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만약 그 몇 번이 정말 다 우연이라고 하면 그때는 그걸 우연이라고 칭할 수 없게 된다.게다가 매번 둘이 같이 있는 걸 볼 때면 지유는 항상 즐겁게 웃고 있다.“여 대표님!”그때 학교 안에서 서승만이 걸어 나와 그를 불렀다. 그는 세 사람 사이의 묘한 분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 그저 싱글벙글 웃으며 그에게로 다가가 인사했다.“마침 다 모인 것 같으니 이제 식사하러 갈까요?”이현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몇 번의 만남으로 서승만도 여이현이라는 사람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기에 그의 태도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민우는 이현을 보며 말했다.“가시죠. 여 대표님.”이현은 아무 말 없이 차에 올라탔다.차에 타기 전 그는 일부러 지유에게 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어느 차량에 타는지 보려는 심산이었다.진호는 지유를 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유 씨, 대표님 옆에 앉으세요.”그는 이현의 기분이 안 좋은 걸 이미 알고 있기에 더 이상 화를 키우지 않게 지유에게 언질을 줬다.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서승만도 민우도 자신이 이현의 비서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지금은 이쪽에 타는 것이 맞았다.진호는 두 사람을 태우고 심호흡을 한번 하고 나서 운전석에 앉았다.이현은 지유가 옆에 앉자마자 이죽거렸다.“월차까지 써서 친구 만나러 온 건데 그 친구분 차에 앉지 그래요, 온 비서?”지유는 그 말을 듣더니 고개를 돌려 이현을 바라보았다. 그의 태도는 무척이나 날이 서 있었고 표정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선생님은 내가 대표님 비서라는 거 아세요. 대표님 차에 앉지 않으면 이상하게 생각하실 거예요.”“온 비서가 나민우 씨와 친구 사이라는 거 알지 않나? 뭐가 이상하다는 거지?”이현이 되물었다.지유는 자신에게 화가 난듯한 그를 보며 한숨을 내쉬더니 차 문을 잡고 말했다.“그럼 민우 차에 탈게요.”그 말에 이현의 얼굴이 더 세게 일그러졌다.다행히 눈치 빠른 진호가 얼른 차 문을 잠그
그 질문에 지유가 어리둥절해졌다.하루빨리 찾아내라고 한 건 그이지 않나?아니면 이건 혹시 그녀를 떠보는 것일까?지유는 잠깐 멈칫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맡기신 일은 꼭 해내야 하는 게 제 일이라서요. 이것 역시 업무의 일환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그녀는 이 정도 대답이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비서로서 상관의 말을 따르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니까.지유의 얼굴에는 슬퍼하거나 속상해하는 기색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 여자를 찾아내겠다며 눈을 반짝이고 있다.이현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더니 담담하게 한마디 했다.“온 비서는 참 훌륭한 비서네요. 내가 아주 손을 놓지를 못하겠어.”아까까지만 해도 긴장했던 지유는 그의 칭찬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비서로서 당연한 일을 한 것뿐입니다.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매우 비서 같은 대답이었다.운전석에 있던 진호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서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분명히 부부인데 전혀 부부 같지가 않았다.그는 눈치 없는 지유의 모습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이현은 부부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잠자리 상대를 기꺼이 찾아주려는 지유가, 질투를 전혀 하지 않고 마음이 태평양보다 넓은 지유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진호는 이현의 마음을 아주 정확하게 캐치하고 있었다.옆에서 뭐라고 얘기를 해주고 싶었지만 괜히 말을 잘못 놀렸다가 쓸데없이 화만 살 것 같아 진호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뭘 또 최선까지야. 그냥 평소대로 하세요.”이현의 이 말을 끝으로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진호는 억압된 분위기 속에서 숨소리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묵묵히 차를 몰았다.길었던 시간이 끝나고 드디어 레스토랑 앞에 도착했다.마침 민우의 차도 뒤이어서 도착했다.서승만은 차에서 내린 순간부터 활짝 웃으며 이현 쪽으로 다가갔다.반면 민우는 지유 쪽을 바라보더니 자신의 외투를 벗어 그녀에게 둘러주었다.“저녁은 쌀쌀하니까 감기 걸리
“지유처럼 예쁜 애는 좋아하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지유도 안목이 높아졌겠죠.”서승만은 여이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하지만 민우도 나쁘지 않아요. 능력 좋은 데다가 성격까지 좋으니, 미래가 창창할 것 같네요.”여이현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졌다. 서승만은 진심으로 나민우가 마음에 드는 듯했다. 온지유와 그를 이어주려는 마음도 진지해 보였다.나민우는 웃는 얼굴로 여이현을 바라보며 말했다.“아니에요, 선생님. 지유는 더 좋은 사람을 만나야죠. 지유는 사랑받아야 마땅한 사람이에요.”온지유는 약간 멈칫했다. 나민우의 말에 감동한 것이다.그는 그녀가 사랑받아야 마땅하다고 했다. 이토록 다정한 말에 흔들리지 않을 여자는 없었다.여이현도 온지유가 나민우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어쩐지 답답한 기분이 들었던 그는 넥타이를 약간 풀며 말했다.“말보다는 행동이 좋을 것 같은데요. 온 비서님이 가장 힘들 때 나 대표님은 무엇을 했죠?”나민우는 눈빛이 약간 변했다. 온지유가 힘들 때 함께 있지 못했던 것은 평생의 한으로 남을 것이다.이제는 도와주고 싶어도 기회가 없었다. 그래도 물러날 수 없었던 그는 금방 말을 보탰다.“여 대표님 말이 맞아요. 앞으로 잘 신경 써야죠.”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기류를 알아챈 온지유는 바로 끼어들었다.“안에는 꽤 시원한 것 같아요. 빨리 들어가요.”서승만도 약간 눈치챈 바가 있는지 말을 보탰다.“맞아요, 빨리 가서 밥 먹어요.”그들의 선택한 것은 고급 호텔이었다. 조용하고 화려한 것이 부자들만 사용하는 듯했다.그들이 들어가자마자 예쁘게 생긴 여자애가 달려와서 말했다.“아빠!”서승만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우리 딸 오래 기다렸지? 왜 벌써 왔어?”“아니야, 나도 금방 도착했어. 이분들은 아빠 친구들이야?”“응, 아주 중요한 손님들이야.”서승만은 몸을 돌려 소개해 줬다.“이쪽은 나민우, 아빠 제자였어. 지금은 금융계의 거물로 아주 유명해졌지. 이쪽은 온지유, 지금 여의현 대표님의
서승만에게는 자식이 서은지밖에 없었다. 오늘은 손님이 있어서 한마디 한 것이지, 평소는 그녀가 무엇을 원하든 다 따라줬다.그는 서은지와 함께 외출한 적이 별로 없다. 애초에 서은지가 관심을 가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여이현은 일부러 못 만나게 했다. 여이현과 같은 사람은 그녀가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여이현보다는 나민우가 마음에 들었다. 나민우처럼 나긋나긋한 사람이라면 결혼 후에도 잘해줄 것 같았다.하지만 나민우가 온지유를 좋아하는 것은 그도 알아차릴 정도로 선명했다. 더군다나 서은지는 여이현만 좋아하니 일단은 그녀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그들뿐만 아니라 서승만의 다른 친구들도 왔다. 전부 서은지와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사이여서 아주 예뻐했다. 근황을 묻는 그들에게 서은지는 당당히 인사했다.사람이 전부 모인 다음 그녀는 여이현을 바라보며 물었다.“혹시 못 드시는 음식 있어요?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요!”여이현은 그녀가 갑자기 말을 걸 줄은 모르는 듯 차갑게 대답했다.“알아서 주문하세요.”이때 한 사람이 웃으면서 말했다.“은지야, 삼촌들도 있는데 왜 안 물어봐 줘? 우리 은지 다 컸네. 벌써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는 거야?”서은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아니에요. 삼촌들은 뭘 좋아하는지 다 알아서 안 물었거든요? 그렇게 자주 만났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해요.”그들은 웃음을 터뜨렸다.서은지가 이 자리에 나온 이유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아무래도 여이현을 목표로 왔을 것이다.온지유는 여이현에게 들어대는 여자를 수도 없이 봐왔다. 하지만 서은지처럼 당돌한 여자는 처음이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여이현을 바라봤다. 그는 감정을 알아볼 수 없는 담담한 표정으로 물을 마시고 있었다.식사 자리에서 그들은 대부분 사업에 관해 얘기했다. 여이현과 서승만도 협력하는 것이 있는 듯했다.온지유는 말없이 곁에서 듣기만 했다. 나민우는 얘기하는 와중에도 잊지 않고 그녀에게 반찬을 집어줬다.그녀는 잠깐 화제가 끊겼을 때 나
중학교 때의 나민우는 몸매도 좋지 못하고 능력도 없었다. 그는 온지유에 대한 마음을 혼자 간직할 수밖에 없었다.“지금이라면 널 좋아할 자격이 있을 것 같아.”온지유는 이런 일이 있은 줄 전혀 몰랐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기도 했다.나민우는 그녀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나 사실 엄청 오래전에 돌아온 적 있어. 네가 다쳤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귀국했거든. 하지만 그때도 너한테 가까이 가지는 못했어. 네가 괜찮아진 걸 보고 몰래 좋아하기만 했지. 그때 다음에 돌아올 때는 너한테 어울리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했어.”온지유는 말을 잃었다.그녀는 나민우의 심정을 알았다.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1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녀가 여이현을 좋아하던 시간보다도 길었다.“다른 사람을 좋아해 본 적은 없어?”“없어. 우리 집안에 순정파 유전자라도 있나 봐. 그런데 너무 부담 가질 필요 없어. 난 친구로 지내는 것도 괜찮아. 너 같은 친구가 있는 것만으로도 좋을 것 같아.”“...”나민우는 정말 좋은 사람이다. 지금 그녀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만 봐도 그랬다. 그와 함께 있을 때는 마음 졸일 필요가 없었다.마음을 고백하는 데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적어도 고백 한 번 못 하는 그녀보다는 훨씬 용감했다.“고마워, 민우야.”온지유의 생각을 잘 알았던 나민우는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뭐 좀 먹자. 내가 한 말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나민우는 온지유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다른 사람과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런 나민우가 그녀는 부럽기도 하고 대단하기도 했다. 내면세계가 아주 강해 보였기 때문이다.반대로 여이현은 두 사람과 꽤 떨어진 자리에 있었다. 그들이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한참이나 가까이에서 얘기하는 것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대표님, 저랑 한 잔 마셔줄 수 있을까요?”이때 서은지가 불쑥 나타나서 말했다. 거절당하기 싫은지 간절한 표정까지 지었다.여이현은 이제야 온지유에게서 시선을 떼고 술잔을
이 순간 온지유는 벼락에 맞은 것만 같았다. 그녀는 창백한 안색으로 꼼짝할 수 없었다.그녀는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발은 바닥에 뿌리 박은 것처럼 추호도 움직일 수 없었고 시선도 마찬가지였다.‘내가 화장실에 다녀오는 새로 키스까지 하는 사이가 됐다고?’이때 여이현이 서은지의 손을 풀어냈다. 그러다가 온지유와 시선이 마주친 그는 잠깐 멈칫하더니 난감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여이현에게는 설명할 기회가 없었다. 그는 일단 서은지와 거리를 두더니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서은지 씨, 선 넘지 마세요.”서은지는 여이현을 쫓아 나온 것이었다. 그녀는 여이현이 혼자 있는 것을 보고 애정 행각을 벌일 수 있을 줄 알았다. 자신처럼 예쁜 여자를 거절할 남자는 없다고 자부했기 때문이다.그녀는 자신만 마음먹으면 여이현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이현과 같은 남자와는 하룻밤 보내는 것만으로도 이득이었다.여이현에게 밀려난 것도 그녀는 밀당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입꼬리를 씩 올리며 말했다.“아까는 쿨하게 허락했잖아요. 혹시 여자가 주동적인 건 싫은가요? 약간 새침한 척해볼까요?”자신을 거절할 사람은 없다는 듯한 당당한 말투였다.여이현의 안색은 아주 어두웠다. 그는 약간의 혐오가 섞인 눈빛으로 말했다.“서은지 씨가 쉽게 행동하는 건 상관없지만 저한테 이러지 마시죠. 저는 아무 여자나 건드리지 않거든요.”그의 말에 서은지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저 쉬운 여자 아니에요. 대표님을 좋아하니까 이러는 거죠.”“지금 보니 쉬운 여자 맞는데요.”여이현은 그녀의 체면을 지켜줄 생각도 없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저는 외국에서 자라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무조건 직진이에요. 실례가 되었다면 사과할게요. 앞으로는 대표님의 취향에 따라 행동할 테니,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세요.”그녀와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았던 여이현은 단호하게 말했다.“저는 서은지 씨한테 관심 없어요. 시간 낭비하지 마요.”여자와 엮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여이현은 서
두 사람은 더 이상 가까워질 방법이 없었다.감정을 추스른 온지유는 고개를 들며 미소를 지었다.“대표님의 비서로서 방해가 된 것은 사실이죠. 본 것도 못 본 척, 들은 것도 못 들은 척해야 한다는 사실 잘 알아요. 오늘 일도 절대 발설하지 않을게요.”이때 무언가 눈치챈 서은지가 걸어와서 말했다.“아까 사람이 있어서 저를 밀어낸 거죠? 대표님 비서라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요. 대표님이 스캔들에 민감한 것 같은데, 저는 공개 연애 같은 거 필요 없어요. 그냥 몰래 만나주기만 하면 돼요, 괜찮죠?”서은지는 여이현이 진심으로 좋았다. 그래서 하루빨리 그를 정복하고 싶었다.여이현만 괜찮다면 그녀는 어떤 관계든 괜찮았다. 여이현 또한 거절하지 않으리라 믿었다.반대로 여이현은 온지유의 태도가 아주 마음에 안 들었다. 덩달아 서은지까지 쫑알쫑알 귀찮게 해대서 싸늘한 눈빛을 쏘았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웃고 있던 서은지는 그의 눈빛을 보자마자 얼어붙었다. 등골이 오싹하다는 느낌을 처음으로 제대로 느낀 것이었다.“저는 서은지 씨한테 관심 없다고 했어요. 사람 말 못 알아들어요? 서승만 씨가 이런 모습을 보면 참 좋아하겠네요.”서은지는 자신감이 지나쳤다. 여이현에게 직진이 통할 것이라는 생각도 오만했다.그는 다른 남자와 달리 그녀에게 관심도 없고, 체면을 챙겨 줄 생각도 없었다. 너무 자존심이 상하는 순간이었다.말을 마친 여이현은 더 이상 서은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는 온지유의 손을 덥석 잡더니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그는 불만이라도 표시하는 듯 온지유의 손을 으스러질 듯 꽉 잡았다. 온지유는 아픈 대로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두 사람의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서은지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하지만 쫓아갈 수 없는지라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왜 나를 안 좋아하지? 왜 나한테 비서보다도 못한 취급을 하지?! 이해할 수 없어! 말도 안 돼!’밖으로 끌려 나간 온지유는 여이현의 분노를 생생하게 느꼈다. 여이현은 그
“죄송합니다, 대표님. 오늘은 제가 실수했어요.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앞으로는 조심할게요.”온지유는 빠르게 잘못을 인정했다. 혹시라도 여이현이 폭발하면 큰일이기 때문이다.그녀가 말대꾸하지 않는 것을 보고 여이현은 피식 웃었다.“사과 하나는 참 빠르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 조금 전의 행동 사적인 거야, 공적인 거야?”그녀의 행동은 사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당연히 공적인 것이죠. 제가 대표님의 비서로 일하는 한 끝까지 책임질 거예요. 이번 일은 월급을 깎는다고 해도 할 말이 없어요.”“...”여이현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토를 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럴 필요도 없고 말이다.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그녀를 놓아줬다. 그리고 다시 거리감 있는 자세로 돌아갔다.드디어 풀려난 온지유는 이대로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여이현의 표정은 조금 전보다 더 어두워 보였다.“안 들어가도 돼요? 얼마 먹지도 않은 것 같은데 배고프지 않을까요?”“배 비서더러 나오라고 해. 돌아가자.”그는 아무래도 서은지 때문에 기분이 단단히 상한 듯했다. 원래도 감정 기복이 큰 사람이니 온지유는 크게 개의치 않고 배진호에게 빨리 나오라고 연락했다.나간 지 한참 됐는데도 돌아오지 않는 그녀를 보고 나민우를 문자를 보냈다. 그녀는 먼저 돌아가야 한다고 답장을 남겼다.나민우는 이렇듯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그녀를 챙겨줬다. 분명히 다 아는 것 같은데도 말하지 않고 그녀가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거리에 머물러 있었다.그녀가 문자를 보내는 것을 보고 여이현이 힐끗 보며 물었다.“아까 나 대표랑 무슨 얘기 했어?”온지유는 말문이 막혔다. 나민우의 고백에 어떡할지 생각하기도 전에 질문을 들었으니 말이다.대답하기 싫었던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했다.“학창 시절 얘기를 하고 있었어요. 동창끼리 만나서 할 얘기가 그것밖에 없잖아요.”“흥, 그때 일을 기억하는 걸 보면 기억력도 참 좋아.”온지
“부사장님, 왜 안 들어가세요?”권다솔은 깜짝 놀랐다. 언제 갑자기 나타났는지 모를 직원을 바라보며 그녀는 억지 미소를 지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참, 이거 대신 전해줘요. 저는 급한 일이 생겨서 가봐야겠어요.”직원에게 서류를 건넨 권다솔은 대답을 듣지도 않고 성큼성큼 멀어져 갔다. 그녀는 슬픈 표정으로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다.목적 없이 거리를 거닐며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랐다. 수많은 차와 정장 차림의 사람이 오가는 거리에서 그녀가 갈 수 있는 곳 하나 없는 것 같았다. 막연한 감각도 따라서 피어올랐다.이때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수락 버튼을 눌렀다. 전화를 건 사람은 배진호의 어머니 정미진이었다.“다솔 씨, 지금 시간 있어?”정미진의 목소리는 아주 무덤덤했다.“시간 되면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어.”...15분 후, 권다솔은 넋을 잃은 채 산부인과 앞에 서 있었다.평일이다 보니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산부인과는 더욱 적을 수밖에 없다.간호사는 금방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권다솔 씨.”권다솔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정미진은 그녀의 가방을 대신 들어주며 미소를 지었다. 태도도 보기 드물게 부드러웠다.“가서 검사받아. 짐은 내가 대신 보관할게.”권다솔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정미진이 왜 그녀를 데리고 산부인과에 왔는지, 그리고 왜 갑자기 태도가 변했는지 전부 알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는 결국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검사 결과는 금방 나왔다. 의사는 보고서를 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축하드려요. 임신하셨네요.”정미진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기쁜 것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다시 한번 물었다.“선생님, 확실한가요?”의사는 아예 보고서를 건네주며 말했다.“직접 확인하세요. 초음파 사진에서 태아의 형태를 볼 수 있습니다. 아주 잘 크고 있어요.”사진까지 나오자 정미진은 할 말이 없었다.병원에서 나온 다음 그녀는 직접 권다솔을 데려다줬다. 가는
배상준이 와인을 보고 지나치게 들뜬 모습을 보이자 정미진은 못마땅하다는 듯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그만 좀 해! 평생 와인 처음 본 사람처럼 굴지 마. 작년에 친구가 준 와인도 있잖아?”정미진은 와인이 그렇게 대단한 물건도 아니니 배상준에게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지 말라는 뜻이었다.하지만 배상준은 잠시 생각하더니 진지하게 말했다.“이건 최고급이야. 그거랑은 달라.”정미진의 얼굴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그제야 배상준은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분위기가 그렇게 된 후라 정미진은 권다솔에게 선물을 다시 가져가라고 하지는 못했다. 그녀는 헛기침을 두 번 하고 말했다.“뭐, 그럼 이건 받아 둘게. 진호 아빠는 다른 취미는 없고 술만 좋아하니까.”말을 하며 그녀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권다솔을 바라보며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사전 준비는 꽤 철저했네.”권다솔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정성을 들여 준비한 선물이 이런 식으로 왜곡되면 누구나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그녀는 손바닥을 꼭 쥐며 침착하게 대답했다.“어른들 댁에 올 때는 좋아하시는 걸 알아보고 준비하는 게 예의니까요.”정미진은 차갑게 웃으며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하지만 선물이 마음에 들었는지 배상준은 더 이상 정미진이 권다솔에게 계속 차갑게 굴지 않도록 나섰다.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됐어, 이제 그만 좀 해. 둘이 결혼한 건 이미 기정사실이고, 이렇게 힘들게 찾아왔는데, 좀 따뜻하게 맞아 주는 게 어때?”정미진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로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당신은 도대체 누구 편이야?”배상준은 주눅 든 듯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는 확실히 아내를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그래도 그의 말이 전혀 효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적어도 정미진은 권다솔을 내쫓지는 않았고 함께 식사를 했다.그러나 그것뿐이었다.식사가 끝난 후 정미진은 권다솔을 문까지 배웅하며 말했다.“앞으로 별일 없으면 다솔 씨는 오지 않는 게 좋겠어. 우리 집은 당신처럼 귀한 아가씨를 모실 수 없으니
전화기 너머에서 정미진은 계속 장황하게 말을 이어갔다.순간, 배진호의 품에 안겨 있던 권다솔은 힘이 풀리더니 그대로 바닥으로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배진호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이만 끊을게요, 어머니.”그는 전화를 빠르게 끊고 권다솔을 부축해 일으켰다.“다솔 씨, 우리 어머니가 한 말 신경 쓰지 마세요. 엄마는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어요. 다솔 씨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해요.”“하지만 당신 어머니잖아요. 당신이 어머니 뜻을 거스를 수 있겠어요?”권다솔은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배진호는 잠시 멈춰 섰다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거스를 수 있어요.”그 대답에 권다솔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답변이었다.배진호는 그녀를 품에 안고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부드럽게 말했다.“그런 건 이제 신경 쓰지 마요. 내가 우리 사이에 어떤 방해도 허락하지 않을 거예요.”“지금 제게 가장 중요한 건 다솔 씨와 우리 아이니까요.”배진호의 시선이 그녀의 아직 평평한 배로 향했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담긴 따뜻함과 온화함은 다솔 씨의 마음을 서서히 녹였다.그녀는 그의 따뜻한 태도 속에서 안정을 찾았다.하지만 정미진과의 문제를 그냥 넘어가기로 하지는 않았다. 모든 걸 배진호에게만 맡길 수는 없었다.그녀는 임신 중이었지만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그래서 배진호가 회사 일로 바쁜 틈을 타 권다솔은 집에 남겠다고 핑계를 대고 몰래 배진호의 본가에 찾아갔다.초인종을 여러 번 급하게 누르자 정미진이 문을 열며 말했다.“누구세요? 왜 이렇게 급하게 눌러요?”문이 열리고 권다솔을 본 순간 정미진의 얼굴은 냉랭하게 굳었다. 그녀는 말을 던지며 문을 닫으려 했다.“권다솔 씨였네. 우리 같은 작은 집안은 당신같이 고귀한 사람은 모실 수 없으니 어서 돌아가.”“잠깐만요, 아주머니! 문 닫지 마세요!”권다솔은 급한 마음에 손을 뻗어 문을 막으려 했다.정미진이 문을 세게 닫으려다 보니 권다솔은 손이 문틈에
약 15분이 지나고 나서야 남태건이 사무실에서 나왔다.그의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침착하고 냉정했다. 협상이 성사되었는지 아닌지는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직원들은 서로 의견을 나누며 추측하기 시작했다.“내 생각엔 협상이 결렬됐을 거야. 대표님 성격 알잖아. 한번 물면 절대 놓지 않는 성격이잖아.”“글쎄, 어떻게 알아? 어쩌면 됐을지도 모르지.”“흥! 그럼 내기라도 해 볼래?”배진호가 공식적으로 발표하기 전까지 직원들은 이런저런 추측만 할 수 있었다.하지만 권다솔은 다르다. 그녀는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사무실에 들어가자 그녀의 눈에 배진호의 책상이 보였다. 책상 위에는 펼쳐보지도 않은 서류 한 장이 놓여 있었고 옆에는 방금 사용된 것 같은 펜이 있었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불안감을 느꼈다.혹시... 직원들 말대로 협상이 성사된 것일까?복잡한 추측을 멈추고 권다솔은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혼자 고민만 하다가는 걱정만 커질 뿐이었다.“진호 씨, 태건 씨와 협력하기로 한 거예요?”권다솔은 숨을 고르고 직접 물었다. 사실을 마주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설령 협력이 성사되었다 해도 그것은 단지 가끔 마주치기 싫은 사람을 회사에서 보게 될 가능성이 생겼을 뿐이었다.배진호는 그녀가 갑자기 들어오자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책상 위 서류로 향했다.그는 아무 말 없이 서류를 집어 들고 찢어버렸다.권다솔은 그 모습을 보고 멍해졌다.“그걸... 찢은 거예요?”“그런 셈이죠.”배진호는 담담히 말했다.“이건 하남 지역의 토지 양도권 계약서였어요. 하지만 협력하지 않기로 했어요.”그의 태도는 마치 그것이 중요한 서류가 아니라 어디에나 흔한 종잇조각인 것처럼 보였다.권다솔은 더욱 놀랐다.하남 지역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그녀도 알고 있었다. 얼마 전 회사 회의에서 다음 목표는 하남 지역으로 설정하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한 곳을 반드시 확보하겠다고 결정했었다.하남 지역 땅은 단순히 지역 시장을 빠르게 여는 것 이상
권다솔은 웃으며 직원들에게 인사를 건네던 중 시선이 한 곳에 닿은 순간 얼굴이 굳었다.남태건이 몇 명의 사람들과 함께 로비를 걸어오다가 갑자기 멈춰 섰다. 그의 깊고 날카로운 시선이 바로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권다솔은 본능적으로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옆에 있던 한 직원이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전무님, 괜찮으세요?”권다솔은 고개를 저으며 간단히 말했다.“괜찮아요. 가죠.”돌아가는 길 내내 그녀는 방금의 장면을 떨쳐내려 했지만 남태건의 모습은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돌았다.그는 알게 모르게 그녀의 악몽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왜 또 온 거지?’‘나를 이렇게 만든 것도 모자라 도대체 뭘 더 하려는 걸까?’수많은 의문들이 마음속에 쌓이며 그녀는 점점 짜증이 솟구쳤다. 그 짜증을 이기지 못한 듯 권다솔은 점점 걸음이 빨라졌다.옆에 있던 사람들이 그녀를 따라가려 했지만 이미 그녀는 훨씬 앞서 있었다.“전무님, 너무 빨리 걸으시면 안 돼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권다솔은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했다.바닥에 부딪히기 직전 그녀는 마음속으로 후회의 물결이 밀려왔다.다행히 익숙한 손이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배진호가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으며 균형을 잡아 주었다.권다솔은 그의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방금의 일은 그녀뿐만 아니라 배진호에게도 큰 충격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다솔 씨, 괜찮아요?”“네, 괜찮아요.”권다솔이 대답을 마치자 뒤에서 또 다른 발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고 예상대로 그곳에는 남태건이 서 있었다.그는 완벽히 맞춘 고급 정장을 입고 있었고 단정한 짧은 머리는 그의 날카롭고 예리한 얼굴선을 더욱 강조했다. 겉보기에는 완벽한 신사처럼 보였다.하지만 권다솔은 알고 있었다. 이 남자는 외면과는 달리 안에 짐승 같은 본성을 숨기고 있다.그는 그녀를 속이고 과거의 따뜻한 기억을 무기로 그녀를 자신에게 끌어들이려 했다
배진호가 회사에서 문제가 생겼다고 말하자 권다솔은 당연히 이것저것 물어보았다.하지만 그는 무언가를 숨기고 싶어 하는 듯 아무것도 말하려 하지 않았다.결국 권다솔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알았어요. 하지만 너무 늦지 않게 돌아와야 해요.”전화를 끊고 난 뒤 방문에서 갑작스럽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문밖에서 도우미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사모님, 닭고기 국을 끓였는데 드셔보시겠어요?”권다솔은 문을 열어 그녀가 닭고기 국을 테이블 위에 놓도록 했다.원래라면 국을 놓고 곧바로 떠났겠지만 도우미는 머뭇거리며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했다.“경미 씨, 무슨 일이에요?”권다솔이 물었다.박경미는 잠시 망설이며 대답했다.“조금 전 누군가가 전화를 했는데 제가 누구냐고 묻자 바로 전화를 끊더라고요.”“그냥 잘못 걸린 전화 아니었을까요?”“그렇다면 별일 아닐 텐데... 전화를 여러 번 했거든요.”박경미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권다솔을 바라보며 말했다.“혹시 누군가를 찾으려고 한 게 아닐까 싶어요.”권다솔은 순간적으로 긴장하며 눈빛이 흔들렸다.배진호가 없는 지금 이 별장에는 박경미와 그녀밖에 없었다. 혹시 전화를 건 사람이 그녀를 찾는 것일까?그러나 누가 이 집 전화번호를 알고 있을까?그녀는 문득 남태건을 떠올리며 본능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지금 그녀에게 남태건은 더 이상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그녀는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그 사람이 다시 전화하면 받지 말아요... 아니, 아예 전화선을 뽑아버리세요.”별장의 집 전화는 구식이라 전화선을 연결해야만 작동했다. 선을 뽑으면 더 이상 울리지 않을 것이었다.박경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마도 전화선을 뽑으러 간 듯했다.권다솔은 샤워를 마친 후 침대에 누웠고 곧 깊은 잠에 빠졌다.그러나 한참 자던 도중 갑작스러운 간지러운 느낌에 그녀는 눈을 떴다. 밝았던 하늘이 완전히 어두운 밤으로 변해 있었다. 그 어둠은 마치 먹물보다도 더 짙고 무거웠다.권다솔
식구들은 배진호의 말을 듣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남자의 무릎이 얼마나 귀중한지 모두가 알고 있었다.세상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이 정도까지 자신을 낮출 수 있는 남자가 얼마나 될까?배진호는 자신의 행동으로 권다솔에 대한 마음이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음을 증명했다.권다솔은 이미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결국 권용민과 김영은은 딸이 계속 우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 마음을 풀어 그녀를 데려가라고 허락했다.집으로 돌아가는 길 배진호는 계속 권다솔을 세심하게 배려하며 그녀를 살폈다.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이전과 다른 어색함이 흘렀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이 그들 사이에 생긴 듯했다.그때 권다솔이 갑자기 배진호의 말을 떠올렸다.“아까 부모님 앞에서... 누군가 틈을 타 끼어들었다고 했잖아요.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는 거예요?”둘 다 이번 사건이 누군가의 의도적인 조작으로 일어난 것임을 알고 있었다.다만 그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배진호는 외투를 벗다 말고 잠시 멈추며 말했다.“그날 남태건 씨가 다솔 씨를 데려갔잖아요.”권다솔은 그가 말하는 것이 그날 밤 부모님과 다툰 일을 가리키는 줄 알았다.그러나 곧 깨달았다. 그가 말하는 것은 그날 밤이 아니라 유람선에서의 일을 언급한 것이었다.그 순간 권다솔은 누군가에게 강하게 얻어맞은 듯 정신이 멍해졌다.휘청거리며 넘어질 뻔했지만 배진호가 그녀를 붙잡아 주었다.“그러니까, 이 모든 게 남태건이 한 짓이라는 거예요?”권다솔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배진호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말한 것을 후회했지만 끝내 고개를 끄덕이며 사실을 인정했다.그 대답을 듣고 권다솔의 마음은 높이 날아오른 풍선이 터져버린 것처럼 산산조각 났다.“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권다솔은 허탈하게 중얼거리며 점점 무너져 결국 웅크리고 주저앉았다.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며, 배진호는 더욱 고통스러웠다. 남태건을 향한 분노와 증오가 마음속에서 더욱 강렬하게 피어
권다솔은 이미 자신을 때릴 준비가 된 아버지의 손바닥을 감당할 각오를 하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예상했던 통증은 오지 않았다.눈을 뜬 그녀는 권용민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으면서 참아내는 모습을 보았다.김영은이 옆에서 권용민을 달래며 말했다.“혼자 화낸다고 뭐가 달라지겠어요. 지금 중요한 건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하느냐죠. 이건 분명히 진호 씨 쪽 문제예요.”“당장 진호 씨를 불러서 해결해야 해요.”권용민은 그 말을 듣고 딸을 곁눈질로 보며 속으로 화를 다스렸다.참고 또 참고 나서야 그는 여전히 차갑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들었지.”“만약 아직도 자존심이 있다면 더는 진호 씨를 감싸선 안 돼. 그는 다 큰 남자다. 자신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권다솔은 잠시 침묵한 후 배진호에게 문자를 보내 집으로 오라고 했다.문자를 받은 배진호는 급히 회사에서 달려왔다.거실에서 앉아 있는 권다솔을 보자마자 다가가려 했지만 권용민의 날카로운 시선에 얼어붙었다.“길게 말하고 싶지 않네요.”권용민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손으로 권다솔을 가리키며 말했다.“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당신 어머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두 들었습니다.”배진호는 고개를 들고 권용민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제 어머니가 그날 한 말은 잘못됐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제 생각도 그렇다는 뜻이 아닙니다.”권용민은 그의 단호한 눈빛을 보며 속으로 약간 안도하면서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사실 그는 배진호를 나쁘게 보지 않았다.그를 존중한 이유는 단순히 과거에 자신을 구한 은혜 때문이 아니라 그의 능력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었다.처음에는 배진호를 단순한 비서로만 보았다. 하지만 이후 그는 자신의 실력으로 한 기업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며 능력을 증명했다.그의 경영 방식은 보통 사람이 쉽게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권용민은 배진호를 인정했다.그 기억을 떠올리며 권용민은 자신의 날카로웠던 시선을 조금 누그러뜨리며 말했다.“진호 씨, 저는
김영은은 깜짝 놀라 잠시 말을 잃었다.“너 그 집안과 엮이고 싶지 않다고 했었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왜 또?”권다솔은 고개를 숙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김영은은 딸의 반응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걸 알았기에 굳이 캐묻지 않았다.하지만 권용민은 달랐다.“그때는 결혼하면 잘해 주겠다느니 너희가 행복하게 살 거라느니 말만 번지르르하게 했네.”권용민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이런 일이 생긴 거냐?”“이건 전적으로 진호 씨의 잘못은 아니에요...”“아직도 진호 씨를 두둔하는 거야? 그럼 말해 봐. 진호 씨 잘못이 아니라면 왜 너는 이틀 동안 아무 소식도 없었던 거냐?”권다솔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테이블 아래에서 손가락을 꼬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머릿속이 뒤엉켰다.그녀는 부모님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두 분 모두 불의를 참지 못하고 화를 잘 내는 성격이었다. 만약 자신이 배진호의 어머니에게서 받은 모욕을 털어놓으면 김영은은 분명 즉시 그 집으로 찾아가 난리를 칠 것이다.그리고 겨우 허락했던 권용민 역시 배진호와의 이혼을 요구할 게 뻔했다.부모님에게 있어 딸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은 용납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결국 권다솔은 침묵을 선택했다.그녀의 태도에 권용민은 더욱 답답함과 분노를 느꼈다. 딸이 집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좋아, 네가 말하지 않으면 내가 진호 씨에게 직접 물어봐야겠다!”권용민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결혼한 지 일주일도 안 돼서 내 딸이 이런 대접을 받는 이유가 뭔지 물어보지 않으면 안 되겠어!”그러면서 휴대폰을 들어 배진호에게 전화를 걸려 했다.권다솔은 급히 그의 손을 붙잡으며 전화를 막아섰다. 그녀는 김영은과 함께 애타게 설득하며 아버지를 저지했다.휴대폰을 간신히 빼앗았지만 권용민의 화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분명히 말한다, 다솔아. 오늘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