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살은 단단한 나무에 제대로 박혔다.그러나 온지유는 여전히 갑자기 날아온 화살에 놀란 상태였다.한참 지나도 진정할 수 없었다.신무열은 미간을 찌푸린 채 나무가 무성한 깊은 곳을 보았다. 숨어 있던 사람은 계획이 실패했음을 알게 된 후 바로 자리를 떴다.그럼에도 신무열에게 들키고 말았다.“괜찮아요?”신무열은 쫓아가지 않고 오히려 온지유부터 걱정했다.온지유의 두 눈은 휘둥그렜다. 갑자기 날아온 화살에 정말이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마을에 사람이 많았던지라 안전하다고 생각했다.그런데 그녀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그녀는 대체 누구의 미움을 산 것일까?꼭 이미 누군가의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지유 씨.”신무열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온지유의 모습에 다시 불렀다.온지유는 그제야 정신이 들어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은 캄캄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범인은 이미 도망쳤을 것이다.“전 괜찮아요.”온지유가 말했다.신무열은 그제야 온지유를 놓아주었다.그녀는 화살이 박힌 나무를 보더니 다가가 화살을 빼냈다.아주 평범한 화살이었다.그랬기에 누구의 화살인지 알 수 없었다.“방금 뭔가 눈치챈 거죠?”온지유는 고개를 돌려 신무열을 보았다. 방금 그가 한 말이 꼭 그녀에게 알려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신무열이 말했다.“그냥 느낌이 이상했어요. 다치지 않아 다행이네요.”온지유는 화살을 꽉 들고 신무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그녀는 생각에 잠겼다.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었다.신무열은 그런 그녀를 눈치챘다.“저한테 할 말이 있어요?”온지유가 말했다.“제가 왜 이곳으로 왔는지 알고 있어요?”그녀는 어느새 진지한 어투로 말하고 있었다. 신무열도 진지하게 대답했다.“저한테 말씀하지 않은 거로 알고 있는데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전 친구를 찾으러 온 거예요. 저에 대한 비밀을 알고 싶었거든요.”심각한 얼굴로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심무열의
신무열이 눈치챈 순간 알게 되었다.“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도 좋지 않아요.”신무열이 일침을 날렸다.“다만 지유 씨가 다치게 된 건 제 책임도 있으니까 두 번 다시 다치게 하지 않을 거예요.”그는 온지유의 생활을 방해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온지유는 곰곰이 생각했다.“괜찮아요. 전 여기서 쉽게 죽을 운명이 아니거든요.”“가죠.”신무열은 계속 그녀를 데려다주려고 했다.그녀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법로에 관한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보아하니 대답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어쩌면 신무열이 여전히 그녀를 믿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게다가 법로를 언급했을 때 신무열은 딱히 별다른 반응이 없는 것을 보아 어쩌면 정말로 법로와 연관이 없는 사람일 수도 있고, 또 어쩌면 그녀에게 말해주고 싶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그녀는 신무열이 돌파구라고 생각했다.일단 그를 좀 더 지켜본 후에 다시 물어보기로 했다. 괜히 나섰다가 일을 망칠 수 있으니 말이다.“지유 씨 돌아왔어요!”온지유와 신무열이 마을로 돌아오자 누군가 바로 소리를 지르며 알렸다.그녀가 학교로 간 후로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기에 그들이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마침 나타난 여이현이 함께 나란히 서 있는 온지유와 신무열의 모습을 보았다.그는 시선을 돌려 신무열을 훑어보더니 다가오며 물었다.“왜 이렇게 늦었어? 마침 너 찾으러 가려던 참이었어.”온지유가 말했다.“잠깐 눈 감고 쉬고 있다는 게 깜빡 졸아버리고 말았어. 참, 내가 소개해줄게. 이분은 신무열 씨.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야.”“무열 씨, 이분은 여이현이라고 해요.”신무열은 미소를 지으며 여이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 마을 사람들에게 들었어요. 마을 사람들을 구해주었다면서요.”“네.”여이현은 원래부터 무뚝뚝한 사람이었고 경계심도 많은 사람이었지만 예의상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저도 신무열 씨에 대해 많이 들었어요. 마을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라면서요. 그런데 마을 주민
여이현은 심기가 아주 불편해 보였다.“대체 무슨 일이기에 저 사람이랑 온 오후 함께 있은 거지?”온지유가 말했다.“말했잖아. 깜박 잠들었다고.”여이현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졸리면 돌아와서 자도 되잖아. 남녀가 유별한데 왜 꼭 같이 있어야 했던 거지? 괜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말이야.”그의 말에 온지유도 기분이 다소 나빠졌다.“남녀가 유별하다고? 아이들도 있었어. 그리고 나랑 신무열 씨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그런데 누가 헛소리를 하겠어? 지금 사람들은 옛날처럼 고리타분하지 않아. 그러니까 이현 씨도 이젠 꽉 막힌 사람처럼 굴지 말아줘.”그녀가 말을 마치자 여이현은 입술을 틀어 물며 표정을 굳혔다.“그리고 아침부터 사라진 건 이현 씨잖아. 코빼기도 안 보이던데. 그러니까 나도 내 할 일을 하러 간 거잖아. 대체 뭐가 문제야?”“됐어. 그만해. 싸우고 싶지 않아.”온지유는 더는 말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대화를 이어가 봤자 서로의 기분만 상할 테니 말이다.그러자 여이현이 말했다.“난 너랑 싸울 생각 없었어.”그는 부드럽고 다정한 어투로 말했다. 온지유가 화내는 것을 원치 않았다.웃는 얼굴에 침을 못 뱉는다고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여이현에 온지유는 화가 사그라들었다. 여이현은 적당히 꼬리를 내렸던지라 온지유도 기분이 풀렸다.“아린이랑 같이 갔어. 신무열 씨가 마을 떠나기 전에 나더러 남은 아이들 공부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었거든. 나도 어찌 보면 선생님이니까 같이 가준 거야. 아무 일도 없었어.”“알았어.”여이현이 말했다.“돌아가서 쉬어.”온지유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그는 아주 평온한 얼굴이었고 더는 그녀와 신무열에 관해 신경 쓰지 않기로 한 것 같았다.그녀에게 돌아가라고 한 건 그녀의 천막으로 돌아가라는 의미였다.그러니까 그녀와 함께 있고 싶지 않다는 얘기였다.어젯밤 일로 그녀는 여이현이 더욱 자신과 함께 잠을 자길 원할 줄 알았다.지금 보니 전부 착각이었다.어젯밤 그가 그녀에게 얼마나 거칠게 굴었는지
“모든 사람들이 인정했어. 다들 내가 잃어버린 오빠 여동생이라고 했다고!”율은 소리를 질렀다.신무열이 말했다.“그래, 오랫동안 잃어버렸으니 누군가 내 동생 신분을 사칭하고 돌아온 것일 수도 있지. 만약 고생하면서 살고 싶지 않은 거라면 더 이상 내 사생활에 관여하지 마!”율은 주먹을 꽉 쥐었다.돌아온 지 오래되었지만 신무열이 이렇듯 화를 내는 목소리는 처음 들어보았다.그는 지금 그녀를 의심하고 있다.그랬기에 그녀는 긴장해졌다.신무열은 그런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았고 자신의 사생활에도 간섭하는 걸 원치 않았다.특별히 마을로 돌아가는 횟수를 줄이며 온지유와의 만남도 자제했다. 괜히 자주 만나면 율의 눈에 거슬리게 될까 봐 말이다.그런데 율은 그런 그의 마음마저 몰랐다.신무열은 떠나 버렸다.덩그러니 남겨진 율은 얼굴을 한껏 찌푸리고 있었고 손톱이 손바닥에 박힐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아가씨, 도련님이 하신 말씀을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입 닥쳐요!”온지유는 김명무를 보며 바로 욕설을 내뱉었다.“전부 그쪽 때문에 일어난 일이잖아요. 그쪽이 내가 시킨 대로 온지유를 죽였으면 이런 일이 있었겠어요? 시킨 일도 제대로 못 해내고 나만 오빠한테 혼나고 말이에요! 정말 쓸모없는 사람이네요!”김명무는 고개를 푹 숙이며 그녀의 욕설을 듣는 수밖에 없었다.“온지유!”율은 이를 빠득 갈며 온지유의 이름을 불렀다.“왜 자꾸 내 앞에 나타나 내 일을 방해하는 건데!”“이번엔 내가 시키는 대로 해요!”그녀는 순간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이번엔 직접 온지유를 죽일 생각이다.괜히 뒤탈이 생기지 않게 말이다.김명무는 눈빛이 음험해진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도련님께서 만약 아시게 된다면 분명 아가씨를 가만두지 않으실 겁니다...”“내가 하라면 하라는 대로 해요!”율은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흥, 오빠가 아무리 날 가만두지 않는다고 해도 아빠 말씀까지 거역할 수 있겠어요?”결국 김명무는 하는 수 없이 움직여야 했다....온
온지유는 조금 더 기다리다가 책상 옆으로 갔다. 위에는 붓으로 쓴 글씨와 외국어책이 있었다.책을 들고 펼쳐보니 안에서 책갈피가 떨어져 나왔다.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지만 왠지 익숙한 패턴의 책갈피였다. 어딘가에서 봤던 것 같았다.온지유는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러다가 그녀와 홍혜주를 쫓던 사람들의 옷에 똑같은 패턴이 있던 것을 떠올렸다. 그녀는 충격에 잠겼다.‘어떻게 이런 우연이... 무열 씨랑 법로가 정말 연관이 있는 건가?’“다 됐어요. 얼른 먹으러 와요.”신무열은 국수 두 그릇 들고 왔다. 온지유는 고개를 돌리는 동시에 책갈피를 소매에 숨겼다.“네.”그녀는 신무열과 마주 앉았다. 국수는 가장 간단한 육수에 계란을 넣은 것이었다. 아주 담백해 보였다.“제가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어서요. 지유 씨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네요.”온지유는 젓가락을 들고 면을 휘휘 저었다. 시선은 신무열에게 멈춰 있었다. 그러자 열심히 먹고 있던 신무열이 젓기락을 내려놓으며 물었다.“뭐라도 찾아냈어요?”그는 당연히 온지유가 뒤져봤다는 걸 알았다. 온지유가 찾아온 목적도 알았다. 그저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온지유도 더 이상 숨기지 않고 책갈피를 꺼내 놓았다.“저 이 패턴 본 적 있어요. 지난번 사람들한테 쫓길 때요. 그 사람들 옷에 이 패턴이 있었어요. 무열 씨 역시 법로랑 연관이 있는 거죠?”“그냥 패턴일 뿐이에요.”“저는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책상을 뒤져볼 걸 알았다면, 이 책갈피도 일부러 넣어둔 거겠네요. 왜 그랬어요? 무열 씨 목적은 도대체 뭐예요?”온지유의 마음속에는 불확실성으로 가득했다. 신무열처럼 부드러운 사람이 도무지 나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온지유가 자신을 경계하는 걸 보고 신무열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그건 제가 물어야 할 것 같은데요.”“제가 먼저 물었어요. 오늘 아침 저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랑 만났던 거죠?”“네.”신무열은 숨김없이 말했다.“그 사람 제 여동생이에요.”“여동생이 있었어요? 무열
온지유는 다시 한번 충격받았다. 그녀는 손을 뻗어 줄곧 하고 있던 팔찌를 바라봤다.“이게 무열 씨 어머니 유품이라고요?”“네.”신무열이 대답했다.“말도 안 돼요. 이게 무열 씨 어머니 유품이라고 어떻게 확신하죠? 그냥 팔찌일 뿐이에요. 비슷한 디자인이 분명히 있을 거예요”“아뇨, 이건 단 하나밖에 없어요.”온지유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지유 씨는 옥에 관해 잘 모르죠? 이 주변에는 천연 옥이 잘 나와요. 그리고 천연 옥은 절대 똑같지 않아요. 지유 씨 팔찌는 제 어머니의 유품이 확실해요. 그래서 제가 의심한 거기도 하고요. 지유 씨 혹시 다른 이름 없어요?”온지유는 주먹을 꼭 쥐며 팔찌를 벗었다.“원래도 제 것이 아니었어요. 친구한테서 선물 받은 거라...”이건 인명진이 준 것이다. 왜 주는지 알려주지도 않고 말이다. 그녀도 이상하게 생각하던 참이었다.인명진은 이 팔찌를 아주 소중히 여겼다. 그녀에게 선물 주면서도 부적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물건을 다른 말 없이 그녀에게 준 것이다.신무열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이런 일로 거짓말할 사람도 아니었다.그녀는 전부터 신무열이 팔찌를 뚫어져라 보던 것을 발견했다. 이것저것 묻는 것만 봐도 연관이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일 것이다.“전에도 남자한테서 받은 거라고 했죠. 얘기를 나눠도 그 사람이랑 나눠야 할 것 같네요. 그 사람한테 엄청 중요한 팔찌라고 했거든요.”“그 중요한 걸 왜 지유 씨한테 줬대요?”“저도 몰라요.”“지유 씨가 팔찌의 주인이어서겠죠.”온지유는 곧장 부정했다.“절대 아니에요. 저는 부모님이 있어요. 형제자매도 없어요. 오해하지 마세요. 여동생이 상상과 다르다고 해서 저를 끌어들이는 건 사절이에요.”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떠나려고 했다. 그러나 팔찌가 책상에 놓여 있는 것을 보고는 다시 돌아왔다.“이 팔찌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떠나서, 제 친구한테 중요한 물건이니 일단 가져갈게요.”“네. 지유 씨한테 있다는 자체가 인연이니
여이현의 눈빛은 살짝 어두워졌다. 그는 어젯밤 발작한 탓에 온지유의 곁에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미안해.”“제가 원하는 건 사과가 아니에요.”온지유가 밀어내려고 하자 그는 더욱 힘을 주며 말했다.“어제는 싸우기 싫어서 피했던 거야. 이쯤 돼야 네 화가 풀릴 것 같아서 다시 돌아왔어.”온지유는 그의 품에 안겨 그를 바라봤다. 거짓말하는 눈빛은 아니었다.그들은 서로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했다. 여이현은 그녀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고 있을 뿐이다.“다음에 같은 일이 생기면 무조건 바로 달래줘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용서하는 건 아니지만, 그냥 휙 가버리면 진짜 기분 나쁘다고요. 무시당하는 느낌이에요. 우리 사이를 의심하게 하지 말아요.”“...그랬어?”온지유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그걸 이제야 알았어요? 여자 마음을 그렇게 몰라서야 되겠어요?”“그래서 배우고 있잖아. 난 경험이 없어서 그래. 잘못한 게 있으면 바로 말해줘. 네가 말한 대로 할게.”그의 진지한 태도에 온지유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며 물었다.“그러고 보니 노승아 씨 실종됐다고 하지 않았어요?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요?”“나한테 있는 거 아니야. 난 잘 몰라.”“정말이에요? 또 몰래 도와준 건 아니고요?”“하아... 난 한 번도 노승아를 사랑해본 적 없어.”“못 믿겠어요.”여이현은 바로 설명을 보탰다.“네가 의심하는 것도 당연해. 하지만 노승아는 여씨 집안사람이야. 난 노승아의 인생을 대신 사는 입장이니 이것저것 챙겨주는 것도 당연하지. 일이 이렇게 귀찮아질 줄은 몰랐지만.”온지유는 턱을 괴고 그의 설명을 들어줬다. 둘 사이에 많은 오해가 있는 것 같았다. 더군다나 두 사람은 한 번도 설명한 적 없었다. 정확히는 회피하고 있었다.그때는 여이현도 온지유를 사랑하지 않을 때이니 설명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오해는 점점 깊어져 갔다.온지유는 여이현의 어깨에 기대며 말했다.“믿어요.”이 말을 들은 여이현의 눈
“사라져? 아린이가 갑자기?”케빈은 흐느끼며 말했다.“몰라요. 저도 몰라요. 산에 가서 멧돼지를 잡아준다고 했는데, 그 뒤로 쭉 안 돌아왔어요. 사라졌어요...”“멧돼지는 왜 잡아?”“먹어야 한다고요. 집에 고기가 없대요. 그래서 멧돼지라도 잡아 와야 저한테 뭘 먹일 수 있다고 했어요. 선생님, 이제 어떡해요? 어디 가서 누나를 찾죠?”케빈은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반대로 온지유는 이성적으로 생각했다. 어딘가 이상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네 부모님은?”“누나를 찾으러 갔다가 아직 안 돌아왔어요.”“우리도 찾으러 가자. 잠깐, 사람이 많을수록 좋을 테니까 몇 명 더 부를게.”“선생님. 대장님은 아까 사람들 데리고 나가던데, 지금 다시 불러올 수 있을까요?”온지유는 밖으로 나가서 상황을 살폈다. 동네에 차가 절반 이상 줄었다.‘이현 씨는 무슨 일을 하러 간 거야. 하필 이럴 때.’그녀는 아린이 너무 걱정되었다. 아무리 이 지역에 대해 잘 아는 지주 집 딸이라고 해도 말이다.아린은 한 번도 이런 말썽을 피운 적 없었다. 산의 지형도 익숙해서 위험한 길에는 들어서지 않을 것이다. 보통은 실수로 떨어지는 일도 적었다.온지유는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말했다.“우리끼리 찾으러 가자. 이현 씨한테는 내가 소식을 전할게. 그 전에 우리가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여이현이 급하게 나간 건 할 일이 있다는 뜻이다. 온지유는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는 여유 시간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연락이 닿는다고 해도 돌아올 수 있을지 문제였다.“네.”케빈은 눈물을 닦았다.두 사람은 손을 잡고 산에 들어갔다. 벌써 아린을 찾기 시작한 주민들이 있었다.대략 10여 명의 주민이 모인 모양인데, 이 큰 산을 다 뒤지려면 적어도 하루는 걸려야 했다.“저희 흩어져서 찾아보죠. 그리고 이곳에서 다시 모여요.”“네.”그들은 온지유의 지시에 따라 각 방향으로 흩어졌다.산길은 아주 가팔랐다. 독충이나 독사가 있을 수도 있어서 조심해야 했다
은서우는 깜짝 놀라며 급히 말했다.“원장님, 제가 알아볼 테니 먼저 가서 쉬세요.”그러나 인명진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은 선생님 먼저 쉬세요. 오늘 하루 종일 이동하느라 피곤했을 텐데 제가 알아서 할 게요.”은서우는 두 개의 침대가 놓인 객실을 바라보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인명진의 배려가 고맙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한 죄책감과 두려움이 그녀를 짓눌렀다.그녀는 침대 모서리에 앉아 두 손으로 옷자락을 꽉 쥐었다.머릿속은 온통 뒤엉킨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잠시 후 돌아온 인명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근처 호텔에도 빈방이 없어서 방법이 없네요. 오늘 밤은 그냥 이렇게 지내야 할 것 같아요. 너무 신경 쓰지 말고 그냥 특수한 상황이라고 생각해요.”은서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원장님.”인명진이 씻으러 들어가자 은서우의 시선은 탁자 위의 주전자에 멈췄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주머니로 가져가 약봉지를 만졌다.심장이 요동치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다.그녀는 약봉지를 손안에 단단히 움켜쥐었다.너무 세게 힘을 주어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갈등 속에서 은서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렇지 않은 척 주전자 쪽으로 다가갔다.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약을 컵에 넣고 재빨리 물을 부었다.그 후 약이 빠르게 녹도록 조심스럽게 저었다.모든 것을 완성하고 물컵을 원래 자리에 돌려놓는 순간 인명진이 욕실에서 나왔다.그는 느슨한 가운 하나만 걸친 채였다.젖은 머리칼 몇 가닥이 이마에 흩어져 있었고 물방울이 그의 단단한 턱선을 따라 흘러내려 쇄골을 타고 가운 속으로 사라졌다.은서우는 무심코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순간적으로 심장이 멎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른 그녀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하지만 그녀는 다시 한번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인명진은 그녀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 듯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은서우에게 다가왔다.목소리는 방금 샤워를 마친 사
이렇게 드문 해외 교류 기회를 얻는 것은 그녀의 전문 능력을 크게 인정받은 것이며 또한 시야를 넓히고 자신을 성장시킬 절호의 기회였다.하지만 그 인턴은 이 소식을 듣고 다른 속셈을 품게 되었다.그녀는 은서우를 찾아가 몰래 약봉지를 건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은 선생님, 이번에 원장님과 함께 가시죠? 기회를 봐서 이 약을 물에 타세요. 일이 끝나면 2천만 원 드릴게요.”은서우는 눈을 크게 뜨고 놀란 채로 연신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이건 불법이에요. 절대 할 수 없어요.”인턴 민지아는 어두워진 얼굴로 싸늘하게 협박했다.“전에 제 돈을 받고 제 부탁 들어주신 거 잊지 마세요. 안 하면 당신이 돈을 받고 원장님의 사진을 몰래 찍은 사실을 폭로해 버릴 거예요. 그러면 당신은 완전히 끝장나는 거죠. 그리고 소씨 가문 사람들이 가만있을 것 같아요? 이렇게 좋은 기회를 망쳐버리면 더 난리 칠걸요?”은서우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는 흰 종이처럼 순식간에 창백해졌다.그녀는 자신이 이 자리까지 오기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떠올렸다.‘이 선택 때문에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지만 민지아의 요구대로 하면 내 양심은 어떡하지? 원장님의 신뢰는 어떻게 보답하지?’민지아는 그녀가 망설이는 것을 보고 다시 유혹하듯 말했다.“그냥 약을 타기만 하면 돼요. 원장님은 전혀 눈치채지 못할 거예요. 잠들면 사진 몇 장만 찍으세요. 어렵지 않잖아요? 이것만 끝내면 우리 둘은 완전히 정리되는 거예요.”은서우는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고뇌 속에서 결국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민지아는 목적을 달성하자 만족스러운 냉소를 지으며 장난치지 말라는 경고를 남긴 뒤 급히 자리를 떠났다.은서우는 손에 약봉지를 꽉 쥔 채 혼자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출발일이 다가왔다.은서우는 무거운 짐을 끌고 인명진과 함께 공항으로 향했다.가는 길 내내 인명진은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이번 교류와 관련된 의학적
은서우는 인명진의 카카오톡을 추가한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동시에 긴장감이 엄습해 왔다.이제 남은 과제는 사진을 찍어 전달하는 것이었다.어느 날 병원 휴게실에서 그녀는 인명진이 혼자 앉아 자료를 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주변에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은서우는 심호흡하며 용기를 내어 조용히 다가가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그녀는 평소와 다름없이 핸드폰을 만지는 척했다.실제로는 몰래카메라를 켜 자연스럽게 각도를 조정한 뒤 빠르게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다행히도 인명진은 자료에 집중하고 있어 그녀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다.은서우는 재빨리 사진을 인턴에게 전송했다.인턴은 그 사진을 보고 매우 만족스러워했다.[은 선생님. 잘하셨어요. 이 정도는 되어야죠.]그러나 안도의 순간도 잠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인명진이 카카오톡으로 메시지를 보내 학술 교류에 관련하여 질문한 것이다.당황한 은서우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그때 인턴도 들킬 우려가 있다고 생각한 것인지 은서우에게 카카오톡 아이디를 보내주며 인명진이 그녀를 추가할 수 있도록 지시했다.은서우는 난감했지만 어쩔 수 없이 인턴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그녀는 다시 인명진을 찾아갔다.“원장님, 한 인턴이 이번 수술에 대해 관심이 많더라고요. 학술 연구에서도 독특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 친구인데 원장님께서도 얘기 나눠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건 그 친구 연락처입니다.”인명진은 의심스러운 눈길로 은서우를 바라보았지만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그는 은서우와 학술 논의를 하기 시작했다.은서우는 탄탄한 의학적 지식과 침착한 분석 능력으로 빛을 발했고 인명진은 그런 그녀를 흥미롭게 지켜보았다.‘이상한 점도 있긴 하지만 확실히 능력은 있네. 한 번 키워봐도 되겠어.’인명진이 은서우를 보며 말했다.“은 선생님, 전문적인 역량이 기대 이상이군요. 앞으로 더 도전적인 케이스들을 맡겨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연구 프로젝트에도 참여해 보면 어떻겠습니까?”은서우는 깜짝 놀랐
은서우는 심장이 조여오는 듯했지만 이번에 물러서면 평생 그들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나는 숨길 것도 두려울 것도 없어. 마음대로 해. 진실은 결국 밝혀질 테니까.”소태훈은 은서우가 조금도 흔들리지 않자 분노에 휩싸였다.그는 옆에 있던 테이블을 손으로 밀쳐버렸다.탁자 위의 찻잔과 유리병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깨진 유리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고 날카로운 소리가 온 방 안을 가득 채웠다.“은서우! 넌 내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수 없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광기에 휩싸인 그의 행동은 방 안에 있던 다른 가족들의 분노까지 부추겼다.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덩치 크고 험악하게 생긴 중년 남성이 목소리를 높였다.“은서우! 네가 이 집에서 몇 년을 공짜로 먹고살았는데! 이제 와서 발을 뺀다고? 꿈도 꾸지 마.”말을 마친 남자는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거친 손으로 은서우의 옷깃을 움켜잡아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발이 바닥에서 떨어진 은서우는 목이 조여와 숨이 막혔지만 여전히 그 남자를 노려보며 외쳤다.“이건 불법 감금이에요! 놔요!”“불법 감금? 이건 가족 간의 일이야! 네가 태연이를 죽였으니 끝까지 책임져야 할 거 아냐.”그 장면을 목격한 인명진은 얼굴을 굳히고 이내 앞으로 나서서 중년 남성의 손목을 움켜잡으며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봤다.“놔. 안 그러면 신고할 거야.”남자는 인명진의 기세에 눌려 주춤했지만 굽히지 않고 외쳤다.“넌 누구야? 뭔데 우리 가족 일에 끼어드는 거지?”인명진은 단호하게 대답했다.“은서우 병원 원장. 내 직원이 이런 식으로 위협받는 걸 두고 볼 수 없어. 사람이 많다고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나? 법 앞에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명심해.”그제야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소상태가 다가와 사내의 팔을 붙잡았다.“이러다 일이 더 커지겠어요. 일단 놔요.”사내는 마지못해 손을 풀었다.갑작스럽게 자유로워진 은서우는 비틀거리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인명진이
은서우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내가 그날 가자고 제안한 건 단순한 모임이었어. 그 누구도 그런 사고가 날 거라 예상하지 못했어. 그래도 나는 지난 몇 년간 계속해서 보상하려고 노력했어. 하지만 나도 내 삶이 있어. 더 이상 이 일에 끌려다닐 순 없어.”그 순간 소상태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오더니 손가락을 뻗어 은서우의 이마를 찌를 듯 들이밀었다.“이 배은망덕한 년아! 태연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이렇게 배신해?”은서우는 고개를 돌려 그의 손길을 피하며 차분하게 말했다.“저도 태연이의 죽음이 너무나 가슴 아픕니다. 하지만 제가 저지르지도 않은 죄까지 짊어지고 살 순 없어요. 저도 할 만큼 했어요.”연희진이 흐느끼며 애원했다.“서우야, 한 번만 더 도와주면 안 되겠니? 태훈이 몸이 안 좋아서 치료비가 계속 필요해.”은서우는 자신을 거둬준 양모를 바라보며 심란함을 느꼈다.이전의 기억들이 밀물처럼 밀려 들어왔다.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 그녀는 감사한 마음뿐이었다.은서우는 조심스럽게 행동했고 진심으로 인정받는 가족이 되고 싶어 노력했다.하지만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엄마, 마지막이라고 말했잖아요. 제가 지난 몇 년간 드린 돈만으로 부족했나요? 단순한 사고였어요. 저도 태연이한테 그런 일이 발생할 줄 몰랐고 태훈이가 이렇게 될 줄도 몰랐어요.”그 말에 소태훈이 흥분하며 휠체어에서 몸을 기울였다.그의 눈빛에는 증오와 광기가 서려 있었다.“은서우! 그렇게 쉽게 벗어날 생각은 하지 마. 이 모든 게 왜 벌어진 줄 알아? 다 너 때문이야! 네가 내 마음을 받아줬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야!”은서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몸을 떨며 물었다.“뭐라고? 그 사고... 설마 일부러 낸 거야? 단지 내가 네 고백을 거절했다는 이유로?”소태훈은 비웃듯 콧방귀를 뀌었다.그는 이젠 감추는 것조차 귀찮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그래! 너만 아니었으면 태연이가 죽을 일도 없었고 내가 장애인이 될 일도 없었겠지. 그러
“성북 쪽으로 가주세요. 도착하면 제가 길 안내할게요.”인명진은 은서우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내비게이션을 켜고 조용히 성북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성북은 오래된 주택가가 밀집한 지역이었다.인명진은 한 번도 이곳에 온 적이 없었다.그가 경성에서 주로 활동하는 곳은 병원이었고 그게 아니면 여이현이 있는 지역에 가끔 방문할 뿐이었다.하지만 생활이 안정된 후로는 여이현이 있는 곳으로도 향하지 않았다.은서우가 아니었다면 그는 이곳에 올 일조차 없었을 것이다.마침내 그녀의 안내에 따라 차는 한 단칸방 앞에 도착했다.차를 세운 순간 안에서 격한 소란이 들려왔다.“왜 아직도 그 계집애 편을 들고 있어? 대체 무슨 생각이야! 그 애만 없었어도 우리 태훈이가 이렇게 되진 않았어!”“그 애가 우리한테 준 돈만 해도 충분해. 게다가 태훈이 사고는 그냥 예상치 못한 사고일 뿐이었어. 대체 언제까지 그 아이한테 책임을 떠넘길 거야?”끝없는 다툼.은서우는 이제 이런 광경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었다.더는 아무런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인명진은 남의 사생활에 관여하는 타입이 아니었다.그는 은서우가 안전벨트를 풀고 내리려는 순간 무심하게 말했다.“가족 문제로 일에 지장 주지 마세요. 도저히 해결할 방법이 없으면 그냥 휴가 내세요. 그리고 차비는 안 받아요.”그건 분명 의도적인 언급이었다.인명진은 은서우를 쳐다보지도 않고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이제 더는 그녀와 이 문제로 말 섞고 싶지 않다는 신호였다.‘내일 현금을 들고 가서 감사 인사를 전해야겠지. 지금은 그런 것보다 당장 눈앞의 일을 해결하는 게 먼저야.’은서우는 얼른 집안으로 들어섰고 방 안은 깨진 유리 조각, 뒤집힌 가구들과 여기저기 널브러진 물건들로 인해서 엉망진창이었다.그녀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여기 이천만 원이에요.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거 기억하세요. 저도 이제 곧 서른이에요.”“곧 서른이라고? 그럼 태연이는 너 때문에 서른이 되기도 전에 죽었다는 거 알
이천만 원이라는 돈은 가뭄의 단비처럼 절실했다.‘하지만 원장님께서 이 일을 아시면 이 병원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할 수도 있어.’“은 선생님, 1억이라도 원하시는 건 아니죠?”인턴은 어떻게든 인명진과 접촉하려 했지만 방법이 없었다.인명진의 비서와 접촉하는 건 꿈도 꿀 수 없었고 결국 선택한 차선책이 은서우였다.어차피 은서우는 돈을 받으면 부탁을 들어줄 것이었고 그 후 그녀가 병원에서 잘리든 말든 인턴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은서우는 머리가 지끈거렸다.“일단 급한 일부터 처리해야겠어요. 그 부탁은 내일 다시 얘기하면 안 될까요?”“내일이면 원장님 사무실에 가는 날이잖아요? 은 선생님, 그냥 지금 확실히 해두는 게 좋겠어요.”인턴은 끊임없이 떠들어댔고 그때 은서우의 폰이 다시 울렸다.“은서우! 지금 죽어야 할 사람은 너야! 네가 아니었으면 우리 가족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어!”전화를 받자마자 들려온 것은 분노에 찬 외침이었다.너무나 익숙한 소리에 그녀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숨이 막혀왔다.“진정 하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 원하는 것도 바로 가져다드릴게요.”은서우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눈앞이 핑 돌 정도로 현기증이 몰려왔다.전화를 끊자마자 그녀는 거의 본능적으로 인턴의 손을 꽉 붙잡았다.“이천만 원 준다고 하셨죠? 바로 주면 내일 부탁 처리해 줄게요.”“지금 바로 송금할게요.”인턴은 은서우가 결국 제안을 받아들이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그녀가 핸드폰을 꺼내는 순간 은서우는 그것이 최신형 아이폰이라는 걸 알아챘다.케이스조차 반짝이는 보석으로 장식된 명품이었다.‘그래. 돈 없는 사람이 이런 일에 이천만 원이나 쓸 리 없지.’계좌 번호를 불러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계좌로 이천만 원이 들어왔다.인턴은 신신당부했다.“전 고화질 사진이 필요해요. 그리고 카카오톡도 꼭 추가해 줘야 해요.”“그럼 제가 당신 카카오톡을 로그인해야 하지 않나요? 아니면 어떻게 추가해요?”“좋아요. 로그인하세요. 은서우 씨...”그때 인턴의
은서우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인명진은 이미 돌아서서 갈 길을 가고 있었다.비록 인명진이 병원의 원장이었지만 은서우는 회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그를 본 적이 거의 없었다.오늘 처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하는 것이었다.그는 수술용 멸균복을 입고 마스크와 모자를 착용하고 있었다.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깊고 차가운 그의 검은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수술 내내 상황이 아무리 긴박해도 인명진은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고 그의 침착함과 냉정함은 뛰어난 실력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은서우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이제야 왜 병원의 많은 여성 간호사, 인턴, 심지어 여의사들까지도 그에게 열광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은서우는 가볍게 몸을 풀며 수술실을 나왔다.막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한 동료가 그녀를 찾아왔다.가슴에 걸린 명찰을 보고 은서우는 상대가 인턴임을 알았다.은서우는 예의 바르게 물었다.“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시죠?”“은 선생님, 방금 원장님과 함께 수술을 마치셨죠?”인턴의 질문에 은서우는 약간 의아했다.“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인턴은 자신의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은 선생님, 저 좀 도와주세요. 원장님 카톡 좀 추가해서 저한테 넘겨주시거나 아니면 원장님 사진 몰래 몇 장만 찍어 주세요. 제가 이만큼 드릴게요.”인턴의 눈에는 기대감이 가득 차 있었다.은서우는 인턴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제가 원장님 연락처를 넘긴다고 해도 원장님 입장에서는 그냥 낯선 사람일 뿐일 텐데 원장님이 연락 받아줄 것 같아요? 그리고 몰래 사진 찍는 건 불법인 거 모르나요? 고작 그 정도 푼돈으로 저를 이런 큰일에 끌어들이겠다고요? 당신이 미친 걸까요? 아니면 제가 미친 걸까요?”은서우는 거침없이 인턴을 몰아붙였다.인턴이 급히 덧붙였다.“아니에요, 은 선생님. 도와주시기만 하면 백만 원 아니 천만 원도 문제없어요.”‘천만 원에 사진 몇 장과 연락처? 저 인턴 진짜 제정신이 아니네.’은서우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이명진은 병원에서 만약 어떤 의료 사고라도 발생한다면 이 병원의 명성은 그대로 무너질 것으로 생각했다.그의 말에 한 간호사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원장님, 병원 내부 번호와 원장님 개인번호 모두 통화 중이셨어요. 원장님 인기가 지금 장난 아닌 걸 모르시는 건 아니시죠?”문 앞에 대기 중인 인턴들로도 모자라 소문 듣고 연락이 오는 환자도 있었고 학생들도 있고 심지어 부잣집 부인들도 어디서 개인번호를 얻었는지 매일 전화를 걸어 이명진의 전화는 항상 통화 중 상태였다.긴급 상황만 아니라면 인명진이 직접 나설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인명진은 간호사의 필요 없는 말을 들을 시간도 없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그가 문을 열자 밖에서 있던 인턴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진짜 너무 멋있고 젊잖아. 이렇게 젊으신데 원장 선생님이라고?”“너무 잘생겼어. 여자 친구도 없다 그러던데.”“많은 수술도 직접 하신대. 그리고 학술논문도 봐주고 기타 강의도 하신다고 들었어.”“이렇게 훌륭한 사람 품에 안겨있는 느낌은 어떤지 상상도 안 가.”그들은 미친 사람처럼 저마다 한마디씩 주고받고 있었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인명진에게 달려들어 길을 막고 있었다.“인 원장님, 저랑 사귀시면 이런 병원 몇 개라도 더 해줄 수 있어요. 당신을 경성의 의료센터에서 우두머리로 만들어 드릴게요.”“인 원장님, 저 사람 말 믿지 마세요. 저랑 사귀시면 더 많은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드릴게요.”“인 원장님, 저랑...”“다들 꺼져!”인명진은 평소에 이 사람들에게 무관심이었지만 지금은 급한 수술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한 간호사가 데리고 온 경호원들도 그녀들을 막을 수가 없었지만 항상 따뜻하고 우아하고 부드러운 말만 할 거로 생각했던 인턴들은 인명진의 화내는 소리 한 번에 더 이상 앞으로 다가서지 못했고 자리를 피해 길을 열어 주었다.인명진은 재빨리 수술용 무균복으로 갈아입고 소독한 후 바로 수술실로 들어갔다.수술실 안에서는 피비린내가 진동했