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유는 부랴부랴 눈물을 닦아냈다. 그리고 그나마 멀쩡한 표정으로 여이현을 바라보며 말했다.“오늘 많이 마셨어요. 얼른 다시 쉬세요.”여이현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다시 물었다.“너 방금 울었어?”온지유는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숙였다.“눈에 먼지가 들어가서요.”“도대체 왜 울었는데?”온지유는 쉽게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그녀가 눈물을 흘렸다는 것은 아주 심각한 일이라는 뜻이다.여이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아까 보니까 이현 씨 몸에 상처가 너무 많더라고요. 저는 전혀 몰랐어요.”여이현은 잠깐 멈칫하더니 기분 좋은 듯 말했다.“날 걱정해 준 거야?”여이현의 말에 그녀는 심장이 쿵 내려앉더니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비밀을 들킨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몸에 흉터가 이렇게 많은 건 처음 봐서요. 많이 아팠죠.”그녀는 바늘에 찔려도 한참 낑낑대는 사람이었다. 이 정도 흉터가 남을 상처라면 견디지 못했을 수도 있다.여이현의 눈빛은 물씬 부드러워졌다. 냉정함과 거리감도 보아낼 수 없었다.“내 흉터를 보고 그런 말을 한 건 네가 처음이야.”그는 입꼬리는 올리며 피식 웃었다. 자신을 향한 비웃음인 것 같았다.온지유는 머리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쳤다. 왠지 모를 씁쓸함을 보아낸 그녀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그럴 리가요. 이현 씨 흉터에 속상해하는 사람 많았을 거예요. 할아버님도 어머님도... 이현 씨를 걱정하는 가족분들이 많잖아요.”온지유는 일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 그녀는 여씨 가문의 모두가 그를 아껴준다고 생각했다.애초에 그가 오냐오냐 자랐다면 이런 상처를 입을 일이 없었다. 총알이 남긴 흉터는 그녀 때문이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흉터는 어떻게 왔단 말인가?온지유는 약간 놀라웠다. 눈빛에도 의혹이 담기기 시작했다.그녀에게 들킨 이상 여이현은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었다. 그는 셔츠를 완전히 벗으며 흉터는 다시 드러냈다.그 모습에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았던 온지유는 입술을 깨물었다. 여이현은 미간을
여이현은 자신을 무방비하게 드러냈다. 등에도 험악한 흉터가 잔뜩 남아 있었고 조각 같은 몸매에 색다른 느낌을 줬다.온지유는 그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누가 여씨 가문의 여이현에게 이런 흉터가 있을 줄 알겠는가?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등을 어루만졌다. 그는 잠깐 멈칫하기만 할 뿐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손길을 가만히 느끼던 그는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안 아파.”흉터는 온지유의 심장에 거듭 꽂혔다. 그녀는 말없이 주먹을 꽉 쥐었다.여이현이 말하기 싫어하는 걸 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것이 확실했다. 그녀가 기억하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뒤로 물러났다. 너무나도 낯설게 느껴지는 여이현에 그가 바로 기억 속의 ‘석이’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여희영은 여진숙을 대놓고 싫어했다. 심지어 여이현은 자신이 직접 키웠으니, 여진숙이 뭐라고 할 자격 없다고 했다. 여진숙은 어머니로서 여이현에게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이것 또한 이상하지 않은가?어쩌면 여진숙이 여이현에게 무심했고, 그래서 여이현이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만약 여이현이 얼마나 잘났는지는 중년에 가서야 알았다면 최근 갑자기 잘해주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머릿속이 복잡했던 온지유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이만 씻으러 가요. 술 냄새가 너무 심해요.”“알았어.”여이현은 무덤덤하게 셔츠를 챙겨 들고 샤워하러 갔다. 밖에서 온지유는 그의 잠옷을 챙겨서 욕실 앞에 내려놓았다.온지유는 그를 챙겨주는 데 익숙했고, 여이현도 그녀에게 챙김을 받는 데 익숙했다. 때로는 그녀가 이혼하고 떠난 다음 여이현이 적적해하지는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만약 그를 완벽하게 챙겨줄 수 있는 다른 여자가 나타난다면 그녀 따위는 금방 잊을지도 모른다. 지구는 어느 한 사람 때문에 돌지 않고, 여이현도 그녀 없이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온지유도 이만 잠옷을 들고 다른 욕실에서 씻고 돌아왔다. 그녀가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았을 때 여이현이 샤워를 끝내
여이현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던 온지유는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부드러운 키스는 소유욕으로 인해 점점 거칠어졌다.온지유는 막연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여이현이 그녀의 옷을 벗기는 순간 후딱 정신 차리고 아랫배를 감쌌다. 다른 한 손은 있는 힘껏 그를 밀어냈다.“안 돼요!”한창 빠져있던 여이현도 밀려나면서 정신을 차렸다. 온지유는 두려운 눈빛으로 옷을 꽉 잡고 있었다. 그와 관계 맺는 것을 진심으로 싫어하는 모습이었다.욕망으로 불타오르던 마음은 차갑게 식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너 지금 이러는 거 나 대표 때문이야? 석이라는 자식 때문이야?”여이현은 그녀가 당연히 다른 남자 때문에 자신을 거절한다고 생각했다.반대로 온지유는 말없이 아랫배를 매만졌다. 임신한 이상 충동적으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 자칫 한 생명이 위험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여이현이 아무리 싸늘한 표정을 짓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술에 취했고, 이성적이지 못한 상황에 놓였기 때문이다.아이 역시 술에 취한 상태에서 생긴 것이었다. 그녀와 아이 모두 무사히 살아남기 위해서는 밀어내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그녀는 머리를 숙이며 아무런 변명이나 했다.“몸이 불편해서... 지금은 안 돼요.”이런 변명이 여이현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그도 당연히 변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눈빛에 담긴 불쾌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분위기도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그는 바로 침대에서 일어나더니 차갑게 말했다.“다른 남자를 위해 날 밀어낼 정도면 같이 잘 것도 없겠네. 난 서재에 가서 잘게.”말을 마친 여이현은 머리도 돌리지 않고 멀어져갔다. 쾅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온지유는 옷매무시를 정리하고 침대에 앉았다. 그는 자신의 배를 바라보며 천천히 쓰다듬었다. 아이를 위로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자기 자신을 위로하는 것 같기도 했다.“아가야, 아빠가 화를 낸 건 네 존재를 몰라서야. 엄마가 아직 용기 내서 말해주지 못했어. 대신 엄마가 배로 사랑해 줄게.”여이현이 아무리
온지유는 마지막 한 입까지 먹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여진숙이 자신에게 불만이 있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여이현이 그녀를 감싸줄 때마다 쌓여갔던 불만이기 때문이다.온지유는 몸을 일으키며 여진숙을 똑바로 바라봤다.“어머님은 제가 임신하는 걸 원하지 않으시죠?”예상치 못한 화제에 여진숙은 잠깐 멈칫했다.“그건 왜 갑자기 묻는 거니?”“하긴, 어머님은 노승아 씨를 좋아하니 당연히 제가 임신하는 걸 원하지 않겠죠. 이현 씨도 마찬가지예요. 저한테 임신하지 못하게 하는 약을 먹이고는 하루 종일 듣기 싫은 말만 해요.”온지유가 먼저 말을 꺼내는 것을 보고 여진숙도 더 이상 연기하지 않았다.“알면 됐다. 우리 집안에 네 피를 끌어들일 수는 없어.”이렇게 말하며 약간 득의양양해진 여진숙은 자리에 앉으면서 오만하게 말했다.“우리 이현이 좋아하는 사람은 승아야. 그런데 어떻게 널 건드릴 수 있겠니? 아버지가 미쳤지, 너 같은 애를 집안에 들이다니. 너만 아니었어도 승아가 진작 우리 집안에 들어왔을 거다.”“맞아요. 저도 다 아니까 이제 약은 주지 마세요. 줘도 안 먹을 거니까요.”차갑게 말하고 난 온지유는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의 오만한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올랐던 여진숙은 뒤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아무리 잔머리를 굴려 봤자 넌 우리 집안 애를 낳지 못해! 너한테 그럴 능력도 없겠지만 말이야! 오만하게 굴지 마. 이 집안을 떠날 때 넌 무릎 꿇고 나한테 빌게 될 테니까.”전에는 그녀가 아무리 괴롭혀도 말대꾸 한 번 안 하던 온지유였다. 하지만 이제는 여이현을 믿고 그러는 것인지 부쩍 나대기 시작했다.‘두고 봐.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여진숙은 피식 웃더니 노승아와 함께 매니큐어 받으러 갔다. 반대로 온지유는 클럽 매니저를 만나러 갔다.“왔어요, 지유 씨.”환하게 인사하는 것도 잠시 매니저는 난감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저 지유 씨한테 할 말이 있어요.”“저도 할 말이 있어요.”“지유 씨 먼저 말해요.”“지난번의 여
이 말을 듣고 여이현은 우뚝 멈춰 서며 몸을 돌렸다.“무슨 여자?”중간에서 말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배진호는 목에 칼이 닿은 것만 같았다. 도대체 부부 생활을 어떻게 했기에 아내가 남편에게 다른 여자를 찾아주는지 의아할 따름이다.더군다나 남편이라는 작자는 아내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고 결혼 사실도 밝히지 않았다. 중간에 끼인 배진호만 죽어 나가는 상황이었다.“그게... 그날 밤 대표님과 같이 있었던 여자 말입니다.”이 말을 듣자마자 여이현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온지유에게 밀려났던 일이 다시 떠올랐던 것이다.‘이렇게 다른 여자를 끌어들이고 싶었나? 도대체 얼마나 날 싫어하는 거야.’여이현의 얼굴에는 얼음이 내려앉은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한 목소리로 말했다.“알았어요. 잠깐 기다리라고 해요.”온지유가 출근해서 가방을 내려놓기 바쁘게 배진호가 걸어왔다.“온 비서님, 대표님께서 손님과 함께 휴게실에서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온지유가 못 알아챈 것을 보고 여이현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보탰다.“온 비서님이 그 여자를 데려온 거 아니에요?”온지유는 추측 가는 바가 있었지만 감히 확신하지 못했다. 그녀는 휴게실을 힐끗 보더니 부리나케 달려갔다.주소영은 가만히 휴게실에 앉아 있었다. 오늘따라 색다른 느낌을 주는 모습이었다.검은색 머리카락과 흔히 보이는 출근룩, 어딘가 불쌍해 보이는 모습은 보호 본능을 이끌었다.이런 곳에 처음 오는 주소영은 약간 불편해 보였다. 그녀는 시골 출신이다. 그리고 어릴 적부터 도시의 높은 건물을 꿈꿔왔다. 지금 그 높은 건물에 들어와서 도시를 내려보고 있다니, 이보다 더 짜릿할 수도 없었다.그녀는 두리번거리다가 문 가에 서 있는 온지유를 발견하고 먼저 인사했다.“안녕하세요, 지유 씨.”“여기는 어떻게 왔어요?”주소영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지유 씨 여기에서 일해요?”밖에 아직 사람이 있었기에 온지유는 안으로 들어가면서 문을 닫았다.“네.”주소
온지유는 머리를 돌려 주소영을 바라봤다. 주소영의 당당한 모습에 그녀마저 속을 것만 같았다.지금은 일단 할 일이 있어서 그녀는 말없이 나갔다. 그렇게 3시간이 지난 다음에도 돌아가지 못했다.이때 회의실 문이 열리고 회의를 끝낸 여이현이 밖으로 나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배진호는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대표님, 휴게실에 가보셔야 합니다.”여이현은 차가운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손목시계를 힐끗 확인한 그는 싸늘하게 웃었다.그가 휴게실에 들어갔을 때 안에는 주소영밖에 없었다. 기다리다 지친 그녀는 소파에 누워 있었다.여이현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온지유부터 찾았다. 온지유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녀가 누워 있는 소파 앞으로 가서 멈춰 섰다.피곤했던 주소영은 눈을 감고 있었다. 물론 큰일을 망칠까 봐 잠들지는 못했다. 약간의 인기척이 느껴져서 눈을 뜨자 눈앞에는 싸늘한 표정으로 그녀를 훑어보고 있는 거대한 몸집이 보였다.그녀는 잠깐 멈칫하다가 화들짝 놀라며 일어났다. 상대가 여이현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사과부터 했다.“죄송해요...”그녀는 부랴부랴 옷매무시를 정리했다. 여이현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안 했다.그녀의 습관은 온지유와 아주 비슷했다. 온지유도 잘못을 하면 일단 사과부터 했다. 그게 누구 잘못인지 따지지도 않고서 말이다.여이현이 하도 말이 없어서 주소영은 안절부절못하며 그의 구두만 바라봤다. 그러다가도 약간 궁금해서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분위기를 풀어줄 온지유가 아직도 나타나지 않은 것을 보고는 다시 화들짝 고개를 숙였다가 조심스레 물었다.“왜 아무 말도 안 하세요? 지, 지유 씨는 같이 안 왔나요?”여이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차갑게 되물었다.“온 비서가 데려온 여자가 그쪽이야?”나지막한 목소리에 주소영은 단번에 홀렸다. 그녀는 천천히 시선을 올리더니 여이현의 깊은 눈동자와 마주했다.몸을 흠칫 떤 그녀는 남자의 이목구비에 완전히 빠져서 한참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여이현이 미간을 찌푸린
주소영은 잔뜩 굳은 얼굴로 주먹을 쥐었다. 그녀가 아무 말도 안 하는 것을 보고 여이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그렇게 어려운 질문인가?”이때 온지유는 마침 부랴부랴 달려오면서 여이현의 질문을 들었다. 한발 늦은 그녀는 문손잡이를 잡았다가 다시 놓았다.주소영은 한참이나 침묵에 잠겼다. 강압적인 분위기 때문에 스트레스도 급격히 상승했다.그는 힘들게 고개를 들어서 여이현을 바라봤다. 자칫하면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나리라는 직감이 들었다.“그 호텔에... 부... 부자가 많다고 들어서요. 돈 많은 남자라도 꼬셔서 팔자 바꿀 생각으로 갔었어요.”여이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주소영을 바라보는 눈빛도 완전히 변했다.그녀의 말은 돈 받고 몸을 판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이 사회에 그런 사람이 실제로 많기도 했다.눈치 보다가 문을 연 온지유의 손에는 커피잔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여이현의 앞에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커피 드세요.”주소영의 몫도 그녀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머리를 들며 인사했다.“고마워요.”여이현은 더 이상 주소영과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낯선 사람을 쉽게 믿을 수도 없으니 말이다.그는 말없이 앞에 놓여 있던 자료를 펼쳐봤다. 그 속에는 CCTV 화면을 캡처 한 사진이 들어 있었다.사진 속의 여자는 주소영과 똑같이 생겼다. 그녀가 걸어가는 방향도 스위트룸이 틀림없었다. 심지어 정리되지 않은 옷가지도 그가 기억하는 것과 같았다.자료에는 그녀에 대한 소개도 있었다. 그녀에게는 남동생 두 명이 있는 데다가 어머니가 투병 중이었는데, 남동생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급하게 돈이 필요했다.주소영은 어린 나이에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그녀는 성인이 되기 바쁘게 학교에서 자퇴하고 일하기 시작했다.전에는 어머니를 보살펴주기 위해 고향 근처에서 일했다. 하지만 돈이 점점 많이 필요하면서는 큰 도시로 올라오게 되었다. 그러다가 여이현과도 만나게 되었을 것이다.여이현은 자료를 내려놓더니 주소영을 바라보며 물었다.“돈이 필요해?”“네, 필요
주소영은 펑펑 울고 있었다. 마치 여이현과 진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처럼 말이다.의아한 기분이 들었던 온지유는 주춤거리다가 밖으로 나갔다. 밖에서 직원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구경하고 있었다.낯선 여자가 휴게실에 한참 앉아 있은 데다가, 그녀와 만난 여이현이 싸늘한 표정으로 나왔으니 말이다.“온 비서님, 안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한 동료가 물었다. 그러자 다른 동료들도 궁금한 듯 다가왔다.온지유는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렇게 궁금하면 대표님한테 직접 물으시죠.”단호한 말투에 여이현까지 언급되자 사람들은 더 이상 묻지 못했다. 그들은 조용히 흩어져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온지유는 탕비실에 들어갔다. 이 모든 일이 그녀와 연관 있는데 아닌 척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더군다나 그녀는 주소영을 끌어들일 계획을 포기했었다. 그런데도 주소영이 나타난 것이 달갑지는 않았지만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진짜 이래도 괜찮은 거 맞아? 에이, 난 몰라. 내가 데려온 사람도 아니고,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온지유는 여이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할 바에는 일을 이대로 넘기는 게 낫다고 자신을 위로했다. 여이현도 그냥 수많은 별장 중 하나를 주소영에게 주라는 뜻일 것이다.그녀는 여씨 가문의 본가와 가까운 별장에 주소영을 데려가기로 했다. 주소영은 여이현의 차에 올라탄 순간 택시와 얼마나 다른지 느꼈다.차량의 좌석은 아주 편했다. 공기도 택시처럼 탁하지 않고 시원했다. 평소 그렇게 하던 멀미도 없는 것을 봐서는 역시 비싼 물건이 달랐다.주소영은 멍하니 바깥 풍경을 바라봤다. 가는 길에도 화려함은 끝없이 펼쳐졌다. 조용한 주택가에서 들어서서는 처음 보는 가로수가 줄을 지었다. 그녀가 살던 동네와는 전혀 다른 아늑함이었다.잠시 후 차가 멈추고 온지유가 먼저 내렸다.“도착했어요.”눈앞에 펼쳐진 별장에는 예쁜 전구가 장식으로 달려 있었다. 안에 반짝이는 수영장도 있는 것을 보고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이게 여 대표님 집이에요.”“네, 들어가요.
남태건은 권다솔의 멘탈이 무너지고 아주 힘들어할 때 손을 내밀어줄 생각이었다. 그래야만 권다솔의 기억 속 그의 이미지도 뒤바뀔 것이고 철저하게 배진호를 증오하게 될 것이다.“네, 대표님. 그럼 전 이만 처리하라던 서류를 마저 하러 가겠습니다.”비서는 그의 마음이 완벽하게 이해가 가는 것은 아니었다.정말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행복할 수 있게 해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악플의 위력은 어마무시했다. 그런데 남태건은 도와주지 않고 그저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기에 비서는 남태건의 생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다만 그는 일개 비서였고 월급쟁이였던지라 그가 끼어들 처지는 아니었다.비서가 나가자 남태건은 계속하던 일을 하면서 드문드문 여론을 확인했다.그는 아직도 미적지근한 사람들의 반응에 속으로 투덜댔다. 결국 성격이 급했던 그는 자기 지갑을 열어 여론을 만들었다....한편 권씨 가문.이혼 서류 신청하고 나온 뒤 권다솔은 비록 남태건의 차를 타고 오긴 했으나 오는 도중에 내렸다.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부모님에게도 말했다.“아빠, 엄마. 오늘 이혼 신청하러 갔으니까 이혼숙려기간만 지나면 완벽하게 남이 될 거예요. 그동안 전 아파트에서 혼자 살 거니까 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다솔아, 네가 혼자 나가 살고 싶다고 해도 엄마는 반대할 생각 없어. 하지만 너 혼자 짐을 다 옮길 순 없을 테니까 엄마랑 아빠가 함께 가주마.”김영은이 먼저 그녀에게 이사를 도와주겠다고 했다.권다솔은 원래 두 사람에게 부탁할 생각이 없었다.여하간에 나이가 많기도 했고 이사 업체에 연락하며 알아서 다 잘해주었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온 것도 모자라 이사까지 부탁하면 그녀는 자신이 불효녀인 것처럼 느껴졌다.그러나 두 사람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권다솔은 계속 거절만 하면 두 사람에게 상처가 될까 봐 걱정되었기에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엄마랑 아빠는 물건을 옮기실 필요 없어요. 제가 이사 업체에 연락해주면 알아서 옮겨줄 거니까 두 분은 그냥 저랑 함께
그런 두 사람을 뒷모습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배진호였다. 배진호는 가슴이 찢어질 듯 괴로웠다.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권다솔에게 집에 가자고 하고 싶었다.하지만 지금 그에겐 그럴 자격이 없었다.“진호 씨, 전 권다솔 씨랑 같은 여자로서 잘 알아요. 권다솔 씨는 지금 새로운 남자친구를 사귀었음에도 진호 씨를 놓아주지 않으려고 해요. 전형적인 어장관리녀인 거죠.”석규리는 계속 말을 이었다.배진호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전 여자를 때리지 않아요. 하지만 계속 내 인내심의 한계에 도전한다면 지금 마지막 경고를 해두죠. 그 입 닥쳐요.”“진호 씨!”석규리는 여전히 포기할 수 없었다.배진호가 대체 왜 이토록 권다솔을 사랑하는 것인지 이해 가지 않았다.하지만 적당한 선에게 멈추어야 했다. 만약 여기서 ‘적당히'를 모르고 계속 나댔다간 배진호의 분노를 일으켜 더는 수습하지 못할 정도가 되어버릴 것이다.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떠나가는 배진호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았다.곧이어 그녀는 미리 연락해둔 언론사에 다시 연락했다.“제가 찍으라고 한 건 전부 찍었죠? 제가 하라는 대로 하세요. 일이 끝나면 약속한 남은 돈을 입금할 테니까요.”그녀가 주겠다고 약속한 금액이 꽤나 많았다. 그러니 언론사에서도 당연히 거부할 리가 없었다.빠르게 인터넷엔 권다솔의 기사가 올라오기 시작했고 심지어 영상 편집본까지 첨부되었다.영상 속의 권다솔은 가정 법원에서 나오자마자 남태건의 꽃다발을 받는 모습이었다.거기에다 일전에 남태건이 김영은에게 전송했던 사진도 석규리는 언론사 기자에게 연락해 전부 기사로 내라고 했고 얼추 타임라인까지 정리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권다솔은 네티즌들의 악플 공격을 받게 되었다.[그러니까 권다솔이라는 사람이 이혼이 끝나기도 전에 다른 남자랑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다는 거네요? 둘이서 바닷가도 가고 가정 법원에서 나온 뒤 꽃다발도 받고? 두 사람 뭐가 이렇게 급하대요?][정말 역겹네요. 설마 이혼 신청하고 나온 가정 법원 앞
“배진호 씨.”권다솔은 몸을 돌려 그를 보았다.“지금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거죠?”배진호가 입을 열기도 전에 금방 택시에서 내린 석규리가 달려오며 대신 대답했다.“당연히 전남편의 자격으로 말하는 거죠. 권다솔 씨의 이혼이 완전하게 끝난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그전까지는 기혼인 거죠. 그런 상태서 다른 남자의 장미 꽃다발을 받는다는 건 대놓고 바람을 피우겠다는 게 아닌가요?”권다솔은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지금 나더러 바람을 피운다고 한 거야?'‘그럼 배진호는? 본인들이 한 건 뭔데?!'그녀와 남태건의 사이는 떳떳했다. 여하간에 아무 짓도 하지 않았으니까. 설령 두 사람 사이에 정말로 뭔가가 있었다고 해도 유부남을 꼬신 석규리에게 입을 열 자격이 없지 않겠는가.“석규리 씨, 누가 여길 오라고 했죠?”배진호는 잔뜩 화가 난 눈길로 석규리를 보았다.‘왜 매번 석규리가 나타나서 자꾸만 내 일에 방해하는 거지!'그는 석규리를 밀쳐냈다.“그쪽이 끼어들 자리는 없으니까 당장 내 앞에서 사라져요!”“진호 씨,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이 여자가 이 남자를 만나고 다닌 게 어디 하루 이틀이겠어요? 진호 씨랑 이혼하기도 전부터 두 사람은 이렇게 만나고 다녔다고요. 아직도 모르겠어요?”석규리는 울면서 말했다.그녀는 배진호에게 보여줄 뿐 아니라 옆에 있던 연예부 기자들에게도 보여줄 생각이었다.정미진이 그녀를 이곳에 보낸 이유가 바로 둘 사이를 방해하라는 것이었다.하지만 방해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배진호는 애초에 그녀의 방해에도 넘어오지 않았다. 설령 그녀가 가정 법원 앞에서 난동을 부린다고 해도 배진호 마음속에 있는 여자는 권다솔뿐이었다.난리를 피우려면 크게 피워야 하지 않겠는가. 그녀는 이미 이곳으로 오기 전에 언론사에 연락했었다. 권다솔의 스캔들인데 어느 언론사가 마다하겠는가.“석규리 씨!”배진호는 화가 나 미칠 것 같았다.그는 사랑하는 여자가 다른 사람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을 가만히 지켜
배진호는 권다솔의 비꼬는 말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그저 죄책감만 잔뜩 들었다.“미안해요, 다솔 씨. 내가 정말 미안해요.”“아니요. 사과할 필요 없어요. 굳이 나한테 시간을 낭비할 필요도 없고. 곧 우리 차례네요. 이혼을 신청하고 절차도 끝나면 배진호 씨는 당당하게 석규리 씨랑 함께 살 수 있을 거예요.”권다솔은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녀는 배진호와 함께 신청서 제출 창구로 간 후 직원에게 말했다.“안녕하세요, 저희는 이혼 신청서를 제출하러 왔어요.”“두 분 정말로 이혼하시려고요?”직원이 절차대로 다시 한번 확인하는 질문을 했다.권다솔은 고개를 끄덕였다.배진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얼굴에 이혼하기 싫다는 말을 써놓은 것처럼 그 기분이 그대로 드러났다.이혼숙려기간이 있는 이유는 이혼율을 낮추기 위함이었다. 직원은 그런 배진호의 마음을 눈치채고 하던 행동을 멈춘 채 계속 물었다.“부부간에 성격이 안 맞아서 싸우는 일도 있죠. 이건 다 흔한 일이에요. 그래도 이혼은 피하는 게 좋을 거예요. 저도 이 일 하면서 많은 부부를 봤거든요. 대부분 이혼하고 후회해서 다시 재혼하겠다는 부부가 많아요.”“저흰 이미 결정했으니까 그냥 그대로 진행해주세요.”권다솔이 직원의 말허리를 자르며 말했다.그녀의 태도는 확고했기에 직원도 하는 수 없이 계속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이혼숙려기간은 한 달이라는 거 아시죠? 그 기간 동안 후회가 된다면 언제든 와서 취소할 수 있어요. 이혼숙려기간이 지나면 두 사람은 완전한 남이 돼요.”권다솔은 직원에게 감사 인사를 한 후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문밖으로 나가자 남태건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한 손엔 붉은 장미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너무도 눈에 거슬렸다.그녀의 뒤를 따라 나오던 온지유는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돌려 배진호를 보았다. 그리고 뭔가를 깨닫게 되었다.원래부터 두 사람 사이에 찬 바람이 쌩쌩 몰아치던 차였다. 그런데 권다솔에게 다가가려는 남자가 있으니 배진호가 권다솔의 마음
“배진호 씨.”권다솔도 자꾸만 반짝이는 그의 핸드폰을 발견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전화 오면 받으면 돼요. 어차피 우린 곧 이혼할 거니까 굳이 날 신경 쓸 필요 없어요.”이제 이혼숙려기간만 지나면 두 사람은 완전히 남이 되는 것이다.그때가 되면 서로에게 더는 신경 쓸 필요 없었다.배진호는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정미진의 전화를 너무도 받고 싶지 않았기에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네, 어머니. 무슨 일이세요?”“진호야, 이틀 동안 어디에 있었던 거니?”정미진은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배진호가 병실에서 홍경천 약재를 언급한 그 날 그녀는 얼른 남편을 집에 돌려보낸 후 배성연에겐 시간을 끌어보라고 했다.홍경천은 이미 성공적으로 처리해 버렸기에 배진호가 아무리 집안을 샅샅이 뒤져보아도 찾을 수 없었다.정미진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배진호는 그 뒤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를 보러 오지도 않았다.심지어 배성연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오늘은 배진호와 권다솔이 이혼 서류를 접수하는 날이었던지라 정미진은 어떻게든 배진호와 통화해 상황을 알아보려고 했다.“진호야, 오늘 가정 법원으로 가야 한다는 거 잊지 않았지?”“어머니, 그렇게 집요하게 전화를 거신 이유가 저한테 이 말을 해주시려고 그런 거예요? 가정 법원에 꼭 가라고요?”배진호는 이런 정미진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혼하러 온 부부도 있고 혼인 신고하러 온 커플도 있었다.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아들의 이혼을 바라며 연락하는 부모는 없었다. 정미진의 연락에 배진호는 실망을 느끼게 되었고 더는 그들과 함께 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배진호는 자신이 이런 말을 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정미진이 그의 입장을 조금만 생각해줬더라면 일이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니까.그는 마지막으로 권다솔을 보았다. 오늘이 지나면 권다솔과 다시 만나게 될 날은 한 달 뒤가 될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아마도 기회조차 없게 된다.“전 이미
별이는 아는 게임을 전부 말했지만 아이는 계속 모른다며 고개를 저었다.아이는 더는 울지 않았다. 그저 커다란 눈으로 호기심 가득 별이를 보았다.“방금 네가 말한 게임들은 어떻게 하는 거야? 난 들어본 적도 없어.”“나랑 같이 어린이집으로 들어가면 알게 될 거야. 어린이집엔 친구들이 많거든. 그럼 내가 말한 게임도 여러 번 할 수 있어.”별이는 일부러 게임 정보를 전부 말해주지 않았다. 아이를 어린이집으로 유인하기 위해서 말이다.아이는 역시나 별이의 말에 홀랑 넘어갔다.바닥에서 떼를 쓰던 아이는 일어나 별이의 손을 잡았다.“그럼 너랑 같이 들어갈래. 방금 네가 말한 게임 전부 해보고 싶어!”아이의 부모들은 그제야 마음이 놓여 온지유에게 다가가 감사 인사를 하며 별이를 칭찬했다.“두 아이는 같은 반 친구일 뿐인걸요. 앞으로 아마 절친한 친구가 될 것 같으니까 그렇게 고마워하지 않으셔도 돼요.”온지유는 어린이집으로 들어가는 별이의 뒷모습을 보았다. 어딘가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그녀와 여이현은 별이를 아주 잘 키웠다.두 아이가 어린이집으로 들어가 더는 모습이 보이지 않자 온지유는 그제야 차에 올라탄 뒤 가정 법원으로 가자며 기사에게 말했다.조금 뒤면 배진호와 만날 생각에 권다솔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긴장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두 사람은 이미 며칠 동안 만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배진호가 그간 석규리와 함께 지낸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게다가 정미진과 배상준은 배진호와 석규리가 결혼하길 바랐으니 아마 중간에서 계속 이어주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녀의 부모님이 그녀와 남태건을 이어주려는 것처럼 말이다.어린이집에서 가정 법원으로 가는 길이 권다솔에겐 한 세기가 지나는 것처럼 느리게 느껴졌다. 드디어 차가 멈춰 섰다.온지유는 그녀와 함께 차에서 내렸다.두 사람은 가정 법원 앞에서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배진호가 나타났다. 그는 혼자였다.“다솔 씨, 오랜만이에요.”권다솔을 본 순간 배진호는 눈시울이 붉어졌다.두 사람은
“흥, 말만 잘하지.”온지유는 그를 살짝 째려본 뒤 그릇을 들고 주방에서 나갔다.만들어 둔 음식을 식탁에 내려놓자마자 별이를 불렀다.“별아, 아침밥 완성되었으니까 얼른 손 씻고 와. 손 씻고 먹는 거야.”“엄마, 전 이미 손도 씻고 왔어요.”별이는 손을 들어 온지유에게 보여주었다.“어린이집 선생님이 저한테 손을 깨끗하게 씻는 방법을 가르쳐줘서 깨끗하게 씻고 왔어요.”“별이 정말 말했네! 우리 별이 이젠 어른이 다 되었네!”온지유는 별이를 안아 의자에 앉힌 뒤 달걀을 까주었다.여이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우유를 꺼내 권다솔의 컵에 따라주었다.“고마워요, 대표님.”권다솔은 얼른 감사 인사를 전했다.여이현은 그녀의 앞에서 배진호의 이름을 꺼내지 않았다.“뭘요. 얼른 들어요.”아침을 먹는 동안 권다솔은 아주 조용했다.그녀는 눈앞에서 웃으며 즐겁게 아침을 먹는 세 사람을 보았다. 부러움이 넘쳐 흘러나올 것 같았다.예전에 그녀도 배진호와 사이가 좋았을 때 이렇게 서로 마주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었었다. 특히 임신했을 때 두 사람의 감정은 극에 달했다.만약 정미진이 두 사람 사이를 방해하지 않았다면 이미 아기를 낳고 눈앞에 있는 온지유 가족처럼 단란하게 지냈을 것이다.하지만 세상엔 만약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미 일은 벌어졌고 상처를 받았으며 두 사람의 결말은 이것뿐이었다.오늘 아침 여이현은 회사에 출근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별이와 온지유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권다솔은 온하윤을 돌보는 것을 자처했다.품에 안은 아기를 보다가 거실에서 웃고 떠드는 세 사람을 보니 그녀는 마치 남의 행복을 구경하러 온 방청객 같았다.온하윤이 졸고 있자 권다솔은 온하윤을 다시 아기 흔들의자에 내려놓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그녀는 방에서 온 오후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을 먹을 때 즈음에야 나왔다.온지유가 묻자 권다솔은 대충 핑계를 댔다.“이틀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거든요. 너무 졸려서 그냥 잤어요.”저녁을 먹은 뒤 그녀는 계속
물론 권용민에게 사심도 있었다.만약 권다솔이 집을 나가 혼자 살게 되면 그들이 남태건과 이어줄 방법이 없지 않겠는가.“아빠, 그러면 제가 매일 집에 들르면 되는 거잖아요. 아니면 주방장이라도 보내서 하루 세 끼를 먹게 하면 되잖아요. 그러니까 허락해 주세요. 전 기분 전환이 필요해요.”권다솔의 요구에 권용민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그날 밤 권다솔은 편히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침대는 편했지만,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드는 일이 많았다.다음 날 아침 여이현은 온지유와 함께 아침을 만들었고 권다솔의 몫도 만들어 주었다.“지유야, 난 아무리 생각해도 배진호가 바람을 피웠다고 생각 안 해. 두 사람이 이렇게 된 거엔 분명 오해가 있을 거야.”온지유가 만든 음식을 식탁으로 가져가려던 때 여이현이 말했다.사실 온지유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사람은 사이가 아주 좋았기 때문이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이렇게 이혼하는 건 아쉬운 일이었다.하지만 그녀는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몰랐다.“다솔 씨는 금방 유산했어. 지금 심신이 힘든 상태라 같은 여자인 나도 지금 다솔 씨가 얼마나 힘든지 알 수 있어. 그래서 난 설득하기가 조금 어려워.”“그럼 내가 가서 배진호한테 물어봐? 일단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고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오해가 있는지 파악하는 거야. 그러면 두 사람을 더 정확하게 도와둘 수 있을 거야.”“아니야, 됐어. 일단 연락하지 마.”온지유는 곰곰이 생각했다.어차피 내일 그녀는 별이를 어린이집으로 데려다줘야 했기에 돌아오는 길에 권다솔과 함께 가정 법원으로 갈 생각이었다.그때가 되면 배진호와 만나게 될 것이고 직접 얼굴 보며 물어보는 것이 전화 통화해서 묻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나도 석규리라는 사람이 궁금해. 어떻게 생겼는지도 궁금하고. 대체 왜 자기가 내연녀라는 거 알면서도 기꺼이 자처하는 지도 궁금해.”석규리를 언급하면서 온지유는 미간을 구겼다.세상에 자기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연녀를 자처하는 여자는
그녀의 결혼 생활은 이미 파탄이 났기에 여이현과 온지유만큼은 행복하게 이어가길 바랐다.“그럼 저녁엔 뭐 좀 먹었어요?”온지유는 권다솔이 걱정되었다.조금 전 권다솔이 엄청 힘들어했던 모습이 여전히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녀의 집으로 온 이상 손님이지 않은가.손님을 그냥 방치할 수는 없었다.권다솔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걱정하지 말아요. 집에서 뭘 좀 먹고 왔어요. 저도 어른인데 당연히 몸 챙겨야죠.”“그럼 됐어요. 혹시라도 배가 고프게 되면 이모님한테 말씀드리면 돼요. 그럼 이모님이 야식거리라도 만들어 주실 거예요.”온지유는 다시 한번 당부했다.그러고 난 후 권다솔을 손님방으로 안내했다. 손님방은 아주 컸고 안에는 샤워실과 드레스룸도 있었다.“고마워요.”권다솔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온지유가 나간 뒤 권다솔은 혼자 방 안에 머물고 있었다.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자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얼굴로 불어왔다.이때 핸드폰이 울렸다. 권용민의 번호였다.권다솔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말을 하기도 전에 벌써 눈시울이 붉어졌다.“다솔아, 거기서 잘 지내고 있는 거니? 아빠가 이미 실력 좋은 경호원으로 뽑아뒀으니까 내일이면 도착할 거다. 그리고 주방장도 알아봐 뒀어. 남의 집이라고 해도 절대 끼니는 거르면 안 된다. 알겠지? 어떻게든 몸조리를 잘해. 아빠는 그래도 우리 딸이 건강하던 모습이 좋으니까.”권용민은 세심하게 당부했다.권다솔은 그의 걱정 가득한 목소리에 목이 메어왔다.“아빠,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돼요. 전 그냥 며칠만 지내다가 갈 거예요. 월요일에 이혼 절차가 끝나면 다시 돌아갈 거예요.”“목소리가 왜 그래? 그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아빠가 지금 바로 갈까?”권용민은 울먹이는 그녀의 목소리에 멍해졌다.권다솔이 온지유의 집에서 며칠 지내겠다고 했을 때 말리지 않은 이유는 권다솔이 기분 전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동의한 것이었다.하지만 지금 그는 생각이 바뀌었다.아빠로서 딸이 우는 목소리를 듣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