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으로 나온 배진호는 온지유를 흔들어 깨웠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왜 그래요?”“대표님이 술을 많이 마셨나 봐요.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아요.”온지유는 황급히 여이현의 상태를 체크했다. 그는 조금 전의 자세 그대로 앉은 채 곤히 잠들었다.평소에는 한 번도 이런 적 없으니 진짜 술에 취했을지도 모르겠다. 온지유의 기억 속에는 이토록 곤히 잠든 그의 모습이 없었다.어느샌가 집 앞에 도착한 것을 보고 온지유가 말했다.“제가 사람을 불러서 대표님을 부축할게요. 시간이 늦었으니 배 비서님은 얼른 돌아가서 쉬세요.”순간 정신을 차린 온지유는 빠르게 움직였다.“네, 수고하세요.”차에서 내린 온지유는 도우미를 불러 여이현을 부축했다. 그렇게 그를 침대에 눕힌 다음 온지유는 힘이 완전히 빠져나갔다.침대에 옮겨질 때까지 눈 한 번 뜨지 않은 남자를 보고 그녀는 신발에 정장 외투까지 벗겨줬다. 그의 몸에서는 짙은 술 냄새가 나고 있었다.‘정말 많이 마셨나 보네.’이때 여이현이 뒤척이며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온지유는 배를 그의 얼굴에 댄 채로 꼼짝 못 하게 되었다.지금 그녀의 무릎에 누워 있는 여이현에게서 평소의 예리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마치 온기를 탐하는 어린아이와 같았다. 누가 이 아이를 한 회사 대표로 보겠는가?온지유는 손을 올려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손길을 그의 콧대를 타고 내려갔다.‘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것도 잠시 그녀는 금방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따듯한 물을 받아와서 그의 몸을 닦아줬다.그녀는 차분하게 셔츠에 바지까지 벗기고, 따듯한 수건으로 몸을 닦아줬다. 하지만 어느 순간 멈춰 서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어두운 조명을 빌어 그녀는 침대 가에 앉았다. 여이현의 몸에는 흉터가 아주 많았다. 직접적으로 몸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 이제야 발견했다.‘전에는 왜 한 번도 볼 생각을 안 했을까. 이현 씨 몸에 흉터가 이렇게 많았다니...’복부에도 흉터가 있는 것을 보
온지유는 부랴부랴 눈물을 닦아냈다. 그리고 그나마 멀쩡한 표정으로 여이현을 바라보며 말했다.“오늘 많이 마셨어요. 얼른 다시 쉬세요.”여이현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다시 물었다.“너 방금 울었어?”온지유는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숙였다.“눈에 먼지가 들어가서요.”“도대체 왜 울었는데?”온지유는 쉽게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그녀가 눈물을 흘렸다는 것은 아주 심각한 일이라는 뜻이다.여이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아까 보니까 이현 씨 몸에 상처가 너무 많더라고요. 저는 전혀 몰랐어요.”여이현은 잠깐 멈칫하더니 기분 좋은 듯 말했다.“날 걱정해 준 거야?”여이현의 말에 그녀는 심장이 쿵 내려앉더니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비밀을 들킨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몸에 흉터가 이렇게 많은 건 처음 봐서요. 많이 아팠죠.”그녀는 바늘에 찔려도 한참 낑낑대는 사람이었다. 이 정도 흉터가 남을 상처라면 견디지 못했을 수도 있다.여이현의 눈빛은 물씬 부드러워졌다. 냉정함과 거리감도 보아낼 수 없었다.“내 흉터를 보고 그런 말을 한 건 네가 처음이야.”그는 입꼬리는 올리며 피식 웃었다. 자신을 향한 비웃음인 것 같았다.온지유는 머리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쳤다. 왠지 모를 씁쓸함을 보아낸 그녀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그럴 리가요. 이현 씨 흉터에 속상해하는 사람 많았을 거예요. 할아버님도 어머님도... 이현 씨를 걱정하는 가족분들이 많잖아요.”온지유는 일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 그녀는 여씨 가문의 모두가 그를 아껴준다고 생각했다.애초에 그가 오냐오냐 자랐다면 이런 상처를 입을 일이 없었다. 총알이 남긴 흉터는 그녀 때문이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흉터는 어떻게 왔단 말인가?온지유는 약간 놀라웠다. 눈빛에도 의혹이 담기기 시작했다.그녀에게 들킨 이상 여이현은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었다. 그는 셔츠를 완전히 벗으며 흉터는 다시 드러냈다.그 모습에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았던 온지유는 입술을 깨물었다. 여이현은 미간을
여이현은 자신을 무방비하게 드러냈다. 등에도 험악한 흉터가 잔뜩 남아 있었고 조각 같은 몸매에 색다른 느낌을 줬다.온지유는 그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누가 여씨 가문의 여이현에게 이런 흉터가 있을 줄 알겠는가?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등을 어루만졌다. 그는 잠깐 멈칫하기만 할 뿐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손길을 가만히 느끼던 그는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안 아파.”흉터는 온지유의 심장에 거듭 꽂혔다. 그녀는 말없이 주먹을 꽉 쥐었다.여이현이 말하기 싫어하는 걸 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것이 확실했다. 그녀가 기억하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뒤로 물러났다. 너무나도 낯설게 느껴지는 여이현에 그가 바로 기억 속의 ‘석이’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여희영은 여진숙을 대놓고 싫어했다. 심지어 여이현은 자신이 직접 키웠으니, 여진숙이 뭐라고 할 자격 없다고 했다. 여진숙은 어머니로서 여이현에게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이것 또한 이상하지 않은가?어쩌면 여진숙이 여이현에게 무심했고, 그래서 여이현이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만약 여이현이 얼마나 잘났는지는 중년에 가서야 알았다면 최근 갑자기 잘해주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머릿속이 복잡했던 온지유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이만 씻으러 가요. 술 냄새가 너무 심해요.”“알았어.”여이현은 무덤덤하게 셔츠를 챙겨 들고 샤워하러 갔다. 밖에서 온지유는 그의 잠옷을 챙겨서 욕실 앞에 내려놓았다.온지유는 그를 챙겨주는 데 익숙했고, 여이현도 그녀에게 챙김을 받는 데 익숙했다. 때로는 그녀가 이혼하고 떠난 다음 여이현이 적적해하지는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만약 그를 완벽하게 챙겨줄 수 있는 다른 여자가 나타난다면 그녀 따위는 금방 잊을지도 모른다. 지구는 어느 한 사람 때문에 돌지 않고, 여이현도 그녀 없이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온지유도 이만 잠옷을 들고 다른 욕실에서 씻고 돌아왔다. 그녀가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았을 때 여이현이 샤워를 끝내
여이현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던 온지유는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부드러운 키스는 소유욕으로 인해 점점 거칠어졌다.온지유는 막연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여이현이 그녀의 옷을 벗기는 순간 후딱 정신 차리고 아랫배를 감쌌다. 다른 한 손은 있는 힘껏 그를 밀어냈다.“안 돼요!”한창 빠져있던 여이현도 밀려나면서 정신을 차렸다. 온지유는 두려운 눈빛으로 옷을 꽉 잡고 있었다. 그와 관계 맺는 것을 진심으로 싫어하는 모습이었다.욕망으로 불타오르던 마음은 차갑게 식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너 지금 이러는 거 나 대표 때문이야? 석이라는 자식 때문이야?”여이현은 그녀가 당연히 다른 남자 때문에 자신을 거절한다고 생각했다.반대로 온지유는 말없이 아랫배를 매만졌다. 임신한 이상 충동적으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 자칫 한 생명이 위험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여이현이 아무리 싸늘한 표정을 짓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술에 취했고, 이성적이지 못한 상황에 놓였기 때문이다.아이 역시 술에 취한 상태에서 생긴 것이었다. 그녀와 아이 모두 무사히 살아남기 위해서는 밀어내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그녀는 머리를 숙이며 아무런 변명이나 했다.“몸이 불편해서... 지금은 안 돼요.”이런 변명이 여이현에게 통할 리가 없었다. 그도 당연히 변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눈빛에 담긴 불쾌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분위기도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그는 바로 침대에서 일어나더니 차갑게 말했다.“다른 남자를 위해 날 밀어낼 정도면 같이 잘 것도 없겠네. 난 서재에 가서 잘게.”말을 마친 여이현은 머리도 돌리지 않고 멀어져갔다. 쾅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온지유는 옷매무시를 정리하고 침대에 앉았다. 그는 자신의 배를 바라보며 천천히 쓰다듬었다. 아이를 위로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자기 자신을 위로하는 것 같기도 했다.“아가야, 아빠가 화를 낸 건 네 존재를 몰라서야. 엄마가 아직 용기 내서 말해주지 못했어. 대신 엄마가 배로 사랑해 줄게.”여이현이 아무리
온지유는 마지막 한 입까지 먹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여진숙이 자신에게 불만이 있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여이현이 그녀를 감싸줄 때마다 쌓여갔던 불만이기 때문이다.온지유는 몸을 일으키며 여진숙을 똑바로 바라봤다.“어머님은 제가 임신하는 걸 원하지 않으시죠?”예상치 못한 화제에 여진숙은 잠깐 멈칫했다.“그건 왜 갑자기 묻는 거니?”“하긴, 어머님은 노승아 씨를 좋아하니 당연히 제가 임신하는 걸 원하지 않겠죠. 이현 씨도 마찬가지예요. 저한테 임신하지 못하게 하는 약을 먹이고는 하루 종일 듣기 싫은 말만 해요.”온지유가 먼저 말을 꺼내는 것을 보고 여진숙도 더 이상 연기하지 않았다.“알면 됐다. 우리 집안에 네 피를 끌어들일 수는 없어.”이렇게 말하며 약간 득의양양해진 여진숙은 자리에 앉으면서 오만하게 말했다.“우리 이현이 좋아하는 사람은 승아야. 그런데 어떻게 널 건드릴 수 있겠니? 아버지가 미쳤지, 너 같은 애를 집안에 들이다니. 너만 아니었어도 승아가 진작 우리 집안에 들어왔을 거다.”“맞아요. 저도 다 아니까 이제 약은 주지 마세요. 줘도 안 먹을 거니까요.”차갑게 말하고 난 온지유는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의 오만한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올랐던 여진숙은 뒤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아무리 잔머리를 굴려 봤자 넌 우리 집안 애를 낳지 못해! 너한테 그럴 능력도 없겠지만 말이야! 오만하게 굴지 마. 이 집안을 떠날 때 넌 무릎 꿇고 나한테 빌게 될 테니까.”전에는 그녀가 아무리 괴롭혀도 말대꾸 한 번 안 하던 온지유였다. 하지만 이제는 여이현을 믿고 그러는 것인지 부쩍 나대기 시작했다.‘두고 봐.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여진숙은 피식 웃더니 노승아와 함께 매니큐어 받으러 갔다. 반대로 온지유는 클럽 매니저를 만나러 갔다.“왔어요, 지유 씨.”환하게 인사하는 것도 잠시 매니저는 난감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저 지유 씨한테 할 말이 있어요.”“저도 할 말이 있어요.”“지유 씨 먼저 말해요.”“지난번의 여
이 말을 듣고 여이현은 우뚝 멈춰 서며 몸을 돌렸다.“무슨 여자?”중간에서 말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배진호는 목에 칼이 닿은 것만 같았다. 도대체 부부 생활을 어떻게 했기에 아내가 남편에게 다른 여자를 찾아주는지 의아할 따름이다.더군다나 남편이라는 작자는 아내에게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고 결혼 사실도 밝히지 않았다. 중간에 끼인 배진호만 죽어 나가는 상황이었다.“그게... 그날 밤 대표님과 같이 있었던 여자 말입니다.”이 말을 듣자마자 여이현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온지유에게 밀려났던 일이 다시 떠올랐던 것이다.‘이렇게 다른 여자를 끌어들이고 싶었나? 도대체 얼마나 날 싫어하는 거야.’여이현의 얼굴에는 얼음이 내려앉은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한 목소리로 말했다.“알았어요. 잠깐 기다리라고 해요.”온지유가 출근해서 가방을 내려놓기 바쁘게 배진호가 걸어왔다.“온 비서님, 대표님께서 손님과 함께 휴게실에서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온지유가 못 알아챈 것을 보고 여이현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보탰다.“온 비서님이 그 여자를 데려온 거 아니에요?”온지유는 추측 가는 바가 있었지만 감히 확신하지 못했다. 그녀는 휴게실을 힐끗 보더니 부리나케 달려갔다.주소영은 가만히 휴게실에 앉아 있었다. 오늘따라 색다른 느낌을 주는 모습이었다.검은색 머리카락과 흔히 보이는 출근룩, 어딘가 불쌍해 보이는 모습은 보호 본능을 이끌었다.이런 곳에 처음 오는 주소영은 약간 불편해 보였다. 그녀는 시골 출신이다. 그리고 어릴 적부터 도시의 높은 건물을 꿈꿔왔다. 지금 그 높은 건물에 들어와서 도시를 내려보고 있다니, 이보다 더 짜릿할 수도 없었다.그녀는 두리번거리다가 문 가에 서 있는 온지유를 발견하고 먼저 인사했다.“안녕하세요, 지유 씨.”“여기는 어떻게 왔어요?”주소영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지유 씨 여기에서 일해요?”밖에 아직 사람이 있었기에 온지유는 안으로 들어가면서 문을 닫았다.“네.”주소
온지유는 머리를 돌려 주소영을 바라봤다. 주소영의 당당한 모습에 그녀마저 속을 것만 같았다.지금은 일단 할 일이 있어서 그녀는 말없이 나갔다. 그렇게 3시간이 지난 다음에도 돌아가지 못했다.이때 회의실 문이 열리고 회의를 끝낸 여이현이 밖으로 나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배진호는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대표님, 휴게실에 가보셔야 합니다.”여이현은 차가운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손목시계를 힐끗 확인한 그는 싸늘하게 웃었다.그가 휴게실에 들어갔을 때 안에는 주소영밖에 없었다. 기다리다 지친 그녀는 소파에 누워 있었다.여이현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온지유부터 찾았다. 온지유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녀가 누워 있는 소파 앞으로 가서 멈춰 섰다.피곤했던 주소영은 눈을 감고 있었다. 물론 큰일을 망칠까 봐 잠들지는 못했다. 약간의 인기척이 느껴져서 눈을 뜨자 눈앞에는 싸늘한 표정으로 그녀를 훑어보고 있는 거대한 몸집이 보였다.그녀는 잠깐 멈칫하다가 화들짝 놀라며 일어났다. 상대가 여이현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사과부터 했다.“죄송해요...”그녀는 부랴부랴 옷매무시를 정리했다. 여이현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안 했다.그녀의 습관은 온지유와 아주 비슷했다. 온지유도 잘못을 하면 일단 사과부터 했다. 그게 누구 잘못인지 따지지도 않고서 말이다.여이현이 하도 말이 없어서 주소영은 안절부절못하며 그의 구두만 바라봤다. 그러다가도 약간 궁금해서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분위기를 풀어줄 온지유가 아직도 나타나지 않은 것을 보고는 다시 화들짝 고개를 숙였다가 조심스레 물었다.“왜 아무 말도 안 하세요? 지, 지유 씨는 같이 안 왔나요?”여이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차갑게 되물었다.“온 비서가 데려온 여자가 그쪽이야?”나지막한 목소리에 주소영은 단번에 홀렸다. 그녀는 천천히 시선을 올리더니 여이현의 깊은 눈동자와 마주했다.몸을 흠칫 떤 그녀는 남자의 이목구비에 완전히 빠져서 한참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여이현이 미간을 찌푸린
주소영은 잔뜩 굳은 얼굴로 주먹을 쥐었다. 그녀가 아무 말도 안 하는 것을 보고 여이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그렇게 어려운 질문인가?”이때 온지유는 마침 부랴부랴 달려오면서 여이현의 질문을 들었다. 한발 늦은 그녀는 문손잡이를 잡았다가 다시 놓았다.주소영은 한참이나 침묵에 잠겼다. 강압적인 분위기 때문에 스트레스도 급격히 상승했다.그는 힘들게 고개를 들어서 여이현을 바라봤다. 자칫하면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나리라는 직감이 들었다.“그 호텔에... 부... 부자가 많다고 들어서요. 돈 많은 남자라도 꼬셔서 팔자 바꿀 생각으로 갔었어요.”여이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주소영을 바라보는 눈빛도 완전히 변했다.그녀의 말은 돈 받고 몸을 판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이 사회에 그런 사람이 실제로 많기도 했다.눈치 보다가 문을 연 온지유의 손에는 커피잔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여이현의 앞에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커피 드세요.”주소영의 몫도 그녀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머리를 들며 인사했다.“고마워요.”여이현은 더 이상 주소영과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낯선 사람을 쉽게 믿을 수도 없으니 말이다.그는 말없이 앞에 놓여 있던 자료를 펼쳐봤다. 그 속에는 CCTV 화면을 캡처 한 사진이 들어 있었다.사진 속의 여자는 주소영과 똑같이 생겼다. 그녀가 걸어가는 방향도 스위트룸이 틀림없었다. 심지어 정리되지 않은 옷가지도 그가 기억하는 것과 같았다.자료에는 그녀에 대한 소개도 있었다. 그녀에게는 남동생 두 명이 있는 데다가 어머니가 투병 중이었는데, 남동생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급하게 돈이 필요했다.주소영은 어린 나이에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그녀는 성인이 되기 바쁘게 학교에서 자퇴하고 일하기 시작했다.전에는 어머니를 보살펴주기 위해 고향 근처에서 일했다. 하지만 돈이 점점 많이 필요하면서는 큰 도시로 올라오게 되었다. 그러다가 여이현과도 만나게 되었을 것이다.여이현은 자료를 내려놓더니 주소영을 바라보며 물었다.“돈이 필요해?”“네, 필요
온지유는 여자아이 혼자 보낼 수 없었다. 이렇게 어린아이가 사고를 당하거나 나쁜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손을 쓸 수도 없기 때문이다.그녀는 다시 여자아이를 안아 올리며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무슨 일인지 이모한테 말해 줄래? 네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왜 넌 엄마 아빠가 없어?”소녀는 울음을 삼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우리 아빠는 떠났어요. 다들 아빠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했어요. 그러고 나서 엄마도 절 혼자 두고 떠나버렸어요. 어디로 간 건지도 모르겠어요. 아무도 절 돌보지 않아서 집에서 굶어 죽을 뻔했어요.”여자아이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온지유의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그녀는 이야기를 듣고 대강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여자아이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아이를 짐스럽게 여겨 의도적으로 버린 것이다.이렇게 어린아이가 집 주소와 전화번호는 물론 이름까지 모른다니 말이다.“이모, 우리 집에서는 아무도 제 이름을 불러 주지 않았어요. 아빠랑 엄마는 그냥 저를 사월이라고만 불렀어요.”소녀는 눈가가 붉어진 채로 속삭였다.“제가 너무 멍청해서 그런 거겠죠? 제가 좀 더 똑똑했으면 엄마가 절 버리지 않았을 텐데...”“아니야.”온지유는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위로가 될지 몰라 머뭇거렸다. 아이에게 잘못이 있는 게 아니었다. 잘못은 그녀의 부모에게 있었다.여자아이를 사월이라고만 부르며 이름조차 제대로 불러주지 않았으니, 아이가 자신의 이름을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더구나 아이를 낳았다면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 아이가 똑똑하든, 그렇지 않든, 어떤 이유로도 아이를 버릴 권리는 없었다. 모든 아이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 진실을 그대로 말한다면, 소녀의 마음에 더 큰 상처를 남길까 두려웠다. 아이에게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하는 것은 너무나 가혹했다.온지유는 여자아이를 위로하기 위해 거짓말로 이야기를 꾸며냈다.“아마도 네 엄마는 중요한 일을 하고 있을 거야. 일이
강원에 도착했을 때는 점심이 되었다. 여이현은 그들을 데리고 가장 큰 백화점으로 갔다. 그리고 한참 구경하고 나서 백화점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갔다.이때 백화점 안에서 귀를 찌르는 화재 경보음이 들렸다.“불났나 봐. 빨리 나가자.”여이현은 별이를 훌쩍 안아 올리며 온지유의 손을 잡았다. 세 사람은 함께 출굴 나갔다.그들이 출구에 갔을 때 이미 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다. 그들은 백화점 안에 갇히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밖으로 밀려 나왔다.여이현은 별이를 안은 손에 힘을 더했다. 인파 속에서 흩어지기라도 하면 큰 일이니 말이다. 특히 별이는 아직 어린아이기 때문에 어른들 틈에서 사고를 당할 확률이 높았다. 별이도 지금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알기에 여이현을 꼭 끌어안았다.이때 한쪽에서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가 된 온지유는 이런 소리에 유독 예민했다.황급히 고개를 돌려 보자 혼자 울고 있는 여자아이가 보였다. 꽃무늬 치마를 입은 여자아이는 별이 또래로 보였다.여자아이는 부모 없이 혼자 인파 속에 있었다. 정말 위험한 상황이었다. 여자아이는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처럼 휘청댔다. 커다란 발이 이미 그녀의 발을 밟고 지나가고 있었다.온지유는 단호하게 여이현의 손을 놓았다.“별이 데리고 먼저 나가. 우린 밖에서 합류하자.”말을 마친 그녀는 여자아이 쪽으로 필사적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를 안아 올리면서 말했다.“네 부모님은? 어디 가셨어?”여아아이는 더 크게 울면서 온지유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 과정에 그녀의 팔에 난 상처들이 드러났다.온지유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설마 아동 학대인가?’어찌 됐든 지금은 이런 문제를 생각할 때가 아니다. 그녀는 있는 힘껏 앞으로 걸어가서 무사히 출구로 빠져나갔다.백화점 밖으로 나간 그녀는 우선 여이현과 별이부터 찾았다. 다행히 두 사람은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한눈에 찾을 수 있었다.“별아, 너 괜찮아?”온지유는 후다닥 달려가서 별이부터 살폈다. 그리고 그의 몸에 생채기 하나 나지
별이도 같은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그럼 나들이 가지 말고 아빠가 좀 더 쉬는 게 어때요? 저는 아빠가 푹 쉬시는 게 더 좋아요.”별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쉴 시간도 있어. 그러니까 마음껏 나가 놀아도 괜찮아.”여이현의 미소가 점점 선명해졌다. 그는 온지유와 별이에게 말했다.“두 사람이 간 다음 인사팀에 연락해서 새 비서를 뽑으라고 했어. 어제 드디어 괜찮은 사람을 뽑아서 오늘부터 출근했어. 내 일의 일부를 맡겨놨으니까 이제 좀 숨 돌릴 수 있을 거야.”“다행이네요.”온지유는 이제야 마음을 놓았다.그녀는 여이현의 일이 바쁜 걸 한 번도 탓한 적 없었다. 여이현도 가족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하지만 남편이 집안일에 손을 보태는 것을 희망하지 않을 여자는 없을 것이다. 말은 안 했지만 그녀도 내심 좋았다.“밥 먹고 나서 짐 정리하자. 내일 아침에 출발하면 될 것 같아. 하윤이는 데려갈까? 아니면 집에 둘까?”온지유는 잠시 고민했다.온하윤은 너무 어려서 거의 하루 종일 잠만 잔다. 괜히 데려갔다가 제대로 못 쉬면 문제였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할 수도 있고 말이다.이런 생각에 온지유는 온하윤을 집에 남겨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이현도 마찬가지다.“밥 먹고 나서 다솔 씨한테 하윤이를 봐줄 수 있는지 연락할게. 도우미가 있는 데다가 우리 금방 돌아올 테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쉬는 시간 며칠 짜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게 바로 그가 강원시에 가기로 결정한 이유다.권다솔이라면 온지유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권다솔은 아이를 좋아하고 인내심도 있었다.식사를 끝낸 다음 그들은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별이도 옆에서 손을 보탰다. 그는 자신의 옷을 챙기고 나서 여이현에게서 받은 장난감도 가져왔다.“엄마, 이것도 가져가면 안 돼요?”“당연히 되지.”온지유는 장난감을 트렁크 안에 넣었다.“트렁크 안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뭐든 가져도 돼.”놀러 가는 거면 당연히 기분이 최우선이었다. 이 정도 소원은 얼
두 사람이 함께 요리를 하니 속도가 훨씬 빨랐다. 온지유는 칼질을 책임지고 여이현은 볶는 걸 책임졌다. 그러자 요리도 금방 완성되었다.온지유가 완성된 음식을 가지고 나가려는 순간 여이현이 뒤에서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요즘 수고했어. 내가 잘못했어. 일만 하느라 집안일은 너한테 다 맡겼네.”“그렇게 생각하지 마. 우리는 이제 부부야. 가족끼리 그 정도 도울 수도 있는 거지.”온지유는 몸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더군다나 일하러 간 거잖아. 노는 것도 아니고. 내가 당연히 이해해야지 노발대발 화를 낼까 봐?”여이현은 한 회사의 리더다. 그 책임은 상상 이상일 것이다.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한 사람을 집에서도 부려 먹을 수는 없었다.온지유의 눈을 바라보며 여이현은 말로 이루 형용하지 못할 행복감을 느꼈다.“내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그는 저도 모르게 온지유에게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갔다. 입술은 당장이라도 닿을 거리에 있었다.똑똑똑.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주방의 분위기도 순식간에 깨졌다.온지유는 옷을 정리하고 나서 문을 열러 갔다.“별아, 깼어?”“네!”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저도 도울게요.”“아니야, 다 됐어. 넌 수저만 챙겨서 오면 돼.”온지유는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벌써 이렇게 사람 마음 헤아릴 줄 아는 걸 봐서는 커서도 아주 스윗한 사람이 될 것이다.“엄마 도와 음식이라도 나를래요.”그는 발꿈치를 들고 그릇을 내리고는 조심조심 밖으로 걸어갔다.식사 전 온지유는 거실에 가서 한창 잘 자고 있는 온하윤을 힐끗 봤다. 그녀는 입맛을 다시며 여이현이 사 온 인형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오늘의 꿈은 사탕 맛인 듯했다.온지유는 손을 뻗어 이불을 정리해 줬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서 식탁 옆으로 걸어갔다.밥 먹을 때 여이현은 좋은 소식을 알렸다.“요즘 날씨 좋으니까 나들이 겸 강원시에 다녀오자.”“정말요?”별이는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좋아요! 좋아요!”그는 진심으로 나가서 놀고 싶었다. 하지만
권다솔은 침묵에 잠겼다. 그녀는 눈을 감으면서 말했다.“저 잠시 혼자 있고 싶어요.”배진호도 지금은 그녀의 생각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같은 시각.여이현은 오랜만에 일찍 퇴근했다.배진호와 권다솔이 따로 회사를 차린 시간 동안 여진그룹에는 그밖에 없어서 얼마나 바빴는지 모른다.온지유는 여이현 혼자 크고 작은 일을 처리하는 게 안타까웠다. 아이들도 유독 말을 잘 들었다. 온하윤은 물론 별이도 조용히 있어 줬다.그래도 여이현은 지금처럼 지내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는 일보다 가족이 중요했다. 오늘 오래간만에 쉬는 시간이 생겼으니 그는 곧바로 집에 돌아갔다.돌아가는 길에는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이현은 선물을 잔뜩 들고 초인종을 눌렀다.“누구세요?”온지유는 거실에서 아이를 보다가 초인종 소리를 듣고 문을 열었다. 그렇게 그녀는 꽃다발을 들고 있는 여이현을 보게 되었다.“오늘 왜 이렇게 일찍 돌아왔어? 이 꽃은...”온지유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우리 사이에 꽃은 무슨.”“만난지 아무리 오래돼도 이런 감성이 필요한 법이야.”여이현이 꽃다발을 건넸다. 이건 그가 직접 고른 꽃이다. 꽃 한 송이 한 송이 다 사랑을 품고 매력적인 색채를 뿜어냈다.소리를 듣고 별이가 달려와서 팔을 벌렸다.“아빠! 안아줘요!”여이현은 짐을 내려놓고 별이를 훌쩍 안아 올렸다. 그리고 거실에서 한참 빙빙 돌고 나서야 내려놓았다.“아빠가 선물 사왔어. 가서 볼래?”“아빠가 준 선물이라면 뭐든 좋아요.”별이가 곧장 대답했다.여이현이 산 것은 최신형 로봇 장난감이었다. 별이가 가장 갖고 싶어 했던 것이기도 했다. 갖고 싶다고 말 하기도 전에 여이현이 먼저 사 온 것이다.그는 장난감을 꼭 붙들고 한시도 놓지 않았다.“아빠 사랑해요! 선물 너무 좋아요!”“좋으면 됐어. 네 여동생 것도 있어. 빠짐없이 챙겨왔거든.”여이현은 또 가방에서 인형 두 개를 꺼냈다. 아기에게 줄 만한 작은 인형이었다.인형을 본 온하윤은 꺄르르 웃었다
이튿날, 정미진은 또다시 권다솔을 만나러 왔다. 이번에는 보온병도 챙겼다.정미진은 보온병을 그녀에게 건네주며 정중하게 말했다.“다솔 씨, 이거 잘 챙겨. 내가 귀한 보약을 가져왔어. 동창한테서 받은 건데 홍경천을 담근 물이래. 이게 임산부한테 그렇게 좋다고 했어.”“홍경천이요?”권다솔은 미간을 찌푸렸다. 홍경천이라는 약재는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임산부에게 좋다는 건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그러나 깊이 생각하기에 정미진은 너무 열정적이었다. 자꾸만 마셔보라고 재촉해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마셨다. 정미진은 가져온 것을 전부 먹인 다음에야 시름을 놓고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권다솔은 임신 후 유독 졸음이 많아져서 오후 세네 시쯤에는 꼭 낮잠을 자야 했다. 그래서 정미진도 오래 머물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정미진이 돌아간 뒤, 권다솔은 평소처럼 침실로 들어가 낮잠을 청했다. 깊은 잠에 빠져 있던 그녀는 갑자기 복부에서 느껴지는 통증 때문에 눈을 떴다.그 통증이 점점 강해져서 도무지 잠을 잘 수 없게 만들었다. 눈을 뜬 순간, 권다솔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침대 시트 아래로 짙은 핏자국이 번져 있었다.그녀는 놀라서 잔뜩 잠긴 소리로 외쳤다.“누구 없어요? 아주머니, 저 너무 아파요... 빨리요...”방문이 열리는 순간 권다솔은 시야가 검게 변하며 의식을 잃었다. 그 순간 느껴진 것은 누군가의 넓은 품에 안겼다는 것뿐이었다.그 품에서 나는 차갑고 상쾌한 향기는 마치 눈 덮인 소나무처럼 그녀를 감쌌다.시간이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권다솔이 다시 눈을 떴을 때, 눈앞에는 새하얀 천장이 보였고 코끝에는 병원 특유의 알코올 냄새가 스며들었다.그녀가 뒤척이자 곁에 앉아 있던 사람이 화들짝 놀라며 깨어났다. 배진호였다.배진호는 곧바로 몸을 숙여 그녀를 부축하며 물었다.“깼어요? 어디 아픈 데는 없어요? 이제 괜찮아요?”그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오랜 시간 제대로 쉬지 못한 모습이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잡으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난 진호 어머니예요. 다솔 씨 집에 있어요?”정미진은 도우미의 뒤를 힐끗거리며 말했다.도우미는 잠깐 멈칫하다가 당황한 표정으로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 정미진은 한 번도 이곳에 방문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오늘 출근하지 않은 권다솔은 초인종 소리가 들려서 와봤다. 정미진이 온 것을 보고는 잠깐 넋이 나갔다.“아주머니? 잠깐만요... 어서 문을 열어줘요.”권다솔은 도우미에게 당부하고 부랴부랴 준비하러 갔다. 이 집에는 손님이 자주 오지 않기에 찻잎을 찾는 것만 한참 걸렸다.곱게 자란 권다솔은 차 끓이는 법조차 몰랐다. 그녀는 한참 연구하고 나서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끓인 것도 물도 차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아주머니, 이거 드셔보세요.”그녀는 조심스럽게 찻잔을 건넸다.정미진은 경멸의 표정을 숨기고 힐끗 보기만 했다.배진호의 부모는 차를 좋아했다. 그들보다 찻잎에 대해 더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권다솔이 끓인 차가 얼마나 형편없는지, 그녀는 보기만 해도 알았다.아무런 기색도 없이 찻잔을 밀어낸 정미진은 덤덤하게 말했다.“이렇게 예의를 차릴 필요 없어. 사실 오늘은 그냥 널 보러 온 거야. 참, 아직 밥 안 먹었지?”권다솔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정미진은 곧장 주방으로 들어가 음식을 만들 기세를 보여줬다. 권다솔은 깜짝 놀라며 급히 그녀를 막아섰다. 옆에 있던 도우미도 얼른 나서서 만류했다.두 사람의 적극적인 만류 끝에서야 겨우 그녀의 의욕을 꺾을 수 있었다. 정미진은 조금 서운한 듯 웃으며 말했다.“요즘은 내가 밥 한 끼 하기도 어렵구나. 뭐, 괜찮아.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정미진은 거실에 앉아 권다솔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해 질 무렵 집을 떠났다. 도우미는 식탁을 정리하며 아까의 상황을 떠올리며 말했다.“제가 보기에 어머님은 참 괜찮은 분 같아요. 저희 때 시어머니들은 얼마나 무서웠는데요.”다른 도우미도 거들며 말했다.“맞아요. 이렇게 좋은 시어머니에 좋은 남편까지 있으니 사모님은 앞으로 행복
“부사장님, 왜 안 들어가세요?”권다솔은 깜짝 놀랐다. 언제 갑자기 나타났는지 모를 직원을 바라보며 그녀는 억지 미소를 지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참, 이거 대신 전해줘요. 저는 급한 일이 생겨서 가봐야겠어요.”직원에게 서류를 건넨 권다솔은 대답을 듣지도 않고 성큼성큼 멀어져 갔다. 그녀는 슬픈 표정으로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다.목적 없이 거리를 거닐며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랐다. 수많은 차와 정장 차림의 사람이 오가는 거리에서 그녀가 갈 수 있는 곳 하나 없는 것 같았다. 막연한 감각도 따라서 피어올랐다.이때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수락 버튼을 눌렀다. 전화를 건 사람은 배진호의 어머니 정미진이었다.“다솔 씨, 지금 시간 있어?”정미진의 목소리는 아주 무덤덤했다.“시간 되면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어.”...15분 후, 권다솔은 넋을 잃은 채 산부인과 앞에 서 있었다.평일이다 보니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산부인과는 더욱 적을 수밖에 없다.간호사는 금방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권다솔 씨.”권다솔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정미진은 그녀의 가방을 대신 들어주며 미소를 지었다. 태도도 보기 드물게 부드러웠다.“가서 검사받아. 짐은 내가 대신 보관할게.”권다솔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정미진이 왜 그녀를 데리고 산부인과에 왔는지, 그리고 왜 갑자기 태도가 변했는지 전부 알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는 결국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검사 결과는 금방 나왔다. 의사는 보고서를 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축하드려요. 임신하셨네요.”정미진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기쁜 것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다시 한번 물었다.“선생님, 확실한가요?”의사는 아예 보고서를 건네주며 말했다.“직접 확인하세요. 초음파 사진에서 태아의 형태를 볼 수 있습니다. 아주 잘 크고 있어요.”사진까지 나오자 정미진은 할 말이 없었다.병원에서 나온 다음 그녀는 직접 권다솔을 데려다줬다. 가는
배상준이 와인을 보고 지나치게 들뜬 모습을 보이자 정미진은 못마땅하다는 듯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그만 좀 해! 평생 와인 처음 본 사람처럼 굴지 마. 작년에 친구가 준 와인도 있잖아?”정미진은 와인이 그렇게 대단한 물건도 아니니 배상준에게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지 말라는 뜻이었다.하지만 배상준은 잠시 생각하더니 진지하게 말했다.“이건 최고급이야. 그거랑은 달라.”정미진의 얼굴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그제야 배상준은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분위기가 그렇게 된 후라 정미진은 권다솔에게 선물을 다시 가져가라고 하지는 못했다. 그녀는 헛기침을 두 번 하고 말했다.“뭐, 그럼 이건 받아 둘게. 진호 아빠는 다른 취미는 없고 술만 좋아하니까.”말을 하며 그녀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권다솔을 바라보며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사전 준비는 꽤 철저했네.”권다솔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정성을 들여 준비한 선물이 이런 식으로 왜곡되면 누구나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그녀는 손바닥을 꼭 쥐며 침착하게 대답했다.“어른들 댁에 올 때는 좋아하시는 걸 알아보고 준비하는 게 예의니까요.”정미진은 차갑게 웃으며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하지만 선물이 마음에 들었는지 배상준은 더 이상 정미진이 권다솔에게 계속 차갑게 굴지 않도록 나섰다.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됐어, 이제 그만 좀 해. 둘이 결혼한 건 이미 기정사실이고, 이렇게 힘들게 찾아왔는데, 좀 따뜻하게 맞아 주는 게 어때?”정미진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로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당신은 도대체 누구 편이야?”배상준은 주눅 든 듯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는 확실히 아내를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그래도 그의 말이 전혀 효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적어도 정미진은 권다솔을 내쫓지는 않았고 함께 식사를 했다.그러나 그것뿐이었다.식사가 끝난 후 정미진은 권다솔을 문까지 배웅하며 말했다.“앞으로 별일 없으면 다솔 씨는 오지 않는 게 좋겠어. 우리 집은 당신처럼 귀한 아가씨를 모실 수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