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이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설명했다.“나랑 제나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그냥 우연히 구해준 난민이었어.”그의 말에 온지유는 웃음만 나왔다.“그래, 맞아. 나도 알아. 이미 두 사람에 대해 들었거든. 하지만 갈 곳을 잃은 여자와 아이가 얼마나 많은데 왜 하필 제나 씨만 구해준 거야? 그냥 제나 씨가 이쁘니까 구해준 거잖아. 아이도 있는 사람인데, 만약 나중에 둘이 정말로 그런 사이로 발전한다고 해도 넌 그냥 그 아이의 새아빠만 될 수밖에 없어. 물론 너만 좋다면 뭐가 어찌 되었든 상관이 없겠지!”“난 그 여자가 내 천막에 있는 줄 정말로 몰랐어.”여이현이 말했다.“하지만 절대 네가 상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제나 씨를 구해준 건 제나 씨 남편이 우리나라 사람이어서 그랬어. 제나 씨 남편이 우리를 많이 도와주었거든. 그것 빼곤 정말 아무것도 없었어.”온지유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 그의 손을 확 뿌리치며 차갑게 말했다.“나한테 설명을 왜 해. 우린 이미 이혼한 사인데. 네가 뭘 하든 내 알 바 아니라고!”여이현의 손이 허공에 멈추었다. 공기만 잡혔다.급해진 나머지 그는 그녀와 이혼했다는 사실을 잊고 말았다. 본능적으로 따라 나와 그녀를 잡은 뒤 설명한 것이다.그녀의 오해를 사는 건 정말로 싫었다.몸이 저도 모르게 먼저 반응을 보이며 그녀를 뒤따라 나왔다.하지만 진정이 되었을 때 그는 이 충동적인 감정을 참아야 했다.“미안해.”여이현이 나직하게 말했다.“내가 실수를 했어.”온지유는 입술을 틀어 물었다. 속에서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말로.그가 대체 뭘 두려워하고 있는지 말이다.그러나 그녀는 끌어 오르는 분노를 참는 수밖에 없었다.“일찍 쉬어.”여이현이 그녀에게 말했다.“너무 늦게까지 눈 뜨고 있지 말고.”온지유는 그를 빤히 보았다. 마치 누가 먼저 분노를 터뜨릴지 관찰하는 것처럼.여이현은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저 침묵하는 수밖에 없어 다시 몸을 돌려 천막으로 돌아가려고 했다.그녀는 여전히
그 순간 온지유는 눈이 확대되었다.이 모든 상황이 꿈처럼 느껴졌다.그녀는 멍하니 서 있었다.여이현의 혀가 그녀의 입술을 벌리며 달콤하게 입안을 헤집었다.이내 그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품에 꽉 끌어안았다. 행여나 그녀가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 말이다. 이런 방법으로 그는 그동안 그녀가 그리웠던 마음을 풀고 있었다.그녀가 너무도 그리웠다.매일매일 그리움 속에서 살았다.위험한 순간에도 머릿속에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온지유는 그의 뜨거운 키스에서 자신을 향한 그리움을 고스란히 느꼈다. 그래서 거부하지 않았다. 두 팔을 그의 넓은 등반에 올리며 최선을 다해 그를 받아들였다.스르륵 눈을 감았다. 왜 그런지 모르겠으나 이상하게도 눈물이 났다.눈물이 똑 흘러내렸다.여이현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뜨거운 키스를 했다.말할 필요도 없이 행동으로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온지유는 자신이 언제, 어떻게 그의 천막까지 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눈을 뜨게 되었을 때 보이는 건 여이현의 품이었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두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만졌다. 그의 눈가는 붉게 물들어 있었고 쌕쌕 숨을 쉬고 있었다.제나가 가져왔던 음식은 이미 치워버린 지 오래였다.천막엔 오직 둘 뿐이었다.온지유는 더는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여하간에 많은 일을 겪었고 내전 중인 국가에 머물고 있었던지라 그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소중히 여기려고 했다.이런 시간이 언제 끝날지 모르니까.설령 후회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여이현의 호흡이 다소 거칠어졌다. 불어오는 숨이 뜨거웠음에도 온지유의 허리를 팔에 핏대가 설 때까지 꽉 끌어안고 있었다. 그리곤 나직하게 그녀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이곳은 언제 어디서든지 전쟁이 일어날 수 있으니까 내 시야에서 벗어나지 마. 그냥 내 곁에 있어. 그래야 내가 널 지켜줄 수 있으니까.”온지유가 시야에 사라졌을 때 여이현은 싸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사실 불안하
여이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난 멀쩡히 살아 있잖아. 그 사람들에 비하면 난 이미 충분히 잘살고 있어.”그 말에 온지유는 코끝이 시큰해졌다. 뜨거운 액체가 두 눈에서 흘러나올 것 같았다.고개를 젖히며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느낌이 싫었다.“그럼 이것만 물을게. 내 독은 어떻게 해독한 거야? 해독제는 어디서 난 거냐고.”온지유는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여러 명이 열심히 해독제를 찾으러 다녔지만 아무런 수확도 없었다. 그런데 여이현이 무심코 가져와 그녀의 목숨을 살려주었다.너무도 이상했다.여이현은 한참 침묵했다.“그 해독제는 내가 애원해서 받은 거야.”온지유가 물었다.“누구한테 애원한 건데?”“아버지.”온지유는 다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아버지?”“응, 네가 아는 내 아버지 아니고 나를 낳아주신 친아버지한테.”여이현은 냉담하게 말했다.온지유는 뜻밖이었다.“친아버지를 찾았어?”“아니, 아버지가 나를 찾아오셨어.”온지유는 너무도 뜻밖이었다. 하지만 여이현의 어투에서 여이현이 그다지 친부를 찾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여하간에 살면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으니 친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그러나 그런 친부를 받아들인 건 오로지 그녀의 해독제를 위해서였다.이런 생각에 온지유는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여이현의 발목을 잡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내가 널 힘들게 했네.”그러나 여이현이 말했다.“아니, 그런 적 없어. 네 목숨은 나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었으니까.”온지유는 침울한 기분이 들었다.“그래서 친아버지랑 거래한 거야?”“응.”여이현이 답했다.“난 아버지랑 거래했어. 3개월만 지나면 난 더 이상 여이현이 아니게 될 거야. 내가 가진 모든 건 전부 너한테 줄 생각이야. 네가 나 대신 지켜줘. 그건 전부 할아버지가 나한테 주신 거니까. 나 대신 잘 보관하고 있어. 그거면 남은 생도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거야.”이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여
“해도 돼?”여이현이 잠긴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했다.“정말 후회 안 하겠어?”그는 온지유에게 동의를 구하고 있었다.온지유가 충동적인 마음으로 하지 않길 바랐다.“응, 후회 안 해.”온지유는 그를 보았다.“결혼 생활 그래도 꽤 오래 했는데, 적어도 이번엔 진짜 부부로 살아보고 싶어.”그녀는 그에게 별다른 요구가 없었다.여하간에 사랑했던 사람이었고 그의 아내기도 했으니까.비록 두 사람 사이엔 아이도 있었지만.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아쉬웠다. 그와 이렇게 끝을 마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알았어.”여이현은 몸을 구부리더니 온지유의 입술에 키스했다.그의 행동은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 온지유를 하늘이 내려준 소중한 선물처럼 말이다.온지유는 그의 손길을 받아들이며 느끼고 있었다.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황홀한 기분이 들었고 온몸이 찌릿찌릿했다.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너무 편안하고 몸을 감싸 안는 손길이 부드러워 그녀는 물속에 있는 것 같았다.가끔 감전된 것처럼 몸이 짜릿짜릿해 그녀는 저도 모르게 야릇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여이현은 거친 숨을 내쉬었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최선을 다해 억제하고 있었다. 행여나 그녀가 다칠까 봐 말이다.그러나 피가 뜨거워지며 충동이 머릿속을 지배해 버렸다.시뻘게진 두 눈이 증명하고 있었다. 그가 이미 이성을 잃어버렸음을. 온지유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세게 주지 않았지만 붉은 손자국을 남기고 말았다.그는 그녀의 몸 곳곳에 흔적을 남겼다.온지유는 흘러나오는 소리를 참으며 고통을 즐기고 있었다.밤새 내내 그에게 시달렸다.가끔은 뜨거운 열기에 몸이 후끈거리기도 했고 부드러운 그의 행동에 편안하기도 했다....이불이 유난히도 푹신했다.온지유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온몸이 구름 위에 있는 것처럼 붕 뜬 것 같았다. 심지어 아프기도 했다.눈을 떴을 때 보이는 건 천막이었다.그녀가 살던 집이 아니었다.황홀했던 어젯밤도 꿈이 아니었다.어젯밤 그녀는
아침부터 그들은 전부 호출되었다.온지유에게 천막에서 나올 시간을 준 것이다.용경호의 말에 온지유는 어젯밤 뜨거웠던 열기가 떠올라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럼에도 그녀는 담담하게 답했다.“네, 아주 잘 잤어요. 그럼 하던 거 계속하세요.”“네, 알겠습니다.”용경호도 이상함을 눈치챘다.비록 어젯밤의 그 일들이 꿈이 아니었지만 여이현이 보이지 않으니 뭔가 전부 꿈처럼 느껴졌다.여이현은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아 온지유는 더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다만 그녀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여이현이 돌아오면 그들이 제일 먼저 그녀에게 알릴 테니 말이다.그녀는 아주머니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행여나 약초 말리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도착하자마자 아린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왜 이제야 왔어요? 어젯밤도 늦게 잔 거죠? 신무열 선생님이 오셨어요!”신무열을 언급하는 아린은 아주 흥분한 상태로 보러 가려고 했다.“다른 사람들은 이미 나갔어요. 다들 선생님이 어떤 신기한 물건을 가져왔나 구경하러 간 거예요. 우리도 얼른 따라가요! 어서 가요!”신무열이 왔다는 소식에 온지유는 사실 마음이 놓였다.적어도 무사하다는 얘기였으니까.신무열이 떠난 뒤 동맹군이 쳐들어왔기에 행여나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걱정되었다.온지유는 아린의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신무열 씨는 매번 너희들한테 선물을 사 오는 거야?”“네! 맞아요!”아린은 웃으며 말했다.“신무열 선생님은 아주 멋진 사람이에요. 얼굴도 잘생기고 저희한테도 잘해줘서 마을에 사는 여자들 대부분 선생님을 좋아하고 있어요. 하지만 선생님은 결혼할 생각이 없대요. 전 적당한 나이가 되면 선생님에게 시집가고 싶지만 제가 한참 부족한 사람이라는 거 알고 있어요. 그래도 전 선생님이 좋아요!”온지유는 생각에 잠긴 채 말했다.“그럼 돈도 많겠네.”신무열은 이곳으로 와 글을 가르치는 사람이었다.다른 목적도 없었고 그저 이 마을에 사는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다.돈에도 딱히 관심이 없었다
그들도 신무열이 걱정되었다.그러나 신무열이 말했다.“날 걱정할 필요는 없어.”온지유는 신무열을 빤히 보았다. 마을이 동맹군에게 무너져도 딱히 별다른 감정이 없어 보였다.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신무열은 시선을 돌려 온지유를 보았다.“어때요. 여긴 적응됐어요?”“네, 아주 잘 적응하고 있어요.”온지유가 답했다.“마을 사람들과도 잘 지내고 있고요.”“그럼 다행이네요.”신무열의 눈빛이 살짝 변하더니 또 물었다.“대장님이란 사람이 온지유 씨와 같은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면서요. 저도 봤어요. 다들 학교를 다시 지어주고 있는 것을요.”그러더니 미묘한 말을 했다.“화국 사람들은 참 정이 넘치는 사람들인 것 같네요. 아무런 조건도 없이 마을 사람도 구해주고 말이에요. 심지어 원하는 보수도 없잖아요.”그는 다소 비꼬며 말했다. 아마 이런 군인들이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듯했다.게다가 그의 인식을 바꾸어 버렸다.온지유는 한마디 거들어 주었다.“저희 나라에서는 일반인들의 물건을 약탈하라고 군인이 있는 게 아니거든요. 군인들은 당연히 사람들을 지켜줘야 하는 거죠. 이렇게 해야 더 평화롭고 좋은 나라를 만들어 갈 수 있는 거거든요.”그녀는 아주 자신만만하게 말했다.전쟁으로 난장판이 된 이곳을 보며 화국이 얼마나 좋은 나라인지 뼈저리게 느껴졌다.신무열은 그녀의 말에 놀란 듯 살짝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다시 미소를 지었다.“부럽네요. 다들 행복하게 살 수 있잖아요.”다른 나라들보다는 확실히 행복지수가 높았다.“죄송해요. 저한테 넘긴 임무를 제가 잘 수행하지 못했어요.”온지유는 다시 말을 이었다.“마을뿐 아니라 학교도 무너져 내렸거든요. 그래서 아이들한테 공부도 가르치지 못했었어요. 이젠 무열 씨가 돌아왔으니 무열 씨가 직접 해주면 되겠네요.”“네.”신무열이 답했다.“전 내일 야외 수업하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지유 씨도 구경하고 싶으면 와서 구경해도 돼요.”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참, 이건 네 선물이야.”그는 이내 아린에
“진심에서 나오는 미소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김명무가 율을 달랬다.그러나 율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았다.“그럼 뭐가 진심인데요? 아빠도 날 딸로 받아들였는데 왜 날 동생으로 받아주지 않는 건데요? 어릴 때 사이가 그렇게 좋았으면서 왜 지금은 변한 거냐고요!”“어쩌면 아가씨가 돌아온 게 아직 적응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김명무가 계속 말을 이었다.“도련님께선 그동안 계속 아가씨만 찾고 계셨으니까요.”율은 차갑게 코웃음을 폈다.“아니요. 오빠는 그냥 날 동생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거예요!”김명무는 설명하려고 했다.“그건 아닐 겁니다...”“그런 게 아니면 왜 다른 여자한테는 저렇게 잘해주는 건데요? 심지어 선물도 챙겨주고 말이에요! 나도 없는 선물을 저 여자가 받고 있잖아요!”율의 눈빛이 사나워지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왜 그런 거냐고요! 당장 저 여자를 죽여요. 저 여자가 죽고 나면 누구한테 잘해주는지 지켜볼 거예요. 내가 갖지 못한 걸 다른 사람도 가질 수 없어야 해요!”“네, 알겠습니다!”율은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원망과 증오의 감정이 흘러넘쳤다. 지금 그녀의 모습은 꼭 사냥감을 노리는 독사의 모습 같았다.신무열은 자기 할 일 하러 갔다.선물을 받은 온지유는 이곳에 남아 아이들과 놀아주고 있었다.아이들은 당연히 온지유를 받아들였고 아주 좋아했다. 호기심이 가득했던 아이들은 궁금한 것을 전부 물어보았다.어쩌면 아이의 엄마가 될 뻔했던지라 온지유는 아이들에게 인내심이 아주 컸다.온지유는 아이들에게 이것저것 가르치고 나니 피곤해졌다.어젯밤 푹 쉬지 못했던 터라 옆에 있던 테이블에 엎드려 조금 눈을 붙이려 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해는 이미 저물었다.아이들은 돌아간 지 오래였다.“어머.”온지유는 시간이 이렇게 빨리 흘러갈 줄은 전혀 몰랐다.몸을 일으키는 순간 자신의 몸 위로 셔츠가 덮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셔츠엔 은은한 우디향이 났다.옷을 끌어당겨 확인했다. 셔츠는 신무열의 것이었
화살은 단단한 나무에 제대로 박혔다.그러나 온지유는 여전히 갑자기 날아온 화살에 놀란 상태였다.한참 지나도 진정할 수 없었다.신무열은 미간을 찌푸린 채 나무가 무성한 깊은 곳을 보았다. 숨어 있던 사람은 계획이 실패했음을 알게 된 후 바로 자리를 떴다.그럼에도 신무열에게 들키고 말았다.“괜찮아요?”신무열은 쫓아가지 않고 오히려 온지유부터 걱정했다.온지유의 두 눈은 휘둥그렜다. 갑자기 날아온 화살에 정말이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마을에 사람이 많았던지라 안전하다고 생각했다.그런데 그녀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그녀는 대체 누구의 미움을 산 것일까?꼭 이미 누군가의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지유 씨.”신무열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온지유의 모습에 다시 불렀다.온지유는 그제야 정신이 들어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은 캄캄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범인은 이미 도망쳤을 것이다.“전 괜찮아요.”온지유가 말했다.신무열은 그제야 온지유를 놓아주었다.그녀는 화살이 박힌 나무를 보더니 다가가 화살을 빼냈다.아주 평범한 화살이었다.그랬기에 누구의 화살인지 알 수 없었다.“방금 뭔가 눈치챈 거죠?”온지유는 고개를 돌려 신무열을 보았다. 방금 그가 한 말이 꼭 그녀에게 알려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신무열이 말했다.“그냥 느낌이 이상했어요. 다치지 않아 다행이네요.”온지유는 화살을 꽉 들고 신무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그녀는 생각에 잠겼다.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었다.신무열은 그런 그녀를 눈치챘다.“저한테 할 말이 있어요?”온지유가 말했다.“제가 왜 이곳으로 왔는지 알고 있어요?”그녀는 어느새 진지한 어투로 말하고 있었다. 신무열도 진지하게 대답했다.“저한테 말씀하지 않은 거로 알고 있는데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전 친구를 찾으러 온 거예요. 저에 대한 비밀을 알고 싶었거든요.”심각한 얼굴로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심무열의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