 의문점이 점점 많아졌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마치고 차씨 가문의 할머니께 말씀을 드린 후, 위층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도혜선을 보러 가려고 준비했다.그리고 팔도 겸사겸사 검사하려고 했다. 차에 앉고 나서 배현우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았다. 이 이른 아침에 뭐 하러 갔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김우연 쪽에 무슨 소식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생각해 보니 이렇게 빠르진 않겠지? 몇 시간밖에 안 됐는데.'병실에 도착하자마자 도혜선이 노발대발하는 장면을 포착했다. 병실에는 도혜선과 서강민 두 사람만 보이고 이미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내가 들어서자 분위기가 좀 이상하고 심상치 않는 것을 느꼈다.침대 옆 머릿장에는 보온병이 놓여있다. 서강민은 오늘도 도혜선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러 온 것 같다.서강민은 침대 앞에 떡 하니 서있었고 침대에 있던 도혜선은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도혜선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상황을 정리하려고 다가가서 서강민에게 인사를 하고 도혜선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좀 어때?""별로야."도혜선은 차갑게 대답하더니 또 말을 건넸다. "지아야, 손님 좀 배웅해 줄래?"난감했다, 도혜선은 서강민을 내쫓으라고 하는 거였다. 난 당연히 그 뜻을 알고 있다. 조심스럽게 서강민을 쳐다보았다. "혜선아, 꼭 이래야 하니?"서강민은 씁쓸한 표정으로 도혜선을 바라보며 물었다."네! 서강민씨, 저는 이미 분명히 말했고 두 번 다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도혜선은 내가 그 자리에 있다고 해서 서강민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았다.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언니, 화 그만 내고 진정 좀 해. 초조해하는 거 알아, 점차 좋아질 거야. 강민씨랑 얘기 좀 하고 있어. 나는 팔 검사해야 돼서, 금방 돌아올 거야!"나는 핑계를 대고 떠나서 그들에게 자리를 비워주었다.
배현우는 나의 우울한 모습을 보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에 회사 일도, 한심로얄의 마지막 한방도 둘 다 포기할 수 없잖아요. 신예 쪽 일도 있고, 전희가 다시 살아날 기회를 얻지 않도록 조심해야 돼요. 지금 모든 게 중요한 시기이니까요.""지금 그 누구도 아버지보다 중요하지 않아요! 수십년간 도망치면서만 살았는데 죄책감도 가지고 있었을 거예요, 분명 아주 괴로워하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는데, 내가... 내가 딸로서, 난..."배현우는 내 말을 듣고 나서 침대에 누워 나를 꼭 껴안고 말했다. "일단 내일 소식을 기다려 봅시다. 김우연 쪽에서 어떤 정보를 얻었는지 보고 결정합시다."배현우는 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제 말 듣고 일단 자세요, 내일 일어나서 먼저 할 일들을 처리하고 준비하고 있으세요, 만약에 상황이 좋으면 내일 같이 데리고 갈게요, 당신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배현우가 지금 나를 위로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내가 기분 나빠하는 모습을 보지를 못한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았다. 배현우의 따뜻한 품에 안기며 눈을 감고 내일 먼저 무엇을 처리해야 할지 생각했다.근데... 눈을 떠서 배현우를 쳐다보는데 배현우도 잠에 들지 않았다. "현우씨... 할머니가 보존하고 있는 CCTV를 보여주시겠어요?"'그 영상을 꼭 보고 싶었다, 알고 싶었다. 어머니가 어떻게...'"알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자세요, 나중에 보여 드릴게요. " 팔짱을 끼더니 분명히 나를 얼버무리고 있는 것이다. 배현우가 그 장면을 내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밤이 깊었고,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배현우의품에 안겨 점점 잠이 들었다. 아침이 밝았다. 날씨는 여전히 흐렸다. 배현우는 이미 곁에 없었고, 손을 뻗어 그가 누워 있던 곳을 만졌다. 이미 차가운 걸 보니 배현우는 일찍 침대에서 일어났나 보다.'무슨 소식이라도 왔나?'이
"할머니가 이번 사건을 피할 수 있었던 건 당시 큰 병을 앓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했어요. 제 생각에는 반은 꽤병인것 같아요. 직접 사표를 쓰고 나서도 서둘러 호주를 떠나지 않았다는 게 참 슬기로운 선택이었어요.""네?"너무 놀라서 몸 둘바를 몰랐다.배현우는 인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호주를 떠나지 않으셨어요. 그곳에 머물면서 배씨 저택의 인기척을 살피다가 배씨 저택의 요상한 소문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에야 조용히 호주를 떠나셨어요."나도 모르게 할머니의 메커니즘에 감탄했다."저도 그때 상황을 잘 몰라서, 할머니도 몸이 허약했고 내 행방을 알아 볼 길이 없어 그 비밀을 계속 지켜왔었나봐요. 부하들이 할머니를 찾고 나서도 여전히 어리석은 척을 하고 있었지 뭐에요."배현우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할머니께서 저를 두눈으로 직접 보고서야 그걸 꺼냈어요."배현우의 말을 듣고 나니 할머니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던 중 배현우가 나를 쳐다보더니 나의 지친 모습을 보고서야 손을 들어 대문을 열어 장벽들이 천천히 열리는 걸 볼 수 있었다.차는 왔던 길을 따라 경원으로 다시 돌아갔다. 벌써 자정이 되어 우리 둘은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 방에 돌아왔다.'우리를 배신한 소인이 두 집안을 풍비박산 시켰다니. 오늘 밤 일어난 모든 일들은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간단히 씻고 걱정 가득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태어나서 얼굴도 한번 못 본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밥은 먹고 다니는지를 걱정해 발 뻗고 자지 못했다. '한강인이랑 한걸은 이미 잡혔는데, 우리 아버지는? 그의 처지는 어떤지.''한씨 부자가 그저 아버지를 인질로 삼아 그들의 안전을 확보하려 했다면 왜 배현우는 그곳의 환경이 복잡하다고 했을가.''이유는 간단하다. 누군가 아버지를 미끼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보고 싶으려는 걸가?''배현우? 아니면 배유정?'생각할수록 더욱 걱정이 됬다.아버지의 이번생은 이미 충분히 힘들다.어머니랑 서로
나는 걱정스레 배현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배현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계속 말했다.“후에 목격자 어르신을 찾고서 한강인을 자세히 조사하니 한강인은 이 모든 것이 일어난 뒤에야 천우 그룹을 떠난 거였어요. 지아 씨도 알잖아요. 그때 당시 천우 그룹은 아직 배유정 손에 있었어요.”“현우 씨의 말은 한강인은 배유정 과도 사이가 틀어졌단 말인가요?”나는 추측하며 물었다.“우리가 조사할 때 이상한 단서 하나가 나왔어요. 한동안 배유정도 한강인을 찾았고 심지어 한강인에 대한 추살령도 내렸어요! 참 이상해요. 배유정은 왜 한강인을 죽이라고 지령을 내린 걸까요?”“이유는 하나뿐이죠. 즉 한강인이 분명 무엇을 알아냈거나? 아니면 어떤 일에 참여하였거나?”나는 대답했다.배현우는 고개를 끄덕이었다.“진백이 죽임을 당했듯이 이 안에는 분명 남들한테 들키면 안 되는 비밀이 있는 거겠죠. 우리는 이 단서를 따라 계속 추적해 보니 한강인의 혐의가 점점 더 드러나더군요. 그리고 그의 아들 한결도 같이 도망쳤어요.”“그러고 보니 이 안에는 분명히 또 다른 요소가 있겠네요!”나는 사색에 잠겼다.“그래서 우리는 추측했죠. 한강인은 확실히 이 사건이랑 연관이 있고 둘이 도주하는 과정에 서로 연락하는 빈도를 보아서 부자 둘은 서로 다른 곳에 있는 것으로 판단했어요.”“그리고 한강인이 도망 다니는 그 시기에 그의 모친이랑 누나 모두 영문도 모른 채 실종되었어요. 지금 보니 그분들은 아마 이미 이 세상을 떠난 것 같네요. 이 때문에 한강인은 고두리에 놀란 새가 돼서 끊임없이 도망치며, 이 또한 한강인이 지금의 상태로 되게 한 원인인 것 같아요. 사실 한강인은 원래 지금의 모양이 아니거든요.”배현우의 말을 듣자 나는 저도 모르게 아까 보았던 한강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강인은 극도의 공포 속에서 엄청 정신적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다른 기타 방식으로 정신을 잃지 않게 버티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저렇게 말라죽을 정도일 리가 없다.“그리고 한 가
배현우는 나를 한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었다.“맞아요. 제 씨 어머니가 얼마나 총명한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어요. 제 씨 어머니는 책 속에 카메라를 숨겨두고 만약 사고가 난다면 여기에 있는 이 물건을 숨겨두었다가 훗날 믿음직스러운 사람에게 주라고 할머니한테만 똑똑히 당부해 두셨어요!”나는 코가 찡긋거리더니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보아하니 제 씨 어머니는 분명 위험이 닥칠 거라는 것을 미리 예감했던 거네요!”배현우는 안색이 조금 어두워지더니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갑자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제 씨 어머니는 만약 자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할머니더러 애들을 데리고 허씨 가문으로 가라고 할머니한테 당부하셨어요.”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고 코를 훌쩍이었다.배현우는 자기 손을 꽉 움켜쥐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참 생각지도 못한 게 모든 것이 제 씨 어머니의 예상대로 일어났고 감춰둔 카메라에 모든 것이 담겼어요! 근데 할머니는 제 씨 어머니의 뜻대로 우리 둘을 순리롭게 허씨 가문으로 데려가지 못했어요.”“급한 나머지 할머니는 고씨 가문에만 소식을 전했고 그마저도 나쁜 놈들보다 동작이 빠르지 못해 그들이 지아 씨를 데려간 후였어요. 그래서 저만 고씨 가문에서 데려갔어요.”나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그때 당시의 내가 얼마나 힘없고 무력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돌아가신 데다가 배현우와 억지로 갈라지게 되었다.배현우는 내 손을 꽉 잡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나도 배현우 지금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날 배현우는 눈앞에서 억지로 끌려 나가는 나를 보기만 하고 반항할 수도 없는 그런 무능력함은 아마 배현우한테 평생 잊지 못할 아픔이 되었을 것이다.차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고 자동차가 앞으로 가는 소리밖에 안 들렸다.한참 뒤에야, 배현우의 잠긴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이런 것들을 찾은 후에야 비행기 추락 사고가 떠올랐고 이로써 모든 것들이 비로소 한강인을 추측하게 했으며 그 이후에 우리는 한강인
이 소식은 그야말로 나를 입이 떡 벌어지게 했다. ‘나를 데려간 게 어떻게 그 사람이지?’“맞아요. 우리는 유일한 목격자를 찾았어요. 그 당시 그쪽 산에서 약재를 캐는 어르신이신데 그때는 중년인이셨어요. 하늘의 뜻인지, 우리가 수년을 찾아 헤맨 끝에야 비로소 이 참극의 전부를 직접 목격한 증인을 찾아냈어요.”“그 어르신 정말로 전체 과정을 모두 목격하셨나요?”나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배현우 얘네가 얼마나 큰 공을 들여야 바다에서 바늘 건지는 것 같은 일을, 그것도 몇 년이 지났는데도 당시의 목격자를 찾아낸 걸까.“어르신의 말로는, 당시 자기는 산 위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잠시 계단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아래 도로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해요. 알다시피 외국에서는 약재를 캐는 일은 엄청 드물어요.”배현우는 엄청 뿌듯한 말투로 말했다.“우리 형제들이 엄청나게 고생 많았어요. 십수 년을 하루같이 귀찮음을 마다하고 사건 지역을 탐방하러 다니면서 일말의 흔적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요.”나도 믿어지지 않아 입을 열었다.“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참 노고가 많았어요.”“어르신이 말씀하기를 당시의 장면은 엄청 아슬아슬했대요. 부딪힌 차는 거의 굴러떨어지기에 일보 직전이었는데 후에 폭발했대요. 어르신은 우리의 차가 폭발한 뒤 키 크고 마른 한 남자가 차에서 내리는 걸 똑똑히 봤다고 해요. 그리고 그 남자는 길 왼쪽의 언덕 아래로 달려가 무언가를 찾았대요.”배현우는 그때 당시의 장면을 묘사하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때 당시의 상황을 필사적으로 상상해 내려고 하니 머리가 또 아파 났지만, 배현우가 말을 멈출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시에 일어난 이 모든 것, 전부 나한테는 엄청난 매력이었다. 나는 지금 내가 찾아낸 산산조각 난 퍼즐들을 하루빨리 제 위치에 맞춰서 하나의 완전한 그림을 만들어 내고 싶었으며 그때 당시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그 뒤로 난 어떻게 Z 국의 만덕동에서 떠돌게 되었고 또 어떻게 지금의 한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