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연은 그냥 소인배예요.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나올 수 있으니 조심해요.”나는 배현우를 보며 말했다.그러자 배현우는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아요.”라며 나더러 돌아가라고 했다.우리 둘은 함께 응급실 문으로 돌아가자, 엄마가 나에게 물었다. “그 개자식은?”“갔어요.”나는 담담하게 말했다.응급실의 불은 거의 2시간 동안 켜져 있었고 마침내 꺼졌다. 의사가 응급실에서 걸어 나와 우리에게 말했다. “환자는 지금 이미 위험에서 벗어났습니다. 다행히 빨리 온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이제부터 환자분의 감정이 격해지는 것만은 피하셔야 합니다!”우리는 한시름을 놓았다.그러자 배현우는 의사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넸다.“외부에 깨어난 소식이 흘러 나가지 않도록 하고 깨어나지 않았다고 해주세요.”그리고 특급 병실에 안배하고 어머니까지 이곳에 머물게 해 아버지를 편하게 돌볼 수 있게 했다. 또 아버지가 깨어나지 않은 것처럼 꾸며 신 씨네 병문안을 거절하도록 계획했다.아버지가 병실로 옮겨지고 산소마스크를 한 모습을 보니 아버지의 창백한 얼굴에 정신 상태가 상당히 좋지 않았다.아버지는 나를 보는 순간 눈가를 따라 눈물을 흘렸고 입가는 끊임없이 떨렸다.나는 얼른 그의 손을 잡았다. “아버지! 진정하세요, 전 괜찮아요, 그러니 화내지 마세요. 아버지가 아직 살아계셔서 제가 아버지에게 효도할 수 있다는 게 제 행복이에요. 그리고 저는 더 이상 그 사람한테서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세요!”아버지는 고개를 약간 끄덕이시고 가냘픈 목소리로 내게 말씀하셨다.“이혼하거라.”이 밤, 나는 감히 병실을 떠나지 못했다.나는 다음 날 점심때가 되어서야 별장으로 돌아왔다. 그 세 사람은 뜻밖에도 별장에서 마음 편히 점심을 먹고 있었다. 신호연은 내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벌떡 일어나 얼굴을 찌푸리고 위층으로 올라가려는 나를 가로막았다.그리고 내 아버지의 안부를 묻지도 않고 자기 딸이 왜 돌아오지 않는가도 묻지 않고 나를 가리키며 욕설을 퍼부었다.“열
내 호흡은 점점 더 가빠졌다. 나는 점점 더 무거워지는 질식감에 필사적으로 눈을 부릅뜨고 살려는 의지 하나만으로 내 목을 잡고 있던 신호연의 손을 마구잡이로 후벼댔다. 지난날의 사랑은 사라져 없어졌고 내 눈앞의 신호연은 언제든 나를 죽일 수 있는 악마다.눈앞에서 샛별이 흩어지고 신호연의 험상궂은 얼굴이 점점 희미해지며 의식을 잃으려는 순간 나는 신호연에게 뿌리치듯 내동댕이쳐져 복도 벽에 심하게 부딪혀 심한 통증과 질식으로 잠시 기절했다.나는 목을 움켜쥐고 숨을 헐떡였다. 갑자기 폐로 들이닥친 신선한 공기에 심한 기침이 났고 나는 마치 죽음의 문턱에 있는 금붕어처럼 공기를 들이마시며 웅크리고 있었다.복도에서 시어머니와 신연아는 냉랭한 눈으로 나의 상태를 외면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그들의 무관심에 감탄했다.신연아는 득의양양한 얼굴로 말했다.“한지아, 이제야 너도 업보가 뭔지 알겠지? 하하하! 오빠, 진작부터 위엄을 보여 줬어야 했는데 쟤는 매를 맞아도 싸.”신호연은 칭찬받아 더 우쭐거렸다. 마치 어젯밤 병원에서의 초라한 모습은 잊은 채로 말이다. “내놓을 거야 말 거야!”신호연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그는 마치 미쳐버린 짐승 같았다. “난 당신이 쓸모가 있을 줄 알았지. 배현우를 이용해서 프로젝트를 따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당신이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다니, 정말 아무런 쓸모도 없어! 언제까지 배현우가 널 만나줄 것 같아?”“너 드디어 진실을 말하는구나. 비열한 녀석!”나는 신호연을 쳐다보며 경멸하는 표정을 지었다.“말해, 너희들 대체 어디까지 간 거야? 같이 잔 거야? 넌 계약서 하나 못 따내고 지금 나한테 이렇게 위세를 부리다니. 한지아, 오늘 네가 삼킨 것들 다 나한테 뱉어내야 해.”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내 몸을 향해 두 발을 세게 걷어찼고 뼈아픈 통증은 내 몸과 마음을 갈라놓았다. 나는 통증 때문에 숨을 크게 들이켰고 이내 눈앞이 흐려졌다.신호연은 또 재빨리 허리를 굽히고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움켜쥐면서 내
이미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허둥지둥 전화기를 들었다.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비서더러 기자를 안배하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이미연에게 말했다.“찍어... 나 사진 찍어줘, 당장.”이미연은 내 말을 듣고 이를 악물면서 휴대폰으로 여러 각도로 내가 폭행당한 흔적을 찍었다.그리고 이미연은 지난번 아동보호전문기관 사람과 구 변호사를 다시 불러들였다.신호연은 내가 이미연에게 이런 일을 안배하게 하자 당황해하며 멀리 있는 나에게 소리쳤다. “한지아, 이건 다 네가 자초한 거야. 경찰에 신고해도 날 어떻게 할 수 없어. 여긴 내 집이고 부부끼리 부부 싸움을 할 수도 있잖아? 안 그래?”“너 이 개자식, 그 입 다물지 못해?”이미연은 신호연을 향해 칼을 던졌다. 신호연은 놀라서 재빨리 안방으로 뛰어들어서야 칼을 피할 수 있었다.이미연은 이런 내 모습을 보고 있자니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런 이미연을 향해 나는 말을 뱉었다.“울지 마, 나 안 죽어. 그리고 신호연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에 들어섰어.” 경찰과 아동보호전문기관 사람들이 도착한 후, 나는 집문서의 사본과 내 증명서를 꺼내 언론사들 앞에서 내가 구타당한 과정을 하나부터 끝까지 빠짐없이 이야기했다.그렇지 않아도 신호연의 불륜 스캔들 파문이 가라앉지 않은 데다가 이번에 또 새로운 기사가 폭로된 셈이다. 또 구 변호사는 나와 신호연이 이혼 사건을 처리 중이라는 증거를 제시했다. 그들은 신호연한테 아무런 설명의 여지도 주지 않고 세 사람은 모두 경찰에 연행됐다.서울에서 또 폭발적인 기사가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신호연, 증여재산을 환수하기 위해 병이 위독한 장인어른을 속이고 불륜녀를 데리고 집에서 아내를 폭행][한지아 집안 발칵 뒤집히고 화가 나 쓰러져 병원 입원]나 한지아가 이혼서 한 장을 이렇게 창피한 방법으로 얻어야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저녁, 나는 이미연에게 나를 대신해 어머니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면서 나는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어 못 간다고 전해주라고 했다. 아직 몸을 움직일
그의 말을 듣고 나는 코가 시큰시큰했고 전례 없는 따뜻함을 느꼈다.차가 움직이자, 나는 그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배현우는 대답 대신 내 턱을 쥐고 내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반쯤 붉어진 얼굴로 그를 한번 바라보고 앞의 운전기사를 바라보았다.“뭐 하는 거예요?”그는 손을 뻗어 버튼을 누르자 차 안의 가림막이 올라가고 우리가 있는 곳은 하나의 밀폐된 공간으로 되었다. 저는 천우그룹의 조건이 정말 좋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역시 대기업이야, 회사 직원에게 이렇게 좋은 대우를 해주다니. 하긴, 배현우는 본사 사장의 비서이니 말이야.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니...’배현우는 다정하게 말했다.“어디 다쳤는지 좀 볼까요?”“어? 아, 안 다쳤어요! 다 봤으면서!”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숨겼다.“그럼, 그 사진들 다 지아 씨가 조작한 건가요?”그의 목소리가 다시 퉁명스러워졌다.“지아 씨가 직접 저에게 보여줄래요? 아니면 제가 직접 할까요?”나는 순간 호흡이 가빠 올랐다.‘이건 너무 썸 타는 사이 같잖아...!’‘내가 다친 곳은 다 보여주기 불편한 곳들인데... 낯선 남자에게 보여 줄 만큼 그렇게 개방적이지 못한데...’“진짜 아니...”내가 뒷말을 마치기 전에 그는 나를 잡아당겨 자신의 품에 안았다. 등의 상처가 그의 단단한 근육에 닿자 나도 저도 모르게 “아!”하는 소리를 냈다.배현우는 내 표정을 보고 다짜고짜 내 옷을 걷어 올렸다. 나는 깜짝 놀라며 내 가슴팍을 가렸다.“현우 씨, 심한 거 아니에요!”그런데 앞가슴 복부의 퍼런 큰 멍이 드러나면서 나는 배현우의 손이 굳어지는 느낌을 알 수 있었다.나는 본능적으로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니 그의 얼굴은 싸늘하다 못해 무서웠다. 배현우는 손가락으로 가볍게 내 상처 난 부위를 쓸었고 나는 긴장해서 근육을 팽팽하게 했다.그는 나를 한 번 보고는 또 가볍게 내 몸을 밀어내 등을 한 번 보았다. 비록 앞의 상처보다 적었지만, 그가 보기에는 충분히 놀랄 만
얼마나 지났을까, 귓가에 들려오는 얕은 소리에 몽롱하던 정신이 돌아오는 듯했다.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릿하던 시야가 차츰 뚜렷해졌고, 그 시야에 불쑥 들어온 건 끔찍하리만치 잘생긴 얼굴이었다. 깜짝 놀라 일어나려 했으나, 가슴을 찌르는 따끔한 고통에 저도 모르게 ‘흡’ 신음을 냈다.“뭘 그렇게 놀라는 거예요?” 낮게 갈라진 음성이 들려왔다.놀랍게도, 우리는 아직 차 안에 있었다. 신이 한 땀 한 땀 고심하며 빚은 듯 잘생긴 그의 얼굴 뒤로 서서히 지고 있는 태양이 보였다. 석양이 하늘 전체를 오렌지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맙소사. 몇 시예요? 콩이 데리러 가야 하는데!” 나는 다급하게 그를 살짝 밀치며 말했다.“이미 지아 씨 폰으로 친구분께 대신 데리러 가달라고 말했으니까 걱정 마요.”그가 무심히 한마디 더 보탰다. “근데 지아 씨, 저 이제 다리에 쥐 날 것 같아요.”나는 그제야 그의 품에 안겨 잠을 자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이고 입을 삐죽거렸다.“저... 얼마나 잤어요?” 나는 쑥스러움을 감추려 얼른 똑바로 앉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두 시간 조금 넘었죠.”배현우가 명령하듯 말했다. “이제 내립시다.”조수석에서 내린 나는 이곳이 그가 지난번에 나를 데리고 왔던 리조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손님은 보이지 않았다.나는 종종걸음으로 앞서간 그를 따라잡았다.“여긴 뭐 하는 곳이에요?”“왜요?” 그가 나를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경치가 너무 아름다워요. 고요하고 상쾌해요! 그런데 왜 다른 손님은 보이지 않는 거죠?” 나는 호기심을 감추지 않고 물었다.그가 한쪽 입꼬리를 쓱 올리고는 내 물음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유유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나는 뾰로통하게 입을 내밀었다. ‘쳇. 멋있는 척하기는.’나는 이곳이 정말 좋았다. 단지 전체의 경치가 아름답고 수려하여 천국에 와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회색빛 도심 속에서 미세먼지만 먹으며 살다가 이렇게 자연과
나는 이곳을 떠나고 싶은 충동까지 들었다. 내가 그를 너무 전적으로 믿고 마음을 연 느낌이 들었다. 이제는 아무 위화감도 없이 그가 내 일상에 녹아들었으니…배현우가 가만히 서 있는 나를 보곤 하던 일을 멈추었다. 그리고 조금 거만한 어투로 물었다.“왜요, 두려워요? 저한테는 경계심이 커지는 건가요?“나는 그를 힐끗 보았다. 이런 밀폐된 공간에서 그와 단둘이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는데.“제가 배현우 씨를 왜 두려워하겠어요.”입으로는 아니라 했어도, 마음속은 대혼란 상태였다.“지아 씨가 조금만 더 조심했다면 이 정도로 다치진 않았을 거예요.”그가 말을 마치고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걱정하지 마세요. 배현우 씨가 싫어하는 일은 저도 안 해요. 당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몰라도...”배현우와 눈이 마주치자, 나는 최대한 애원하듯 가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그는 못 본 척 넘어가 버렸다.“엎드려요. 금방 끝나니까.”그의 말투가 전보다 조금 부드러워진 것이 느껴졌다.“자꾸 거절하면 강제로 해요?”보아하니 오늘은 그가 어떻게 해도 놔줄 것 같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호의에 이렇게 난처함을 느낄 수도 있다니, 나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계속 거절하는 것도 억지 부리는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나는 얌전하게 엎드린 채로 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배현우는 나의 옷자락을 살며시 풀고는 연고를 살살 발라주었다.상처가 있는 곳 구석구석을 그는 자상한 손길로 가볍게 문질러주었는데 그 야릇한 분위기에 나는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긴장 풀어요. 앞으론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도망가야 해요. 이렇게 미련하게 맞지 말고요. 안전이 제일 중요하죠. 복수는 언제든 할 수 있잖아요.”무뚝뚝하게 건네는 말에 담겨있는 그의 진심이 눈에 보여 나는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날의 내 대처는 확실히 멍청했다.나는 저도 모르게 연고를 발라주는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우뚝 솟은 콧대를 따라 시선을 옮기면
그의 갈급한 부름에 나는 착실하게 응했다. 이렇게 사랑받고 있음을, 누군가에게 소중한 존재임을 느끼는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나는 억눌렸던 그동안의 슬픔을 쏟아내듯 더욱 그의 입술을 탐하고 갈망했다.머릿속에는 여전히 그가 했던 말이 맴돌았다. ‘앞으로 핑계 댈 수도 없게, 오늘은 참지 않을 거예요.’나는 지금 내가 놓인 상황을 철저히 무시하고 싶었다. 걱정과 불안이 가득한 속박 속에서 벗어나 한 번만이라도 고삐 풀린 말처럼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하고 싶었다. 아마도 너무 억눌렸던 탓일 것이다. 그에게 홀려 이성도 잃고 지금 이렇게 애정을 갈구하는 걸 보면.신호연과 신연아가 한 몸으로 뒤엉킨 모습이 생각나 나를 끊임없이 자극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끓어오르는 분노와 억울함에 견딜 수 없었다. 그들에게 끔찍이 복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너 없이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다고, 너희들보다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배현우의 따뜻한 숨결이 나를 에워싸고 뜨끈한 손이 내 등을 단단히 받치고 있다. 내가 아플까 봐 조심스러워하는 그의 손길이, 사랑스럽고 부드러운 입맞춤에 집중하는 모습이 소중했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그를 내가 거절할 이유가 있을까.나는 몸이 상했다는 사실도 잊은 채, 갈망을 해소하기에 급급했다. 나의 갈증에 그가 짙은 입맞춤으로 응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사랑이라는 따뜻한 감정이 통증도 줄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려왔던 상처가 지금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그가 나의 끓어오르는 갈망을 느낀 듯 이성을 잃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지아 씨, 괜찮겠어요? 많이 아플 수...”나는 빠르게 입술을 포개 그의 입을 막았다. 그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무얼 걱정하고 있는지 모두 알 것 같았다.나의 대답에 그가 인내해 오던 탐욕을 펼쳐내듯 순식간에 성급해지고, 거칠어졌다...그 순간 나는 구름 위에 둥둥 떠 있는 듯한 편안함을 느꼈다. 모든 번뇌, 우울함, 억울함,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을 애써 삼켰다. 나의 말이 우리 사이에 찬 물을 끼얹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조금 전까지 사랑을 갈구하며 자신을 탐해놓고서 이제 와서 없던 일로 하려는 걸 안다면. 어쩌면 정말 화낼지도...나는 급히 화제를 전환했다. “현우 씨 회사는 직원들에게 정말 잘해주는 것 같아요. 제가 지금 회사에 몸담고 있지 않았다면 저도 천우 그룹에 가서 일했을 거예요.”그가 아무런 표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물었다. “왜요?”“회사 사람들이 모두 소탈한 것을 보니 회사가 잘 대해주겠다 싶어서요.”억지스럽다.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억지스럽게 갖다 붙인 티가 났다.내 말을 들은 그가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으나 더 이상 말을 잇지는 않았다.배현우가 음식을 먹는 모습은 느긋하고 점잖아서 내가 그릇을 비우는 속도가 더 빨랐다. 정말 배고프기도 했고 그의 앞에서 옷매무새에 신경 쓰며 조신한 척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식사 후 내가 집에 돌아가겠다 고집하여 그는 할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바래다줄게요.”운전하고 있는 그가 깊은 사색에 잠겨있는 듯했다. 나도 창밖을 내다보았다. 얼굴에 사정없이 맞받아치는 찬 바람이 정신을 깨우는 것 같았다. 조금 전의 모든 일이 꿈 같게 느껴졌다.후회되지는 않았다. 당시의 나는 진실로 사랑을 갈구했으니까. 다만 지금이 좀 어색할 뿐.신호연이 다시금 이해되기 시작했다. 어쩌면 쉴 틈 없이 굴러가는 운명의 굴레 속에정해진 인연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 한 몸 불태워 사랑할 수 있는, 끊임없이 탐하게 되는 그런 사람.어떤 의미에서 사랑에 옳고 그름은 없는 것 같기도 하다.그럼 이후에는 어떡하고? 가슴이 갑자기 바늘로 찌르는 듯 쑤셔왔다.배현우는 마치 나의 싱숭생숭한 기분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내 손을 감싼 채 조용히 운전했다. 소중하게 꼭 쥔 손에 그의 온기가 느껴졌는데 집에 다가올수록 나는 이유 모를 아쉬움을 느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참한 현실 세계로 내던져지는 것 같은.나의 세상은 차갑고 복잡하고
나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서강민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서강민 씨, 먼저 들어가시죠. 언니가 깨서 서강민 씨를 보면 또 흥분할 것 같은데... 지금 같은 상황에 언니가 회복하는 게 제일 중요하잖아요.”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한마디 더 보탰다.“어떤 일들은 천천히 해야 해요. 언니한테 시간을 좀 주세요. 서로 생각을 정리해 봐요.”서강민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깊은 잠에 빠진 도혜선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발길을 돌리기 전에도 아쉬움에 한 번 더 뒤돌아보며 나한테 말했다.“고생해 줘요.”나도 담담히 답했다.“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 언니에게 시간을 좀 줘요. 언니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할 수 있잖아요.”내가 말하는 회복이 뭔지는 서강민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건 도혜선이 마음에 입은 상처였다. 오늘 도혜선의 행동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그녀의 상처는 아물 수 없을 것이다. 언급만 해도 피가 흘러내릴 만한 상처였다.잠시 후, 서강민은 한발 물러섰지만, 눈길은 여전히 도혜선에게 머물러 있었다. 평온해 보이는 모습 아래에서 어떠한 파도가 휘몰아치는지 나는 몰랐다.한참 전 도혜선이 했던 말들은 마디마디가 주옥이었다. 모두 그녀가 마음속으로만 담아두었던 것들이었고 또한 서강민의 약점이었다. 얼마나 아플지는 서강민 본인만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쓰디쓴 독주도 그는 혼자 삼켜내야만 했다.도혜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와 깨어나려는 낌새가 보이고 나서야 서강민은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나는 마음이 아파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뻗어 도혜선의 손을 맞잡았다.인제야 하루 종일 배현우에게서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쪽에는 어떤 상황인지, 김우연에게서는 소식이 없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도혜선을 보니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 같아 살며시 그녀의 손을 놓고 일어서려 했을때, 그녀는 다시 나를 잡으며 미약한 목소리로 말했다.“가지 마...”나는 너무 놀라 얼른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서강민은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나 하는 걸까?’“당시의 사고는 내가 저지른 거야. 그녀도 나 때문에 다쳐서 지금처럼 된 거고… 나는 좋은 남편이 아니야. 아내가 식물인간이 되었는데 나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말이야...”서강민은 여기까지 말하며 후회하는 기색을 내비쳤다.“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너무 죄책감이 들고 고민스러워. 나 또한 발버둥 쳐봤지.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나의 일탈을 받아들일 수 있어 해. 그녀한테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내가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거야...”“강민 씨!”도혜선은 꾸짖는 듯한 말투로 그의 말을 잘랐다.“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당신 아내가 듣고 있을 거예요. 저를 끌어들여서 같이 속죄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당신의 구세주가 아니에요. 저는 그냥 사람답게 살고 싶은 평범한 여자라고요. 저 좀 그냥 내버려둘 순 없어요?”도혜선은 말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이 일그러지며 그녀는 한 손으로 본능적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녀 앞으로 갔다.“혜선 언니, 움직이지 마! 위험해...”늑골 골절과 뇌진탕이 있는 환자다 보니 이러한 행동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위험했다.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녀를 안으려고 하는 한지아를 제지했다.“제가 오늘 한 말이 아직도 이해가 안 되나요? 서강민 씨, 저의 인생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당신한테 묶여 당신의 부속품이 되었었는데 저도 자존심이 있어요. 더 이상 당신처럼 지난날의 죄책감을 짊어지며 답답하게 살아가지 않을 거예요.”도혜선은 여전히 분노에 차 외치고 있었다.“매일 제 앞으로 와 지난날의 행동에 대해 속죄하라고 일깨워 주실 필요 없어요! 당신을 보면 저는 지난날 모든 서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치욕적인 과거가 떠올라요. 당신은 마음 가는 대로 해요. 당신은 아내와 했던 약속을 지켜야 해요.”말을 마친 도혜선은 숨이 차올랐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도혜선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계속하여 들려왔다.“당신은 아무런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저 같은 여자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아도 돼요.”그녀는 자기비하적인 말을 내뱉었다.”선아...”“설사 강민 씨가 와이프와의 약속을 안 지킨다 해도 당신의 신분과 지위로 당신에게 더 어울릴만한 사람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저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물며 당신네 부부 눈에는 저는 그냥 염치없고 미천한 사람일 뿐이죠. 저 같은 사람은 본처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아요. 사모님이라는 호칭도 어울리지 않죠.”“나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오해하지 마.”서강민은 조급함에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해명하려 했다.하지만 도혜선은 손을 들어 그를 막아섰다.“강민 씨... 해명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의 행동이 모든 걸 설명해 주고 있어요! 장담하건대 아직 당신들이 어떤 의도로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보가 된 건 아니에요. 그녀는 정말 대단하네요. 죽을 때까지도 제가 이길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녀는 아무리 병상에 누워있어도 고상한 사람이고 저는 그냥 미천한 사람일 뿐이니 말이에요.”도혜선은 말을 내뱉으며 입가에 처량한 미소를 비췄다. 누가 봐도 가슴 아픈 미소였다.“이전의 저는 확실히 허례허식에 차 있는 사람이었지만 저도 성장했어요. 정신 차렸어요. 당신 앞에 있는 저의 진정한 가치가 어떤 것인지 깨달았어요. 저는 하나의 도구, 들러리뿐이었지만 원망하지 않았어요.”그녀는 여기까지 말하고 한숨 돌렸다. 얼굴빛은 아까보다 더 창백해져 있었다.“하지만 이제 저는 자존감을 챙기며 살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의탁하지 않고 쓰레기같은 취급을 받더라도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살고 싶어졌어요.”점점 더 차가워지는 도혜선을 바라보며 서강민은 답했다.“혜선아, 나는 널 한 번도 무시한 적 없어. 나는 그냥 내가 뭘 하든지 네가 다 이해해 줄 줄 알았어.”도혜선의 서강민의 말을 듣고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안색은 더 창백해져 있었다.“이해? 당신이 어떤 말을
방금 허투루 한 말이 어머니의 진실인가 싶다. 보아하니 어머니가 나를 속이는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마음속의 의문점이 점점 많아졌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마치고 차씨 가문의 할머니께 말씀을 드린 후, 위층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도혜선을 보러 가려고 준비했다.그리고 팔도 겸사겸사 검사하려고 했다. 차에 앉고 나서 배현우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았다. 이 이른 아침에 뭐 하러 갔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김우연 쪽에 무슨 소식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생각해 보니 이렇게 빠르진 않겠지? 몇 시간밖에 안 됐는데.'병실에 도착하자마자 도혜선이 노발대발하는 장면을 포착했다. 병실에는 도혜선과 서강민 두 사람만 보이고 이미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내가 들어서자 분위기가 좀 이상하고 심상치 않는 것을 느꼈다.침대 옆 머릿장에는 보온병이 놓여있다. 서강민은 오늘도 도혜선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러 온 것 같다.서강민은 침대 앞에 떡 하니 서있었고 침대에 있던 도혜선은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도혜선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상황을 정리하려고 다가가서 서강민에게 인사를 하고 도혜선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좀 어때?""별로야."도혜선은 차갑게 대답하더니 또 말을 건넸다. "지아야, 손님 좀 배웅해 줄래?"난감했다, 도혜선은 서강민을 내쫓으라고 하는 거였다. 난 당연히 그 뜻을 알고 있다. 조심스럽게 서강민을 쳐다보았다. "혜선아, 꼭 이래야 하니?"서강민은 씁쓸한 표정으로 도혜선을 바라보며 물었다."네! 서강민씨, 저는 이미 분명히 말했고 두 번 다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도혜선은 내가 그 자리에 있다고 해서 서강민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았다.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언니, 화 그만 내고 진정 좀 해. 초조해하는 거 알아, 점차 좋아질 거야. 강민씨랑 얘기 좀 하고 있어. 나는 팔 검사해야 돼서, 금방 돌아올 거야!"나는 핑계를 대고 떠나서 그들에게 자리를 비워주었다.
배현우는 나의 우울한 모습을 보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없는 동안에 회사 일도, 한심로얄의 마지막 한방도 둘 다 포기할 수 없잖아요. 신예 쪽 일도 있고, 전희가 다시 살아날 기회를 얻지 않도록 조심해야 돼요. 지금 모든 게 중요한 시기이니까요.""지금 그 누구도 아버지보다 중요하지 않아요! 수십년간 도망치면서만 살았는데 죄책감도 가지고 있었을 거예요, 분명 아주 괴로워하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는데, 내가... 내가 딸로서, 난..."배현우는 내 말을 듣고 나서 침대에 누워 나를 꼭 껴안고 말했다. "일단 내일 소식을 기다려 봅시다. 김우연 쪽에서 어떤 정보를 얻었는지 보고 결정합시다."배현우는 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제 말 듣고 일단 자세요, 내일 일어나서 먼저 할 일들을 처리하고 준비하고 있으세요, 만약에 상황이 좋으면 내일 같이 데리고 갈게요, 당신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배현우가 지금 나를 위로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내가 기분 나빠하는 모습을 보지를 못한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았다. 배현우의 따뜻한 품에 안기며 눈을 감고 내일 먼저 무엇을 처리해야 할지 생각했다.근데... 눈을 떠서 배현우를 쳐다보는데 배현우도 잠에 들지 않았다. "현우씨... 할머니가 보존하고 있는 CCTV를 보여주시겠어요?"'그 영상을 꼭 보고 싶었다, 알고 싶었다. 어머니가 어떻게...'"알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자세요, 나중에 보여 드릴게요. " 팔짱을 끼더니 분명히 나를 얼버무리고 있는 것이다. 배현우가 그 장면을 내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밤이 깊었고,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배현우의품에 안겨 점점 잠이 들었다. 아침이 밝았다. 날씨는 여전히 흐렸다. 배현우는 이미 곁에 없었고, 손을 뻗어 그가 누워 있던 곳을 만졌다. 이미 차가운 걸 보니 배현우는 일찍 침대에서 일어났나 보다.'무슨 소식이라도 왔나?'이
"할머니가 이번 사건을 피할 수 있었던 건 당시 큰 병을 앓은 것에 대해 감사해야 했어요. 제 생각에는 반은 꽤병인것 같아요. 직접 사표를 쓰고 나서도 서둘러 호주를 떠나지 않았다는 게 참 슬기로운 선택이었어요.""네?"너무 놀라서 몸 둘바를 몰랐다.배현우는 인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호주를 떠나지 않으셨어요. 그곳에 머물면서 배씨 저택의 인기척을 살피다가 배씨 저택의 요상한 소문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뒤에야 조용히 호주를 떠나셨어요."나도 모르게 할머니의 메커니즘에 감탄했다."저도 그때 상황을 잘 몰라서, 할머니도 몸이 허약했고 내 행방을 알아 볼 길이 없어 그 비밀을 계속 지켜왔었나봐요. 부하들이 할머니를 찾고 나서도 여전히 어리석은 척을 하고 있었지 뭐에요."배현우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할머니께서 저를 두눈으로 직접 보고서야 그걸 꺼냈어요."배현우의 말을 듣고 나니 할머니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던 중 배현우가 나를 쳐다보더니 나의 지친 모습을 보고서야 손을 들어 대문을 열어 장벽들이 천천히 열리는 걸 볼 수 있었다.차는 왔던 길을 따라 경원으로 다시 돌아갔다. 벌써 자정이 되어 우리 둘은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 방에 돌아왔다.'우리를 배신한 소인이 두 집안을 풍비박산 시켰다니. 오늘 밤 일어난 모든 일들은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간단히 씻고 걱정 가득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태어나서 얼굴도 한번 못 본 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밥은 먹고 다니는지를 걱정해 발 뻗고 자지 못했다. '한강인이랑 한걸은 이미 잡혔는데, 우리 아버지는? 그의 처지는 어떤지.''한씨 부자가 그저 아버지를 인질로 삼아 그들의 안전을 확보하려 했다면 왜 배현우는 그곳의 환경이 복잡하다고 했을가.''이유는 간단하다. 누군가 아버지를 미끼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보고 싶으려는 걸가?''배현우? 아니면 배유정?'생각할수록 더욱 걱정이 됬다.아버지의 이번생은 이미 충분히 힘들다.어머니랑 서로
나는 걱정스레 배현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배현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계속 말했다.“후에 목격자 어르신을 찾고서 한강인을 자세히 조사하니 한강인은 이 모든 것이 일어난 뒤에야 천우 그룹을 떠난 거였어요. 지아 씨도 알잖아요. 그때 당시 천우 그룹은 아직 배유정 손에 있었어요.”“현우 씨의 말은 한강인은 배유정 과도 사이가 틀어졌단 말인가요?”나는 추측하며 물었다.“우리가 조사할 때 이상한 단서 하나가 나왔어요. 한동안 배유정도 한강인을 찾았고 심지어 한강인에 대한 추살령도 내렸어요! 참 이상해요. 배유정은 왜 한강인을 죽이라고 지령을 내린 걸까요?”“이유는 하나뿐이죠. 즉 한강인이 분명 무엇을 알아냈거나? 아니면 어떤 일에 참여하였거나?”나는 대답했다.배현우는 고개를 끄덕이었다.“진백이 죽임을 당했듯이 이 안에는 분명 남들한테 들키면 안 되는 비밀이 있는 거겠죠. 우리는 이 단서를 따라 계속 추적해 보니 한강인의 혐의가 점점 더 드러나더군요. 그리고 그의 아들 한결도 같이 도망쳤어요.”“그러고 보니 이 안에는 분명히 또 다른 요소가 있겠네요!”나는 사색에 잠겼다.“그래서 우리는 추측했죠. 한강인은 확실히 이 사건이랑 연관이 있고 둘이 도주하는 과정에 서로 연락하는 빈도를 보아서 부자 둘은 서로 다른 곳에 있는 것으로 판단했어요.”“그리고 한강인이 도망 다니는 그 시기에 그의 모친이랑 누나 모두 영문도 모른 채 실종되었어요. 지금 보니 그분들은 아마 이미 이 세상을 떠난 것 같네요. 이 때문에 한강인은 고두리에 놀란 새가 돼서 끊임없이 도망치며, 이 또한 한강인이 지금의 상태로 되게 한 원인인 것 같아요. 사실 한강인은 원래 지금의 모양이 아니거든요.”배현우의 말을 듣자 나는 저도 모르게 아까 보았던 한강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강인은 극도의 공포 속에서 엄청 정신적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다른 기타 방식으로 정신을 잃지 않게 버티고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람이 저렇게 말라죽을 정도일 리가 없다.“그리고 한 가
배현우는 나를 한눈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었다.“맞아요. 제 씨 어머니가 얼마나 총명한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어요. 제 씨 어머니는 책 속에 카메라를 숨겨두고 만약 사고가 난다면 여기에 있는 이 물건을 숨겨두었다가 훗날 믿음직스러운 사람에게 주라고 할머니한테만 똑똑히 당부해 두셨어요!”나는 코가 찡긋거리더니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보아하니 제 씨 어머니는 분명 위험이 닥칠 거라는 것을 미리 예감했던 거네요!”배현우는 안색이 조금 어두워지더니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갑자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제 씨 어머니는 만약 자신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할머니더러 애들을 데리고 허씨 가문으로 가라고 할머니한테 당부하셨어요.”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고 코를 훌쩍이었다.배현우는 자기 손을 꽉 움켜쥐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참 생각지도 못한 게 모든 것이 제 씨 어머니의 예상대로 일어났고 감춰둔 카메라에 모든 것이 담겼어요! 근데 할머니는 제 씨 어머니의 뜻대로 우리 둘을 순리롭게 허씨 가문으로 데려가지 못했어요.”“급한 나머지 할머니는 고씨 가문에만 소식을 전했고 그마저도 나쁜 놈들보다 동작이 빠르지 못해 그들이 지아 씨를 데려간 후였어요. 그래서 저만 고씨 가문에서 데려갔어요.”나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그때 당시의 내가 얼마나 힘없고 무력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어머니가 돌아가신 데다가 배현우와 억지로 갈라지게 되었다.배현우는 내 손을 꽉 잡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나도 배현우 지금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날 배현우는 눈앞에서 억지로 끌려 나가는 나를 보기만 하고 반항할 수도 없는 그런 무능력함은 아마 배현우한테 평생 잊지 못할 아픔이 되었을 것이다.차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고 자동차가 앞으로 가는 소리밖에 안 들렸다.한참 뒤에야, 배현우의 잠긴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이런 것들을 찾은 후에야 비행기 추락 사고가 떠올랐고 이로써 모든 것들이 비로소 한강인을 추측하게 했으며 그 이후에 우리는 한강인
이 소식은 그야말로 나를 입이 떡 벌어지게 했다. ‘나를 데려간 게 어떻게 그 사람이지?’“맞아요. 우리는 유일한 목격자를 찾았어요. 그 당시 그쪽 산에서 약재를 캐는 어르신이신데 그때는 중년인이셨어요. 하늘의 뜻인지, 우리가 수년을 찾아 헤맨 끝에야 비로소 이 참극의 전부를 직접 목격한 증인을 찾아냈어요.”“그 어르신 정말로 전체 과정을 모두 목격하셨나요?”나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배현우 얘네가 얼마나 큰 공을 들여야 바다에서 바늘 건지는 것 같은 일을, 그것도 몇 년이 지났는데도 당시의 목격자를 찾아낸 걸까.“어르신의 말로는, 당시 자기는 산 위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잠시 계단에서 쉬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아래 도로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해요. 알다시피 외국에서는 약재를 캐는 일은 엄청 드물어요.”배현우는 엄청 뿌듯한 말투로 말했다.“우리 형제들이 엄청나게 고생 많았어요. 십수 년을 하루같이 귀찮음을 마다하고 사건 지역을 탐방하러 다니면서 일말의 흔적도 소홀히 하지 않았어요.”나도 믿어지지 않아 입을 열었다.“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참 노고가 많았어요.”“어르신이 말씀하기를 당시의 장면은 엄청 아슬아슬했대요. 부딪힌 차는 거의 굴러떨어지기에 일보 직전이었는데 후에 폭발했대요. 어르신은 우리의 차가 폭발한 뒤 키 크고 마른 한 남자가 차에서 내리는 걸 똑똑히 봤다고 해요. 그리고 그 남자는 길 왼쪽의 언덕 아래로 달려가 무언가를 찾았대요.”배현우는 그때 당시의 장면을 묘사하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그때 당시의 상황을 필사적으로 상상해 내려고 하니 머리가 또 아파 났지만, 배현우가 말을 멈출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시에 일어난 이 모든 것, 전부 나한테는 엄청난 매력이었다. 나는 지금 내가 찾아낸 산산조각 난 퍼즐들을 하루빨리 제 위치에 맞춰서 하나의 완전한 그림을 만들어 내고 싶었으며 그때 당시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되찾고 싶었다.그 뒤로 난 어떻게 Z 국의 만덕동에서 떠돌게 되었고 또 어떻게 지금의 한지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