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승만에게는 자식이 서은지밖에 없었다. 오늘은 손님이 있어서 한마디 한 것이지, 평소는 그녀가 무엇을 원하든 다 따라줬다.그는 서은지와 함께 외출한 적이 별로 없다. 애초에 서은지가 관심을 가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여이현은 일부러 못 만나게 했다. 여이현과 같은 사람은 그녀가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여이현보다는 나민우가 마음에 들었다. 나민우처럼 나긋나긋한 사람이라면 결혼 후에도 잘해줄 것 같았다.하지만 나민우가 온지유를 좋아하는 것은 그도 알아차릴 정도로 선명했다. 더군다나 서은지는 여이현만 좋아하니 일단은 그녀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그들뿐만 아니라 서승만의 다른 친구들도 왔다. 전부 서은지와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사이여서 아주 예뻐했다. 근황을 묻는 그들에게 서은지는 당당히 인사했다.사람이 전부 모인 다음 그녀는 여이현을 바라보며 물었다.“혹시 못 드시는 음식 있어요?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요!”여이현은 그녀가 갑자기 말을 걸 줄은 모르는 듯 차갑게 대답했다.“알아서 주문하세요.”이때 한 사람이 웃으면서 말했다.“은지야, 삼촌들도 있는데 왜 안 물어봐 줘? 우리 은지 다 컸네. 벌써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는 거야?”서은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아니에요. 삼촌들은 뭘 좋아하는지 다 알아서 안 물었거든요? 그렇게 자주 만났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해요.”그들은 웃음을 터뜨렸다.서은지가 이 자리에 나온 이유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아무래도 여이현을 목표로 왔을 것이다.온지유는 여이현에게 들어대는 여자를 수도 없이 봐왔다. 하지만 서은지처럼 당돌한 여자는 처음이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여이현을 바라봤다. 그는 감정을 알아볼 수 없는 담담한 표정으로 물을 마시고 있었다.식사 자리에서 그들은 대부분 사업에 관해 얘기했다. 여이현과 서승만도 협력하는 것이 있는 듯했다.온지유는 말없이 곁에서 듣기만 했다. 나민우는 얘기하는 와중에도 잊지 않고 그녀에게 반찬을 집어줬다.그녀는 잠깐 화제가 끊겼을 때 나
중학교 때의 나민우는 몸매도 좋지 못하고 능력도 없었다. 그는 온지유에 대한 마음을 혼자 간직할 수밖에 없었다.“지금이라면 널 좋아할 자격이 있을 것 같아.”온지유는 이런 일이 있은 줄 전혀 몰랐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기도 했다.나민우는 그녀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나 사실 엄청 오래전에 돌아온 적 있어. 네가 다쳤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귀국했거든. 하지만 그때도 너한테 가까이 가지는 못했어. 네가 괜찮아진 걸 보고 몰래 좋아하기만 했지. 그때 다음에 돌아올 때는 너한테 어울리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했어.”온지유는 말을 잃었다.그녀는 나민우의 심정을 알았다.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1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녀가 여이현을 좋아하던 시간보다도 길었다.“다른 사람을 좋아해 본 적은 없어?”“없어. 우리 집안에 순정파 유전자라도 있나 봐. 그런데 너무 부담 가질 필요 없어. 난 친구로 지내는 것도 괜찮아. 너 같은 친구가 있는 것만으로도 좋을 것 같아.”“...”나민우는 정말 좋은 사람이다. 지금 그녀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만 봐도 그랬다. 그와 함께 있을 때는 마음 졸일 필요가 없었다.마음을 고백하는 데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적어도 고백 한 번 못 하는 그녀보다는 훨씬 용감했다.“고마워, 민우야.”온지유의 생각을 잘 알았던 나민우는 여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뭐 좀 먹자. 내가 한 말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나민우는 온지유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다른 사람과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런 나민우가 그녀는 부럽기도 하고 대단하기도 했다. 내면세계가 아주 강해 보였기 때문이다.반대로 여이현은 두 사람과 꽤 떨어진 자리에 있었다. 그들이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한참이나 가까이에서 얘기하는 것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대표님, 저랑 한 잔 마셔줄 수 있을까요?”이때 서은지가 불쑥 나타나서 말했다. 거절당하기 싫은지 간절한 표정까지 지었다.여이현은 이제야 온지유에게서 시선을 떼고 술잔을
이 순간 온지유는 벼락에 맞은 것만 같았다. 그녀는 창백한 안색으로 꼼짝할 수 없었다.그녀는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발은 바닥에 뿌리 박은 것처럼 추호도 움직일 수 없었고 시선도 마찬가지였다.‘내가 화장실에 다녀오는 새로 키스까지 하는 사이가 됐다고?’이때 여이현이 서은지의 손을 풀어냈다. 그러다가 온지유와 시선이 마주친 그는 잠깐 멈칫하더니 난감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여이현에게는 설명할 기회가 없었다. 그는 일단 서은지와 거리를 두더니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서은지 씨, 선 넘지 마세요.”서은지는 여이현을 쫓아 나온 것이었다. 그녀는 여이현이 혼자 있는 것을 보고 애정 행각을 벌일 수 있을 줄 알았다. 자신처럼 예쁜 여자를 거절할 남자는 없다고 자부했기 때문이다.그녀는 자신만 마음먹으면 여이현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이현과 같은 남자와는 하룻밤 보내는 것만으로도 이득이었다.여이현에게 밀려난 것도 그녀는 밀당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입꼬리를 씩 올리며 말했다.“아까는 쿨하게 허락했잖아요. 혹시 여자가 주동적인 건 싫은가요? 약간 새침한 척해볼까요?”자신을 거절할 사람은 없다는 듯한 당당한 말투였다.여이현의 안색은 아주 어두웠다. 그는 약간의 혐오가 섞인 눈빛으로 말했다.“서은지 씨가 쉽게 행동하는 건 상관없지만 저한테 이러지 마시죠. 저는 아무 여자나 건드리지 않거든요.”그의 말에 서은지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저 쉬운 여자 아니에요. 대표님을 좋아하니까 이러는 거죠.”“지금 보니 쉬운 여자 맞는데요.”여이현은 그녀의 체면을 지켜줄 생각도 없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저는 외국에서 자라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무조건 직진이에요. 실례가 되었다면 사과할게요. 앞으로는 대표님의 취향에 따라 행동할 테니,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세요.”그녀와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았던 여이현은 단호하게 말했다.“저는 서은지 씨한테 관심 없어요. 시간 낭비하지 마요.”여자와 엮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여이현은 서
두 사람은 더 이상 가까워질 방법이 없었다.감정을 추스른 온지유는 고개를 들며 미소를 지었다.“대표님의 비서로서 방해가 된 것은 사실이죠. 본 것도 못 본 척, 들은 것도 못 들은 척해야 한다는 사실 잘 알아요. 오늘 일도 절대 발설하지 않을게요.”이때 무언가 눈치챈 서은지가 걸어와서 말했다.“아까 사람이 있어서 저를 밀어낸 거죠? 대표님 비서라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요. 대표님이 스캔들에 민감한 것 같은데, 저는 공개 연애 같은 거 필요 없어요. 그냥 몰래 만나주기만 하면 돼요, 괜찮죠?”서은지는 여이현이 진심으로 좋았다. 그래서 하루빨리 그를 정복하고 싶었다.여이현만 괜찮다면 그녀는 어떤 관계든 괜찮았다. 여이현 또한 거절하지 않으리라 믿었다.반대로 여이현은 온지유의 태도가 아주 마음에 안 들었다. 덩달아 서은지까지 쫑알쫑알 귀찮게 해대서 싸늘한 눈빛을 쏘았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웃고 있던 서은지는 그의 눈빛을 보자마자 얼어붙었다. 등골이 오싹하다는 느낌을 처음으로 제대로 느낀 것이었다.“저는 서은지 씨한테 관심 없다고 했어요. 사람 말 못 알아들어요? 서승만 씨가 이런 모습을 보면 참 좋아하겠네요.”서은지는 자신감이 지나쳤다. 여이현에게 직진이 통할 것이라는 생각도 오만했다.그는 다른 남자와 달리 그녀에게 관심도 없고, 체면을 챙겨 줄 생각도 없었다. 너무 자존심이 상하는 순간이었다.말을 마친 여이현은 더 이상 서은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는 온지유의 손을 덥석 잡더니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그는 불만이라도 표시하는 듯 온지유의 손을 으스러질 듯 꽉 잡았다. 온지유는 아픈 대로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두 사람의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서은지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하지만 쫓아갈 수 없는지라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왜 나를 안 좋아하지? 왜 나한테 비서보다도 못한 취급을 하지?! 이해할 수 없어! 말도 안 돼!’밖으로 끌려 나간 온지유는 여이현의 분노를 생생하게 느꼈다. 여이현은 그
“죄송합니다, 대표님. 오늘은 제가 실수했어요.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앞으로는 조심할게요.”온지유는 빠르게 잘못을 인정했다. 혹시라도 여이현이 폭발하면 큰일이기 때문이다.그녀가 말대꾸하지 않는 것을 보고 여이현은 피식 웃었다.“사과 하나는 참 빠르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 조금 전의 행동 사적인 거야, 공적인 거야?”그녀의 행동은 사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당연히 공적인 것이죠. 제가 대표님의 비서로 일하는 한 끝까지 책임질 거예요. 이번 일은 월급을 깎는다고 해도 할 말이 없어요.”“...”여이현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토를 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럴 필요도 없고 말이다.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그녀를 놓아줬다. 그리고 다시 거리감 있는 자세로 돌아갔다.드디어 풀려난 온지유는 이대로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여이현의 표정은 조금 전보다 더 어두워 보였다.“안 들어가도 돼요? 얼마 먹지도 않은 것 같은데 배고프지 않을까요?”“배 비서더러 나오라고 해. 돌아가자.”그는 아무래도 서은지 때문에 기분이 단단히 상한 듯했다. 원래도 감정 기복이 큰 사람이니 온지유는 크게 개의치 않고 배진호에게 빨리 나오라고 연락했다.나간 지 한참 됐는데도 돌아오지 않는 그녀를 보고 나민우를 문자를 보냈다. 그녀는 먼저 돌아가야 한다고 답장을 남겼다.나민우는 이렇듯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그녀를 챙겨줬다. 분명히 다 아는 것 같은데도 말하지 않고 그녀가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거리에 머물러 있었다.그녀가 문자를 보내는 것을 보고 여이현이 힐끗 보며 물었다.“아까 나 대표랑 무슨 얘기 했어?”온지유는 말문이 막혔다. 나민우의 고백에 어떡할지 생각하기도 전에 질문을 들었으니 말이다.대답하기 싫었던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했다.“학창 시절 얘기를 하고 있었어요. 동창끼리 만나서 할 얘기가 그것밖에 없잖아요.”“흥, 그때 일을 기억하는 걸 보면 기억력도 참 좋아.”온지
밖으로 나온 배진호는 온지유를 흔들어 깨웠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왜 그래요?”“대표님이 술을 많이 마셨나 봐요.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아요.”온지유는 황급히 여이현의 상태를 체크했다. 그는 조금 전의 자세 그대로 앉은 채 곤히 잠들었다.평소에는 한 번도 이런 적 없으니 진짜 술에 취했을지도 모르겠다. 온지유의 기억 속에는 이토록 곤히 잠든 그의 모습이 없었다.어느샌가 집 앞에 도착한 것을 보고 온지유가 말했다.“제가 사람을 불러서 대표님을 부축할게요. 시간이 늦었으니 배 비서님은 얼른 돌아가서 쉬세요.”순간 정신을 차린 온지유는 빠르게 움직였다.“네, 수고하세요.”차에서 내린 온지유는 도우미를 불러 여이현을 부축했다. 그렇게 그를 침대에 눕힌 다음 온지유는 힘이 완전히 빠져나갔다.침대에 옮겨질 때까지 눈 한 번 뜨지 않은 남자를 보고 그녀는 신발에 정장 외투까지 벗겨줬다. 그의 몸에서는 짙은 술 냄새가 나고 있었다.‘정말 많이 마셨나 보네.’이때 여이현이 뒤척이며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온지유는 배를 그의 얼굴에 댄 채로 꼼짝 못 하게 되었다.지금 그녀의 무릎에 누워 있는 여이현에게서 평소의 예리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마치 온기를 탐하는 어린아이와 같았다. 누가 이 아이를 한 회사 대표로 보겠는가?온지유는 손을 올려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손길을 그의 콧대를 타고 내려갔다.‘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것도 잠시 그녀는 금방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따듯한 물을 받아와서 그의 몸을 닦아줬다.그녀는 차분하게 셔츠에 바지까지 벗기고, 따듯한 수건으로 몸을 닦아줬다. 하지만 어느 순간 멈춰 서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어두운 조명을 빌어 그녀는 침대 가에 앉았다. 여이현의 몸에는 흉터가 아주 많았다. 직접적으로 몸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 이제야 발견했다.‘전에는 왜 한 번도 볼 생각을 안 했을까. 이현 씨 몸에 흉터가 이렇게 많았다니...’복부에도 흉터가 있는 것을 보
온지유는 부랴부랴 눈물을 닦아냈다. 그리고 그나마 멀쩡한 표정으로 여이현을 바라보며 말했다.“오늘 많이 마셨어요. 얼른 다시 쉬세요.”여이현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다시 물었다.“너 방금 울었어?”온지유는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숙였다.“눈에 먼지가 들어가서요.”“도대체 왜 울었는데?”온지유는 쉽게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그녀가 눈물을 흘렸다는 것은 아주 심각한 일이라는 뜻이다.여이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아까 보니까 이현 씨 몸에 상처가 너무 많더라고요. 저는 전혀 몰랐어요.”여이현은 잠깐 멈칫하더니 기분 좋은 듯 말했다.“날 걱정해 준 거야?”여이현의 말에 그녀는 심장이 쿵 내려앉더니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비밀을 들킨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몸에 흉터가 이렇게 많은 건 처음 봐서요. 많이 아팠죠.”그녀는 바늘에 찔려도 한참 낑낑대는 사람이었다. 이 정도 흉터가 남을 상처라면 견디지 못했을 수도 있다.여이현의 눈빛은 물씬 부드러워졌다. 냉정함과 거리감도 보아낼 수 없었다.“내 흉터를 보고 그런 말을 한 건 네가 처음이야.”그는 입꼬리는 올리며 피식 웃었다. 자신을 향한 비웃음인 것 같았다.온지유는 머리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쳤다. 왠지 모를 씁쓸함을 보아낸 그녀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그럴 리가요. 이현 씨 흉터에 속상해하는 사람 많았을 거예요. 할아버님도 어머님도... 이현 씨를 걱정하는 가족분들이 많잖아요.”온지유는 일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 그녀는 여씨 가문의 모두가 그를 아껴준다고 생각했다.애초에 그가 오냐오냐 자랐다면 이런 상처를 입을 일이 없었다. 총알이 남긴 흉터는 그녀 때문이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흉터는 어떻게 왔단 말인가?온지유는 약간 놀라웠다. 눈빛에도 의혹이 담기기 시작했다.그녀에게 들킨 이상 여이현은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었다. 그는 셔츠를 완전히 벗으며 흉터는 다시 드러냈다.그 모습에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았던 온지유는 입술을 깨물었다. 여이현은 미간을
여이현은 자신을 무방비하게 드러냈다. 등에도 험악한 흉터가 잔뜩 남아 있었고 조각 같은 몸매에 색다른 느낌을 줬다.온지유는 그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누가 여씨 가문의 여이현에게 이런 흉터가 있을 줄 알겠는가?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등을 어루만졌다. 그는 잠깐 멈칫하기만 할 뿐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손길을 가만히 느끼던 그는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안 아파.”흉터는 온지유의 심장에 거듭 꽂혔다. 그녀는 말없이 주먹을 꽉 쥐었다.여이현이 말하기 싫어하는 걸 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것이 확실했다. 그녀가 기억하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뒤로 물러났다. 너무나도 낯설게 느껴지는 여이현에 그가 바로 기억 속의 ‘석이’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여희영은 여진숙을 대놓고 싫어했다. 심지어 여이현은 자신이 직접 키웠으니, 여진숙이 뭐라고 할 자격 없다고 했다. 여진숙은 어머니로서 여이현에게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이것 또한 이상하지 않은가?어쩌면 여진숙이 여이현에게 무심했고, 그래서 여이현이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만약 여이현이 얼마나 잘났는지는 중년에 가서야 알았다면 최근 갑자기 잘해주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머릿속이 복잡했던 온지유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이만 씻으러 가요. 술 냄새가 너무 심해요.”“알았어.”여이현은 무덤덤하게 셔츠를 챙겨 들고 샤워하러 갔다. 밖에서 온지유는 그의 잠옷을 챙겨서 욕실 앞에 내려놓았다.온지유는 그를 챙겨주는 데 익숙했고, 여이현도 그녀에게 챙김을 받는 데 익숙했다. 때로는 그녀가 이혼하고 떠난 다음 여이현이 적적해하지는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만약 그를 완벽하게 챙겨줄 수 있는 다른 여자가 나타난다면 그녀 따위는 금방 잊을지도 모른다. 지구는 어느 한 사람 때문에 돌지 않고, 여이현도 그녀 없이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온지유도 이만 잠옷을 들고 다른 욕실에서 씻고 돌아왔다. 그녀가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았을 때 여이현이 샤워를 끝내
여학생이 사망한 직접적인 원인은 달리기를 하던 중 과다 출혈이 일어난 것이었다.그녀는 생리 기간이라 선생님에게 달리기를 면제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선생님이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무리하게 달리기를 하다가 출혈이 심해진 데다가 제때 치료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그런데 학교 쪽에서는 자신들이 잘못한 건 일부일 뿐이고, 학생과 학부모 쪽 책임도 크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다른 여학생들은 달려도 멀쩡한데, 왜 그 여학생만 그랬냐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양시은은 사건 자료를 살펴보면서 분노를 참기 어려웠다.“이런 파렴치한 학교가 다 있네!”나도현이 달래듯 말을 건넸다.“진정해.”양시은은 억지로 심호흡을 했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사례가 드물지 않다는 걸 알기에 더 마음이 무거웠다.400만 원으로 한 생명의 가치가 판단되는 것이 황당하기는 해도 실존한다. 현실에서는 정말 흔히 일어나고 있지만 법에 명시된 조항이 없어서 답답할 따름이다.“게다가 그 여자애 학교에서 전학한 뒤로 적응도 못 하고 왕따까지 당했어. 여기저기 호소해 봐도 해결이 안 됐고 집에서도 신경을 안 썼대.”그렇게 말하던 양시은은 고개를 들어 나도현을 바라보았다. 눈에는 순수한 의문이 서려 있었다.“이렇게 비슷한 일이 자꾸 생기는데 왜 명확한 규정 하나 안 만들어지는 걸까?”왕따는 겉보기에는 사소해 보여도 실제로는 사람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는 문제였다. 심지어 매년 그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학생도 적지 않았다.나도현은 시선을 살짝 떨구며 깊은 무력감이 깃든 목소리로 대답했다.“진정해. 이런 일에는 얽힌 게 생각보다 많이 있어. 그래도 좋게 생각해 보자. 이번에 네가 변론에서 이기면 많은 사람이 이 사건에 더 관심을 가질 수 있잖아. 그럼 좀 나아질 수도 있어.”“응.”양시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다시 자료를 꼼꼼히 살폈다.그 사이, 나도현도 일하기 시작했지만 둘은 같은 공간에 머무르며 묘한 평온을 공유했다. 창문 너머
“이 법률 자료들은 누구 겁니까?”양시은이 대답했다.“제 거예요. 요즘 어떤 대회에 참가 중이라서요.”간단히 상황을 설명하자, 경찰은 자료를 돌려주며 회사 내에 이런 자료가 있으면 안 된다고 한마디 덧붙이고는 그냥 돌아갔다.그러자 그 남자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리쳤다.“아니, 제대로 조사 안 해본 겁니까? 저 사람은 변호사였다고요! 변호사가 어떻게 대표가 될 수 있어요? 그건 불법이잖아요!”남자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나도현이 서 있었다. 경찰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답했다.“나도현 씨의 변호사 자격은 이미 오래전에 말소됐습니다.”남자는 순간 멍해져서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부인했다.“그, 그럴 리가... 그건 말이 안 돼요!”“뭐가 안 된다는 거죠? 나도현 씨가 변호사 자격증을 취소하러 왔을 때, 일부 서류를 저희 쪽에서도 처리해 줬어요.”경찰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이건 사실관계를 의심하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사실 나도현은 워낙 유명한 변호사였기에 변호사 자격을 정리할 때도 꽤 화제가 됐었다. 그래서 경찰들 역시 모를 리가 없었다.남자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휘청거리며 같은 말만 반복했다.“이럴 수가... 이럴 수가...”경찰들은 허탕 치고 가게 된 것이 불만인 듯 돌아가기 전 남자를 한 번 더 나무랐다.“다음부터 뚜렷한 증거가 없으면 함부로 신고하지 마세요.”이 한마디로 그 남자는 체면이 말 그대로 땅에 떨어졌다.양시은은 시퍼렇게 질린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떠한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다.“이제 믿겠어요? 아직도 못 믿겠다면 직접 로펌에 가도 돼요. 거기선 다들 증언해 줄 테니. 만약 믿었다면 이전에 한 약속 이행 좀 부탁드릴게요.”남자는 약속을 어기고 싶었지만, 이미 주변에서 그를 지켜보는 시선이 엄청났다. 만약 그 자리에서 발을 빼려 한다면 사회적 신뢰가 무너질 게 뻔했다.결국 그는 마지못해 공개 해명을 올렸다. 그 덕분에 온라인에서 막 불붙으려던 논란은 재빨리 사그라들었고, 나도현
그렇다고 해서 나도현은 양시은이 자신을 대신해 앞장서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그는 양시은을 뒤로 끌어당기며 말을 시작한 무리에게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좋아요. 그럼 경찰 불러서 조사해 보죠.”양시은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물론 잘못이 없으면 두려울 이유도 없다는 건 안다. 하지만 이들은 애초에 시비를 걸 목적으로 왔을 게 뻔했다. 혹시 뒤에서 상대편이 사주한 걸 수도 있고, 결국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해도 여론몰이를 해서 나도현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이 높았다.‘도현 씨가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려 하다니...’양시은은 감동스러우면서도 안절부절못했다. 그를 말리고 싶었지만 이번만큼은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의 따뜻하면서도 단호한 손길이 양시은을 제지하는 듯했다.“왜 신고 안 해요? 이제 와서 겁내는 거예요?”나도현은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눈썹을 치켜떴다. 여유로우면서도 강압적인 기세가 느껴졌다.시끄럽게 목소리를 높이던 이가 가장 먼저 그 기세에 눌려 뒷걸음질 치고, 곧 스스로를 다독이듯 중얼거렸다.“무, 무서울 건 없지. 어차피 다 허세일 뿐이야. 그렇게 짧은 시간에 증거를 없앨 수 있었겠어...”그러면서 나도현을 노려보았다.“좋아요. 지금 바로 신고하죠. 다만 약속하세요. 제대로 입증하지 못하면 뒤에 있는 저 여자는 준결승에서 사퇴해야 해요.”“당신들 같은 사람이 대회에 나오는 건 인정할 수 없어요.”나도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조건을 바꾸죠. 이건 제 일이니 다른 사람은 끌어들이지 마요.”자신이야 어떻게 되든 괜찮지만 양시은이 휘말리는 건 견딜 수 없었다. 그녀가 이 대회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까.그 말을 들은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비웃음을 흘렸다.“겁난다면 그냥 겁난다고 하지 그래요?”“그렇게 하죠.”“시은아, 너...”나도현이 말을 잇기도 전에 양시은이 괜찮다는 눈빛을 건넨 뒤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 조건에 응할게요. 다만 저도 약속을 받아야겠어요
“위에 CCTV도 있어요. 임다혜 씨를 위해 화풀이하려는 거라면 이렇게 말씀드리죠. 나씨 가문 일이라고 하든, 임씨 가문 일이라고 하든, 외부인인 단미주 씨가 낄 자리는 없어요. 이 술 한 잔으로 경고하는 거예요. 제 한계를 시험하려 들지 마요.”나도현의 한계란 곧 양시은이었다. 다른 사람이 그녀를 괴롭히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여러분 다 들으셨죠? 술로 저를 경고하겠다네요. 여러분은 이게 맞는다고 생각하세요? 제가 몇 마디 했다고 이 지경을 만드는 게 말이나 돼요? 나도현 씨 같은 사람은 분명히 벌을 받게 돼 있어요! 다들 궁금하지 않나요? 변호사로 잘 나가던 사람이 왜 갑자기 회사를 운영하겠어요. 변호사가 상업에 뛰어들면 안 된다는 건 기본 상식이에요.”단미주는 나도현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지만 이대로 물러나긴 억울했다. 그 억울함은 임다혜를 대신한 것이기도 했고, 동시에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그녀는 한평생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굴욕을 당해 본 적이 없었다. 나도현이 무슨 권리로 함부로 술을 끼얹느냐는 분노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그 말이 떨어지자 장내가 일제히 술렁거렸다.“그러고 보니 나도현 씨 전에는 유명한 변호사였는데 왜 갑자기 진로를 바꿨지? 설마 내막이 있는 거 아냐?”“그야 뻔하죠. 뒷배경 없이 어떻게 변호사 접고 곧장 대표 자리에 오르겠어요?”“변호사라는 직업 특성상 인맥도 많고 나씨 가문의 오랜 기반도 있잖아요. 뭐든 상상 초월인 거죠.”“돈 많고 힘 있는 사람은 언제나 원하는 걸 얻기 마련이니까,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나도현은 양시은을 데리고 세상 구경을 시키려 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곳은 어느새 나도현을 몰아세우는 비난의 장소로 바뀌어 버렸다. 사람들 태도가 하나같이 막무가내였다.양시은은 나도현을 끌고 나가려 했으나, 그가 오히려 양시은의 손을 단단히 잡았다.나도현은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며 천천히 말했다.“제 직종 변경은 모두 절차에 따른 겁니다. 변호사 자격증도 이미 말소했고, 나
양시은은 자신과 나도현의 관계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뭐라 하든 크게 신경 쓰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두 사람이 오래갈 것 같아요? 둘 사이에는 애초에 신분 격차가 있어요. 나도현 씨가 정말 신경을 안 썼다면 이렇게 자주 연회에 왔겠어요? 결국에는 신경 쓰고 있다는 거겠죠.”말투에서 은근히 도발적인 기색이 풍겼다. 상대는 우아하고 고상해 보였지만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아 보였다.양시은은 낮은 목소리로 비꼬듯 대꾸했다.“도현 씨가 신경 쓴다고 해도, 그건 저희 문제지 그쪽과는 상관없잖아요? 그리고 이런 말, 정말 당당하면 도현 씨 앞에서도 해봐요. 근데 저만 붙잡고 이러는 거 보니까 그럴 용기는 없나 보네요.”양시은은 이 상황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낯선 여자가 모른다고 해도 그녀는 잘 알았다. 나도현이 그녀에게 얼마나 헌신적인지를 말이다.“나도현 씨 앞에서도 얼마든지 말할 수 있어요. 그렇게까지 안 한 건 당신이 눈치 있는 사람인 줄 알아서였는데... 보다시피 아니네요.”여자는 이렇게 말하고 돌아섰다.마침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나도현은 곧장 움직였다. 양시은에게 시비를 건 여자가 임다혜의 친구인 단미주라는 걸 바로 알아챘기 때문이다.단미주가 양시은의 앞에 나타난 목적은 뻔했다.그렇게 생각한 나도현은 대화를 나누던 무리에서 벗어나 양시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는 잠시 망설이지도 않고 양시은과 함께 곧장 단미주를 찾아갔다. 단미주는 나도현이 나타난 걸 보자마자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했다.“당신 고자질하는 취미도 있었네요.”단미주는 나도현이 자신의 앞에 온 이유가 양시은이 무언가 일러바쳤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직접 찾아올 리 없다고 여긴 것이다.“시은이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제가 직접 본 거거든요. 남 험담하는 게 그렇게 좋으면 재능 살릴 만한 직업이라도 구해줄까요, 단미주 씨?”나도현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서빙 트레이에 있던 술잔을 집어 들어 단미주의 얼굴에 그
나도현이 양시은을 바라보며 말했다.“오늘 이현이네랑 만났어. 시은아, 내일 나랑 같이 연회에 가지 않을래?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양시은에게 상류층 행사는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진짜 중시하는 건 나도현의 곁에 함께 있는 일뿐이었다.하지만 나도현은 그녀에게 세상을 보여 주고 싶어 했다. 사람들에게 그녀를 소개하고 싶었고, 가능한 모든 인맥과 자원을 총동원해 그녀의 앞길을 활짝 열어 주고자 했다. 양시은은 지금 이 작은 공간에서 조용히 지내는 편이 더 좋은데도 말이다.“난 지금으로 충분해. 연회 같은 거 별로 관심도 없어. 그냥 안 가면 안 될까?”양시은은 차라리 하민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종종 별이도 만나서 둘이 친해지는 모습을 보는 것이 훨씬 즐거웠다.“당연히 네 의견이 우선이야. 하지만 앞으로 점점 더 큰 자리에 나가야 하는 일이 많아질 텐데 적응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알았어. 먼저 샤워부터 해. 내가 비타민C 챙겨둘게.”이미 나도현이 결정한 듯 보였기에 양시은도 굳이 반대하지 않았다.지금 가장 중요한 건 나도현이 푹 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었다.나도현은 그녀를 살짝 끌어안고 속삭였다.“난 네가 아이를 하나 더 낳아주면 좋겠지만 출산은 고통스럽지. 그리고 우리가 이현이네랑 같은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일까 봐 좀 꺼려지기도 해. 우선 네가 좀 더 편하게 이 생활을 누리면 좋겠어. 다른 건 나중에 천천히 생각하자.”양시은이 예전에 겪었던 삶은 너무 힘겨웠다. 이제는 일단 편안한 생활을 누리고, 혹시 나중에 정말 원하게 되면 무슨 일이든 해줄 수 있다는 뜻이었다.“응, 다 네 말대로 할게.”그녀는 나도현을 사랑했고, 당연히 그의 아이를 낳는 일도 기쁘게 여겼다. 예전에 둘이 떨어졌을 때도 아이를 기어코 낳은 건 그를 향한 마음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다.두 사람은 서로를 꼭 껴안고 잠들었다. 둘 사이의 거리는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단단했다.다음 날, 나도현은 양시은을 데리고
지석훈과 최주하가 동시에 나도현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결혼까지 다 해놓고 그러냐. 하여간 너도 참 대단하다.”여이현은 나도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이미 애도 있는데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네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주면 되는 거야. 게다가 네 와이프 지유랑 같이 있는 거 보니까 괜찮던데?”나도현은 최근 양시은의 상태를 떠올렸다. 그녀가 하고 싶은 일을 다시 하게 된 뒤로는 이전처럼 피곤해 보이지 않아 상태가 훨씬 낫기는 했다.지석훈이 끼어들었다.“나 다음 달 지방 출장 가야 해서 오늘이 아니었으면 못 올 뻔했어.”“나도 내일 해외 나가야 해.”최주하도 맞장구쳤다.그렇게 짬을 내서 다 같이 모인 것이다.여이현은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도현이 놀리다가 너희도 똑같이 될 줄 알아. 너희는 언제쯤 가정 꾸리고 애 낳을 건데? 우리 애들 중학생 될 때까지도 결혼 안 하고 이러고 있을 거야?”그들은 이미 서른을 훌쩍 넘겼다. 여이현은 온지유와 함께 행복한 가정을 이루면서부터 안정을 선호하게 되었다.하지만 최주하는 달랐다.“좋아하는 사람이 없는데 아무나 붙잡고 결혼할 수는 없잖아.”지석훈도 거들었다.“여이현처럼 지유 씨랑 먼저 결혼해 놓고 천천히 좋아하게 되는 쪽도, 나도현처럼 재회한 뒤 오해로 얽히고설키는 쪽도, 내 취향은 아냐.”그는 결혼에 전혀 흥미가 없다는 태도였다.“결혼해서 뭐 해? 맨날 아내랑 애들만 신경 쓰게 되잖아. 난 지금 일하는 게 더 재밌어. 인생이 꼭 결혼이 전부는 아니지.”솔직히 말해서, 그는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이 전혀 부럽지 않았다. 결혼이 도대체 뭐가 좋다는 건지 의문이었다.매일 아내와 아이를 돌보는 것보다 일하는 게 훨씬 더 매력적이지 않나. 게다가 인생이 결혼만이 전부는 아니었다.최주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석훈에게 엄지를 치켜세웠다.“나도 그렇게 생각해. 둘이 결혼했다고 우리까지 끌어들이려는 것 같아.”“뭐야, 네 명이 아니면 못 하는 거라도 있어?”최주하는 여
“훌륭합니다. 양시은 변호사는 법 조항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능력이 인상 깊네요. 주장도 명확하고 논리 정연해서, 이번 사건을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해줬어요.”다른 심사위원들도 잇달아 동의하며 양시은의 변론을 높이 평가했다.대회가 끝난 뒤, 양시은은 관중의 박수를 받으며 무대에서 내려왔다.그녀는 전혀 예상치 못했지만 탈락한 여성 변호사가 갑자기 주먹을 쥐고 외쳤다.“이건 불공평합니다.”조금 전 무대에서 사용했던 마이크가 꺼지지 않았던 터라, 그 소리는 대회장 안팎으로 크게 울려 퍼졌다.순식간에 장내가 조용해졌다.“이번 변론은 양시은 변호사 쪽이 훨씬 수월하게 짜여 있습니다. 게다가 뒤를 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까지 있는 데 왜 참가 자격을 박탈하지 않은 거죠?”그녀의 말에 주위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양시은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표정은 차분하면서도 단호했다.“상황을 잘 모르시는 것 같네요.”양시은의 목소리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저는 어떤 특혜도 받지 않았어요. 모든 절차는 대회 운영위원회의 엄격한 심사를 거쳤고, 온라인상의 소문은 실력 있는 사람을 함부로 정의하지 못한다고 믿습니다.”여성 변호사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여전히 목소리를 높였다.“그래도 지금 누리는 편의가 전부 다 나도현 변호사 덕분이잖아요. 이게 뒤를 봐주는 게 아니면 뭐겠어요?”양시은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나도현 변호사는 대회의 스폰서 중 한 명이고, 스폰서가 추가로 한 명을 뽑을 수 있다는 건 공개된 조항이에요. 그건 운영위원회의 결정이고, 저는 그 범위 안에서 경쟁했을 뿐이죠. 만약 이게 뒤를 봐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스폰서의 추천을 받는 모든 참가자를 그렇게 의심해야 하지 않을까요?”주위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양시은의 말은 많은 이들에게도 나름의 설득력이 있었다.“게다가 대회 중 제가 보여 준 실력은 심사위원과 관중들이 다 지켜봤다고 생각해요.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결과가 아니었다면, 저는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예요
양시은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곧 오늘 대회가 시작되겠네요. 저는 제가 가진 전문성으로 끝까지 가볼 거예요. 설령 못 간다고 해도 떳떳하게 임할 거고요.”그 말을 남기고 양시은은 돌아섰다.곧이어 대회가 시작됐다. 유언비어 때문인지, 방청석에 있던 사람들은 그녀를 편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무시하는 기색까지 드러냈다.그러나 양시은은 전혀 개의치 않고 법 조항을 들고 무대에 올라 당당하게 변론을 펼쳤다.“이모 씨가 몸싸움을 하는 과정에, 증언에 따르면 가해자는 여전히 행동 능력이 있었고 침해 행위가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이모 씨의 생존을 위한 반항은 정당방위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봅니다.”상대 변호사는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반박했다.“법의학자가 부검한 결과, 피해자는 당시 이미 행동 능력을 상실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도 이모 씨가 공격을 이어간 건 방어를 넘어섰다고 볼 수 있죠.”양시은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이모 씨는 체구가 작아서 키가 160도 안 되는 반면 가해자는 180에 달합니다. 체격 차이가 꽤 크기 때문에 가해자가 완전히 재공격 능력을 잃었다고 확신하기 전까지는 손을 뗄 수 없었겠죠? 이모 씨에게 가해자를 고의로 해치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양시은의 목소리는 단단했고, 사건에 대한 이해와 법 조항 활용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 줬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그녀의 전문성에 저절로 감탄하는 분위기였다.상대 변호사 역시 그녀의 논리에 흔들린 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반박했다.“그래도 이모 씨의 행동은 필요한 한도를 이미 넘어섰습니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가상 판사가 기침을 하며 둘 사이의 공방을 제지했다.“핵심은 이모 씨의 행동에 주관적 고의가 있었는지를 어떻게 판단하느냐입니다.”양시은은 미묘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실무에서 주관적 고의 판단은 언제나 가장 복잡하고 까다로운 문제였기 때문이다.“이모 씨는 가해자가 이미 행동 불능 상태인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양시은은 차분하게 설명했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