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은 더 이상 가까워질 방법이 없었다.감정을 추스른 온지유는 고개를 들며 미소를 지었다.“대표님의 비서로서 방해가 된 것은 사실이죠. 본 것도 못 본 척, 들은 것도 못 들은 척해야 한다는 사실 잘 알아요. 오늘 일도 절대 발설하지 않을게요.”이때 무언가 눈치챈 서은지가 걸어와서 말했다.“아까 사람이 있어서 저를 밀어낸 거죠? 대표님 비서라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요. 대표님이 스캔들에 민감한 것 같은데, 저는 공개 연애 같은 거 필요 없어요. 그냥 몰래 만나주기만 하면 돼요, 괜찮죠?”서은지는 여이현이 진심으로 좋았다. 그래서 하루빨리 그를 정복하고 싶었다.여이현만 괜찮다면 그녀는 어떤 관계든 괜찮았다. 여이현 또한 거절하지 않으리라 믿었다.반대로 여이현은 온지유의 태도가 아주 마음에 안 들었다. 덩달아 서은지까지 쫑알쫑알 귀찮게 해대서 싸늘한 눈빛을 쏘았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웃고 있던 서은지는 그의 눈빛을 보자마자 얼어붙었다. 등골이 오싹하다는 느낌을 처음으로 제대로 느낀 것이었다.“저는 서은지 씨한테 관심 없다고 했어요. 사람 말 못 알아들어요? 서승만 씨가 이런 모습을 보면 참 좋아하겠네요.”서은지는 자신감이 지나쳤다. 여이현에게 직진이 통할 것이라는 생각도 오만했다.그는 다른 남자와 달리 그녀에게 관심도 없고, 체면을 챙겨 줄 생각도 없었다. 너무 자존심이 상하는 순간이었다.말을 마친 여이현은 더 이상 서은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는 온지유의 손을 덥석 잡더니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그는 불만이라도 표시하는 듯 온지유의 손을 으스러질 듯 꽉 잡았다. 온지유는 아픈 대로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두 사람의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서은지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하지만 쫓아갈 수 없는지라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왜 나를 안 좋아하지? 왜 나한테 비서보다도 못한 취급을 하지?! 이해할 수 없어! 말도 안 돼!’밖으로 끌려 나간 온지유는 여이현의 분노를 생생하게 느꼈다. 여이현은 그
“죄송합니다, 대표님. 오늘은 제가 실수했어요.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앞으로는 조심할게요.”온지유는 빠르게 잘못을 인정했다. 혹시라도 여이현이 폭발하면 큰일이기 때문이다.그녀가 말대꾸하지 않는 것을 보고 여이현은 피식 웃었다.“사과 하나는 참 빠르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 조금 전의 행동 사적인 거야, 공적인 거야?”그녀의 행동은 사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당연히 공적인 것이죠. 제가 대표님의 비서로 일하는 한 끝까지 책임질 거예요. 이번 일은 월급을 깎는다고 해도 할 말이 없어요.”“...”여이현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토를 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럴 필요도 없고 말이다.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그녀를 놓아줬다. 그리고 다시 거리감 있는 자세로 돌아갔다.드디어 풀려난 온지유는 이대로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여이현의 표정은 조금 전보다 더 어두워 보였다.“안 들어가도 돼요? 얼마 먹지도 않은 것 같은데 배고프지 않을까요?”“배 비서더러 나오라고 해. 돌아가자.”그는 아무래도 서은지 때문에 기분이 단단히 상한 듯했다. 원래도 감정 기복이 큰 사람이니 온지유는 크게 개의치 않고 배진호에게 빨리 나오라고 연락했다.나간 지 한참 됐는데도 돌아오지 않는 그녀를 보고 나민우를 문자를 보냈다. 그녀는 먼저 돌아가야 한다고 답장을 남겼다.나민우는 이렇듯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그녀를 챙겨줬다. 분명히 다 아는 것 같은데도 말하지 않고 그녀가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거리에 머물러 있었다.그녀가 문자를 보내는 것을 보고 여이현이 힐끗 보며 물었다.“아까 나 대표랑 무슨 얘기 했어?”온지유는 말문이 막혔다. 나민우의 고백에 어떡할지 생각하기도 전에 질문을 들었으니 말이다.대답하기 싫었던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했다.“학창 시절 얘기를 하고 있었어요. 동창끼리 만나서 할 얘기가 그것밖에 없잖아요.”“흥, 그때 일을 기억하는 걸 보면 기억력도 참 좋아.”온지
밖으로 나온 배진호는 온지유를 흔들어 깨웠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왜 그래요?”“대표님이 술을 많이 마셨나 봐요.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아요.”온지유는 황급히 여이현의 상태를 체크했다. 그는 조금 전의 자세 그대로 앉은 채 곤히 잠들었다.평소에는 한 번도 이런 적 없으니 진짜 술에 취했을지도 모르겠다. 온지유의 기억 속에는 이토록 곤히 잠든 그의 모습이 없었다.어느샌가 집 앞에 도착한 것을 보고 온지유가 말했다.“제가 사람을 불러서 대표님을 부축할게요. 시간이 늦었으니 배 비서님은 얼른 돌아가서 쉬세요.”순간 정신을 차린 온지유는 빠르게 움직였다.“네, 수고하세요.”차에서 내린 온지유는 도우미를 불러 여이현을 부축했다. 그렇게 그를 침대에 눕힌 다음 온지유는 힘이 완전히 빠져나갔다.침대에 옮겨질 때까지 눈 한 번 뜨지 않은 남자를 보고 그녀는 신발에 정장 외투까지 벗겨줬다. 그의 몸에서는 짙은 술 냄새가 나고 있었다.‘정말 많이 마셨나 보네.’이때 여이현이 뒤척이며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온지유는 배를 그의 얼굴에 댄 채로 꼼짝 못 하게 되었다.지금 그녀의 무릎에 누워 있는 여이현에게서 평소의 예리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마치 온기를 탐하는 어린아이와 같았다. 누가 이 아이를 한 회사 대표로 보겠는가?온지유는 손을 올려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손길을 그의 콧대를 타고 내려갔다.‘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것도 잠시 그녀는 금방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따듯한 물을 받아와서 그의 몸을 닦아줬다.그녀는 차분하게 셔츠에 바지까지 벗기고, 따듯한 수건으로 몸을 닦아줬다. 하지만 어느 순간 멈춰 서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어두운 조명을 빌어 그녀는 침대 가에 앉았다. 여이현의 몸에는 흉터가 아주 많았다. 직접적으로 몸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 이제야 발견했다.‘전에는 왜 한 번도 볼 생각을 안 했을까. 이현 씨 몸에 흉터가 이렇게 많았다니...’복부에도 흉터가 있는 것을 보
온지유는 부랴부랴 눈물을 닦아냈다. 그리고 그나마 멀쩡한 표정으로 여이현을 바라보며 말했다.“오늘 많이 마셨어요. 얼른 다시 쉬세요.”여이현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다시 물었다.“너 방금 울었어?”온지유는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숙였다.“눈에 먼지가 들어가서요.”“도대체 왜 울었는데?”온지유는 쉽게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그녀가 눈물을 흘렸다는 것은 아주 심각한 일이라는 뜻이다.여이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아까 보니까 이현 씨 몸에 상처가 너무 많더라고요. 저는 전혀 몰랐어요.”여이현은 잠깐 멈칫하더니 기분 좋은 듯 말했다.“날 걱정해 준 거야?”여이현의 말에 그녀는 심장이 쿵 내려앉더니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비밀을 들킨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몸에 흉터가 이렇게 많은 건 처음 봐서요. 많이 아팠죠.”그녀는 바늘에 찔려도 한참 낑낑대는 사람이었다. 이 정도 흉터가 남을 상처라면 견디지 못했을 수도 있다.여이현의 눈빛은 물씬 부드러워졌다. 냉정함과 거리감도 보아낼 수 없었다.“내 흉터를 보고 그런 말을 한 건 네가 처음이야.”그는 입꼬리는 올리며 피식 웃었다. 자신을 향한 비웃음인 것 같았다.온지유는 머리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쳤다. 왠지 모를 씁쓸함을 보아낸 그녀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그럴 리가요. 이현 씨 흉터에 속상해하는 사람 많았을 거예요. 할아버님도 어머님도... 이현 씨를 걱정하는 가족분들이 많잖아요.”온지유는 일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 그녀는 여씨 가문의 모두가 그를 아껴준다고 생각했다.애초에 그가 오냐오냐 자랐다면 이런 상처를 입을 일이 없었다. 총알이 남긴 흉터는 그녀 때문이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흉터는 어떻게 왔단 말인가?온지유는 약간 놀라웠다. 눈빛에도 의혹이 담기기 시작했다.그녀에게 들킨 이상 여이현은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었다. 그는 셔츠를 완전히 벗으며 흉터는 다시 드러냈다.그 모습에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았던 온지유는 입술을 깨물었다. 여이현은 미간을
여이현은 자신을 무방비하게 드러냈다. 등에도 험악한 흉터가 잔뜩 남아 있었고 조각 같은 몸매에 색다른 느낌을 줬다.온지유는 그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누가 여씨 가문의 여이현에게 이런 흉터가 있을 줄 알겠는가?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등을 어루만졌다. 그는 잠깐 멈칫하기만 할 뿐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손길을 가만히 느끼던 그는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안 아파.”흉터는 온지유의 심장에 거듭 꽂혔다. 그녀는 말없이 주먹을 꽉 쥐었다.여이현이 말하기 싫어하는 걸 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것이 확실했다. 그녀가 기억하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뒤로 물러났다. 너무나도 낯설게 느껴지는 여이현에 그가 바로 기억 속의 ‘석이’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여희영은 여진숙을 대놓고 싫어했다. 심지어 여이현은 자신이 직접 키웠으니, 여진숙이 뭐라고 할 자격 없다고 했다. 여진숙은 어머니로서 여이현에게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이것 또한 이상하지 않은가?어쩌면 여진숙이 여이현에게 무심했고, 그래서 여이현이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만약 여이현이 얼마나 잘났는지는 중년에 가서야 알았다면 최근 갑자기 잘해주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머릿속이 복잡했던 온지유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이만 씻으러 가요. 술 냄새가 너무 심해요.”“알았어.”여이현은 무덤덤하게 셔츠를 챙겨 들고 샤워하러 갔다. 밖에서 온지유는 그의 잠옷을 챙겨서 욕실 앞에 내려놓았다.온지유는 그를 챙겨주는 데 익숙했고, 여이현도 그녀에게 챙김을 받는 데 익숙했다. 때로는 그녀가 이혼하고 떠난 다음 여이현이 적적해하지는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만약 그를 완벽하게 챙겨줄 수 있는 다른 여자가 나타난다면 그녀 따위는 금방 잊을지도 모른다. 지구는 어느 한 사람 때문에 돌지 않고, 여이현도 그녀 없이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온지유도 이만 잠옷을 들고 다른 욕실에서 씻고 돌아왔다. 그녀가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았을 때 여이현이 샤워를 끝내
여이현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던 온지유는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부드러운 키스는 소유욕으로 인해 점점 거칠어졌다.온지유는 막연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여이현이 그녀의 옷을 벗기는 순간 후딱 정신 차리고 아랫배를 감쌌다. 다른 한 손은 있는 힘껏 그를 밀어냈다.“안 돼요!”한창 빠져있던 여이현도 밀려나면서 정신을 차렸다. 온지유는 두려운 눈빛으로 옷을 꽉 잡고 있었다. 그와 관계 맺는 것을 진심으로 싫어하는 모습이었다.욕망으로 불타오르던 마음은 차갑게 식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너 지금 이러는 거 나 대표 때문이야? 석이라는 자식 때문이야?”여이현은 그녀가 당연히 다른 남자 때문에 자신을 거절한다고 생각했다.반대로 온지유는 말없이 아랫배를 매만졌다. 임신한 이상 충동적으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 자칫 한 생명이 위험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여이현이 아무리 싸늘한 표정을 짓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술에 취했고, 이성적이지 못한 상황에 놓였기 때문이다.아이 역시 술에 취한 상태에서 생긴 것이었다. 그녀와 아이 모두 무사히 살아남기 위해서는 밀어내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그녀는 머리를 숙이며 아무런 변명이나 했다.“몸이 불편해서... 지금은 안 돼요.”이런 변명이 여이현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그도 당연히 변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눈빛에 담긴 불쾌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분위기도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그는 바로 침대에서 일어나더니 차갑게 말했다.“다른 남자를 위해 날 밀어낼 정도면 같이 잘 것도 없겠네. 난 서재에 가서 잘게.”말을 마친 여이현은 머리도 돌리지 않고 멀어져갔다. 쾅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온지유는 옷매무시를 정리하고 침대에 앉았다. 그는 자신의 배를 바라보며 천천히 쓰다듬었다. 아이를 위로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자기 자신을 위로하는 것 같기도 했다.“아가야, 아빠가 화를 낸 건 네 존재를 몰라서야. 엄마가 아직 용기 내서 말해주지 못했어. 대신 엄마가 배로 사랑해 줄게.”여이현이 아무리
온지유는 마지막 한 입까지 먹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여진숙이 자신에게 불만이 있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여이현이 그녀를 감싸줄 때마다 쌓여갔던 불만이기 때문이다.온지유는 몸을 일으키며 여진숙을 똑바로 바라봤다.“어머님은 제가 임신하는 걸 원하지 않으시죠?”예상치 못한 화제에 여진숙은 잠깐 멈칫했다.“그건 왜 갑자기 묻는 거니?”“하긴, 어머님은 노승아 씨를 좋아하니 당연히 제가 임신하는 걸 원하지 않겠죠. 이현 씨도 마찬가지예요. 저한테 임신하지 못하게 하는 약을 먹이고는 하루 종일 듣기 싫은 말만 해요.”온지유가 먼저 말을 꺼내는 것을 보고 여진숙도 더 이상 연기하지 않았다.“알면 됐다. 우리 집안에 네 피를 끌어들일 수는 없어.”이렇게 말하며 약간 득의양양해진 여진숙은 자리에 앉으면서 오만하게 말했다.“우리 이현이 좋아하는 사람은 승아야. 그런데 어떻게 널 건드릴 수 있겠니? 아버지가 미쳤지, 너 같은 애를 집안에 들이다니. 너만 아니었어도 승아가 진작 우리 집안에 들어왔을 거다.”“맞아요. 저도 다 아니까 이제 약은 주지 마세요. 줘도 안 먹을 거니까요.”차갑게 말하고 난 온지유는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의 오만한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올랐던 여진숙은 뒤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아무리 잔머리를 굴려 봤자 넌 우리 집안 애를 낳지 못해! 너한테 그럴 능력도 없겠지만 말이야! 오만하게 굴지 마. 이 집안을 떠날 때 넌 무릎 꿇고 나한테 빌게 될 테니까.”전에는 그녀가 아무리 괴롭혀도 말대꾸 한 번 안 하던 온지유였다. 하지만 이제는 여이현을 믿고 그러는 것인지 부쩍 나대기 시작했다.‘두고 봐.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여진숙은 피식 웃더니 노승아와 함께 매니큐어 받으러 갔다. 반대로 온지유는 클럽 매니저를 만나러 갔다.“왔어요, 지유 씨.”환하게 인사하는 것도 잠시 매니저는 난감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저 지유 씨한테 할 말이 있어요.”“저도 할 말이 있어요.”“지유 씨 먼저 말해요.”“지난번의 여
이 말을 듣고 여이현은 우뚝 멈춰 서며 몸을 돌렸다.“무슨 여자?”중간에서 말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배진호는 목에 칼이 닿은 것만 같았다. 도대체 부부 생활을 어떻게 했기에 아내가 남편에게 다른 여자를 찾아주는지 의아할 따름이다.더군다나 남편이라는 작자는 아내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고 결혼 사실도 밝히지 않았다. 중간에 끼인 배진호만 죽어 나가는 상황이었다.“그게... 그날 밤 대표님과 같이 있었던 여자 말입니다.”이 말을 듣자마자 여이현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온지유에게 밀려났던 일이 다시 떠올랐던 것이다.‘이렇게 다른 여자를 끌어들이고 싶었나? 도대체 얼마나 날 싫어하는 거야.’여이현의 얼굴에는 얼음이 내려앉은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한 목소리로 말했다.“알았어요. 잠깐 기다리라고 해요.”온지유가 출근해서 가방을 내려놓기 바쁘게 배진호가 걸어왔다.“온 비서님, 대표님께서 손님과 함께 휴게실에서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온지유가 못 알아챈 것을 보고 여이현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보탰다.“온 비서님이 그 여자를 데려온 거 아니에요?”온지유는 추측 가는 바가 있었지만 감히 확신하지 못했다. 그녀는 휴게실을 힐끗 보더니 부리나케 달려갔다.주소영은 가만히 휴게실에 앉아 있었다. 오늘따라 색다른 느낌을 주는 모습이었다.검은색 머리카락과 흔히 보이는 출근룩, 어딘가 불쌍해 보이는 모습은 보호 본능을 이끌었다.이런 곳에 처음 오는 주소영은 약간 불편해 보였다. 그녀는 시골 출신이다. 그리고 어릴 적부터 도시의 높은 건물을 꿈꿔왔다. 지금 그 높은 건물에 들어와서 도시를 내려보고 있다니, 이보다 더 짜릿할 수도 없었다.그녀는 두리번거리다가 문 가에 서 있는 온지유를 발견하고 먼저 인사했다.“안녕하세요, 지유 씨.”“여기는 어떻게 왔어요?”주소영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지유 씨 여기에서 일해요?”밖에 아직 사람이 있었기에 온지유는 안으로 들어가면서 문을 닫았다.“네.”주소
가뜩이나 하얀 피부라 붉은 손바닥 자국이 얼굴에 아주 선명하게 생겨났고 이 장면을 목격한 이들은 모두 간담이 서늘해졌다.이때 기세등등했던 연희진이 갑자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은서우의 눈빛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너 그게 무슨 눈길이야? 넌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하는 거니?”“아닙니다.”은서우는 얼굴에서부터 전해져오는 아릿한 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아주 평온해 보였다. 그 통증이 그녀를 현실로 다시 돌아오게 했기에 고맙기만 할 따름이었다.“제가 오히려 엄마에게 고마워해야 하죠.”얼굴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그녀가 가족에 대한 환상에서 완전히 깨어나게 해주었다.연희진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그녀는 은서우가 약해 보일 때엔 마음대로 손찌검을 할 수 있었는데 은서우의 눈빛이 날카로워지자 예전처럼 괴롭힐 엄두가 나지 않았다.은서우는 연희진이 저도 모르게 움츠러드는 모습을 보며 문득 과거를 떠올렸다. 그녀 기억 속의 연희진은 항상 이런 모습이었다. 소심하고 겁이 많으며 본분만을 지키는 사람.연희진은 그저 옛 세대의 방식대로 살아왔을 뿐이었다.남편과 아들의 말은 절대적이었고 아이들이 그녀를 어떻게 대하든 무조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저는 한때... 엄마가 불쌍하다고 생각했어요.”은서우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엄마의 고통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롯된 것도 맞지만 그중 일부는 엄마가 자초한 거예요.”소상태는 두 사람의 대화를 더는 듣고 싶지 않았는지 헐떡이며 달려오더니 소리쳤다.“내 아들을 풀어줘!”은서우는 아무 표정 없이 무덤덤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죄송하지만, 그럴 수 없어요.”그녀의 대답에 화가 난 소상태가 손찌검을 들려 했다.그의 손이 은서우의 얼굴에 닿으려던 순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인명진이 그 손을 잡았다.인명진의 얼굴은 평소와는 달리 분노로 가득 차 있었고 마치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 그가 이 정도로 화가 나 있는 모습은 처음
소태훈의 그날 증상은 마약의 부작용으로 판명되었고 이로써 은서우에게 씌워졌던 혐의는 완전히 벗겨졌다.하지만 소태훈은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이건 조작이야! 은서우, 우리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너 어떻게 이럴 수 있어? 그러고도 사람이야?”경찰이 그를 끌어가려 했지만 소태훈은 끝까지 버티며 저항했다.그 소란에 병원 전체가 떠들썩해졌다.복도에는 사람들이 가득했고 수많은 시선이 은서우와 소태훈에게 쏠렸다.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은서우는 이제 신경 쓰지 않았다.그녀는 단단한 눈빛으로 소태훈을 바라보았다.“그래, 소씨 집안이 날 길러준 건 맞지. 그런데 그게 어쨌다고? 1200만 원은 이미 다 갚았어.”부유한 집안에 놓고 말하면 별것 아닐 수도 있지만 은서우에게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거액이었다. 평생 모아도 그런 돈을 마련할 수 없을 정도였다.‘소씨 가문 가족들이 나한테 써준 돈이 과연 1200만이나 될까? 아니, 100만이라도 될까? 학비도, 생활비도 다 내가 스스로 벌었는데... 소씨 집안 사람들이 날 조금이라도 챙겨준 적이 있었던가?’소씨 가문 사람 중에 그녀가 미련을 가졌던 건 오직 소태연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소태연도 세상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도 더 이상 연연할 필요가 없는 곳이었다.소태훈은 소리를 질렀다.“그럼 내 동생은? 내 동생이 죽은 것도, 내 다리가 이렇게 된 것도 다 너 때문이야! 그것도 네가 갚아야 할 빚 아니야?”소태연을 떠올리는 순간, 은서우의 가슴속 깊은 상처가 다시 한번 아려왔다. 순간,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하지만 인명진을 떠올리는 순간, 그 불안한 감정은 점점 사라지는 것이었다.사실 그가 개입하지 않아도 온서우 혼자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소태훈을 끌고 가 검사를 강제로 받게 하는 것쯤은 그녀 혼자서도 할 수 있었다.하지만 그럼에도 인명진은 나서서 그렇게 했다.깊이 생각해 보지는 않았지만 이제 와서 곱씹어보면 그는 온서우에게 방법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
연희진의 얼굴빛이 극도로 어두워졌다.병실로 들어간 은서우는 멈칫하더니 제자리에 멈춰 섰다.“소태훈, 너 깨어난 거야?”그녀는 멍하니 소태훈을 바라보며 깜짝 놀랐다.‘깨어났는데 왜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걸까? 분명 간호사가 지켜보고 있었을 텐데...’인명진의 표정은 점점 더 싸늘해졌고 그는 고개를 돌려 뒤에 서 있는 간호사를 쳐다보았다.“당직 간호사가 누구죠?””소민이에요.”“그만두라고 하세요.”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아무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소태훈은 순간 당황스러운 듯했지만 이내 금세 진정하며 오히려 역으로 말했다.“너 여기는 왜 들어왔어? 아직도 날 해칠 생각이야? 여긴 병원이야. 함부로 날뛰지 마.”그러면서 그녀 뒤에 서 있는 인명진을 힐끗 바라보며 비웃는 어조로 덧붙였다.“진짜로 사람이 죽기라도 하면 네 남자 친구도 널 지켜줄 수 없을걸?”그 말에 은서우는 짜증이 확 났다.“소태훈, 말조심해. 말을 똑바로 못 하겠으면 내가 좀 가르쳐 줄까?”“이젠 나한테 대놓고 덤비는 거야? 대단하네. 배짱이 커졌나 봐?”소태훈의 눈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고 표정은 싸늘해졌다.그동안 인명진은 이미 간호사에게 검사 준비를 하게 했다.은서우는 그를 한번 쳐다보더니 더 이상 시간 낭비하지 않고 말했다.“일어나. 검사를 할 거야.”소태훈이 순순히 응할 리 없었다.‘내가 왜 협조해야 하지?’그는 느긋하게 은서우를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검사를 받았으면 좋겠어? 그러면 네가 직접 날 모셔봐. 어차피 어릴 때도 많이 해봤잖아. 어때?”그 말을 듣자 은서우는 당장이라도 손에 쥔 시험관을 그의 입에 쑤셔서 넣고 싶었다.너무 역겨워서 그녀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바로 그때, 인명진이 소태훈을 단단히 붙잡았다. 곧이어 소태훈은 비명을 질렀다.“뭐야, 뭐 하는 거야? 난 환자라고! 이렇게 대해도 된다고 생각해?”인명진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그를 화장실로 던져 넣고는 재빠르게 문을 잠가 버렸다.안에서는 필
은서우는 지금 당장이라도 소태훈을 찾아가서 따지고 싶었지만 인명진이 그녀를 막아섰다.“지금 가봐야 얻을 수 있는 건 없어요. 소태훈 씨는 중환자실에 있고 아직 깨어나지도 않았어요. 가봤자 괜히 문제만 생길 거예요.”그 말을 듣고 나서야 은서우는 감정을 가라앉혔다.지금 그녀의 모든 행동은 감시당하고 있었다. 병원 안의 소문은 사그라졌지만 여전히 많은 시선이 은서우를 주시하고 있었고 그녀는 아직 혐의를 벗지 못했다.소태훈이 깨어나기 전까지 그녀는 가까이 갈 수조차 없었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또다시 그녀에게 책임이 돌아갈 테니 말이다.은서우는 다시 자리에 앉아 얼굴을 감싸 쥐고 잠시 침묵했다.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인명진을 바라보면서 말했다.“고마워요. 제가 너무 경솔했어요. 명진 씨가 있어서 다행이에요.”그 말에 인명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더니 잠시 후 그가 입을 열었다.“제가 직접 고른 조수인데 당연히 도와야죠. 걱정 마요. 단순히 간단한 검사만 하면 알 수 있으니까요.”하지만 그 단순한 일조차 쉽지는 않았다. 소태훈에게 간단한 검사를 하겠다는 말을 듣자 연희진이 필사적으로 막아섰다.“우리 아들 그런 거 절대 못 해요. 은서우, 너 양심이 있으면 이 의사를 당장 돌려보내!”은서우는 미간을 찌푸렸다.“원장님은 단순히 검사를 하려는 것뿐이에요. 다른 의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막으시는 거죠?”“내 아들이 이렇게 된 건 다 너 때문이야! 네가 무슨 말을 한들 누가 믿겠어?”연희진은 인명진을 돌려보내기 싫어하는 그녀의 태도에 화가 난 듯, 갑자기 주변 사람들에게 소리쳤다.“다들 여기 봐요! 이 아이예요. 우리 집에서 거둬들여 키운 양녀인데 며칠 전 우리 아들을 병원에 보냈죠.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모자라서 지금 또 저희를 해치려 하고 있어요!”그녀의 큰 목소리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누군가 은서우를 알아보고 손가락질했다.“저도 알아요. 진짜 그런 일이 있었거든요. 그냥 두 마디 정도 말을 걸었을 뿐인데 기분 나쁘다고 그
은서우는 어릴 때부터 소씨 가문 사람들에게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소태훈도 계속 그녀에게 장난만 쳤다. 그땐 아직 어렸기에 독한 마음을 먹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괴롭힌 건 사실이었다.흔히 말하는 인간 말종들은 크면서 갑자기 망가지는 게 아니라 애초부터 썩어 있었던 것일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어릴 때부터 은서우는 늘 그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소태훈은 가끔 일부러 그녀를 문밖에 가둬놓기도 했고 때론 그녀의 숙제를 일부러 잃어버려서 제출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결국 온서우는 학교에서 벌을 받고 집에 돌아와서 또 소상태에게 또 혼났다. 창피한 짓 하지 말라며 말이다.“서우 씨를 그렇게 대했다고요?”듣기만 해도 인명진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은서우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어릴 때는 이해 하지 못했어요. 크고 나서는 알게 되었죠. 제가 친자식이 아니라서 그랬다는 걸 말이에요.”인명진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그건 그냥 핑계예요. 애초에 제대로 키울 생각이 없었으면 왜 굳이 입양했어요?”은서우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도 그게 궁금했던 것이다. 십수 년 동안, 이 의문은 그녀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내가 싫으면서 왜 입양한 걸까...’인명진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차갑고 창백한 그의 얼굴이 조명 아래서 옥처럼 빛났다. 긴 손가락은 마디마디가 뚜렷했고 그가 손가락을 움직이는 모습이 눈길을 사로잡았다.은서우가 무의식적으로 그의 손을 쳐다보던 순간, 갑자기 인명진이 툭 던지듯 물었다.“그래서 아직도 그 사람들이랑 얽힐 생각이에요? 친자식이 아니라는 걸 알았는데 친부모를 찾아볼 생각은 안 해봤어요?”그 말을 듣자, 은서우의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역시 찾고 싶은 거겠지.’인명진은 속으로 생각했다.그는 책상 위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무심한 듯 말했다.“그날 있었던 일을 자세히 말해봐요.”인명진이 말하는 그날이란 소태훈이 사고를 당하기 전의 상황이었다.은서우는 시간을 들여 그날의 일을 하나하나 설명했다.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소상태 등이 돌아간 후에도 이 사건은 사그라지지 않았다.아직 사실 여부가 밝혀지지 않았지만 대다수 사람들 눈에는 은서우가 이미 가해자로 보였다. 순식간에 그녀는 고립된 존재로 되었고 그녀를 예전처럼 대해 주는 사람은 오직 인명진뿐이었다.병원에서 누군가 험담을 늘어놓으면 인명진이 직접 나서서 막았고 그들에게 경고까지 해주었다.“병원은 환자를 치료하는 곳이지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곳이 아니에요. 떠들고 싶으면 다른 곳으로 가시죠.”그제야 사람들의 험담이 조금 수그러들었다....인명진은 사무실로 돌아왔다.은서우는 눈가를 적신 눈물을 훔치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평소처럼 미소를 지어 보였다.“원장님, 믿어 주셔서 감사해요.”인명진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그는 말했다.“웃고 싶지 않으면 억지 미소 짓지 마세요.”그 말을 들은 은서우는 순간 멍해졌다.“억지로 웃는 거 별로예요.”“죄송해요, 저...”은서우는 무의식적으로 사과하려 했다.최근 들어 그녀는 무슨 일이 생기든 먼저 사과부터 하는 습관이 생겨버렸다. 자기도 모르게 굽신거리는 것이었다.그걸 알아챈 인명진은 진지하고 단호하게 말했다.“저한테 미안해할 거 없어요. 서우 씨가 가장 미안해야 할 사람은 서우 씨 본인이에요. 다른 사람들이 그런 소문을 퍼뜨리는데 왜 반박하지 않으세요?”은서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 후에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말했다.“설명해 봤자 아무도 믿지 않더라고요.”거짓 소문은 쉽게 퍼지지만 사실을 바로잡는 건 생각보다 많이 힘들었다.루머를 퍼뜨리는 사람들은 입을 열기만 하면 거짓말을 했고 진실이 무엇인지는 애초에 관심도 없었다.이번 일도 마찬가지였다.모두가 배은망덕한 인간이라며 그녀를 욕했다.소씨 가문에서 그녀를 입양한 것을 두고 눈이 멀었다면서, 어리석은 선택이었다면서 떠들었다.하지만 아무도 그녀가 소씨 가문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소씨 가문 사람들이 그녀를 어떻게 대했는지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세상의 모든 악의가
병원에 도착한 인명진은 시끄러운 소리에 이끌려 은서우가 있는 사무실로 향했고 눈앞에 펼쳐진 아수라장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며 빠른 걸음으로 연희진한테 다가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저는 이병원 원장입니다. 일단 진정하시고 너무 위험하니까 거기서 내려오시죠. 이번 일에 대해서는 철저한 조사를 거친 뒤 전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충동적으로 행동하시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상황이 더 악화할 수도 있어요.”인명진은 말하면서 옆에 있던 보안 요원에게 눈짓했고 그들은 창문 옆으로 살며시 다가가 연희진을 구할 기회를 살폈다.이어서 인명진은 몸을 돌려 소상태를 보며 말했다.“그리고 소 선생님, 어떻게 된 일인지 제대로 조사도 하기 전에 그런 조건으로 은 선생님을 협박하는 건 아니죠. 일방적으로 한쪽 말만 듣고 잘 잘못을 확정할 수는 없어요. 이는 분명히 법의 공정 원칙에도 어긋나는 일이에요.”소상태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인 원장님, 은서우한테 속지 마세요. 은서우가 우리 아들을 저렇게 만든 걸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요.”인명진은 냉정하게 말했다.“지금 소 선생님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병원에도 절차라는 게 있어요. 경찰들도 수사할 테니 진상은 분명히 밝혀지겠죠. 은 선생님은 지금까지 병원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었고, 아무 증거 없이 함부로 은 선생님 잘못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어요.”인명진은 또 병원 임원들을 향해 말했다.“여러분들도 너무 당황하지 마시고 경찰들이 와서 제대로 조사하기 전에는 맹목적으로 은 선생님을 비난하지도 마세요. 경찰 조사에 적극 협조하시고 남은 건 조사 결과가 나오면 다시 의논하죠.”임원들은 여전히 불만이 남아 있었지만, 병원장의 말이라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인명진은 이어서 소태훈의 부모를 향해 말했다.“소 선생님 그리고 사모님, 부모로서 지금 심정이 어떨지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극단적인 방법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요. 제가 직접 이 일에 관여할 거고 전문적인
은서우도 뒤따라가려는데 간호사가 그녀의 팔을 잡으며 엄숙하게 말했다.“은 선생님, 아직은 따라가면 안 되죠.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부터 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정말 제가 밀친 게 아니에요. 혼자 병이 발작한 거라고요. 믿어주세요.”은서우의 말에도 간호사는 고개만 저을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이때 보안팀 요원들도 현장에 도착했고 은서우를 사무실로 데려가 추가 처리를 기다렸다.은서우는 두 손으로 팔을 꽉 끌어안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 임원진들이 속속 도착했고, 그들은 어두운 표정으로 은서우를 바라보며 면전에 대고 욕설을 퍼부었다.“은 선생님, 의사이신 분이 어떻게 병원에서 이런 일을 저지를 수가 있어요? 이건 명백히 병원 규정과 직업윤리에 어긋나는 행실이에요.”“이유가 뭐였든 간에 은 선생님의 이런 행동은 병원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어요.”은서우는 모든 걸 설명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많은 비난 속에 묻힐 수밖에 없었고 어쩔 수 없이 그냥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삼켰다.은서우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소상태와 연희진은 아들의 소식을 듣고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두 사람은 급하게 병실로 뛰어 들어갔고, 의식을 잃은 소태훈을 본 연희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소상태는 노기등등한 표정으로 은서우가 있는 사무실로 들어가 그녀를 보자마자 서슬이 퍼런 눈빛으로 달려들어 때리려 했지만, 다행히 보안 요원이 달려와 그를 말렸다.“내 아들을 저렇게 만들어 놓고 무사할 줄 알아? 죽기보다 못하게 만들어 줄 거야!”소상태는 은서우를 향해 으르렁거렸다.“이 쓸모없는 년아, 내 아들을 저렇게 만들어 놓고 이제 어떡할래!”뒤따라온 연희진은 목이 쉬도록 고함을 지르며 은서우를 잡으려고 허공에서 손을 허우적거렸다.은서우는 울며 말했다.“제가 밀친 게 아니라니까요. 갑자기 병이 발작해서 쓰러진 걸 왜 제 탓으로 돌리는 거예요!”하지만 은서우의 말을 전혀 들을 생각이 없었던 소상태는 연희진보다 다소 진정된
“소연아, 너 그 말 들었어? 저쪽 병동에 있던 까다로운 환자 한 명이 오늘 의료진들한테 고맙다고 인사를 했대. 정말 해가 서쪽에서 뜬 거 아닌가 했다니까?”김소민의 신기하다는 듯한 말에 박소연이 웃으며 답했다.“우리가 정성스럽게 돌봐줘서 감동하였나 봐. 그건 그렇고, 은 선생님이 회진하러 간 지 한참 지나지 않았어? 왜 아직도 안 오지? 평소 같으면 이 시간에는 돌아왔을 텐데.”김소민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말했다.“상태가 안 좋은 환자가 있으면 좀 걸릴 수도 있지. 은 선생님이 워낙 책임감도 강하고 뭐든 열심히 하시잖아. 너도 잘 알면서.”“그건 그렇지만 너무 오래 지난 것 같은데? 왜 나는 이렇게 불안하지?”박소연은 불안한 마음에 눈썹을 찡그렸다.“아이고, 쓸모없는 걱정하고 있어. 곧 돌아오시겠지. 병원이 이렇게 큰데 아는 사람을 만나서 얘기를 나눌 수도 있잖아.”김소민은 박소연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은서우는 돌아오지 않았고 불안감이 더욱 커졌던 박소연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걱정돼서 안 되겠어. 내가 가볼게. 이 밤중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면 어떡해.”진지한 박소연의 태도에 김소연도 즉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그럼 같이 가보자.”두 사람이 간호사 스테이션을 나와 얼마 지나지 않자, 비상계단 쪽에서 은서우의 목소리가 섞인 듯한 시끄러운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김소민과 박소연은 서로 눈길을 마주치더니 즉시 계단 쪽으로 달려가며 소리쳤다.“은 선생님!”두 간호사의 목소리를 들은 은서우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소리를 질렀다.“사람 살려요! 저 여기 있어요!”은서우는 자신을 잡아당기는 소태훈의 손을 있는 힘껏 뿌리치고 동료들을 향해 달려갔다.겨우 소태훈한테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던 찰나 뜻밖의 사고가 벌어졌다.은서우의 뿌리치는 힘에 몸의 균형을 잃은 소태훈은 뒤로 몇 걸음 비틀거리더니 곧바로 바닥에 쓰러져 입에 거품을 물고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막 계단 입구에 도착하던 간호사들은 은서우 옆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