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동안 인명진은 모든 실험을 견뎌냈다.원래부터 약인이었던 그는 법로의 훌륭한 실험체기도 했다. 노석명의 실험에도 그의 몸엔 벌써 내성이 생겨버렸다.노석명의 부하가 가까이 다가오며 주사를 찔러넣을 때 그는 역습했다. 주사기를 잡아 빼앗은 뒤 노석명 부하의 목으로 세게 찔러넣었다.그런 뒤 인명진은 남자를 책상 밑으로 끌고 갔다. 남자의 옷을 벗겨 빠르게 입었고 얼굴에 마스크도 썼다.곧이어 남자를 유리 용기 안으로 넣어 자신이 있는 것처럼 만들었다.인명진은 실험실에서 오랫동안 지냈기에 이곳의 모든 길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그는 주위를 살피며 빠져나오다가 멀지 않은 곳에 온지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순간 마음이 조급해져 얼른 다가갔다.“율아.”그는 온지유의 앞에 다가가 그녀를 불렀다. 익숙한 목소리에 온지유는 고개를 확 들었다.인명진의 얼굴은 가려져 있었지만 밝은 호박색의 두 눈을 알아볼 수 있었다.온지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명진 씨, 명진 씨가 여기 어떻게 있는 거예요?”그녀는 인명진이 Y 국에 있을 뿐 아니라 내부에까지 들어왔을 거라곤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인명진이 이곳에서 분명 벗어났었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 그녀의 앞에 서 있다는 것은 그녀 때문임이 분명했다.온지유는 순간 이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인명진은 놀라면서도 기뻐하였다.그가 이곳으로 온 이유가 바로 온지유를 찾기 위함이었으니까. 그런데 오는 도중에 노석명에게 납치될 줄은 몰랐고 지금 여기서 온지유를 보게 될 줄은 더 몰랐다. 게다가 온지유는 다행히 멀쩡히 살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주 기뻤다.지금 그는 당장 온지유를 데리고 이곳에서 빠져나가고 싶었다. 설령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고 해도 말이다. 그는 반드시 이곳에서 온지유를 내보낼 생각이었다.인명진은 온지유의 손을 잡았다.“오늘 밤은 우리 함께 모험하자.”그가 이곳에서 한번 빠져나갔으니 두 번째도 빠져나갈 수 있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그는 노석명 부하의 옷을 입고 있었으니 한동
두 사람의 앞길을 막은 사람은 다름이 아닌 바로 모든 사람들이 중독되어 눈을 뜨지 못하고 있다고 알고 있는 신무열이었다.인명진은 무의식적으로 온지유를 등 뒤로 숨겼다.“이 여자를 데리고 여기서 나가려고 합니다.”신무열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손을 들자 요한은 바로 사람들을 이끌고 두 사람을 둘러쌌다.그들은 다른 안전한 곳으로 옮겨졌다.그러나 도착하자마자 누군가 그에게 말했다.“도련님, 큰일 났습니다. 노석명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신무열은 입꼬리를 올리며 차갑게 피식 웃었다. 노석명의 반란은 예상하던 일이었다. 다만 온지유를 데리고 도망치는 인명진 덕분에 반란이 앞당겨졌을 뿐이다.“Y 국의 일은 저희와 무관한 일이에요. 그쪽도 율이가 이런 위험한 곳에 남겨지는 걸 바라지 않잖아요. 안 그런가요?”인명진은 온지유의 손을 꽉 잡으며 미간을 찌푸렸다.지금 이 순간 그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엄숙했다. 얼굴에 꼭 안개가 낀 것처럼 어두웠다.신무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요한과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모든 사람에게 전해. 일단 방어부터...”“도련님,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노석명의 편에 서서 반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저희에게 남은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부하가 고개를 숙이며 신무열에게 말했다.신무열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검은 아우라가 그에게서 흘러나와 주위를 감쌌다. 지금 그의 모습은 마치 지옥에서 걸어 나온 염라대왕 같았다.신무열은 언성을 높였다.“당장 온지유부터 데리고 나가. 온지유를 여이현의 곁으로 보내!”“네, 알겠습니다!”요한은 신무열을 오랫동안 보좌하고 있었던지라 신무열의 생각을 제일 잘 알고 있었다.신무열은 남아서 싸울 생각이었다. Y 국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법로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상황이 좋지 않으니 그도 어느 정도 책임을 져야 했다.인명진이 온지유를 ‘율'이라고 부른 순간 그는 모든 걸 눈치채게 되었다.율은 어릴 때 노예 수용소와 실험실에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인명진은 그의 아
온지유는 신무열 얼굴을 흘러 타고 내리는 피를 발견했다. 눈빛이 심하게 떨렸다. 말을 하려고 했지만 목구멍에 무언가 막힌 것처럼 턱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신무열은 있는 힘껏 온지유를 밖으로 밀었다.“가서 여이현을 찾아! 그리고 돌아오지 마!”온지유는 휘청이더니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그러나 누군가 커다란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잡아 주었다.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총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인명진은 온지유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겼다.그러나 신무열은 노석명의 심복 부하에게 잡혀버렸다. 요한은 목숨을 내걸고 달려들다가 행동을 멈추는 수밖에 없었다.노석명은 비록 얼굴에 흙이 잔뜩 묻었지만 입꼬리를 올리며 비릿하게 웃고 있었다. 드러난 하얀 이가 모든 것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승리를 거머쥔 사람은 노석명이라고.“신무열, 네가 연기까지 하는 사람일 줄은 몰랐네. 난 정말로 네가 중독된 줄 알았다고. 그런데 그게 전부 연기였다니. 내가 널 너무 만만하게 보고 있었던 것 같군.”그는 원래 파티에서 손을 쓸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늘 밤 인명진이 온지유를 데리고 탈출하게 되면서 그는 계획을 앞당길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다행히도 신무열의 계략을 눈치채게 되었다.신무열은 코웃음을 쳤다.노석명이 다가오자 신무열은 빠르게 주먹을 뻗어 공격하려고 했다. 옆에 있던 노석명의 부하가 그의 손을 발견하곤 바로 잡으려고 했지만 노석명이 말렸다.두 사람은 싸우기 시작했다.노석명은 콧방귀를 꼈다.“신무열 도련님은 정말로 감추는 것이 많았군. 오늘 인명진과 온지유가 아니었으면 네가 싸움질도 할 줄 알았다는 걸 몰랐을 거야.”신무열의 싸움 실력은 예사롭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상대해야 할 사람은 노석명이었고 노석명은 법로를 인질로 잡고 있었을 뿐 아니라 총기와 부하들까지 손에 넣었다.요한은 이미 노석명의 부하에게 제압당했다. 노석명은 신무열과 싸우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저 신무열을 약 올리기 위한 싸움이었다.신무열이 흉기를 들어 노석명을
노석명은 방아쇠를 당겨 신무열의 목숨을 끝내려고 했지만 이내 다시 방아쇠를 당기려던 행동을 멈추었다.그는 눈을 가늘게 접으며 신무열의 두 눈 가득한 거만함을 보았다.“난 너랑 네 아버지를 높은 곳에서 떨어져 지옥에서 사는 기분이 무엇인지 맛보게 할 생각이야.”노석명은 이내 손짓을 했다. 그러자 부하가 신무열과 요한을 데리고 가버렸다.그는 부하에게 지시를 내렸다.“가서 인명진이랑 온지유를 잡아 와. 멀리 도망가진 못했을 테니까. 살아 있는 거라면 산채로 데리고 오고 죽은 거라면 시체라도 들고 와!”“네, 알겠습니다.”노석명의 부하들이 대답했다....여이현은 혼란스러운 틈을 타 그들의 근거지로 들어갔다.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소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신무열 쪽의 사람은 꽤나 많았지만 상대가 율이라면 처리할 수 있었다.총을 들고 있던 여이현은 바로 율의 머리를 조준하며 겨줬다.“움직이지 마. 당장 온지유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율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앞엔 한 폭의 그림이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그린 장미밭이었다.생생한 그림이었지만 윤곽과 색채가 너무도 선명해 그림을 그린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율은 이미 누군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었다. Y 국으로 온 뒤로 그녀는 매일 엄청난 고통을 참으며 훈련을 받았다.그녀의 방까지 들어왔다는 건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는 두렵지도 않았다. 주위에 부하들이 매복해 있었으니까 말이다.그러나 그녀의 방으로 들어온 사람이 여이현일 줄은 몰랐다.여이현은 분명 이미 떠났었다. 그런데 온지유를 위해 다시 돌아왔다.그는 여전히 온지유를 위해 목숨까지 마다하지 않고 있었다.“그쪽 생각엔 내가 온지유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줄 것 같아요? 그렇게 쉽게 온지유를 찾아 데리고 나가게 해줄 것 같냐고요.”율은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었다.그녀의 두 눈엔 경멸이 서려 있었다. 꼭 여이현을 더는 신경 쓰지 않는 듯한 그런
여이현은 노승아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너와 노석명의 관계가 증명하고 있었잖아. 그걸 눈치 못 챌 수가 있나?”노승아와 노석명의 관계에 대해 그는 이미 조사를 한 적 있었다. 노석명이 그와 온지유에게 손을 댄 건 오로지 노석명의 야망 때문은 아니었다. 온지유의 신분 때문이기도 했다.그리고 노승아도 이유 중 하나였다.“확실히 영원히 숨길 수 있는 비밀은 없죠. 하지만 제 발로 걸어들어왔으니 절대 쉽게 놓아주지 않을 거예요. 항상 나한테 눈길조차 주지 않았었죠. 온지유가 나한테 무슨 짓을 해도 말이에요... 오빠는 항상 고고했죠. 난 그런 오빠를 반드시 끌어내려 내 노예로 만들 거예요!”여이현의 눈빛은 아주 차가웠다. 심지어 다소 혐오하기도 했다.그러나 그녀의 예상과 달리 더 많은 사람들이 방으로 쳐들어왔다. 그 사람들이 노승아를 둘러쌀 때야 노승아는 여이현에게 속았음을 알게 되었다.하긴 여이현은 어떻게든 온지유를 구하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혼자 쳐들어올 수 있겠는가.여이현은 천천히 일어났다. 조금 전 그녀가 뿌린 약은 여이현에게 아무런 효과도 일으키지 않았다. 그녀는 멍하니 일어서는 여이현을 보았다. 지금 이 순간 여이현은 그저 노승아를 인질로 삼고 싶은 생각만 할 뿐 과거의 일은 더는 여이현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다만 여이현이 노승아를 끌고 노석명의 앞으로 갔을 때 노석명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Y 국의 사람들이 전부 내 발아래에 있지. 고작 법로의 딸을 인질로 삼아 날 협박하다니. 그 협박이 나한테 먹힐 거라고 생각했나?”노석명의 눈빛은 차가웠다. 그는 인질이 된 노승아를 애초에 걱정하지도 않았다.노승아는 당연히 이런 노석명의 태도를 예상했었다. 그랬기에 노석명에게 애초에 아무런 희망을 품지 않았다. 희망을 품지 않으면 실망도 없으니까.그러나 여이현이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노석명의 거짓말을 들춰냈다.“노석명 씨, 정말로 이 여자가 노석명 씨 딸 노승아가 아니라 법로의 딸 율이라고 생각해요?”노석명의 표정이 굳어
여이현의 옆엔 부하도 있었고 거기에다 여이현은 감각이 예민한 사람이었다.노석명의 공격은 여이현을 다치게 하지 못했다.하지만 싸운다면 분명 부상자가 생길 것이다.노석명은 애초에 노승아를 신경 쓰지 않았다. 여이현도 더는 노승아를 인질로 쓰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놓아주지는 않았다.상황이 좋지 않음을 발견한 노석명은 얼른 흰 손수건을 흔들며 여이현에게 대화를 시도했다.“여이현, 네가 여기까지 온 건 평화와 해독제, 그리고 사람을 찾기 위함이겠지. 넌 우리 Y 국 사람들이랑 깊은 원한을 가진 사람도 아니잖아. 우리 사이에도 큰 원한도 없고 말이야. 네가 원하는 걸 내가 줄 수 있어. 지금 당장. 난 너랑 적이 되고 싶지 않거든.”노석명의 목적은 그저 Y 국이었고 이곳의 주인이 되는 것이었다.현재 아무런 약점도 없는 여이현과 적이 된다면 싸워서 밀리게 되는 사람은 바로 그였다.여이현의 안중엔 애초에 노석명이 없었다.“난 온지유를 원해요.”해독제가 뭐라고.전쟁이 뭐라고.죽는 것이 뭐라고.그가 원하는 건 오로지 온지유였다. 무사히 그의 눈앞에 서 있기만 한다면 다른 건 전부 필요 없었다.노승아는 그런 여이현을 보았다.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다.그녀는 참 멍청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도 그녀의 심장은 여이현을 보며 두근두근 미친 듯이 뛰고 이었다. 하지만 여이현의 마음 속에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바로 온지유였다.여이현은 온지유를 위해 모든 걸 내걸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여이현의 안중에 지나가는 개 한 마리보다 못했다.노석명과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그녀를 무시하고 그녀의 정체를 들춰냈다.“여이현, 지금 당창 철퇴하지 않으면 평생 온지유를 볼 수 없을 거야.”“그럼 일단 그쪽부터 죽여야겠네요.”여이현은 싸늘하게 말했다. 진심이었다.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노승아의 어깨에 총을 가져다 댔다.“아악!”노승아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아무리 그간 혹독한 훈련을 받고 있었다고 해도 이런 엄청난 고통은 처음이었다. 이 순간 그녀는 정
여이현은 입술을 틀어 물었다. 손짓 한 번에 그의 병사들이 나서며 신무열과 법로를 부축했다.신무열은 Y 국의 핵심 인물이었다. Y 국은 아직 안정이 필요한 나라였고 만약 전쟁을 멈추지 못한다면 나라는 폐허가 될 것이다.그는 이내 용경호와 성재민에게 지시를 내렸다.“주위를 샅샅이 뒤져서 인명진 씨랑 온지유를 찾아와.”지금 상황은 좋지 않았다. 인명진에겐 핸드폰이 없었고 온지유에게 다친 곳은 없는지도 몰랐다. 심지어 노석명이 도망가버렸기에 최악의 상황에서 노석명이 먼저 온지유를 찾았을 수도 있었다.여이현은 그 최악의 상황을 바라지 않았다.“대장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이미 사람들을 시켜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온지유 씨에겐 절대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 겁니다.”용경호와 성재민은 거의 동시에 말했다.신무열은 여이현의 두 눈에서 견고함을 보아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지만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여이현에게서 신무열은 온지유를 향한 깊은 애정과 사랑을 느꼈다. 그리고 신무열에게서 여이현은 뭔가를 눈치채게 되었다. 거기에다 인명진이 온지유를 대하는 태도까지 결합하면 대충 상황을 알 수 있었다.“신무열 씨, 여기는 신무열 씨가 맡으세요. 전 전쟁을 좋아하지 않거든요.”여이현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 신무열도 모든 걸 알게 되어 갈라진 목소리로 답했다.“저도 전쟁을 좋아하지 않아요.”그는 전쟁을 싫어했고 전쟁 때문에 부상자가 생기는 것도 싫었다. 매번 Y 국 인구수가 줄어들 때마다 가슴이 아팠지만 Y 국의 현 상황에 그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다행히 노석명이 도망쳐버리고 중요한 순간에 여이현이 나타나 주었다. 이 모든 건 전부 온지유 덕분이었다. 온지유가 아니었으면 Y 국엔 오늘도 없었을 것이다.여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그는 여전히 Y 국에 남아 있었다. 다만 노승아를 찾아가 중요하게 할 일이 있었다.노승아는 온지유를 이곳으로 데리고 왔을 뿐 아니라 온지유를 사칭하면서 조금 전에는 그와 함께 죽으려는 생각까지 했다. 대
“날 구해준 사람이 정말로 너 맞아?”노승아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여이현이 입꼬리를 올리며 차갑게 픽 웃었다.여이현은 노승아의 앞에 우뚝 서 있었다. 190 CM 넘는 그는 꼭 눈앞에 웅장한 산이 있는 것처럼 압박감이 들었다. 특히 여이현의 눈빛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그녀를 내려다보는 여이현의 모습은 마치 높은 왕좌에 올라앉은 사람처럼 위엄이 느껴졌다.노승아는 이런 여이현을 빤히 보았다. 너무도 낯설었다.예전의 여이현은 그녀를 차갑게 대하지 않았다. 지금 이런 모습도 그녀의 앞에서 보인 적 단 한 번도 없었고 그녀는 여이현에 대해 모르는 것도 없었다.더는 속일 수 없으니 이제는 본색을 드러내는 수밖에.더구나 여이현은 아무것도 눈치 못 챘던 상황에서도 그녀에게 눈에 띄게 차갑게 대하지 않았던가. 그녀도 이젠 포기할 때가 되었다.“내가 구했든 아니든 너한테 중요하긴 해? 여이현, 어차피 너 마음속엔 온통 온지유 뿐이잖아. 그런데 너랑 온지유 사이를 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굳이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지 않아?”노승아는 더 짙은 미소를 지었다.누군가는 노승아에 대한 처벌이 너무도 잔인하다고 했지만 여이현은 그저 싸늘한 눈빛으로 지켜볼 뿐이다.그와 온지유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노승아가 알려주지 않아도 알았다....한편 온지유 쪽.인명진은 그녀를 데리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온몸에 힘이 빠진 온지유는 심지어 헛구역질도 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온지유는 더는 걸을 수가 없었다. 헛구역질하던 그녀는 결국 토하기 시작했다.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인명진은 너무도 걱정스러웠다.“지유야, 여이현 씨가 있는 곳까지 가려면 한참 멀었어. 얼른 기운 차려야 해. 안 그러면 노석명이 뒤쫓아 올 거야!”이곳에 한시라도 벗어나고 싶었던 인명진은 온지유를 데리고 얼른 도망치고 싶었다.그의 머릿속엔 오로지 하나의 생각뿐이다. 반드시 온지유를 살려내는 것.그걸 온지유가 모를 리가 있겠는가?하지만 그녀와 법로의 관계가 떠올랐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